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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學或問
대학혹문 교정본
원본 이미지 대조 교정 완료 · 總論·經文·傳 10章 · 책 225–366쪽 (14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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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總論 등 소제목은 편저자가 붙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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總論總論*

或問: 大學之道, 吾子以爲大人之學, 何也? 曰: 此對小子之學 言之也.

혹자가 물었다. "선생이 ≪대학≫의 도를 대인의 학문이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어린아이 학문의 대칭으로 말한 것이다."

曰: 敢問其爲小子之學, 何也? 曰: 愚於序文, 已略陳之, 而古法之宜於今者, 亦旣輯而爲書矣, 學者不可以不之考也.

"어린아이의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나는 ≪대학장구서≫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고, 옛 법이라 하지만 오늘날에 시행할 수 있는 타당한 것들을 또한 이미 편집하여 ≪소학≫으로 엮은 바 있다. 배우는 자들이 한번쯤 이를 고찰해 보지 않을 수 없다."

曰: 吾聞君子務其遠者·大者, 小人務其近者·小者, 今子方將語人以大學之道, 而又欲其考乎小學之書, 何也? 曰: 學之大小, 固有不同, 然其爲道, 則一而已. 是以方其幼也, 不習之於

* 이 總論 및 이하의 소제목들은 편집상의 편의를 위해 편저자가 붙인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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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 則無以收其放心·養其德性, 而爲大學之基本. 及其長也, 不進之於大學, 則無以察夫義理·措諸事業, 而收小學之成功. 是則學之大小, 所以不同, 特以少長所習之異宜, 而有高下淺深先後緩急之殊, 非若古今之辨· 義利之分, 判然如薰蕕冰炭之相反而不可以相入也. 今使幼學之士, 必先有以自盡乎灑掃應對進退之間, 禮樂射御書數之習, 俟其旣長而後, 進乎明德新民以止於至善, 是乃次第之當然, 又何爲而不可哉?

"제가 듣기에, '군자는 멀고 큰 것에 힘쓰고, 소인은 가깝고 작은 것에 힘을 쓴다'라고 하였는데, 선생은 사람들에게 ≪대학≫의 도를 말하기에 앞서 또한 ≪소학≫을 고찰하도록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학문을 함에 있어서 大小의 차이가 있어 각기 다르다 하지만 그 도는 하나일 뿐이다. 이 때문에 어려서 ≪소학≫을 익히지 않으면, 放心을 수렴하여 덕성을 함양1)할 수 없으므로 ≪대학≫의 기본이 성립될 수 없고, 장성

1) 或曰 放心者, 或心起邪思妄念; 耳聽邪言, 目觀亂色, 口談不道之言, 以至手足動之不以禮, 皆是放也. 收者, 便於邪思妄念處, 截斷不續耳. 目言動皆然, 此謂之收. 旣能收其放心, 德性自然養得. 不是收放心外, 又養箇德性也. 朱子曰 然. 어떤 사람이 물었다. "放心이란 마음속에 사악한 생각과 망령된 잡념이 일어나, 귀로는 사악한 말을 듣고 눈으로는 어지러운 빛을 보며 입으로는 무도한 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부터 손과 발을 예의로써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모두 放心이라 말할 것입니다. 수렴한다는 것은 이처럼 사악한 생각과 망령된 잡념을 끊고서 다시는 이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耳·目·言·動에 있어서 모두 그처럼 제재하는 것을 收라 말합니다. 그러나 방심을 거둬들이면 덕성이 자연히 함양되는 것이지, 방심을 수렴하는 것이외에 또 다른 하나의 덕성을 함양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자가 답하였다. "그렇다." ○西山眞氏曰 德性, 謂得之於天者, 仁義禮智信 是也. 德性在心, 本皆全備. 緣放縱其心, 不知操存, 是致賊害其性. 若能收其放心, 即是養其德性, 非二事也. 서산 진씨가 말하였다. "덕성이란 하늘에서 받아온 仁·義·禮·智·信이 바로 그것이다. 덕성이란 본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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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에 이르러 ≪대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의리를 살펴 사업2)을 이룩해 나갈 수 없기에 ≪소학≫의 성공을 거둘 수 없다. 이것이 곧 학문의 대소가 구별되는 까닭이다. 이는 특별히 어린이와 어른에 따라서 학습해야 할 점이 다름으로써 고하와 천심과 선후와 완급의 차이가 있는 것일 뿐, 옛날과 오늘이라는 구별, 그리고 의리와 利欲의 구분만큼이나 판연하여, 마치 향기나는 풀과 악취 나는 풀처럼, 또는 깨끗한 얼음과 새까만 숯처럼 상반되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것과는 다르다. 오늘날 어린 선비들에게 반드시 먼저 쇄소·응대·진퇴와 禮·樂·射·御·書·數를 익히는 데 힘을 다하도록 하고, 그가 성장하였을 때에는 명덕·신민의 지극한 선에 그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학문하는 차례에 있어서 당연함인데, 또한 이를 어찌 불가하다고 하겠는가!"

曰: 幼學之士, 以子之言而得循序漸進, 以免於躐等陵節之病, 則誠幸矣. 若其年之旣長而不及乎此者, 欲反從事於小學, 則恐其不免於扞格不勝· 勤苦難成之患. 欲直從事於大學, 則又恐其失序無本 而不能以自達也, 則如之何? 曰: 是其歲月之已逝者, 則固不可得而復追矣. 若其工夫之次第條目, 則豈遂不可得而復補耶. 蓋吾聞之, 敬之一字, 聖學之所以成始而成終者也.

에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데, 그 마음을 방종함으로써 操存할 바를 모르기에 그 본성을 해치는 데 이른 것이다. 만일 방심을 거둔다면 그것은 곧 덕성을 함양하는 것이기에, 두 가지의 일이 아니다."

2) 玉溪盧氏曰 察夫義理, 大學始事, 格致 是也. 措諸事業, 大學終事, 齊治平 是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의리를 살핀다는 것은 ≪대학≫의 첫 공부이니, 格物·치지가 바로 이것이며, 사업에 조치한다는 것은 ≪대학≫의 맨 끝의 공부이니, 제가·치국·평천하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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爲小學者 不由乎此, 固無以涵養本源 而謹夫灑掃應對進退之節與夫六藝之敎, 爲大學者不由乎此, 亦無以開發聰明 進德修業而致夫明德新民之功也. 是以程子發明格物之道, 而必以是爲說焉. 不幸過時而後學者, 誠能用力於此, 以進乎大而不害兼補乎其小, 則其所以進者 將不患於無本而不能以自達矣, 其或摧頹已甚, 而不足以有所兼, 則其所以固其肌膚之會·筋骸之束, 而養其良知·良能之本者, 亦可以得之於此而不患其失之於前也. 顧以七年之病而求三年之艾, 非百倍其功, 不足以致之, 若徒歸咎於旣往, 而所以補之於後者, 又不能以自力則吾見其扞格勤苦, 日有甚焉. 而身心顚倒, 眩瞀迷惑, 終無以爲致知力行之地矣, 況欲有以及乎天下國家也哉?

"어린 선비들이 선생의 말에 따라서 차례대로 점점 닦아 나아감으로써 과정을 건너뛰는 병폐가 없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미 나이 장성하여 이에 미칠 수 없는 사람이 도리어 ≪소학≫에 힘쓰고자 한다면 그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거부와 반발로써 아무리 부지런히 고생하여도 성공하기 어렵다3)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바로 ≪대학≫에 힘쓴다면, 이는 차례를 잃어서 근본이 없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미 떠나버린 세월이야 다시 붙잡을 수 없지만, 공부의 차례와 조목은 어찌 보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들으니, 敬이라는 한 글자는 聖學의 시작임과 동시에 끝이 된다고 한다.4) ≪소학≫을 배우는 이가 이[敬]를

3) 記學記, 發然後禁, 則扞格而不勝; 時過然後學, 則勤苦而難成. ≪예기 학기≫에서 말하였다. "이미 잘못이 발생한 뒤에 이를 금지하면 거부감을 느껴 이를 이겨낼 수 없으며, 시기가 지난 이후에 배우면 아무리 부지런히 고생을 하여도 성공하기 어렵다."

4) 問敬字當不得小學. 朱子曰 看來小學, 却未當得敬, 敬已自包得小學. 敬是徹上徹下工夫, 雖做到聖人田地, 也只放下這敬不得. "敬이란 ≪소학≫에서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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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르지 않으면 본원을 함양하지 못함으로써 쇄소·응대·진퇴의 절차와 六藝의 가르침을 삼가지 못할 것이며, ≪대학≫을 배우는 자가 이를 따르지 않으면 또한 총명함을 깨우쳐 덕업을 닦아 나가지 못함으로써, 명덕 신민의 성공을 기약하지 못할 것이다. 이 때문에 정자는 격물의 도를 밝혀 말하면서도 반드시 敬 자를 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때를 잃은 뒤에 배우는 자들이 참으로 이 敬에 힘써 ≪대학≫으로 나아가되 겸하여 ≪소학≫을 보완해 나아간다면, 학문의 진전 또한 '근본이 없어서, 소기의 성과를 이룰 수 없다'라고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혹 너무나 큰 부담이 되어 ≪소학≫을 겸할 수 없을 경우에는 예로써 한 몸을 견고히 속박하여,5)

주자가 답하였다. "일반적으로 ≪소학≫에서는 敬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敬은 이미 ≪소학≫을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敬이란 徹上徹下의 공부로서, 비록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敬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北溪陳氏曰 程子只說一箇主敬工夫, 可以補小學之缺. 盖主敬工夫, 可以收放心而立大本. 大本旣立然後工夫循序而進, 無往不通. 大抵主敬之功, 貫始終, 一動靜, 合內外, 小學大學, 皆不可無也. 북계 진씨가 말하였다. "정자는 다만 공부를 말하여 ≪소학≫에 결여된 점을 보완코자 하였다. 主敬의 공부는 방심을 수렴하여 大本을 세우는 데 있다. 큰 근본이 세워진 이후에는 공부의 순서에 따라 나아가노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통하지 않은 바가 없다. 대체로 主敬의 공부는 시종을 일관되고 動靜을 하나로 하며 내외를 합하니 ≪소학≫과 ≪대학≫에 모두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玉溪盧氏曰 敬者, 定志慮, 攝精神, 而存養本心之道. 故爲聖學之始終, 百倍其功, 只在主敬. 篇首三言, 爲大學一書之綱領; 明明德一句, 爲篇首三言之綱領. 朱子敬之一字, 則又明明德之綱領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敬이란 마음과 생각을 안정시키고, 정신을 거두어 본심을 존양하는 도이므로 聖學의 처음이자 끝이 된다고 한다. 스스로 그 공부를 곱절로 해야 할 것은 다만 主敬에 있다. ≪대학≫의 첫머리 세 구절은 ≪대학≫ 전체의 강령이지만, 명명덕 구절이 삼강령 중에서도 으뜸되는 강령이 되는 바와 같이, 주자가 말한 敬이라는 한 글자는 또한 명명덕의 강령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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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양능의 근본을 함양하는 것 또한 이처럼 행하는 과정에서 뜻한 바를 얻을 수 있기에, 전일의 잘못에 대해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돌이켜보면, 7년 동안 앓아온 해묵은 고질병에 3년 된 약쑥을 구해서 병을 치료하려고 할 때, 백 곱절 노력이 없고서는 이루어내지 못할 것이다.6) 그러나 만일 지난날의 잘못만을 후회할 뿐, 후일 보완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힘쓰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는 거부감과 괴로움이 날로 심하여 몸과 마음이 전도되어 암흑과 미혹의 연속으로 결국 致知·力行의 터전을 마련치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하물며 이로써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 미쳐간다는 것을 바랄 수조차 있겠는가?"7)

5) 記禮運, 禮義也者, 人之大端也. 所以講信修睦, 而固人之肌膚之會·筋骸之束也. 會, 合也; 物合其則也, 如頭容宜合於直之類. 束, 收斂也, 如手容宜恭之類. ≪예기 예운≫에서 말하였다. "예의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실마리이다. 이 때문에 믿음을 강론하고 화목함을 닦으며, 사람의 肌膚의 會合과 근육과 뼈의 속박을 견고히 해주는 것이다. 會란 합함이니, 사물이 그 법칙에 부합됨을 말한다. 예컨대 손의 거동을 공손하게 가지는 것 등이 바로 이것이다."

6) 問人於已失學後, 須如此勉强奮勵, 方得? 朱子曰 失時而後學, 必著如此趲, 補得前許多欠缺處. 人一能之, 己百之; 人十能之, 己千之. 若不如是, 悠悠度日, 一日不做得一日工夫, 只見沒長進, 如何要補前面? "사람이 이미 학문할 시기를 잃은 뒤에는 모름지기 이와 같이 힘써 분발하고 노력해야만이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시기를 잃어버린 뒤, 때늦게 배우는 자는 반드시 지난날 부족된 부분을 적극적으로 보완하여야 한다. 따라서 남들이 단 한 번에 능했을 때 자신은 백 번을 해야 하고, 남들이 열 번에 능했을 때 자신은 천 번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만일 이와 같이 하지 않고 덧없이 세월을 보내면서 정작 오늘날에 노력해야 할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가는 바 없을 것이니, 어떻게 지난날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겠는가."

7) 今人不曾做得小學工夫, 一旦學大學, 是以無下手處. 今且當自持敬, 始使端的純一靜專, 然後能致知格物. 敬字是徹頭徹尾工夫, 自格物以至平天下, 皆不外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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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然則所謂敬者, 又若何而用力耶? 曰: 程子於此, 嘗以主一無適言之矣, 嘗以整齊嚴肅言之矣. 至其門人謝氏之說, 則又有所謂常惺惺法者焉. 尹氏之說 則又有所謂其心收斂不容一物者焉. 觀是數說, 足以見其用力之方矣.

"그렇다면 이른바 敬에 대한 공부 또한 어떻게 힘써 나가야 합니까?" "정자는 이에 대해 '主一無適'8)을, 그리고 일찍이 '整齊嚴肅'9)으로 이를

"오늘날 사람들은 일찍이 소학의 공부를 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대학≫을 배운 까닭에 착수할 곳이 없다. 오늘날은 마땅히 持敬으로부터 비롯하여 純一함과 靜專을 갖춘 이후에 치지와 격물을 닦아 나가야 한다. 敬이라는 것은 철두철미한 공부로서 격물로부터 평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敬 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8) 程子曰 主一之謂敬, 無適之謂一. 정자가 말하였다. "하나로 주하는 것을 敬이라 하고, 다른 곳으로 감이 없는 것을 一이라 한다." 朱子曰 主一, 只是心專一, 不以他念雜之. 無適, 只是不走作, 如讀書時只讀書, 著衣時只著衣. 了此一件, 又做一件, 身在這裏, 心亦在這裏. 주자가 말하였다. "主一이란 마음을 전일케 하여 다른 생각으로 뒤섞임이 없게 함이며, 無適이란 마음이 다른 곳으로 치달려 나가지 못하게 함이다. 예컨대 독서할 때는 독서하는 데에 마음을 두고,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 데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이 하나의 일을 끝마치고 또 다시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몸이 여기에 있으면 마음 또한 여기에 있어야 한다." 北溪陳氏曰 主一是心只在此, 不二不三. 無適, 是心只在此, 不東不西. 主一無適, 只展轉相解釋要分明, 非主一外, 又別有無適之功也. 북계 진씨가 말하였다. "主一은 마음을 여기에 두고서 두 마음, 세 마음을 가지지 않음이며, 無適이란 마음을 여기에 두고서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가지 않는 것이다. 主一無適에 대해 전전하여 서로 분명하게 해석해야 한다. 이는 主一 이외에 또 다른 별도의 無適공부가 있는 게 아니다."

9) 程子曰 只整齊嚴肅, 則心便一. 一則無非僻之干矣. 정자가 말하였다. "다만 정제엄숙하게 몸가짐을 가지면 마음은 곧 전일하며, 전일하면 그릇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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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바 있으며, 그의 문인 謝氏(上蔡, 謝良佐) 또한 '常惺惺法'10)을, 尹氏(尹

焞, 和靖先生) 또한 '그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다'11)

편벽된 마음이 침범해오지 않는다."

10) 上蔡謝氏曰 敬, 是常惺惺法. 상채 사씨가 말하였다. "敬이란 항상 惺惺하는 법이다." 朱子曰 惺惺, 乃心不昏昧之謂, 只此便是敬. 整齊嚴肅, 固是敬, 然心若昏昧, 燭理不明, 雖强把捉, 豈得爲敬? 주자가 말하였다. "성성이란 마음이 혼미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렇게 하는 것이 곧 敬이다. 정제와 엄숙은 敬이라 하지만, 마음이 혼미하여 이치를 밝게 비춰보지 못하면 아무리 마음을 억지로 잡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敬이라 할 수 있겠는가?" 學問, 須是警省. 且如瑞巖和尙, 每日常自問, 主人翁惺惺否? 又自答曰 惺惺. 今時學者, 却不能如此. <주자가 말하였다.>"학문이란 모름지기 스스로를 경계하고 살피는 것이다. 이는 서암스님이 매일 항상 자신에게 '주인옹이여, 성성한가' 묻고서, 또 스스로 '성성하다'라고 답한 것과 같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도리어 이처럼 하질 않는다."

11) 祁寬 問如何是主一? 和靖尹氏曰 只收斂身心, 便是主一. 且如人到神祠致敬時, 其心收斂, 便著不得毫髮事, 非主一而何? 기관이 물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主一입니까?" 화정 윤씨가 답하였다. "몸과 마음을 수렴하는 것이 곧 주일이다. 예컨대 신을 모신 사당에 이르러 공경을 다할 때, 그 마음이 수렴되어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바로 주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朱子曰 心主這一事, 不爲他事撓亂, 便是不容一物. 주자가 말하였다. "마음을 하나의 일로써 주제를 두어 다른 일에 어지럽힘을 당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의 사물도 용납함이 없는 것이다." 問心收斂不容一物? 曰 這心都不著一物, 便收斂他. 上文云 今人入神祠, 當那時直是, 更著不得些子事, 只有箇恭敬, 此最親切. 今人若能專一此心, 便收斂緊密, 都無些子空罅. 若這事思量未了, 又走做那邊去, 心便成兩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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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한 바 있다. 이 여러 말들을 종합해보면, 이에 대해 어떻게 힘써야 하는가의 방법을 찾아보는 데 부족함이 없으리라 본다.12)

曰: 敬之所以爲學之始者 然矣, 其所以爲學之終也, 奈何? 曰: 敬者, 一心之主宰而萬事之本根也. 知其所以用力之方, 則知小學之不能無賴於此以爲始. 知小學之賴此以始, 則夫大學之不能無賴乎此 以爲終者, 可以一以貫之而無疑矣. 蓋此心旣立, 由是格物致知 以盡事物之理,

"마음을 수렴하여 하나의 사물도 용납하지 않음이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마음이 어떤 사물에도 집착이 되지 않는 것이 곧 수렴이다. 윗 문장에 의하면"오늘날 사람들이 신을 모신 사당에 들어갔을 때 조금도 다른 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의 공경이다"라는 구절은 이에 가장 밀접한 말이다. 오늘날 만일 이를 전일하게 한다면 마음이 수렴된 바 긴밀하여 조금도 빈틈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을 생각하기도 전에 또 다른 일에 옮겨간다면 마음은 곧 두 갈래의 길을 이루게 된다.

12) 問程子謝氏尹氏所說敬處? 朱子曰 譬如此屋, 四方皆入得. 若從一方入到這裏, 則那三方入處, 都在這裏了. "정자·사씨·윤씨가 말한 敬에는 어떠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이를 비유하면 집이 하나 있는데, 이 집은 사방에서 모두 들어갈 수 있다. 만일어느 한 곳으로 이미 그 집에 들어갔다면 그 나머지 세 길은 모두 그 가운데 있다." 勿齋程氏曰 整齊嚴肅, 及收斂不容一物, 皆敬之始也; 主一無適, 及常惺惺者, 皆敬之成也. 主一無適者, 敬之純; 常惺惺者, 敬而明也. 然主一亦有淺深 以初學言之, 則欲主乎一; 以成德言之, 則所主者一. 물재 정씨가 말하였다. "정제엄숙과 수렴으로써 하나의 사물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두 敬의 첫 공부이다. 주일무적과 常惺惺이란 모두 敬의 성공이다. 주일무적은 경의 순수함이요, 상성성은 경으로써 밝음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主一 또한 深淺이 있다. 초학자로 말하면 하나를 주로 하고자 함을 말하며, 성덕자로 말하면 마음에 주한 바이미 전일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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則所謂尊德性而道問學. 由是誠意正心以修其身, 則所謂先立其大者而小者不能奪. 由是齊家治國以及乎天下, 則所謂修己以安百姓, 篤恭而天下平. 是皆未始一日而離乎敬也. 然則 敬之一字, 豈非聖學始終之要也哉?

"敬이 학문의 비롯이라는 점은 그렇다고 하지만, 학문의 끝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敬이란 한 마음의 주재요, 모든 일의 근본이다. 이에 대해 힘쓰는 방법을 안다면 ≪소학≫은 이를 힘입어 비롯이 되지 않을 수 없는 바를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소학≫이 이에 힘입어 비롯됨을 안다면, ≪대학≫ 또한 이를 힘입어 마침이 되지 않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모두 하나로서 일관되어 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에 마음을 세워 이를 토대로 격물치지를 통하여 사물의 이치를 지극히 다하면 이것이 곧 '尊德性 道問學(덕성을 높이 받들되 문학으로 말미암는다. ≪중용≫ 제27장)'13)이며, 이를 토대로 성의 정심으로 몸을 닦아 나아가면 이것이 곧 이른바 '먼저 그 큰 것(마음과 의지)이 세워져 작은 것(육체)이 이를 빼앗지 못한다(≪맹자· 告子≫上)'14)라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제가치국으로 천하에까지 미쳐 가면 이것이 곧 이른바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논어·憲問≫) '篤恭으로 천하를 평정한다'(≪중용≫ 제33장)라는 것이다. 이 모두가 애당초 어느

13) 新安陳氏曰 尊德性, 持敬以涵養本原也; 道問學, 窮格以開發聰明也.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존덕성이란 敬으로써 본원을 함양함이며, 도문학이란 궁리와 격물로써 총명을 개발하는 것이다."

14) 新安陳氏曰 先立其大者, 持敬以誠其意正其心也. 小者不能奪, 百體從心君所令而身修也.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먼저 그 큰 것을 세운다는 것은 持敬으로써 진실한 생각을 가지고 마음을 바르게 한 것이며, 작은 것이 빼앗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나의 육체가 마음의 명령한 바에 따라 몸이 닦여짐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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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도 敬에서 떠날 수 없음을 말해 주는 것들이다. 이로 보면 敬이라는 한 글자란 聖學의 시작이요 끝이 되는 요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5)

15) 朱子曰 敬者, 始終之要. 未知則敬以知之, 已知則敬以守之. 若不敬, 則其心顚倒昏昧而不自知. 未知者, 非敬無以知; 已知者, 非敬無所守. 주자가 말하였다. "敬이란 처음이요 끝이 되는 요체이다. 이를 알지 못할 때에는 敬으로써 아는 데 힘쓰고, 이미 알고 난 뒤에는 敬으로써 이를 지켜나가야 한다. 만일 경을 하지 못하면, 그 마음이 전도되고 혼매하여 스스로 이를 알지 못하게 된다. 사물을 알지 못한 자는 敬으로 하지 않고서는 알아 나갈 수 없고, 이미 아는 자가 경으로 힘쓰지 않으면 이를 지켜 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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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文

曰: 然則 此篇所謂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者, 亦可得而聞其說之詳乎?

曰: 天道流行, 發育萬物, 其所以爲造化者, 陰陽五行而已. 而所謂陰陽五行者, 又必有是理而後有是氣. 及其生物, 則又必因是氣之聚而後有是形. 故人物之生, 必得是理然後, 有以爲健順仁義禮智之性, 必得是氣然後, 有以爲魂魄五臟百骸之身. 周子所謂 無極之眞, 二五之精, 妙合而凝者, 正謂是也. 然以其理而言之, 則萬物一原, 固無人物貴賤之殊. 以其氣而言之, 則得其正且通者 爲人, 得其偏且塞者 爲物. 是以或貴或賤而不能齊也. 彼賤而爲物者 旣梏於形氣之偏塞, 而無以充其本體之全矣. 唯人之生 乃得其氣之正且通者, 而其性爲最貴, 故其方寸之間, 虛靈洞徹, 萬理咸備. 蓋其所以異於禽獸者, 正在於此, 而其所以可爲堯舜 而能參天地以贊化育者 亦不外焉. 是則所謂明德者也. 然其通也 或不能無淸濁之異, 其正也 或不能無美惡之殊, 故其所賦之質, 淸者智 而濁者愚, 美者賢 而惡者不肖, 又有不能同者. 必其上智大賢之資, 乃能全其本體, 而無少不明. 其有不及乎此, 則其所謂明德者 已不能無蔽而失其全矣. 況乎又以氣質有蔽之心, 接乎事物無窮之變, 則其目之欲色·耳之欲聲·口之欲味·鼻之欲臭·四肢之欲安佚, 所以害乎其德者, 又豈可勝言也哉. 二者相因, 反覆深固, 是以 此德之明 日益昏昧, 而此心之靈 其所知者, 不過情欲利害之私而已. 是則 雖曰有人之形, 而實何以遠於禽獸, 雖曰可以爲堯舜而參天地, 而亦不能有以自充矣. 然而 本明之體 得之於天, 終有不可得而昧者. 是以雖其昏蔽之極, 而介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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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頃一有覺焉, 則卽此空隙之中, 而其本體 已洞然矣. 是以 聖人施敎, 旣已養之於小學之中, 而復開之以大學之道, 其必先之以格物致知之說者, 所以使之卽其所養之中, 而因其所發, 以啓其明之之端也. 繼之以誠意正心修身之目者, 則又所以使之因其已明之端, 而反之於身, 以致其明之之實也. 夫旣有以啓其明之之端, 而又有以致其明之之實, 則吾之所得於天 而未嘗不明者, 豈不超然無有氣質物欲之累, 而復得其本體之全哉. 是則 所謂明明德者, 而非有所作爲於性分之外也. 然其所謂明明德者, 又人人所同得, 而非有我之得私也. 向也 俱爲物欲之所蔽, 則其賢愚之分 固無以大相遠者. 今吾旣幸有以自明矣. 則視彼衆人之同得乎此, 而不能自明者, 方且甘心迷惑沒溺於卑污苟賤之中, 而不自知也, 豈不爲之惻然而思有以救之哉. 故必推吾之所自明者以及之, 始於齊家, 中於治國, 而終及於平天下, 使彼有是明德而不能自明者, 亦皆有以自明而去其舊染之污焉. 是則所謂新民者, 而亦非有所付畀增益之也. 然德之在己而當明, 與其在民而當新者, 則又皆非人力之所爲, 而吾之所以明而新之者, 又非可以私意苟且而爲也. 是其所以得之於天, 而見於日用之間者, 固已莫不各有本然一定之則. 程子所謂以其義理精微之極, 有不可得而名者. 故姑以至善目之, 而傳所謂君之仁·臣之敬·子之孝·父之慈·與人交之信, 乃其目之大者也. 衆人之心, 固莫不有是, 而或不能知. 學者 雖或知之, 而亦鮮能必至於是而不去. 此爲大學之敎者 所以慮其理雖粗復而有不純, 己雖粗克而有不盡, 且將無以盡夫修己治人之道, 故必指是而言, 以爲明德新民之標的也. 欲明德而新民者, 誠能求必至是, 而不容其少有過不及之差焉, 則其所以去人欲而復天理者, 無毫髮之遺恨矣. 大抵大學一篇之指 總而言之, 不出乎八事, 而八事之要, 總而言之, 又不出乎此三者. 此愚所以斷然以爲大學之綱領而無疑也. 然自孟子沒, 而道學不得其傳, 世之君子 各以其意之所便者爲學, 於是 乃有不務明其明德, 而徒以政敎法度 爲足以新民者, 又有愛身獨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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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謂足以明其明德, 而不屑乎新民者, 又有略知二者之當務, 顧乃安於小成, 狃於近利, 而不求止於至善之所在者. 是皆不考乎此篇之過, 其能成己成物而不謬者 鮮矣.

"그렇다면 이 책의 첫머리에서 말한 在明明德, 在新民, 在止於至善에 대해서도 또한 자세히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천도가 유행하면서 만물을 낳고 길러 주지만, 그 조화는 음양오행이 있을 뿐이다.1) 그러나 음양오행 또한 이 이치[理]가 있은 뒤에 기운[氣]이 있고, 만물이 발생함에 있어서도 또한 반드시 이 氣의 취합이 있은 뒤에 그것이 발생되어 형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과 만물이 발생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 이치를 얻은 뒤에 健順 仁義禮智의 본성을 소유하게 되고, 반드시 이 기운을 얻은 뒤에 魂魄·五臟·百骸의 육체를 소유하게 된다. 周濂溪의 '無極의 眞(理)과 二五(음양과 오행)의 精(氣)이 오묘하게 합하여 凝聚된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이른 것이다.2) 그러나 이치로 말하면

1) 黃氏曰 天道是理, 陰陽五行是氣. 合而言之, 氣卽是理, 一陰一陽之謂道 是也. 分而言之, 理自爲理, 氣自爲氣, 形而上下 是也. 황씨가 말하였다. "천도는 이치요, 음양·오행은 기운이다. 그러나 이를 합하여 말하면 기운이 곧 이치이니, 一陰一陽을 道라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나누어 말하면 이치는 그 나름대로의 이치이며, 기운은 그 나름대로 기운을 가지고 있으니, 형이상·형이하로 나누어보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未有五行, 只得喚做陰陽; 旣有五行, 則陰陽在五行之中矣. <황씨가 말하였다.>"오행이 있지 않을 때에는 음양이라 말할 뿐이지만, 이미 오행이 생성되었을 때는 음양은 오행의 가운데 있다."

2) 問必有是理, 然後有是氣, 是如何? 朱子曰 此本無先後之可言. 然必欲推其氣之所從來, 則須說先有是理. 然理又非別爲一物, 卽存乎是氣之中. 無是氣則是理亦無掛搭處. 氣則爲金木水火, 理則爲仁義禮智. "반드시 이 이치가 있은 뒤에 이 기운이 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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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다 같이 한 근원으로서 사람과 만물에 귀천의 차이가 없지만, 기운

"이는 본래 선후로 말할 수 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그 기운의 유래를 미루어 말하면 먼저 이 이치가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치 또한 별개의 一物이 아니며, 곧 기운의 가운데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기운이 없으면 이치 또한 실릴 수 없다. 기운은 금목수화이며 이치는 인의예지이다." 理未嘗離乎氣. 然豈無先後? 理無形, 氣便粗有査滓. <주자가 말하였다.>"이치는 일찍이 기운에서 떠날 수 없다. 그러나 어찌 선후가 없겠는가. 이치는 無形이요, 기운은 곧 거친 渣滓가 있다." 就原頭定體上說, 則未分五行時, 只謂之陰陽; 未分五性時, 只謂之健順 及分而言之, 則陽爲木火, 陰爲金水; 健爲仁禮, 順爲智義. <주자가 말하였다.>"原頭定體로 말하면 오행이 구분되지 않았을 때는 음양이라 말하고, 五性으로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는 健順이라 말하지만, 나누어 말하면 陽은 木·火요, 陰은 金·水 요, 健은 仁·禮요, 順은 智·義이다." 問陰陽五行健順五常之性? 曰 健是稟得那陽之氣, 順是稟得那陰之氣, 五常是稟得五行之理. 人物皆稟得健順五常之性. "음양·오행·건순·오상의 성품이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健이란 양의 기운을, 順이란 음의 기운을, 五常이란 오행의 이치를 얻은 것이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건순·오상의 본성을 얻은 것이다." 天地之間, 有理有氣. 理也者, 形而上之道也, 生物之本也. 氣也者, 形而下之器也, 生物之具也. 故人物之生, 必稟此理然後有性, 必稟此氣然後有形. 其性其形, 雖不外乎一身, 然道器之間, 分際甚明, 不可亂也. <주자가 말하였다.>"천지의 사이에는 이치와 기운이 있다. 이치란 形而上의 道이니 생물의 근본이며, 기운이란 形而下의 器이니 생물의 기구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만물이 태어날 때 반드시 이 이치를 받은 후에 본성이 있고, 반드시 이 기운을 받은 후에 형체가 있다. 그 본성과 형체는 한 몸에서 떠날 수 없지만 道·器의 사이에는 그 구분이 매우 명백하므로 이를 어지럽힐 수 없다." 玉溪盧氏曰 魂, 陽之靈; 魄, 陰之靈; 五臟, 五行之質; 百骸, 萬物之象也. 眞, 以理言, 而理不雜氣; 精, 以氣言, 而氣不離理. 妙者, 理氣之莫測. 合者, 理氣之無間. 凝則有是形, 而各一其性矣.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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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말하면 바르고 통명한[正·通] 기운을 얻으면 사람이 되고, 편벽되고 막힌[偏·塞] 기운을 얻으면 만물이 된다. 이 때문에 그 어느 것은 고귀하고 어느 것은 비천하다는 차이점이 있으며,3) 비천한 만물은 이미 形氣의 偏塞

"魂은 양의 靈이요 魄은 음의 靈이며, 오장은 오행의 質이요, 百骸는 만물의 象이다. 眞이란 이치로서 말한 것이지만 이치는 기운에 뒤섞여 있지 않고, 精이란 기운으로 말한 것이지만 기운은 이치를 떠날 수 없다. 妙란 이치와 기운의 헤아릴 수 없는 것을 말하며, 合이란 이치와 기운의 간격이 없는 것을 말한다. 凝이란 이 형체가 있음으로써 각기 그 성품을 하나로 하고 있다." 周子之言, 見太極圖說. 周子의 말에 관한 부분은 太極圖說에 보인다.

3) 朱子曰 以理言之, 則無不全; 以氣言之, 則不能無偏. 주자가 말하였다. "이치로써 말한다면 온전하지 않은 바 없지만, 氣로 말하면 편벽되지 않은 바 없다." 人得其氣之正, 故是理通而無所塞; 物得其氣之偏, 故是理塞而無所通. 且如人頭圓象天, 足方象地, 平正端直, 以其受天地之正氣. 所以識道理有知識; 物受天地之偏氣, 所以禽獸橫生, 草木頭生向下, 尾反向上. 物之間有知者, 不過只通得一路, 如烏之知孝, 獺之知祭, 犬但能守禦, 牛但能耕而已. 人則無不知無不能. 人所以與物異, 所爭者此耳. <주자가 말하였다.>"사람은 바른 기운을 얻었으므로 이 이치가 통하여 막힌 바 없지만, 物이란 편벽된 기운을 얻었던 까닭에 그 이치는 막혀서 통할 수 없다. 또한 인간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발이 모가 난 것은 땅을 상징하며, 平正端直은 천지의 正氣를 받은 까닭에 이로써 도리를 알고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物이란 천지의 偏氣를 받은 까닭에 금수는 橫生하고 초목은 머리가 아래를 향하고 끝부분이 도리어 위로 향하고 있다. 만물 또한 知覺이 없지 않지만 그것은 하나의 도리를 아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예컨대 까마귀는 효도를, 수달은 제사 지낼 줄을, 개는 집을 지킬 줄을, 소는 밭갈이할 줄을 알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란 알지 못한 바 없고 능하지 못한 바 없다. 인간과 만물이 다른 점이라면 바로 여기에서 나뉘어진다." 論萬物之一原, 則理同而氣異; 觀萬物之異體, 則氣猶相近而理絶不同. 方賦與萬物之初, 天命流行, 只是一般, 故理同. 二五之氣, 有淸濁純駁, 故氣異. 萬物已得之後, 雖有淸濁純駁之不同, 而同此二五之氣, 故氣相近; 以其昏明開塞之甚遠, 故理絶不同. 氣相近, 如知寒暖, 識飢飽, 好生惡死, 趨利避害, 人與物, 都一般. 理不同, 如蜂蟻之君臣, 只是他義上有一點子明; 虎狼之父子, 只是他仁上有一點子明, 其他, 更推不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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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질곡되어 본체의 온전함을 확충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바르고 통명한 기운을 얻었기에 그의 본성이 가장 고귀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란 비어 있으며 신령하고 밝아서 모든 이치를 다 갖추고 있다.4) 사람이 금수와 다른 바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모든 사람이 다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천지에 동참하여 천지의 化育을 도울 수 있는 것 또한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을 일러서 밝은 덕이라 한다. 그러나 그 통명한 기운 가운데에도 혹은 청탁의 차별이 없을 수 없고, 그 바른 기운 가운데에도 혹 선악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부여받은 기질이 청명한 자는 지혜롭고, 혼탁한 자는 어리석으며, 아름다운 자는

<주자가 말하였다.>"만물의 一原을 논한다면 이치는 같지만 기운은 다르며, 만물의 異體를 살펴보면 기운은 서로 비슷하지만 이치는 전혀 같지 않다. 바야흐로 만물에게 부여할 처음에 천명이 유행한 것은 일반이다. 그러므로 이치가 같고 二五의 기운에는 淸濁·純駁의 차이가 있으므로 기운이 다르게 된다. 만물이 이미 얻게 된 뒤에 청탁·순박의 차이가 있으나, 음양 오행의 기운이 같으므로 기운이 서로 비슷하며, 昏·明, 開·塞의 큰 거리가 있는 까닭에 이치는 전혀 같지 않다. 기운이 서로 가깝다는 것은 추위와 더위를 알고, 굶주림과 배부름을 느끼고,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이로움으로 달려 나아가고 해를 피하는 것은 인간이나 만물이 모두 일반임을 일컫는다. 이치가 같지 않다는 것은 벌과 개미에게 君臣이 있는데 그것은 義에 있어서의 한 부분의 밝음을 가진 것이며, 범과 승냥이에게 父子가 있는데 그것은 다만 仁에 있어서의 한 부분의 밝음을 가지고 있을 뿐, 그 나머지는 미루어 나가지 못한다."

4) 北溪陳氏曰 此八字, 只是再詳虛靈不昧以具衆理之意. 虛靈洞徹, 盖理與氣合, 而有此妙用耳, 非可專指氣. 如心恙底人, 亦有氣存. 何故昏迷顚錯, 無此虛靈洞徹耶 북계 진씨가 말하였다. "이 여덟 글자는 다시 '虛靈不昧, 以具衆理'의 뜻을 자세히 해석한 것이다. 虛靈洞徹이란 이치와 기운이 합하여 이와 같은 妙用이 있는 것이니, 이는 오로지 기운만을 가리켜 말한 게 아니다. 예컨대 마음의 병을 앓은 사람 또한 기운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혼미하고 전도되어 이와 같은 허령통철이 없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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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질고, 악한 자는 어질지 못함으로써 똑같지 않다.5) 그러므로, 반드시 上智 大賢의 바탕을 가진 자만이 본체를 온전히 보존하여 조금이라도 밝지 못한 점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에 미치지 못한 자는 밝은 덕을 얻었지만 가린 바 없지 않아 그 온전한 본체를 잃게 된다. 더욱이 기질에 가린 마음으로써 한량없는 사물의 변화를 접촉하노라면 눈은 빛을, 귀는 소리를, 입은 맛을, 코는 냄새를, 손발은 안일만을 추구함으로써 덕을 해친 바 또한 어찌 이루 다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기질에 가린 마음과 한량없는 사물의 변화, 이 두 가지가 상호 연속 반복됨으로써 밝은 덕의 본체는 날로 더욱 혼미하여, 신령한 마음으로 아는 것이라곤 오로지 정욕이해의 사사로움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전락하게 되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금수와 다른 바 그 무엇이 있겠는가?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요순이 될 수 있고 천지에 동참할 수 있다고 하지만, 또한 스스로 확충해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본디 밝음이 있는 본체는 하늘에서 얻어온 것이기에 영원히 혼미해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아무리어둠에 가려 있을지라도 잠깐 사이나마 단 한 번의 깨침이 있으면 그 빈틈 사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명으로써 그 본체를 밝힐 수 있다.6) 이로써

5) 朱子曰 人雖皆是天地之正氣, 但衮來衮去, 便有昏明厚薄之異. 盖氣是有形之物, 纔是有形之物, 便自有美惡也. 주자가 말하였다. "사람은 모두 천지의 正氣를 받아 태어나지만, 기운의 유행, 왕래에 의하여 昏明厚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기운은 유형의 존재인데, 유형의 존재가 있으면 곧 美惡이 형성된다." 格庵趙氏曰 通塞偏正, 判人物之大分而言; 其淸濁美惡, 又就人中分別. 격암 조씨가 말하였다. "通·塞·偏·正이란 인간과 만물을 크게 나누어 말한 것이며, 淸·濁과 美·惡이란 인간 가운데서 분별하여 말한 것이다."

6) 問介然之頃, 一有覺焉, 則其本體已洞然矣. 須是就這些覺處, 便致知充廣將去. 朱子曰 然. 如擊石之火, 只是些子, 纔引著, 便可以燎原. 若必欲等大覺了, 方去格物致知, 如何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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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가르침을 베풂에 있어 먼저 ≪소학≫으로 함양토록 하였고, 이어 다시 ≪대학≫의 도를 말함에 있어 반드시 격물치지를 먼저 말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함양한 가운데에서 우러나오는 앎으로 인하여, 밝은 덕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열어 주고자 함이며, 이를 뒤이어 성의·정심·수신의 조목을 말한 것 또한 그들로 하여금 이미 밝은 덕을 밝히는 실마리로 인하여 자신을 돌이켜봄으로써 밝음의 실상을 다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앞서 밝은 덕을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열어 주고, 또 다시 밝음의 실상을 다한 바 있으면 하늘에서 얻어온 나의 밝은 덕이 일찍이 밝혀지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으면 기질과 물욕을 초탈하여 누를 찾아볼 수 없고, 또한 본체의 온전함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곧 이른바 밝은 덕을 밝힘이다. 그러나 이는 애당초 性分의 밖에서 作爲한 바 없다. 그러나 명덕이란 사람마다 다 함께 얻은 것이요, 나 홀로 사사로이 얻은 것이 아니다. 지난날 모두 물욕에 가려 있을 때는 현인과 어리석은 구별이 별로 크지 않지만, 오늘날 내 다행스럽게도 이를 밝혔는 바, 다 함께 이를 얻고서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여, 바야흐로 혼미한 데에 있으면서도 마음 달게 여기고, 낮고 더럽고 구차스럽고 비천한 생활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得這般時節? 那箇覺, 是物格知至了, 大徹悟到恁地時, 事都了. 若是介然之覺, 一日之間, 其發也無時無數, 只要人識認得操持充養將去. "잠깐 사이에 한번 깨달으면 그 본체가 이미 밝게 나타나니, 반드시 이 깨달음이 있는 곳에서 앎을 다하여 이를 확충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자가 답하였다. "그렇다. 이는 마치 부싯돌을 부딪쳐 튀겨 나온 불씨는 조그맣지만 이 불씨가다른 곳으로 불붙으면 큰 언덕을 불태울 수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반드시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바야흐로 格物·致知를 통하여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그런 시절을 얻을 수 있을까? 그 깨달음이란 物格이요 知至이다. 큰 깨달음을 얻은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일을 모두 깨닫게 된다. 만일 잠깐 사이의 깨달음으로써 하루 사이에 그 發하는 바 무시로 수없이 많게 나타나게 된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인식하여 확충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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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이를 알지 못하는 뭇 사람을 보고서, 어떻게 그들을 가엾게 여겨 구제하고자 하는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내 스스로 밝힌 바를 미루어 그들에게 미쳐 가되, 제가에서 비롯하여 중간에는 치국을, 마지막 엔 평천하에까지 이르러, 자신의 명덕을 가지고서도 스스로 밝히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 또한 모두 그 스스로가 밝은 덕을 밝혀서, 해묵고 더러운 때를 없애도록 해주는 그것이 이른바 백성을 새롭게 함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그들에게 나의 것을 준다거나 더해 주는 것은 아니다.7) 덕이란 나에게 있어 마땅히 밝혀야 한다는 사실과 백성에게 있는 덕 또한 마땅히 새롭게 해야 하는 것인 바, 이 또한 모두 인력으로 강작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밝히고 새롭게 하는 것 또한 사사로운 뜻과 구차스럽게 행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하늘에서 얻어온 것으로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것이니만큼, 여기에는 근본적으로 일정한 준칙이 있을 수밖에 없다.8)

7) 玉溪盧氏曰 非彼本無而我付畀之, 非彼本少而我增益之, 以其本體之明無不全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저 사람에게 본래 없었던 것을 내가 그에게 부여해 준 것도 아니며, 저 사람에게 본래 적었던 것을 내가 그에게 더해 준 것도 아니다. 그 본체의 밝음이란 애당초 온전하지 않은 바 없기 때문이다."

8) 西山眞氏曰 則者, 法也. 天下之理, 皆天實爲之, 莫不有一定之法, 非人力所可增損, 故曰則. 서산 진씨가 말하였다. "則이란 법을 말한다. 천하의 이치는 모두 하늘이 실로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여기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지 않은 바 없으며, 人力으로 더하거나 줄일 수 없다. 그러기에 이를 법칙이라 말한다." 玉溪盧氏曰 至善, 乃太極之異名; 而明德之本體, 得之於天, 而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體, 乃吾心統體之太極; 見於日用之間, 而各有本然一定之則者, 至善之用, 乃事事物物各具之太極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지선이란 바로 태극의 異名이다. 명덕의 본체란 하늘에서 얻어온 것으로 본연 一定의 준칙을 가지고 있다. 지선의 본체란 곧 吾心統體의 태극이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남에 각기 본연 일정의 준칙이 있으며, 지선의 작용이란 사사물물에 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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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정자의 말처럼 '義理精微의 極處로서 뭐라 형용할 수 없기에' 이를 지극한 선이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전문 3장에서 열거한, 임금으로서의 '어짊', 신하로서의'공경', 자식으로서의 '효도', 어버이로서의 '사랑', 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의 '믿음'이 바로 지극한 선이다. 이는 숱한 조목 가운데 그 큰 것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9) 뭇 사람의 마음 또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간혹 이를 알지 못하고, 배우는 자들이 간혹 이를 안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지극한 선에 이르러, 다시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자 매우 드물다. 그것은 ≪대학≫을 가르치는 이가 조금이나마 이치를 회복했다 할지라도 순수, 온전하지 못한다거나, 다소 자신을 극복했을지라도 지극히 다하지 못한 바 있으면, 몸을 닦아 사람을 다스리는 도를 다할 수 없을까를 염려한 나머지 반드시 이를 말하여 명덕과 신민의 표준을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명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이에 이르러야 하며, 조금이라도 여기에서 지나치다거나 미치지 못하는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회복하는 데, 털끝만큼도 여한이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학≫ 전체의 뜻을 종합하여 말하면 이 여덟 가지 일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이 여덟 가지의 요점을 종합하여 말하면 또한 이 세 가지에서

가지고 있는 태극을 말한다."

9) 朱子曰 至善, 只是極好處, 十分端正恰好, 無一毫不是處, 無一毫不到處. 且如事君, 必當如舜之所以事堯而後喚做敬; 治民, 必當如堯之所以治民而後喚做仁. 不獨如此, 凡理皆有箇極好處. 주자가 말하였다. "지선이란 것은 다만 지극히 좋은 곳, 十分 단정하고 좋은 것이다. 조금도 옳지 않은 곳이 없으며, 조금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다. 또 일례를 들면 임금을 섬길 때는 반드시 순임금이 요임금을 섬기는 것처럼 한 후에 敬이라 말할 수 있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반드시 요임금이 백성을 다스린 것처럼 한 후에야 仁이라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치에는 다 지극히 좋은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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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나는 이를 단연코 ≪대학≫의 강령이라 말하기에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맹자가 죽은 이후로 도학이 전수되어 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의 군자들은 각자가 제 편할 대로 뜻을 두고서 학문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그들은 명덕을 밝히는 데 힘쓰지 않고, 오로지 정치·敎條와 법령·제도만으로도 신민을 하기에 충분하다 여기게 되었고, 또한 자신의 한 몸을 사랑하여 혼자 선한[獨善] 것으로써 스스로가 밝은 덕을 밝혔다고 생각하여 新民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또한 이 두 가지를 마땅히 힘써야 할 줄 알면서도 도리어 작은 성취에 안주하고 이욕의 습관에 젖어 지극한 선이 있는 곳에 그치기를 구하지 않는 자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는 모두가 이 책을 고찰하지 않은 데에서 저지른 잘못들이다. 이 때문에 자아와 그리고 타인을 완성시킴[成己·成物]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지 않을 이가 적으리라고 본다."10)

曰: 程子之改親爲新也, 何所據? 子之從之, 又何所考而必其然耶? 且以己意輕改經文, 恐非傳疑之義, 奈何? 曰: 若無所考而輒改之, 則誠若吾子之譏矣. 今親民云者, 以文義推之, 則

10) 朱子曰 不務明其明德, 而以政敎法度爲足以新民, 如管仲之徒 便是. 自謂能明其明德, 而不屑於新民, 如佛老 便是. 略知明德新民而不求止於至善, 如王通. 주자가 말하였다. "명덕을 밝히는 데 힘쓰지 않고 政敎와 법도로써 넉넉히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관중과 같은 무리이다. 스스로 명덕을 밝혔다 하면서도 신민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이는 佛·老가 바로 그런 유이다. 명덕과 신민을 대략 알면서도 지선에 그치기를 구하지 않은 이는 王通과 같은 자이다." 玉溪盧氏曰 成己, 謂明德; 成物, 謂新民. 不止至善, 故不謬者鮮.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成己란 명명덕이며, 成物이란 신민을 말한다. 지선에 그치지 못한 까닭에 잘못을 범하지 않을 자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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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理. 新民云者, 以傳文考之, 則有據. 程子於此, 其所以處之者, 亦已審矣. 矧未嘗去其本文, 而但曰某當作某, 是乃漢儒釋經不得已之變例, 而亦何害於傳疑耶. 若必以不改爲是, 則世蓋有承誤踵訛, 心知非是, 而故爲穿鑿附會, 以求其說之必通者矣. 其侮聖言而誤後學也 益甚, 亦何足取以爲法邪?

"정자가 '親'을 '新' 자로 바꿔 쓴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이며, 선생이 그 말을 따르는 것 또한 무엇으로써 그 점을 고증하여 꼭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또한 자기의 뜻으로써 가벼이 경문을 고친다는 것은 '의문점을 의문 그대로 전하는'[傳疑]11) 의의가 아니라고 여겨지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아무런 고증 없이 곧장 이를 고쳐 썼다면, 참으로 그대가 비난한 바와 같다. 그러나 이에 친민이라 말한 것은 전체 문장의 맥락으로 유추해보아도 그와 같은 점을 찾아볼 수 없으나, 신민은 傳文을 살펴보면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정자가 이에 조처한 바 또한 이미 분명히 하였고, 더욱이 본문을 버리지 않고서 다만 '○ 자는 마땅히 ○ 자로 써야 한다[某當作某]'라는 주석은, 漢儒가 경문을 해석함에 있어서 부득이할 경우에 사용하는 變例이다. 이 또한 의문점을 그대로 전해주는 데 나쁠 게 없다. 만일 굳이 고쳐 쓰지 않은 것이 옳다고 고집한다면, 사람들은 오류를 그대로 전승하고 訛傳을 답습하는 과정에서 마음속으로 이의 잘못된 부분을 분명히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또 다른 뜻을 찾아서 천착과 부회로써, 반드시 제 의견이 통용될 수 있도록 억지를 부리는 杜撰人이 생겨나게 될 것이다.

11) 新安倪氏曰 春秋穀梁傳云 信以傳信, 疑以傳疑, 此傳疑二字所本也. ≪春秋穀梁傳≫에 의하면 "믿을 수 있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그대로 전하고,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한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 쓰인 '傳疑' 두 글자는 이에 의거하여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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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될 경우 그것은 성인의 말씀을 경멸하고 후학을 오도하는 바 더욱 클 것이다. 이러한 폐해를 어떻게 취하여 법을 삼을 수 있겠는가?"

曰: 知止而后 有定, 定而后 能靜, 靜而后 能安, 安而后 能慮, 慮而后 能得, 何也? 曰: 此推本上文之意, 言明德新民, 所以止於至善之由也. 蓋明德·新民, 固皆欲其止於至善. 然非先有以知夫至善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止者而止之. 如射者 固欲其中夫正鵠, 然不先有以知其正鵠之所在, 則不能有以得其所當中者而中之也. 知止云者, 物格知至, 而於天下之事, 皆有以知其至善之所在, 是則吾所當止之地也. 能知所止, 則方寸之間, 事事物物, 皆有定理矣. 理旣有定, 則無以動其心而能靜矣. 心旣能靜, 則無所擇於地而能安矣. 能安則日用之間, 從容閒暇, 事至物來, 有以揆之而能慮矣. 能慮則隨事觀理, 極深研幾, 無不各得其所止之地而止之矣. 然旣眞知所止, 則其必得所止, 固已不甚相遠. 其間四節, 蓋亦推言其所以然之故, 有此四者, 非如孔子之志學以至從心, 孟子之善信以至聖神, 實有等級之相懸, 爲終身經歷之次序也.

"그쳐야 할 지극한 선을 안 뒤에 뜻에 정향이 있으니, 뜻에 정향이 있는 뒤에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몸이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꼼꼼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지극한 선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위 문장의 뜻에 근본한 것으로, 명덕과 신민의 지극한 선에 그침을 얻어가는 유래를 말한 것이다. 명덕과 신민 모두 다 지극한 선에 그치기를 원하지만, 먼저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하면 마땅히 그쳐야 할 곳에 그칠 수 없다. 예컨대 활 쏘는 사람이 과녁에 적중시키기를 원하지만 먼저 그 과녁의 정곡이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면, 적중시켜야 할 곳을 알지 못하며, 따라서 정곡을 맞힐 수 없을 것이다. 知止란 物格·知至로서, 이는 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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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물의 지선이 있는 곳을 아는 것이요, 곧 내 마땅히 그쳐야 할 터전인 셈이다. 이와 같이 그쳐야 할 곳을 알면 마음속에 事事物物 모든 게 정돈되어 있고,12) 도리가 이미 정해진 바 있으면 마음에 동요가 없음으로써 마음이고요하게 된다. 마음이 고요하면 어느 곳에서든 몸이 편안하게 되고 몸이 편안하면 일상생활이 자연스럽고 한가함으로써 어떤 사물이 닥쳐올지라도 이를 꼼꼼히 헤아리고 깊이 사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깊이 생각하면 일에 따라서 이치를 살펴봄에 지극히 깊이 탐구하고 미세한 부분까지 연구함으로써 각각 그쳐야 할 곳을 얻어, 이에 그치지 않은 바 없다. 그러나 참으로 그쳐야 할 바를 안다면 반드시 그칠 곳을 얻을 수 있기에 이는 서로의 거리가 먼 것이 아니다. 그 사이의 4절(定·靜·安·慮) 또한 그 所以然의 유래를 미루어 말한 것이다. 이 네 가지는 공자가 '15세에 학문에 뜻을 둠[十五志學]'으로부터 '70세에 마음의 하고자 함……[七十從心]'(≪논어·위정≫)에 이르는, 그리고 맹자의 善人·信人으로부터 聖人·神人(≪맹자· 진심 하≫)에 이르는 것과 같이 현격한 등급이 설정되어, 일생을 두고 하나하나 거쳐 가야 하는 차례가 있는 것과는 다르다."13)

12) 新安陳氏曰 章句云知之則志有定向, 此云事物皆有定理, 合二說, 其義方備. 能知所止, 則此心光明見得事物, 皆有定理而志方有定向.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장구에서는 '이를 알면 뜻에 정향이 있다'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사물에 모두 定理가 있다'라고 하였다. 이 두 말을 종합해보면 그 의의를 더욱 완벽하게 알 수 있다. 그칠 바를 안다면 마음이 밝아서 사물을 봄에 있어 모두 일정한 이치를 두고 뜻에는 바야흐로 定向이 생기게 될 것이다."

13) 朱子曰 如志學, 至從心中間許多, 便是大階級步却闊. 知止, 至能得, 只如志學至立, 立至不惑相似. 定靜安, 大抵皆相類, 只是就一級中間細分耳. 주자가 말하였다. "예컨대 15 志學으로부터 70 從心에 이르는 그 중간에는 여러 큰 단계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 과정은 큰 것이다. 그러나 知止로부터 能得에 이르기까지 지학(15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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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物有本末, 事有終始, 知所先後, 則近道矣, 何也?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明德·新民, 兩物, 而內外相對, 故曰本末. 知止·能得, 一事, 而首尾相因, 故曰終始. 誠知先其本而後其末, 先其始而後其終也, 則其進 爲有序, 而至於道也 不遠矣.

"물건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위의 ≪大學·知止≫ 2절의 뜻을 끝맺은 문장이다. 명덕·신민은 두가지의 일로서 내외의 대칭이 되기에 이를 本末이라 하고, 知止와 能得은 하나의 일로서 수미가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이를 終始라 한다. 만일 근본을 먼저 하고 지엽적인 끝을 뒤에 하며, 시작을 먼저 하고 마침을 뒤에 할 줄 안다면 그 나아가는 바에 차례가 있을 것이며, 도에 다다름 또한 가까울 것이다."14)

曰: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 先治其國. 欲治其國者, 先齊其家. 欲齊其家

로부터 立(30세)에 이르고, 立으로부터 不惑(40세)에 이르는 것과 같으며, 定·靜·安또한 이와 유사하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단계를 세분한 것이다."

14) 朱子曰 知工夫先後次第, 則進爲有序, 不忽近務遠, 處下窺高, 而其入道爲不遠矣, 謂至道之近也. 주자가 말하였다. "공부의 선후 차례를 안다면 나아감에 순서가 있기에, 가까운 것을 가벼이 여겨 먼 곳에 힘쓰지 않으며 아래에 처하여 위를 엿보지 않는다면 도에 들어감에 있어서 멀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일러 도에 다다름이 가깝다고 말한 것이다." 黃氏曰 知所先後, 方是曉得爲學之道, 未能遽得夫道也. 然旣知其進爲之序, 則有至之階矣, 故云去道不遠. 황씨가 말하였다.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아야 학문의 도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 도를 얻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 나아가는 차례를 알았다면 도에 이를 수 있는 단계에 있으므로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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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 先修其身. 欲修其身者, 先正其心. 欲正其心者, 先誠其意. 欲誠其意者, 先致其知. 致知 在格物, 何也? 曰: 此言大學之序 其詳如此, 蓋綱領之條目也. 格物·致知·誠意·正心· 修身者, 明明德之事也. 齊家·治國·平天下者, 新民之事也. 格物致知, 所以求知至善之所在. 自誠意 以至於平天下, 所以求得夫至善而止之也. 所謂明明德於天下者 自明其明德, 而推以新民, 使天下之人 皆有以明其明德也. 人皆有以明其明德, 則各誠其意·各正其心·各修其身·各親其親·各長其長, 而天下無不平矣. 然天下之本 在國, 故欲平天下者 必先有以治其國. 國之本 在家, 故欲治國者, 必先有以齊其家. 家之本 在身, 故欲齊家者 必先有以修其身. 至於身之主, 則心也 一有不得其本然之正, 則身無所主, 雖欲勉强以修之, 亦不可得而修矣. 故欲修身者 必先有以正其心, 而心之發 則意也. 一有私欲 雜乎其中, 而爲善去惡 或有未實, 則心爲所累, 雖欲勉强以正之, 亦不可得而正矣. 故欲正心者 必先有以誠其意. 若夫知 則心之神明, 妙衆理而宰萬物者也. 人莫不有, 而或不能使其表裏洞然無所不盡, 則隱微之間, 眞妄錯雜, 雖欲勉强以誠之, 亦不可得而誠矣. 故欲誠意者 必先有以致其知. 致者 推致之謂, 如喪致乎哀之致, 言推之而至於盡也. 至於天下之物, 則必各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人莫不知而或不能使其精粗隱顯 究極無餘, 則理所未窮, 知必有蔽, 雖欲勉强以致之, 亦不可得而致矣. 故致知之道 在乎卽事觀理 以格夫物. 格者 極至之謂, 如格于文祖之格, 言窮之而至其極也. 此大學之條目, 聖賢相傳, 所以敎人爲學之次第 至爲纖悉. 然漢魏以來 諸儒之論, 未聞有及之者, 至唐韓子乃能援以爲說, 而見於原道之篇, 則庶幾其有聞矣. 然其言極於正心·誠意, 而無曰致知格物云者, 則是不探其端而驟語其次, 亦未免於擇焉不精·語焉不詳之病矣. 何乃以是而議荀揚哉?

"옛날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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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다듬고, 그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뜻을 진실하게 하고, 그 뜻을 진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앎을 지극히 다하였으니, 앎을 지극히 다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대학≫의 차례가 이와 같이 자세함을 말한 것으로, 삼강령의 팔조목이다.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은 명명덕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신민의 일이다. 격물·치지는 지선이 있는 곳을 알려고 추구하는 것이며, 성의로부터 평천하에 이르기까지는 지선을 얻어 그 곳에 그치기를 추구하는 것이다.15) 이른바 明明德於天下란 스스로의 밝은 덕을 밝히고, 이를 미루어 백성을 새롭게 하여, 천하의 모든 사람들까지 모두 다 제각기 밝은 덕을 밝히는 것이다. 사람마다 모두 밝은 덕을 밝히면, 각기 그 생각을 성실하게 가지고, 각각 그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각기 그 몸을 닦고, 각각 그 부모를 효도로 섬기고, 각기 그 어른을 공경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근본은 한 나라에 있으므로 천하를 평정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하며, 나라의 근본은 집안에 있으므로 나라를 다스리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가다듬어야 하며, 집안의 근본은 나의 몸에 있으므로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몸을 닦아야 한다. 한 몸의 주재는 마음이다. 만에 하나 그 본연의

15) 朱子曰 格物致知, 是求知其所止; 誠意正心修身至平天下, 是求得其所止. 物格知至, 是知所止; 意誠心正身修家齊國治天下平, 是得其所止. 주자가 말하였다. "격물·치지는 그 그칠 바를 알고자 함이며, 성의·정심·수신으로부터 평천하에 이르기까지는 그 그칠 바를 얻고자 함이며, 물격·지지는 그칠 바를 앎이며, 의성· 심정·수신·가제·국치·천하평은 그 그칠 바를 얻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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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를 얻지 못하면 몸의 주재가 되는 마음이 없으므로, 비록 몸을 닦으려고 힘써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몸을 닦으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곧 意(뜻, 또는 생각)이다. 만일 마음에 사욕이 뒤섞여 있어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는 데에 혹 진실하지 못한 바 있으면 마음에 누가 되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힘써 도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문에 마음을 바르게 하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먼저 그 뜻을 진실하게 해야 한다. 앎[知]이란 마음의 神明으로서 뭇 이치를 오묘하게 알고 만물을 주재하는 것이다. 사람마다 이 같은 앎을 가지고 있지 않은 바 없다. 그러나 혹 안팎으로 훤하게 다 아는 바 없으면 보이지 않는, 마음속의 그 미세한 부분에 진실과 거짓이 뒤섞이게 되므로, 뜻을 진실하게 하려고 힘써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뜻을 진실하게 하려는 자는 반드시 앞서 그 앎을 극진히 다해야 한다. 致란 '미루어 다함[推致]' 을 말한다. 예컨대 '喪致乎哀'(≪논어·자장≫)의 致 자와 같은 뜻이다. 이는 미루어 지극함에 다다름을 말한다. 천하의 사물에는 반드시 각각 그 所以然이라는 원초적 이유와 소당연이라는 당위성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16) 이것이 이른바 이치이다. 사람들은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지만, 간혹 精粗· 隱顯을 남김없이 다 궁구하지 못하면, 이치를 모두 궁구하지 못한 바 있어 앎에 가린 바 있으므로, 비록 앎을 다하고자 힘써도 또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앎을 다하는 도는 '사물 상에 나아가 이치를 관찰하고 사물을 궁구한 데 있다. 格이란 '지극히 하여 ……에 이르다[極至]'의 뜻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格于文祖'(≪서경·舜典≫)의 格 자와 같은 뜻으로, 이는 그것을

16) 新安陳氏曰 所當然之則, 理之實處; 所以然之故, 乃其上一層, 理之源頭也.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소당연의 준칙이란 이치의 實處이며, 소이연의 故란 위의 한 층이니, 이치의 源頭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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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름을 말한다. 이는 ≪대학≫의 조목이요, 성현이 서로 전수한 바로서 학문의 차례가 지극히 섬세하다. 그러나 漢·魏 이후 제유의 논설은 여기에 미치지 못했고, 唐 韓愈에 이르러서야 이를 원용하여 ≪原道≫에 이의 의의를 밝힘으로써 이에 대해 가까 스로 깨친 바 있었다.17) 그러나 그의 말은 정심·성의에 그쳤을 뿐, 치지·격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이를 깊이 탐구하지 못한 채, 갑자기 그 차례를 말한 것으로, 그 또한 '선택하였지만 정밀하지 못하고 말하였지만 자상하지 못하다(≪孟子·序說≫)'18)라는 병폐를 면치 못했다. 왜 그 스스로가 이러한 잘못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이 말로써 순자와 양웅을 비난할 수 있었는지?"

曰: 物格而后 知至, 知至而后 意誠, 意誠而后 心正, 心正而后 身修, 身修而后 家齊, 家齊而后 國治, 國治而后 天下平 何也? 曰: 此覆說上文之意也. 物格者 事物之理 各有以詣其極而無餘之謂也. 理之在物者 旣詣其極而無餘, 則知之在我者 亦隨所詣而無不盡矣. 知無

17) 朱子曰 原道擧大學, 却不說格物致知. 蘇氏古史, 擧中庸不獲乎上, 却不說明善誠身. 這樣, 都是無頭學問. 주자가 말하였다. "한유의 ≪원도≫에서 ≪대학≫을 들어 말하였지만, 도리어 격물·치지를 말하지 않았고, 蘇氏는 古史에서 ≪중용≫의 不獲乎上 구절을 열거하였지만, 明善·誠身을 말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모두가 源頭가 없는 학문들이다."

18) 韓文集, 荀與揚也, 擇焉而不精, 語焉而不詳. 한유의 문집에 의하면, "순자와 양자는 선택하되 정밀하지 못하고, 말하되 자상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荀子, 名況, 字卿, 戰國時趙人也. 揚子, 名雄, 字子雲, 西漢成都人也. 各有所著之書, 今傳於世. 순자의 이름은 況, 자는 卿, 전국 때 조나라 사람이며, 양자의 이름은 雄, 자는 子雲, 서한 成都 사람이다. 모두 저서를 남겨 오늘날 그의 문집이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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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盡, 則心之所發 能一於理而無自欺矣. 意不自欺, 則心之本體 物不能動而無不正矣. 心得其正, 則身之所處 不至陷於所偏而無不修矣. 身無不修, 則推之天下國家, 亦擧而措之耳, 豈外此而求之智謀功利之末哉?

"사물의 이치가 이른 뒤에 앎이 지극해지고, 앎이 지극해진 뒤에 뜻이 진실해지며, 뜻이 진실한 뒤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지며, 몸이 닦여진 뒤에 집안이 가다듬어지고, 집안이 가다듬어진 뒤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뒤에 천하가 평정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위 글의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物格이란 사물의 이치 극처에까지나아가 조금도 남음이 없음을 말한다. 사물 상 이치의 극처에까지 나아가 남음이 없으면, 나의 앎 또한 그 조예에 따라서 극진하지 않은 바 없다. 앎이 극진하면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 또한 천리와 하나가 되어, 스스로 속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마음의 본체가 바깥 사물에 동요되지 않음으로써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면 몸의 처한 바 편벽된 곳에 빠지지 않음으로써 몸이 닦여지지 않은 바 없을 것이다. 몸이 닦여지면 이를 미루어서, 천하·국가에 조처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러한 도를 도외시하고서 지모와 공리라는 지엽적인 데에서 구하려 하는가?"

曰: 篇首之言明明德以新民爲對, 則固專以自明爲言矣. 後段於平天下者, 復以明明德言之, 則似新民之事 亦在其中, 何其言之不一 而辨之不明邪? 曰: 篇首三言者, 大學之綱領也. 而以其賓主·對待·先後·次第言之, 則明明德者 又三言之綱領也. 至此後段, 然後 極其體用之全而一言以擧之, 以見夫天下雖大而吾心之體 無不該, 事物雖多而吾心之用 無不貫. 蓋必析之有以極其精而不亂, 然後合之, 有以盡其大而無餘, 此又言之序也

"이 책의 첫 부분에서 명명덕을 신민의 대칭으로 말했는데, 이는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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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밝혀야 한다는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래 단락의 평천하에 대해서도 명명덕으로 이를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신민의 일 또한 그 가운데 있다는 말과 같은데, 왜 그처럼 말이 통일되지 못하고 논변이 명백하지 못한 것인지?" "첫머리의 명명덕, 신민, 지지선 세 구절은 ≪대학≫의 강령이다. 그러나 이에 또 다시 빈주·對待·선후·차례로 말하면 명명덕은 또한 세 구절의 강령이다. 이 때문에 아래 단락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본체와 작용[體用]의 전체를 모두 말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천하가 크다 하지만 내 마음의 본체에 모두 갖추어져 있고, 사물이 많다 하지만 내 마음의 작용으로 모두 관통되지 않은 게 없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를 분석하여 그 정밀함을 다하여 조금이라도 어지러움이 없는 뒤에야, 다시 이를 모두 종합하여 그 큰 것까지 다하여 하나도 남김이 없게 할 수 있다. 이 또한 말하는 차례가 이러하다."19)

19) 玉溪盧氏曰 言明明德與新民對, 則大學之體用, 猶二; 言明明德於天下, 則大學之體用, 非二矣. 吾心之體, 卽明德之虛而具衆理者也; 吾心之用, 卽明德之靈而應萬事者也. 能析之, 極其精而不亂, 則知吾心之用, 無不貫矣. 能合之, 盡其大而無餘, 則知吾心之體, 無不該矣. 不析之而遽欲合之, 則有虛空恍惚之病; 徒析之而不能合之, 則有支離破碎之病. 必析之, 極其精, 然後合之, 盡其大. 此二句, 其義無窮. 西山眞氏, 嘗誦此而繼之, 曰 小德川流, 大德敦化. 又繼之, 曰 吾道一以貫之, 其旨深矣.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명명덕과 신민을 대칭으로 보면 ≪대학≫의 체용이 오히려 둘이라 할 수 있지만, 명명덕어천하라 말했는 바, ≪대학≫의 체용은 둘이 아니다. 내 마음의 본체가 곧 명덕의 虛로서 衆理를 갖추고 있으며, 내 마음의 작용이 곧 명덕의 靈으로서 만사에 응할 수 있다. 이를 잘 분석하여 그 정밀함을 다하되 어지럽지 않으면 내 마음의 작용이 관통되지 않은 바 없으며, 이를 잘 종합하여 그 큼을 다하되 남음이 없으면 내 마음의 본체가 갖추어지지 않은 바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를 분석해 보지 않고 문득 이를 종합하여 보고자 한다면 虛空·恍惚한 병폐를 가지게 되며, 한갓 분석을 하고 이를 종합해 볼 줄 알지 못하면 支離·破碎한 병폐를 가지게 된다. 반드시 이를 분석하여 그 정밀함을 다한 이후에 이를 합하여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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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自天子 以至於庶人 壹是皆以修身爲本. 其本亂 而末治者 否矣, 其所厚者 薄, 而其所薄者 厚, 未之有也, 何也? 曰: 此結上文兩節之意也. 以身對天下國家而言則身 爲本而天下國家爲末. 以家對國與天下而言則其理 雖未嘗不一. 然其厚薄之分 亦不容無等差矣. 故不能格物致知以誠意正心而修其身, 則本必亂而末不可治. 不親其親·不長其長, 則所厚者薄而無以及人之親長, 此皆必然之理也. 孟子所謂於所厚者 薄, 無所不薄, 其言 蓋亦本於此云.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가 자신의 몸을 닦는 것으로서 근본을 삼으며, 그 근본이 어지럽고 그 끝이 다스려질 수 없으며, 그 두텁게 해야 할 바를 얇게 하고서 그 얇게 해야 할 바에 두텁게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는 위의 ≪고지≫·≪물격≫ 두 절의 뜻을 끝맺은 문장이다. 몸이란 천하·나라·집안의 대칭으로 말하면 몸은 근본이요, 천하와 나라와 집안은 지엽적인 것이며, 집안을 나라와 천하의 대칭으로 말하면 그 이치는 하나 이지만 厚薄의 분수 또한 차등이 없을 수 없다. 이 때문에 격물치지와 성의 정심으로 몸을 닦지 않으면 근본이 어지럽게 됨으로써 지엽적인 것이 다스려질 수 없으며, 제 부모를 사랑하지 않거나 어른을 공경하지 않음은 두텁게 해야 할 곳을 얇게 하여, 타인의 부모와 어른에게 미쳐갈 수 없다. 이 모두가 필연적인 이치이다. 맹자의 말에 '두텁게 할 곳을 얇게 하면, 어느 곳에서든 얇게 하지 않을 바 없다'(≪맹자·진심 하≫)라는 말 또한 이에 근본하여 말한 것이다."

큼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 두 구절은 그 의의가 무궁하다. 서산 진씨가 일찍이 이를 말하고 뒤이어서 '小德川流, 大德敦化'를 말했고, 또한 이의 뒤를 이어서 '吾道一以貫之'라 하니, 그 뜻이 심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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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治國平天下者, 天子諸侯之事也. 卿大夫以下 蓋無與焉. 今大學之敎乃例以明明德於天下爲言, 豈不爲思出其位·犯非其分, 而何以得爲爲己之學哉? 曰: 天之明命有生之所同得, 非有我之得私也. 是以君子之心 豁然大公, 其視天下無一物而非吾心之所當愛, 無一事而非吾職之所當爲. 雖或勢在匹夫之賤, 而所以堯舜其君·堯舜其民者, 亦未嘗不在其分內也. 又況大學之敎, 乃爲天子之元子衆子, 公侯卿大夫士之適子, 與國之俊選而設. 是皆將有天下國家之責而不可辭者, 則其所以素敎而預養之者 安得不以天下國家爲己事之當然, 而預求有以正其本·淸其源哉. 後世敎學不明, 爲人君父者 慮不足以及此, 而苟循於目前. 是以天下之治日常少·亂日常多, 而敗國之君·亡家之主, 常接迹於當世, 亦可悲矣. 論者不此之監, 而反以聖法爲疑, 亦獨何哉. 大抵以學者而視天下之事, 以爲己事之所當然而爲之, 則雖甲兵·錢穀·籩豆·有司之事 皆爲己也. 以其可以求知於世而爲之, 則雖割股·廬墓·弊車·羸馬, 亦爲人耳. 善乎, 張子敬夫之言. 曰 爲己者無所爲而然者也. 此其語意之深切, 蓋有前賢所未發者. 學者以是而日自省焉, 則有以察乎善利之間, 而無毫釐之差矣.

"치국 평천하는 천자와 제후의 일로서 卿·大夫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관련된 바 없는데, 도리어 ≪대학≫을 가르침에 있어서 '명명덕어천하'를 예로 들어 말한 것은, 제자리에서 벗어난 생각이요, 분수를 벗어난 행위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를 어떻게 자신을 위한[爲己] 학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의 밝은 명[明命]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다 같이 얻은 것이며, 나만이 사사로이 얻은 게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의 마음은 막힘이 없이 드넓고 크게 공정하여, 천하의 어느 사람을 보든지 내 마음에 의당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지 않은 바 없고, 무슨 일을 보든지 내 직분상 마땅히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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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로 생각지 않음이 없다. 따라서 설령 비천한 신분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그 임금을 요순과 같은 聖君으로 만들고 그 백성을 요순의 백성과 같이 善民으로 만들 수 있다. 이 또한 제 분수 내의 일이며, 더욱이 ≪대학≫의 가르침은 천자의 원자·뭇 아들, 公·侯·卿·大夫·士의 맏아들, 그리고 나라의 준수한 인재를 위해서 베푸는 교육이다. 이들은 모두 장차 천하 국가를 다스릴 책임이 있는 자들로서 이를 사양할 수 없는 바에야 그들에게 이를 미리 가르쳐 함양케 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천하 국가의 다스림을 자신의 당연한 일로 생각하게 하여, 미리 그 근본을 바르게 잡고 본원을 맑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후세에 이르러 가르침과 배움이 밝지 못하여, 나라의 임금이요 부모인 군주의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마냥 목전의 일에 구차스럽게 급급하여 천하에 태평성대를 찾아보기 어렵고 혼란의 시대가 줄곧 이어져, 나라를 잃은 군왕과 집을 망치는 군주가 항상 줄을 잇고 있다. 이 또한 슬픈 일이다. 이를 강론하는 사람들이 이를 살펴보지 못한 채 도리어 성인의 법을 의심한다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인지? 배우는 사람은 천하의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 할 마땅한 일로 생각하여 이를 행하면 비록 갑병·전곡·변두·유사의 일일지라도 모두가 자신을 위하는[爲己] 학문이지만 세상의 명예를 구하고자 이를 행한다면, 설령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받드는 효성, 시묘 살이, 그리고 허름한 수레, 수척한 말을 탈지라도 그것은 결코 타인을 위하는[爲人] 데에 해당하는 행위들이다.20)

20) 問爲己爲人一條? 朱子曰 這須要自看. 如一日之間, 小事大事, 只道我合當做, 便如此做, 這便是無所爲. 如讀書, 只道自家合當如此讀, 合當如此理會. 身己纔說要人知, 便是有所爲. 如世上人纔讀書, 便安排這箇好做時文, 此又爲人之甚者. "爲己와 爲人 이 조목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스스로가 이를 살펴보아야 한다. 예컨대 하루 사이의 크고 작은 일 가운데 내의당 그와 같이 해야 할 일이라면 이는 곧 作爲가 없는 것이다. 예컨대 독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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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다, 張敬夫21)의 말이여. '爲己란 어떠한 목적도 위한 바 없이 당연한 바에 따라서 그처럼 행하는 것이다'22)라는 그의 말뜻은 깊으면서도 간절하다. 이는 옛 현인들도 일찍이 말하지 못했던 것이니만큼, 배우는 자가 이로써 날마다 스스로를 반성하면 善과 利의 사이를 잘 살피게 되어,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바 없을 것이다."

曰: 子謂正經, 蓋夫子之言, 而曾子述之, 其傳則曾子之意, 而門人記之, 何以知其然也?

자신이 마땅히 이와 같이 읽어야 할 일이라 생각하여 이와 같이 하는 것일 뿐이다. 만일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한다면 이는 作爲가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독서를 하면서 곧잘 時文을 지으려고 생각하는 것 또한 크나큰 爲人이라 하겠다." 如割股廬墓, 一是不忍其親之病; 一是不忍其親之死. 這都是爲己者, 若因要人知了去, 恁地便是爲人. <주자가 말하였다.>"또 일례를 들면 허벅지의 살을 베어 부모에게 드리고 廬墓를 치르는 것은 하나는 그 어버이의 병환을 안타깝게 여기는 효성의 마음이며, 하나는 그 어버이의 죽음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모두가 자신의 효성스런 마음을 다하는 데 있다. 만일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 이와 같이 한다면 이는 곧 남의 이목과 명예를 위한 일이다." 問割股事如何? 曰 割股, 固自不是. 若誠心爲之, 不求人知, 亦庶幾; 今有以此要譽者.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에게 드리는 일은 어떻습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허벅지 살을 베어 부모를 받드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만일 진실한 마음(효성)으로 할 뿐,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 또한 효도에 가까운 일이지만, 오늘날에는 이러한 일로써 명예를 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21) 張子, 名栻, 字敬夫, 號南軒, 廣漢人 乃朱子同志之友也. 장자의 이름은 栻, 자는 敬夫, 호는 南軒, 廣漢人이며 주자와 뜻을 함께한 벗이다.

22) 南軒此言, 擴前聖所未發, 而同於孟子性善養氣之功者歟! 南軒의 이 말은 前聖이 밝히지 못한 바를 확충한 것으로, 맹자의 性善·養氣說의 공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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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正經 辭約而理備, 言近而指遠, 非聖人不能及也. 然以其無他左驗, 且意其或出於古昔先民之言也, 故疑之而不敢質. 至於傳文, 或引曾子之言, 而又多與中庸·孟子者合, 則知其成於曾氏門人之手, 而子思以授孟子無疑也. 蓋中庸之所謂明善, 卽格物致知之功. 其曰誠身, 卽誠意正心修身之效也. 孟子之所謂知性者, 物格也. 盡心者, 知至也. 存心·養性·修身者, 誠意·正心·修身也. 其他 如謹獨之云·不慊之說·義利之分·常言之序, 亦無不脗合焉者. 故程子以爲孔氏之遺書, 學者之先務, 而論孟 猶處其次焉, 亦可見矣.

"선생의 말에 의하면, '正經(경1장)은 공자의 말씀인데 증자가 이를 전술하였고, 전10장은 증자의 뜻을 문인들이 기록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그와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경문 1장은 문장이 요약되어 있으면서도 이치가 모두 갖춰져 있고, 언어가 알기 쉬우면서도 그 뜻은 깊고 원대하다. 이는 성인이 아니고서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밖의 어떠한 傍證도 없으며, 또한 생각해보면 혹시 옛 선인의 말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 때문에 이를 의문으로 남겨둔 채 감히 이렇다 확정짓지 않으며, 전문 10장에서는 혹 증자의 말을 인용하였고, 또한 ≪중용≫·≪맹자≫의 내용과 일치되는 부분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는 증자 문인의 손에 의해서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자사가 맹자에게 전수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예를 들면 ≪중용≫에서 말하는 '明善'이란 이의 격물·치지의 공부이며, ≪중용≫의 '誠身'은 성의· 정심·수신의 공효이다. 그리고 ≪맹자≫에서 말하는 '知性'은 物格이며, '盡心'이란 知至이며,23) '存心·養性·修身'이란 성의·정심·수신을 말한다. 그밖

23) 朱子曰 知性者, 物格也. 物字 對性字. 盡心者, 知至也. 知字 對心字. 주자가 말하였다. "知性이란 物格이다. 物 자는 性 자와 對를 이루고 있으며, 盡心이란 知至이니 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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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謹獨 운운한 것과 不慊이라 하는 말, 그리고 義利의 분별과 항상 말하는 차례 또한 이와 일치되지 않은 것들이 없다. 이 때문에 ≪대학≫의 序論에서 '이는 공씨의 유서이니, 배우는 자가 먼저 힘써야 할 일이며, ≪논어≫ ·≪맹자≫는 오히려 그 다음에 있다'라는 정자의 말만 가지고서도 이 같은 뜻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曰: 程子之先是書而後論孟, 又且不及乎中庸, 何也? 曰: 是書垂世立敎之大典, 通爲天下後世而言者也. 論孟應機接物之微言, 或因一時一事而發者也. 是以是書之規模 雖大, 然其首尾該備而綱領可尋, 節目分明而工夫有序, 無非切於學者之日用. 論孟之爲人 雖切, 然而問者非一人, 記者非一手, 或先後淺深之無序, 或抑揚進退之不齊, 其間蓋有非初學日用之所及者. 此程子所以先是書後論孟, 蓋以其難易緩急言之, 而非以聖人之言 爲有優劣也. 至於中庸, 則又聖門傳授極致之言, 尤非後學之所易得而聞者. 故程子之敎, 未遽及之, 豈不又以爲論·孟旣通, 然後可以及此乎. 蓋不先乎大學, 無以提挈綱領而盡論孟之精微, 不參之論孟, 無以融貫會通而極中庸之歸趣. 然不會其極於中庸, 則又何以建立大本·經綸大經, 而讀天下之書·論天下之事哉. 以是觀之, 則務講學者, 固不可不急於四書, 而讀四書者 又不可不先於大學 亦已明矣. 今之敎者, 乃或棄此不務, 而反以他說先焉. 其不溺於虛空·流於功利, 而得罪於聖門者 幾希矣.

"정자는 이 책을 먼저 배우고 ≪논어≫·≪맹자≫를 그 다음에 한다고 말했을 뿐, 다시 ≪중용≫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자는 心 자와 對를 이루고 있다." 物理之極處無不到, 知性也; 吾心之所知無不盡, 盡心也. 주자가 말하였다. "物理之極處 無不到라 知性이며, 吾心之所知 無不盡은 盡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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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가르침을 세워 후세에 전하는 위대한 법전으로서 천하 후세를 모두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논어≫·≪맹자≫는 應機接物의 微言이라 하지만, 간혹 一時一事에 대해 말한 바 없지 않다. 물론 이 책의 규모는 크게는 평천하에 이르지만 처음과 끝이 모두 갖춰져 있고, 강령과 절목이 분명하며 공부의 차례 또한 질서 정연하므로, 배우는 자의 일상생활에 간절하지 않은 바 없다. ≪논어≫·≪맹자≫의 내용들이 사람을 위한 바 간절하지만 묻는 자가 한 사람이 아니며, 기록한 자 또한 한 사람이 아니다. 혹 선후·천심의 차례가 없거나, 아니면 억양·진퇴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처음 배우는 자로서의 일용사물에 미칠 바 아닌 부분 도 있다. 이 때문에 정자는 이 책을 먼저 하고 ≪논어≫·≪맹자≫를 뒤로 한 것이다. 이는 난이도와 완급 순으로 말한 것일 뿐, 성인의 말씀을 우열 지어 본 것은 아니다. ≪중용≫은 聖門 전수의 극치가 되는 말이므로, 후학으로서는 쉽게 얻어 들을 수 없기 때문에 정자의 가르침은 갑자기 이를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어쩌면 ≪논어≫·≪맹자≫를 통달한 뒤에 ≪중용≫에 미쳐 가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학≫을 먼저 읽지 않으면 강령을 알지 못하므로 ≪논어≫·≪맹자≫의 精微한 뜻을 다할 수 없으며, ≪논어≫·≪맹자≫를 참고하지 않으면 모든 것을 빠뜨림 없이 잘 갖추어 ≪중용≫의 귀치를 다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극치를 ≪중용≫에 융회시켜 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큰 근본[大本]을 세우고 큰 법[大經]을 經綸하며, 천하의 책을 읽고 천하의 일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이로 살펴보면 강학에 힘쓰는 자는 참으로 사서를 먼저 읽지 않을 수 없으며, 사서를 읽는 자 ≪대학≫을 먼저 읽지 않을 수 없다는 점 또한 명백하다. 오늘날 이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이를 버려두고 힘쓰지 않은 채 도리어 괴이쩍은 말들을 앞세우고 있다. 그와 같은 유들은 공허한 데에 빠지고 공리에 흘러 들어감으로써 聖門에 죄를 얻지 않을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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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文

傳1傳首章

或問: 一章而下 以至三章之半, 鄭本元在沒世不忘之下, 而程子乃以次於此謂知之至也之文, 子獨何以知其不然, 而遂以爲傳之首章也? 曰: 以經統傳, 以傳附經, 則其次第可知, 而二說之不然 審矣.

혹자가 물었다. "1장 이하로부터 3장의 절반 부분에 이르기까지는 鄭本에는 원래 沒世不忘 구절 아래에 있었는데, 정자는 도리어 이를 此謂知之至也 구절의 뒤에 이어 썼습니다. 그런데 선생만은 어떻게 해서 그렇지 않다는 점을 알고서 마침내 전문의 첫 장으로 삼게 되었는지?" "경문으로써 전문을 총괄해 보고 전문을 경문에 붙여 보면 그 차례를 알 수 있으며, 두 사람의 말이 부당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曰: 然則其曰克明德者, 何也? 曰: 此言文王能明其德也. 蓋人莫不知德之當明而欲明之, 然氣稟拘之於前, 物欲蔽之於後. 是以 雖欲明之而有不克也. 文王之心, 渾然天理, 亦無待於克之而自明矣. 然猶云爾者, 亦見其獨能明之而他人不能, 又以見夫未能明者之不可不致其克之之功也.

"그렇다면 克明德이란 무엇입니까?" "이는 문왕이 그 덕을 잘 밝혔음을 말하고 있다. 사람마다 그 덕을 밝혀야 할 줄 알고서 이를 밝히고자 원하지 않는 이가 없다. 그러나 선천적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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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품에 얽매이고 후천적으로는 물욕에 가린 까닭에 아무리 이를 밝히려고 해도 밝힐 수 없다. 그러나 문왕의 마음은 모두가 천리이기에 또한 힘쓸 것조차 없이 스스로 밝아졌다. 그러나 이처럼 말한 것은 문왕만이 홀로 그처럼 잘 밝혔고, 타인은 이를 능하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며, 이를 잘 밝히지 못한 자 또한 이를 능하지 못함을 나타낸 것이며, 이를 잘 밝히지 못한 자 또한 이를 잘 밝힐 수 있는 공부를 지극히 다하지 않을 수 없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1)

1) 問克明德, 克能也; 或問中, 却作能致其克之之功, 又似克治之克, 如何? 朱子曰 此克字, 雖訓能字. 然克字重, 是他人不能, 而文王獨能之. 若只作能明德, 語意便都弱了. 凡字有文義一般而聲響頓異, 如云克宅心·克明德之類, 可見. "克明德의 克은 能함이라 하였는데, ≪혹문≫에서는 도리어 그 克한 공부를 다했다하여 또한 克治의 克 자와 같이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주자가 말하였다. "이 克 자는 비록 能 자로 訓詁를 붙이지만 克 자의 비중이 보다 크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능하지 못했지만 문왕만이 홀로 능했다는 뜻이다. 만일 단순한 能明德이라는 말로 본다면 그것은 의미가 약화된 것이다. 모든 글자에는 일반적인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자음에서 풍겨 나오는 의미는 전혀 다르다. 예컨대 '克宅心', '克明德'의 유에서 그 다른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人所以不能明其德者, 何哉? 盖氣偏而失之太剛, 則有所不克; 氣偏而失之太柔, 則有所不克; 聲色之欲 蔽之, 則有所不克; 貨利之欲 蔽之, 則有所不克. 不獨此耳. 凡有一毫之偏蔽, 得以害之, 則有所不克. 唯文王無氣稟物欲之偏蔽, 故能有以勝之而無疑 <주자가 말하였다.>"사람이 능히 그 덕을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기운이 편벽되어지나치게 강하면 이를 이기지 못하게 되고, 기운이 편벽되어 지나치게 유하면 이를 이기지 못하게 되며, 성색의 욕구에 가리면 이를 이기지 못하게 되며, 貨利의 욕구에 가리면 이를 이기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호라도 편벽됨과 가려짐이 이를 해치면 이기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문왕만이 기품과 물욕의 偏蔽가 없었던 까닭에 능히 이를 극복하여 의심한 바 없었다." 西山眞氏曰 明德, 人所同有, 其所以爲聖愚之分者, 但以克明與不能明之異爾. 常人所以不能明者, 一則以氣稟昏弱之故, 二則以物欲蔽塞之故. 雖是蔽塞之餘, 若一旦悔悟, 欲自明其德, 亦無不可者. 患在自暴自棄而不肯爲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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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顧諟天之明命 何也? 曰: 人受天地之中以生, 故人之明德 非他也. 卽天之所以命我而至善之所存也. 是其全體大用, 蓋無時而不發見於日用之間, 人惟不察於此. 是以汩於人欲而不知所以自明, 常目在之, 而眞若見其參於前·倚於衡也, 則成性存存而道義出矣.

"顧諟天之明命이란?"

"사람은 천지의 中道를 받아 태어나므로 사람이 받아온 명덕이란 다름이 아닌, 곧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준 지극한 선이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이에 그 全體 大用2)이 일용사물에 나타나지 못한 것은 인욕에 골몰하여 스스로 밝힐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밝은 명을 눈여겨보되 마치 눈앞에 있는 듯이, 수레에 탈 때는 멍에에 달려 있는 듯이3) 생각하여

서산 진씨가 말하였다. "명덕이란 인간의 고유한 바이다. 그 聖·愚의 구분이 결정지어지는 것은 克明과 不能明의 차이 때문이다. 보통사람이 이를 밝히지 못한 이유는 첫째 기품이 혼약하기 때문이며, 둘째는 물욕에 가리기 때문이다. 蔽塞에 의해 이처럼 된 것이라 하지만 만일 하루아침에 후회하고 깨우치고서 그 덕을 밝히려고 한다면 불가능도 없다. 그러나 자포자기로써 이를 기꺼이 하지 않는 것이 걱정이다."

2) 問如何是體? 如何是用? 朱子曰 體與用不相離. 且如身是體, 要起行去便是用. 赤子匍匐將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只此一端, 體用便可見. 如喜怒哀樂, 是用; 所以喜怒哀樂, 是體 "어떤 것이 본체이며 어떤 것이 작용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본체와 작용은 서로 떠날 수 없다. 또한 몸이 본체라면, 일어나 행하는 것이 작용이다.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는 것을 보고서 모두 두려워하고 가엾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니, 여기에서 하나의 체용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희로애락은 작용이며 희로애락이 나오게 되는 所以는 본체이다."

3) 若見其參前倚衡, 此豈有物可見? 但凡人不知省察, 常行日用, 每與是德相忘, 亦不自知其有是也. 今所謂顧諟者, 只是心裏常常存著此理. 一出言一行事, 皆必有當然之則, 不可失也. 初豈實有一物之可見其形象耶? <주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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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본성처럼 보존된 이치를 잘 보존하여 도의가 나오게 될 것이다(≪주역·繫辭 上≫)."4)

曰: 克明峻德 何也? 曰: 言堯能明其大德也. "克明峻德이란?"

"요임금이 그 큰 덕을 잘 밝혔음을 말한다."5)

"參前倚衡이란 어찌 하나의 물체를 볼 수 있는 것일까? 다만 범인들이 성찰할 줄 모르기에 항상 행하는 일상생활에서 으레 그 덕을 잊어버리기에 또한 그 스스로가 이러한 것이 있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顧諟란 다만 그 마음속에 항상 이러한 이치를 보존하고서 말할 때나 일할 때에 모두 반드시 당연한 법칙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 이는 애당초 형상으로 볼 수 있는 물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4) 問成性存存道義出矣, 何如? 曰 天之所命, 我之所得於己, 只是一箇道理. 人只要存得這些在這裏. 才存得在這裏, 則事君必會忠, 事親必會孝; 見孺子入井, 則怵惕之心, 便發; 見穿窬之類, 則羞惡之心, 便發; 合恭敬處, 便自然會恭敬; 合辭遜處, 便自然會辭遜. 須要常存得此心, 則便見得此性發出底, 都是道理. 若不存得, 這些待做出, 那箇會合道理? "成性存存, 而道義出矣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하늘에서 명한 것과 나의 몸에 얻은 것은 하나의 도리일 뿐이다. 사람은 반드시 이를 보존하여 여기에 두어야 한다. 이를 보존하여 여기에 두면 임금을 섬기는 데에 반드시 충성을,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반드시 효도를 알게 되고,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는 것을 보고서 가엾은 마음이, 도적의 무리를 보고서 부끄러운 마음이 나오며, 공경해야 할 곳에 자연히 공경을, 사양해야 할 곳에 자연히 사양을 하게 된다. 항상 이러한 마음을 보존하면 곧 본성에서 유출되어 모두가 도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이를 보존하지 못하면 어떻게 그와 같은 도리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5) 朱子曰 人之爲德, 未嘗不明. 而其明之爲體, 亦未嘗不大. 但人自有以昏之. 是以旣不能明, 而又自陷於一物之小. 唯堯爲能明其大德, 而無昏暗狹小之累. 是則所謂止於至善. 주자가 말하였다. "사람의 덕이란 일찍이 밝지 않은 바 없으며, 그 밝음의 본체 또한 일찍이 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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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是三者 固皆自明之事也. 然其言之亦有序乎? 曰: 康誥通言明德而已. 太甲則明天之未始不爲人, 而人之未始不爲天也. 帝典則專言成德之事, 而極其大焉. 其言之淺深 亦略有序矣.

"이 세 가지는 모두 다 스스로가 밝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 가운데에도 차례가 있는 것입니까?" "≪강고≫는 명덕을 전체적으로 말한 것이며, ≪태갑≫은 하늘이란 애당초 사람을 위하지 않은 바 없고 사람 또한 하늘을 위하지 않은 바 없음을6) 밝힌 것이며, ≪제전≫은 오로지 成德者의 일을 들어서 이에 명덕의 지대함을 지극히 말하였다. 위의 말에는 또한 천심의 차이에 따라서 대략 차례가 있다."

傳2傳二章

或問: 盤之有銘, 何也?

않은 바 없다. 다만 사람 스스로가 이를 어둡게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밝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 하나의 작은 물욕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오직 요임금만은 그 큰 덕을 능히 밝혀 혼매하거나 협소한 누가 없었다. 이것이 이른바 止於至善이다."

6) 問天未始不爲人, 而人未始不爲天, 何也? 朱子曰 只是言人性本無不善, 而其日用之間, 莫不有當然之則, 所謂天理也. 人若每事做得是, 則便合天理. 天人本一理, 若理會得此意, 則天何嘗大? 人何嘗小也? "하늘은 애당초 사람을 위하지 않은 바 없고 사람은 애당초 하늘을 위하지 않은 바 없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이는 다만 인간의 본성이란 본래 선하지 않은 바 없으며, 일상생활에 당연의 법칙이 있지 않은 바 없다. 이른바 천리이다. 사람이 매사를 이와 같이 한다면 천리에 부합될 수 있다. 하늘과 인간은 본래 한 이치이다. 만일 이러한 뜻을 이해하면 어찌 하늘을 크다 하고 인간을 작다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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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盤者, 常用之器. 銘者, 自警之辭也. 古之聖賢, 兢兢業業, 固無時而不戒謹恐懼, 然猶恐其有所怠忽而或忘之也. 是以, 於其常用之器, 各因其事而刻銘, 以致戒焉. 欲其常接乎目, 每警乎心, 而不至於忽忘也.

혹자가 물었다. "욕조[盤]에 명문을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욕조란 항상 사용하는 그릇이며, 명문이란 스스로를 경계하는 글이다. 옛 성현들은 조심조심하여 어느 때이든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처럼 하는 데에도 오히려 게으르다거나 가벼이 여기는 바 있어 혹 이를 잊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항상 사용하는 그릇에 각기 그에 따른 일과 관련한 명을 새겨 경계의 마음을 다하였다. 이는 항상 그것을 눈여겨봄으로써 매양 마음을 경계하여 경홀히 여긴다거나 잊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曰: 然則沐浴之盤, 而其所刻之辭如此, 何也? 曰: 人之有是德, 猶其有是身也. 德之本明, 猶其身之本潔也. 德之明而利欲昏之, 猶身之潔而塵垢污之也. 一旦存養省察之功, 眞有以去其前日利欲之昏而日新焉, 則亦猶其疏瀹澡雪而有以去其前日塵垢之污也. 然旣新矣, 而所以新之之功, 不繼, 則利欲之交, 將復有如前日之昏. 猶旣潔矣, 而所以潔之之功 不繼, 則塵垢之集, 將復有如前日之污也. 故必因其已新, 而日日新之, 又日新之, 使其存養省察之功, 無少間斷, 則明德常明, 而不復爲利欲之昏, 亦如人之一日沐浴, 而日日沐浴, 又無日而不沐浴, 使其疏瀹澡雪之功, 無少間斷, 則身常潔淸, 而不復爲舊染之污也. 昔成湯所以反之而至於聖者, 正惟有得於此. 故稱其德者 有曰不邇聲色, 不殖貨利. 又曰以義制事, 以禮制心. 有曰從諫弗咈, 改過不吝. 又曰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此皆足以見其日新之實, 至於所謂聖敬日躋云者, 則其言愈約, 而意愈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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矣. 然本湯之所以得此, 又其學於伊尹而有發焉. 故伊尹自謂與湯咸有一德, 而於復政太甲之初, 復以終始惟一, 時乃日新, 爲丁寧之戒. 蓋於是時, 太甲 方且自怨自艾於桐, 處仁遷義而歸, 是亦所謂苟日新者, 故復推其嘗以告于湯者告之, 欲其日進乎此, 無所間斷, 而有以繼其烈祖之成德也. 其意亦深切矣. 其後 周之武王踐阼之初, 受師尚父丹書之戒 曰敬勝怠者 吉, 怠勝敬者 滅. 義勝欲者 從, 欲勝義者 凶, 退而於其几席·觴豆·刀劒·戶牖, 莫不銘焉. 蓋聞湯之風而興起者. 今其遺語 尙幸頗見於禮書, 願治之君·志學之士, 皆不可以莫之考也.

"그렇다면 목욕하는 욕조에 새긴 명문을 이와 같이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람에게 덕이 있음은 마치 이 몸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있으며, 덕이 본초로부터 밝음은 애당초 몸의 깨끗했던 것과 같으며, 밝은 덕이 이욕에 의해 어두워지는 것은 깨끗했던 몸이 티끌과 때에 묻어 더럽혀지는 것과 같다. 어느 날 아침, 존양과 성찰의 공부를 통하여 지난날 이욕의 혼미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나날이 새롭게 한다면, 이 또한 몸을 씻어 지난날 찌들었던 더러운 티끌과 때를 벗겨버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미 새롭게 씻었다 할지라도 이를 새로이 닦아가는 공부를 지속하지 않으면 다시 이욕에 가림으로써 머지않아 또 다시 지난날처럼 혼미에 빠지게 될 것이다. 이는 마치 몸을 깨끗이 씻었다 할지라도 깨끗이 씻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으면 더러운 때가 다시 엉겨붙어 또 다시 예전처럼 불결해지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반드시 이미 새로워진 그것으로 인하여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다시 나날이 새롭게 하여 존양·성찰의 공부를 끊임없이 계속해 나가면 명덕은 항상 밝게 빛남으로써 이욕에 의해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 또한 어느 하루 깨끗이 목욕하고서 이를 이어서 날마다 목욕하며 언제나 끊임없이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씻는 일이 끊이지 않으면 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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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깨끗하여 다시는 舊染에 더럽혀지지 않을 것이다. 탕임금이 자신을 반성하면서 닦아 나아가는 反之者로서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여기에서 얻은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탕임금의 덕을 기리는 자들은, '음악과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았고 재물과 이익을 불려 나가지 않았다[不邇聲色, 不殖貨利]'(≪서경·仲虺之誥≫)·'義로써 일을 제재하고, 禮로써 마음을 제재하였다[以義制事, 以禮制心]'(上同)·'간언을 거슬림 없이 받아들이고 허물을 고치는 데 인색치 않았다[從諫弗咈, 改過不吝]'· '완벽한 사람을 구하지 않고 자신은 언제나 미치지 못한 듯이 살폈다[與人不求備, 檢身若不及]'(上同·≪伊訓≫)라고 하니, 이 모두가 날로 새롭게 발돋움한 그의 실상을 찾아볼 수 있으며,1) 이른바 슬기로움과 공경의 덕이 날로 향상되었다[聖敬日躋]2)(≪시경·商頌, 長發≫)라는 말은 더욱 요약되면서도 그 뜻은 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탕임금이 이를 얻을 수 있었던 근본적인 것은 또한 이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윤은 스스로 '탕임금과 더불어 한결같은 덕을 가졌다[與湯咸有一德]'라고 말하였고, 태갑을 섬기던 초기에는 또 다시 '시종 한결같아야 이에 날로 새로워

질 수 있다[終始惟一 時乃日新]'(≪書經·商書, 咸有一德≫)라는 간절한 경계를

1) 朱子曰 成湯工夫, 全在敬字上. 看來大段是箇修飭底人. 故當時人說他做工夫處, 如云以義以禮不邇不殖等, 可見日新之功. 或問中所以詳載, 非說道人不知, 亦欲學者經心耳. 주자가 말하였다. "탕임금의 공부는 모두 敬 자 내에 있으며, 그는 몸을 닦는 데 크게 힘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러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의 공부에 대해 말할 때, 義로써 ……하고, 예로써 ……하며, 聲色을 가까이 하지 않았고 재물을 불려 나가지 않았다는 따위의 말에서 그의 日新의 공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혹문≫은 이를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갖도록 권하려는 뜻이다."

2) 躋, 升也. 聖人能敬其德, 日愈升於高明也. 躋란 오름[升]이다. 성인이 그 덕을 공경하여 날로 더욱 고명한 데로 오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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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 있다. 그 당시 태갑은 桐 땅에서 스스로를 후회하고 스스로를 다스리면서 仁에 처하고 義로 옮겨 마침내 다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또한 '苟日新'을 실천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일찍이 탕임금에게 고한 말로써 태갑에게 다시 고한 것이다. 이는 태갑이 날로 이에 나아가 끊임없이 노력하여, 烈祖(湯)가 이룩한 덕을 계승해주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를 말한 것으로, 그의 마음 또한 깊고 간절하다고 하겠다. 그 후 周 武王이 왕위에 등극한 초기에 師尙父(太公)3)로부터 '공경이 게으름을 이기는 자는 길하고 게으름이 공경을 이기는 자는 멸망하고, 의리가 욕심을 이기는 자는 순종하고 욕심이 의리를 이기는 자는 흉하다'4)라는 ≪丹書≫의 경계를 받은 바 있다. 무왕은 그 후 물러나와 의자며 자리며 술잔이며 그릇이며 칼이며 문에다가 명문을 새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는 무왕이 탕임금의 風聲을 듣고 흥기한 자라 말할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무왕의 遺語를 다행히 禮書에서 찾아볼 수 있다.5) 천하를 다스리기를 원하는 임금과 학문에

3) 尙父, 太公望, 呂氏, 詳見孟子離婁上篇. 尙父는 太公望이니 呂氏이다. 이는 ≪맹자·이루 상≫에 자세히 보인다.

4) 問從字意? 朱子曰 從, 順也. 敬便立起, 怠便放倒. 以理從事, 是義; 不以理從事, 便是欲. 這處敬與義, 是箇體用. 從 자의 의의는 무엇인가? 주자가 말하였다. "從이란 순종함이다. 敬으로 하면 서게 되고, 게으르면 거꾸러지게 된다. 이치에 따라 일하는 것이 義이며, 이치에 따라 하지 않는 것이 욕심이다. 이곳의 敬과 義는 하나의 體用이다."

5) 張氏存中曰 大戴禮武王踐阼篇, 武王踐阼三日, 召師尙父而問焉, 曰 黃帝顓帝之道, 可得而見與? 曰 在丹書. 王欲聞之, 則齊矣. 王 齊三日, 師尙父 奉書而入, 道書之言, 曰 敬勝怠者, 吉; 怠勝敬者, 滅. 義勝欲者, 從; 欲勝義者, 凶. 凡事不强則枉, 弗敬則不正. 枉者滅廢, 敬者萬世. 王 聞書之言, 惕若恐懼而爲戒. 書於席四端爲銘焉. 銘曰 安樂必敬, 無行可悔. 一反一側, 亦不可不志. 殷監不遠, 視爾所代. 鑑銘曰 見爾前, 慮爾後. 盤銘曰 與其溺於人也, 寧溺於淵. 溺於淵, 猶可游也; 溺於人, 不可捄也. 楹銘曰 毋曰胡殘? 其禍將然. 毋曰胡害? 其禍將大. 毋曰胡傷? 其禍將長. 牖銘曰 隨天之時, 以地之財, 敬祀皇天, 敬以先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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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을 둔 선비라면 모두 이를 고찰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曰: 此言新民, 其引此, 何也? 曰: 此自其本而言之. 蓋以是爲自新之至, 而新民之端也.

"이는 신민을 말한 것인데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신민의 근본적인 입장을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스스로를

劒銘曰 帶之以爲服, 動必行德. 行德則興, 倍德則崩. 倍與背同. 銘凡十有四, 今摘其辭義之易知者于此. 장씨 존중이 말하였다. "≪대대례·무왕천조≫편에 의하면, 무왕이 즉위한 지 3일 만에 師尙父를 불러 물었다. '황제·顓帝의 도를 들려줄 수 있겠는가?' '이는 ≪단서≫에 있습니다. 만일 왕이 이를 듣고자 한다면 재계해야 할 것입니다.' 무왕이 3일 동안 재계를 하자, 사상보는 책을 받들고 들어와 이 책의 말을 들어 말하였다. '敬이 게으름을 이긴 자는 길하고, 게으름이 경을 이긴 자는 멸망한다. 의리가 욕심을 이긴 자는 따르고, 욕심이 의리를 이긴 자는 흉하다. 범사에 강하지 못하면 굽히게 되고, 공경하지 않으면 부정하게 된다. 부정한 자는 멸망과 폐위를 당하고, 경한 자는 만세의 영화를 누릴 수 있다.' 무왕은 이 책에 쓰인 글을 듣고서 두려워하여 경계로 생각하여, 앉은 자리의 네 모서리에 명을 썼다. 그 銘은 '안락할지라도 반드시 공경하고 후회하는 일을 행함이 없도록 하라. 한 번 돌아서고 한 번 몸을 기울 적에도 이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殷나라의 거울은 멀리 있지 않다. 그대가 대신한 바를 보라'라고 하였으며, 鑑銘에 이르기를 '너의 앞을 보고서 너의 뒤를 생각하라'라고 하였으며, 盤銘에 이르기를 '사람에게 빠지기보다는 차라리 연못에 빠지는 것이 낫다. 연못에 빠지면 헤엄쳐 나올 수 있지만, 사람에게 빠지면 구제할 길이 없다' 라고 하였으며, 楹銘에 이르기를 '어찌 잔혹한 일이랴?라고 말하지 말라, 그 화는 장차 불타듯 할 것이다. 어찌 해가 있으리오?라고 말하지 말라, 그 화는 장차 크게 될 것이다. 어찌 상함이 있으랴?라고 말하지 말라, 그 화는 장차 커나갈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牖銘에서는 '하늘의 계절에 따라서, 땅의 재물로써 경건히 황천에 제사 지내고, 경건히 계절을 앞서 맞는다'라고 하였으며, 劒銘에서는 '띠를 두르고서 옷을 입으며, 움직임에 반드시 덕을 행하니, 덕을 행하면 흥성하게 된다' 라고 하였다. 무왕의 명에는 14편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쉽게 알 수 있는 문장만을 발췌하여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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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하는[自新] 지극함이요, 신민의 실마리가 되는 바이다."

曰: 康誥之言作新民, 何也? 曰: 武王之封康叔也. 以商之餘民, 染紂汚俗, 而失其本心也. 故作康誥之書而告之, 以此欲其有以鼓舞而作興之, 使之振奮踴躍, 以去其惡而遷於善, 舍其舊而進乎新也. 然此豈聲色號令之所及哉. 亦自新而已矣.

"≪강고≫에서 '作新民'이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무왕이 康叔에게 나라를 봉하여 줄 때 상나라의 일부 백성들이 紂의 옛 풍속에 오염되어 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강고≫라는 글을 지어 이로써 그에게 고해 준 것이다. 이는 그들을 고무하고 일으켜 세워 그들로 하여금 분발, 고무케 하여 악을 버리고 선으로 옮겨가며,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데로 나아가도록 함이다. 그러나 이는 어찌 노기 띤 큰소리와 붉으 락푸르락 하는 얼굴, 그리고 호령으로 미칠 바이겠는가. 이 또한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曰: 孔氏小序以康誥爲成王周公之書, 而子以武王言之, 何也? 曰: 此 五峯胡氏之說也. 蓋嘗因而考之, 其曰朕弟寡兄云者, 皆爲武王之自言, 乃得事理之實, 而其他証亦多, 小序之言 不足深信, 於此可見. 然非此書大義所關, 故不暇於致詳, 當別爲 讀書者言之耳.

"공씨의 ≪小序≫에서는 ≪강고≫는 성왕·주공이 지은 글이라 하였는데, 선생은 이를 무왕으로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오봉 호씨의 말이다. 일찍이 그의 말로 인하여 고찰해 보면 그 글에 '朕弟·寡兄' 운운한 것은 모두 무왕 스스로의 말로 간주하여야 사실의 실상을 바로 안 것이며, 기타 증거 또한 많이 있다. ≪소서≫의 말들은 크게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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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에 관계되는 바 아니므로 굳이 자세히 논할 게 없고, 별도의 기회를 마련하여 독서하는 자를 위해서 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曰: 詩之言周雖舊邦 其命維新, 何也? 曰: 言周之有邦, 自后稷以來千有餘年, 至於文王, 聖德日新, 而民亦丕變. 故天命之以有天下, 是其邦雖舊, 而命則新也. 蓋民之視效 在君, 而天之視聽在民. 君德旣新, 則民德必新. 民德旣新, 則天命之新, 亦不旋日矣.

"≪시경≫의 '周雖……維新'이란?" "주나라가 나라를 소유한 시대는 후직 이후로부터 천여 년을 지나 문왕에 이르러서야 슬기로운 덕이 날로 새로워 백성 또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하늘은 그를 명하여 천하를 소유하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그 나라가 제후국으로서 오랫동안 내려왔지만 천명이 새롭다고 함이다. 백성들이 우러러보고 본받음은 임금에게 있고, 하늘이 보고 들음은 백성에게 달려 있다. 따라서 임금의 덕이 새로우면 백성의 덕이 반드시 새롭게 되고, 백성의 덕이 새로우면 천명의 새로움 또한 곧 강림하게 된다."

曰: 所謂君子無所不用其極者, 何也? 曰: 此 結上文詩書之意也. 蓋盤銘, 言自新也. 康誥, 言新民也. 文王之詩, 自新新民之極也. 故曰君子無所不用其極, 極卽至善之云也. 用其極者, 求其止於是而已矣.

"이른바 君子……其極이란?" "이는 위에서 인용한 ≪시경≫·≪서경≫의 뜻을 끝맺고 있다. ≪반명≫ 에서는 自新을, ≪강고≫에서는 新民을, ≪문왕≫에서는 自新·新民의 극치를 말하고 있다. 이를 이어 말했기 때문에 '君子無所不用其極'이라 하니, 極이란 곧 지선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極으로 하고자 한다'라는 것은 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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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그치기를 추구하는 데 있을 뿐이다."6)

傳3傳三章

或問: 此引玄鳥之詩, 何也? 曰: 此以民之止於邦畿, 而明物之各有所止也.

혹자가 물었다. "여기에서 ≪현조편≫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사람이란 수도의 근교 경기지방에 거주하여야[그치다] 한다는 것으로, 사물마다 각기 그칠 곳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曰: 引緜蠻之詩, 而系以孔子之言, 孔子 何以有是言也? 曰: 此夫子說詩之辭也. 蓋曰鳥於其欲止之時, 猶知其當止之處, 豈可人爲萬物之靈, 而反不如鳥之能知所止而止之乎. 其所以發明人當知止之義, 亦深切矣.

"≪면만편≫을 인용한 뒤에 공자의 말씀을 이어 쓰고 있는데, 공자는 어떻게 해서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이는 공자가 ≪시경≫을 해설한 글귀이다. 그것은 새가 날다가 앉고자[그치다] 할 때 한낱 새로서도 오히려 마땅히 앉아야 할 곳을 아는데, 하물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도리어 그쳐야 할 곳을 알아 그치는 새만

6) 朱子曰 觀上文三引詩書, 而此以無所二字, 總而結之, 則於自新新民, 皆欲用其極可知矣. 주자가 말하였다. "위 문장에서 세 차례 ≪시≫·≪서≫를 인용한 뜻을 살펴보면 이는 無所 두 글자로 모두 끝맺고 있다. 이는 自新·新民에 모두 그 極을 쓰고자 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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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 못할 수야! 이는 사람이란 마땅히 그칠 곳을 알아야 한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그 뜻 또한 깊고 간절하다."

曰: 引文王之詩, 而繼以君臣父子·與國人交之所止, 何也? 曰: 此因聖人之止, 以明至善之所在也. 蓋天生烝民, 有物有則. 是以萬物·庶事, 莫不各有當止之所. 但所居之位 不同, 則所止之善 不一. 故爲人君, 則其所當止者, 在於仁. 爲人臣, 則其所當止者, 在於敬. 爲人子, 則其所當止者, 在於孝. 爲人父, 則其所當止者, 在於慈. 與國人交, 則其所當止者, 在於信. 是皆天理人倫之極致, 發於人心之不容已者, 而文王之所以爲法於天下·可傳於後世者, 亦不能加毫末於是焉. 但衆人類爲氣稟物欲之所昏, 故不能常敬, 而失其所止. 唯聖人之心, 表裏洞然, 無有一毫之蔽. 故連續光明, 自無不敬, 而所止者 莫非至善, 不待知所止而後得所止也. 故傳引此詩, 而歷陳所止之實, 使天下後世, 得以取法焉. 學者於此 誠有以見其發於本心之不容已者, 而緝熙之, 使其連續光明, 無少間斷, 則其敬止之功, 是亦文王而已矣. 詩所謂上天之載, 無聲無臭, 儀刑文王, 萬邦作孚, 正此意也.

"≪문왕편≫을 인용하면서 군신·부자·사람과의 사귐에 있어서의 그쳐야 할 바를 이어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는 성인의 그침[止]으로 인하여 지선이 있는 곳을 밝히고 있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리심에, 물건이 있으면 그에 따른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만물과 모든 일에는 각기 그쳐야 할 곳이 없지 않다. 다만 거주한 지위가 각기 다름에 따라서 그쳐야 할 최선 또한 한 가지가 아니다. 때문에 임금이 되어서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어짊에, 신하가 되어서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공경에, 자식이 되어서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효도에, 부모가 되어서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자애로움에, 사람과의 사귐에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은 미더움에 있다. 이는 모두 천리 인륜의 극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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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 그만둘 수 없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타난 것들이다. 문왕이 천하에 법이 되고 후세에 전한 바 또한 이에 더할 수 없다. 다만 뭇 사람은 기품과 물욕에 어두워져 있고, 가린 바 많은 까닭에 항상 공경하지 못하고 그쳐야 할 곳을 잃게 된다. 그러나 성인의 마음은 안팎이 모두 밝아서 조금이라도가린 바 없으므로 광명이 끊임없이 빛나고 저절로 敬으로 하지 않은 바 없으면, 그치는 것마다 지극한 선이 아닌 게 없다. 이는 그쳐야 할 곳을 알고 난 뒤에 그칠 곳을 얻어 나가는 强作의 공부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자연의 경지이다.1) 이 때문에 傳文에서는 이 시를 인용하고 지극한 선에 그친 그 실상을 역력히 들어 말하여 천하 후세인으로 하여금 이를 본받게 한 것이다. 배우는 자가 여기에서 그만둘 수 없는 본심에서 우러나오는 양심을 보고서 줄곧 이를 이어서 밝혀 광명이 지속되고, 조금이라도 끊임이 없으면 敬止의 공효 또한 문왕과 같을 것이다. ≪시경≫에서 말한 '하늘이치란 소리도 냄새도 없지만 문왕을 본받으면 온 누리에 미더움을 얻으리'라는 문장이 바로 이 뜻이다."

曰: 子之說詩, 旣以敬止之止, 爲語助之辭, 而於此書, 又以爲所止之義, 何也? 曰: 古人引詩斷章, 或姑借其辭以明己意, 未必皆取本文之義也.

"≪시경≫에 대한 선생의 주석에서는 앞서 '敬止'의 止 자를 어조사로 해석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또 달리 '所止'의 뜻으로 해석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 新安陳氏曰 學者必先知所止而後, 方得所止. 聖人安於所止, 則不待先知而後得也.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학자는 반드시 먼저 그칠 바를 안 뒤에 바야흐로 그칠 바를 얻을 수 있다. 성인은 그칠 바에 편안하니, 이는 먼저 알고 뒤에 얻음을 기다릴 것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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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들은 시를 인용하면서 斷章取義를 하였고, 간혹 그 문장을 빌어 다가 자신의 뜻을 밝혔던 것이기에 굳이 본문의 뜻만을 취한 것은 아니다."

曰: 五者之目, 詞約而義該矣. 子之說 乃復有所謂究其精微之蘊, 而推類以通之者, 何其言之衍而不切耶? 曰: 擧其德之要而總名之, 則一言足矣. 論其所以爲是一言者, 則其始終本末, 豈一言之所能盡哉. 得其名而不得其所以名, 則仁或流於姑息, 敬或墮於阿諛, 孝或陷父, 而慈或敗子, 且其爲信 亦未必不爲尾生白公之爲也. 又況傳之所陳, 姑以見物各有止之凡例, 其於大倫之目 猶且闕其二焉. 苟不推類以通之, 則亦何以盡天下之理哉?

"이 다섯 가지 조목은 말이 간략하면서도 뜻이 고루 갖추어져 있는데, 선생은 이에 또 다시 '그 심오하고 정미한 부분을 궁구하여 이를 유추·통달하여야 한다'라고 하니, 왜 간단하게 요약하여 말하지 않고 그처럼 너저분하게 벌여 나가는 것입니까?" "덕의 요체를 들어 총괄적으로 이름한다면 말 한마디2)로서 충분하다. 하지만 이 한마디 말의 所以가 되는 바를 논한다면 그 시종·본말을 어떻게 말 한마디로 다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면 그 이름만을 가지고서 그 이름이 붙여지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어짊은 혹 姑息으로 흘러가고, 공경은 혹 阿諛로 떨어지고, 효도는 혹 부모를 죄악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하고, 자애로움은 혹 자식을 버리게 만들고, 그 믿음 또한 尾生과 白公의 행위를 다시 만들어내지 않을 턱이 없을 것이다. 더더욱 전문에서 서술한 바는 모든 사물에 각기 그쳐야 할 곳이 있다는 범례를 나타내고 있을 뿐이다. 이 때문에 오륜의 조목 가운데에서도 오히려 그 부부와 長幼 두 가지가

2) 一言, 謂一字, 如仁字敬字之類. 一言이란 一字라는 말과 같다. 仁字, 敬字의 유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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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락되었다. 만일 이를 유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천하의 이치를 다할 수 있겠는가."

曰: 復引淇澳之詩, 何也? 曰: 上言止於至善之理 備矣. 然其所以求之之方, 與其得之之驗, 則未之及, 故又引此詩以發明之也. 夫如切如磋, 言其所以講於學者 已精, 而益求其精也. 如琢如磨, 言其所以修於身者 已密, 而益求其密也. 此其所以擇善固執, 日就月將, 而得止於至善之由也. 恂慄者, 嚴敬之存乎中也. 威儀者, 輝光之著乎外也. 此其所以睟面盎背, 施於四體, 而爲止於至善之驗也. 盛德至善 民不能忘, 蓋人心之所同然, 聖人旣先得之, 而其充盛宣著 又如此, 是以民皆仰之而不能忘也. 盛德, 以身之所得而言也. 至善, 以理之所極而言也. 切磋琢磨, 求其止於是而已矣.

"뒤이어 다시 ≪기욱편≫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위에서 止至善의 이치를 완벽하게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를 추구하는 방법과 이를 얻은 뒤에 얻어진 효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기에 또 다시 이 시편을 인용하여 이를 밝혔다. '여절여차'는 학문의 강학을 이미 정밀하게 하였지만 더욱더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며. '여탁여마'는 몸을 이미 정밀하게 닦았지만 더욱더 정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擇善固執3)으로 일취월장하여 지지선을 얻어 가는4) 그 유래를 말하고 있다. '恂慄'

3) 擇善, 卽講學之事; 固執, 卽修身之事. 택선은 강학의 일이며, 고집은 수신의 일이다.

4) 朱子曰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 旣學而猶慮其未至, 則復講習討論以求之. 猶治骨角者, 旣切而復磋之. 切, 是切得一箇璞, 在這裏, 似乎可矣, 又磋之, 使至於滑澤, 這是治骨角者之至善也. 旣修而又慮其未至, 則又省察克治以終之. 猶治玉石者, 旣琢而復磨之. 琢, 是琢得一箇璞, 在這裏, 似乎得矣, 又磨之, 使至於精細. 這是治玉石者之至善也. 取此以喻君子之止於至善. 旣格物以求知所止矣, 又日用力以求得其所止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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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내면의 嚴敬이며, '威儀'란 겉으로 나타나는 광명이니 이는 온몸에 성대하게 빛나는 지지선의 증험이다. '盛德至善 民不能忘'이란 성인이 사람의 다 같은 마음을 먼저 다하여 안으로 충만 성대하고 밖으로 나타난 바 또한 이와 같은 까닭에 백성은 그를 우러러 잊지 못함이다. 성덕이란 몸소 얻은 것으로 말하며, 지선이란 이치의 지극한 바를 말한다. '절차탁마'란 바로 여기에 그치기를 구할 뿐이다."

曰: 切磋琢磨, 何以爲學問自修之別也? 曰: 骨角, 脉理可尋, 而切磋之功 易, 所謂始條理之事也. 玉石, 渾全堅確而琢磨之功 難, 所謂終條理之事也.

"'절차' '탁마'를 어떻게 하여 學問과 自修로 구별지은 것입니까?" "골각류란 결(맥락)을 찾을 수 있어, 끊고 가는 일이 다소 쉽기에 이른바'始條理'의 일이며, 옥석류란 덩어리로서 단단하여 쪼고 가는 일이 보다 어렵기에 이른바 '終條理'의 일5)에 해당된다."

주자가 말하였다. "如切如磋者, 道學也. 如琢如磨者, 自修也는 이미 배우고서도 오히려 지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강습하고 토론하여 추구함이다. 이는 마치 골각을 다스리는 사람이 이미 끊고서 다시 정밀하게 가는 것과 같다. 切이란 뼈다귀를 끊는 것이며, 이를 또 다시 갈아서 윤을 내는 것이다. 이는 골각을 다스리는 이의 지선이다. 이미 닦고 또한 그 이르지 못할까를 염려하여 省察과 克治로써 이를 끝맺는다. 이는 마치 옥석을 다스리는 자가 이미 쪼아내고 다시 가는 것과 같다. 琢이란 옥덩이를 쪼는 것과 같다. 또한 이를 갈아 정밀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옥석을 다스리는 이의 지선이다. 이를 취하여 군자의 지어지선을 비유한 것이다. 앞서 격물로써 그쳐야 할 바를 알고자 하였고, 또한 날로 힘을 써 그쳐야 할 바를 얻고자 한 것이다."

5) 問切磋是始條理, 琢磨是終條理. 終條理, 較密否? 朱子曰 始終條理都要密, 講貫而益講貫, 修飭而益修飭. "절차는 시조리이며 탁마는 종조리이니, 종조리는 비교적 정밀한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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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引烈文之詩 而言前王之沒世 不忘, 何也? 曰: 賢其賢者, 聞而知之, 仰其德業之盛也. 親其親者, 子孫保之, 思其覆育之恩也. 樂其樂者, 含哺鼓腹, 而安其樂也. 利其利者, 耕田鑿井, 而享其利也. 此皆先王盛德至善之餘澤, 故雖已沒世而人猶思之, 愈久而不能忘也. 上文之引淇澳, 以明明德之得所止言之而發新民之端也. 此引烈文, 以新民之得所止言之, 而著明明德之效也.

"≪열문편≫을 인용하여, '선왕이 세상을 떠났지만 잊지 못한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賢其賢'이란 직접 보지 못하였지만 전해 듣고 이를 앎으로써 그의 성대한 덕업을 우러러보는 것이며, '親其親'이란 자손이 이를 보존하면서 하늘과 땅과 같이 덮어 주신 큰 은덕을 생각함이며,6) '樂其樂'이란 배불리 먹고 배를 두들기며 안락한 생활을 영위함이며, '利其利'란 밭갈이하며 농사짓고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며 후생의 이익을 향유함이니, 이 모두가 선왕의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의 餘澤이다. 이로써 그는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를 사모하여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를 잊지 못한 것이다. 위에서 ≪기욱편≫을 인용하여 명명덕의 지지선을 말함으로써 신

주자가 답하였다. "시, 종조리를 모두 정밀하게 해야 한다. 강학을 하되 더욱 강학하며, 수식하되 더욱 수식을 해야 하는 것이다." 問琢磨後, 更有恁箇赫喧, 何故爲終條理之事? 曰 那不是做工夫處, 是成就後氣象自如此. "탁마한 후에 다시 瑟·僩·赫·喧이 있는데 무슨 까닭에 이를 終條理라고 합니까?" <주자가 말하였다.>"그것은 노력의 공부가 아니다. 이는 성취한 후에 스스로 이와 같은 기상이 나타남이다."

6) 朱子曰 如孔子仰文武之德, 是賢其賢; 成康以後, 思其恩而保其基緖, 便是親其親. 주자가 말하였다. "예컨대 공자가 문왕과 무왕의 덕을 우러러보는 것은 賢其賢이며, 성왕 강왕 이후에 문무의 은혜를 생각하여 그 기업을 보존하는 것은 親其親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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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의 실마리를 열어주었고, 여기에서는 ≪열문편≫을 인용하여 신민의 지지선을 말하여 명명덕의 공효를 밝힌 것이다."7)

曰: 淇澳烈文二節, 鄭本, 元在誠意章後, 而程子置之卒章之中, 子獨何以知其不然, 而屬之此也? 曰: 二家所繫, 文意不屬, 故有不得而從者. 且以所謂道盛德至善沒世不忘者推之, 則知其當屬乎此也.

"≪기욱≫·≪열문≫ 2절은 鄭本에 의하면 원래 ≪성의장≫ 뒤에 있었다고 하며, 정자는 이를 맨 끝장(전10장) 가운데에 두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해서 유독 그렇지 않다고 하여 여기에 붙여 놓았는지?" "두 사람이 정리해 놓은 대로 보면 문장의 맥락이 연결되지 않기에 그들의 말을 따를 수 없다. 또한 '도성덕지선'과 '몰세불망' 구절로 미루어 보더라도 여기에 두어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傳4傳四章

或問: 聽訟一章, 鄭本, 元在止於信之後·正心修身之前, 程子 又進而寘之經文之下·此謂知之至也之上, 子不之從而寘之於此, 何也?

7) 朱子曰 淇澳, 言明明德而可以新民, 以見明明德之極功. 烈文, 因言非獨一時民不能忘, 而後世之民, 亦不能忘, 以見新民之極功. 주자가 말하였다. "≪기욱≫에서는 명명덕으로써 신민을 할 수 있음을 말하니, 이는 명명덕의 지극한 공효를 나타낸 것이며, ≪열문≫에서는 이어서 '한 시대의 백성이 잊지 못할 뿐 아니라, 후세의 백성까지도 잊지 못한다' 하여 신민의 지극한 공효를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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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以傳之結語考之, 則其爲釋本末之義, 可知矣. 以經之本末之文乘之, 則其當屬於此, 可見矣. 二家之說 有未安者, 故不得而從也.

혹자가 물었다. "≪청송≫ 1장은 鄭本에 의하면 원래 '止於信'의 뒤, 정심수신의 앞에다가 썼고, 정자 또한 경문의 아래, '此謂知之至也'의 위에 두었는데, 선생은 이를 따르지 않고 여기에 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傳文의 맺음말을 살펴보면, 이는 본말에 대한 해석임을 알 수 있으며, 경문의 본문과 대조해 보더라도 이는 마땅히 여기에 써야 할 것임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말이 타당하지 않기에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다."

曰: 然則聽訟無訟. 於明德新民之義, 何所當也? 曰: 聖人德盛仁熟所以自明者, 皆極天下之至善. 故能大有以畏服其民之心志, 而使之不敢盡其無實之辭. 是以雖其聽訟, 無以異於衆人, 而自無訟之可聽. 蓋己德旣明而民德自新, 則得其本之明效也. 或不能然, 而欲區區於分爭辯訟之間, 以求新民之效, 其亦末矣. 此傳者 釋經之意也.

"그렇다면 聽訟과 無訟이 명덕과 신민의 의의, 어느 곳에 해당되는지?" "성인의 덕이 성대하고 仁이 성숙되어 스스로 밝혔기에 모두 천하의 지선을 지극히 다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마음을 크게 경외, 굴복시킬 수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로 하여금 감히 진실성이 없는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이 때문에 그가 송사를 듣고 판결하는 것이야 뭇 사람들과 다를 바 없지만, 송사를 들을 것조차 없도록 하는 것은 그 자신의 덕이 이미 밝음으로써 백성의 덕까지도 스스로 새롭게 한 것이다. 이것이 곧 근본을 얻은 명백한 효험이다. 혹 그렇지 못하고 분쟁과 논쟁의 틈바구 니에서 자질구레한 일에 휩싸여 신민의 공효를 추구하고자 하는 것 또한 지엽적인 것이다.1) 이는 전문을 쓴 자가 경문을 해석한 본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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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然則其不論夫終始者, 何也? 曰: 古人釋經, 取其大略, 未必如是之屑屑也. 且此章之下, 有闕文焉, 又安知其非本有而并失之也邪?

"그렇다면 본말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종시에 대해 논급하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 사람들은 경문을 해석할 때 그 대체만을 취했을 뿐, 굳이 그처럼 자질구레하게 해석하지 않았다. 또한 이 장 아래에 빠진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 종시에 대해 본디 언급한 바 있었는데 아래 빠진 문장과 함께 모두 유실된 게 아닐는지!"

傳5傳五章

或問: 此謂知本, 其一爲聽訟章之結語, 則聞命矣, 其一鄭本元在經文之後·此謂知之至也之前, 而程子以爲衍文, 何也? 曰: 以其複出而他無所繫也.

혹자가 물었다. "'此謂知本'이라 하는 두 구절 가운데 그 하나는 ≪청송장≫의 맺음말로 썼다는 데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들은 바 있지만, 그밖의 하나는 鄭本에서는 원래 경문의 뒤, '此謂知之至也' 구절의 앞에 둔 데 반하여 정자는 이를 衍文이라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1) 陳氏曰 聽訟, 末也; 明德, 本也. 不能明己之德, 而專以智能決訟者, 抑末矣. 진씨가 말하였다. "청송은 지엽이며 명덕은 뿌리이다. 자신의 덕을 밝히지 못하고 오로지 지혜로써 송사를 처리하려는 것은 지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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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중복되어 나온 구절로서 다른 곳에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曰: 此謂知之至也, 鄭本元隨此謂知本, 繫於經文之後, 而下屬誠意之前, 程子則去其上句之複, 而附此句於聽訟知本之章, 以屬明德之上, 是必皆有說矣. 子獨何據以知其皆不盡然, 而有所取舍於其間邪? 曰: 此無以他求爲也. 考之經文, 初無再論. 知本·知至之云者, 則知屬之經後者之不然矣. 觀於聽訟之章, 旣以知本結之, 而其中間又無知至之說, 則知再結聽訟者之不然矣. 且其下文所屬明德之章, 自當爲傳文之首, 又安得以此而先之乎. 故愚於此, 皆有所不能無疑者. 獨程子上句之所刪, 鄭氏下文之所屬, 則以經傳之次求之, 而有合焉. 是以不得而異也.

"'此謂知之至也' 구절은 鄭本에서는 원래 '此謂知本' 구절에 뒤이어서 경문의 뒤에 붙여 아래로 ≪誠意章≫ 앞에 써놓았다. 그러나 정자가 중복된 위 구절을 버리고 이 구절은 ≪청송장≫의 ≪知本章≫ 구절에 이어서 명덕의 위에다가 써놓은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선생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하여 그들의 말이 모두 옳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되었으며, 그 사이에서 이처럼 취사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이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필요가 없다. 경문을 살펴보면 애당초 다시 논할 여지가 없는 문제들이다. '知本'이니 '知至'니 운운한 말들을 통해서경문의 뒤에 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청송장≫을 살펴보면 앞서 '知本'으로 맺음말을 삼았고, 또한 그 중간에 '知至'에 대한 말이 없는 것으로 볼지라도, 또 다시 ≪청송장≫의 맺음말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그 아래의 ≪명덕장≫은 마땅히 전문의 첫머리가 되어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이 구절을 그 앞에 써놓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정자가 위 구절을 삭제한 것과 정씨가 아래 문장에다가 연결지은 것은, 경문·전문의 차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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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추어 볼 때 그 뜻이 부합되므로 그들의 의견과 달리하지 않았다."

曰: 然則 子何以知其爲釋知至之結語, 而又知其上之當有闕文也? 曰: 以文義與下文推之, 而知其釋知至也. 以句法推之, 而知其爲結語也. 以傳之例推之, 而知其有闕文也.

"그렇다면 선생은 무엇으로 그 구절이 '知至' 구절에 대한 맺음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으며, 또한 그 위에 '빠진 문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이 문장의 의의와 아래 문장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구절은 知至에 대한 해석임을 알 수 있고, 句法으로 미뤄보더라도 그 구절은 맺음말임을 알 수 있으며, 전문의 예로 미뤄보더라도 그 곳에 빠진 문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曰: 此經之序, 自誠意以下, 其義明, 而傳悉矣. 獨其所謂格物致知者, 字義不明, 而傳復闕焉. 且爲最初用力之地, 而無復上文語緖之可尋也. 子乃自謂取程子之意以補之, 則程子之言, 何以見其必合於經意, 而子之言, 又似不盡出於程子, 何邪? 曰: 或問於程子曰 學何爲而可以有覺也. 程子曰 學莫先於致知. 能致其知, 則思日益明, 至於久而後有覺爾. 書所謂思曰睿, 睿作聖. 董子 所謂勉强學問, 則聞見博而智益明, 正謂此也. 學而無覺, 則亦何以學爲也哉. 或問忠信, 則可勉矣, 而致知爲難, 奈何. 程子曰 誠敬, 固不可以不勉, 然天下之理不先知之, 亦未有能勉以行之者也. 故大學之序, 先致知, 而後誠意, 其等有不可躐者. 苟無聖人之聰明睿知, 而徒欲勉焉, 以踐其行事之迹, 則亦安能如彼之動容周旋 無不中禮也哉. 惟其燭理之明, 乃能不待勉强, 而自樂循理爾. 夫人之性 本無不善, 循理而行, 宜無難者. 惟其知之不至, 而但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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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力爲之, 是以苦其難, 而不知其樂耳. 知之而至, 則循理爲樂, 不循理爲不樂, 何苦而不循理以害吾樂耶. 昔嘗見有談虎傷人者, 衆莫不聞, 而其間一人 神色獨變, 問其所以, 乃嘗傷於虎者也. 夫虎能傷人, 人孰不知. 然聞之有懼·有不懼者, 知之有眞·有不眞也. 學者之知道, 必如此人之知虎, 然後爲至耳. 若曰 知不善之不可爲, 而猶或爲之, 則亦未嘗眞知而已矣. 此兩條者, 皆言格物致知 所以當先而不可後之意也. 又有問: 進修之術 何先者? 程子曰: 莫先於正心·誠意. 然欲誠意, 必先致知, 而欲致知又在格物. 致, 盡也. 格, 至也. 凡有一物, 必有一理, 窮而至之, 所謂格物者也. 然而格物亦非一端, 如或讀書講明道義, 或論古今人物而別其是非, 或應接事物而處其當否, 皆窮理也. 曰: 格物者, 必物物而格之耶. 將止格一物, 而萬理皆通邪? 曰: 一物格而萬理通, 雖顏子, 亦未至此. 惟今日而格一物焉, 明日又格一物焉. 積習旣多, 然後脫然有貫通處耳. 又曰: 自一身之中, 以至萬物之理, 理會得多, 自當豁然有箇覺處. 又曰窮理者, 非謂必盡窮天下之理, 又非謂止窮得一理便到. 但積累多後, 自當脫然有悟處. 又曰: 格物, 非欲盡窮天下之物, 但於一事上窮盡, 其他, 可以類推. 至於言孝, 則當求其所以爲孝者如何. 若一事上, 窮不得, 且別窮一事, 或先其易者, 或先其難者, 各隨人淺深. 譬如千蹊萬徑, 皆可以適國, 但得一道而入, 則可以推類而通其餘矣. 蓋萬物各具一理, 而萬理同出一原,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又曰: 物必有理, 皆所當窮. 若天地之所以高深, 鬼神之所以幽顯, 是也. 若曰 天, 吾知其高而已矣. 地, 吾知其深而已矣. 鬼神, 吾知其幽且顯而已矣, 則是已然之詞, 又何理之可窮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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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曰: 如欲爲孝, 則當知所以爲孝之道如何, 而爲奉養之宜如何, 而爲溫淸之節, 莫不窮究, 然後能之, 非獨守夫孝之一字而可得也. 或問: 觀物察己者 豈因見物而反求諸己乎? 曰: 不必然也. 物我一理, 纔明彼, 卽曉此, 此合內外之道也. 語其大, 天地之所以高厚. 語其小, 至一物之所以然, 皆學者所宜致思也. 曰: 然則先求之四端, 可乎? 曰: 求之情性, 固切於身, 然一草一木, 亦皆有理, 不可不察. 又曰: 致知之要, 當知至善之所在, 如父止於慈·子止於孝之類. 若不務此, 而徒欲汎然以觀萬物之理, 則吾恐其如大軍之遊騎出太遠而無所歸也. 又曰: 格物, 莫若察之於身, 其得之尤切, 此九條者, 皆言格物致知所當用力之地·與其次第工程也. 又曰: 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其遲速, 則在乎人之明暗耳. 又曰: 入道莫如敬, 未有能致知而不在敬者. 又曰: 涵養須用敬, 進學則在致知. 又曰: 致知, 在乎所養. 養知, 莫過於寡欲又曰: 格物者, 適道之始, 思欲格物, 則固已近道矣. 是何也? 以收其心而不放也. 此五條者, 又言涵養本原之功, 所以爲格物致知之本者也. 凡程子之爲說者, 不過如此, 其於格物致知之傳, 詳矣. 今也尋其義理, 旣無可疑. 考其字義, 亦皆有據. 至以他書論之, 則文言所謂 學·聚·問· 辨, 中庸所謂明善·擇善, 孟子所謂知性·知天, 又皆在乎固守力行之先, 而可以驗夫大學始敎之功爲, 有在乎此也. 愚嘗反覆考之, 而有以信其必然. 是以竊取其意, 以補傳文之缺. 不然, 則又安敢犯不韙之罪, 爲無證之言, 以自託於聖經賢傳之間乎?

"이 경문의 차례에 있어서 성의 이하부터는 자의가 명백하고 전문의 뜻 또한 지극히 분명한데, 이른바 격물·치지는 자의가 명백하지 않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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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누락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먼저 힘써야 할 터전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위 문장에서 이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선생이 이에 '정자의 뜻을 취하여 이를 보완하였다'라고 말하였는데, 정자의 말이 어떻게 경문의 뜻에 부합된다고 볼 수 있으며, 선생의 말 또한 모두가 정자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어떤 사람이 '학문은 어떻게 하여야 깨달을 수 있는가?'라고 묻자 정자가 그에게 답하였다. '학문에 있어 치지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공부는 없다. 그 앎을 다하면 생각은 날로 더욱 밝아지며, 이처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서경≫의 생각이란 슬기로워야 한다. 슬기로우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과, 董仲舒의 '학문에 힘쓰면 견문이 넓어지고 지혜가 더욱 밝아진다'1)라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만일 학문을 닦되 깨달음이 없으면 또한 어떻게 이를 학문이라 할 수 있겠는가.'2) 다시 물었다. '충성과 믿음이란 힘써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앎을 다한다는 것은 어려운데 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誠과 敬에 대해서 진실하게 힘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하의 이치를 먼저 알지 못한다면, 또한 이를 힘써 행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의 차례는 치지를 먼저 하고 성의를 뒤로 하며, 그 차례를 건너뛸 수 없다. 만일 성인의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없어, 오로지 이에 힘써 행사상의 자취를 밟아 나가려 한다면 또한 어떻게 모두 예절에 맞는 몸가짐과 일처리를 잘할 수 있겠는가? 오직 이치를 밝게 비춰 보면 억지로 힘쓰지 않고서도 스스로 이치를 따라서 순조롭게 행할

1) 董仲舒, 廣川人. 賢良對策. 董仲舒는 廣川 사람이다. 이는 ≪西漢書·賢良對篇≫이다.

2) 朱子曰 能致知則思自然明, 至於久而後有覺, 是積累之多自有箇覺悟時節. 주자가 말하였다. "致知를 하면 자연히 생각이 밝아지고 오랜 이후에는 깨달음이 있다. 이는 많은 積累로서 스스로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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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사람의 본성이란 본디 선하기에, 이치를 따라 행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다. 오직 그 앎이 지극하지 못한 상태에서 억지로 이를 하려고 하기에 그 어려움을 고생으로 느끼게 되고 따라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된다. 앎이 지극하면 이치를 따라 즐거움을 느끼게 되고, 이치에 따르지 않으면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그처럼 고생을 하면서도 이치를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즐거움을 해치는 것인지. 옛적에 일찍이 이를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모두 다 같이 들었지만, 그 중 한 사람의 얼굴빛이 갑자기 변하였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일찍이 호랑이에게 당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호랑이가 사람을 해친다는 것은 그 어떤 사람이든 모르는 자가 없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고서 두려워하는 자와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차이가 있는 것은, 참으로 아느냐와 모르느냐에 달려 있다. 배우는 자들이 도에 대해 아는 것 또한 반드시 그 사람만큼 호랑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은 뒤에야 도를 앎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불선한 일이란 해서는 아니 될 일인 줄을 알면서도 오히려 이를 행하는 것 또한 일찍이 참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3)라고 답하였다. 이 두

3) 朱子曰 今人有知不善之不當爲, 及臨事又爲之, 只是知之未至. 人知烏喙之殺人不可食, 斷然終於不食, 是眞知之也. 知不善不可爲, 而猶或爲之, 是特未能眞知也. 所以未能眞知者, 緣於道理上, 只就外面理會, 裏面却未理會得十分瑩淨. 주자가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 또한 불선한 일이란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면서도 막상 일에 임해서 이의 잘못을 범한 것은 앎이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烏喙(독 약)를 먹으면 목숨을 잃기에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결코 먹지 않는다. 이는 참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불선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하는 것은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은 도리 상에 있어서 겉만을 이해하고 이면을 명철하게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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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목은 모두 격물·치지에 관한 것으로 마땅히 먼저 힘써야 하는 것이지, 미루어 두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또 다시 '덕에 나아가고 몸을 닦으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묻자, 정자는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정심·성의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러나 성의를 하려면 반드시 먼저 치지를 해야 하고, 치지를 하려면 그 또한 격물에 있다. 致란 다함이며 格은 다다름이다. 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곳에는 한 이치가 있다. 이를 궁구하여 그 극처에 다다름이 이른바 격물이다. 그러나 격물의 방법 또한 한 가지만은 아니다. 혹독서를 통하여 도의를 강구하여 밝히는 방법, 혹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시비를 분별하는 방법, 혹 사물에 접촉하면서 그 시의적절함에 대처하는 방법, 이 모두가 궁리이다.'4) '격물이란 반드시 사물마다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한 사물을 궁구함으로써 모든 이치를 다 통달할 수 있는가?' ① '한 사물을 궁구함으로써 모든 이치를 통달한다는 것은 설령 안연과 같은 성현으로서도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 오늘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고, 이튿날 또 다시 한 사물을 궁구하면서 이처럼 오래 강습하다보면 사물을 초탈하여 관통하는 곳5)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4) 朱子曰 格物之理, 所以致我之知. 주자가 말하였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바로 나의 앎을 다하려는 것이다." 而今, 且只就事物上格去. 如讀書, 便就文字上格; 聽人說話, 便就說話上格; 接物, 便就接物上格. 精粗大小, 都要格久後貫通, 粗底便是精, 小底便是大, 這便是理之一本處. <주자가 말하였다.>"오늘날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독서는 文字上에서 궁구함이며,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은 그의 말에서 궁구함이며, 사물을 접촉함은 그 사물을 접촉하는 데에서 궁구함이다. 이처럼 精粗와 大小를 모두 궁구함이 오랜 이후에 관통케 되면 거친 것이 정밀하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되니, 이것이 이치의 一本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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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나의 몸으로부터 만물의 이치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을 알면 스스로

5) 朱子曰 一日一件者, 格物工夫次第也. 脫然貫通者, 知至效驗極致也. 不循其序而遽責其全, 則爲自罔. 但求粗曉而不期貫通, 則爲自畫. 주자가 말하였다. "하루에 하나의 일을 궁구하는 것은 격물 공부의 차례이며, 탈연히 관통하는 것은 知至 효험의 극치이다. 그 순서에 따르지 않고 곧장 그 전체를 바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며, 다만 거칠게 아는 것만을 추구하여 활연관통함을 지양하지 않음은 스스로가 멈춰서는 自畫이다." 程子此語, 便是眞實做工夫來. 不說格一件後便貫通也, 不說盡格得天下物理後方始通只云積習旣多, 然後脫然有箇貫通處. <주자가 말하였다.>"정자의 이 말은 진실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이지, 하나의 일을 궁구하면 모든 것은 관통한다는 말이 아니며, 천하 사물의 이치를 모두 다 궁구한 후에 비로소 관통한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오랜 학습의 축적이 쌓인 후에 탈연히 이와 같은 관통처가 있다는 것이다." 問一理通, 則萬理通, 其說如何? 曰 伊川嘗云雖顏子亦未到此, 天下豈有一理通, 便解萬理皆通也? 須積累將去. 如顏子高明, 不過聞一知十, 亦是大段聰明了. 學問却有漸無急迫之理. "하나의 이치를 통하면 모두 이치를 통할 수 있다는 말은 무엇인지?" <주자가 답하였다.>"이는 안자로서도 이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천하에 한 이치를 통하면 모든 이치를 다 통할 수 있겠는가. 이 또한 오랫동안 쌓아 나가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안자의 고명함으로도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아는 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또한 대단한 총명이다. 학문은 차츰차츰 앞으로 나가야 하며 급박하게 서둘러서는 안 된다." 窮理者, 因其所已知而及其所未知, 因其所已達而及其所未達. 人之良知, 本所固有. 然不能窮理者, 只是足於已知已達, 而不能窮其未知未達. 故見得一截, 不曾又見得一截, 此其所以於理未精也. 然仍須工夫, 日日增加, 今日旣格得一物, 明日又格得一物, 工夫更不住地做, 如左脚進得一步, 右脚又進一步, 右脚進得一步, 左脚又進, 接續不已, 自然貫通. <주자가 말하였다.>"이치를 궁구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인해서 알지 못하는 데에 미쳐가는 것이며, 이미 통달함으로 인해서 통달하지 못한 바에 미쳐 가는 것이다. 사람의 良知란 본래 고유한 것이다. 그러나 궁리를 하지 못한 자는 이미 알고 이미 통달한 것으로 만족할 뿐, 알지 못하고 통달하지 못한 것을 궁구하려고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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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트인 하나의 깨달음이 있을 것이다.'6) ③ '궁리란 굳이 천하의 이치를 모두 다 궁구하라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하나의 이치를 궁구하면 모든 곳에 다 이른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많은 궁리가 쌓인 뒤에 스스로 초탈하여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7)

않는다. 이는 한 부분만을 보았을 뿐 다른 부분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치에 있어서 정밀하게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나날이 공부를 더하여 오늘날 하나의 일을 궁구하고, 이튿날 하나의 일을 궁구하여 공부를 멈추지 않아야 한다. 이는 마치 왼발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고 오른발 또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오른발로 한 걸음 나아가고 왼발 또한 한 걸음 나아가 끊임없이 걷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면 자연히 관통하게 된다."

6) 朱子曰 一身之中, 是仁義禮智. 惻隱羞惡辭遜是非與視聽言動, 皆所當理會. 至夫萬物之榮悴與夫動植大小, 這底是如何, 使那底是如何, 用車之可以行陸, 舟可以行水, 皆當理會. "한 몸의 가운데 仁·義·禮·智, 惻隱·羞惡·辭遜·是非, 視·聽·言·動 이 모든 것은 마땅 히 이해해야 할 공부이며, 만물의 榮悴와 動·植·小·大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부려야 하고 저것은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궁구해야 하며, 수레가 육지를 달리고, 배가 물 위에 떠가는 것도 모두 이해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玉溪盧氏曰 至豁然覺處, 則一身之理與夫萬物之理, 通貫而爲一矣.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활연히 깨우친 곳에 이르면 한 몸의 이치가 만물의 이치와 관통이 되어 하나가 된다."

7) 問知至若論極盡處, 聖賢亦難言. 如孟子未學諸侯喪禮, 與未詳班爵之制. 朱子曰 如何要一切知得? 然理會得已多, 萬一有插一件差異底事來, 也識得他破, 只是貫通; 便不通底, 亦通將去. 某舊亦有此疑, 後看程子說格物非欲窮盡天下之理, 積累多後, 自當脫然有悟處, 方理會得. 如十事, 已窮得八九, 其一二, 雖未窮, 將來湊合都自見得. "知至의 극진한 곳을 논하면 성현 또한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컨대 맹자로서도 제후의 상례를 배우지 못했고, 班爵의 제도에 대해서 자세히 아는 바 없었습니다." 주자가 답하였다. "어떻게 모든 것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아는 바 이미 많으면, 설령 하나의 다른 일을 만났을지라도 그것을 아는 것이 사물을 관통함이며, 관통하지 못한 것까지도 관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 또한 지난날 이러한 점을 의심해 왔으나 후일 정자가 말한 '格物은 천하의 이치를 모두 궁구하여 다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쌓인 후에는 스스로 툭 트이게 깨친 곳이 있어 바야흐로 이해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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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격물이란 천하의 사물을 모두 궁구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을 지극히 궁구하면 그밖의 것은 이를 유추해 나아갈 수 있다. 예컨대 효를 말하면 효도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궁구해야 한다. 만일 하나의 일을 궁구하지 못했을 때는 또 다른 하나의 일을 들어 궁구하되 쉬운 것부터 먼저 하기도 하고 어려운 점을 먼저 하기도 하는데, 이는 각기 그의 깊고 얕은 경지에 따라서 생기는 차이점이다. 비유하면, 천만 갈래의 길이 있는 데, 이 길은 모두가 서울로 갈 수 있는 길들이다. 다만 하나의 길로 서울에 들어서면 이로 유추하여 그 나머지의 길을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만물은 각각 하나의 이치를 갖추고 있지만, 만물의 이치는 모두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때문에 이로 유추해 보면 통하지 않을 것이 없다.'8)

있다'라는 구절을 보았다. 예컨대 열 가지 일 가운데 이미 여덟, 아홉 개를 궁구하면 그 나머지 한두 가지는 설령 궁구하지 못했을지라도 스스로 볼 수 있는 것이다."

8) 朱子曰 旣是敎人類推, 不是窮盡一事便了. 且如盡得箇孝底道理, 故忠可移於君. 又須盡得忠, 以至兄弟夫婦朋友, 從此推之, 無不盡窮, 始得. 주자가 말하였다. "사람으로 하여금 유추해 나가게 하는 것이지, 하나의 일을 궁구하면 곧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효도의 도리를 모두 이해하면 충성을 임금에게 옮겨갈 수 있으며, 또한 충성을 다하면 형제·부부·붕우에 대해서도 미루어 나아감에 다하지 않은 바 없을 것이다." 問程子 若一事上窮不得, 且別窮一事之說, 與中庸弗得弗措相發明否? 曰 看來有一樣底, 若弗得弗措, 一向思量這箇, 少間便會, 擔閣了. 若謂窮一事不得, 便掉了; 別窮一事, 又輕忽了, 也不得. 程子爲見學者有恁地底, 不得已說此話. "정자의 '하나의 일에서 궁구하지 못하면, 또 다른 하나의 일을 궁구한다'라는 말은 ≪중용≫의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라는 구절과 서로 그 의미를 밝혀준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주자가 답하였다.>"한 가지 예로 볼 수 있다.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라는 것은 한결같이 생각하여 조금 후에 깨달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만일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다가 깨닫지 못하면 곧 그만두고서, 따로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되 또한 경홀히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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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사물에는 반드시 이치가 있다. 이 모두 마땅히 궁구해야 할 것들이다.

얻을 수 없다. 정자는 배우는 이들이 이와 같이 하는 것을 보고서 마지못해 이 같은 말을 하게 된 것이다." 問致之爲言, 推而致之, 以至於盡也. 於窮不得處, 正當努力, 豈可遷延逃避別求一事邪? 曰 這是隨人之量, 非曰遷延逃避也. 蓋於此處, 旣理會不得, 若專一守在這裏, 却轉昏了. 須著別窮一事, 又或可以因此而明彼也. "致라고 말한 것은 미루어서 다하여 그 지극함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궁구하여 얻지 못한 곳을 노력해야 하는 것이지, 세월을 지연하고 회피하면서 다른 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주자가 답하였다.>"이는 사람의 역량에 따라서 하는 것이지, 세월을 지연하거나 도피하라는 것은 아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만일 오로지 이것만을 고수한다면 도리어 혼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또 다른 일을 궁구해 나가거나 아니면 혹 이것으로 인해서 저것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萬物皆有此理, 理皆同出一原. 但所居之位 不同, 則其理之用 不一. 如爲君須仁, 爲臣須敬, 爲子須孝, 爲父須慈. 物物各具此理, 而物物各具其用. 然莫非一理之流行者也. 又曰近而一身之中, 遠而八荒之外, 微而一草一木之衆, 莫不各具此理如此. 四人在坐, 各有這箇道理, 某不用假借於公, 公不用求於某. 然雖各有這一道理, 又却同出於一箇理耳. 如排數器水相似, 這盂也是這樣水, 那盂也是這樣水, 各各滿足, 不待求假於外. 然打破放裏, 也只是這箇水, 此所以可推而無不通也. 所以謂格得多後, 自能貫通, 只爲是一理. <주자가 말하였다.>"만물은 모두 이치를 가지고 있으며, 이치는 모두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다만 거처한 바의 지위가 같지 않기에 이치의 작용이 한 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임금이 되어서는 仁을, 신하가 되어서는 敬을, 자식이 되어서는 효도를, 어버이가 되어서는 자애롭게 해야 한다. 모든 사물마다 각기 이치를 갖추고 있으며, 사물마다 각기 작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의 이치가 유행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까이는 한 몸의 내면과 멀리는 八荒(八方의 끝부분)의 밖, 작게는 하나의 풀과 나무의 많은 유까지 제각기 이치를 갖추고 있지 않은 바 없다. 예를 들어,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자, 각기 도리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그에게 빌려줄 수 없고, 그는 나에게 구할 게 없다. 그러나 각기 도리를 가지고 있다하지만 그 또한 하나의 이치에서 다 같이 나온 것이다. 예컨대 여러 개의 그릇에 담아놓은 물과 같다. 이 사발에 있는 것도 물이요, 저 사발에 있는 것도 물로서, 각기 만족스러워 바깥의 것을 빌릴 것이 없다. 그러나 이를 깨뜨려 흘려보내면 또한 똑같은 물일 뿐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통하지 않은 바 없다. 이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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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천지는 왜 높고 깊으며 귀신은 왜 그윽하고 현저한가를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예이다. 만일 하늘이 높은 줄을, 땅이 깊은 줄을, 귀신이 그윽하고 현저한 것을 내 이미 아노라고 말한다면, 이는 이미 예로부터전래되어온 말들인데, 또한 굳이 이치를 궁구할 것이 있겠는가.' ⑥ '만일 효도를 하고자 한다면 의당 효도의 도리가 어떤 것인가를 알고서 부모의 봉양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9) 지낼 수 있을 방법인지를 궁구해야 한다. 그런 뒤에 이를 능히 할 수 있는 것이지, 효라는 한 글자를 고수하는 데에 그치라는 말은 아니다.'10) ⑦ 혹자가 물었다. '사물과 자아를 관찰한다는 것은 사물을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것입니까?' '이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사물과 자아가 한 이치이다. 저것을 밝게 알면 곧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내외의 도를 합한 것이다"라고

많은 것을 궁리한 이후에, 스스로 관통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9) 禮記, 凡爲人子者, 冬溫而夏凊. ≪예기≫에서 말하였다. "자식된 도리는 겨울에는 부모의 이부자리를 따뜻하게 하고, 여름에는 서늘하게 한다."

10) 朱子曰 聖人言孝, 其實精粗本末, 只是一理. 人皆有良知, 而前此未嘗知者, 只爲不曾推去耳. 愛親從兄, 誰無是心? 於此推去, 則溫凊定省之事, 亦不過是自其所知, 推而至於無所不知, 皆由人推耳. 주자가 말하였다. "성인이 말한 효도는 그 精粗와 本末이 하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모두 良知를 가지고 있으나 일찍이 이를 알지 못한 것은 이를 미루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따르는 마음이야 어느 누구에게 없겠는가. 이 良知로 미루어 나가면 溫凊 定省의 일 또한 스스로 그 아는 바를 미루어 모르는 데까지 이르게 된 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모두가 사람에 의해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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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그 큰 것으로 말하면 하늘의 높음과 땅의 두터움, 그 작은 것으로 말하면 한 사물의 所以然에 이르기까지도 배우는 자는 모두 극진히 생각을 하여야 할 문제들이다.'11) '그렇다면 먼저 四端을 구해야 하는지?' '性情에서 구하는 것은 참으로 나의 몸에 간절한 것이다. 그러나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나무까지도 모두 이치가 있으므로 이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⑧ '치지의 요체는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아는 데 있다. 예컨대 부모로서 사랑에, 자식으로서 효도에 그치는 유이다. 만일 이에 힘쓰지 않고 한낱 그처럼 만물의 이치를 보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대군의 유격 기마병이 너무 적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올 수 없는 것과 같다.'12)

11) 朱子曰 天地之所以高厚, 一物之所以然, 只是擧至大與至細者言之. 學者之窮理, 無一物而在所遺也. 주자가 말하였다.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움과 一物의 所以然을 함께 말한 것은, 지극히 큰 것과 작은 것을 함께 들어 말한 것이다. 배우는 이의 이치를 궁구함이란 어느 한 사물이라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12) 朱子曰 格物之論, 伊川意雖謂眼前無非是物, 然其格之也, 亦須有緩急先後之序. 如今爲學而不窮天理·明人倫·論聖言·通世故, 乃兀然存心於一草木器用之間, 此是何學問? 주자가 말하였다. "格物論에 대한 伊川의 뜻은 眼前의 모든 사물에 대한 것이지만, 그 궁구함에 있어서는 또한 緩急 先後의 차례가 있다. 예컨대 학문을 하면서 우선적으로 천리를 궁구하고, 인륜을 밝히고 성인의 말을 논하고, 세상의 일을 통하지 않은 채 멍청스럽게 하나의 초목과 器用에 마음을 둔다면 이를 어찌 학문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天下之理, 偪塞滿前. 耳之所聞, 目之所見, 無非物也. 若之何而窮之哉? 須當察之於心, 使此心之理旣明然後, 於物之所在從而察之, 則不至於汎濫矣. <주자가 말하였다.>"천하의 이치는 나의 앞에 가득 차 있다. 귀에 들리는 것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사물 아닌 게 없다. 어떻게 이를 모두 궁구할 수 있겠는가. 이는 마음에서 살펴, 마음의 이치를 밝게 한 이후에 사물을 따라서 살핀다면 범람한 데에 이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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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격물이란 가까이 자기의 몸에서 살펴 체득하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은 없다.' 이 아홉 가지 조목은 모두 격물·치지를 말한 것으로 마땅히 힘써야 할 터전과 그 공부과정의 차례를 말하고 있다.13) ① '격물·궁리를 하되 성의를 세워서 이를 궁구해 나아가야 한다.14) 늦게 깨치고 빨리 깨침은 그 사람의 밝음과 혼미에 달려 있다.' ② '도에 들어가는 데에는 공경[敬]하는 것만 같음이 없다. 앎을 극진히 다한 자 치고 공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15)

않을 것이다."

13) 玉溪盧氏曰 用力之地者, 讀書應接事物之類, 是也. 次第工程者, 今日格一物, 明日又格一物之類, 是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用力의 터전이란 독서와 사물을 응접하는 유가 바로 이것이며, 次第 工程이란 오늘날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고 이튿날 또 다시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는 유가 바로 이것이다."

14) 問知至而後意誠, 而程子又云格物窮理, 但立誠意以格之, 何也? 朱子曰 此誠字說較淺, 未說得深處. 只是確定其志朴實去做工夫. 如胡氏立志以定其本, 便是這意, 此與經文誠意之說, 不同也. "≪대학≫에서는 앎이 지극한 후에 생각이 진실하다고 하였는데, 이에 반해 정자는 '사물과 이치를 궁구하되 먼저 誠意를 세워서 이를 궁구해야 한다'라고 하니, 이는 또한 무엇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정자가 말한 誠 자는 비교적 얕은 의미이지, 심오한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뜻을 확정지어 소박하게 공부해 나가는 것이다. 예컨대 胡氏는 '뜻을 세워 그 근본을 정한다'라고 하였다. 바로 그와 같은 뜻이다. 이는 경문의 誠意說과는 다르다."

15) 朱子曰 今人將持敬致知來做兩事. 持敬時, 只塊然獨坐, 更不去思量; 却是今日持敬, 明日去思量道理也, 豈可如此? 但一面自持敬, 一面自思量道理, 二者本不相妨. 주자가 말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持敬·致知를 두 가지 일로 나누어 보고 있는데, 이는 그렇지 않다. 持敬을 할 때에, 다만 흙덩이처럼 홀로 앉아 있는 채 전혀 생각하지 않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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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덕성의 함양은 모름지기 공경으로 해야 하고, 학문을 닦아 나아감은 치지에 있다.'16) ④ '치지란 함양하는 데 있고,17) 지식을 배양하는 데 있어 욕심을 적게

갑자기 오늘 持敬을 하고 그 이튿날 생각하는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다만한편으로는 持敬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도리를 생각하면 이 두 가지는 본래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莫若且收斂身心, 盡掃雜慮, 令其光明洞達, 方能作得主宰, 方能見理. <주자가 말하였다.>"마음과 몸을 수렴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잡된 생각을 모두 없애 빛나고 통달케 하여야만이 주재가 있을 수 있으며, 이치를 볼 수 있다."

16) 朱子曰 學者工夫, 惟在居敬窮理二事. 此二事互相發, 能窮理, 則居敬工夫日益進; 能居敬, 則窮理工夫日益密. 주자가 말하였다. "학자의 공부는 오직 居敬窮理라는 하나의 일에 있다. 이는 두 가지 일이 서로서로를 밝혀 주는 것들이다. 窮理를 하게 되면 居敬의 공부는 날로 더욱 나아가게 되고, 敬에 居하면 窮理의 공부는 날로 더욱 정밀하게 된다. 問涵養在致知之先? 曰 涵養, 合下在先. 古人從少以敬涵養, 父兄漸敎之讀書, 識義理. 今若說待涵養了, 方去致知, 也無限期, 須兩下用工. <주자가 답하였다.>"함양은 致知의 앞에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주자가 답하였다.>"함양 공부가 본디 앞에 있다. 옛 사람은 어려서부터 敬으로 함양하였고, 부형이 그에게 독서를 통하여 의리를 알게 하였다. 오늘날 만일 함양을 한 후에야 致知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한계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모름지기 이 두 가지를 함께 공부해 나가야 한다."

17) 問養知, 是旣知後, 如此養否? 朱子曰 此不分先後. 未知之前, 若不養之, 此知如何養得? 旣知之後, 若不養, 又差了, 不可道未知之前, 便不必如此. "養知는 이미 안 후에 이와 같이 함양한 것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이는 선후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알기 이전에 이를 함양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앎을 함양할 수 있겠는가? 이미 알고서도 함양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알기 이전에는 꼭 이와 같이 할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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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는 것보다도 더 좋은 것이 없다.' ⑤ '격물이란 도에로 나아가는 첫 공부이다, 격물을 하려고 생각하는 것은 이미 도에 가까워진 것이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이는 그 마음을 수렴하여 방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다섯 조목은 또한 본원을 함양하는 공부로서 격물·치지를 할 수 있는 근본이 되는 것들이다. 대체로 정자의 말은18) 이와 같은 데에서 벗어나지

18) 問程子致知格物之說, 不同? 曰 當時答問, 各就其人而言之. 今須是合就許多不同處來, 看作一意爲佳. 且如旣言不必盡窮天下之物, 又云一草一木, 亦皆有理. 今若以一草一木上理會, 有甚了期? 但其間有積習多後, 自當脫然有貫通處者, 爲切當耳. 今以十事言之, 若理會得七八件, 則那兩三件, 觸類可通. 若四旁都理會得, 則中間所未通者, 其道理亦是如此. 蓋長短小大, 自有準則. 如忽然遇一件事來時, 必知某事合如此, 某事合如彼, 則此方來之事, 亦有可見者矣. 聖賢如難處之事, 只以數語, 盡其曲折. 後人皆不能易者, 以其於此理素明故也. "정자의 致知格物說이 각기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인지?" <주자가 답하였다.>"당시의 문답은 각기 그 사람의 묻는 입장에 따라 말한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이처럼 각기 다른 부분을 종합하여 일관된 뜻으로 보는 것이 좋다. 예컨대 앞서서 반드시 천하의 사물을 다 궁구할 게 없다고 말하였는데, 또 다시 一草一木에도 모두 이치가 있다고 말하였다. 오늘날 막상 一草一木의 이치를 모두 이해하려 들면 언제 이를 다할 수 있겠는가. 다만 그 사이에 많은 것이 쌓인 후에 스스로 脫然히 관통한 곳이 있게 된다는 말이 옳다. 이제 10개의 일로써 말한다면 만일 7~8가지의 일을 이해했을 때 그 나머지 2~3가지는 유추하여 통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방으로 모두 이해했을 때 그 중간의 통하지 못한 도리 또한 이와 같음을 유추할 수 있다. 長短大小에는 그 나름대로 준칙을 가지고 있다. 만일 갑자기 하나의 일을 만났을 때에 반드시 어떤 일은 이렇게 해야 되고 어떤 일은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는 어떤 일이 닥칠지라도 스스로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성현은 난처한 일을 당하여서도 몇 마디의 말로써 曲折함을 다했음에도, 후세 사람들이 이를 쉽게 말하지 못한 것은, 성현이 평소에 이치를 밝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又曰 所謂格物者, 常人於此理, 或能知一二分, 卽其一二分之所知者推之, 直要推到十分窮得來無去處, 方是格物. 또 <주자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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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며, 이는 격물치지의 전문에 대해 자세히 말한 것이다. 이에 그 문장의 맥락으로 보아도 의심할 것이 없고, 자의로 고찰해 보아도 모두 근거가 있다. 기타 서적으로 이를 논증한다면 ≪주역·文言≫의 '學聚問辨'19) ≪중

용≫의 '明善擇善'(제20장), ≪맹자≫의 '知性知天'(≪盡心,上≫) 또한 모두 固

守와 力行을 먼저 하는 것으로, 처음 ≪대학≫을 배우는 공부가 곧 여기에 있음을 증명하는 근거들이다. 내 일찍이 이를 반복하여 고찰함으로써 반드시 그와 같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나는 정자의 뜻을 취하여 傳文의 누락된 부분을 보완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감히 옳지 못한 죄를 범하고,20) 아무런 증거가 없는 말을 뇌까려 성현의 경전 속에 끼워 넣을 수 있겠는가."

曰: 然則吾子之意, 亦可得而悉聞之乎? 曰: 吾聞之也, 天道流行, 造化發育, 凡有聲色貌象而盈於天地之間者, 皆物也. 旣有是物, 則其所以爲是物者, 莫不各有當然之則, 而自不容已. 是皆得於天之所賦而非人之所能爲也. 今且以其至切而近者言之, 則心之爲物, 實主於身. 其體則有仁義禮智之性, 其用則有惻隱羞惡恭敬是非之情, 渾然在中, 隨感而應, 各有攸主而不可亂也. 次而及於身之所具, 則有口鼻耳目四肢之用. 又次而及於身之所接, 則有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之常. 是

"이른바 격물은 보통 사람이 이 이치에 대해서 1~2분 아는 것을 미루어 곧 전체로 미루어 나가려고 하기에 반드시 궁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궁구하여 더 나아갈 것이 없는 것이 바야흐로 격물이다."

19) 易文言, 學以聚之, 問以辨之, 寬以居之, 仁以行之. ≪역·문언≫에 의하면 "배움으로써 모으고, 물음으로써 분별하고, 너그러움으로써 거하고, 仁으로써 행한다"라고 하였다.

20) 犯不韙之說, 出春秋左氏傳. 犯不韙는 ≪춘추좌씨전≫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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皆必有當然之則, 而自不容已, 所謂理也. 外而至於人, 則人之理, 不異於己也. 遠而至於物, 則物之理, 不異於人也. 極其大, 則天地之運·古今之變, 不能外也. 盡於小, 則一塵之微·一息之頃, 不能遺也. 是乃上帝所降之衷, 烝民所秉之彝, 劉子所謂天地之中, 夫子所謂性與天道, 子思所謂天命之性, 孟子所謂仁義之心, 程子所謂天然自有之中, 張子所謂萬物之一原, 邵子所謂道之形體者. 但其氣質 有淸濁偏正之殊, 物欲有淺深厚薄之異. 是以人之與物·賢之與愚, 相與懸絶而不能同耳. 以其理之同, 故以一人之心, 而於天下萬物之理, 無不能知, 以其稟之異, 故於其理或有所不能窮也. 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 知有不盡, 則其心之所發, 必不能純於義理而無雜乎物欲之私. 此其所以意有不誠·心有不正·身有不修, 而天下國家不可得而治也. 昔者聖人, 蓋有憂之, 是以於其始敎, 爲之小學, 而使之習於誠敬, 則所以收其放心·養其德性者, 已無所不用其至矣. 及其進乎大學, 則又使之卽夫事物之中, 因其所知之理, 推而究之, 以各到乎其極, 則吾之知識, 亦得以周遍精切而無不盡也. 若其用力之方, 則或考之事爲之著, 或察之念慮之微, 或求之文字之中, 或索之講論之際, 使於身心性情之德·人倫日用之常, 以至天地鬼神之變·鳥獸草木之宜, 自其一物之中, 莫不有以見其所當然而不容已, 與其所以然而不可易者. 必其表裏精粗, 無所不盡, 而又益推其類以通之, 至於一日脫然而貫通焉, 則於天下之物, 皆有以究其義理精微之所極, 而吾之聰明睿智, 亦皆有以極其心之本體而無不盡矣. 此愚之所以補乎本傳闕文之意, 雖不能盡用程子之言, 然其指趣要歸, 則不合者, 鮮矣. 讀者其亦深考而實識之哉.

"그렇다면 선생의 뜻을 자세하게 모두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내 들으니, 천도가 유행하여 조화로써 만물을 양육하는데, 이 천지의 사이에 가득히 존재해 있는, 무릇 소리와 빛, 그리고 얼굴과 형상을 소유한 것 모두를 物이라 한다. 이미 만물이 있으면 그 만물이 형성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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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에는 각각 당연한 법칙을 가지고21) 있기에 그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22) 이는 모두 하늘이 내려준 바를 얻은 것이지, 인간이 그처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이에 또한 지극히 간절하고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면, 마음이란 실로 한 몸의 주재이다. 그 본체는 인의예지의 본성이요, 그 작용은 측은· 수오·공경·시비의 감정이다. 이는 혼연한 이치가 마음속에 잠재해 있다가 사물의 감촉에 따라 사물에 응하되 각기 주된 바 있어 어지럽지 않다. 그 다음으로 몸에 갖추어진 것으로 살펴보면 입·코·귀·눈·손·발의 작용이 있고, 또 그 다음으로 몸에 접촉하는 것으로 살펴보면 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라는 떳떳한 인륜이 있다. 이 모두가 반드시 당연한 법칙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며,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것들이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이치이다. 밖으로 사람(타인)에게 있어서는 사람의 이치가 곧 나와 다를 바 없고, 멀리 만물에 있어서도 만물의 이치 또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 그 큰 것으로 지극히 말하면 천지의 운수와 고금의 변화 또한 이에 벗어날 수 없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한 티끌의 미세함과 한 호흡의 순간 또한 빠뜨릴 수 없다.23) 이것이 바로 상제의 降衷24)이요, 뭇 백성의 秉彝25)이며, 劉子가

21) 朱子曰 物乃形氣, 則乃理也. 物之理, 方爲則. 주자가 말하였다. "物은 形氣요, 則은 이치이다. 사물의 이치를 바야흐로 則이라 말한다."

22) 理之所當爲者, 自不容已; 如孩提之愛, 及長, 知敬, 自有住不得處. <주자가 말하였다.>"마땅히 해야 할 이치는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 이는 어린아이의 부모에 대한 사랑과 장성하여서 형에게 공경할 줄 아는 것은 스스로 그만둘 수 없는 일들이다."

23) 格菴趙氏曰 一塵之微, 一息之頃, 不能遺者, 理無物不在, 無時不然. 大而天地之一開一闔, 古今之一否一泰; 小而一塵之或飛或伏, 一息之或呼或吸, 皆此理之所寓也. 격암 조씨가 말하였다. "한 티끌의 미세함, 한 호흡의 순간에서도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이치이다. 어느 물건이든 존재하지 않은 바 없고, 어느 때이든 그렇지 않은 바 없다. 크게는 천지의 一開一闔과 고금의 一否一泰, 작게는 한 티끌이 날고 멈추는 것과 한 호흡을 들이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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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 '천지의 中'26)이며, 공자가 말한 '性과 天道'이며, 자사가 말한 '하늘이

고 내쉬는 것까지 모든 것에 이 이치가 붙어 있다." 新安陳氏曰 天地及一塵, 是橫說; 古今及一息, 是直說.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천지와 一塵은 橫說이며 고금과 一息은 直說이다."

24) 問降衷秉彝一段, 其名雖異, 要之皆是一理? 朱子曰 誠是一理, 豈可無分別? 須各曉其名字訓義之所以異, 方見其所謂同. "降衷秉彝 한 단락은 그 이름이야 다르지만 모두 한 이치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참으로 하나의 이치라 하지만 어찌 분별이 없을 수 있겠는가. 반드시 각기 그 名字의 뜻을 밝게 알았을 때 바야흐로 그 같은 점을 볼 수 있다." 衷字, 只是箇無過不及之中; 是箇恰好底道理. 天生人物, 箇箇有一副當恰好 無過不及道理, 降與你, 今人言折衷 折衷者, 以中爲則而取其正也.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字, 却似中字. 天之生此物, 必有箇當然之則. 故民執之以爲常道, 所以無不好此懿德, 降衷于下民. 緊要在降字上, 故自天而言謂之降衷, 自人受此衷而言則謂之性 緣各據來處與受處而言也 <주자가 말하였다.>"衷 자는 다만 지나치다거나 부족함이 없는 中으로서 가장 좋은 도리를 말한다. 하늘이 사람과 만물을 냄에 하나하나 지나치다거나 부족함이 없는 가장 좋은 도리를 그들에게 내려주었다. 시쳇말에 절충이라는 단어가 있다. 절충이란 中道로써 준칙을 삼아 그 바른 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天生烝民, 有物有則의 則 자는 中 자와 같은 뜻이다. 하늘이 만물을 낼 적에 반드시 하나의 당연한 법칙을 주었다. 그러므로 백성은 이를 가지고 常道를 삼기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지 않은 바 없으며, 사람에게 衷을 내려준다는 말에 가장 중요한 점은 降 자에 있다. 그러므로 하늘의 입장에서 말하면 이를 降衷이라 하고, 사람이 이 衷을 받은 입장에서 말한다면 性이라 한다. 이는 그 각각 유래된 곳과 받은 곳에 근거하여 말한 차이점이다."

25) 問彝而言秉, 何也? 曰 渾然一理, 只于吾心, 不可移奪, 若秉執然. "彝 자에 秉 자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주자가 답하였다.>"혼연한 하나의 이치를 나의 마음에 갖추고 있어 옮겨가거나 빼앗기지 않음이 마치 잡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26) 左傳 成公十三年, 劉康公成肅公, 會晉侯, 伐秦.(劉·成, 食采之邑名. 康·肅, 皆其諡也.) 成子受脤于社, 不敬. 劉子曰 吾聞之, 民受天地之中以生, 所謂命也. 是以有動作禮義威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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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한 性'이며, 맹자가 말한 '인의의 마음'이며, 정자가 말한 '天然自有의 中'27)이며, 張子28)가 말한 '만물의 일원'29)이며, 邵子30)가 말한 '도의 형체'31)이다. 다만 기질의 淸濁·偏正과 물욕의 淺深·厚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간과 만물, 현인과 어리석은 자의 차이가 현격하여 똑같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이치가 같기 때문에 한 사람의 마음으로서 천하 만물의 이치까

之則, 以定命也. 能者養之以福, 不能者敗以取禍. ≪左傳≫ 成公 13년에 劉康公과 成肅公이 晉侯와 회합을 갖고 秦을 정벌하였다.(劉· 成은 食邑의 지명. 康과 肅은 모두 그들의 시호.) 成子가 社에서 제사 지낸 고기를 받는 거동이 불경스러웠다. 이에 劉子가 말하였다. "내가 들어보니, 백성은 천지의 中을 받아 태어난다고 하니 이른바 命이다. 그러므로 동작·예의·위의의 준칙이 있어 命이 정해 있다. 능한 자는 복을 받고, 능하지 못한 자는 패망하여 재앙을 얻게 된다."

27) 程子曰 楊子, 拔一毛不爲; 墨子, 又摩頂放踵爲之, 此皆是不得中. 至如子莫執中, 欲執此二者之中, 不知怎麼執得? 識得則事事物物上, 皆天然有箇中在那上, 不待人安排也. 安排著, 則不中矣. 정자가 말하였다. "양자(楊朱)는 자신의 한 터럭을 뽑아서 남을 위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를 하지 않고, 묵자(墨翟)는 이마를 휘어 발뒤꿈치에 닿는 어려운 일이라도 감행한다 하니, 이는 모두 중도를 얻지 못한 자이다. 예컨대 자막의 執中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중앙을 잡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이를 안다면 事事物物上에 모두 천연한 하나의 中이 존재하여, 사람의 안배를 필요로 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안배한다는 것은 곧 中이 아니다."

28) 張子, 名載, 字子厚, 家于鳳翔府郿縣橫渠鎭, 世號橫渠先生. 장자의 이름은 載며 자는 子厚이니, 봉상부 미현 횡거진에 거처했기 때문에 세인들이 그를 橫渠先生이라 한다.

29) 正蒙 誠明篇. 性者, 萬物之一原非有我之得私也. ≪정몽·성명편≫에 보임. 본성이란 만물의 한 근원이기에 나만이 소유한 사유물이 아니다.

30) 邵子, 名雍, 字堯夫, 諡康節, 河南人. 소자의 이름은 雍이며 자는 堯夫이며 시호는 康節, 하남 사람이다.

31) 性者, 道之形體. 見擊壤集序. 性이란 도의 형체이다. ≪격양집≫ 서문에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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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알 수 있으나, 그 기품이 각기 다른 까닭에 그 이치를 간혹 궁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치를 다 궁구하지 못한 까닭에 그 앎에는 미진한 바 있고, 앎이 미진한 까닭에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 또한 반드시 의리가 순수 온전하지 못하게 되고 물욕의 사사로움이 뒤섞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곧 성의를 할 수 없고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없고 몸을 닦을 수 없음으로써 천하 국가까지도 다스릴 수 없게 되는 이유이다. 옛 성인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가르칠 때 먼저 ≪소학≫에서 진실과 공경[誠·敬]을 익히도록 한 것은, 그 방심을 수렴하고 덕성을 함양하는 바 이미 지극함이며,32) 그들이 대(태)학에 입학하여서는 또한 사물에 나아가 그들이 알고 있는 이치로 인해서 이를 미루어 탐구해 가면서 각각 그 극치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로써 곧 나의 지식 또한 빠짐없이 두루 하고 정밀하고 간절하여 극진하지 않은 바 없었다. 이를 힘쓰는 방법으로는 혹 事爲上에 뚜렷이 나타난 바를 고증하기도 하고, 혹은 은미한 생각을 살펴보기도 하고,33) 혹은 문자상에

32) 玉溪盧氏曰 此格物致知之本原.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이는 격물·치지의 본원이다."

33) 問關於事爲者, 不外乎念慮; 而入於念慮者, 往往皆是事爲, 此分爲二項意, 如何? 朱子曰固是都相關然也. 有做在外底, 也有念慮方動底. 念慮方動, 便須辨別那箇是正, 那箇是不正. 這只就始末上, 大約如此說. 問只就著與微上看? 曰 有箇顯, 有箇微 "事爲에 관계되는 것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생각에 들어오는 것들은 모두가 事爲인데, 이를 두 뜻으로 나눈 것은 무엇 때문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이는 모두가 상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응하는 것도 있고, 또한 생각이 바야흐로 동할 때 바른 도인가 아닌가를 반드시 분별하고, 이에 始末上에 나아가 대략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著와 微로 보아야 합니까?" <주자가 답하였다.>"이는 뚜렷한 것도 있고 은미한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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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구해 보기도 하고, 혹은 강론을 통해서 탐색하면서, 身心性情의 덕과 일상생활의 떳떳한 인륜으로부터 천지·귀신의 변화와 금수·초목의 마땅한 바에 이르기까지, 제각기 하나의 사물 가운데 그만둘 수 없는 당연성과 다시 바뀔 수 없는 소이연을 찾아보아야 한다.34) 이렇게 하여 반드시 表裏· 精粗에 미진한 바를 없게 하고, 또 다시 이를 더욱 유추, 통달하여 一旦에 툭 트여 관통하기에 이르면 천하 사물의 정미한 이치의 극치35)를 모두

34) 朱子曰 今人未嘗看見當然而不容已者, 只是就上較量一箇好惡耳. 如眞見得這底是, 我合當爲, 則自有所不可已者矣. 如爲臣而必忠, 非是謾說如此, 蓋爲臣不可以不忠. 爲子而必孝, 亦非是謾說如此, 蓋爲子不可以不孝也. 주자가 말하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당연한 법칙으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을 보지 못하고서도 다만하나의 好惡를 헤아린 것이다. 하지만, 참으로 옳은 것을 보고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면 스스로 그만둘 수 없다. 예컨대 신하가 되어서 반드시 충성해야 한다는 것은 부질없이 이처럼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는 신하가 되어 충성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식이 되어서 반드시 효도를 해야 한다는 것 또한 부질없이 이처럼 괜한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이는 자식된 자 효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問所以然而不可易者, 是指理而言; 所當然而不容已者, 是指人心而言否? 曰 下句, 只是指事而言. 凡事固有所當然而不容已者. 然又當求其所以然者, 何故? 其所以然者, 理也. 理如此故, 不可易. 又如人見赤子入井, 皆有怵惕惻隱之心, 此其事所當然而不容已者也. 然其所以如此者, 何故? 必有箇道理之不可易者. "소이연으로서 바뀔 수 없는 것은 이치를 가리켜 말하며, 소당연으로써 그만 둘 수 없음은 인심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아래 구절은 일[事]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일에는 당연하여 그만두지 못할 바 있다. 그러나 또한 마땅히 그 소이연을 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所以然이란 이치이다. 이가 이와 같기 때문에 바뀔 수 없다. 또한 예를 들면 사람이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는 것을 보고 모두가 출척 측은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는 그 일의 소당연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은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여기에는 반드시 바뀔 수 없는 하나의 도리가 있기 때문이다."

35) 玉溪盧氏曰 極, 卽至善之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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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구하게 되고, 나의 총명함과 슬기로움 또한 모두 마음의 본체를 다함으로써 극진하지 않은 바 없다.36) 곧 본 전문의 빠진 문장을 보완할 수밖에 없는 나의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정자의 말을 모두 전적으로 따른 것은 아니지만, 그 취지와 요지는 정자의 뜻과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적다. 이를 읽는 자들은 이 점을 깊이 고증하여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曰: 然則子之爲學, 不求諸心而求諸迹, 不求之內而求之外. 吾恐聖賢之學不如是之淺近而支離也. 曰: 人之所以爲學, 心與理而已矣. 心雖主乎一身, 而其體之虛靈, 足以管乎天下之理. 理雖散在萬物, 而其用之微妙, 實不外一人之心, 初不可以內外精粗而論也. 然或不知此心之靈而無以存之, 則昏昧雜擾 而無以窮衆理之妙, 不知衆理之妙而無以窮之, 則偏狹固滯而無以盡此心之全. 此其理勢之相須, 蓋亦有必然者. 是以聖人設敎, 使人黙識此心之靈, 而存之於端莊靜一之中, 以爲窮理之本. 使人知有衆理之妙, 而窮之於學問思辨之際, 以致盡心之功, 巨細相涵, 動靜交養, 初未嘗有內外精粗之擇. 及其眞積力久而豁然貫通焉, 則亦有以知其渾然一致, 而果無內外精粗之可言矣. 今

옥계 노씨가 말하였다. "極이란 지극한 선을 말한다."

36) 朱子曰 不可盡者, 心之事; 可盡者, 心之理. 理旣盡後, 謂如一物初不曾識來到面前, 便識得此物盡吾心之理. 주자가 말하였다. "다할 수 없는 것은 마음의 일이며, 다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이치이다. 이치를 이미 다한 후에 하나의 물건을 처음에는 일찍이 알지 못한 듯하지만, 알았을 때에는 면전에 다다름에 곧 이 사물을 알게 되고 나의 마음의 이치를 다할 수 있다." 新安陳氏曰 此格物致知之效驗.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이는 격물치지의 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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必以是爲淺近支離, 而欲藏形匿影, 別爲一種幽深恍惚艱難阻絶之論, 務使學者莽然措其心於文字言語之外, 而曰道必如此然後可以得之, 則是近世佛學詖淫邪遁之尤者, 而欲移之以亂古人明德新民之實學, 其亦誤矣.

"그렇다면 선생의 학문은 마음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事迹上에서 추구하였고, 내면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외면에서 추구한 것입니다. 나는 성현의 학문이란 이처럼 얕다거나 지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마음과 이치에 있을 뿐이다. 마음은 한 몸을 주재하지만 본체의 비고 신령함은 천하의 뭇 이치를 관장하기에 넉넉하고, 이치는 만물에 널리 흩어져 있지만 작용의 미묘함은 실로 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는다.37) 이는 애당초 내외와 정추로 논할 수 없다. 그러나마음의 허령함을 알지 못하여 이를 보존하지 못하면 혼미하여 사욕이 뒤섞이므로 오묘한 뭇 이치를 궁구할 수 없고, 뭇 이치의 오묘함을 알지 못하여 이를 궁구함이 없으면 편협함과 융통성 없는 고집으로써 마음의 전체를 다할 수 없다. 이는 사리와 형세에 있어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 이 또한 필연의 이치이다. 이 때문에 성인이 가르침을 베풂에 사람으로 하여금 묵묵히 그 마음의 허령함을 알아서 端莊·靜一 한가운데 이를 보존하여 궁리의 근본을 삼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뭇 이치의 오묘함을 알아서

37) 問用之微妙, 是心之用否? 朱子曰 理必有用, 何必又說是心之用乎? 心之體, 具乎是理. 理則無所不該, 而無一物之不在. 然其用實不外乎人心, 蓋理雖在物, 而用實在心也. "用의 미묘라 하는 것은 마음의 작용입니까?" 주자가 말하였다. "이치에는 반드시 작용이 있다. 어찌 굳이 마음의 작용만을 말했겠는가. 마음의 본체에는 이치를 갖추고 있는데, 이치는 온전하지 않은 바 없는 까닭에 어느 물건이라도 존재하지 않은 바 없다. 그러나 그 작용은 실제로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치는 사물에 있다지만, 작용은 실제 마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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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問·思·辨의 즈음에 이를 궁구하여 盡心의 공부를 다하며, 크고 작은 것을 모두 포괄하고, 동할 때나 고요할 때나 항상 함양하여 내외·정추를 모두 다하고, 그 참다운 마음으로 쌓아 가면서 오랫동안 힘을 써서 활연관통함에 이르면 안팎이 모두 하나가 되기에 내외·정조로써 말할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굳이 이를 천근하고 지리하다 하여 모습을 감추고 그림자조차 숨긴 채 또 다른 하나의 幽深·恍惚·艱難·阻絶한 의논을 가지고, 배우는 자들에게 문자와 언어를 떠난 곳에서 마음을 가지도록 조장하여 '道란 반드시 이와 같이 한 뒤에야 얻을 수 있다'38)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근세불학의 詖辭·淫事·邪辭·遁辭보다도 더욱 심한 것인데. 이를 옮겨다가 옛 사람의 명덕·신민의 실학을 어지럽히고자 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曰: 近世大儒, 有爲格物致知之說者, 曰格, 猶扞也, 禦也. 能扞禦外物而後, 能知至道也. 又有推其說者, 曰人生而靜, 其性, 本無不善, 而有爲不善者, 外物誘之也. 所謂格物以致其知者 亦曰扞去外物之誘, 而本然之善 自明耳. 是其爲說 不亦善乎? 曰: 天生烝民, 有物有則, 則物之與道 固未始相離也. 今曰禦外物而後可以知至道, 則是絶父子而後 可以知孝慈, 離君臣而後, 可以知仁敬也. 是

38) 問陸象山不取伊川格物之說, 以爲若隨事討論, 則精神易弊, 不若但求之心. 心明則無不照, 其說亦似省力. 朱子曰 不去隨事討論, 便聽他胡做? 話便信口說, 脚便信步行, 冥冥地去, 都不管他. "육상산은 이천의 격물설을 취하지 않고, '일에 따라 토론하면 정신이 쉽게 피폐 되니, 마음에서 구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마음이 밝으면 관조하지 못할 게 없다' 하니, 그 말을 따라 공부하면 매우 힘이 덜 들 것 같습니다." 주자가 답하였다. "사물에 따라 토론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따라 한다면 어떻게 그처럼 될 수 있겠는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발은 걷고 싶은 대로 걷는다면, 어두운 곳으로 갈지라도 모두 이를 제재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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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有此理哉. 若曰所謂外物者, 不善之誘耳, 非指君臣父子而言也. 則夫外物之誘人, 莫甚於飮食男女之欲. 然推其本, 則固亦莫非人之所當有而不能無者也. 但於其間, 自有天理人欲之辨, 而不可以毫釐差耳. 惟其徒有是物而不能察於吾之所以行乎其間者, 孰爲天理, 孰爲人欲. 是以無以致其克復之功, 而物之誘於外者 得以奪乎天理之本然也. 一不卽物以窮其原, 而徒惡物之誘乎己, 乃欲一切扞而去之, 則是必閉口枵腹然後可以得飮食之正, 絶滅種類然後 可以全夫婦之別也. 是雖裔戎無君無父之敎, 有不能充其說者, 況乎聖人大中至正之道, 而得以此亂之哉.

"근세의 큰 유학자의 한 사람인 그 누구는 격물·치지설에 대해서 '格이란 扞(막다)39)과 御의 뜻과 같다. 바깥 사물을 막아낸 뒤에야 지극한 도를 알 수 있다' 말하였는데, 이에 또 다시 그의 말을 추연하여 강론한 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나면서 고요한 것은 본성이다. 이는 본디 선한 것이지만 불선한 일을 하게 된 것은 바깥 사물의 유혹 때문이다. 이른바 격물로써 그 앎을 다한다는 것은 또한 외물의 유혹을 막아냄으로써 본연의 선이 스스로 밝아지는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 또한 훌륭한 것이 아닙니까?" "하늘이 뭇 백성을 내시매 만물이 있으면 그에 따른 법칙이 있기에, 만물과 도란 애당초 서로 떠날 수 없다.40) 그런데 이에 '바깥 사물을 막은 이후에

39) 問溫公以格物爲扞格之格, 不知格字有訓扞義否? 朱子曰 亦有之, 如格鬪之格, 是也. "사마온공은 격물을 扞格의 格 자로 보고 있는데, 格 자에 扞 자의 뜻이 있는 것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그 또한 그런 뜻이 있다. 바로 格鬪의 格 자가 바로 그런 뜻으로 쓰인 것이다."

40) 格菴趙氏曰 物與理, 未嘗相離. 若離物以求理, 則空虛而無據, 豈得一切扞而去之? 격암 조씨가 말하였다. "사물과 이치란 서로 떠날 수 없다. 만일 사물을 떠나서 이치를 구한다면 공허하여 근거할 바 없다. 어떻게 모든 것을 막아 이를 버릴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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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한 도를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부자의 관계를 끊은 뒤에 효도와 자애로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군신이 서로 격리된 뒤에 仁과 敬을 알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어떻게 이런 논리가 성립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바깥 사물이란 불선으로 유혹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군신과 부자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유혹하는 바깥 사물이란 음식과 남녀의 욕구보다도 더 큰 것은 일찍이 없다. 그러나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이는 인간이 의당 소유해야 할 것으로 없앨 수 없는 것들이다. 다만 그 사이에 천리와 인욕의 분별이 있으므로,41) 털끝만큼이라도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이 같은 음식과 남녀라는 하나의 문제를 가지고서, 그 사이에서 행하는 나의 행위가 어느 것이 천리이고 어느 것이 인욕인가를 살피지 않음으로써, 극기복례의 노력을 다하지 못하고 바깥의 물욕에 유혹당하여 곧 천리의 본연을 빼앗기게 된다. 오늘날 사물에 나아가 그 근본을 궁구하지 않고 한낱 자신을 유혹하는 바깥 사물만을 증오하여, 이에 일체 막아버리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입을 꼭꼭 다물고 뱃속이 텅 빈 뒤에야 음식의 바른 도를 얻었다고 할 것이며, 인류의 종족이 없어진 뒤에야 부부의 분별을 다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는 임금과 아버지가 없는 오랑캐의 가르침으로서도 그러한 말은 더 이상 확충해 나갈 수 없을 터인데, 하물며 성인의 大中至正의 도를 이러한 유로써 어지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曰: 自程子以格物爲窮理, 而其學者傳之, 見於文字, 多矣. 是亦有以發其

41) 問飮食之間, 孰爲天理, 孰爲人欲? 朱子曰 飮食者, 天理也; 要求美味, 人欲也. "먹는다는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천리이며 어느 것이 인욕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음식을 먹는 것 자체는 천리이다. 그러나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것이 인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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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說而有助於後學者耶? 曰: 程子之說, 切於己而不遺於物, 本於行事之實而不廢文字之功, 極其大而不略其小, 究其精而不忽其粗. 學者循是而用力焉, 則旣不務博而陷於支離, 亦不徑約而流於狂妄. 旣不舍其積累之漸, 而其所謂豁然貫通者, 又非見聞思慮之可及也. 是於說經之意·入德之方, 其亦可謂反復詳備而無俟於發明矣. 若其門人, 雖曰祖其師說, 然以愚考之, 則恐其皆未足以及此也. 蓋有以必窮萬物之理, 同出於一爲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爲知至. 如合內外之道, 則天人·物我爲一, 通晝夜之道, 則死生幽明爲一, 達哀樂好惡之情, 則人與鳥獸魚鱉爲一, 求屈伸消長之變, 則天地山川爲一者, 似矣. 然其欲必窮萬物之理, 而專指外物, 則於理之在己者, 有不明矣. 但求衆物比類之同, 而不究一物性情之異, 則於理之精微者, 有不察矣. 不欲其異而不免乎四說之異, 必欲其同而未極乎一原之同, 則徒有牽合之勞而不睹貫通之妙矣. 其於程子之說, 何如哉. 又有以爲窮理, 只是尋箇是處. 然必以恕爲本, 而又先其大者, 則一處理通, 而觸處皆通者. 其曰 尋箇是處者, 則得矣, 而曰以恕爲本, 則是求仁之方, 而非窮理之務也. 又曰 先其大者, 則不若先其近者之切也. 又曰 一處通而一切通, 則又顔子之所不能及, 程子之所不敢言, 非若類推積累之可以循序而必至也. 又有以爲天下之物, 不可勝窮, 然皆備於我而非從外得也. 所謂格物, 亦曰反身而誠, 則天下之物, 無不在我者, 是亦似矣. 然反身而誠, 乃爲物格知至以後之事. 言其窮理之至, 無所不盡. 故凡天下之理, 反求諸身, 皆有以見其如目視·耳聽·手持· 足行之畢具於此, 而無毫髮之不實耳. 固非以是方爲格物之事, 亦不謂但務反求諸身, 而天下之理, 自然無不誠也. 中庸之言明善, 卽物格知至之事. 其言誠身, 卽意誠心正之功. 故不明乎善, 則有反諸身而不誠者, 其功夫地位, 固有序而不可誣矣. 今爲格物之說, 又安得遽以是而爲言哉. 又有以今日格一物, 明日格一物, 爲非程子之言者, 則諸家所記程子之言, 此類非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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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容皆誤. 且其爲說, 正中庸學·問·思·辨, 弗得弗措之事, 無所怫於理者, 不知何所病而疑之也. 豈其習於持敬之約而厭夫觀理之煩耶. 抑直以己所未聞而不信他人之所聞也. 夫持敬·觀理, 不可偏廢, 程子固已言之. 若以己偶未聞, 而遂不之信, 則以有子之似聖人而速貧·速朽之論, 猶不能無待於子游而後定. 今又安得遽以一人之所未聞, 而盡廢衆人之所共聞者哉. 又有以爲物物致察而宛轉歸己, 如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德者 亦似矣. 然其曰物物致察則是不察程子所謂不必盡窮天下之物也. 又曰宛轉歸己, 則是不察程子所謂物我一理, 纔明彼卽曉此之意也. 又曰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德, 則是但欲因其已定之名, 擬其已著之迹, 而未嘗如程子所謂求其所以然, 與其所以爲者之妙也. 獨有所謂卽事卽物, 不厭不棄, 而身親格之, 以精其知者, 爲得致字向裏之意, 而其曰格之之道, 必立志以定其本, 居敬以持其志. 志, 立乎事物之表 敬, 行乎事物之內. 而後乃可精者, 又有以合乎所謂未有致知而不在敬者之指. 但其語意, 頗傷急迫, 旣不能盡其全體規模之大, 又無以見其從容潛玩積久貫通之功耳. 嗚呼, 程子之言, 其答問反復之, 詳且明也如彼, 而其門人之所以爲說者 乃如此, 雖或僅有一二之合焉, 而不免於猶有所未盡也. 是亦不待七十子喪而大義 已乖矣. 尙何望其能有所發而有助於後學哉. 間獨惟念昔聞延平先生之敎以爲爲學之初, 且當常存此心, 勿爲他事所勝. 凡遇一事, 卽當且就此事, 反復推尋, 以究其理, 待此一事融釋脫落, 然後 循序少進而別窮一事如此旣久, 積累之多, 胷中自當有洒然處, 非文字言語之所及也 詳味此言, 雖其規模之大·條理之密, 若不逮於程子. 然其功夫之漸次·意味之深切, 則有非他說所能及者. 惟嘗實用力於此者, 爲能有以識之, 未易以口舌爭也.

"정자가 격물을 궁리라고 말한 이후로부터 정자 문하의 학자들은 그의 말을 전하여 문자로 나타낸 바 많은데, 이 또한 스승의 말 뜻[程子說]을 밝히고 후학에게 도움이 되는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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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의 말은 몸에 간절하게 말하면서도 바깥 사물을 빠뜨리지 않았고, 일을 행하는 실상에 근본하면서도 문자의 공부를 폐지하지 않았고, 그 큰 것을 다하면서도 작은 것을 생략하지 않았고, 그 정밀함을 연구하면서도 거친 부분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배우는 이들이 이에 따라 힘쓴다면 박학에 힘쓸지라도 지리한 데 빠지지 않을 것이며, 또한 요약된 곳으로가로질러 가다가 狂妄한 곳으로 흘러들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점차 쌓아가는 공부를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이른바 활연관통이란 견문과 사려로써 미칠 바 아니다. 이는 경문에 대한 해설이요, 덕에 들어가는 방법인데, 또한 반복하여 자세히 잘 갖추어 말했기 때문에 이밖에 더 밝혀야 할 필요가 없다. 그 문인들이 스승의 말을 높이고 있다지만 나의 생각으로는 그들의 말은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만물의 이치가 一에서 나온 것임을 궁구한 것을 격물이라 하고, 만물은 모두 一理에서 나온 것임을 아는 것을 知至라 한다. 예컨대 '내외의 도를 합하면 天人·物我가 하나이며, 주야의 도를 통달하면 生死·幽明이 하나이며, 哀樂·好惡의 정을 통달하면 인간과 금수와 魚鼈가 하나이며, 屈伸·消長의 변화를 통달하면 천지와 산천이 하나이다'라는 말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들이 굳이 만물의 이치를 궁구하고자 하면서도 오로지 바깥 사물만을 가리키고 있다. 이에 내 자신에 있는 이치를 밝히지 못하고 다만 뭇 사물의 같은 부분만을 추구하여 一物의 性情 차이를 궁구하지 않은 것은 이치의 정미한 부분을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두려고 하지 않음으로써 위에서 네 가지 말에 잘못을 범하였고, 반드시 이를 같이 하고자 하여 한 근원의 같은 점을 다하지 못함에 따라서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구차스러움이 있을 뿐, 관통의 오묘함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의 말을 정자 설에 비교해볼 때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또한 '궁리란 다만 하나의 옳은 곳을 찾는 것이다.42) 그러나 반드시 恕에 근본하며, 또한 그 큰 것을 먼저 하면 한 곳의 이치를 통달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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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곳이든 모두 통달할 수 있다'라고 한다. 그가 말한 '옳은 곳을 찾는다' 라는 말은 옳지만, '恕에 근본한다'라는 것은 仁을 구하는 방법이지 궁리의 일은 아니며, 또한 '그 큰 것을 먼저 한다'라는 말은 '그 가까운 것을 먼저한다'라는 말로 바꿔 써서 간절하게 표현하는 것만 같지 못하며, 또한 '한 곳을 통달하면 일체를 통달한다'라는 것 또한 안자로서도 미칠 수 없는 경지인 것으로 보아, 정자는 감히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유추하여 점차 쌓아 나아감의 차례에 따라 반드시 이른다'라는 말과는 다르다. 또한 천하의 사물이란 모두 다 궁구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두가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지 바깥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격물 또한 몸을 돌이켜 진실하면 천하 만물이 나에게 있지 않은 것은 없다'라는 말 또한 그럴싸한 말이다. 그러나 '몸을 돌이켜 진실케 한다'라는 말은 物格·知至 이후의 일이며, 이치를 지극히 궁구하면 극진하지 않은 바 없다. 때문에 천하의 이치를 몸을 돌이켜 구하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잡고 발로 걷는 그 모든 것들이 모두 이에 갖추어져 있어 조금이라도 진실하지 않음이 없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격물의 일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며, 또한 한갓 몸을 돌이켜 구하는 데 힘쓰면 천하의 이치가 자연 진실하게 된다는 말도 아니다. ≪중용≫에서 말한 '明善'이란 物格·知至의 일이며, 그 '誠身'은 곧 意誠·心正의 공부이다. 그러므로 선을 밝게 알지

42) 朱子曰 謝氏尋箇是處之說, 甚好. 與呂與叔必窮萬物之理, 同出於一爲格物; 知萬物同出乎一理爲知至. 其所見大段不同. 但尋箇是處者, 須是於其一二分是處, 直窮到十分是處, 方可. 주자가 말하였다. "사씨의 '옳은 것을 찾아야 한다'라는 말은 매우 좋은데, 여여숙은 반드시 만물의 이치가 한 가지 일에서 나옴을 궁구하는 것을 格物, 만물이 다 함께 一理에서 나오는 것은 知至라 하여, 그들의 견해가 크게 다릅니다. 그러나 옳은 것을 찾는다는 것은 반드시 그 1~2분 옳은 곳에서 곧 十分 옳은 곳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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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면 몸을 돌이켜 진실하게 할 수 없다. 그 공부와 지위는 차례가 있기에 이를 속일 수 없는 것인데, 격물에 대하여 말할 때 또한 어떻게 이처럼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그들의 말에 의하면 '오늘 하나의 사물을 궁구하고 이튿날 또 다시 한 사물을 궁구한다는 것은 정자의 말이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기록한 정자의 말 가운데 이와 같은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므로 이 모두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다. 또한 그들은 ≪중용≫의 學·問·思·辨에 있어 '이를 얻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는다'라는 구절에 대한 논의는, 이치에 어긋나는 바 없는데, 무엇을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의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들은 요약된 持敬工夫에 익숙한 나머지, 번거롭게 이치를 살펴보는 데 대해 싫증을 내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을 자신이 미처 듣지 못했다는 이유를 가지고 다른 사람이들은 것조차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 하겠다. 持敬과 觀理, 그 어느 것 하나도 폐지할 수 없다. 정자는 이에 대해서 이미 말한 바 있다. 만일 그들 자신이 우연찮게 그 말을 듣지 못한 사실을 가지고 끝까지 믿지 않는다면, 이는 유자가 공자와 닮은 면이 있지만 速貧速朽論은 오히려 子游의 논정이 있은 후에 그 뜻이 밝혀지게 된 것처럼,43) 이 또한 그와 같이 눈 밝은 자가

43) 禮記檀弓, 有子 問於曾子曰 聞喪於夫子乎? 曰聞之矣. 喪欲速貧, 死欲速朽. 有子曰 是非君子之言也. 曾子曰 參也, 與子游聞之. 有子曰 然. 然則夫子有爲言之也. 曾子以斯言, 告於子游. 子游曰 甚哉, 有子之言似夫子也! 昔者, 夫子居於宋, 見桓司馬自爲石槨, 三年而不成. 夫子曰 若是其靡也! 死不如速朽之愈也. 死之欲速朽, 爲桓司馬言之也. 南宮敬叔, 反魯, 必載寶而朝. 夫子曰 若是其貨也! 喪不如速貧之愈也. 喪之欲速貧, 爲敬叔言之也. 曾子以子游之言, 告於有子. 有子曰 然, 吾固曰非夫子之言也. ≪예기·단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有子가 曾子에게 물었다. "喪位(失位去國) 에 대해 공자에게 들은 바 있는가?" "들었다. 벼슬을 잃으면 속히 가난해야 하고, 죽으면 속히 주검이 썩어야 한다고 하였다." 유자가 다시 말하였다. "이는 군자다운 말씀이 아니다." "나는 자유에게서 들었노라." "그런가? 그렇다면 공자가 그 무엇인가 이유가 있어서 그처럼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증자가 이 말을 자유에게 말하자, 자유가 말하였다. "유자의 말이 매우 공자의 말씀과 같다. 옛적에 공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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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한 사람이 이를 듣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 함께 들었던 말을 폐지할 수 있겠는가. 또한 '사물마다 정밀하게 살펴서 원만하게 자신에게로 되돌려야 한다.' 예컨대 '하늘의 운행을 살펴서 스스로를 강하게 하고, 땅의 형세를 살펴서 덕을 두텁게 한다'라는 말 또한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가 말한 '物物致察'이란 '굳이 천하 사물을 다 궁구할 것이 없다'라는 정자의 말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며, 또한 '宛轉歸己'란 '物·我는 一理이다. 저것을 알면 곧 이것을 깨칠 수 있다'라는 정자의 말을 살펴보지 못한 것이며, 또한 '察天行以自强 察地勢以厚德'은 이미 확정지어진 그 이름에 따라서 나타난 그 事迹에 비슷하게 하려는 것이므로, '그 所以然과 그 所以爲의 오묘함을 추구해야 한다'라는 정자의 말과는 차이가 있다. 이는 '하나하나의 사물에 나아가 이를 싫어한다거나 버리지 않고 몸소 친히 이를 궁구하여44) 그 앎을 정밀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이면으로 지향하는 致 자를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물을 궁구하는 도는 반드시 뜻을 세워 그 근본을 정립하고, 조심하는 마음으로 생각을 흐트러지지 않게 하여, 사물의 밖에 뜻을 높이 세우고, 모든 사물에 조심조심 행하면

송나라에 머무실 때, 桓司馬가 스스로 석곽을 만들었는데 3년이 되도록 석곽이 완성되지 않자, 공자는 이를 보고서 말씀하시길 '이처럼 석곽이 화려하다니……! 죽으면 주검이 빨리 썩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하셨다. 죽으면 빨리 썩어야 한다는 말은 환사마의 석곽을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南宮敬叔이 노나라에 돌아올 때마다 보배를 싣고 조문하였다. 공자는 이를 보고서 말씀하시기를 '이와 같이 재물을 쓰다니! 벼슬을 잃으면 빨리 가난해지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니, 벼슬을 잃었을 때 빨리 가난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남궁경숙 때문에 한 말이다." 증자가 자유의 말을 유자에게 전하니, 유자가 말하기를 "그렇다! 나는 참으로 공자다운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44) 朱子曰 身親格之說得親字急迫, 不成是倩人格. 주자가 말하였다. "몸소 친히 궁구한다는 데에는 親 자로 말하는 것이 절실하다. 이는 남에게 빌어 궁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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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앎이 정밀해질 수 있다'라고 한다. 이 또한 '치지는 敬에 있지 않은 바 없다'라는 정자의 설과 부합되는 것이지만, 그의 말에 나타나는 의미와 기상은 매우 급박한 감이 있어, 정령 큰 규모의 전체를 극진히 다하지 못하였고, 또한 여유 있게 깊이 음미하고 오랫동안 노력하여 쌓은 공부를 찾아볼 수 없다. 아! 정자의 말은 여러 차례 반복된 문답을 통하여 그처럼 자상하고 명백한데도 문인들의 말은 도리어 이처럼 모순을 가지고 있다. 한두 군데의 말이 일치된다고 하지만, 오히려 미진한 바 없지 않다. 이는 또한 공자의 칠십 제자가 미처 죽기도 전에 공자의 大儀가 이미 무너져버린 것과 같은 예라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그들이 정자의 설을 새로이 밝혀 후학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45) 요즘 혼자서 옛적에 들었던 연평 선생의 가르침을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처음 학문할 때에는 항상 마음을 보존하여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 어떤 하나의 일을 만났을 땐 곧 그 일에 나아가 반복, 추심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고, 그 일을 의심 없이 원만히 알고 난 뒤에 순서에 따라서 서서히 나아가고 또 다시 다른 일을 이와 같이 궁구하여 오래오래 쌓아 나아가다 보면 가슴 속이 스스로 해맑게 되어 말쑥한 곳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문자와 언어로써 미칠 경지가 아니다.' 이 말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규모의 크기로 나 맥락의 정밀함이, 정자에야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공부의 점진적인

45) 朱子曰 程子說, 更不可易. 某當初, 於呂謝楊尹說, 段段錄出, 句句比對, 逐字秤停過, 方見程子說顚撲不破; 諸說挨著, 便成粉碎. 諸說皆失了, 程子意此正是入門欵. 於此旣差, 他可知矣. 주자가 말하였다. "정자 설은 다시 바뀔 수 없는 정설이다. 이는 여씨, 양씨, 윤씨 설을 단락마다 구절마다 대비하고 글자마다 잘 알아야만이 다시는 정자 설을 타파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말들은 부딪치면 곧 무너져 버린다. 많은 사람들의 말들이 모두 다 정자의 뜻을 잘못 알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인데, 여기에서 이미 잘못되면 다른 것은 알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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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와 의미의 깊고 간절함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비교해볼 때 따라갈 수 없는 높은 경지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로 이에 힘껏 노력한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기에, 쉽사리 말로 논할 수 없다."

曰: 然則所謂格物致知之學, 與世之所謂博物洽聞者, 奚以異? 曰: 此以反身窮理爲主, 而必究其本末是非之極摯, 彼以徇外誇多爲務, 而不覈其表裏眞妄之實. 然必究其極, 是以知愈博而心愈明, 不覈其實, 是以識愈多而心愈窒. 此正爲己爲人之所以分, 不可不察也.

"그렇다면 격물·치지와 博學多聞[博物·洽聞]이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지?" "이것[格·致]은 자신을 돌이켜보면서 이치를 궁구하는 것을 주로 하여, 반드시 본말과 시비의 지극한 곳을 궁구한 것이지만, 저것[博·洽]은 자신이 아닌 바깥 사물을 따라서 해박한 학식을 과장하는 데 힘쓸 뿐, 표리와 眞妄의 실상을 깊이 있게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그 지극한 곳을 궁구하면 지식이 더욱 해박할수록 마음이 더욱 밝아지게 되지만, 반면에 그 실상을 깊이 파헤치지 못하면, 아는 것이 많을수록 마음은 더욱 막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爲己·爲人이 나누어지는 곳이므로, 이를 분명하게 살피지 않을 수 없다."46)

46) 潛室陳氏曰 格物致知, 硏窮義理, 心學也. 記誦博識, 口耳外馳, 喪志之學也. 二者正相反. 잠실 진씨가 말하였다. "격물치지는 의리를 연구하여 궁구함이니 心學이며, 記誦과 博識은 입과 귀로써 바깥으로 치달림이니 喪志의 학문이다. 이 두 가지는 상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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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6傳六章

或問: 六章之旨, 其詳猶有可得而言者邪? 曰: 天下之道二, 善與惡而已矣. 然揆厥所元而循其次第, 則善者, 天命所賦之本然. 惡者, 物欲所生之邪穢也. 是以人之常性, 莫不有善而無惡, 其本心莫不好善而惡惡. 然旣有是形體之累, 而又爲氣稟之拘. 是以物欲之私, 得以蔽之, 而天命之本然者, 不得而著其於事物之理, 固有瞢然不知其善惡之所在者, 亦有僅識其粗而不能眞知其可好可惡之極者. 夫不知善之眞可好, 則其好善也, 雖曰好之, 而未能無不好者以拒之於內. 不知惡之眞可惡, 則其惡惡也, 雖曰惡之, 而未能無不惡者以挽之於中. 是以不免於苟焉以自欺, 而意之所發, 有不誠者. 夫好善而不誠, 則非唯不足以爲善, 而反有以賊乎其善. 惡惡而不誠, 則非唯不足以去惡, 而適所以長乎其惡. 是則其爲害也, 徒有甚焉, 而何益之有哉. 聖人於此, 蓋有憂之, 故爲大學之敎, 而必首之以格物致知之目, 以開明其心術, 使旣有以識夫善惡之所在與其可好可惡之必然矣. 至此而復進之以必誠其意之說焉, 則又欲其謹之於幽獨隱微之奧,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而凡其心之所發, 如曰好善, 則必由中及外, 無一毫之不好也. 如曰惡惡, 則必由中及外無一毫之不惡也. 夫好善而中無不好, 則是其好之也, 如好好色之眞, 欲以快乎己之目, 初非爲人而好之也. 惡惡而中無不惡, 則是其惡之也, 如惡惡臭之眞, 欲以足乎己之鼻, 初非爲人而惡之也. 所發之實, 旣如此矣, 而須臾之頃·纖芥之微, 念念相承, 又無敢有少間斷焉, 則庶乎內外昭融, 表裏澄徹, 而心無不正·身無不修矣. 若彼小人, 幽隱之間, 實爲不善, 而猶欲外託於善以自蓋, 則亦不可謂其全然不知善惡之所在. 但以不知其眞可好惡, 而又不能謹之於獨, 以禁止其苟且自欺之萌. 是以淪陷, 至於如此而不自知耳. 此章之說 其詳如此, 是固宜爲自修之先務矣. 然非有以開其知識之眞, 則不能有以致其好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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實, 故必曰欲誠其意者 先致其知, 又曰知至而后意誠. 然猶不敢恃其知之已至而聽其所自爲也. 故又曰必誠其意, 必謹其獨, 而毋自欺焉, 則大學工夫次第相承, 首尾爲一, 而不假他術以雜乎其間, 亦可見矣. 後此皆然, 今不復重出也.

혹자가 물었다. "전문 제6장의 뜻도 자세히 말씀해 줄 수 있습니까?" "천하의 도에는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그것은 선과 악이다. 그러나 그 원초를 찾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면 선이란 천명으로부터 부여받은 본연의 그것이며, 악이란 물욕에서 발생된 사악한 더러움이다. 이 때문에 인간의 떳떳한 본성에는 선이 있고 악이 없기에 따라서 본마음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선천적인 형체의 누를 가지고 있으며, 또한 타고난 기질의 품부에 얽매인 바 있는 까닭에 사사로운 물욕에 가려지게 되어 천명의 본연이 나타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물의 이치에 대해 까마득해져 선악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거나, 또는 겨우겨우 거칠게 앎으로써 참답게 좋아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극치를 모르게 된다. 만일 참으로 선을 좋아할 줄 알지 못하고서 미적미적 선을 좋아하면 그것은 설령 좋아한다 할지라도 선을 좋아하지 않는 그 마음이 내면에 존재하여 거부감이 없지 않을 것이며, 참으로 악을 미워할 줄 알지 못하고서 어정쩡하게 악을 미워하면 그것은 비록 미워한다 할지라도 악을 미워하지 않는 그 마음이 이면에 존재하여 악으로 끌어당겨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구차스럽게 자신을 속이게 되고 생각하는 바에 진실하지 못함이 있게 된다. 선을 좋아하되 진실하지 못하면 선을 행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선을 해치게 되며, 악을 미워하되 진실하지 못하면 악을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악을 길러 나가게 된다. 이처럼 해된 바 크니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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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도움이 있었는가. 성인이 이를 근심하여 ≪대학≫을 가르침에 먼저 격물·치지의 조목으로써 마음을 밝게 열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선악이 있는 곳과 좋아하고 미워해야 할 필연성을 알도록 하였으며, 이에 이르면 다시 이어서 성의를 말하여 또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그윽한 곳, 은미하게 깊은 곳에서 삼가, 구차스럽거나 스스로를 속이려는 마음이 싹트지 못하게 하고,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을, 예컨대 선을 좋아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으로부터 바깥에까지 조금이라도 좋아하지 않는 마음이 없도록 하고, 악을 미워한다면 반드시 마음속으로부터 바깥에까지 털끝만큼이라도 미워하지 않는 마음이 없도록 해야 한다. 선을 좋아하되 마음으로 참답게 좋아하면, 마치 어여쁜 여인을 좋아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좋아하여 눈을 빛내며 반가워할 것이다. 이는 애당초 남을 위해서 그처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악을 미워하되 마음으로 참답게 미워하면, 마치 악취를 싫어하는 것처럼 진심으로 싫어하여, 나의 코앞에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는 애당초 남을 위하여 이처럼 싫어한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이와 같이 진실하게 하고, 잠깐 사이라도 그리고 가시 끝처럼 미세한 곳까지도 언제나 이러한 생각들을 가지고서 조금이라도 끊임이 없으면 안팎이 모두 밝고 바깥과 속이 맑아서, 마음이 바르고 몸이 닦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인들은 남이 보지 않는 그윽한 곳에서는 실로 불선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다가도 겉으로는 착한 척 꾸며대면서 스스로 이를 숨기려고 든다. 이는 결코 선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참으로 좋아하고 미워할 줄을 알지 못함으로써, 그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지 못하여, 구차스럽게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싹을 없애지 못한 데 그 이유가 있다. 이 때문에 이 같은 잘못에 빠져 있으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장의 자상한 뜻이 이와 같으니, 이는 스스로를 닦아 나아가는 공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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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선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앎을 밝게 열어 주지 못하면 좋아하고 미워해야 할 실상을 다 알 수 없기에 반드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려면 먼저 그 앎을 다하라' 하였고, 또한 '앎이 지극한 뒤에 뜻이 진실하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앎이 지극하다는 것을 자시하고서 마음대로 행하여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반드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라'라고 말한 것이다. 이처럼 그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대학≫의 공부를 차례차례 이어서 처음과 끝이 하나가 되어, 다른 것들이 그 사이에 뒤섞이지 않게 됨을 또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한 이후의 공부 또한 모두 그와 같기에 이에 대해 다시 말하지 않고자 한다."1)

曰: 然則慊之爲義, 或以爲少, 又以爲恨, 與此不同, 何也? 曰: 慊之爲字 有作嗛者, 而字書以爲口銜物也. 然則 慊亦但爲心有所銜之義而其爲快·爲足·爲恨·爲少, 則以所銜之異而別之耳. 孟子所謂慊於心, 樂毅所謂慊於志, 則以銜其快與足之意而言者也. 孟子所謂吾何慊 漢書所謂嗛栗姬, 則以銜其恨與少之意而言者也. 讀者各隨所指而觀之, 則旣並行而不悖矣. 字書又以其訓快與足者, 讀與愜同, 則義愈明而音又異, 尤不患於無別也.

"그렇다면 慊 자의 자의는 혹 적다[少]는 뜻과 또는 한스럽다[恨]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와는 달리 '快·足'의 뜻으로 해석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慊이라는 글자는 嗛 자와 통용해 쓰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字書에서는 이를 '입 속에 물체를 머금고 있다'라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이로 본다면

1) 後此皆然, 如意誠而後心正, 意旣誠 又不可不正其心, 心正而后身修, 倣此. "後此皆然은 성의 이후에 心正하게 된다는 것과 같다. 생각이 이미 진실하면 마음 또한 바르지 않을 수 없고, 마음이 바른 뒤에 몸이 닦여진다는 것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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慊 또한 마음에 어떤 생각을 머금고 있다는 뜻이 된다. 때문에 그것은 쾌활 [快], 또는 만족[足]의 뜻이 되기도 하고, 한스럽다[恨], 또는 적다[少]의 의미로도 쓸 수 있다. 그것은 마음속에 머금고 있는 것의 차이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맹자가 말한 '慊於心'(≪맹자·공손추 상≫)과 樂毅가 말한 '慊於志'는 快·足의 뜻으로,2) ≪맹자≫의 '吾何慊'과 ≪한서≫의 '嗛栗姬'3)란한과 언짢은 생각[恨·少]을 품었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4) 때문에 독자들

2) 史記樂毅列傳, 樂毅遺燕惠王書曰 自五伯以來, 功未有及於先王者也. 先王以爲慊於志. ≪사기·樂毅列傳≫에 의하면, "악의가 연혜왕에게 보낸 상소에서 '오패 이후, 공업이 선왕에게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일찍이 없었다. 선왕은 이로써 마음에 慊하였다" 라고 한다.

3) 史記西漢外戚傳, 景帝立, 齊栗姬子爲太子, 王夫人男爲膠東王; 長公主嫖有女, 欲與太子爲妃, 栗姬謝不許. 長公主欲與王夫人, 夫人許之, 會, 薄皇后廢, 長公主日譖栗姬短, 景帝嘗屬諸姬曰 吾百歲後, 善視之. 栗姬怒不肯, 應言不遜, 景帝心銜之而未發也. 長公主 日譽王夫人男之美, 帝亦自賢之. 王夫人知嗛栗姬, 又陰使人趣大臣立栗姬爲皇后, 大臣奏事文曰 子以母貴, 母以子貴. 今太子母, 宜號爲皇后. 帝怒曰 是乃所當言耶? 遂案誅大臣而廢太子, 爲臨江王; 栗姬以憂死. 卒立王夫人爲皇后, 男爲太子. ≪史記·西漢外戚傳≫에 의하면, 경제가 즉위했을 때 齊 栗姬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왕부인의 아들을 膠東王으로 삼았으며, 長公主 嫖의 딸을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율희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장공주가 왕부인과 함께 하고자 하자, 왕부인이 이를 허락하였다. 때마침 薄皇后가 폐위당하고 장공주가 율희의 단점을 날마다 참소하자, 경제는 諸姬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은 이후에 그를 잘 돌봐주라"라고 했었다. 이에 율희는 성을 내며 이를 좋게 받아들이지 않고, 불손하게 말을 하자, 경제는 마음속에 이를 한으로 품었지만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장공주가 날로 왕부인 아들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경제 또한 어질게 여겼다. 王夫人이 율희에게 한을 품은 것을 알고서 몰래 사람을 시켜서 대신들에게 율희를 황후로 세우도록 재촉하자 대신들이 이를 아뢰는 글에 "자식은 어머니로써 귀하게 되고, 어머니는 자식으로써 귀하여지니 오늘날 태자의 어머니를 마땅히 황후로 삼아야 한다"라고 하자, 경제는 성내어 말하기를 "이 어찌 마땅히 해야 할 말이냐" 하고서 마침내 대신들을 죽이고 태자를 臨江王으로 폐위하였으며, 율희는 이 일을 걱정하다가 죽었으며, 마침내 왕부인을 황후로 세우고 그 아들을 태자로 세웠다.

4) 朱子曰 字有同一義而二用者, 如銜字或爲銜恨, 或爲銜恩, 亦同此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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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각기 지칭하는 뜻에 따라서 이해하면 두 뜻으로 겸하여 보아도 자의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서에서 快와 足의 뜻이라 하여 愜자와 같이 독음을 나타내니, 그 뜻은 더욱 분명하지만 자음은 또한 다르다. 그러나 구별이 없이 쓰이는 것을 우려할 것은 못 된다."

傳7傳七章

或問: 人之有心, 本以應物, 而此章之傳, 以爲有所喜怒憂懼, 便爲不得其正. 然則其爲心也, 必如槁木之不復生·死灰之不復然, 乃爲得其正邪? 曰: 人之一心, 湛然虛明, 如鑑之空·如衡之平, 以爲一身之主者, 固其眞體之本然, 而喜怒憂懼, 隨感而應, 妍蚩俯仰 因物賦形者, 亦其用之所不能無者也. 故其未感之時, 至虛至靜, 所謂鑑空衡平之體, 雖鬼神有不得窺其際者, 固無得失之可議. 及其感物之際而所應者, 又皆中節, 則其鑑空衡平之用, 流行不滯, 正大光明. 是乃所以爲天下之達道, 亦何不得其正之有哉. 唯其事物之來, 有所不察, 應之旣或不能無失. 且又不能不與俱往, 則其喜怒憂懼, 必有動乎中者, 而此心之用, 始有不得其正者耳. 傳者之意, 固非以心之應物, 便爲不得其正, 而必如枯木死灰然後, 乃爲得其正也. 惟是此心之靈, 旣曰一身之主. 苟得其正而無不在是, 則耳目鼻口·四肢·百骸, 莫不有所聽命以供其事, 而其動靜·語黙·出入·起居, 唯吾所使而無不合於理如其不然, 則身在於此而心馳於彼, 血肉之軀 無所管攝, 其不爲仰面貪看

주자가 말하였다. "한 가지 뜻을 가지고 있지만 두 가지로 쓰이는 글자도 있다. 예컨대 銜 자는 혹 원한을 품었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은혜를 품은 것이 되기도 하니, 이 또한 이러한 용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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鳥, 回頭錯應人者 幾希矣. 孔子所謂操則存, 舍則亡, 孟子所謂求其放心· 從其大體者 蓋皆謂此. 學者可不深念而屢省之哉.

혹자가 물었다. "사람에게 마음이 있기에 본디 사물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장의 전문에서 기쁨·성냄·근심·두려움이 있음을 바르지 못한 마음이라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메마른 고사목처럼 다시 회생할 수 없고, 꺼져버린 잿더미처럼 다시 불붙을 수 없는 상태처럼 감정의 작용이 없을 때를 바른 마음이라 하는지?" "사람의 마음이란 담담하게 맑아서 비어 있고 밝아 마치 속이 비어 있는 거울마냥, 또는 평형을 이루는 저울과 같은 것으로,1) 나의 몸의 주재요, 眞體의 本然—人僞가 뒤섞여 있지 않는 本體이다.2) 그러나 기쁨·성냄·근심·두려움이 바깥 사물의 감촉에 따라서 응하는 것은, 마치 거울에 예쁘고 미운 얼굴이 비춰지는 것과 같고, 저울 위에 놓인 물건에 따라 저울대가

1) 朱子曰 人心如一箇鏡, 先未有一箇影象; 有物事來, 方始照見. 妍醜若先有箇影象在裏面, 如何照得? 人心本是湛然虛明, 事物之來, 隨感而應, 自然照得高下輕重. 事過, 便當依前恁地虛, 方得. 若事未來, 先有一箇忿懥好樂恐懼憂患之心, 在這裏; 及忿懥好樂恐懼憂患之事到來, 又以這心相與滾合, 便失其正. 事了, 又只若留在這裏, 如何得正? 주자가 말하였다. "사람의 마음이란 거울과 같아서, 애당초 하나의 영상도 없다. 어떤 물건이 다가왔을 때 비로소 아름답거나 추한 얼굴이 비춰지는 것이다. 만일 애초에 어떤 영상이 이면에 있으면 어떻게 비춰질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란 본래 湛然虛明한 것이다. 사물이 올 때, 감응에 따라서 응하면 자연히 고하와 경중에 따라 비춰지고, 일이 지나가면 곧 예전처럼 비게 되지만, 어떤 일이 닥쳐오기도 전에 먼저 성냄, 좋아함, 두려움, 근심의 마음이 이면에 있다가 성냄, 좋아함, 두려움, 근심의 일이 닥쳐왔을 때 또한 이 마음과 하나로 합해지면 바른 마음을 잃게 되며, 또 그 일이 끝났음에도 마음속에 그 감정을 남겨둔다면 어떻게 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2) 眞體, 乃其本體之不雜於人僞者也. 주자가 말하였다. "眞體는 인위가 뒤섞여 있지 않는 본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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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내리는 것처럼 그 사물에 따라서 형상이 부여되어지는 것과 같다. 이 또한 작용(情)이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사물에 감촉하지 않을 때는 지극히 비어 있고 지극히 고요하니, 이른바 비어 있는 거울, 반듯한 거울[鑑空衡平]의 본체이므로 설령 귀신이라도 그 틈을 엿볼 수 없다. 때문에 이는 잘잘못을 논할 수 없지만, 사물에 감촉된 즈음에 사물에 응한 것이 모두 절도에 맞으면 이는 鑑空衡平의 작용3)이 막힘없이 유행하여 광명정대하니, 이것이 천하의 達道이다. 이를 어떻게 바르지 못한 마음이라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사물이 이르러 올 때 잘 살피지 못함이 있어 이에 응한 바 간혹 잘못이 없지 않으며, 또한 그 일에 함께 휩쓸리면 기쁨·성냄·근심· 두려움의 감정은 반드시 마음의 동요에 따라 마음의 작용(정)이 비로소 바르지 못하게 된다. 전문을 쓴 자의 뜻은, 마음으로 사물에 응한다는 것이란 바르지 못하니, 반드시 메마른 고사목과 식어버린 잿더미처럼 작용이 없는 후에 바른 마

3) 西山眞氏曰 鑑空衡平之體用, 切須玩味. 蓋未應物時, 此心只要淸明虛靜, 不可先有一物. 如鑑未照物, 只是一箇空; 如衡未稱物, 只是一箇平. 此乃心之本體, 卽喜怒哀樂未發之中, 所謂鑑空衡平之體也. 及事物之來, 隨感而應, 因其可喜而喜, 可怒而怒, 在我本未嘗先有此心, 但隨物所感而應之耳. 故其發無不中節, 此所謂鑑空衡平之用也. 서산 진씨가 말하였다. "이른바 비어 있는 거울, 반듯한 거울과 같은 본체와 작용에 대해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다. 사물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이 마음은 그저 淸明虛靜하여 애초에 어떤 물건도 없다. 예컨대 거울이 사물을 비추지 않을 때에는 하나의 비어 있는 그 자체일 뿐이며, 저울대가 물건이 얹혀 있지 않을 때는 하나의 평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본체로서, 희로애락 未發의 中이며, 이른바 비어 있는 거울, 반듯한 거울과 같은 본체이다. 그러나 사물이 이르러 오면 느낀 바에 따라 응하되 기뻐할 만한 일을 기뻐하고 성내야 할 만한 일을 성내는 것이니, 이는 나에게 본래 이러한 마음이 없다가 사물의 감응에 따라 응한 것이다. 그러므로 감정을 발산함에 절도에 맞지 않은 바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비어 있는 거울, 반듯한 거울과 같은 작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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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직 마음의 신령함이란 한 몸의 주재이다. 바른 도를 얻어 항상 내 몸에 있으면 이목구비, 사지, 百骸는 마음의 명령에 따라 각기 그 관능의 일에 이바지하게 되므로 동정·어묵·출입·기 거 등 모든 작위가 오로지 내가 부리는 대로 움직여도 도리에 부합되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몸은 여기에 있는데 마음은 저곳으로 치달리게 되어 혈육으로 구성된 육신을 통제하지 못하여, 두보의 시—仰面貪看鳥[위를 보면 탐욕스럽게 새를 보고], 回頭錯應人[머리를 돌리며 사람에게 잘못 응한다]4)—와 같이 탐욕과 잘못을 범하지 않을 자 거의 없다. 공자의 '마음이란 잡으면 이에 있고 놓으면 잃는다'라는 말과 맹자의 '잃어버린 마음을 구하고, 그 大體(心·志)를 따른다'라는 말은 모두 이를 말한 것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배우는 이들은 이 점을 깊이 생각하여 자주자주 반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傳8傳八章

或問: 八章之辟, 舊讀爲譬而今讀爲僻, 何也? 曰: 舊音舊說, 以上章例之而不合也. 以下文逆之而不通也. 是以間者, 竊以類例文意求之, 而得其說如此. 蓋曰人之常情, 於此五者, 一有所向, 則失其好惡之平而陷於一偏. 是以身有不修·不能齊其家耳. 蓋偏於愛, 則溺焉而不知其惡矣. 偏於惡, 則阻焉而不知其善矣. 是其身之所接, 好惡取舍之間, 將無一當於理者, 而況於閨門之內, 恩常掩義, 亦何以勝其情愛暱比之私而能有以齊之哉.

4) 이는 杜子美의 詩를 인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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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가 물었다. "전문 제8장의 辟 자는 옛적에는 譬(비)의 독음으로 읽어왔는데, 오늘날이를 僻(벽)으로 읽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 독음(譬의 음)과 이에 따른 舊說은 윗글의 전례로 미루어 보더라도 맞지 않고 아래의 문장으로 거슬러 보아도 그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근간에 나는 유례와 문맥을 통하여 그 뜻을 추구한 나머지 그 말이다음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란 이 다섯 가지 가운데 만에 하나라도 치우친 바 있으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에 공평함을 잃게 되어 一偏에 빠지게 된다. 이로써 몸이 닦여질 수 없고 가정이 다스려질 수 없다. 사랑에 치우치면 사랑을 탐닉한 나머지 그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미움에 치우치면 그를 용납지 못하여 그의 선을 모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몸의 접촉하는 바, 호오·취사에 있어 도리어 적절한 바 그 어느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물며 한 집안 식구들이란 항상 사랑하는 마음이 의리를 가리게 되는데, 더더욱 어떻게 사사로운 끈끈한 사랑과 가까운 관계를 이겨 나갈 수 있으며 집안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曰: 凡是五者, 皆身與物接, 所不能無, 而亦旣有當然之則矣. 今曰一有所向, 便爲偏倚, 而身不修, 則是必其接物之際, 此心漠然, 都無親疎之等·貴賤之別然後, 得免於偏也. 且心旣正矣, 則宜其身之無不修, 今乃猶有若是之偏, 何哉? 曰: 不然也. 此章之義, 實承上章, 其立文命意, 大抵相似. 蓋以爲身與事接而後, 或有所偏, 非以爲一與事接而必有所偏. 所謂心正而后身修, 亦曰 心得其正, 乃能修身, 非謂此心一正, 則身不待檢而自修也.

"이 다섯 가지는 내 몸과 사물이 접촉함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일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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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에는 당연한 법칙인데, 여기에서 선생의 말을 살펴보면 '만에 하나라도 편향한 바 있으면 곧 편벽되고 치우쳐 몸이 닦여지지 않는다' 하니, 그렇다면 사물을 접촉할 때 반드시 마음에 아무런 것 없이 친소의 차등, 귀천의 분별을 모두 없앤 후에야 편벽됨을 면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또한 마음이 바르면 몸이 닦여지기 마련인데, 여기에서 도리어 이처럼 편벽됨이 있다 말함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지 않다. 이 장의 뜻은 실로 위의 제7장에 이어 문장을 쓰면서 그의의를 명명한 것이기에 대체로 유사한 점이 있다. 내 몸과 일이 접촉한 뒤에 간혹 편벽된 바 생겨난다는 것이지, 단 한번 사물과의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편벽됨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리고 이른바 '마음이 바르게 된 뒤에 몸이 닦여진다'라는 말 또한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만이 이에 몸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이지, 마음이 한번 바르면 몸이란 살펴보지 않아도 저절로 닦여진다는 말은 아니다."

曰: 親愛·賤惡·畏敬·哀矜, 固人心之所宜有, 若夫敖惰, 則凶德也. 曾謂本心而有如是之則哉? 曰: 敖之爲凶德也, 正以其先有是心, 不度所施而無所不敖爾. 若因人之可敖, 而敖之, 則是常情所宜有而事理之當然也. 今有人焉, 其親且舊, 未至於可親而愛也, 其位與德, 未至於可畏而敬也, 其窮, 未至於可哀, 而其惡, 未至於可賤也, 其言, 無足去取, 而其行, 無足是非也, 則視之泛然如塗之人而已爾. 又其下者, 則夫子之取瑟而歌·孟子之隱几而臥, 蓋亦因其有以自取, 而非吾故有敖之之意, 亦安得而遽謂之凶德哉. 又況此章之旨, 乃爲慮其因有所重而陷於一偏者, 發其言, 雖曰有所敖惰, 而其意則正欲人之於此, 更加詳審, 雖曰所當敖惰, 而猶不敢肆其敖惰之心也, 亦何病哉.

"親愛·賤惡·畏敬·哀矜이란 인간의 마음에 꼭 있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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敖惰란 좋지 못한 것[凶德]입니다. 일찍이 위의 문장에서 '本心 ……'이라 말해 놓고서 다시 이와 같은 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오만[敖]을 좋지 못한 행위[凶德]라 말함은, 먼저 오만스러운 마음을 가지고서 이를 어디에 써야 할 줄을 모르는 채 어느 곳에서는 오만을 부리기에 흉덕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오만하게 대해야 할 사람에게 오만하게 대했다면, 이는 인간의 떳떳한 정으로서 꼭 있어야 할 것이며 사리의 당연한 바이다. 예컨대,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친분으로나 가까운 면으로 보면 친히 하고 사랑하기엔 적절치 않고, 그의 지위와 덕행으로 보더라도 그를 경외하기엔 적절치 않으며, 그의 곤궁함 또한 가엾게 여기기엔 적절치 않고, 그의 말 또한 살펴볼 만한 게 없고, 그의 행실 또한 시비를 논할 수 없는 어정쩡한 사람일 경우 그를 대함에 있어서 여느 사람들과 같이 담담하게 평범히 볼 뿐이며, 또한 그 이하의 인물이라면 공자 또한 비파를 켜고 노래하면서 고의로 만나주지 않았고, 맹자 또한 찾아온 사람의 앞에서 의자에 기댄 채 누워 있은 적이 있었다. 이 또한 그들 스스로가 그처럼 대하도록 만든 것이지, 내가 고의로 오만하게 대하려는 마음을 가진 것은 아니다. 이를 어떻게 흉덕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본장의 뜻은 편향으로 인하여 一偏에 빠질까를 염려해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비록 오만하고 게으르게 대해야 할 바 있다……라고 말했지만, 그 의도는 사람들이 이를 더욱더 자세히 살펴주기를 위한 바람이며, 설령 마땅히 오만하고 게을러야 할 곳이 있을지라도 오히려 오만하고 게으른 마음을 방자히 가져서는 안 된다. 이처럼 한다면 이 또한 무슨 병폐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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傳9傳九章

或問: 如保赤子, 何也? 曰: 程子有言, 赤子未能自言其意, 而爲之母者 慈愛之心 出於至誠, 則凡所以求其意者, 雖或不中, 而不至於大相遠矣. 豈待學而後能哉. 若民則非如赤子之不能自言矣, 而使之者, 反不能無失於其心, 則以本無慈愛之實, 而於此有不察耳. 傳之言此, 蓋以明夫使衆之道, 不過自其慈幼者而推之, 而慈幼之心, 又非外鑠而有待於强爲也. 事君之孝·事長之弟, 亦何以異於此哉. 旣擧其細, 則大者可知矣.

혹자가 물었다. "'갓난아이를 보살피듯 한다'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정자의 말에 의하면, 갓난아이란 제 마음을 스스로 말할 수 없지만, 그 아이의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지극한 모성애로써 모든 것을 생각하므로 어린아이가 원하는 뜻을 헤아림에 있어 정확하게 맞추지는 못하지만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이러한 능력과 행위를 어떻게 배운 뒤에 능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백성이란 스스로 말을 못하는 갓난아이와는 다르다. 하지만 백성을 부리는 위정자가 민심을 잃게 된 것은 본디 백성을 사랑하는 진실한 마음이 없어 백성의 마음을 살피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전문에서 이를 말한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미루어가는 데 지나지 않으며,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깥에서 주어지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임금을 섬길 수 있는 효도, 어른을 섬길 수 있는 공경 또한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이미 그 작은 일을 예로 열거하였는 바, 이로 미루어 큰 것을 알 수 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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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仁讓言家, 貪戾言人, 何也? 曰: 善必積而後成, 惡雖小而可懼, 古人之深戒也. 書所謂爾惟德罔小, 萬邦惟慶. 爾惟不德罔大, 墜厥宗, 亦是意爾.

"仁·讓은 한 집안으로, 貪戾는 한 사람으로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선은 반드시 쌓은 뒤에 이루어지지만, 악이란 작은 것일지라도 두려워함은 옛 사람의 큰 경계이다. ≪서경≫에서 '너는 작은 덕이라 하여 하찮게 여기지 말라.2) 작은 덕이라 할지라도 수많은 나라의 경사이며, 너는 덕이 아닌 불선한 행위에 대해서 그까짓 것쯤이야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라.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한 불선이 너의 종족을 멸망시키리라'(≪서경·商書·伊訓≫)라는 말 또한 이 같은 뜻이다."

曰: 此章本言上行下效, 有不期然而然者. 今曰有諸己而后求諸人, 無諸己而後非諸人, 則是猶有待於勸勉程督而后化, 且內適自修而遽欲望人之皆有, 己方僅免而遂欲責人以必無也. 曰: 此爲治其國者言之, 則推吾所有與民共由, 其條敎法令之施·賞善罰惡之政, 固有理所當然而不可已者. 但以所令, 反其所好, 則民不從. 故又推

1) 細, 謂慈; 大, 謂孝弟. "細란 慈를, 大란 효제를 말한다." 三山陳氏曰 長民者 往往不得下之情, 蓋亦視之不切於己, 不若慈母之心耳. 孝弟與慈, 初無二心. 苟自切己推之, 則擧慈可以見孝弟矣. 삼산 진씨가 말하였다. "백성의 우두머리로서 이따금 아랫사람의 실정을 알지 못한 것은 또한 자기의 몸처럼 간절하게 보지 않은 것으로, 어머니의 마음만 같지 못했기 때문이다. 孝弟와 慈는 애당초 두 마음이 아니다. 스스로 몸에 간절한 것으로 미루어 보면 慈를 들어서 孝弟를 찾아볼 수 있다."

2) 朱子曰 惟德罔小, 言其不可小也. 주자가 말하였다. "惟德罔小란 그 일을 작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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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言之, 欲其先成於己而有以責人, 固非謂其專務修己, 都不治人而拱手以俟其自化, 亦非謂其矜己之長·愧人之短, 而脅之以必從也. 故先君子之言曰 有諸己不必求諸人, 以爲求諸人而無諸己則不可也. 無諸己不必求諸人以爲非諸人, 而有諸己則不可也, 正此意也.

"이 장에서는 본디 윗사람이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는다는 점을 말한 것으로, 그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 그와 같이 행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나의 몸에 선이 있은 뒤에 남에게 선을 행하도록 요구하고, 나에게 악이 없는 뒤에 남의 악을 꾸짖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오히려 권유와 격려, 그리고 감독과 사찰이 있은 뒤에 교화가 시행된다는 말이며, 또한 안으로 스스로 닦고서 곧 사람들에게 모두 이 같은 선을 소유하기를 바라며, 자신의 잘못을 면하자마자 사람들에게 반드시 그 같은 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꾸짖은 것인지?"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자에 대해 말한 것이다. 나에게 있는 것을 미루어 백성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敎條와 법령의 시행, 상선벌악의 정치는 도리상 당연한 바로서 그만둘 수 없는 일들이다. 다만 명령이 위정자의 좋아하는 마음에 상반될 경우 백성은 그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이 때문에 또한 그 근본을 미루어 말하기를 먼저 자신이 선을 이룬 뒤에 사람을 꾸짖어야 한다 하니, 이는 오로지 자신을 닦는 데에 힘쓸 뿐,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방관한 채 스스로 교화되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며, 또한 나의 장점을 자랑하고 다른 사람의 단점을 부끄럽게 여겨 그들을 협박하여 따르도록한다는 말도 아니다. 그러므로 先考3)의 '나의 몸에 선을 둘 뿐이지 반드시 남에게 구해서는 안 된다. 남에게 선하기를 구하면서도 자신에게 선이 없는 것은 옳지 못한

3) 文公父, 名松, 字喬年, 號韋齋先生. 주자 부친의 이름은 松이며, 자는 喬年. 호는 韋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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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며, 나에게 악을 없게 할 뿐이지, 굳이 남들을 비난할 것은 없다. 저 사람의 악을 비난하면서 자신에게 악이 있으면 옳지 못한 일이다'라는 말이 바로 이 뜻이다."

曰: 然則未能有善而遂不求人之善, 未能去惡而遂不非人之惡, 斯不亦恕而終身可行乎哉? 曰: 恕字之旨, 以如心爲義. 蓋曰如治己之心以治人, 如愛己之心以愛人, 而非苟然姑息之謂也. 然人之爲心, 必嘗窮理以正之, 使其所以治己愛己者 皆出於正, 然後可以卽是推之以及於人, 而恕之爲道, 有可言者. 故大學之傳, 最後兩章 始及於此, 則其用力之序 亦可見矣. 至卽此章而論之, 則欲如治己之心以治人者, 又不過以强於自治爲本. 蓋能强於自治, 至於有善而可以求人之善, 無惡而可以非人之惡, 然後推己及人, 使之亦如我之所以自治而自治焉, 則表端景正·源潔流淸, 而治己治人, 無不盡其道矣. 所以終身力此而無不可行之時也. 今乃不然, 而直欲以其不肖之身爲標準, 視吾治敎所當及者, 一以姑息待之, 不相訓誥, 不相禁戒, 將使天下之人, 皆如己之不肖而淪胥以陷焉. 是乃大亂之道, 而豈所謂終身可行之恕哉. 近世名卿之言有曰, 人雖至愚, 責人則明. 雖有聰明, 恕己則昏. 苟能以責人之心責己, 恕己之心恕人, 則不患不至於聖賢矣. 此言近厚, 世亦多稱之者. 但恕字之義, 本以如心而得. 故可以施之於人, 而不可以施之於己. 今曰恕己則昏, 則是已知其如此矣. 而又曰以恕己之心恕人, 則是旣不知自治其昏, 而遂推以及人, 使其亦將如我之昏而後已也. 乃欲由此以入聖賢之域, 豈不誤哉. 藉令其意, 但爲欲反此心以施於人, 則亦止可以言下章愛人之事, 而於此章治人之意, 與夫中庸以人治人之說, 則皆有未合者. 蓋其爲恕雖同, 而一以及人爲主, 一以自治爲主, 則二者之間, 毫釐之異, 正學者所當深察而明辨也. 若漢之光武, 亦賢君也, 一旦以無罪黜其妻, 其臣郅惲不能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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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大義以救其失, 而姑爲緩辭以慰解之. 是乃所謂不能三年而緦功之察, 放飯流歠而齒決是憚者. 光武乃謂惲爲善恕己量主, 則其失又甚遠. 而大啓爲人臣者 不肯責難陳善以賊其君之罪. 一字之義, 有所不明, 而其禍 乃至於此, 可不謹哉?

"그렇다면 자신이 선을 소유하지 않고서는 남들에게 선을 추구하지 못하며, 악을 버리지 않고서는 남들의 악을 비난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또한'恕란 몸이 다하도록 행한다'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恕 자의 뜻은 나의 마음과 같이 남에게 대한다는 것이다.4) 다시 말하면 이는 나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처럼 남을 다스리고 내 몸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이 남을 사랑한다는 것이지, 구차스럽거나 편히 해주는 것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이란 반드시 이치를 궁구하여 바르게 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몸을 다스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모두 바른 도에서 나오게 한 뒤에 이를 미루어 사람에게 미쳐 갈 수 있으며, 恕의 도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학≫의 전문 제9, 10장에 이르러 처음 恕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보아도 공부의 차례를 엿볼 수 있다. 이 장에 이르러 恕를 논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려 타인을 다스리는 것 또한 힘껏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에 근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스스로 힘껏 다스려 나에게 선이 있어야만이 사람들에게 선하기를 추구하고, 나에게 악이 없어야만이 사람

4) 問如心爲恕? 朱子曰 如, 比也. 比自家心上推去, 仁之與恕, 只爭些子. 自然底, 是仁; 比而推之, 便是恕. "如心爲恕란 무엇인지?" 주자가 답하였다. "如란 비교함이다. 자신의 마음에 비교하여 미루어가는 것이다. 仁과 恕는 다만 작은 데서 나누어진다. 자연스럽게 하는 것은 仁이요, 비하여 미루어 나가는 것은 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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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꾸짖을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나의 몸을 미루어 남들에게 미쳐 가, 그들 또한 내 스스로 다스렸던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다스려 나가도록 하면, 푯대가 바름으로써 이에 따른 그림자가 반듯하고 원천이 깨끗하므로 흘러내려오는 물이 맑게 되어, 나의 몸을 다스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도를 다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몸이 다하도록 恕에 힘써 이를 언제나 행할 수 있다. 그러나오늘날의 위정자들은 이처럼 하지 못하고 어질지 못한 몸으로 백성의 표준이 되어, 마땅히 다스리고 가르쳐야 할 바를 하나같이 무사안일의 姑息으로 대하여 서로의 가르침에 대한 말이 없고 서로 금지하고 경계하지 않음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모두 나와 같이 불초하게 만들어 모두가 멸망의 늪으로 빠져들게 하였다. 이는 곧 대혼란의 길이지 어떻게 일생 동안 행할 수 있는 恕라 할 수 있겠는가. 근세의 저명한 관리(范純仁)5)의 말에 의하면 '사람이란 지극히 어리석어도 남을 꾸짖는 데에는 밝고, 아무리 총명한 사람일지라도 제 몸을 용서하는 데에는 어둡다. 만일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제 자신을 꾸짖고 자신을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한다. 이는 알기 쉽고 후덕한 말이어서 세상 사람들이 이를 흔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恕 자의 의의는 본디 나의 마음과 같이 한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글자이다. 때문에 이를 타인에게 베풀 수는 있지만 내 자신에게 쓸 수는 없다. 그럼에도 도리어 그가 '恕己則昏'이라 말한 것은 이미 이와 같은 뜻을 알고 한 말인데, 또 다시 '나를 용서하는 마음으로 남을 용서하라' 말한 것은, 먼저 스스로가 그 혼매함을 다스릴 줄을 알지 못하고 결국은 이를 미루어 남들까지도 나와 같이 혼매하게

5) 范純仁, 字堯夫, 諡忠宣公. 범순인의 자는 堯夫, 시호는 忠宣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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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뒤에 그만두려는 것이다. 과연 이런 경로를 통해서 성현의 경지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겠는가? 설령 그의 뜻이 그 마음을 돌이켜 사람에게 베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다음 장의 愛人의 일에 그치므로, 이 장의 治人의 의의와 ≪중용≫의 '以人治人'說(제13장)에 비교해보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恕가 비록 다 같다고 하지만, 한 곳에서는 남에게 미쳐 가는 것으로 주장하였는 바, 이 둘의 차이는 털끝만한 데에서 나누어지니, 배우는 자가 마땅히 깊이 살피고 밝게 분별해야 할 부분이다. 예컨대 한 광무제 또한 어진 임금이라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아무런 죄가 없는 아내를 내쫓았음에도 그의 신하 질운(郅惲)은 대의에 따라서 강경하게 그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고, 도리어 부질없는 군소리로 그를 위로하였다. 이는 마치 부모의 3년상이라는 큰일을 행하지 못하면서도 그에 비해 하찮은 3개월 초상, 緦功을 꼼꼼히 살피는 격이며, 크게 밥술을 뜨고 국물을 질질 흘리면서 마시는 크나큰 불경을 범하면서도 음식물을 이빨로 끊는 따위의 자질구레한 일에 조심한 자라 하겠다. 그러나 한 광무는 도리어 질운은 '자신의 처지를 미루어서 임금의 사정을 아주 잘 아는 신하[善恕己量主]'라고 말했다.6) 그 잘못은 또한 매우 큰 것이며, 많은

6) 後漢書郅惲傳, 郭皇后廢. 光武之后, 以寵衰, 數懷怨而廢. 惲乃言於帝曰 臣聞夫婦之好, 父不能得之於子, 況臣能得之於君乎? 是臣所不敢言, 雖然, 願陛下念其可否之計, 無令天下有議社稷而已. 帝曰 惲善恕己量主, 知我必不有所左右而輕天下也. ≪후한서·郅惲傳≫에 의하면, 곽황후는 폐위된 광무의 황후이다. 총애가 쇠함으로써 원망을 품었다는 죄로 폐위당하였다. 이때에 질운이 무제에게 말하기를 "신은 듣자니, 부부의 사이는 아버지라 해도 자식에게 말할 수 없다 하는데, 하물며 신하가 임금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신이 감히 말씀드릴 수 없는 바입니다. 그러나 원컨대 폐하는 그 가부의 계책을 생각하시어 천하 사람들의 사직을 의논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라고 하니, 무제가 말하기를 '질운은 자신의 처지를 잘 미루어 임금의 마음을 헤아리니, 반드시 좌우 측근들의 말에 따라 천하의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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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들에게 임금이 하기 어려운 일을 이루도록 꾸짖지 못하게 하였고 선을 베풀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그 임금을 해치는 죄를 크게 열어 준 셈이다. 이는 한 글자의 뜻을 명백히 알지 못한 데에서 그 화가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다. 어찌 이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曰: 旣結上文而復引詩者三, 何也? 曰: 古人言必引詩, 蓋取其嗟嘆·咏歌·優游·厭飫, 有以感發人之善心, 非徒取彼之文證此之義而已也. 夫以此章所論齊家治國之事, 文具而意足矣. 復三引詩, 非能於其所論之外, 別有所發明也. 然嘗試讀之, 則反覆吟咏之間, 意味深長, 義理通暢, 使人心融神會, 有不知手舞而足蹈者, 是則引詩之助, 與爲多焉. 蓋不獨此, 他凡引詩云者, 皆以是求之, 則引者之意可見, 而詩之爲用亦得矣.

"이미 위 문장을 끝맺고서 다시 세 차례 ≪시경≫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옛 사람은 말할 적마다 으레 시를 인용해 왔다. 그것은 詠嘆調의 노래로서 여유있고 만족스럽게 사람의 선한 마음을 감동시키고 분발시킨다는 데 이유가 있는 것이지, 저 문장을 취해서 이 뜻을 증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 장에서 논술한 제가·치국에 관한 일은 문장이 완벽하고 의미 또한 만족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그럼에도 또 다시 세 차례 ≪시경≫을 인용한 것은, 위의 논지 이외에 별도로 다시 밝혀야 할 점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찍이 시험삼아 이를 읽다 보면 반복하여 읊조리는 사이에 의미가 심장하고 의리가 통창하여, 그 내용과 마음이 하나가 되고 정신 또한 일치됨으로써 나도

가벼이 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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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사이에 손발이 움질거리며 춤추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는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곧 시구를 인용하여 씀으로써 도움이 되는 바 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인용된 시 또한 이 같은 의미로 추구해보면, 인용한 자의 마음을 엿볼 수 있고, 시의 쓰임새 또한 알 수 있다."

曰: 三詩亦有序乎? 曰: 首言家人, 次言兄弟, 終言四國, 亦刑于寡妻, 至于兄弟, 以御于家邦之意也.

"세 차례 인용한 시 또한 순서가 있는지?" "맨 먼저 집사람을, 그 다음엔 형제를, 끝에서 사방의 나라를 말한 것, 또한 '내 아내에게 법이 되어 형제에게 이르고, 나아가 가정과 나라를 다스린다'(≪시경·대아·思齊篇≫)라는 뜻이다."7)

傳10傳十章

或問: 上章論齊家治國之道, 旣以孝弟慈爲言矣. 此論治國平天下之道, 而復以是爲言, 何也? 曰: 三者人道之大端, 衆心之所同得者也. 自家以及國, 自國以及天下, 雖有大小之殊, 然其道 不過如此而已. 但前章專以己推而人化爲言. 此章又申言之, 以見人心之所同而不能已者如此. 是以君子不唯有以化之, 而又

7) 新安陳氏曰 所引詩, 見大雅思齊篇. 孟子嘗引之, 集註云 御, 治也. 詩傳云 御, 迎也. 신안 진씨가 말하였다. "인용한 시는 ≪대아·사제편≫에 보인다. 맹자가 일찍이 이를 인용하였고, ≪집주≫에서는 御란 다스림으로 해석하였는데, ≪시전≫에서는 御란 맞이함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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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以處之也. 蓋人之所以爲心者, 雖曰未嘗不同, 然貴賤殊勢, 賢愚異稟, 苟非在上之君子, 眞知實蹈有以倡之, 則下之有是心者, 亦無所感而興起矣. 幸其有以倡焉而興起矣. 然上之人, 乃或不能察彼之心而失其所以處之之道, 則彼其所興起者, 或不得遂, 而反有不均之歎. 是以君子察其心之所同, 而得夫絜矩之道, 然後有以處此而遂其興起之善端也.

혹자가 물었다. "윗장에서 제가·치국의 도를 논하면서 효도·공경·사랑을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치국·평천하의 도를 논하면서 또 다시 이를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이 세 가지는 인도의 큰 실마리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얻은 것이다. 집안으로부터 나라에, 나라에서 천하에 미쳐 가는 데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그 도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앞장에서는 오로지 자신을 토대로 미루어 가야만이 사람을 교화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하였고, 이 장에서는 또 다시 거듭 이를 말하여 다 같은 사람의 마음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바 이와 같음을 밝히고 있다. 이로써 군자는 그들을 교화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대처방법 또한 설명하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일찍이 다 같은 것이지만 귀천의 세력이 다르고 賢愚의 기품이 다르므로, 위에서 다스리는 군자가 참으로 알고 실재로 실천하여 백성을 계도하지 않으면 다 같은 마음을 소유한 아랫사람 또한 보고 느낀 바 없어 흥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들을 계도하여 흥기시킨 바 있을지라도 윗사람이 혹 그들의 마음을 살피지 못하여 그들을 대하는 도를 잃게 되면, 그들을 흥기시킬 바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균평하지 못하다는 탄식이 야기될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마음이 한가지임을 알고 혈구의 도를 얻은 뒤에야 그들에게 대처하여 마침내 이미 흥기했던 선의 실마리를 이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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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何以言絜之爲度也? 曰: 此莊子所謂絜之百圍, 賈子所謂度長絜大者也. 前此諸儒 蓋莫之省而强訓以挈, 殊無意謂. 先友太史范公 乃獨推此以言之, 而後其理可得而通也. 蓋絜度也. 矩, 所以爲方也. 以己之心度人之心, 知人之所惡者, 不異乎己, 則不敢以己之所惡者, 施之於人 使吾之身一處乎此, 則上下·四方· 物我之際, 各得其分, 不相侵越而各就其中, 校其所占之地, 則其廣狹長短, 又皆平均如一, 截然方正而無有餘不足之處, 是則所謂絜矩者也. 夫爲天下國家, 而所以處心制事者, 一出於此, 則天地之間, 將無一物不得其所, 而凡天下之欲爲孝弟不倍者, 皆得以自盡其心而無不均之歎矣. 天下其有不平者乎. 然君子之所以有此, 亦豈自外至而强爲之哉. 亦曰物格知至, 故有以通天下之志, 而知千萬人之心, 卽一人之心. 意誠心正, 故有以勝一己之私, 而能以一人之心爲千萬人之心. 其如此而已矣. 一有私意, 存乎其間, 則一膜之外, 便爲胡越, 雖欲絜矩, 亦將有所隔礙而不能通矣. 若趙由之爲守則易尉, 而爲尉則陵守. 王肅之方於事上而好人佞己. 推其所由, 蓋出於此. 而充其類, 則雖桀紂盜跖之所爲, 亦將何所不至哉?

"어떻게 해서 絜 자를 헤아리다[度]의 뜻으로 말하는지?" "이는 ≪莊子≫의 '絜之百圍1)[헤아려보니 백 아름이었다].' 賈誼의 '度長絜大[길이를 재고 크기를 헤아리다]'의 뜻이다. 이에 앞서 여러 유학자들은 이를 살펴보지 못하고 挈 자에 대해 억지 주석을 붙였지만 아무런 의의가 없었는데, 선친의 벗 太史范公(이름은 如圭)이 홀로 이를 미루어 말한 뒤에야 그 이치가 통할 수 있게 되었다. 絜이란 헤아림이며, 矩란 직각을 만드는 기구

1) 莊子, 名周. 人間世篇, 匠石之齊, 至于曲轅, 見社櫟樹, 其大蔽牛, 絜之百圍. 장자의 이름은 周이다. ≪인간세편≫에 의하면, 匠石이 제나라를 가다가 곡원에 이르렀을 때 사직의 상수리나무를 보니, 그 크기는 소를 가릴 만하고, 이를 헤아려보니 백 아름이 되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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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나의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나와 다를 바 없음을 알았으면 감히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들에게 베풀지 말 것이며, 나의 몸을 하나같이 이와 같이 대처하면 상하사방, 피아의 즈음에 제각기 분수를 얻어 서로를 침범하거나 분수를 넘지 않음으로써, 각기 그가운데 나아가 그들이 점유한 곳을 비교해 보면, 장단 광협 또한 모두 하나같이 균평하게 되어 칼로 잘라놓은 것처럼 반듯하여 남는다거나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絜矩이다. 천하 국가를 다스리되 마음가짐과 일을 제재하는 바 하나같이 이처럼 하면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사물이든지 제자리를 얻지 않는 게 없을 것이며, 천하에 효도와 공경, 그리고 배반함이 없게 다스리고자 하는 위정자가 모두 그 마음을 스스로 다함으로써 백성으로부터 균평하지 못하다는 탄식의 소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고서도 천하가 평정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군자가 이처럼 하는 것 또한 외부로부터 이르러 온다거나 억지로 하는 일이 아니다. 또한 물격과 지지로써 천하 사람이 생각하는 뜻을 통달하여 천만인의 마음이 곧 한 사람의 마음임을 알고, 意誠과 心正으로써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마음을 극복하여 한 사람의 마음으로써 천만 인의 마음을 삼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이 하는 데 그칠 뿐이다.2) 만에 하나라도 그 사이에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한 꺼풀의 각막이 胡越처럼 멀어지게 되므로, 아무리 혈구를

2) 格庵趙氏曰 天下之志, 萬殊理則一也. 物格知至者, 能燭理則視衆人之心, 猶一心而明絜矩之義. 公則一致, 私則萬殊. 意誠心正者, 能克己則以一心爲衆人之心, 而盡絜矩之道 격암 조씨가 말하였다. "천하의 뜻이 일만 가지로 다르다지만 이치는 하나이다. 物格知至는 이치에 밝으면 衆人의 마음을 한 사람의 마음과 같이 하여 혈구의 의의를 밝게 할 수 있다. 공정하면 일치되고 사사로우면 萬殊가 되는 것이다. 意誠·心正者가 능히 克己를 하면 一心으로써 衆人의 마음을 함께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서 혈구의 도를 다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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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고 해도 또한 장차 막힌 바 있어 통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마치 趙由가 군수가 되어서는 都尉를 가볍게 여기고 도위가 되어서는 태수를 능멸하였던 고사와 王肅이 자신이 윗사람을 섬겼던 것처럼 그 아랫사람들이 그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는 격이라 하겠다.3) 그들의 유래를 미루어 보면 이 같은 사사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와 같은 일을 더욱 확산해 나간다면 걸주와 도척과 같은 행위 또한 어찌 주저할 턱이 있겠는가."

曰: 然則絜矩之云是 則所謂恕者已乎? 曰: 此固前章所謂如愛己之心以愛人者也. 夫子所謂終身可行, 程子所謂充拓得去, 則天地變化而草木蕃. 充拓不去, 則天地閉而賢人隱, 皆以其可以推之而無不通耳. 然必自其窮理正心者而推之, 則吾之愛惡取舍, 皆得其正, 而其所推以及人者, 亦無不得其正. 是以上下四方, 以此度之而莫不截然各得其分. 若於理有未明而心有未正, 則吾之所欲者, 未必其所當欲. 吾之所惡者, 未必其所當惡. 乃不察此而遽欲以是爲施於人之準則, 則其意雖公而事則私, 是將見其物我相侵·彼此交病, 而雖庭除之內·跬步之間, 亦且參商矛盾而不可行矣. 尙何終身之望哉. 是以聖賢凡言恕者, 又必以忠爲本. 而程子亦言忠恕兩言, 如形與影, 欲去其一而不可得. 蓋唯忠而後所如之心 始得其正是亦此篇先後本末之意也. 然則君子之學 可不謹其序哉.

"그렇다면 혈구를 恕라 말할 수 있는지?"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 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를 사랑하는 마음처럼

3) 魏志王肅傳, 肅, 太和中, 拜散騎常侍.(肅, 字子雍, 東海郡人) 史評曰 劉實以爲肅方於事上而好下佞己, 此一反也. ≪위지·왕숙전≫에 의하면, 왕숙은 태화 연간에 산기상시에 임명되었다(왕숙의 자는 子雍, 동해군 사람이다). 史評에 의하면 유실은 왕숙이 임금을 섬김에 있어서 아랫사람이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하니, 이것이 하나의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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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사랑한다'라는 것이다. 이는 공자가 말한 '종신토록 행하여야 할 일' 이며, 정자가 말한 '확충해 나아가면 천지가 변화하여 초목이 번성하고, 확충해 나가지 못하면 천지가 閉塞되어 현인이 근거한다'라는 것이다. 이는 모두 恕로 미루어 나아가면 통하지 않은 바 없기 때문이다.4) 그러나 반드시 궁리와 정심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아가면 나의 사랑과 미움, 그리고 취하고 버림이 모두 바르게 되고, 이를 가지고 사람에게 미쳐 나아가면 또한 바르게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때문에 상하 사방을 이것으로 헤아려서 반듯하게 하여 각각 제 분수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만일 이치에 밝지 못하여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내가 원하는 바 반드시 원하여야 할 일이 아닐 것이며, 내가 미워하는 바 반드시 미워하여야 할 일이 아닐 것이다. 이를 살피지 못하고 곧장 이를 사람에게 베푸는 준칙으로 삼고자 하면, 마음이 비록 공정하다 할지라도 그 일은 사사로운 것이다. 이는 또한 物我모두가 침범당하고, 피차 모두가 병듦으로써 가까운 집안의 뜰과 한 걸음 반 걸음 사이에서도 參商5)과 모순처럼 괴리되어 이(恕)를 행할 수 없을 것인데, 어떻게 종신토록 행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성현은 恕를 말할 때는 으레 충으로 근본을 삼았고, 정자 또한 '충서 두 글자는

4) 朱子曰 推得去則物我貫通, 自有箇生生無窮底意思, 便有天地變化草木蕃氣象 天地, 只是這樣道理. 若推不去物我隔絶, 欲利於己, 不利於人; 欲己之富, 欲人之貧, 欲己之壽, 欲人之夭, 似這氣象全然閉塞隔絶了, 便似天地閉賢人隱. 주자가 말하였다. "이를 미루어 나가면 物我를 관통할 수 있으며, 스스로 生生無窮의 의사가 있다. 이는 곧 천지변화와 초목이 무성하게 된 기상이다. 천지는 다만 이와 같은 도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일 이를 미루어 나가지 못하면 物我가 隔絶되므로 내 몸을 이롭게 하고자 한 나머지 남에게 이롭지 않은 해를 끼치며, 나만이 부유하고자 남을 가난하게 만들며, 자신만이 장수를 누리고자 남을 요절하게 만든다. 같은 기상은 서로 폐색과 격절을 낳게 되므로 이는 곧 천지가 폐색되고 현인이 은거하는 것과 같다."

5) 參의 독음은 森이니, 參·商은 별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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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체와 그림자 같은 사이로, 그 중 하나를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오직 충을 극진히 한 뒤에야 비로소 다 같은 마음에 정도를 얻을 수 있다. 이 또한 ≪대학≫의 선후와 본말의 뜻으로 말한 것이다.6) 그러기에 군자의 학문이란 그 차례를 삼가지 않을 수 없다."

曰: 自身而家, 自家而國, 自國而天下, 均爲推己及人之事. 而傳之所以釋之者 一事自爲一說, 若有不能相通焉者, 何也? 曰: 此以勢之遠邇·事之先後, 而所施 有不同耳, 實非有異事也. 蓋必審於接物, 好惡 不偏然後有以正倫理·篤恩義而齊其家. 其家已齊, 事皆可法, 然後有以立標準, 胥敎誨, 而治其國. 其國已治, 民知興起, 然後可以推己度物, 擧此加彼而平天下. 此以其遠近先後而施有不同者也. 然 自國以上, 則治於內者嚴密而精詳. 自國以下, 則治於外者 廣博而周遍 亦可見其本末 實一物, 首尾實一身矣. 何名爲異說哉?

6) 所當先而爲本者, 忠也; 所當後而爲末者, 恕也? 朱子曰 忠是本體, 恕是枝葉; 非是別有枝葉, 乃是本根中發出枝葉. "마땅히 먼저 해야 하고 근본이 되는 것은 忠이며, 마땅히 뒤에 하고 끝이 되는 것은 恕입니까?" 주자가 답하였다. "충이란 본체이며 서란 지엽이다. 이는 별도로 지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운데서 가지와 잎이 나오는 것이다." 陳氏曰 大槩忠恕, 只是一物. 就中截作兩片, 則爲二物. 蓋存諸中者, 旣忠, 則發出外來, 便是恕. 應事接物處不恕, 則是在我者, 必不十分眞實. 故發出忠底心, 便是恕底事; 做成恕底事, 便見忠底心. 진씨가 말하였다. "충서는 하나의 일이지만 그 중간을 둘로 나눈다면 이는 두 가지가 된다. 중심에 보존한 바 이미 忠으로 하면 바깥으로 나옴에 있어서 곧 恕가 된다. 응사접물처에서 恕를 하지 못한 것은 나에게 있는 바 반드시 십분 진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忠의 마음을 發出하는 것이 곧 恕의 일이며, 恕의 일을 만들어내는 것에서 忠의 마음이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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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서 집안으로, 집안에서 나라로, 나라에서 천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나의 몸을 미루어 사람에게 미쳐 가는 일이다. 그러나 전문에서 이를 해석할 때, 하나의 일에는 그에 따른 일설만을 주로 하여 서로 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는 무엇 때문인지?" "이는 멀고 가까운 지리적인 형세와 먼저 하고 뒤에 해야 할 일의 차례에 따라서 베푸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지, 실로 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사람을 접촉할 때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편벽되게 하지 않아야만이 윤리가 바르고 恩義가 두터워 집안을 다스릴 수 있고, 집안을 다스려 모든 일에 법이 된 이후에야 표준을 세워 많은 사람을 가르칠 수 있기에 이에 나아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나라가 다스려져 백성이 흥기할 줄 안 뒤에야 나의 몸을 미루어 사람을 헤아리고 이것을 들어서 저것에 더해줌으로써 천하를 평정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원근의 거리와 선후의 차례에 따라 베푸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단위 이상의 것은 내면에 다스리는 바 엄밀하고 자상스러우며, 국가 단위 이하의 것은 외면을 다스리는 바 드넓고 두루 빠뜨림 없으므로 이 또한 본말이 실로 하나의 物이며 처음과 끝이 실로 하나의 몸임을 볼 수 있는데, 어떻게 이를 異說이라 이름할 수 있겠는가."

曰: 所謂民之父母者, 何也? 曰: 君子有絜矩之道. 故能以己之好惡, 知民之好惡. 又能以民之好惡, 爲己之好惡也. 夫好其所好而與之聚之, 惡其所惡而不以施焉, 則上之愛下, 眞猶父母之愛其子矣. 彼民之親其上, 豈不亦猶子之愛其父母哉?

"이른바 '백성의 부모'란 무엇입니까?" "군자에게 혈구의 도가 있으므로 자신을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백성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알고, 또한 백성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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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써 자신의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삼는 것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여 그들에게 주고 모이게 하며, 그들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들이 싫어하는 일을 시키지 않으면, 윗사람이 아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니, 백성이 윗사람을 사랑함 또한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과 다를 바 있겠는가."7)

曰: 此所引節南山之詩, 何也? 曰: 言在尊位者 人所觀仰, 不可不謹. 若人君恣己徇私, 不與天下同其好惡, 則爲天下僇 如桀紂幽厲也.

"여기에서 ≪절남산편≫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많은 사람이 우러러보는 만큼 이에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임금이 몸을 방자히 행하여 사사로운 욕심에 따라서, 천하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미워함을 함께 하지 않으면 걸주와 幽厲처럼 천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다."

曰: 得衆得國, 失衆失國, 何也? 曰: 言能絜矩則民父母之, 而得衆得國矣. 不能絜矩則爲天下僇, 而失衆失國矣.

"'백성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백성을 잃으면 나라를 잃는다'라는 것은

7) 三山陳氏曰 父母之於子, 其所好惡, 無有不知者, 體氣同也. 至於民之好惡, 其君常有所不知, 無他, 制於形體之異耳. 能絜矩則能以民之心爲心, 而可以父母斯民, 民亦父母之矣. 삼산 진씨가 말하였다. "부모는 자식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모두 알고 있다. 이는 육체와 기운이 같기 때문이다. 백성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그 임금이 알지 못하는 것은 형체와 기운이 달라서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혈구를 하여 능히 백성의 마음으로써 마음을 삼고, 백성의 부모가 되면 백성 또한 임금을 부모로 섬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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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인지?" "혈구를 잘하면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들이 섬겨 나라를 얻을 수 있지만, 혈구를 다하지 못하면 천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므로 백성을 잃고 나라를 잃게 된다."

曰: 所謂先愼乎德, 何也? 曰: 上 言有國者不可不謹, 此言其所謹而當先者, 尤在於德也. 德, 卽所謂明德. 所以謹之, 亦曰格物致知誠意正心, 以修其身而已矣.

"'先愼乎德'이란 무슨 말인지?" "앞에선 국가를 소유한 자는 삼가지 않을 수 없음에 대해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삼가야 할 바를 말하기에 앞서 마땅히 먼저 할 일이 덕에 있음을 말하고 있다. 덕이란 명덕이며, 이를 삼간다는 것 또한 격물·치지·성의·정심으로 몸을 닦는 데 있을 뿐이다.

曰: 此其深言務財用而失民, 何也? 曰: 有德而有人·有土, 則因天分地, 不患乎無財用矣. 然不知本末而無絜矩之心, 則未有不爭鬪其民而施之以劫奪之敎者也. 易大傳曰 何以聚人曰財, 春秋外傳曰 王人者 將以導利而布之上下者也. 故財聚於上則民散於下矣. 財散於下則民歸於上矣. 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鄭氏以爲君有逆命則民有逆辭. 上貪於利, 則下人侵畔, 得其旨矣.

"여기에서 재물에 힘쓰면 백성을 잃게 된다는 점을 깊이 있게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덕이 있으므로 백성이 있고 국토가 있었던 만큼, 계절에 따라 밭갈이를 하고 땅을 나누어 주면 재물이 없음을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본말을 알지 못하고 혈구하는 마음이 없으면 백성들을 다투게 만들고 위협과 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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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의 가르침을 베풀지 않을 자가 없다. ≪주역·大傳≫에 의하면 '무엇으로 사람을 모으는가? 그것은 재물이다'라고 하였고, ≪춘추외전≫(≪국어≫의 별칭)에서는 '왕이란 백성을 복지와 이로움으로 계도하여 위아래에 널리 펴야 할 인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윗사람이 재물을 모으면 아래 백성이 흩어지게 되고, 백성에게 재물을 흩뜨리면 백성은 윗사람에게 돌아오게 된다. 귀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거슬리는 말이 되돌아오고,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또한 부정한 방법으로 나가기 마련이다. 鄭氏는 이에 대해서 '임금이 거슬리는 명을 내리면 백성들이 거슬리는 말을 하게 되고, 위에서 이욕을 탐내면 아랫사람은 배반하게 된다' 말하니, 이는 그 뜻을 잘 이해한 것이라 하겠다."

曰: 前旣言命之不易矣. 此又言命之不常, 何也? 曰: 以天命之重而致其丁寧之意, 亦承上文而言之也. 蓋善則得之者, 有德而有人之謂也. 不善則失之者, 悖入而悖出之謂也. 然則命之不常, 乃人之所自爲耳, 可不謹哉?

"앞에서 이미 '천명이란 보존하기 쉽지 않다'라는 점에 대해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또 다시 '천명이란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천명이 중하기에 간절하게 그 뜻을 말하고 있다. 이 또한 윗 문장에 잇따라 쓴 것이다. '선하면 천명을 얻을 수 있다'라는 것은 덕이 있으므로 백성이 있음을 말한 것이며, '불선하면 천명을 잃게 된다'라는 것은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부정하게 나가게 됨을 말하고 있다. 이로 보면'천명이 항상 같지 않음'은 위정자 스스로가 그처럼 만드는 것이니만큼이를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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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其引秦誓, 何也? 曰: 言好善之利, 及其子孫. 不好善之害, 流於後世, 亦由絜矩與否之異也.

"그 ≪진서≫를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선한 사람을 좋아한 데서 얻어지는 이로움은 자손에게 미쳐 가고, 선을 좋아하지 않은 데서 얻어지는 해로움은 후세에 뻗어 가게 되는데, 이 또한 혈구를 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曰: 媢疾之人 誠可惡矣. 然仁人惡之之深, 至於如此, 得無疾之已甚之亂邪? 曰: 小人爲惡, 千條萬端. 其可惡者, 不但媢疾一事而已. 仁人不深惡乎彼而獨深惡乎此者, 以其有害於善人, 使民不得被其澤, 而其流禍之長, 及於後世而未已也. 然非殺人于貨之盜, 則罪不至死, 故亦放流之而已. 然又念夫彼此之勢雖殊, 而苦樂之情則一. 今此惡人放而不遠, 則其爲害, 雖得不施於此, 而彼所放之地, 其民復何罪焉. 故不敢以己之所惡施之於人, 而必遠而置之無人之境, 以禦魑魅而後已. 蓋不惟保安善人 使不蒙其害, 亦所以禁伏凶人, 使不得稔其惡. 雖因彼之善惡而有好惡之殊, 然所以仁之之意, 亦未嘗不行乎其間也. 此其爲禦亂之術 至矣, 而何致亂之有?

"남을 시기하고 증오하는 사람은 참으로 가증스러운 자입니다. 그러나 어진 사람이 그를 이처럼 심하게 미워한다면 너무 지나치게 미워함으로 인하여 도리어 그가 난을 일으키게 되지 않겠습니까?" "소인의 악이란 수없이 많다. 물론 가증스러운 것은 어진 이를 시기하고증오하는, 하나의 일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진 사람이 그밖의 다른 사람은 저처럼 심하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유달리 이와 같은 사람을 그처럼 심하게 미워한 것은, 선한 사람에게 해를 끼쳐 백성들이 임금의 덕택을 입지 못하도록 만들고 그들의 화가 후세에 길이길이 미쳐 끝이 없을까를 염려한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재물을 탈취하고자 살인을 자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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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도적이 아니기에 그의 죄는 사형에 처할 수 없다. 때문에 그를 추방, 유배한 데 그칠 뿐이다. 그렇지만 또한 생각해보면 유배지가 중국의 형세와 다르다 하지만, 그 곳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느끼는 괴로움과 즐거운 마음은 매일반이다. 따라서 악한 자를 추방하되 멀리 보내지 않으면 그 피해가 중국에 미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가 추방, 유배된 지방에 거주하는 백성이야 무슨 죄가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히 내가 싫어하는 것을 저곳 사람들에게 베풀지 아니하고, 반드시 더 멀리 사람이 없는 곳에 방치하여 魑魅와 같이 철저하게 차단 한 뒤에 그만두는 것이다. 이는 선한 사람의 안녕을 보존하여 그 해를 입지 않도록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한 흉악한 자를 경계시켜 그들의 악이 더 커 나가지 않도록 엄단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선악에 따라서 好惡의 차이가 있으나 그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일찍이 그러한 사이에 흘러 넘치지 않은 바 없다. 이는 난을 막는 방법으로서 가장 지극한 것인데, 어찌 난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曰: 迸之爲屛, 何也? 曰: 古字之通用者, 多矣. 漢石刻詞有引尊五美·屛四惡者, 而以尊爲遵, 以屛爲迸, 則其證也.

"迸 자를 물리친다[屛]의 뜻으로 쓴 것은 무엇 때문인지?" "옛 글자에 통용되는 글자가 많다. 한대 ≪石刻詞≫에서 ≪논어≫의 '尊五美 屛四惡[다섯 가지 아름다움을 높이고, 네 가지 악을 물리친다]' 구절을 인용하였는데, 尊 자를 遵으로, 屛 자를 迸 자로 바꿔 쓴 것이 바로 그 예증이라 할 수 있다."

曰: 仁人之能愛人能惡人, 何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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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仁人者 私欲不萌而天下之公 在我. 是以是非不謬而擧措得宜也.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미워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어진 사람은 사욕이 싹트지 않으므로 천하의 모든 일에 공정하게 할 수 있는 까닭에 시비를 잘못 판단함이 없고 모든 일을 시의적절하게 할 수 있다."

曰: 命之爲慢, 與其爲怠也, 孰得? 曰: 大凡疑義, 所以決之, 不過乎義理·文勢·事證三者而已. 今此二字, 欲以義理·文勢決之, 則皆通 欲以事證決之, 則無考. 蓋不可以深求矣. 若使其於義理事實之大者 有所鄕背而不可以不究, 猶當視其緩急以爲先後況於此等字旣兩通, 而於事義無大得失, 則亦何必苦心極力以求之, 徒費日而無所益乎. 以是而推, 他亦皆可見矣.

"命을 慢 자로 바꿔 썼는데, 이를 怠 자로 바꿔 쓴 것에 비해 어느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보시는지?" "대체로 의심스런 부분을 결정한 데에는 내면의 의미, 문장의 맥락, 사실의 증거라는 이 세 가지로써 판단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에 이 두 글자를 내면의 의미와 문장의 맥락으로 결정짓는다면 모두가 통하는 말이지만, 사실의 증거로서 이를 살펴보고자 할 때 이를 고증할 길이 없다. 이는 깊이 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의미로 보나 사실의 향배에 관련되는 바로 보나 지대하다면 이를 깊이 탐색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완급에 따라서 선후를 정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 두 글자는 모두 통하는 글자이며, 사실과 의미에 있어서도 큰 잘못이 없는 것인 바, 굳이 고심어리게 이를 추구하고자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이것만으로 미뤄 보더라도 또한 그밖의 다른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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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찾아볼 수 있다."

曰: 好善惡惡, 人之性然也. 有拂人之性者, 何哉? 曰: 不仁之人阿黨媢疾, 有以陷溺其心. 是以其所好惡, 戾於常性, 如此與民之父母, 能好惡人者, 正相反. 使其能勝私而絜矩, 則不至於是矣.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을 어김이 있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어질지 못한 사람은 아첨과 편당, 시기와 증오의 감정에 마음이 沒溺된 까닭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떳떳한 본성에 어긋나는 바 이와 같게 된다. 이는 '백성의 부모로서 백성과 함께 좋아하고 미워한 자'와는 상반된 행위이다. 그가 사사로운 마음을 극복하여 혈구를 잘한다면 이런 데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曰: 忠信驕泰之所以爲得失者, 何也? 曰: 忠信者, 盡己之心而不違於物, 絜矩之本也. 驕泰, 則恣己徇私, 以人從欲, 不得與人同好惡矣.

"忠信·驕泰에 의해 득실이 빚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충신이란 나의 마음을 극진히 하여 남에게 어김이 없도록 하는 것이니, 이는 혈구의 근본이며, 교태란 자신을 방자히 하여 사사로움을 따르고 사람에 따라서 욕심을 좇음으로써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고 미워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曰: 上文深陳財用之失民矣. 此復言生財之道, 何也? 曰: 此所謂有土而有財者也. 夫洪範八政, 食貨爲先. 子貢問政而夫子告之亦以足食爲首, 蓋生民之道, 不可一日而無者, 聖人豈輕之哉. 特以爲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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者, 以利爲利, 則必至於剝民以自奉而有悖出之禍. 故深言其害以爲戒耳. 至於崇本節用, 有國之常政, 所以厚下而足民者, 則固未嘗廢也. 呂氏之說, 得其旨矣. 有子曰 百姓足, 君孰與不足. 孟子曰 無政事則財用不足, 正此意也. 然孟子所謂政事, 則所以告齊梁之君, 使之制民之産者, 是已. 豈若後世頭會箕斂, 厲民自養之云哉?

"앞의 문장에서는 財用에 의해서 백성을 잃게 되는 점을 깊이 있게 서술하였는데 여기에서 또 다시 재물을 생산하는 법에 대해 언급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이는 '국토를 소유하고 재물을 소유한 자'를 말한다. ≪홍범≫의 八政에서는 음식과 재물을 최우선으로 하였고, 자공이 정사를 물었을 때 공자 또한 음식이 풍족해야 함을 첫머리로 삼은 것으로 보아, 백성이 살아가는 데에는 어느 하나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어찌 이를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특별히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재리를 이익으로 만 생각하면 반드시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제 몸을 받듦으로써 결국 재물을 잃게 되는 화를 겪을 것이다. 이 때문에 그 피해에 대해서 깊이 있게 말하여 경계를 삼은 것이다. 근본을 숭상하고 쓰는 것을 절약하여8) 나라에 떳떳한 정책을 펴는 것은 아래 백성에게 두터이 하고 풍요롭게 하는 데 그 뜻이 있기에, 참으로 이러한 유는 없을 수 없는 정치 강령이다. 呂氏의 해설은9) 본지를 잘 파악했다 말할 수 있다. 有子의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 혼자서 부족됨이 있겠는가?' (≪논어·안연≫)라는 말과 맹자의 '정사가 없으면 재용이 부족하다'(≪맹자·

8) 崇本, 生之衆, 爲之疾也. 節用, 食之寡, 用之舒也. 崇本이란 생산하는 사람이 많고 일을 빨리 하는 것이요, 節用이란 먹는 자가 적고 쓰기를 늦추는 것이다.

9) 呂說, 已見章句中. 여씨의 말은 이미 ≪장구≫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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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라는 말이 바로 이 같은 뜻이다. 그러나 맹자가 말한 '정사'란 제 선왕과 양 혜왕에게 고한 말로서, 그들에게 백성의 恒産을 이처럼 제정하라는 '정사'를 말한 것이지, 후세에 이르러 사람마다 가혹한 세금을 수탈하여 백성을 병들게 하면서까지 제 한 몸만을 받드는 '정사'를 말하겠는가."10)

曰: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何也? 曰: 仁者不私其有, 故財散民聚而身尊. 不仁者惟利是圖, 故捐身賈禍以崇貨也. 然 亦卽財貨而以其效言之爾, 非謂仁者眞有以財發身之意也.

"어진 자는 재물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어질지 못한 자는 몸으로 재물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 "어진 자는 재물을 사사로이 소유하지 않는 까닭에 재산을 흩뜨리어 백성을 모음으로써 자연히 몸이 높아져 가고, 어질지 못한 자는 오로지이익만을 도모하기 때문에 몸을 잃고 화를 불러들이면서까지 재물을 숭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또한 재물에 의한 그 공효를 말한 것일 뿐, 어진 자가 참으로 재물을 통해서 몸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을 말한 것은 아니다."

曰: 未有府庫財, 非其財者, 何也? 曰: 上好仁則下好義矣, 下好義則事有終矣. 事有終則爲君者, 安富尊榮而府庫之財, 可長保矣. 此以財發身之效也. 上不好仁則下不好義, 下不好義則其事不終, 是將爲天下僇之不暇, 而況府庫之財, 又豈得爲吾之財乎?

10) 前漢書陳餘傳, 秦爲亂政, 外內騷動, 百姓罷敝. 頭會箕斂, 以供軍費, 財匱力盡. ≪전한서·진여전≫을 살펴보면, 진나라에 난정이 거듭되었을 때 내외에 소동이 일어났으며 백성은 피폐하기 짝이 없었다. 사람의 머릿수로 계산하여 세금을 착취하여 군비에 충당하자, 재물은 탕갈되고 백성의 힘은 극도로 쇠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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若商紂以自焚而起鉅橋鹿臺之財, 德宗以出走而豐瓊林大盈之積, 皆以身發財之效也.

"'창고의 재물이 그의 재물이 되지 않는 게 없다'라는 말은 무슨 말인지?" "윗사람이 仁을 좋아하면 아래 백성은 義를 좋아하게 되고, 아래 백성이의를 좋아하면 모든 일이 모두 끝맺게 되어 부의 안녕과 영화를 향유함으로써, 창고의 재물을 길이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이 곧 '재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라는 공효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윗사람이 仁을 좋아하지 않으면 아래 백성은 의를 좋아하지 않게 되고, 아래에서 의를 좋아하지 않으면 일을 끝맺지 못함으로써 장차 천하 사람들에게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창고의 재물 또한 어떻게 나의 재물이랄 수 있겠는가. 商나라의 紂는 결국 자신이 불에 타죽은 결과를 빚으면서까지 鉅橋와 鹿臺의 재물을 일으켰고,11) 당 덕종은 결국 쫓겨나면서까지 瓊林과 大盈에 재물을 가득히 쌓았다.12) 이 모두가 '몸으로 재물을 일으켜 세운' 증험을 말한 것이다."

11) 史記, 紂使師涓, 作新淫聲北里之舞靡靡之樂; 厚賦稅以實鹿臺之財而盈鉅橋之粟. 以酒爲池, 縣肉爲林, 爲長夜之飮, 百姓怨望而諸侯有畔者. 周武王, 於是遂率諸侯伐紂, 紂亦發兵距之牧野. 甲子日, 紂兵敗 紂走登鹿臺, 衣其寶玉, 乃自焚而死. 武王遂斬紂頭, 懸之白旗. 又書武成篇,(此篇記武王功成之事.) 乃反商政, 政由舊; 散鹿臺之財, 發鉅橋之粟, 大賚于四海, 而萬姓悅服. ≪사기≫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紂가 師涓으로 하여금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북리의 춤과 미미의 음악을 저작하였고, 많은 부세로써 녹대에 재물을, 거교에 곡식을 채웠다. 그리고 술동이가 연못을 이루고, 살코기를 매달아 숲을 이루었으며, 긴긴 밤에 질탕하게 잔치를 벌이자 백성은 원망하고 제후는 배반하는 사람이 있었다. 주 무왕이 이에 제후를 거느리고 紂를 정벌하자, 紂 또한 병사를 보내어 목야에서 막았지만 갑자일에 주의 군대가 패배하자, 주는 녹대로 도망하여 寶玉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서 분신자살을 하였다. 무왕은 마침내 주의 머리를 베어 하얀 기에 달았다. 또 ≪무성편≫을 기록하였다(이 편에는 무왕의 성공에 관한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상나라의 어진 정치를 돌이켜 옛 정사를 따랐으며 녹대의 재물과 거교의 곡식을 천하 백성에게 나눠주자 백성이 기뻐하여 굴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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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其引孟獻子之言, 何也? 曰: 鷄豚牛羊, 民之所畜養以爲利者也. 旣已食君之祿而享民之奉矣, 則不當復與之爭. 此公儀子所以拔園葵·去織婦, 而董子因有與之齒者去其角, 傅之翼者兩其足之喩 皆絜矩之義也. 聚斂之臣, 剝民之膏血以奉上而民被其殃, 盜臣竊君之府庫以自私而禍不及下. 仁者之心, 至誠惻怛, 寧亡己之財而不忍傷民之力. 所以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 亦絜矩之義也. 昔孔子以臧文仲之妾織蒲而直斥其不仁. 以冉求聚斂於季氏而欲鳴鼓以聲其罪. 以聖人之宏大兼容, 溫良博愛, 而所以責二子者疾痛深切, 不少假借如此, 其意亦可見矣.

"여기에서 맹헌자의 말을 인용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닭 돼지 소 염소란 백성들이 이를 길러 이익을 누리는 것들이다. 임금의 녹을 먹고 백성의 받듦을 향유하는 벼슬아치라면 의당 그들과 이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 이는 곧 公儀子가 후원의 해바라기를 뽑고, 길쌈하는 부인을 내쫓은 것이며,13) 동중서의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동물에게는 뿔

12) 唐書陸贄傳, 始帝播遷,(帝, 德宗也. 朱泚反, 帝出走在外.) 府藏委棄. 至是, 天下貢奉稍至乃於行在夾廡署瓊林大盈二庫別藏貢物贄諫以爲今師旅方殷瘡痛呻吟之聲未息遽以珍貢私別庫恐羣下有所觖望不滿所望請悉出以賜有功給軍賞帝悟卽撤其署. ≪唐書·陸贄傳≫에 의하면, 처음 帝가 播遷(帝는 덕종을 말한다. 朱泚가 배반했을 때 덕종은 바깥으로 달아났었다)했을 때 창고의 재물을 모두 버렸다. 이에 천하의 貢奉이 조금 이르자, 행재소에다 협무서를 마련하고, 瓊林·大盈 두 창고에 별도로 공물을 저장하였다. 이에 육지가 "오늘날 군사들이 죽어가고, 신음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데 이러한 보배 공물을 사사로이 別庫에 저장한다면 많은 신하들이 실망할까 두렵습니다. 청컨대 이를 모두 꺼내어 공 있는 사람에게 상으로 내려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자, 덕종은 이에 깨달은 바 있어 곧바로 협무서를 철회하였다.

13) 史記, 公儀休, 爲魯相, 食茹而美食, 拔其園葵而棄之. 見其家織布好而疾出其家婦, 燔其機云. 欲令農夫工女安所讎其貨乎?(謂食祿者, 不得與下民爭利.) ≪史記≫를 살펴보면 公儀休가 노나라 재상이 되었을 때, 가지를 먹고 맛있게 여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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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주지 않고, 날개를 준 동물에게는 두 개의 발만 주었다'14)라는 비유가 모두 혈구의 뜻을 말한 것이다. 많은 세금을 수탈하는 신하는 백성의 고혈 을 수탈하여 윗사람을 받듦으로써 백성이 그 피해를 입게 되고, 도둑 신하는 군주의 창고에서 도둑질하여 스스로 착복하는 것이기에 아래 백성에게는 피해를 입히지 않는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진실하고 인정이 넘쳐, 차라리 나의 재물을 잃을지언정 차마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킬 수 없기에, 많은 세금을 거둬들이는 신하를 두기보다는 차라리 도둑질하는 신하를 둔다는 것이니, 이 또한 혈구의 뜻이다. 옛적에 공자는 臧文仲의 첩이 갯버들나무로 돗자리를 짜자, 그를 不仁하다 꾸짖었고,15) 염구가 계씨를 위하여 많은 세금을 걷자, 공자는 북을 울려

화원의 해바라기를 뽑아버렸고, 집안에서 베 짜는 것을 보고서 부인을 내쫓고 베틀을 불태워 버렸다 한다. 이는 농부와 工女들과 어찌 그 재물을 다툴 수 있겠는가라는 점을 말한다(국녹을 먹는 사람들은 아래 백성과 이곳을 다투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14) 西漢書, 董仲舒以賢良對策曰 夫天亦有所分. 予之齒者, 去其角.(言天生物賦予, 有分定牛無上齒者, 則有角. 其餘無角, 有上齒; 傅之翼者, 兩其足傅(言鳥不四足) 是所受大者, 不得取小也. 古之所予祿者, 不食於力, 不勤於末.(末, 謂工商之業.) 是亦受大者, 不得取小. 與天同意者也. ≪서한서≫를 살펴보면 ≪현량대책≫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하늘 또한 분수가 있다. 예리한 이를 준 짐승에게는 뿔을 주지 않았고(하늘은 만물을 내어 부여할 때 일정한 분수가 있다. 소에게 윗니가 없기에 뿔이 있고 그 나머지 뿔이 없는 짐승에게는 윗니를 주었다), 날개를 붙여준 동물에게는 그 발을 둘로 주었다(새에게는 네 개의 발을 주지 않았다). 이는 큰 것을 받은 짐승은 작은 것을 취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옛적에 하늘이 부여한 바에 의해 祿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노동으로써 다시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였고, 末에 힘쓰지 못하도록 하였다(末이란 工·商業을 말한다). 이 또한 큰 것을 받은 자는 작은 것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의 뜻과 함께하는 것이다.

15) 事詳見論語公冶長篇. 이 일은 ≪논어·공야장편≫에 자세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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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죄를 성토하도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성인은 큰 아량과 넓은 도량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여 온화하고 선량하며 널리 사랑을 하면서도, 유독 이 두 사람에게 심한 질책을 가하여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의 마음 또한 미루어 알 수 있다."16)

曰: 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 何也? 曰: 以利爲利, 則上下交征, 不奪不饜, 以義爲利, 則不遺其親, 不後其君. 蓋惟義之安而自無所不利矣. 程子曰 聖人以義爲利, 義之所安, 卽利之所生, 正謂此也. 孟子分別列義利, 拔本塞源之意, 其傳蓋亦出於此云.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財利를 이익으로 생각하지 말고, 의리로써 이익을 삼는다'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재리를 이익으로 삼으면 '상하가 서로 탈취하고자 하여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을 것이다'(≪맹자·양혜왕 상≫). 그러나 의리로 이익을 삼으면 어버이를 잊지 않고 임금을 뒤로 하지 않으며, 오직 의리에 편안하여 스스로 이롭지 않은 바 없을 것이다. 정자가 '성인은 의리를 이익으로 생각하며, 오직 의리에 편안함으로써 스스로 이롭지 않은 바 없다'라고 한 것은,17) 바로 이를 말함이다. 맹자가 의리와 財利를 분별하여 발본색

16) 三山陳氏曰 織紝亦儉矣, 而君子疾之, 以其主於利也. 冉求之聚斂, 未必有後世掊克之事. 但聚斂, 藏於季氏之家; 而不能布之於下, 則聖人疾而欲攻之, 況剝民力以自富乎? 삼산 진씨가 말하였다. "베 짜는 것 또한 검박한 일임에도 군자가 이를 미워한 것은, 그가 利를 주로 하였기 때문이며, 염구의 취렴은 후세 탐관오리들의 착취처럼 혹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취렴은 계씨의 집안에 저장한 것이며 천하에 널리 펴는 것이 아니기에, 공자는 그를 미워하여 그의 죄를 성토하고자 한 것이다. 하물며 백성의 힘을 박탈하여 스스로 부를 누린다면 어떠하겠는가?"

17) 朱子曰 只萬物皆得其分, 便是利. 君得其爲君, 臣得其爲臣, 父得其爲父, 子得其爲子, 何利如之? 這利字, 卽易所謂利者義之和. 利, 便是義之和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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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했던 그 뜻을 전수받은 것 또한 이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曰: 此其言菑害並至, 無如之何, 何也? 曰: 怨已結於民心, 則非一朝一夕之可解矣. 聖賢深探其實而極言之, 欲人有以審於未然而不爲無及於事之悔也. 以此爲防, 人猶有用桑羊·孔僅· 宇文融楊矜·陳京·裴延齡之徒, 以敗其國者. 故陸宣公之言曰 民者, 邦之本. 財者, 民之心. 其心傷, 則其本傷. 其本傷, 則枝幹凋瘁而根柢覆拔矣. 呂正獻公之言曰 小人聚斂以佐人主之欲, 人主不悟, 以爲有利於國而不知其終爲害也. 賞其納忠, 而不知其大不忠也. 嘉其任怨而不知其怨歸於上也. 嗚呼. 若二公之言, 則可謂深得此章之指者矣. 有國家者, 可不監哉?

"이에서 '天災와 人害가 한꺼번에 이르면 어찌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인지?" "백성의 마음속 깊이 원한이 사무치면 일조일석에 풀 수 없는 법이다. 성현이 그 실상을 깊이 탐구하여 지극히 말한 것은, 발생하기 이전에 일을 살펴 어찌할 수 없는 후회를 없게 하고자 하여, 이로써 예방을 삼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桑羊·孔僅·宇文融·楊矜·陳京·裴延齡18) 등을 등용

주자가 말하였다. "만물이 모두 제 분수를 얻는 것이 곧 이로움이다. 임금은 그 임금다움을 얻고, 신하는 그 신하다움을 얻고, 아버지는 그 아버지다움을 얻고, 자식은 그 자식다움을 얻는다면 어떤 이로움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이 利 자는 ≪역경≫에서 말하는 '利란 義의 和'라는 뜻이니, 利가 곧 義의 和가 있는 곳이다."

18) 桑弘羊楊愼矜, 朱子以在宋避諱, 故各去一字. 桑弘羊·楊愼矜 등은 주자가 송조의 避諱로써 각각 한 글자씩 떼어 버린 것이다. 張氏存中曰 桑弘羊, 洛陽賈人之子. 漢武帝朝, 爲治粟都尉, 領大司農; 盡管天下鹽鐵 後爲御史大夫. 昭帝朝, 與燕王旦謀反, 坐誅 상홍양은 낙양 장사꾼의 아들이다. 한 무제 당시 治粟都尉가 되어 大司農을 다스리면서 천하의 鹽鐵을 관리하였으며, 후일 어사대부가 되었다. 昭帝朝에 연왕 旦과 더불어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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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마침내 나라를 패망케 하였다. 이 때문에 陸宣公19)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재물은 백성의 마음이니, 그 마음을 아프게 하면 근본을 잃게 되고, 그 근본을 잃으면 가지와 줄기가 메마르게 됨으로써 뿌리까지 뽑히

孔僅漢武帝朝爲大農丞領鹽鐵事後爲大農令 孔僅은 漢 武帝朝에 大農丞이 되어 鹽鐵의 일을 담당하였으며 후일 大農令이 되었다. 宇文融, 辨給多詐. 唐玄宗朝, 爲覆田勸農使, 擢兵部員外郎兼侍御史. 又兼稅地安輯戶口使, 拜御史中丞. 有司劾融在汴州, 給隱官息錢巨萬. 給事中馮紹烈, 深文推證, 詔流巖州道廣州, 惶恐而卒. 宇文融은 말을 잘하고 속임수에 능하였다. 당 현종조에 복전권농사가 되었다가 병부원외랑 겸 시어사로 발탁되었고, 또 조지안집호구사를 겸임하고 어사중승에 임명되었다. 유사가 "우문융이 변주에 있으면서 官息錢 수만금을 숨긴 사실을 속여 왔다" 하였고, 급사중 풍소열이 이 사실을 깊이 파헤쳐 증거를 잡자, 그를 巖州道 廣州로 유배를 보냈다. 그는 두려움에 마침내 죽었다. 楊愼矜, 唐玄宗朝, 爲御史知雜事. 後授御史中丞, 以蓄讖緯妖言, 賜死. 양신긍은 당 현종조에 어사가 되어 잡사를 관장했으며, 후에 어사중승이 되어 讖緯와 妖言을 조장했다는 죄로 賜死되었다. 陳京, 事唐德宗. 帝討李希烈, 財用屈. 京爲給事中, 與戶部侍郎趙贊, 請稅民屋間架, 籍賈人資力, 以率貸之. 後以事罷, 爲秘書少監, 卒. 진경은 당 덕종을 섬겼는데 덕종이 이희열을 토벌하다가 재용이 부족하게 되자, 진경은 給事中으로서 호부시랑 조찬과 함께 민가의 칸수에 따라 세금을 추징하였으며, 장사들의 재산을 문서로 작성, 비율대로 그들의 재력을 빌렸으나, 후일 그 일이 끝나자 비서소감이 되었다가 죽었다. 裴延齡, 唐德宗朝, 爲司農少卿領度支. 取宿姦老吏, 與謀以固帝幸. 延齡資苛刻, 專剝下附上, 肆騁譎怪. 時人側目, 及死人語以相安, 惟帝悼不已. 배연령은 당 덕종조에 사농소경 영탁지가 되었는데, 宿姦老吏를 모아들여 그들과 함께 모의하여 덕종의 총애를 꾀하였다. 이에 배연령의 가혹한 정책은 오로지 아랫사람의 재물을 착취해 윗사람에게 전해주고, 괴이한 일을 예사로 자행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죽었을 때에 사람들은 서로 편안하게 되었다고 말하였지만 덕종만은 그의 죽음을 슬퍼해 마지않았다.

19) 陸公, 名贄, 字敬輿, 蘇州嘉興人. 事唐德宗, 諡曰宣, 其言見奏議. 육공의 이름은 贄이며 자는 敬輿이니 소주 가흥 사람이다. 당 덕종을 섬겼으며 시호는 宣이며 그 말은 奏議에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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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된다'라고 하였고, 呂正獻公20)은 '소인이 많은 세금을 수탈하여 임금의 욕심을 채워주면, 임금은 이를 알지 못하고 나라에 유리하다고 생각함으로써 결국 해가 된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게 된다. 때문에 그를 충성을 다한 신하라 하여 상을 내리기까지 하여 그가 큰 불충을 범한 줄을 모르며, 그가 백성의 원한을 산 것을 가상히 여기지만 그 원한이 위로 되돌아올 줄을 알지 못하게 된다'라고 한다. 아! 이 두 분의 말은 본장의 뜻을 깊이 잘 이해하였다고 하겠다.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이를 거울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21)

20) 呂公, 名公著, 字晦叔, 諡正獻, 河南人. 其言見奏箚. 呂公의 이름은 公著이며, 자는 晦叔이며 시호는 正獻이니 하남 사람이다. 그의 말은 奏箚에 나타나 있다.

21) 格庵趙氏曰 興利之臣不過以聚斂爲長策, 以掊克爲善謀, 唯求取媚於上, 而不顧結怨於下. 人主以其奉己之欲, 悅而寵之, 不知其失民心而蠹國脈. 菑害並至, 匪一朝一夕之可解, 有必然之理者. 此桑羊之徒, 所以誤人之天下國家, 至於極也. 陸呂二公之言, 可謂當矣. 如司馬公 闢善理財者不加賦之說, 則亦所當知其言曰 天地所生, 財貨百物, 止有此數 不在民則在官, 譬如雨澤, 夏澇則秋旱, 此古今之至言也. 後世之臣, 有以言利媒人主者, 其尙以大學此章之旨, 與三君子之言, 察之 격암 조씨가 말하였다. "재리를 밝히는 신하들은 취렴으로 으뜸을 삼고 掊克으로 좋은 계책을 삼아, 오로지 윗사람에게 아첨을 구할 뿐, 아랫사람과 원수 맺는 일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임금은 자기를 잘 받들어 준다고 그를 좋아하고 총애하여 민심을 잃고 국가의 운명에 좀이 되는 줄을 알지 못하여 결국 재해가 이르게 되니, 一朝一夕에 풀릴 수 없음은 필연적인 이치이다. 이는 상양의 무리들이 천하 국가를 오도하여 혼란 이 극도에 이르게 한 것이다. 陸·呂·二公의 말은 타당하다. 예컨대 사마공이 理財에 능한 사람을 물리쳐서, 그들이 '賦稅를 더 걷어야 한다'라는 말을 못하게 했다. 이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천지가 財貨와 百物을 생산하는 이것은 몇 가지에 그치고 있다. 백성에게 있지 않으면 그것은 官에 있다. 비유하자면 빗물과 같다. '여름에 장마가 지면 가을에 가뭄이 온다'라는 것은 고금의 명언이다. 후세에 임금을 잘 섬기려는 신하들은 ≪대학≫의 전문 제10장의 뜻과 三君子의 말을 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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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此章之文, 程子多所更定而子獨以舊文爲正者, 何也? 曰: 此章之義博, 故傳言之詳. 然其實則不過好惡義利之兩端而已. 但以欲致其詳, 故所言已足, 而復更端以廣其意. 是以二義相循, 間見層出, 有似於易置而錯陳耳. 然徐而考之, 則其端緖接續, 脉絡貫通, 而丁寧反復, 爲人深切之意, 又自別見於言外, 不可易也. 必欲二說中判, 以類相從, 自始至終, 畫爲兩節, 則其界辨雖若有餘, 而意味或反不足, 此不可不察也.

"이 장의 문장에 대해서 정자는 개정한 부분이 많은데, 선생은 유독 옛 문장 그대로 따르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지?" "이 장의 뜻은 광범위하므로 전문에서 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은 好惡와 義利라는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 점을 자세히 다하고자 한 까닭에 앞서 말한 것만으로도 충분한데도 다시 그 단락을 바꿔 가면서 그 뜻을 밝힌 것이다. 이로써 두 의의는 서로 번갈아 가면서 뒤섞여 나타나고, 한층 표출하여 마치 뒤바꿔 잘못 서술된 것처럼 보이지만, 서서히 고찰해보면 그 단락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문장의 맥락이 일관되어 재삼 되풀이되고 있다. 때문에 깊고 간절한 가르침의 뜻 또한 이 말의 밖에 각별히 나타나 있으므로 쉽게 볼 수 없는 글이다. 만일 굳이 好惡·義利 二說을 한 중간으로 나누어 유별로 정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2절로 구분짓고자 한다면 그 한계가 비록 잘 나타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의미는 도리어 혹 부족한 감을 느끼게 될 것이니, 이러한 점을 잘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