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章)은 고대에 학교를 세워 사람을 가르쳤던 선왕의 교육법을 밝혀 후세의 사람들에게 고해준 공자의 말씀이다. '대학' 두 글자는 이 책의 주요 핵심이 되는 부분이며, 이 장은 앞뒤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 단락의 <大學>·<知止>·<物有> 3절은 삼강령(3대 원칙)을 총괄적으로 말하고, 이를 뒤이어서 선후의 차례로써 끝을 맺으면서 이를 어떠한 순서에 따라서 실천해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공부상의 과정을 제시해 주었으며, 뒤 단락의 <古之>·<物格>·<自天>·<其所> 4절은 팔조목(8개 세칙)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이어서 8조목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수신에 중점을 두어 추구해야 한다는 점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로 보면 본장의 가장 중요한 요체가 수신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본장의 전체적인 주된 의미는 삼강령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삼강령 또한 명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뒤 단락에서 수신을 근본으로 귀결시킨 것만으로도 곧 명덕이 근본임을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책을 볼 때 성인의 경1장을 읽으면서 반드시 전10장과 관련지어 보아야 하겠지만, 지나치게 전문 10장으로 경문 1장을 침범해서도 안 된다.
이 절(節)은 ≪대학≫의 삼강령에 대해 말하고 있다.
명명덕은 격물·성의·정심·수신의 강령이며, 신민은 제가·치국·평천하의 강령이며, 止於至善은 명덕·신민의 총괄이요, 또한 팔조목의 강령이기도 하다. ≪장구집주≫에 의하면 "대학은 '대인'의 학문[大人之學]이다" 하여, 어린아이[小子]의 대칭으로 말하고, '大學之道'의 道란 학문을 닦아 나가는 방법, 곧 도리의 당연함을 말하였다. 덕을 밝힌다는 것은 공간과 시간, 둘로 나눠볼 수 있는데, 밝음을 더욱 확충하여 넓혀 간다는 것은 공간적인 橫說이며, 그 밝음을 끊임없이 밝혀 나간다는 것은 시간적인 竪說이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新民]는 데에는 백성을 기른다는 뜻까지 겸하고 있지만, 본서에서는 백성의 교육[敎]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지 양육[養]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며, 지극한 선이란 지나치다거나 부족함이 없는가장 훌륭하고, 가장 완벽한 도리를 말한다. 따라서 이는 작은 성취에 안주한다거나 卑近한 공로에 스스로 만족해 하는 것과는 반대로 보아야 한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으며, 지극한 선에 그치는 데 있다.
증자는 공자의 뜻에 따라 경1장을 전술하여 후세에 가르침을 남겼다. 인류의 역사가 존재한 이후, 고금 상하의 일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모두 갖추고 있어서 정밀하게 대처할 수 있고, 타인과 自我, 그리고 내면의 정신 세계와 외재적 모든 현상 사물들을 모두 겸하여 빠뜨림 없는 공부가 있다면 그것은 2천 자(경문 1장 205자, 전문 10장 1,546자)가 되지 않는 ≪대학≫이다. 그렇다면 교육의 보편적인 지침은 과연 어디에 있는 것일까? 첫째, 나의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덕이란 인간이 하늘로부터 받은 이치로서 원초로부터 비어 있고 밝은 것[虛明]이지만, 선천적으론 기품에
얽매이고 후천적으론 물욕에 가림으로써 때론 어두워지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그 본체의 밝음은 영원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배우는 자는 밝음이 나타나는 곳을 따라서 그 밝음을 더욱 확충하여 虛明한 본체를 지극히 밝히고, 이를 밝힌 뒤에는 끊임없이 이미 밝힌 밝음을 가지고서 애초의 본성에로 회복시켜야 한다. 이것이 대인 학문의 본체[體]이다. 둘째,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 덕이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얻은 것으로, 나에게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밝은 덕을 밝혔으면 이를 미루어 백성 또한 새롭게 해주어야 한다. 이는 본디 밝은 덕을 가지고서도 스스로 밝히지 못한 자들까지도 모두가 새로워지도록 진작시켜 그 예전에 물들어 더렵혀진 것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대인 학문의 작용[用]이다. 셋째, 지극한 선에 그치는 데 있다. 나의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으로 한다거나 또한 구차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일상생활상에 나타나는 당연한 법칙이 바로 지극한 선이다. 이는 반드시 나의 덕을 밝히고 백성의 덕을 새롭게 하는 데에 모두 지극함을 다하여, 다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는, 최고지상의 완전무결한 선에 그쳐야 한다. 이는 대인 학문의 체용에 있어서의 極則(會極)이다. ≪대학≫의 도는 바로 여기에 있다.
程子曰 親은 當作新하다
大學者는 大人之學也라 明은 明之也라 明德者는 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하야 以具衆理而應萬事者也로되 但爲氣稟所拘와 人欲所蔽면 則有時而昏이라 然其本體之明은 則有未嘗息者일새 故學者 當因其所發而遂明之하야 以復其初也라 新者는 革其舊之謂也니 言旣自明其明德하고 又當推以及人하야 使之亦有以去其舊染之污也라 止者는 必至於是而不遷之意오 至善
은 則事理當然之極也라 言明明德·新民을 皆當止於至善之地而不遷이니 盖必其有以盡夫天理之極하야 而無一毫人欲之私也라 此三者는 大學之綱領也라
정자(程子)가 말하였다. "親 자는 마땅히 新 자로 써야 한다." 대학이란 대인의 학문이다. 明은 밝힘이다(……을 밝히다). 明德은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로서, 비어 있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음으로써 뭇 이치가 갖추어져 있고 모든 일에 응할 수 있으나, 다만 氣稟에 얽매인 바와 인욕에 가린 바 있어 때로 어두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본체의 밝음은 일찍이 쉼이 없다. 그러므로 배우는 자는 마땅히 그 본체에서 발하는 바로 인하여 마침내 이를 밝혀서 그 본초의 밝음을 회복해야 한다. 新이란 옛것을 개혁한다는 말이다. 스스로의 밝은 덕을 밝혔으면 또한 마땅히 이를 미루어서 남에게까지 미치어 그들 또한 옛날에 물든[舊染] 더러움을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止는 반드시 거기에 이르러 다시는 옮겨갈 수 없다는 뜻이다. 至善은 사리의 당연한 극치이다. 이는 밝은 덕을 밝히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함을 모두 지극한 선이 있는 곳에 그쳐 다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도록 함을 말하니, 이는 반드시 그 천리의 지극함을 다하여 털끝만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대학≫의 강령
[大原則]이다.
程朱說에서는 ≪대학≫에 세 개의 오자[三誤字]를 인정하고 있다. 이는
'親民'의 親은 新으로, 전7장 '身有……'의 身은 心으로, 末章 '擧而不能先命
也'의 命은 慢으로 써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王陽明·丁茶山은 모두 三誤字說을 부정하고 이를 本字라고 고집하였는데, 王과 丁이 부정하는 입장 또한 각기 다르다.1) 이의 요지 또한 더없이 중요한 부분이기에 본서의 補論으로 첨부하였는 바, 참조하기 바란다.
대학이란 大人의 학문이다. 대인은 小子에 대칭되는 말로서 연소자의 반대말인 연장자로서의 대인의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위정자의 맏이와 서민의 준수한 자를 주로 교육시키던 곳을 대학이라 일컬은 것으로 본다면 이는 덕행을 소유한 인격체로서의 대인, 그리고 통치자의 지위로서의 대인까지를 종합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明明德의 앞 明 자는 동사로서 밝히다의 뜻이다. 明德이란 혹은 心이라 하기도 하고 혹은 性이라 하기도 하는데, 小註에서 朱子는 命과 性·心 그리고 명덕으로 나누어 말하였기 때문에 자칫 心性의 밖에 별개의 명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명덕에 대한 ≪장구≫의 해석은 ≪맹자≫의 心 자에 대한 해석과 같다.2)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虛靈不昧'란 명덕의 體段을, '具衆理, 應萬事'란 그 이면에 갖추어져 있는 것과 발용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하여, 이면에 갖춰진 것은 性, 발용할 수 있는 것은 情이라고 인식하였다. 위와 같이 주자는 명덕을 마음으로 말하였지만 性과 情이 그 가운데 포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에서 얻은 것으로 광명정대함이란"3) 마음 밖에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마음의 虛靈함을 가리킨 것이며, 또한 명덕이 마음인가 본성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주자는 "신령한 것은 마음이요, 진실한 것은 본성이다[靈底是心, 實底是性]. 마음은 불에 속하므로 광명이 있고 발동을 할 수 있다"라고 운운하였는 바, 신령이니 광명이니 하는 말들은 명덕의 밝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로 보면 주자는 명덕을 마음에 속한 것으로 보았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바꿔 말해, 하늘이 사람과 만물에게 부여해 주는 입장에서 말하면 그것은 天命, 사람과 만물이 하늘로부터 명을 받는 입장에서 말하면 本性, 한 몸을 주재하는 것은
1) ≪국역 여유당 대학≫, 29쪽.
2) ≪盡心章句上≫ 盡心章.
3) ≪大全≫, 朱子.
마음, 하늘에 얻은 바로서 광명정대한 그것을 명덕이라 한다.4)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마음이 불에 속한다'라는 것은 광명과 활동이 있기 때문인데, 마음에는 수많은 도리가 갖춰져 있다. 예를 들면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마음이 나오는 그 근본은 본성이며, 어버이에게 효도를, 임금에게 충성을 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지각능력이 바로 마음이다. 張橫渠의 "마음이란 性·情을 겸하고 있다[心統性情]"라는 말은 가장 정밀하게 이를 설파해준 것이다.5) 이로 보면 명덕이란 性情을 모두 갖추고 있는 본심임을 알 수 있으며, '虛靈不昧' 네 글자는 명덕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6) 虛란 마음의 고요함[心之寂]으로 뭇 이치[衆理]가 갖춰져 있으니, 이는 명덕의 전체요 未發이며, 靈이란 마음의 감동[心之感]으로 만사에 응하니, 명덕의 大用이요 已發이며, 어둡지 않다는 것[不昧] 또한 밝음을 역설적으로 말한 데 불과할 뿐이다.7) 본성이야 요순으로부터 도척까지도 매한가지이지만 기질의 稟受가 각기 다름에 따라서 智愚·賢不肖의 차별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밝은 덕을 온전히 다하지 못하게 되며, 뿐만 아니라 기질에 의해 어두워지고 가려진 마음으로써 수많은 사물과 접촉하노라면, 마음의 인식과 지각은 오로지 정욕과 이해를 추구하는 육체의 욕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선천적 기품과 후천적 환경의 폐해로 인해 때로는 본초의 밝음을 잃지 않을 수 없다. 본초의 밝은 덕이 기품과 물욕에 의해 더럽혀졌다[虛靈不昧……氣稟所
拘, 物欲所蔽……] 등의 주자설은, 불교에서 말하는 昭昭不昧 了了常知의 本
4) 위와 같음.
5) 앞과 같음.
6) 위와 같음.
7) 같은책, 玉溪盧氏.
覺眞心이 망상과 집착으로 깨침을 얻지 못한다는 화엄종의 '染淨'說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지적되는 바, 이는 불성과 관련이 있다. 宗密의 ≪原人論· 直顯眞源第三≫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一切有情에는 모두 本覺眞心이 있다. 無始以來 항상 청정에 住하며, 밝고 밝아서 어둡지 아니하고 了了하여 항상 지각이 있으니[昭昭不昧 了了常知], 이 또한 佛性 또는 如來藏이라 한다. 무시의 즈음으로부터 망상(想)에 가리워져 스스로 이를 깨닫지 못한 것은 다만 凡質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탐착으로 業을 지어 생사의 苦를 받으니, 부처님이 이를 가엾게 여겨 일체가 모두 空임을 說하고, 또한 靈覺眞心이 청정하여 모두가 제불과 같음을 가르쳐주었다. 이 때문에 ≪화엄경≫에서는, '佛子여! 어느 중생이든지 여 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지 않은 자가 없지만 다만 망상과 집착으로 이를 깨닫지 못하게 된 것이다. 만일 망상을 버리면 一切智, 自然智, 無碍智가 곧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8) 이와 같이 昭昭不昧, 了了常知의 本覺眞心은 항상 청정하니, 이것이 곧 불성이다. 불성은 항상 청정한 것이지만, 단 망상에 가리워 불성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凡質'만을 보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에서 이미 染淨의 문제에 대해 논급하고 있다. 불성이 항상 청정하다는 것은 '淨'이며, 불성을 가리우는 망상 또한 하나의 '染'이다.9) 이를 주자설에 견주어 보면, 虛靈不
昧는 昭昭不昧 了了常知의 불성인 '淨'에, 氣稟所拘와 物欲所蔽는 탐착과 망
상으로 본초의 청정을 잃게 하는 '染'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染淨' 문제에 대해 法藏은 ≪華嚴一乘敎義分齊章≫ 4권에서 明鏡으로
비유하여 이를 거듭 논하였고, 뿐만 아니라 ≪六祖壇經≫에서도 이의 문제를 논하고 있다. "自性은 항상 청정하고 해와 달은 항상 밝지만, 짙은 먹구
8) ≪大正藏≫45권, ≪諸宗部二(三)≫.
9) 侯外盧 外 主編, ≪宋明理學史≫上, 人民出版社, 171쪽.
름이 맑은 하늘을 뒤덮어 밝은 태양을 가려도 빛나는 광명은 여전히 비추 기에 하늘 위는 밝고 아래는 어둠에 휩싸여 암흑세계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지혜의 바람이 불어 안개와 구름이 걷히면 삼라만상이 일시에 나
타나 보이게 된다[自性常淸淨, 日月常明, 只爲雲蓋覆, 上明下暗……忽遇慧風吹散, 森羅萬象, 一時皆現]."10)
이에 본초의 밝음을 회복하는 수양방법 또한 佛說과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외면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며, 본체의 밝음 또한 해와 달처럼 자약하기에 배우는 자는 마땅히 구름 틈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따라서 점차 밝혀 나가듯, 良知·良能의 실마리를 따라서 남들이 한 번에 능하면 나는 백 곱절의 노력을 더하여 일백 번을 가하는 각고의 정진으로 기질을 변화시키고 인욕을 배제하여 그 애초의 본성으로 회복시키는 데 있다고 한다. 이것이 곧 명명덕이다. 이 같은 명덕은 모든 인류가 다 같이 소유한 것이지 나만이 가지고 있는 일개인의 사유물이 아니다. 때문에 나의 밝은 덕을 밝힌 뒤에 이를 미루어 타인에게 미쳐 나아가는 것이 바로 선각자로서 후각자를 깨우쳐 주어야 하는 당연한 사명이다. 이는 기품과 물욕에 의하여 혼매한 자를 보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서 명명덕은 신민으로 이어지는 것이다.11) 新民의 新은 舊 자와 대칭되는 글자로서, 옛적에 물들어 더렵혀진 때[舊染]를 쇄신하여 一變한다는 뜻이다. 舊染에 대해서는 ≪章句≫의 본주에 직접적인 자세한 언급이 없지만, 이 또한 명명덕의 染淨 문제에 이어 불교설의 논지와 유사한 점이 없지 않다. 불교설을 살펴보면 舊染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 그것은 內在 心性上의 新薰과 外在 環境上의 영향인데, 이
10) ≪敦煌本檀經≫29쪽. 藏經閣, 佛紀 2532년.
11) ≪大全≫, 朱子.
또한 각기 둘로 나뉘어진다. 외재 환경상의 여건으로는 흉악한 자와의 접촉, 오염된 풍속에 의해 젖어든 습관이며, 내재 심리상으로는 본디 虛靈한 본성은 선천적 기품 그리고 후천적 물욕에 의해서 다시금 새로이 더러움에 찌들어 오염[新薰]되게 된다. 이는 ≪大乘起信論≫에 자주 언급되어온 부분이다. 아무튼 여기에서 말한 新薰이란 본체는 虛明한 것인데 기품 물욕에 의해 새로이 찌들어 오염된다는 것으로, 바꿔 말하면 新薰이 舊染이며 舊染이 新薰이니, 본연성에 근거해 말하면 신훈이요 현재에 근거하여 말하면 舊染이라 한다.12) 그러나 신민에 앞서 스스로 자신을 새롭게 한 뒤에야 이를 미루어 그들 또한 새롭게 하여 애초의 본성으로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민은 모든 사람의 명명덕을 요하는 것으로, 궁극적 목적은 나의 명덕으로써 천하인의 명덕을 밝히는 것이지만, 명명덕과 신민이란 사사로운 마음[私意]과 억지로 하는[强作] 것은 아니다. 이는 본디 당연한 법칙이 있기에 이를 지나쳐서도 안 되고 이에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되는 지극한 곳, 지상의 법칙[極則]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도리인 지선을 말한다. 止於至善의 止란 그 극치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그 頂點에 그치는 것이다. 따라서 止란 반드시 그 정점에 이르러서 다시는 다른 곳으로 옮겨갈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곳[至善]에 이르지 못하면 止라 말할 수 없고, 이미 이르렀을지라도 이를 지키지 못하면 또한 止라 말할 수 없다.13) 이로 보면 止 자에 대한 朱子註의 '必至於是'란 이르러야 할 곳을 알고서 그곳에 이르러 가는 것[知至至之]이며, '불천(不遷)'이란 끝맺을 줄을 알고서 끝을 맺는 것[知終終之]으로 보아,14) 止 자에는 그 정점
12) ≪국역 여유당 대학≫, 30~31쪽.
13) ≪大全≫, 朱子.
에 이른다는 '至' 자의 뜻과 이를 굳건히 고수한다는 '守' 자의 뜻이 포괄되어 있다. 至善이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가장 훌륭하고 완벽한 도리로서 事理當然의 극치이다. 때문에 명덕에도 지선이 있고 신민 또한 지선이 있기에, 명덕과 신민은 모두 지선에 이르기를 요하는 것이다. 지선이란 지극한 극치를 말한 것이므로, 이를 아는 데 그쳐서만은 안 된다. 따라서 지극한 곳에 이르고자 힘껏 노력하여 그곳에 그쳐야 하는 것이다. 지선에 이르러 그치면 지선과 나의 몸은 하나가 되지만, 그쳐야 할 곳에 그치지 못하면 지선은 지선대로, 나는 나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 지선을 사리당연의 극치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천리가 지극하여 조금도 인욕이 없는 경지이다. 때문에 명명덕·신민의 최고의 준칙이 되는 것이다. 위의 명명덕·신민·지지선 여덟 글자는 ≪대학≫ 전체의 뜻을 총괄한 삼대 강령으로서 대인 학문의 본체와 작용, 그리고 知와 行이 모두 이에 갖춰져 있다.
이는 지선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차례로 말하고 있다. 知止의 止는 명덕과 신민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의 중점은 그쳐야 할 곳을 안다는 '知' 자에 있다. 지극한 선이란 쉽사리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쳐야 할 곳을 알았을[知止] 때가 바로 物格이요, 知止이다. 지극한 선에 그쳐야 할 곳을 아는 것[知止]에서부터 지극한 선에 그침을 얻어가는[能得] 과정의 중간 부분에 의지의 定向을 말하는 定, 마음의 고요함을 말하는 靜, 몸의 편안함을 말하는 安, 자세히 생각함을 말하는 慮는 知止이후 자연스럽게 연결지어 나타나는 오묘한 효험들이다.
14) 같은 책, 雲峰胡氏.
이는 하나의 有(知止而后'有'定) 자로서 네 개의 能(能靜, 能安, 能慮, 能得) 자를
거느리고 있으며, 靜·安·慮·得 또한 모두가 有定이라는 定의 기조 위에서 만이 이뤄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定·靜·安은 어떤 일이 이르기 이전에 있으며, 慮란 바야흐로 일이 이르러 왔을 때 깊이 있게, 그리고 꼼꼼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慮는 앎을 말한 것인 바, 이는 중요한 관문이다. 안다는 것은 평소 쌓아가는 공부요, 생각[慮] 또한 그 일에 임하여 깊이 연구하고 고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선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우연찮게 부합되었다거나 일시 기습적으로 탈취한 것이 아니다. 이는 지극한 선과 나의 몸이 하나로 융합됨을 말한다.
知止而后에 有定이니 定而后에 能靜하며 靜而后에 能安하며 安而后에 能慮
하며 慮而后에 能得이니라 그쳐야 할 지극한 선을 안 뒤에 뜻에 定向(일정한 방향)이 있으니, 정향이 있은 뒤에 마음이 고요하고, 고요한 뒤에 몸이 편안하고, 편안한 뒤에 꼼꼼히 생각하고, 생각한 뒤에 지극한 선을 얻을 수 있다.
명덕과 신민을 어떻게 해서 지극한 선에 그칠 수 있을까? 먼저 그칠 곳을 알아 가린 바 없어야만이 이치에 어두운 바 없다. 그처럼 안 뒤에야 굳은 의지가 세워져 정향이 있을 것이다. 굳은 의지의 정향이 있으면 마음에 잡념이 일어나지 않고 바깥 사물에 동요되는 바 없으므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된다. 그런 뒤에야 마음이 고요할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하면 동요되는 바 없어, 내가 처해 있는 그 어느 곳이든 항상 마음이 편안하게 된다. 몸이 편안하면 일상생활에 있어서 언제나 자연스럽고 한가하므로 그 어느 일에 대해서도 자세히 생각하고 꼼꼼히 헤아려볼 수 있다. 그런 뒤에야 정밀하게 생각할 수 있다. 정밀하게 생각하면 이에 이치를 밝게
볼 수 있으므로 심오함을 다하고 미세한 기미를 탐구하여 事理의 당연한 바의 극치에 부합할 수 있다. 그런 뒤에야 명명덕과 신민의 지극한 선을 어느 곳에서든 얻을 수 있어 지극한 선에 그칠 수 있다.
止者는 所當止之地니 卽至善之所在也라 知之면 則志有定向이라 靜은 謂心不妄動이요 安은 謂所處而安이요 慮는 謂處事精詳이요 得은 謂得其所止라
止는 마땅히 그쳐야 할 곳, 곧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이다. 이를 알면 의지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 靜은 마음이 망령되이 움직이지 않음을 말하며, 安은 거처하는 바에 편안함을 말하며, 慮는 일을 처리함에 정밀하고 자세함을 말하며, 得은 그 그쳐야 할 바를 얻음을 말한다.
의지에 일정한 방향이 있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명백히 알아서 선을 지향하고 악을 배제하는 것이다. 마음에 잡념이 사라져 동요가 없는 고요함[靜]의 상태란 이미 의지에 일정한 방향이 있어 다른 갈림길에 동요가 없는, 그것은 곧 시비를 명쾌하게 결정지어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바 없으므로 항상 마음이 평안하고 고요함을 말한다. 어느 곳에서든지 편안하다는 安이란 사리를 분별하는 마음의 척도인 權衡이 올바름으로써 사물을 접촉함에 있어 어느 때이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태연함을 말한다. 일처리에 정밀하고 자세히 한다는 慮란 어떤 사물이 이르러 올 때 다시 그 幾微處를 깊이 연구하고 살펴서 처리하는 것이다.15)
위의 ≪大學≫·≪知止≫ 2절은 모두 하나로 묶어 말한 것이지만, 이 절에
15) ≪栗谷先生全書≫ 下冊. 「語錄」下, 262쪽 하단, 263쪽 상단(栗谷思想研究院 영인 본, 1978). 이하에서는 ≪栗谷全書≫로 약칭한다.
서는 그 선후의 차례를 가리키고 있다. 명덕과 신민이란 두 가지[物]로서 안팎[內外: 명덕과 신민]의 대칭이 되기에 이를 本末이라 한다. 知止와 能得은 하나의 일이면서도 처음과 끝으로 나뉘기에 이를 終始라 말한다. 하지만 이 구절 또한 대등한 관계로 말한 것은 아니다. 일[事: 知止와 能得]이란 곧 물건[物: 明德·新民] 가운데 일부분의 일[事]을 말한다. 그러나 知所先後의 知 또한 知止 이전에 있는 것이기에, 보다 얕은[淺近] 의미로 쓰인 것이며, 近道는 처음 학문을 닦아 나가는 출발점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선후의 차례를 알았을 때 비로소 학문의 길로 나아갈 곳이 있음을 말한다.
物有本末하고 事有終始하니 知所先後면 則近道矣리라
물건[物]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마침과 시작이 있으니, 먼저 하고 뒤에 할 바를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
위의 2절을 종합하여 보면 명덕과 신민은 모두 본성에 존재하는 물건이라 하겠다. 그러나 명덕은 뿌리요, 신민은 지엽이다. 이를 두고 물건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 말한 게 아니겠는가. 知止와 能得이란 모두 제 자신 본분상의 일이다. 그러나 知止는 시작이요, 能得은 끝이다. 이것이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말한 게 아니겠는가. 근본인 명덕과 시작인 知止란 먼저 해야 할 바임을 알고서 이를 우선으로 삼고, 지엽인 신민과 끝인 能得이란 뒤에 해야 할 바임을 알고서 이를 뒤에 한다면, 나아가는 바 차례가 있어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지극한 선을 알고 지극한 선에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학의 도에 가까운 것이다.
明德은 爲本이요 新民은 爲末이며 知止는 爲始요 能得은 爲終이니 本始는
所先이요 末終은 所後라 此는 結上文兩節之意라
명덕은 근본이요 신민은 끝이며, 知止는 시작이요, 能得은 끝이다. 근본과 시작은 먼저 해야 할 바이며, 끝과 마침은 뒤에 해야 할 바이다. 이는 위 2절(≪大學≫·≪知止≫)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事와 物이란 어떤 차이점을 가지는 것일까? 事와 物을 대칭으로 말하면 事는 事이고, 物은 物로서 각기 다른 뜻을 가지지만 物만을 들어 말하면 事란 그 가운데에 포함되어 있다.16) 그러나 형상과 물체가 있는 것만을 物이라 말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름이든 그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라면 유형이든 무형이든 모두 物이라 하는 것이지, 굳이 유형의 물체만을 物이
라 말한 것은 아니다.[有名可名者, 皆謂之物, 豈必物之物, 乃爲物耶?]"17)
이는 옛 태학에서의 학문과정을 들어 삼강령의 팔조목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차례를 조금이라도 어지럽혀서는 안 되며, 공부 또한 그 어느 것 하나 빠뜨릴 수 없다는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옛적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古之欲明明德於天下]"라는 구절은 본디 '신민'에 관한 일이다. 그러나 "古之欲'明明德'於天下"로 말한 것은 신민이란 명명덕의 밖에 따로 있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 미뤄보면 나라를 다스림과 집안을 가다듬는 것 또한 한 나라와 한 집안에서 명덕을 밝히는 것이다. 천하와 나라는 모두 하나의 국가 단위로서 각기 井田과 학교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멀거나 가까운 지리적 거리의 구별이 있으며, 나라와 집안 또한 다 같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고[老老]
16) ≪大全≫, 朱子.
17) 李珥, ≪李子性理書·與奇明彦大升書≫.
어린이를 어린이로 사랑하는[幼幼] 관계로 형성되어 있지만 가깝거나 소원하다는 인정상의 情感에 차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몸을 닦기에 앞서 먼저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것은 먼저 그 큰 意志를 세움으로써 하찮은 물욕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며, 마음을 바르게 하기에 앞서 먼저 성의를 다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진실하게 하여 그 내면의 마음을 함양하고자 함이다. 주자는 "성의란 人鬼
關(善惡關)이요, 致知는 夢覺關(智愚關)이며, 치지는 全體說이요, 격물은 零碎
說이다" 하였다. 物이란 외부에 있는 것이지만 그 이치는 마음에 갖추어져 있으며, 마음은 내면에 있지만 그 이치는 外在事物에 두루 갖춰져 있다. 知와 物이란 선후가 없는 까닭에 致知在格物이라 하여, 在 자를 쓰게 된 이유이다.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는 先治其國하고 欲治其國者는 先齊其家하고 欲齊其家者는 先修其身하고 欲修其身者는 先正其心하고 欲正其心者는 先誠其意하고 欲誠其意者는 先致其知하니 致知는 在格物하니라
옛적에 밝은 덕을 천하에 밝히고자 한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집안을 가다듬고, 그 집안을 가다듬고자 한 자는 먼저 그 몸을 닦고, 그 몸을 닦고자 한 자는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먼저 그 앎을 지극히 다하였으니, 앎을 지극히 다함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데 있다.
옛 사람을 보지 못했는가. 옛 사람은 천하인의 밝은 덕을 밝혀 백성을 새롭게 하려면 천하에서 이를 구하기에 앞서 그 나라를 다스려 천하의 모든 백성들이 보고 느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나라를 다스
리고자 한 자는 나라에서 이를 구하기에 앞서 그 집안을 잘 가다듬어 나라의 백성들이 그 교화의 기풍에 진작될 수 있는 근본을 마련하였다. 그리고집안을 가다듬고자 한 자는 집안에서 이를 구하기에 앞서 자신의 몸을 닦아 한 집안의 식구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근본을 마련하였다. 자신의 몸을 닦고자 한 자는 어찌 한낱 자신의 몸에서 추구하는 데 그쳤겠는가.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한 몸의 주재를 올바르게 하는 데 있으며, 마음을 바르게 하고자 하는 자는 어찌 한낱 마음에서만 구하였겠는가. 먼저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여 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진실하게 한 데 있다.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자 한 자는 어찌 한낱 생각에서만 구했겠는가. 먼저 앎을 지극히 하여 진실과 거짓의 幾微(선악의 미세한 조짐)를 명확 히 분석한 데 있다. 그렇다면 앎을 극진히 한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사물에로 나아가 천하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 데 있을 뿐이다. 이것이 곧 옛 사람이 일찍이 학문하였던 차례이다.
明明德於天下者는 使天下之人으로 皆有以明其明德也라 心者는 身之所主也라 誠은 實也며 意者는 心之所發也니 實其心之所發하야 欲其必自慊而無自欺也라 致는 推極也요 知는 猶識也니 推極吾之知識하야 欲其所知 無不盡也라 格은 至也요 物은 猶事也니 窮至事物之理하야 欲其極處 無不到也라 此八者는 大學之條目也라
천하에 밝은 덕을 밝힌다는 것은 천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그들의 밝은 덕을 밝히도록 함이다. 마음은 한 몸의 주재가 되는 것이다. 誠은 진실함이요, 意는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그 마음에서 발생한 것을 진실하게 하여, 반드시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를 속임이 없게 하고자 함이다. 致는 미루어 다함이요, 知는 앎[知識]과 같으니, 나의 지식을 미루어 극진히 다하여 그 아는 바를 지극히 다하고자 함이다. 格은 다다름이요,
物은 일[事]과 같으니,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는 바 없고자 함이다. 이 여덟 가지는 ≪대학≫의 조목[細則]이다.
여기에서는 情과 意·志의 자의적 해석과 주자의 ≪誠意章≫ 晩年改定說에 대해 먼저 언급하고, 격물치지에 관한 부분은 이후 전문 제5장에서 논하기로 한다. 情과 意와 志는 모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意와 志는 情이 나온 뒤에 작용하는 것이므로,18) 이는 先後·始終의 관계로 말할 수 있다. "意란 情으로 인연하여 計較를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意란 情으로 인연하여 發用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栗谷)는 이로써 마음이 처음 동하는 것을 情이라 하고, 이 情을 따라서 商量하는 것을
意라고 말한다[意, 緣情計較者也 ……故朱子曰 意緣有情而發用, 予故曰 心之初動者謂情, 緣是情而商量者謂意]."19) 이로 살펴보면 情은 마음이 처음 발동
하는 것이기에 선하지만 意에는 計較와 商量이 있는 까닭에 선과 악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誠情이라 말하지 않고 誠意라 한다. 志는 확고부동한 의지를 말하기에 匹夫之志……,20) 또는 志於道,21) 志于學22) 등의 구절에 쓰인 용례는 모두 不變不屈의 굳건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들이다. 誠意에 대한 ≪장구집주≫의 주석은 諸本에는 모두 "欲其一於善而無自欺" 로 쓰여 있으며, 오직 祝氏의 附錄本에서만은 주자의 嫡孫 鑑이 그 책의 첫머리에 "四書의 원본은 鑑이 지난날 얻은 先公의 晩年改定本으로 간행한
18) ≪栗谷全書≫ 上冊. ≪語錄≫ 上, 248쪽 하단.
19) ≪李子性理書·答安應休書≫.
20) ≪논어·子罕≫.
21) 같은 책, ≪述而≫.
22) 위와 같음.
다"라고 하였는데, 이 祝本에는 "……必自慊而無自欺"로 쓰여 있다. 이는 一於善의 구절을 必自慊으로 바꿔 썼음을 쉽게 알 수 있다.
黃勉齋의 ≪朱子年譜≫를 살펴보면, 慶元 庚申(1200) 3월 辛酉(초6일)에 주
자는 ≪誠意章註≫의 한 구절을 개정하고, 그로부터 3일 후 甲子(초9일)에 타계하였다고 한다. 오늘날 ≪성의장≫을 살펴보면 祝本과 기타 諸本은 한 글자도 다른 부분을 찾아볼 수 없는데, 세 글자만이 다른 것으로 보아 개정한 부분이 바로 이 곳임을 알 수 있다. '一於善' 운운한 말도 깊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악취처럼 악을 싫어하고 어여쁜 여인과 같이 선을 사랑하였을 때 바야흐로 자신에 만족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仁을 좋아하면 不仁을 미워하기 마련이다. 이로 보면 '一於善'의 구절에는 '不二於善'이라는 뜻을 포괄하고 있지만, 必自慊으로 無自欺에 대칭되는 구절을 쓴 것만큼은 간절하지 못하리라고 본다. 더군다나 ≪語錄≫ 을 살펴보면 "誠과 不誠, 自慊과 自欺는 지극히 작은 데에서 나누어진다. 自謙은 선과 내가 하나이지만, 自欺는 선과 내가 둘로 나뉘어 있음을 말한다. 自慊이란 自欺와 대칭되는 것으로 ≪성의장≫의 뜻은 다만 이 두 개의 自 자에 있다"라고 한다. 주자의 이 말을 살펴보면 그 뜻을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23)
이 절은 위의 뜻을 거듭 해석하여 모두 공효를 밝힌 것으로, 여러 부분에'……而后……'라는 글자를 넣어 반드시 그에 앞서 그 같은 공부가 있어야 함을 나타내주고 있다. 앞 문장의 知止란 사물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말한 데 반해 여기에서 말한 知至란 심리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23) ≪大全≫, 新安陳氏.
知至의 至와 致知의 致 자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致는 미루어 나가야만이 바야흐로 그처럼 할 수 있다는 工夫處를 말하며, 至는 이미 그 곳에 이르렀다는 功效處를 말한다. 그리고 앎[知]과 생각[意: 또는 의식]은 서로 관련이 있으며, 모든 절에서 다 이로써 미루어 나가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은 앎이라는 하나의 대단위로서 곧 평천하에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意誠은 一時一事를, 心正은 全體渾然을, 제가·치국·평천하는 그들의 모든 교화와, 그리고 대처하는 일까지를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物格而后에 知至하고 知至而后에 意誠하고 意誠而后에 心正하고 心正而后에 身修하고 身修而后에 家齊하고 家齊而后에 國治하고 國治而后에 天下平이니
라 사물의 이치가 이른 후에 앎이 지극하고, 앎이 지극한 후에 생각이 진실해지며, 생각이 진실한 후에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른 후에 몸이 닦여지며, 몸이 닦여진 후에 집안이 가다듬어지고, 집안이 가다듬어진 후에 나라가 다스려지고, 나라가 다스려진 후에 천하가 평정되는 것이다.
옛 사람은 학문을 함에 있어 그 어떤 공부를 하기에 앞서 이미 모종의 공부를 해왔었다. 그것은 공부란 서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되 남김없이 극진히 한 후에야 내면의 앎이 지극하여 극치에 이르고, 앎이 지극한 후에야 도리가 밝혀져 어려움 없이 이를 실행하여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할 수 있고, 그 생각이 진실한 후에야 한 몸에 주재가 있어 모두 진실해지므로 그 어떤 사물에도 동요됨이 없이 마음이 바르게 되고, 마음이 바르게 된 후에야 마음에 주재되는 바가 있어 어떠한 사물에도 얽매이지 않으므로 몸이 닦여지게 되고, 몸이 닦여진 후에야 한 집안의 법이 될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집안이 가다듬어지게 된다. 집안이 가다듬
어진 다음에 한 나라에 감화를 불어넣을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나라가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다. 나라가 다스려진 다음에는 이 도리를 가지고 그 밖의 다른 나라에까지 더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이 제각기 밝은 덕을 밝힐 수 있으니, 이를 계기로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사람들이 먼저 해야 할 바와 뒤에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 이와 같았다.
物格者는 物理之極處 無不到也요 知至者는 吾心之所知 無不盡也라 知旣盡이면 則意可得而實矣요 意旣實이면 則心可得而正矣라 修身以上은 明明德之事也요 齊家以下는 新民之事也라 物格知至는 則知所止矣요 意誠以下는 則皆得所止之序也라
物格은 사물 이치의 지극한 곳이 이르지 않음이 없고, 知至는 나의 마음에 아는 바 지극하지 않음이 없음이다. 앎이 지극하면 생각이 진실하게 되고, 생각이 이미 진실하면 마음이 바르게 된다. 수신 이상은 명명덕의 일이요, 제가 이하는 신민의 일이다. 格物과 知至는 지선에 그칠 바를 아는 것이요, 意誠 이하는 모두 그칠 바를 얻어 나가는 차례이다.
위 '古之節'의 팔조목은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공부이며[逆推工夫], 이 절의 팔조목은 차례대로 미루어 나가는 공효이다[順推功效].24) 格物과 物格의 格 자에는 窮과 至의 두 뜻이 담겨 있다. 格物의 格에는 窮 자의 뜻이 많고, 物格의 格에는 다만 至 자의 뜻이 있을 뿐이다.25) 다시 말하면 格物이란 사물의 이치를 탐구 모색하는 공부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기에, 궁리·궁구 따위의 연구정신을 표현하는 窮 자의 의미가 부각되었고, 物格은 格物에 의해서 이미 얻어진 공효처로서, 사물을 대함에 있어 사물의
24) 같은 책. 雙峰饒氏.
25) ≪栗谷全書·聖學輯要≫, 1권.
이치가 자신의 인식에 스스로 와 닿는 밝음을 뜻하기에, 공부와 노력의 차원을 떠나서 그것이 스스로 이르러 온다는 至 자의 뜻을 지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物格과 知至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物格이란 物理의 극처가 이르러 온다는 것이다. 만일 나의 지식이 극처에 이르렀다고 말하면 그것은 知至이다. 실제로 物格과 知至는 한 가지이지만 物理라는 측면으로 말하면 物格이요, 내 마음의 認識 측면에서 말하면 知至라 한다. 이는 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점은, 사물의 이치는 인간의 인식 여부에 관계없이 원래부터 지극한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를 비유하면 어두운 방안에 책은 시렁 위에 있고 옷은 횃대 위에 있고상자는 벽 아래에 있는데, 어둠으로 인하여 물건을 볼 수 없기에 책이나 옷 따위가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없으나, 등불을 가져다가 비춰보면 책가지 등이 있는 곳을 분명히 볼 수 있으며, 그처럼 밝게 본 뒤에 책, 옷 등이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物理는 원래 극처에 있기에, 格物 이후에 극처에 이른 것이 아니요, 또한 스스로 알고서 극처에 이른 것도 아니다. 다만 나의 지식에 밝고 어둠이 있기에 理가 이르고 이르지 않는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26) 그리고 知至와 意誠은 凡聖이 나누어지는 界分이기에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설령 조그마한 선이 있을지라도, 이는 마치 검은 물체 속에 자그 마한 흰 점이 박혀 있는 것처럼 선을 찾아보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이 관문을 통과하면 비록 작은 허물이 있을지라도 흰 물체 속에 미세한 검은 점이 있는 것처럼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意誠 이후에야 비로소 더러운 찌꺼기와 怜悧心을 말끔히 씻어내어 의리로 충만하게 할 수 있다. 意란 발동하는 곳이며, 心이란 본체를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意란 動함
26) 같은 책, ≪語錄≫ 下, 262쪽 상단.
이며, 心이란 動靜을 포괄하며, 身이란 心의 대칭이다. 이의 공부를 연계지어 말하면, 뜻이 이미 진실하여 마음이 장차 바르게 될 즈음에 恐懼와 哀樂의 감정에 이끌리면 또한 사악하게 되므로 이를 心正이라 말하지 못할 것이며, 몸을 제재하지 않고 외부의 일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마음과 행실상에 차이점을 가져오게 되므로 身修라 말할 수 없다.27)
위에서 말한 격물·치지·성의·정심은 모두 수신을 하기 위함이요, 제가· 치국·평천하는 모두 이 수신에서 비롯됨을 말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명명덕은 근본이며, 수신은 그 근본을 바르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명명덕이지만 이를 생략하면 수신이다. 천자에게는 천하를 평정해야 할 책임이 있는 데 반하여, 서민에게는 나라와 천하를 다스려야 할 책임이 없다. 그러나 제각기 집안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를 말하여, 正言(反語法의 대칭)으로 끝을 맺고 있다.
自天子로 以至於庶人히 壹是皆以修身爲本이니라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모두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나 팔조목을 요약해 보면 격물·치지·성의·정심이란 수신을 위해 설정된 전제이며, 제가·치국·평천하는 수신을 기조로 하여 이를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는데, 수신이란 바로 그 근본에 해당된다. 위로는 존귀한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미천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천하와
27) ≪大全≫, 朱子.
나라와 집안을 다스려야 할 책임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삼가 몸을 닦아서 나라와 집안을 다스릴 수 있는 근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壹是는 一切也라 正心以上은 皆所以修身也요 齊家以下는 則擧此而措之耳라
壹是는 일체를 말한다. 正心 이상은 모두 몸을 닦는 바이며, 제가 이하는 이것(修身)을 들어다가 저기(나라와 천하)에 조처하는 것이다.
이는 천자로부터 제후, 경대부, 士, 庶人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齊家 이하의 공효는 굳이 기약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르러 오는 것이기에 수신만을 들어서, 위로는 정심·성의·치지·격물의 공부와 아래로는 제가·치국·평천하의 공효를 포괄한 것이다.28)
이는 反結法으로서 근본이 되는 명명덕을 중시하여야 한다는 점을 밝혀, 위 ≪自天節≫의 뜻을 보완해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위아래로 일관된 문장이기에 수신과 제가를 대등한 관계로 볼 수 없다. "두터이 해야 할 곳을 얇게 한다"라는 것은 근본적인 몸을 닦지 않고서 집안을 가다듬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라가 다스려질 수 없는 병폐가 발생되는 실마리라 하겠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두터이 해야 할 가정에 먼저 잘못을 범하면서 어떻게 보다 큰 나라와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여, 근본을 어지럽힐 수 없음을 거듭 밝히고 있다.
28) 같은 책, 新安陳氏.
其本이 亂而末治者 否矣며 其所厚者에 薄이요 而其所薄者에 厚하리 未之有
也니라 그 근본이 어지러우면서 그 끝이 다스려질 수 없으며, 그 두터이 해야 할 데에 얇게 하고서 그 얇게 해야 할 데에 두터이 할 사람은 없다.
천하에 모든 사람은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한 몸을 국가와 천하에 비해 보면 몸은 근본이요 국가와 천하는 지엽이 된다. 그러므로 격물·치지·성의·정심으로써 몸을 닦지 않으면 그 근본이 먼저 어지럽혀지므로 그 지엽이 다스려질 수 없다. 또한 한 집안을 나라와 천하에 비교해보면 물론 하나의 도리라 하지만 厚薄의 차이가 없을 수 없다. 만일 몸을 닦지 않으면 집안에서 그 어버이를 어버이로 섬기지 못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지 못함으로써 두터이 하여야 할 곳을 또한 얇게 한 셈이다. 그렇게 되면 정작 나라와 천하는 집안에 비해 얇게 해야 할 곳인데, 어떻게 이에 두터이 하여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대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먼저 덕을 밝혀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다.
本은 謂身也요 所厚는 謂家也라 此兩節은 結上文兩節之意라
本이란 몸을 말하며, 두텁게 할 바란 집을 말한다. 이 2절(≪自天節≫·≪其本節≫)은 위의 2절(≪古之節≫·≪格物節≫)의 뜻을 끝맺고 있다.
위에서는 修身이 근본이 된다고 말하였는데, 이에 집안까지를 아울러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장구≫의 이 부분에 대해 의문을 가지지 않은 이들이 없다. ≪논어≫에서는 "몸(자신)은 스스로 두텁게(심하게) 꾸짖고, 타인은 얇게(가볍게) 꾸짖는다[躬自厚而薄責於人]"라고 하여, "두터이 할 바란" 그 몸[身]을 스스로 꾸짖는다는 명백한 증거임에도 왜 하필이면 몸을
버려두고 이를 집안에 귀속시켜 말했을까? 또한 여기에서 말한 本末이란 거듭 강령의 본말 의의를 밝히면서 모두 명덕을 근본으로 삼아 왔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終始·本末을 말했고 여기에서 厚薄을 말한 것은 모두 本末의 입장에서 말한 것인데, 어떻게 해서 이 부분에 신민을 끼워 넣어 명덕과 신민의 한계를 모호하게 하였는지? 이를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그에 대한 분명한 설명을 얻기 어렵다. 다만 그 의심된 부분을 남겨두고 밝은 눈을 가진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29)
* * *
右는 經一章이니 蓋孔子之言을 而曾子述之하시고 其傳十章은 則曾子之意를 而門人記之也라 舊本에 頗有錯簡일세 今因程子所定하야 而更考經文하야 別爲序次 如左하노라
오른편30)은 경문 1장(205자)이니, 공자의 말을 증자가 기록하였고, 그 전문 10장(1,546자)은 증자의 뜻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옛 책에 문장의 순서가 뒤섞여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정자가 편정한 바에 따라서 정리하되, 다시 경문의 순서를 고찰하여 별도로 다음과 같이 차례를 바로잡는 바이다.
凡傳文에 雜引經傳하야 若無統紀나 然文理接續하고 血脈貫通하야 深淺始終이 至爲精密하니 熟讀詳味면 久當見之일세 今不盡釋也하노라
모든 전문은 여러 경전을 뒤섞어 인용하여 일정한 맥락이 없는 것처럼
29) 權龍鉉, ≪秋淵先生文集≫ 3책 8권 ≪答金平叔衡浩大學問目≫, 泰東書舍印行, 庚午 仲冬. 이하에서는 ≪秋淵問集·大學問目≫으로 약칭한다.
30) 원문에는 세로 배열에 따라 오른편이라 지칭되어 있으나, 본서는 가로쓰기이므로 위쪽을 가리키며 따라서 이상(以上)이라고 함이 적절하다.(이하 모두 같음)
보이지만, 문장의 조리가 잘 이어져 있고 문리의 맥락이 일관되어, 깊고 얕고 처음과 끝이 지극히 정밀하니, 이를 익히 읽고 자세히 음미하면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는 이러한 점을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이에 모두 다 해석하지 않는 바이다.
이 장은 명명덕의 의의를 해석한 것이다. ≪서경≫을 인용한 것은 공자의 말씀이 예로부터 일찍이 유래와 근거가 있음을 밝히기 위함이다. 따라서 오늘날 전래되어 오는 三聖(康叔·太甲·帝堯)의 말을 그대로 인용한 것일 뿐, 그들의 경지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본장에서는 4절의 문장을 대등한 관계에서 서술하고 있지만 맨 마지막 절의 "이는 모두 스스로가 밝히는 것이다[皆自明也]"라는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克明德의 克은 "참으로 ……을 하였다"라는 말이며, 덕이란 모든 사람이다 함께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굳이 덕을 "잘 밝혔다[克明]"라고 말한 것은 오직 문왕만이 능히 할 수 있음을 뜻한다.
康誥에 曰 克明德이라 하며
≪康誥≫에 이르기를 "덕을 잘 밝혔다"라고 하며,
경문에서 말한 명명덕을 옛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周書·康誥≫에 의하면 모든 사람들이 밝은 덕을 가지고 있으나, 기품에 얽매이고 물욕에 가려서 밝은 덕이 어두워짐으로써 본초의 밝음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문
왕은 끊임없이 敬의 공부를 통하여 본초의 밝은 덕을 잘 밝혔다고 한다.
康誥는 周書요 克은 能也라
≪강고≫는 ≪주서≫요, 克은 능함이다.
≪康誥篇≫은 무왕이 그의 아우 康叔을 衛國에 封한 뒤 그에게 고한 글이다. 이의 주요 부분은 克이라는 한 글자에 있으며,1) 克 자에 대한 訓詁는 能 자로 쓰고 있으나, 能 자에 비해 보다 의미 깊은 글자로서, 참으로 안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2) 아래 문장에서 여러 경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인용의 용례는 문장 전체를 인용하지 않고 필요 부분만을 쓰고 있다. 예컨대 ≪康誥篇≫의 본문에서는 "克明德愼罰" 운운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위의 세 글자만을 취하였으며, 아래 인용문은 "先王顧諟天之明命" 가운데 先王 두 자를 삭제하였다. 이는 경전 인용에 있어서 斷章取義의 活法이라 한다.3)
≪康誥篇≫을 인용한 것만으로도 명명덕의 유래와 전거가 밝혀졌지만, 밝은 덕은 원래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임을 알지 못할까 걱정한 나머지 다시 ≪太甲篇≫을 인용한 것이다. 하늘의 명이란 본디 밝은 것인데, 이를'돌아본다[顧諟]'는 것은 마음에 항상 간직하여 그 무언가를 돌아보는 것처럼, 매양 하늘의 밝은 命을 눈여겨봄을 말한다.
1) ≪大全≫, 西山眞氏.
2) 같은 책, 朱子.
3) 같은 책, 新安陳氏.
太甲에 曰 顧諟天之明命이라 하며
≪太甲≫에 이르기를,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본다"라고 하며,
≪周書·康誥≫보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나라의 康叔에 앞서 상나라의 탕임금이 있었다. ≪商書·太甲≫에서 말한 하늘의 밝은 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밝음, 바로 그것이다. 이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나의 덕으로 삼은 것인데, 이를 가벼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탕임금만은 성스럽고 공경한 덕이 날로 향상되어[聖敬日躋] 하늘에서 부여해준 밝은 명을 항상 눈여겨 돌아보았다고 한다.
大甲은 商書요 顧는 謂常目在之也라 諟는 猶此也니 或曰 審也라 天之明命은 即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爲德者也라 常目在之면 則無時不明矣라
≪태갑≫은 ≪상서≫이며, 顧는 항상 눈여겨봄을 말한다. 諟는 此 자와 같으니, 혹자는 이를 "살피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늘의 밝은 명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으로, 나는 이를 받아서 덕으로 삼은 것이다. 항상이를 눈여겨보면 어느 때나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상하의 문장에서 모두 명덕으로 말하다가 여기에서 '明命'으로 바꿔 말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입장에서 말하면 明命이요, 내가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본성으로 삼은 것을 명덕이라 하는데, 명덕의 본원이 곧 明命임을 밝히고자 함이다. 그러나 그 실상은 하나이며, 命과 德에 대해 모두'明' 자를 붙인 것은 원래 光明하기 때문이다.4) 明德과 明命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명덕에 대하여
4) 같은 책, 朱子.
≪장구집주≫에서는 "사람이 하늘에서 얻은 바로서, 비어 있고 신령하여 어둡지 않다[人之所得乎天而虛靈不昧]" 하였고, ≪혹문≫에서는 "方寸의 사이는 비어 있고 신령하고 밝아서 모든 이치를 갖추고 있다[方寸之間, 虛靈洞澈, 萬理俱備]"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인간의 입장에서 마음[心]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明命에 대해 ≪장구집주≫에서는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준 것으로 내가 덕으로 삼은 것이다[天之所以與我而我之所以爲德]" 하였고, ≪혹문≫에서는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준 바이며 지극한 선이 있는 바이다[天之所以命我而至善之所存]"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가 하늘의 입장에서 이치[理]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明命에 대하여 ≪장구≫에서 '所以爲德'이라 말한 것은 직접적으로 명덕을 말하지 않고, 명덕의 근본이 되는 바를 밝힌 것이며, ≪혹문≫의 '至善之所存' 구절은 직접적으로 虛靈不昧를 말하지 않고, 명덕에 갖춰 있는 바를 밝힌 것이다. 명덕과 명명에서 가리키는 바는 主心과 主理의 차이가 있다. 玉溪 盧氏의 "명명이란 명덕의 본원이 된다"라는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5)
이는 밝은 덕이란 지극히 큼을 밝히고자 ≪帝典≫을 인용한 것이다. 명덕은 본체의 입장에서, 峻德은 전체적인 면에서 말한 것이다. "능히……밝혔다[克明……]"라는 것은 요임금의 '공경·밝음·공순·겸양[欽明恭讓]'과 관련이 있을 뿐, 신민에까지는 관련되지 않는다.
帝典에 曰 克明峻德이라 하니
≪帝典≫에 이르기를 "큰 덕을 잘 밝히셨다"라고 하니,
5) ≪秋淵文集·大學問目≫.
≪태갑≫에서 보다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탕임금 이전에 요임금이 있었다. ≪虞書·帝典≫을 살펴보면, 밝은 덕은 원래 지극히 고매하고 광대하지만, 사욕에 의해 비루하고 협소해지게 된다. 그러나 요임금만은 "공경하고 밝고 문장이 있고 깊은 생각[欽明文思]"이 있어 이처럼 크나큰 덕을 밝혔다고 한다.
帝典은 堯典이니 虞書요 峻은 大也라
≪제전≫은 ≪요전≫이니 ≪우서≫요, 峻은 큼이다.
명덕이란 덕의 본체가 밝다는 본질적인 면으로, 峻德이란 덕의 전체가 크다는 공간적인 의미로 말한 것이나 실상은 하나이다. 덕의 전체는 본디 한량없이 크다. 그러나 이를 밝히면 자기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여 막힘이 없고 밝음을 얻으므로, 전체가 모두 밝게 되는 연속선상의 일환이다.6)
皆自明也 구절은 '明' 자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스스로 해야 한다는 '自' 자에 보다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인은 오로지 천부적인 자질만을 믿지 않고 스스로 배우고 밝혀야 한다는 뜻으로 이 장을 끝맺고 있다. 따라서'스스로 밝힌다'라는 自明 두 글자는 ≪서경≫을 인용한 3절의 뜻을 모두 종합, 귀결지은 것이므로, 배우는 자들은 이 구절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뜻을 알아야 한다.
6) ≪大全≫, 新安陳氏.
皆自明也니라
모두 자기 스스로가 밝히는 것이다.
위에서 세 차례 ≪서경≫을 인용한 뜻은 각기 다르지만 그 요지는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혀야 한다는 데 있다. 따라서 ≪대학≫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위의 세 성인을 본받지 않을 수 없다.
結所引書니 皆言自明己德之意라
위에서 인용한 글을 끝맺음이니, 모두 스스로 자기의 덕을 밝혀야 한다는 뜻을 말한다.
위에서 세 차례 ≪서경≫을 인용한 것은 대체로 윗부분에 쓰인 두 글자
('克明'·'顧諟')를 해석한 것이다. 克明德·克明峻德의 '克明'은 하나같이 明明
德이라는 앞의 明 자의 뜻을 해석한 것이며, 뒤의 '……德', '……天之明命', '……峻德'은 명덕의 의의를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맨 끝 절에서 본장의 맺음말로 쓰인 皆自明의 皆 자는 위에서 세 차례 인용한 ≪서경≫에 이어여러 성인이 전수한 바 일맥상통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을 강조하는 自 자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 이는 세 성인의 덕을 찬양하면서 아울러 후인을 격려하는 깊은 뜻을 담고 있다.7)
* * *
右는 傳之首章이니 釋明明德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첫 장이니, 밝은 덕을 밝힌다는 데 대한 해석이다.
7) ≪備旨≫, 顧麟士.
此通下三章 至止於信은 舊本에 誤在沒世不忘之下하다
이로부터 아래의 3장 '止於信' 구절까지는 옛 책[舊本]에 잘못되어 '沒世不忘' 구절 아래에 있었다.
이 장은 신민의 의의를 해석한 것으로, 첫 ≪湯之節≫에서는 신민의 근본을, 둘째 ≪康誥節≫에서는 신민의 일을, 셋째 ≪詩曰節≫에서는 신민의 효험을, 끝 ≪是故節≫에서는 군자가 마땅히 힘써야 할 책임을 말한 것으로, 끝 절에 가장 중점을 두고 있다.
욕조[盤]란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용기이며, 銘이란 그 글을 항상 눈여겨보면서 마음을 경계하고자 함이다. 苟日新의 '苟' 자는 아래의 두 구절, 日日新 又日新과 밀접하게 관련지어 보아야 한다. 이는 자신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지만 반드시 신민의 의의와 종합하여 일관성 있게 규명해야 할 것이다.
湯之盤銘에 曰 苟日新이어든 日日新하고 又日新이라 하며
탕임금의 욕조에 명문이 새겨 있는데, "참으로 어느 날 새롭게 하였거든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 하며,
경문에서 말한 신민의 의의를 옛 성인의 말에서 고찰해볼 수 있다. 탕임금의 욕조 위에 새겨 놓은 명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몸을 씻는 일과 같다. 그 어느 날 오랫동안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 스스로 새롭게 하였으면, 줄곧 이어서 깨끗한 몸을 항상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다시 날마다 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사욕을 말끔히 없애는 것 또한 목욕하는 일과 같다. 이는 탕임금이 자신을 새롭게 했던 규범을 말한다.
盤은 沐浴之盤也요 銘은 名其器以自警之辭也라 苟는 誠也라 湯이 以人之洗濯其心以去惡을 如沐浴其身以去垢라 故銘其盤이라 言誠能一日有以滌其舊染之污而自新이면 則當因其已新者하야 而日日新之하고 又日新之하야 不可略有間斷也라
盤은 목욕하는 소반(욕조)을 말하고, 銘은 그 그릇에 이름을 붙여 스스로를 경계하는 말이다. 苟는 진실로 ……의 뜻이다. 탕임금이 사람이 그 마음을 깨끗이 씻어서 악을 버리는 것을 마치 그 몸을 씻어 때를 벗겨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 욕조에 명문을 새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그 어느 날 예전에 찌든 더러운 때를 씻어 스스로 새롭게 한 바 있으면 마땅히 이미 새로워진 것을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나날이 새롭게 하여 잠시라도 그침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銘에 관한 유래와 문체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일찍이 夏·商 시대로부터 솥·술잔·소반·양치그릇 따위에 모두 銘을 썼다고 하는데 그 문장은 대부분 유실되었고, 탕임금의 盤銘이 ≪대학≫에 남아 있을 뿐이며, ≪大戴禮≫에 武王의 여러 가지 銘이 기재되어 있다. 그 후로 銘은 점차 확대되어 산·시내·궁실·문·샘 따위에까지 銘을 씀으로써 器物에 사용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銘의 문체는 두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는 警戒類이며 둘째는
祝頌類이다. 陸機의 말에 의하면 "銘의 문체란 해박하면서도 요약되고, 요약되면서도 溫潤한 것을 중요시한다"라고 한다. 이 밖에도 碑銘·墓碑銘·墓誌銘이 있지만 이와 함께 나열할 성질의 문체가 아니다.8)
이의 공부는 모두 '作' 자에 있다. 作新民의 '作' 자는 경문에서 新民의'新' 자의 뜻으로 쓰인 글자이다. 이 때문에 ≪장구집주≫에서는 "스스로 새로워지려고 힘쓰는 백성을 ……[自新之民]"이라 하니, 이는 양심의 발로 와 문왕의 덕화를 겸하여 말함이다.
康誥曰 作新民이라 하며
≪강고≫에 이르기를 "스스로 새롭게 하려고 하는 백성을 진작시켜라" 라고 하며,
≪周書·康誥≫를 살펴보면, 상나라의 백성들이 桀의 포악한 옛 풍속에 물들어 있었지만, 그들에게도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힘쓰는 계기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위정자는 마땅히 그 같은 계기를 마련하여 그들을 진작시키되, 井田과 학교 등을 마련해 주는 것은 곧 계기의 진작에 필요한 도구이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이 찾아오도록 선정을 베풀고 그들의 허물을 바로잡아 잘못되는 일이 없이 곧은 마음으로 살도록 해주는 것은 곧 계기의 진작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방법을 자세히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그들로 하여금 지난날의 악을 버리고 선으로 옮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무왕이 백성을 새롭게 진작시켰던 선정을 말한다.
8) 徐師曾 著, ≪文體明辨≫, 旿晟社, 1984, 영인본 3책, 325쪽.
鼓之舞之之謂作이니 言振起其自新之民也라
그들을 고무시키는 것을 作이라 한다.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백성을 진작시키는 것을 말한다.
≪장구≫의 '鼓之舞之'는 ≪주역·계사≫ 上의 "鼓之舞之以盡神" 구절 가
운데 4글자만을 뽑아서 作 자를 해석한 것이다.9)
"그 천명이 새롭다[其命維新]"라는 것은 곧 신민에 의한 결과로서, 이는 其數의 '命'을 가리킨 것이니, 顧諟明命의 命(본원적인 命) 자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其命維新의 其는 문왕을 가리키는데, ≪장구≫의 "능히 그 덕을 새롭게 하여 이로써 백성에게 미쳐간다"라는 말은 문왕이 천명을 받을 수 있었던 그 연유를 밝힌 것이다.
詩曰 周雖舊邦이나 其命維新이라 하니
≪시경≫에 이르기를 "주나라는 오랜 제후의 나라였으나, 그 천명이 새롭다" 하니,
≪大雅·文王篇≫을 살펴보면, 주나라는 후직 이후 자그마한 제후국으로 면면히 이어왔는데, 문왕에 이르러 聖德이 날로 새롭고 백성의 풍속 또한 크게 탈바꿈되었다. 이 때문에 하늘이 그에게 천하를 소유하도록 명하여주나라의 운명이 새롭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문왕이 나라의 운명을 새롭
9) ≪大全≫ 新安陳氏.
게 했던 바를 말한다.
詩는 大雅文王之篇이라 言周國雖舊나 至於文王 能新其德 以及於民하야 而始受天命也라
詩는 ≪대아·문왕편≫이다. 주나라는 비록 오래되었지만 문왕에 이르러 능히 그 덕을 새롭게 하여 백성에게까지 미쳐 처음으로 천명을 받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 장은 신민에 대한 해석인데, 이 장 내에서 쓰인 다섯 개의 新 자는 모두 신민의 新 자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盤銘節≫은 자신의 새로움을, ≪康誥節≫은 백성이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하는 것[自新]을 말하며, ≪文王節≫은 국가 운명, 즉 천명의 새로움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의 3절에 차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盤銘節≫은 신민의 근본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실마리를, ≪康誥節≫은 신민의 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방법을, ≪文王節≫은 신민의 공효의 극치로서 백성을 새롭게 한 이후에 얻어진 공효를 말한 것이다.10)
이는 위의 3절을 총괄하여 끝맺은 말로서 군자에게 큰 책임을 부여하는 것이지, 군자를 찬양하는 뜻은 아니다. "無所不用其極"의 極은 지극한 선을 말한다. 신민은 첫 절의 自新에 근본하여 이를 '用其極' 구절에 귀결지은 점으로 미뤄보면 명덕·신민·지선 삼강령이 상하로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0) 같은 책, 北溪陳氏.
是故로 君子는 無所不用其極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그 지극함을 쓰지 않는 바 없다.
탕임금과 문왕·무왕을 살펴보면 그들 모두가 그 지극한 선[至善]으로 행하였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후세의 군자로서 백성을 새롭게 다스려야 할 사명을 지닌 위정자는, 의당 스스로의 몸을 새롭게 하되 반드시 탕임금과 같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며, 백성을 새롭게 하되 반드시 주나라와 같이 새로워지고자 원하는 백성을 진작시키고, 천명을 새롭게 하되 모두 지극한 선이 있는 곳에 그치기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自新과 新民은 皆欲止於至善也라
스스로를 새롭게 하는 것과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 이 모두가 지극한 선에 그치고자 함이다.
≪장구≫에 의하면 ≪作新節≫에서는 '自新之民'이라 하여 '自新'을 신민에 포함시켰는데, 여기에서는 '自新·新民'이라 하여 自新을 명덕에 포함시켜 말하였다. 이는 명명덕과 신민은 항상 서로를 필요로 하여 둘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명명덕이란 스스로의 명덕을 밝히는 것이지만 경문 1장에서 말한 '明明德於天下'란 신민의 일이며, 신민이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盤銘節≫의 ≪장구≫에서는 '日新其德'이라 말하니 이는 명덕의 일이다. 이처럼 명덕과 신민을 함께 말하여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11)
11) ≪秋淵文集·大學問目≫.
* * *
右는 傳之二章이니 釋新民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둘째 장이니,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대한 해석이다.
이 장에서는 ≪시경≫을 인용하여 止至善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明德·新民, 知止·能得의 뜻이 모두 그 가운데에 담겨 있다. 첫 절에서는 나라의 도읍지를 빌어 사물마다 그칠 곳이 있다는 뜻으로 '止' 자를, 다음 절에서는 그칠 곳을 아는 꾀꼬리를 빌려서 반드시 지선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知' 자를, 셋째 절에서는 마땅히 지선에 그쳐야 한다는 점을 직접적으로 말하면서 문왕의 敬止를 예로 제시하여 이를 본받아야 함을, 제4~5절에서는 명덕의 止至善과 신민의 지지선의 실상을 둘로 나누어서 말하였는 바, 여기에는 율동적인 詠歎調와 넘쳐흐르는 淫泆感이 짙게 깔려 있다.
邦畿란 천하에서 가장 중앙지요, 바른[中正] 땅으로서, 외진 곳 비루한 땅과 비유할 바 아니며, 千里란 광활한 지방으로서 협소한 고을과 견줄 수 없다. 이는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비유한 말이다. 惟民所止 구절을 음미해 보면, 지극한 선이란 은연중 마음의 邦畿임을 나타내주고 있으며, 또한 스스로 그곳에 그쳐야 한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다만 이의 중점은 나라의 도읍지라 하는 그 소재지에 있는 것이지, 백성의 그침[民止]에 있지 않으므로 반드시 하나의 '所(……하여야 할 곳)' 자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장구≫의 '言物各有所'의 物은 명덕·신민을 가리킨다.
詩云 邦畿千里여 惟民所止라 하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나라의 서울 근교, 천리 땅이여! 백성들이 멈추어 살 곳이다"라고 하였다.
경문에서 말한 '止於至善'이란 무엇을 말한 것일까? 일찍이 옛 책을 뒤적이다가 이에 관한 문장을 찾아볼 수 있었다. ≪商頌·玄鳥篇≫에 의하면, "왕의 도읍이 소재한 사방 천 리의 지방은 천하의 중앙이기에 사방 백성들이 그 주변을 에워싸고 모두가 그곳으로 옮겨와 살기를 바란다. 정령 그곳은 백성들이 살기에 가장 좋은 지방이다"라고 한다. 이 시구를 음미해 보면, 모든 일에는 지극히 선한 이치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 살려고 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이치이다.
詩는 商頌玄鳥之篇이요 邦畿는 王者之都也요 止는 居也니 言物各有所當止之處也라
시는 ≪상송·현조편≫이요, 邦畿는 王者의 도읍이요, 止는 거주한다는 뜻이니, 모든 사물에는 제각기 마땅히 그쳐야 할 곳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위 ≪邦畿≫ 절에 이어서 지극한 선에 그쳐야 할 줄을 알아야 한다는 '知止'의 뜻을 밝힌 글이다. 緡이란 노랫소리와 피리가락을 서로 번갈아가며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과 같으며, 蠻이란 南冠의 곡조, 鴃舌의 소리와 같은 유이다. 於止(於止 知其所止)의 止는 시간적으로, 所止의 止는 공간적으로 말한 것이다. 공자가 ≪시경≫의 뜻을 이와 같이 해석한 것은 사람들을 경각시키고자 함이지, 꾀꼬리에 대한 찬사가 아니다.
詩云 緡蠻黃鳥여 止于丘隅라 하야늘 子曰 於止에 知其所止로소니 可以人而不如鳥乎아
≪시경≫에 이르기를 "꾀꼬르르…… 꾀꼬르…… 노래하는 꾀꼬리여! 산 모퉁이 무성한 숲에 그친다"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이에 대해 말씀하였다. "그칠 때에 그쳐야 할 곳을 앎이니, 사람으로서 새만 같지 못해서야……!"
≪小雅·緡蠻篇≫에 "꾀꼬르르…… 꾀꼬르……노래하는 꾀꼬리여! 높다 란 언덕, 무성한 수풀에 앉는다"라고 하니, 공자는 이 시를 읊으면서 느낀 바 있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꾀꼬리는 한낱 날짐승에 지나지 않지만 그 새는 앉을 때 오히려 앉아야 할 곳을 알고서 가려서 앉는데, 하물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그칠 곳을 알지 못하여, 저 새만 같지 못해서야……!" ≪시경≫과 공자의 말을 살펴보면, 인간이란 지극한 선이 있는 곳에 그쳐야 할 바를 알아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詩는 小雅緡蠻之篇이요 緡蠻은 鳥聲이요 丘隅는 岑蔚之處라 子曰以下는 孔子說詩之辭라 言人當知所當止之處也라
詩는 ≪소아·면만편≫이다. 緡蠻은 꾀꼬리의 울음소리, 丘隅는 산이 깊고수풀이 우거진 곳이다. 子曰 이하의 문장은 공자가 ≪시경≫을 해석한 말이다. 사람이란 그쳐야 할 곳을 알아야 한다는 점을 말한 것이다.
이 절에서는 문왕의 止至善을 예로 들어 명덕·신민의 지지선을 종합하여 말하였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시경≫을 인용, 穆穆을 첫머리로 삼고 敬止를 끝으로 맺고 있다. 이는 周濂溪의 "고요를 주로 하여 인간의 법을
세운다[主靜立人極]"라는 의미와 같다. ≪장구≫에서는 緝[不斷]과 熙[光明]를 상대적으로 말하였는데, ≪혹문≫ 의 "광명이 끊임없이 지속되어 조금도 간단이 없다"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 뜻이 일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語類≫를 살펴보면, "緝熙란 공부요, 敬止란 공효"라 하였는데, ≪혹문≫의 小註에서는 "緝熙는 이미 이처럼 얻은 것이지, 바야흐로 공부를 해나가는 상태가 아니다"라고 하여, 兩說이 각기 다르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문왕 그 자신의 입장에서 말할 경우의 緝熙란 문왕이 이미 이처럼 얻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배우는 자가 문왕을 본받아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하면 緝熙란 긴요한 공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문왕편≫의 한 구절이라는 점에서 볼 때 문왕 그 자신의 측면에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 시를 인용한 중점은 止에 있는데, 敬이란 특별히 그 마음가짐을 말한다. 이 때문에 敬이란 내재의 심리상에, 止란 외면의 사물상에 그 뜻을 두고 있다. 敬止 두 글자는 아래 다섯 조목[仁·敬·孝·慈·信]의 강령이다. 다섯 조목 가운데 명명덕에 관한 부분은 명명덕의 지선이요, 신민에 관한 부분은 신민의 지선에 해당된다.
詩云 穆穆文王이여 於緝熙敬止라 하니 爲人君엔 止於仁하시고 爲人臣엔 止於敬하시고 爲人子엔 止於孝하시고 爲人父엔 止於慈하시고 與國人交엔 止於信
이러시다 ≪시경≫에 이르기를 "거룩하신 문왕이시여! 아아, 끊임없이 빛나고 공경에 그친다"라고 하니, 임금이 되어서는 어짊에 그치고,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고, 아들이 되어서는 효도에 그치고, 아버지가 되어서는 자애로움에 그치고, 나라 사람들과 더불어 사귀는 데는 믿음에 그치셨다.
지극한 선에 그친 자를 찾아보면 문왕 한 분이 있었을 뿐이다. ≪대아·문왕편≫을 살펴보면, "거룩하신 문왕이시여! 아아, 그의 덕은 끊임없이 빛나고 공경으로서 그쳐야 할 곳에서 언제나 편안해하지 않는 바 없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시경≫에서 말한 공경에 그쳤다[敬止]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어짊이란 임금으로서의 지극한 선이기에 문왕이 임금이 되어서는 어진 마음으로 어진 정사를 행하여 인에 그쳤다. 공경이란 신하로서의 지극한 선이기에 문왕이 신하가 되어서는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받들어 공경에 그쳤다. 효도란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선이기에 문왕이 자식이 되어서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효도에 그쳤다. 사랑이란 아버지로서의 지극한 선이기에 문왕이 아버지가 되어서는 덕을 쌓아 후손을 창성케 하여 사랑에 그쳤다.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지극한 선이란 믿음에 있기에 문왕이 백성과 사귈 때에는 안이나 밖이나 그리고 처음이나 끝이나 그들을 속이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갈팡질팡하는 두 마음이 없는, 믿음에 그쳤다. 이른바 "끊임없이 빛나고 공경에 그쳤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이는 문왕이 자연스럽게 그칠 곳을 얻음이다. 배우는 자는 일상생활의 인륜 가운데 가장 큰 강령인 이 다섯 가지의 조목으로써 천하의 모든 일을 유추해 나가면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을 것이다.
詩는 文王之篇이라 穆穆은 深遠之意요 於는 歎美辭요 緝은 繼續也요 熙는 光明也요 敬止는 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라 引此而言聖人之止 無非至善이로되 五者는 乃其目之大者也니 學者於此에 究其精微之蘊하고 而又推類以盡其餘면 則於天下之事에 皆有以知其所止而無疑矣니라
詩는 ≪문왕편≫이다. 穆穆은 깊고 원대한 뜻, 於는 탄미사, 緝은 끊임없이 이어짐, 熙는 광명, 敬止는 불경스러움이 없이 그칠 데에서 편안함을 말한다. 이를 인용하여, 성인의 그침은 지극한 선 아닌 것이 없지만 이다섯 가지는 그 중에 큰 조목이니, 배우는 자가 이에 그 精微한 蘊奧를 궁구하고, 또한 이를 유추하여 그 나머지 것을 다하면, 천하의 일에 있어서 모두 그쳐야 할 곳을 앎으로써 의심이 없게 될 것이다.
敬止의 敬은 廣義로서 全體說인 데 반하여, 止於敬의 敬은 狹義로서 內外와
常變으로 국한지어 말한 것이다. 이로 보면 敬止의 止와 止於……의 止 자 역시 廣義와 狹義로 나누어짐을 알 수 있다.12)
이 절은 명명덕 止至善의 실상에 대해 읊은 것이다. ≪시경≫의 구절을 가볍게 서술해 나가면서 시를 해석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有斐 구절은 군자의 인품이 아름답고 빛남을 말한 것으로, 이는 애당초 切磋琢磨에서 연유한 것이다. 골각류는 결[脈絡]을 찾아서 갈고 닦기에, 이는 分析을 주로 말한다. 따라서 이는 궁리에 속한다. 옥석류는 견고한 덩이이므로 탁마 하기 어려운 물체이기에 이는 다듬는 것[攻鏨]을 주로 한다. 따라서 이는 사심을 버리는 데[去私] 속한다. 학문과 수신은 바로 止於至善을 추구하는 공부이며, 恂慄과 威儀는 止於至善을 얻은 증험이다. 그리고 恂慄은 동정을 겸하여 말하며, 威는 자신의 의젓한 풍모를 남들이 우러러보고 두려워하는 것이지 한갓 엄격하고 사나움을 일삼는 것이 아니며, 儀란 動容周旋하는데 예절이 맞은 것이지 외모만을 꾸미는 것이 아니다. 명덕은 稟賦 초기
12) ≪備旨≫, 該條와 經文의 夾註
에, 盛德은 이를 실천한 뒤에 얻어진 것이며, 성덕으로서 이에 다시 더할 수 없는 그것이 지극한 선이니, 이 절의 중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백성이 잊지 못하는 것[不能忘]은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 秉彝의 본성으로 말한 것이지, 백성에게 덕택이 미친 것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道學 이하의 문장은 ≪시경≫을 빌어 경문을 해석한 것이기에, 굳이 衛 武公을 찬양한 글로 보아서는 안 된다.
詩云 瞻彼淇澳한대 菉竹猗猗로다 有斐君子여 如切如磋하며 如琢如磨로다 瑟兮僩兮며 赫兮喧兮니 有斐君子여 終不可諠兮라 하니 如切如磋者는 道學也요 如琢如磨者는 自修也요 瑟兮僩兮者는 恂慄也요 赫兮喧兮者는 威儀也요 有斐君子 終不可諠兮者는 道盛德至善을 民之不能忘也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저 기수 굽이진 언덕 바라보니 푸른 대숲이 무성하여라. 우아하신 군자여 자른 듯 갈은 듯하며, 쪼는 듯 윤내듯하여라. 빈틈없는 엄밀함과 씩씩하고 꿋꿋함이여, 빛나고도 성대하심이여, 우아하신 군자를 마침내 잊을 수 없노라" 하니, 자른 듯 갈은 듯하다는 것은 학문을 말함이요, 쪼는 듯 윤내듯하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닦음이요, 빈틈없는 엄밀함과 씩씩하고 꿋꿋함이 있다는 것은 엄하고 두려운 마음가짐이요, 빛나고도 성대하다는 것은 위엄과 의젓함이 풍겨 나오는 모습이요, 우아하신 군자를 마침내 잊을 수 없음은 성대한 덕과 지극한 선을 백성들이 잊지 못함을 말한다.
≪衛風≫의 시에서 명명덕의 지어지선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시에 의하면"저 기수 굽이진 언덕을 보라. 푸르른 대나무가 그지없이 무성하다. 하물며 우리의 우아하신 군자를 보라. 그의 공부의 정밀함은 상아와 뿔을 다듬을 때 먼저 톱으로 켠 뒤에 또 다시 정성들여서 줄로 갈 듯이 거듭하였다.
공부의 세밀함은 옥돌을 다듬을 때 먼저 끌로 쪼아낸 뒤 또 다시 정성껏 모래로 갈아 윤을 내듯 거듭하였다. 이로써 안으로는 빈틈없이 엄밀하고의젓하고 꿋꿋하며, 바깥으로는 성대하게 빛나고 눈부시게 나타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우아한 군자를 끝내 잊을 수 없다"라고 한다. 이 시에서 말한 바를 오늘날의 입장에서 연역해 보면, 이른바 톱으로 자른 듯 줄로 가는 듯하다는 것은 군자가 궁리로서 강습을 통하여 탐구하고 토론을 통하여 논변함을 말하니, 학문으로 알아 나가는 지적인 공부가지극히 정밀함이다. 끌로 쪼는 듯 모래로 윤내듯하다는 것은 군자가 사욕을 버리는 공부로써 자아를 반성하여 욕심을 끊고 자신을 극복하여 악을 물리침을 말하니, 몸을 닦아 나가는 실천의 수양이 지극히 세밀함이다. 엄밀하고 꿋꿋함이란 천리를 따르는 생각이 정밀하고 밝아서 굳이 붙잡아 두지 않아도 방자하다거나 게으름이 없이 스스로 조심하고 두려워함이다. 빛나고 찬란함이란 군자의 순수하고 전일한 마음이 안에 쌓여 바깥으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아도 찬란한 빛이 저절로 나타나므로 남들이 두려워하는 위엄이 있고 남들이 본받을 수 있는 몸가짐이 있다. 우아하신 군자를 마침내 잊을 수 없다는 것은 우아한 군자가 학문과 自修의 공부에 기조를 두고 恂慄과 위의의 경지로 나아가 그의 성대한 덕이 이미 지극한 선에 이르렀기에 인간으로서의 똑같은 마음을 소유한 백성들이 자연히 그를 추앙하게 되어 그를 잊지 못하기에 이른 것이다. 명명덕의 지어지선은 바로 이와 같다. 이는 신민을 할 수 있는 근본이 이의 토대 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詩는 衛風淇澳之篇이라 淇는 水名이오 澳은 隅也요 猗猗는 美盛貌니 興也라 斐는 文貌라 切以刀鋸하고 琢以椎鑿은 皆裁物使成形質也요 磋以鑢鐋하고 磨以沙石은 皆治物使其滑澤也라 治骨角者는 旣切而復磋之하고 治玉石者
는 旣琢而復磨之하니 皆言其治之有緖而益致其精也라 瑟은 嚴密之貌요 僩은 武毅之貌요 赫喧은 宣著盛大之貌라 諠은 忘也요 道는 言也요 學은 謂講習討論之事요 自修者는 省察克治之功이요 恂慄은 戰懼也요 威는 可畏也요 儀는 可象也라 引詩而釋之하야 以明明明德者之止於至善이라 道學自修는 言其所以得之之由요 恂慄威儀는 言其德容表裏之盛이요 卒乃指其實而歎美之也라
詩는 ≪위풍·기욱편≫이다. 淇는 강 이름, 澳은 강 언덕, 猗猗는 아름답고 성대한 모양이니, 이는 興體(聯想法)이다. 斐는 문장에 광채가 나는 모양이다. 칼과 톱으로써 끊고 방망이와 끌로 쪼아낸 것은 모두 물체를 재단하여 형태소[形質]를 이루는 것이며, 줄과 대패로 갈고 미세한 모래와 돌로 갈아내는 것은 모두 물체를 다듬어서 매끄럽고 윤이 나게 하는 것이다. 뼈와 뿔을 다듬는 것은 먼저 자른 뒤에 다시 갈며, 옥과 돌을 다듬는 것은 먼저 쪼고 다시 갈아내는 것이니, 이는 모두 그런 물체를 다듬는 데에는 선후의 실마리가 있어 더욱 더 그 정밀함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瑟은 엄밀한 모양, 僩은 씩씩하고 굳센 모양, 赫喧은 현저[宣著] 성대한 모양이다. 諠은 잊음이요, 道는 말함이요, 學은 강습과 토론, 自修는 省察과 克治의 공부, 恂慄은 戰慄과 恐懼, 威는 남들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요, 儀는 남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다. ≪시경≫을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여 명명덕의 지어지선을 밝힌 것이다. 道學과 自修는 지극한 선을 얻어 나가는 유래를 말하며, 준율과 위의는 그 德容·表裡(준율은 내면의 덕, 위의는 표면의 몸가짐)의 성대함을 말함이며, 끝에서는 그 실상[盛德至善]을 가리켜 탄미함이다.
이 ≪대학≫에 인용된 ≪시경≫은 제2장 ≪周雖節≫의 ≪大雅·文王篇≫을 필두로 하여 무려 12군데이다. 그 가운데 제9장 ≪桃之節≫, 제10장 ≪節彼節≫과 본절은 ≪시경≫의 '六義'의 하나인 흥체에 해당되는 문장이다. ≪毛
詩序≫에서는 ≪周禮·太師職≫의 六詩(風·賦·比·興·雅·頌)에 근거하여 이를
'六義'라 하였는데, '육의'는 다시 三經(風·雅·頌)과 三緯(賦·比·興)로 나누어 ≪시경≫의 체제를 형성하였다. '興'이란 외재의 사물을 통해서 내심의 영 감을 촉발시키는 것으로 觸景生情式의 문체이며, 이는 수사학에 있어서 연상법에 상당한다.13) 그리고 盛德과 至善은 어떻게 다르며, 또한 盛德至善에서 어찌하여 명덕이라 하지 않고 성덕이라 하였을까? 이치가 사물에 있는 것을 지선이라 하고, 몸소 이 이치를 체득하여 얻은 바 있으면 이를 성덕이라 한다. 예컨대 임금에 있어서의 지선은 곧 仁인데, 그 인을 지극히 다한 것은 임금의 성덕이다. 명덕과 성덕의 차이는, 명덕이란 애초에 받아온 밝음을 말하며, 성덕이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실천한 이후에 얻어진 것으로 자신의 덕을 이루어 밖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니, 이는 하나의 이치일 뿐 명덕 밖에 또 다른 성덕이 있는 것은 아니다.14)
이 절은 신민에 관한 止於至善의 실상을 읊고 있다. 前王不忘이란 전왕이 사람으로 하여금 잊지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네 개의 其(其賢·其親·其樂·其利) 자는 전왕을 가리키며, 아래의 賢·親·樂· 利 네 글자는 전왕의 신민 止至善을 말한다. 이의 주된 뜻은 전왕을 지칭하는 위의 其 자에 있다. '賢·親·樂·利' 네 글자는 후인들이 선왕의 餘澤을 흠뻑 입음으로써 그를 노래하고 감탄하여 후세에까지 이를 전하게 된 것이다. 舊章成憲이란 賢을 말한 것으로서 嘉語와 懿行을 포괄하며, 創業垂統은 親을 말한 것으로서 建國·分封을 말하며, 樂은 태평의 덕화로서 이는
13) 周何 等 共編, ≪國學導讀叢編·詩經導讀≫, 162쪽, 康橋出版事業公社, 1969.
14) ≪大全≫, 新安吳氏.
교육상의 일이며, 利란 의식주의 厚生으로서 養民上의 일이다. 앞 ≪瞻彼節≫ 의 不忘은 군자의 훌륭한 덕을 존경한다는 뜻이지만, 이의 不忘은 그의 큰 은혜에 감사하고 마음속 깊이 추대함을 말한다.
詩云 於戲라 前王不忘이라 하니 君子는 賢其賢而親其親하고 小人은 樂其樂而利其利하나니 此以沒世不忘也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아아, 예전의 임금을 잊지 못하리로다!" 하니, 군자는 예전 임금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고 그 친함을 친하게 여기며, 백성들은 예전 임금이 즐겁게 해줌을 즐거워하고 그 이익을 이롭게 누리니,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이 때문에 잊지 못한 것이다.
또한 ≪烈文篇≫에서, 신민의 지어지선을 찾아볼 수 있다. 그에 의하면, "아! 우리의 옛 임금을 잊을 수 없노라"라고 한다. 무슨 까닭에 예전의 임금을 잊지 못하는 것일까? 후대의 후왕 입장에서 살펴보면 舊章成憲은 전왕의 어지심[賢]인데, 후대의 제왕이 선왕의 어진 법을 받들어 지켜오고[賢其賢], 創業垂統은 선왕의 친하심[親]인데, 후대의 제왕이 선왕의 친함을 이어 계승하고[親其親], 후대의 백성 입장에서 살펴보면 아름답고 순박한 풍속[風淳俗美]은 즐거움[樂]인데, 후대의 백성들이 그 즐거움을 즐기면서 길이 태평을 누려왔고[樂其樂], 정전과 집을 나눠줌[分井授廛]은 이로움[利]인데, 후세의 백성들이 그 이로움을 이롭게 여기며 영원히 그 은택에 젖어 살 수 있었다[利其利]. 이 때문에 예전 임금이 이미 세상을 떠났으나 후대 사람으로서 그로부터 은택을 입은 자들이 모두 사모하는 마음에 차마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신민의 지어지선은 이와 같다. 이는 명명덕에 의한 증험이 아니겠는가.
詩는 周頌烈文之篇이라 於戲는 歎辭요 前王은 謂文武也요 君子는 謂其後賢後王이요 小人은 謂後民也라 此言前王所以新民者 止於至善하야 能使天下後世로 無一物不得其所라 所以旣沒世而人思慕之하야 愈久而不忘也라 此兩節은 咏歎淫泆하야 其味深長하니 當熟玩之니라
詩는 ≪주송·열문편≫이며, 오호[於戲]는 감탄사, 前王은 문왕·무왕을 이르는 말이다. 군자는 후대의 현인과 후대의 왕을 말하며, 소인은 후대의 백성을 이르는 말이다. 이는 전왕이 백성을 새롭게 한 바 지극한 선에 그쳐 천하 후세로 하여금 어느 한 사람도 제자리를 얻지 못한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를 더욱 사모하여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를 잊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2절(≪瞻彼≫·≪於戲≫)은 읊조리고 감탄[詠歎]해하는 어조와 말 밖에 넘쳐흐르는[淫泆] 뜻이 있어 그 의미가 심장하니, 마땅히 이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傳文에서 명덕과 신민은 간략하게 언급하고 특별히 지지선에 대해 자세히 논한 것은 명덕과 신민의 표준이 되는 지지선에 중점이 있기 때문이다. 옛 사람들의 문장은 항상 篇의 끝부분에서 시를 인용하여 읊조리며 감탄해마지않았는데, 이는 樂章에 亂이 있는 것과 같은 예이다. 예컨대 ≪중용≫의 맨 끝장 또한 이와 같은 용례로서, 여덟 차례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중용≫을 끝맺고 있다. 이는 경문의 삼강령에 관한 傳文의 끝부분이 되므로 다섯 차례 시를 인용하여 지극히 영탄한 것도 악장의 亂體를 따른 것이며, 傳文을 지은 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하겠다.15)
15) ≪秋淵文集·大學問目≫.
* * *
右는 傳之三章이니 釋止於至善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셋째 장이니, 지극한 선에 그친다는 데에 대한 해석이다.
此章內 自引淇澳詩以下는 舊本에 誤在誠意章下하다
이 장의 안에 인용한 ≪기욱편≫ 이하의 문장은 옛 책에 잘못되어 ≪성의장≫ 아래에 있었다.
이 장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본말을 해석한 것으로, 聽訟의 일례를 들어 말하였지만 그 나머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 ≪논어≫에서는 聽訟·無訟으로 본말을 나누어 보았는데 여기에서는 無訟만을 들어 스스로 송사가 없게 되는 그 자체로서 본말을 구분짓고 있다. 이 때문에 聽訟 구절은 버려두고 다만 無訟 구절을 들어, 이에 그 근본이 있음을 미루어 보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반드시 그들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해야 한다. 진실하지 못한 자가[……必也使無訟乎 無情者……]"라는 구절에서는 使 자에 보다 큰 뜻을 두고 있으며, 無情 구절은 다시 無訟을, 大畏 구절은 다시 使 자의 뜻을 말하고 있다. '大畏民心'이라 말하지 않고 '民志'라고 말한 것은 송사의 시비를 일으키고자 하는 그 의지[志]를 말했기 때문이다. 백성의 뜻[民志]을 두렵게 만든다는 것은 천리와 양심을 두려워하도록 하는 것이며, 송사가 없다는 것은 백성의 덕이 새로워졌음을 뜻한다. 大畏民志 또한 신민에 속하지만, 백성의 마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위정자의 명명덕에 의
한 것이므로, 그 근본은 반드시 자신의 덕을 밝힌 뒤에 백성의 덕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 그 본말이 이처럼 분명한 것으로 보아 일에 있어서의 선후 또한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아래의 知本 이하 두 구절은 원래 衍文에 속한다. 그러나 知本 두 글자는 격물치지의 전체 공부를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라 해도 잘못된 말은 아니다.
子曰 聽訟이 吾猶人也나 必也使無訟乎인저 하시니 無情者 不得盡其辭는 大畏民志니 此謂知本이니라
공자가 말하기를 "송사를 듣고 처리함에 있어서 나도 남들과 같으나,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하겠다" 하니, 진실하지 못한 자가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백성의 마음을 매우 두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를 일컬어 근본을 앎이라 한다.
일찍이 경문에서 말한 '物有本末'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공자의 말을 살펴보면 이 뜻을 알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백성의 송사를 듣고서 그들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이야 나 또한 남들과 다를 바 없지만, 반드시 백성으로 하여금 잘잘못을 모두 잊게 함으로써 스스로 송사가 없도록 하는 것이 고귀한 일이다"라고 말하였다. 송사를 벌인다는 것은 원래 진실하지 못한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스스로 송사가 없게 되는 것은 성인이 먼저 진실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는 나의 밝은 덕이 이미 밝아서 자연스럽게 백성의 마음을 크게 굴복시켰기에 송사가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이를 살펴보면 명덕이란 신민의 근본으로서 마땅히 먼저 해야 할 일임을 알 수 있다. 명덕이 근본임을 안다면 끝이 되는 신민이란 마땅히 뒤에 해야 할 바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경문에서 말한 '物有本末'은
바로 이와 같다.
猶人은 不異於人也요 情은 實也라 引夫子之言 而言聖人能使無實之人으로 不敢盡其虛誕之辭는 盖我之明德旣明하야 自然有以畏服民之心志라 故訟不待聽而自無也라 觀於此言이면 可以知本末之先後矣라
猶人이란 남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며, 情은 진실이다.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진실하지 못한 자로 하여금 감히 그 헛된 거짓말을 다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나의 덕이 이미 밝아서 스스로 백성의 마음과 뜻을 두렵게 하여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이로써 송사는 들을 것조차 없이 스스로 없어진 것이다. 이 말을 살펴보면 본말의 선후를 알 수 있다.
송사를 듣고서 잘잘못을 판결하는 것은 신민의 지극한 선이 아니며, 송사를 들을 것조차 없을 때 바야흐로 신민의 지선이라 할 수 있다. 송사가 없다는 것은 백성이 이미 새로워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백성으로 하여금 송사가 없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밝은 덕을 밝힌 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聽訟과 無訟은 곧 명덕과 신민의 본말로서 선후가 있다.16)
* * *
右는 傳之四章이니 釋本末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넷째 장이니, 근본과 지엽에 대한 해석이다.
此章은 舊本에 誤在止於信下하다
이 장은 옛 책에 잘못되어 '止於信' 구절 아래에 있었다.
16) ≪大全≫, 玉溪盧氏.
이 장은 주자가 격물치지의 뜻을 보완하여 해석한 것으로서, 이를 네 단락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言欲 이하 두 구절은 致知는 격물에 있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며, 人心之靈 이하 여섯 구는 격물치지의 유래를 미루어 말하였고, 是以 이하 다섯 구는 격물치지의 공부를 자세히 논술함이며, 至於用力 이하 네 구는 격물치지의 공효를, 끝 두 구절은 끝맺는 말이다. 莫不有知의 知는 인심의 본연적인 내면 全體의 知를 지칭하고, 已知之理의 知는 외재 사물상에 나타난 부분[一段]적인 知를 말한다. 격물이란 표면으로부터 이면으로, 또는 거친 부분으로부터 정밀한 부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의 가운데에도 또 다른 이면이 있고, 정밀한 가운데에도 또 다른 지극히 정밀한 것이 있으므로, 한 겹을 통과하면 또 다른 한 겹이 있다. 이 때문에 반드시 지극히 다함에 이르러야만이 바야흐로 격물이라 말할 수 있다. 주자는 이 장을 보완하면서 이치를 밝히려고 하였을 뿐, 문체상의 문제에 관해서는 구애받지 않았다. 주자가 보완한 이 뜻은 程子가 앞서 말한 九條(≪혹문≫ 該條 참조)의 의의를 간단히 개괄한 것으로 그 원류와 공효를 모두 빠뜨림 없이 열거하였고,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정밀하고 자세하게 완벽한 문장을 구사했기 때문에 설령 후세에 성인이 태어난다 할지라도 다시 바뀔 수 없는 정설이라 할 것이다. 이 장은 오로지 앎[知: 인식의 문제]에 속한 부분으로 선을 밝히는[明善] 요체이며, 아래 ≪성의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실행[行: 실천의 문제]에 속한 것으로 몸을 진실케[誠身]하는 근본이 된다.
此謂知本이니라
이를 일러 근본을 안다는 것이다.
程子曰 衍文也라
정자가 말하였다. "이는 衍文이다."
此謂知之至也니라
이를 일러 앎의 지극함이라 말한다.
此句之上에 別有闕文이니 此特其結語耳라
이 구절의 위에 별도로 빠진 문장이 있다. 이는 특히 그에 대한 끝맺음말일 뿐이다.
* * *
右는 傳之五章이니 蓋釋格物致知之義而今亡矣라
오른편은 전문의 다섯째 장이니, 사물을 궁구하여 앎을 미루어 다한다는 뜻을 해석한 것으로 보이나, 이제는 없어졌다.
此章은 舊本에 通下章히 誤在經文之下하다
이 장은 옛 책에 아래 장(전6장의 일부분)까지 잘못되어 경문[經一章] 아래에 있었다.
間嘗竊取程子之意하야 以補之曰 所謂致知 在格物者는 言欲致吾之知인댄 在即物而窮其理也라 蓋人心之靈이 莫不有知요 而天下之物이 莫不有理언마는 惟於理에 有未窮故로 其知 有不盡也니 是以로 大學始敎에 必使學者로 即凡天下之物하야 莫不因其已知之理而益窮之하야 以求至乎其極하나니 至於用力之久而一旦에 豁然貫通焉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而吾心之全體
大用이 無不明矣리니 此謂物格이며 此謂知之至也니라
근래에 삼가 정자의 뜻을 취하여 이를 보완하고자 한다. 이른바 "앎을 미루어 다하는 것이 사물을 궁구하는 데 있다"라고 한 것은, 나의 앎을 다하고자 하면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함에 있음을 말한다. 사람마음의 신령함에는 앎이 있지 않음이 없고, 천하의 사물에는 이치가 있지 않음이 없건만,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지 못한 까닭으로, 그 앎에 극진하지 못함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대학에서의 첫 가르침은, 반드시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하여, 그 지극한 데 이르기를 추구하는 것이니, 오랜 동안 힘쓰다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훤히 툭 트이어 관통함에 이르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친 것이 이르러 오지 아니함이 없고, 내 마음의 온전한 본체와 큰 작용이 밝혀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것을 일러 사물의 이치를 궁구함이며, 이를 일러 앎이 지극함이라 한다.
주자는 '격물치지'의 궐문에 대한 전문을 다음과 같이 보완하였다. ≪대학≫의 전문 제5장은 경문의 격물치지에 대한 의의를 해석한 부분인데, 그에 관한 문장이 없어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격물치지란 배우는 자가 처음 공부해야 할 것으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기에 일찍이 정자의 뜻을 취하여 이를 보완하게 된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致知는 격물에 있다"라는 뜻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마음의 앎이 지극하여 어느 것 하나라도 모두 밝게 알기를 원한다면, 천하의 모든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하여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이르지 않는 바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비어 있고 신령[虛靈]한 마음이란 본연의 앎을 가지고 있으며, 천하의 모든 사물은 제각기 당연한 이치를 소유하고 있다. 오직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공부에 미진한 바 있었던 까닭에 내
마음의 앎 또한 본연의 도량을 다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대학에서 처음 사람을 가르칠 때 성의·정심·제가·치국·평천하를 한가로이 배울 수 없는 까닭에, 태학에 입학한 사람들에게 반드시 먼저 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나의 마음에 이미 알고 있는 이치로써, 더욱 궁구하는 공부를 더함으로써 앎의 극치에 이르기를 추구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랜 동안 노력하다 보면 어느 날 아침 훤히 깨침을 얻어 모든 사물의 이치를 통달하게 되면, 뭇 사물의 이치로서, 표면의 大綱과 이면의 節目 그리고 정밀하고 미세한 것과 거칠고 淺近한 모든 견해가 이르러오지 않는 바 없을 것이며, 따라서 나의 마음에 갖추고 있는 뭇 이치의 전체와 만사에 응용되는 大用의 所以然을 통달하게 되어 밝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사물의 表裡 精粗가 이르러 온다는 것은 경문에서 말한 格物이며, 내 마음의 전체와 대용이 밝아진다는 것은 경문에서 말한 知至이다. 대학에 들어간 자가 이처럼 지중한 공부를 가벼이 여길 수 있겠는가.
'格物致知'說은 그 유명한 주자의 인식론이다. 이는 ≪대학≫의 '致知在格物'·'物格而后知至' 두 구절을 推演한 것으로, 주자 인식론의 핵심이다. 주자
가 '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두 구절의 주해에서 '此謂知本' 네 글자를 衍文
이라 하고, '此謂知之至也'는 "이 구절의 위에 별도로 闕文이 있을 것이다. 이는 특별히 그 맺음말이다" 하여, 이러한 인식하에서 전문 제5장을 독립시켜 보완한 것이 격물치지에 관한 논술이다. 물론 伊川의 인식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격물에 관한 九條와 五條를 기본으로 하였음은 ≪혹문≫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格物이란 무엇이며, 致知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주자의 ≪장
구집주≫를 살펴보면, "格, 至也. 物, 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格은 다다름이요, 物은 일[事]과 같다. 이는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그 지극한
곳에 이르지 않음이 없고자 함이다)", "致, 推極也. 知, 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 無不盡也(致는 미루어 지극히 다함이요, 知는 앎[지식]과 같으니, 나의 지식을 미루어 극진히 다함은 그 아는 바를 지극히 다하고자 함이다.)" 또는 '物格
而后知至'의 ≪장구≫에서는 "物格者, 物理之極處 無不到也. 知至者, 吾心之
所知 無不盡也(物格은 사물 이치의 지극한 곳이 이르러 오지 않음이 없음이요, 知至는 나의 마음에 아는 바 지극하지 않음이 없음이다)"라 하였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주자의 뜻이 객관세계의 진리를 탐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주자의 격물치지의 목적은 "그칠 곳을 아는 데 있으며[知所止]", "그칠 곳이란 바로 마땅히 그쳐야 할 곳, 즉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이다. 이를 알면 뜻[志]에 정향이 있다."17) 이에서 격물치지의 목적은 마땅히 그쳐야 할 '至善이 있는 곳'을 알아서 '뜻에 정향이 있게 하는 데' 있는 것으로 도덕의 선을 규명하는 데 있을 뿐, 객관세계의 사물 이치를 탐구하는 데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주자 격물치지론의 본질이다. 다시 말하면 "卽物而窮其理(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궁구한다)"의 '物'이란 "卽凡天下之物, 莫不因其已知之理, 而益窮之(천하의 사물에 나아가, 이미 알고 있는 그 이치로 인하여 더욱 궁구하여……)"의 '天下之物'과 "衆物之表裡精粗 無不到(뭇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친 것이 이르러 오지 아니함이 없고)"의 '衆物'을 말한다. 이 '物'·'天下之物'·'衆物'이란 객관세계의 각종 사물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다음의 사실에서 알 수 있다. ≪近
思錄≫18)에 기재된 程頤의 "格物窮致事物之理" 일단의 ≪語錄≫에 대한 주
자의 해석에 의하면 "예컨대 독서로 도의를 講明한다는 것은 이 이치가 서적에 있기 때문이며, 고금의 인물을 논하여 그들의 是非 邪正을 분별한다는 것은 이 이치가 고금의 인물에 있기 때문이며, 사물을 응접하여 타당
17) 경문 1장 ≪知止節≫, 朱子의 주석.
18) 제3권, 格物窮理.
하게 처리한다는 것은 이 이치가 사물의 응접에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치를 궁구하는 세 가지의 경로는 모두 객관세계의 사물의 이치를 연구 탐색하는 데에 관계되지 않으며, 다만 이 여러 방면에 나타난 天理를 체험하고 인식한 데 지나지 않는다. 程·朱 또한 때로는 객관세계의 '物'을 말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 말한 '物'이란 天理·人倫·聖言·世故를 가리킨 것으로 사료된다. 뿐만 아니라 주자가 말한 "人心之靈, 莫不有知(사람의 마음의 신령함은 앎이 있지 않음이 없다)"의 '人心'과 "吾心之全體大用(내 마음의 전체·대용)"의 '吾心'이란 인식론의 각도에서 詮釋한 '心'으로, 이 마음은 一身의 主宰이며, 이 主體는 神明不測의 작용을 갖추고 있다. 다시 말하면, "虛靈이 곧 마음의 本體"로서,19) 靈이란 神明不測·知覺·思惟를 말한다. 이로써 마음이란 뭇 이치를 갖추고서 思惟를 할 수 있고 모든 일에 응할 수 있다.
때문에 ≪大學補傳≫에서 말하는 '天下之物'의 '物'과 '人心之靈'의 '心'이
란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이해하는 것은 주자의 격물치지론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人心之靈, 莫不有知'란 인식능력으로서의 '마음의 작용[心之用]'과 마음에 고유한 '앎[知]'·'마음의 본체[心之體]'라는 두 측면을 가리키며, '天下之物, 莫不有理'란 주체와 상대되는 객체에도 모두 天理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의 본체란 천리의 體現이다. 주자는 "마음의 전체는 湛然하게 비어 있고 밝으며 일만 이치가 모두 갖춰져 있다[心之全體, 湛然虛明, 萬理具足]", "마음에는 뭇 이치를 갖추고 있다[心具衆理]"라고 하였다. 이는 마음에 천리가 갖춰져 있고 사물에도 천리가 갖춰져 있기에 "천하의
19) ≪語類≫ 5권.
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여야"만이 "나의 앎을 다할 수 있다"라는 것으로, 내 마음의 천리로서 바깥 사물의 천리를 印證하여, "뭇 사물의 表裡精粗가 이르러 오게 되면 내 마음의 全體와 大用이 밝혀지게 된다." 이렇듯"사물에 나아가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격물치지의 수단이며, "나의 앎을 다하는 것은" 격물치지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주자의 인식론은 객관유심 주의의 철학을 기조로 발전된 인식론임을 알 수 있다.20)
이 장은 성의에 대한 해석으로, ≪대학≫에 있어 중요한 관건이 되기에 ≪격물치지장≫ 뒤에 별도로 이 장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제1절 ≪誠意節≫의 성의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는 경계로서,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하여 실행으로 옮기는 愼獨에 귀결되며, 제2절 ≪小人節≫은 신독을 하지 못한 데에서 생겨나는 폐단을 말하며, 제3절 ≪曾子節≫은 신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요성을 밝혔고, 끝의 ≪富潤節≫에서는 신독의 공효를 제시하여, 마땅히 지극하게 성의를 다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끝맺고 있다.
無自欺 구절에서 好色까지의 4구절은 성의의 공부란 반드시 이와 같이 하여야 한다는 뜻이며, 끝 구절 愼獨에서는 성의의 공부가 바로 여기에 있음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성의란 오직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毋自欺]는 구절로서 그 뜻을 다할 수 있으며, 如惡 이하 2구절은 毋自欺의 뜻을 거듭
20) ≪宋明理學史≫ 上, 398~402쪽.
설명한 것이고, 스스로의 만족[自慊]이란 본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으로써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실행해야 할 공부로 말한 것이지, 이미 이뤄진 공효로 말한 것은 아니다. 此之謂 세 글자를 음미해 보면, 윗글에 이어서, 혼자서 거처할 때, 사람과 접촉할 때, 처음 생각이 일어날 때, 정작 일에 응할 때, 그 어느 때든지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제 마음을 말한다. 홀로[獨]라는 것과 기미[幾]라는 것은 차이점이 있다. 기미란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을 말하니 선악이 처음 나누어지는 분기점을 말하며, 홀로 란 곧 처음 일어나는 생각을 밝게 알아 혼미하게 하지 않음을 말한다. 때문에 이를 삼간다[愼]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로 보면 삼가함은 곧 毋 자의 실질적인 공부를 말한다.
所謂誠其意者는 毋自欺也니 如惡惡臭하며 如好好色이 此之謂自謙이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이른바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지 아니함이니, 악을 미워하되 역겨운 냄새를 싫어하듯이 하며, 선을 좋아하되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듯이 해야 한다. 이를 일러 스스로의 만족이라 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제 마음을 삼가는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군자가 격물치지를 극진히 다한 뒤에는 선이란 반드시 행하여야 하고 악이란 반드시 미워해야 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그처럼 힘쓰지 않는 것을 곧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 한다.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밝은 본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악을 미워하되 역겨운 악취를 싫어하듯이 거짓 없는 진실한 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결단코 악을 버려야 할 것이며, 선을 좋아하되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성심껏 추구하여 반드시 선을 얻으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진실하게 노력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뿌듯한 마음 때문이기에, 이를 스스로의 만족이라 말한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참된 마음으로 그 스스로가 만족스러움을 느껴 조금이라도 유감되는 바가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속이느냐 않느냐는 문제는 타인으로선 알 수 없는, 자신만이 혼자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제 마음을 삼가 성의 여부의 기미를 살피는 것이다.
誠其意者는 自修之首也라 毋者는 禁止之辭요 自欺云者는 知爲善以去惡이나 而心之所發에 有未實也라 謙은 快也며 足也요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라 言欲自修者 知爲善以去其惡이면 則當實用其力而禁止其自欺하야 使其惡惡則如惡惡臭하고 好善則如好好色하야 皆務決去而求必得之하야 以自快足於己요 不可徒苟且以徇外而爲人也라 然 其實與不實은 盖有他人所不及知요 而己獨知之者라 故必謹之於此하야 以審其幾焉이라
그 생각을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의 몸을 닦는 첫 공부이다. 毋는 금지한다는 말이다. 스스로를 속임이란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할 줄 알면서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이 진실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謙(慊) 은 쾌함이요, 족함이다. 獨은 남들이 알지 못한 바로서 자신만이 홀로 알 수 있는 곳(즉 마음)을 말한다. 스스로 몸을 닦고자 한 자는 선을 행하고 악을 버려야 할 줄을 알았으면 마땅히 진실한 마음으로 노력하여 그 스스로 속이는 일을 금하여, 악을 증오하되 악취를 싫어하듯이 하고, 선을 좋아하되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듯이 하여, 악은 결단코 버리고 선이란 반드시 추구하여 얻고자 하되, 스스로 자신에 만족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지,
한낱 바깥을 따른다거나 사람들의 명예·시비 따위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처럼 진실하게 하느냐 못하느냐는 남들로서는 미처 알 수 없는 것이며, 자신만이 홀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그 마음을 삼가 이로써 그 마음의 기미를 살펴보아야 한다.
≪誠意章≫에서 맨 먼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毋自欺]"라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뜻을 진실하게 한다는 것은 致知 이후의 공부로서 스스로 몸을 닦는 첫 공부[自修之首]이기에 이는 知·行의 교차점이라 할 수 있다. 안다는 것은 반드시 실천을 전제로 하므로, 알고서도 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스스로를 속임이다. 때문에 이를 쓴 자가 특별히 知行合一의 의의를 밝혀 毋自欺를 말한 것이다. 이는 실로 정심과 수신을 모두 포괄하여 말한 것이지만, 그 요지는 성의에 있으므로 이를 맨 먼저 말한 것이다.21) 스스로를 속인다[自欺]는 것은, 안 듯 모른 듯 어정쩡한 사람이 선이란 실행하여야 하는 것인 줄을 알면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여 실행하지 않고, 악이란 행해서는 안 되는 줄을 알면서도 악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만일 전혀 모르는 일이라면 이를 모른다고 말할 뿐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말할 수 없다. 毋自欺는 誠意이며, 自慊은 意誠이다.22)
이는 스스로 속이는 자를 들어 특별히 경계한 글이다. 불선을 자행한다는 것은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지 못함을 말한다. ≪집주≫에서 말한 消沮란 양심에 가책을 느끼게 되면 참신한 정신과 浩然之氣가 사라져 스스로 위축되어짐을 말하며, 閉藏이란 곧 아래 글에서 언급한 "악을 감추고
21) ≪秋淵文集·大學問目≫.
22) ≪大全≫, 朱子.
선을 나타내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如見 구절은 굳이 군자만이 그처럼 본다는 것이 아니다. 이른바 "천하를 탐내는 司馬昭의 검은 마음은 길 가는 사람까지도 모두 다 꿰뚫어보고 있다"라는 말과 같은 예이다. 마음속에 그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이치이므로 선이든 악이든 마음의 이면에 있으면 모두 그처럼 바깥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말한다. 위 ≪성의절≫의 신독은 아래 문장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의 신독은 보다 더 깊은 경계와 반성을 痛責하는 말이다.
小人이 閒居에 爲不善하되 無所不至하다가 見君子而后에 厭(암)然揜其不善하고 而著其善하나니 人之視己 如見其肺肝然이니 則何益矣리오 此謂 誠於中이면 形於外니 故로 君子는 必愼其獨也니라
소인이 한가로이 혼자 있을 때에는 착하지 못한 일을 서슴없이 하여 못할 짓이 없다가, 군자를 보면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채, 그 선하지 못한 일을 감추고 선한 것만을 드러내려 하지만, 남들이 자기를 보는 것은 마치 폐와 간을 들여다보듯 하니,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것을 일러 "중심에 실제로 그런 것이 있으면 바깥으로 나타나게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제 마음을 삼가는 것이다.
소인이란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지 못하여 스스로를 속이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가로이 거주하며 혼자 있는 곳에선 남들이 보지 않는다 생각한 나머지, 선하지 못한 일들을 방자히 행하여 못할 짓이 없다. 이는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일 치곤 너무 지나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진실한 뜻을 가진 군자를 만나면 이런 일이 전혀 없었다는 듯, 그가 자행했던 불선한 행위를 모두 숨기고서 겸연쩍게 거짓 선한 척 꾸미려고 들지만, 군자는 마치 폐와 간을 꿰뚫어보기나 하듯이 이미 모두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것이다.
악이란 가릴 수 없고 속일 수도 없다. 그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옛말에 그처럼 악한 마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와 같은 악이 바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라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 스스로가 제 자신을 속이지 않도록 거듭 경계의 말을 하게 된 것이다.
閒居는 獨處也라 厭然은 消沮閉藏之貌라 此言小人陰爲不善이라가 而陽欲揜之는 則是非不知善之當爲와 與惡之當去也로되 但不能實用其力以至此耳라 然 欲揜其惡而卒不可揜하고 欲詐爲善而卒不可詐니 則亦何益之有哉리오 此君子所以重以爲戒而必謹其獨也라
閒居는 홀로 거처함, 厭然은 위축되고 감추는 모양이다. 소인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불선한 일을 하다가도 겉으로 이를 감추려고 하는 것은 곧 선은 마땅히 행해야 하고 악은 마땅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니다. 다만 실제로 그 힘을 쓰지 않은 까닭에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 악을 가리려고 하지만 결국 가릴 수 없었고, 선한 척 속이려 하지만 마침내 속일 수 없었는 바, 이 또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이 때문에 군자는 거듭 이를 경계하여 반드시 혼자만이 아는 제 마음을 삼가는 것이다.
閒居 註의 獨處의 獨 자는 위의 愼獨에 대한 주석인 獨知의 獨 자와는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獨知의 獨은 혼자만이 아는 내면의 심리(마음)를 말한 것이지만 獨處란 혼자서 거처하는 一身(몸)의 환경을 말한다.23) ≪格致章≫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구분하지 않다가 이 장에서 엄격히 분별하는 것은, 誠意란 善惡關이므로 이 관문을 통과하였을 때 비로소 군자가
23) 같은 책, 新安陳氏.
될 수 있으며, 이를 통과하지 못하면 소인이기 때문이다.24)
위의 문장에서는 신독을 두 차례 말하였는데, 이 절에서는 곧바로 德 자를 제시한 데 그치지 않고, 또한 曾子曰 세 자에 본장 전체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열 개의 눈[十目], 열 개의 손[十手]이란 보는 사람, 가리키는 사람이 많음을 말한다. 마음의 한 생각에 따라 선악으로 나누어지고, 선악이 나타남에 따라 남들이 손으로 가리킬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글자는 所(所視 所指) 자에 있다. 한 생각이 우연히 움직이는 그것이 곧 그것[所]이다. 其嚴乎 세 글자를 들어 지극히 위험스럽고 두렵다는 뜻을 강조한 것은 선과 악, 이 두 사이를 오가는 중립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선이 아니면 그것은 곧 악이므로, 두렵기 짝이 없다. 이는 군자와 소인을 모두 총괄하여 말하고 있다.
曾子曰 十目所視며 十手所指니 其嚴乎인저
曾子(공자의 제자, 이름은 參)가 말하였다. "열 개의 눈이 바라보는 바이며, 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바이니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러나 소인이 혼자 있을 때 가벼이 행동하는 것은 혼자 있을 때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질 줄 모르기 때문이다. 증자는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혼자 있는 곳이란 그윽하여 보이지 않으므로 남들이 알지 못한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선악이란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바깥으로 나타나
24) 같은 책, 雲峰胡氏.
기 마련이다. 남들이 보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 열 개의 눈이 모두 너를 바라보고 있다. 남들이 손가락질을 하지 않는다 말하지 말라. 열 개의 손가락이 너를 가리키고 있다. 남들이 보지 않는, 혼자 있는 곳에서도 감출 수 없음은 이와 같다. 매우 두렵고 무서운 일이 아니겠는가.
引此 以明上文之意라 言雖幽獨之中이라도 而其善惡之不可揜이 如此하니 可畏之甚也라
이를 인용하여 위 글의 뜻을 밝힌 것이다. 비록 보이지 않는, 홀로 있는가운데에서도 그 선악을 감출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이는 ≪중용≫의 "莫見乎隱, 莫顯乎微" 구절의 뜻과 상통하는 점이 없지 않다. 위 글의 獨 자는 곧 隱과 微이며, 十目, 十手는 곧 莫見 莫顯이다.25)
이는 愼獨의 공효를 말하고 있다. 富潤屋이란 비유사가 아니다. 이 문장을 빌어 아래의 德潤身 구절을 일으킨 것으로 보아 興體에 속한 문법이다. 潤身의 潤과 以著其善의 著는 상반된 뜻으로, 내실이 없이 밖으로 드러내보이려고 하는 것은 著, 내면에 간직된 실상이 축축이 젖어 바깥으로 베어나오는 것은 潤이다. 덕은 명덕을 말하니, 潤身 또한 虛說이며, 體胖 구절이 潤身의 뜻에 상당하는데, 먼저 心廣을 말한 것은 몸이란 마음에 근본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心廣體胖이라 말할 수 있지만 心正身修라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는 心正身修의 견지에 해당되며, 이 절은 모두 이러한 뜻으로 쓰여 있다. 때문에 結語에서 故君子 1구절만을 가리켜 말한 것은 아니다.
25) 앞과 같음.
富潤屋이오 德潤身이라 心廣體胖하나니 故로 君子는 必誠其意니라
부는 집을 윤택하게 하고 덕은 몸을 빛나게 한다. 마음이 넓고 몸이 편안하므로 군자는 반드시 그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위 글을 종합해 보면 성의 공부는 신독에 있다. 혼자 있을 때 삼갈 줄 알면 그에 따른 효험이 없을 수 있겠는가. 재물을 모아 부를 향유한 자는 그 씀씀이가 넉넉하므로 저절로 집안이 윤택해지기 마련이다. 하물며 성의로 덕을 쌓으면 이면의 마음에 근본하여 겉으로 덕이 나타나게 마련이니, 몸이 윤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의 주재는 마음이요, 마음을 바깥으로운용하는 것은 몸이다. 때문에 뜻이 진실하고 덕이 있으면 마음에 부끄러운 바 없으므로 마음이 스스로 고매하고 온몸으로 너그럽게 나타나게 되어, 사물에 얽매인다거나 마음에 급박함이 없으므로 몸에 태연자약한 여유가 생기게 된다. 덕이 있으면 몸이 윤택하게 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속이는 것을 경계하고 스스로의 만족을 추구하여 혼자 있을 때 삼가고 그 뜻을 진실하게 하는 것이다. ≪대학≫에 뜻을 둔 사람은 성의를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胖은 安舒也라 言富則能潤屋矣요 德則能潤身矣라 故心無愧怍이면 則廣大寬平하야 而體常舒泰하니 德之潤身者然也라 盖善之實於中而形於外者 如此라 故又言此以結之니라
胖은 구김살 없이 편안함이다. 부를 누리면 집이 윤택하게 되고 덕이 있으면 몸이 윤택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으면 마음이 넓고 크며 너그럽고 평화로워서 몸에 항상 구김살 없이 편안하니, 덕이 몸을 윤택하게 함이 이와 같다. 선이 실제로 중심에 있으면 밖으로 나타남이 이와 같으므로 또 다시 이를 말하여 끝맺고 있다.
이는 맹자가 말한 浩然之氣와 일치되는 점이 있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毋自欺]는 것은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정직한 것이며[自反而縮], 스스로를 속임[自欺]은 스스로를 돌이켜볼 때 정직하지 못함이며[自反而不縮], 厭
然은 氣餒이며, 心廣體胖은 곧 浩然之氣이다.26)
* * *
右는 傳之六章이니 釋誠意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여섯째 장이니, 뜻을 진실하게 한다는 데에 대한 해석이다.
經에 曰 欲誠其意댄 先致其知라 하고 又曰 知至而后에 意誠이라 하니 盖心體之明이 有所未盡이면 則其所發이 必有不能實用其力而苟焉以自欺者라 然 或已明而不謹乎此면 則其所明이 又非己有而無以爲進德之基라 故此章之指는 必承上章而通考之然後에 有以見其用力之始終이니 其序不可亂이요 而功不可闕이 如此云이라
경문에 이르기를 "그 뜻을 진실하게 하려면 먼저 그 앎을 다하여야 한다" 하고, "앎이 지극한 뒤에 뜻이 진실하다" 하니, 이는 마음에 본체의 밝음을 다하지 못한 바 있으면 그 마음에서 일어나는 바, 반드시 그 힘을 진실하게 쓰지 못하여 구차스럽게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 그러나 혹 이미 밝게 알았다 할지라도 이를 삼가지 않으면 밝혔던 바 또한 나의 소유가 아니므로 덕으로 나아가는 터전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장의 뜻은 반드시 윗장에 이어서 모두 종합적으로 고찰한 뒤에야 비로소 그 힘써야 할 처음
26) 앞과 같음.
과 마침을 볼 수 있으니, 그 차례를 어지럽힐 수 없고, 공부를 빠뜨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이 장에서는 정심 수신의 의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첫 ≪修身節≫에서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게 되는 원인을 말하였고, 다음 ≪心不節≫에서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그 병폐는 내면의 마음이 바르지 못한 데에 그치지 않고 몸 또한 닦여질 수 없음을 말했으며, 끝 ≪此謂節≫에서는 正言으로 끝맺고 있다. ≪장구≫에서는 察 자와 敬 자를 통하여 正心의 공부를 보완해주고 있다.
경문에서 말한 정심이란 원래 體用을 겸해 말하였는데 전문에서는 用의 측면에서 이를 해석하고 있다. 忿懥 등 네 가지 감정은 반드시 無心한 곳에서 나와야만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마음의 누는 모두 여러 개의 有(有所……) 자 이하에 관련이 있다. 不得其正은 마음의 작용[用]에 관계되지만, 작용이 부정하면 본체[體] 또한 부정하게 되므로, 작용이 아닌 본체의 측면에서 이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아래 문장에서는 이를 이어서 心不在焉을 말하게 된 것이다. 恐懼란 막상 그 어떤 일에 당면하여 안절부절, 겁에 질려서 공포에 떠는 현재의 견지에서 말함이며, 근심·걱정·시름 따위의 憂患이란 그 일이 이르기 이전에 지레 불안해하는 심리상태 를 말한다. 이는 내면의 마음을 논한 것이지, 외부의 形迹을 말한 것이 아니므로, 수신의 측면과 관련지어 볼 수 없다.
所謂修身이 在正其心者는 身(心)有所忿懥則不得其正하고 有所恐懼則不得其正하고 有所好樂則不得其正하고 有所憂患則不得其正이니라
이른바 몸을 닦음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한 데 있다 함은, 마음에 분하고 노여워하는 바 있으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겁에 질리거나 두려워하는 바 있으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 있으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근심하는 바 있으면 그 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경문에서 말한 몸을 닦음이 마음을 바르게 한 데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마음이란 몸의 주재이며, 그 본체는 본래 비어 있고 신령한 것이므로 그 어떤 사물에도 집착되는 바 없다. 만일 성내고 노여워하는 바에 치우쳐 이치를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곧 성내고 노여워하는 바에 얽매여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두려움에 치우쳐 이치를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곧 두려움에 얽매여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좋아하고 즐기는 바에 치우쳐 이치를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곧 좋아하고 즐기는 바에 얽매여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며, 근심에 치우쳐 이치를 살피지 못하면 마음은 곧 근심에 얽매여 올바른 마음을 얻지 못하게 된다. 마음 씀씀이가 올바름을 잃으면 마음의 본체 또한 어찌 올바르다 할 수 있겠는가.
程子曰 身有之身은 當作心하다 忿懥는 怒也라 盖是四者는 皆心之用而人所不能無者라 然一有之而不能察이면 則欲動情勝하야 而其用之所行이 或不能不失其正矣라
程子가 말하였다. "身有의 身은 마땅히 心 자로 바꿔 써야 한다." 忿懥는 노여워함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마음의 작용으로서 사람들에게 없을 수 없다. 그러나 한번 이를 두고서 살피지 못하면 욕심이 동하고 정이
치우쳐 그 작용의 감정이 행하는 바에 간혹 그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有所……란 그 네 가지의 감정이 내면 심리의 主가 됨으로써 마음이 도리어 그 감정에 의해 동요당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네 가지의 감정을 없애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러한 감정으로써 마음을 동요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음이란 어떤 사물에 얽매이면 곧 동요를 일으키기 마련인데, 사물에 얽매이게 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 어떤 사물이 닥치기에 앞서 먼저 기대하는 未來心이 있다거나,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여 마음속 깊이 간직한 채 잊지 못하는 過去心이 있다거나, 또한 그 어떤 일에 당면하였을 때 그 일에 고착되어 偏重해 버리는 現在心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느 한 일을 겪자마자 또 다른 일이 닥쳐옴으로 해서 이리저리 정신없이 대응하다 보면 자연히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올바른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성인의 마음은 비어 있고 밝으므로, 크고 작은 사물과 사방팔면에 자유로이 그 사물에 따라서 응하는 것이다. 이는 성인의 마음속에는 원래부터 그 어떠한 사물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27) 그러나 우리의 현실 생활을 살펴보면 온갖 사사로운 생각과 욕망으로 들끓고 있어, 이를 억제하여도 자주 일어나 이러한 생각들을 없애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에 별다른 공부가 없다. 다만 마음에 일정한 주재를 굳건히 세워, 글을 읽을 때에는 이치를 탐구하는 데 전심전력하고, 일에 부딪쳐서는 실천하는 데 힘쓰며, 할일 없을 때에는 고요한 가운데 수양을 쌓아 진실한 마음을 가지면 私念과 私慾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되고,
27) ≪大全≫, 朱子.
설령 사념과 사욕이 일어날지라도 반드시 이를 살펴서 곧 잘못을 깨닫게 되고, 살펴서 깨달으면 사념과 사욕이 스스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만일이와 같은 근본적인 수양과 성찰 없이 마음을 방종하여 소홀히 한 채, 사념· 사욕과 싸우려 들면 많은 힘을 들인다 할지라도 마치 돋아나는 풀에 흙을 덮는 것과 같아서 덮으면 덮을수록 풀은 더욱 돋아나오게 된다.28) 때문에 마음을 비우지 못하여 마음에 동요가 일어날 때에는 모름지기 그 의지를 굳게 가져야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곧 위에서 말한 敬의 공부이다.
이 절은 다만 몸과 마음이 서로 관련지어져 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다. 心不在 구절은 위 ≪修身節≫을 이어서 말한 것이며, 在는 곧 程伊川의 心在腔子裏(마음은 몸 속에 있어야 한다)의 在 자의 뜻과 같다. "……이 있지 않으면[……不在]"이라는 말은 마음이라는 주인이 虛靈한 神明의 집안에 있지 않음으로써 작용을 잃게 되고 본체 또한 잃었다는 뜻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視而不見]" 이하의 세 구절은 외재 현상을 들어, 내면 심리의 정밀한 부분을 나타내주고 있다.
心不在焉이면 視而不見하며 聽而不聞하며 食而不知其味니라
마음이 있지 않으면 보여도 보지 못하며, 들려도 듣지 못하며, 먹으면서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몸은 분명 이곳에 있는데도 마음은 다른 곳으로
28) ≪栗谷全書≫ 下冊, ≪語錄≫ 下, 260쪽 上段
치닫기 마련이다. 만일 마음이 바깥으로 치달아 까마득히 잃어버리면 스스로 몸을 살필 수 없으므로, 눈에 보이는데도 그 빛을 볼 수 없으며, 귀에 들리는데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음식을 먹으면서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소리·빛·냄새·미각 따위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기에 누구나 쉽게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곳에 마음이 없으면 설령이처럼 또렷이 나타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일지라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정밀한 의리야 어떠하겠는가.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이처럼 몸을 닦을 수 없는 법이다.
心有不存이면 則無以檢其身이라 是以 君子必察乎此하야 而敬以直之然後에 此心常存 而身無不修也라
마음이 보존되어 있지 않으면 그 몸을 살필 수 없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이 마음을 살펴 敬으로 바르게 한 뒤에야 이 마음이 항상 보존되어서 몸이 닦여지지 않음이 없다.
心不在焉의 註에 ……必察乎此라 하였는데, 退溪는 "此 자는 不在의 病處
를 가리키는 것이다"라고 말한 데 반해서, 栗谷은 "此 자는 마음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29) 본 국역에서는 栗谷說을 따라 此 자를 마음으로 해석하였다.
위의 두 절(≪修身節≫·≪心不節≫)은 모두 反說法으로 말한 까닭에 여기에서는 正結法을 쓰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在正其心의 正 자는 공부하는
29) 같은 책, 32권, ≪語錄≫ 下, 263쪽 下段
곳을 가리킨 것으로, 앞 ≪心不節≫의 ≪장구집주≫에 "반드시 이 마음을 살펴 경으로 바르게 한다[必察乎此 而敬以直之]"라는 察 자와 敬 자를 응용하여 힘껏 노력해야 할 것이다.
此謂修身이 在正其心이니라
이것을 일러 몸을 닦는 것이 그 마음을 바르게 한 데 있다고 말한 것이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몸을 닦을 수 없다는 점에서, 몸을 닦음은 반드시 마음이 바른 데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다. 경문에서 말한 "몸을 닦고자 하면 먼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라"라는 구절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말이다.
* * *
右는 傳之七章이니 釋正心修身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일곱째 장이니,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데 대한 해석이다.
此亦承上章以起下章이라 盖意誠 則眞無惡而實有善矣니 所以能存是心以檢其身이라 然或但知誠意而不能密察此心之存否면 則又無以直內而修身也라 自此以下는 並以舊文으로 爲正이라
이 또한 앞장에 이어서 다음 장의 뜻을 일으키고 있다. 뜻이 진실하면 참으로 악이 없고 실제로 선이 있게 된다. 이로써 이 마음을 보존하여 그 몸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성의만을 알고 이 마음이 보존되어 있느냐 없느냐를 정밀하게 살피지 못하면 또한 내면을 바르게 하여 몸을 닦아 나갈 수 없다. 이 아래로부터는 모두 옛 책대로 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한다.
이 장은 수신제가에 대한 해석이다. 첫 ≪齊其節≫은 몸을 닦지 못하게 되는 원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였고, 그 다음 ≪故諺節≫에서는 몸이 닦여 있지 않음으로써 집안이 잘 다스려질 수 없음을 이 문장의 밖에서 밝혀주고 있으며, 끝 ≪此謂節≫에서는 反說法으로 끝맺고 있다. 주자는 이에 대해 앞의 ≪釋正章≫처럼 그 같은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은 내면 심리에 존재하는 인욕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한 데 있음을 말하였다.
이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치우친 인정에 대해 말하고 있다. 親愛 따위의 다섯 가지는 자신으로부터 집안에 베풀어 나가는 것이다. 친애란 부자· 형제 등 골육의 친척에게, 賤惡는 불초한 자에게, 畏敬은 덕망이 있는 자에게, 哀矜이란 제자리를 얻지 못한 자에게, 敖惰는 지위가 낮고 용렬한 자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며, 辟焉의 辟 자는 마음이 혼미한 데에서 범하는 무지를 말하고 있다. 끝 부분 세 구절은 위 글의 뜻을 모두 거두어 詠歎한 것이며, ……知其惡, ……知其美의 知 자는 察 자의 뜻으로 바꿔보아야 하지만 앎[知]의 본질을 말한 致知의 知 자와는 다르다. ≪誠意章≫의 好惡는 제 자신의 진실한 마음을 다하고자 함이요, 이 장의 好惡는 공정하게 사람을 대하고자 하는 것으로, 自心과 待人이라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所謂齊其家 在修其身者는 人이 之其所親愛而辟焉하며 之其所賤惡而辟焉하며 之其所畏敬而辟焉하며 之其所哀矜而辟焉하며 之其所敖惰而辟焉하나니 故로 好而知其惡하며 惡而知其美者 天下에 鮮矣니라
이른바 그 집을 가다듬는 것이 그 몸을 닦는 데 있다고 말한 것은, 사람들이 그 친하고 사랑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그 천하게 여기고 미워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그 두렵고 공경하는 데에서 편벽되며, 그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는 데에서 편벽되며, 그 오만하고 게으른 데에서 편벽된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의 잘못을 살필 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찾아보기 어렵다.
경문에서 말하는 "집을 가다듬는 것이 몸을 닦는 데 있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일까? 나와 타인의 접촉에서 그에게로 향하는 인간의 정에는 제각기 당연한 법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간혹 어느 한곳에 치우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예컨대 골육 사이에 사랑하는 마음은 때로는 의리로써 이를 제재하지 못하여 姑息, 安逸에 치우치게 되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천시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때로는 너그러움과 후함이 없는 각박 잔인함에 치우치게 되고, 높으신 어른이야 畏敬하여야 할 대상이지만 때로는 지나치게 굽실대거나 억눌리는 데 치우치게 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은 가엾이 여겨야 할 대상이지만 때로는 안일에 빠지는 데 치우치게 되고, 사랑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대의 사람에게는 본인이 직접하지 않고 타인에게 그를 대접하도록 하여 예의를 생략하기도 하니, 이것을 일러 敖惰라 하는데 때로는 교만과 방종하는 데에 치우치게 된다. 사랑과 존경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은 그들을 좋아하는 데에 속하는 것이지만 어찌 그들에게 전혀 잘못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있겠는가. 미워함과 게으름은 그들을 미워하는 데에 속하는 마음이지만 어찌 그들에게 전혀 아름다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하나같이 그처럼 치우침 때문이다. 그러므로 좋아하면서도 그들의 잘못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들의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마음이 바른 사람으로서도 쉽사리 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세상에서 이 같은 사람을 찾아보고자 해도 좀처럼 찾기 힘들다.
人은 謂衆人이요 之는 猶於也요 辟은 猶偏也라 五者는 在人本有當然之則이라 然常人之情은 惟其所向 而不加察焉이면 則必陷於一偏 而身不修矣리라
人은 뭇 사람을 뜻하며, 之는 於 자와 같다. 辟은 偏 자의 뜻과 같다. 이 다섯 가지는 사람에게 있어서 본래 소유하고 있는 당연한 법칙이다. 그러나 보통사람의 정은 오직 그 향하는 바에 따라서 더더욱 살피지 못하기에 반드시 한쪽에 빠져 몸을 닦을 수 없게 된다.
앞장의 忿懥 등은 나의 마음과 사물이 접촉한 때의 일이며, 이 장의 친애 등은 나의 몸과 사물이 접촉할 때의 일을 말한다.30)
이는 앞의 ≪齊其節≫과 밀접한 관련을 지어 말하면서 속담을 인용하여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치우친 마음을 밝혔는데, 이 또한 몸을 닦지 못한 데 대한 말이니, ≪장구집주≫의 偏之……所以不齊也의 所以 두 글자를 자세히 음미해야 한다. 그리고 두 곳의 "……을 알지 못한다[莫知: 莫知其子……, 莫知其苗……]"라는 것은 참으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고 가려 있음을 밝힌 것이다. 갓 돋아난 새싹을 苗라 하고, 碩이란 새싹이 무성하게 잘 자란 것 또는 잘 가꿔진 농사를 뜻한다.
故로 諺에 有之하니 曰 人이 莫知其子之惡하며 莫知其苗之碩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이 제 아들의 잘못을 알지 못하
30) ≪大全≫, 朱子.
고, 제 밭의 농사가 잘된 줄을 알지 못한다."
이 때문에 속담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사람의 정은 사랑에 빠지면 눈이 멀어 밝음을 잃기에 제 자식의 잘못을 알지 못하고, 탐욕스러운 마음은 모든 것을 다 얻고자 하여 만족한 바 없기에 잘 가꿔진 제 농사를 알지 못하게 된다. 이 속담의 내용은 보통사람들이란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쉽게 치우침을 말한다.
諺은 俗語也라 溺愛者 不明이요 貪得者 無厭이라 是則偏之爲害而家之所以不齊也라
諺은 속담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밝지 못하고, 얻기를 탐하는 자는 싫어함이 없다. 이는 편벽의 해로서, 집안이 가다듬어지지 못하게 되는 이유이다.
나의 마음과 사물이 접촉할 때에는 성깔을 부리는 激情이 가장 쉽게 발산되어 억제하기 어려운 까닭에 앞 장에서는 맨 먼저 忿懥를 말하였고, 나의 몸과 사물이 접촉할 때에는 사랑에 치우치기 가장 쉬운 까닭에 이 장에서 맨 먼저 親愛를 쓰게 된 것이다. 이 속담을 인용하면서 치우친 사랑만을 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의 여러 가지 감정 가운데 가장 쉽게 치우치는 감정이 사랑이라 함은 다 아는 사실이다. 더더욱 閨門 內에서는 엄격한 의리로 집안을 다스리지 못하고, 항상 사랑이 편중되어 골육의 깊은 정을 이겨 나가기 어려운 까닭에 이로써 몸을 닦기 어렵고 한 집안이가다듬어지지 못하게 된다. 이의 깊은 병폐는 모두 여기에 있다.31)
31) 같은 책, 雲峰胡氏.
"몸을 닦지 않으면 그 집안을 가다듬지 못한다[身不修, 不可以齊其家]"라는 뜻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이에 특별히 이 구절을 통하여 본장 전체의 뜻을 거듭 밝히면서 끝을 맺고 있다. 不可 2자는 제가에 속한 것으로 일신에 초점을 맞춰 말한 것이다.
此謂身不修면 不可以齊其家니라
이것을 일러, 몸을 닦지 않으면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하지 못한다고 말한 것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인간의 편벽된 마음과 속담을 살펴보면, 제가에 앞서 그의 몸마저 제대로 닦여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편벽된 마음으로 어느 한 곳에 치우쳐 미루어 나가면 반드시 그는 그에 알맞은 제 분수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한 집안을 가다듬을 수 있겠는가. 경문에서 말한, "집안을 가다듬고자 한다면 먼저 몸을 닦으라" 함은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정심수신에 앞서 성의가 절대적임을 다시 밝히기로 한다. 몸의 주재는 마음이지만, 마음은 생각[意]에 의해서 선악으로 나누어지는 기틀[機]이 있다. 이 때문에 親愛 따위의 정에 얽매여 편벽하게 된 것은 그 마음이 부정함 때문이며, 마음이 忿懥 등의 감정으로 바른 마음을 잃게 되는 것은 그 뜻이 진실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친애하는 사랑과 노여운 감정에 의해 편벽되어 바르지 못한 것은 곧 성의를 다하지 못함에 따라서 마음을 바르게 가지지 못함 때문이다. 참으로 성의를 다하면 분치 등의 감정이 일어날 때 반드시 그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
감히 바른 마음을 잃지 않을 것이며, 친애 따위의 정에 있어서도 반드시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 감히 편벽된 곳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성의가 정심수신의 요체임을 알 수 있다.32)
* * *
右는 傳之八章이니 釋修身齊家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여덟째 장이니, 몸을 닦고 집을 가지런히 한다는 데 대한 해석이다.
이 장은 제가·치국의 의의를 해석한 것으로, "국가의 교육은 가정교육에서 벗어나지 않는다[不出家而成敎於國]"라는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첫 ≪治國節≫에서는 국가의 교육이 집안의 효도 등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국가교육의 근원을 말함으로써 국가교육이 가정교육에서 벗어나지 않음을 밝혔으며, 仁·讓의 기풍을 언급한 아래 두 절은 국가교육은 가정교육에서 이루어진다는 실상을 말하여, 한 집안에서 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국가교육이 형성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혔으며, ≪故治節≫은 윗글의 뜻을 모두 끝맺고 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아래에서는 ≪시경≫을 세 차례 인용하여 읊으면서 끝을 맺었는데, 이는 가정을 버려두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을 말하고, 나아가 孝·悌·慈와 仁·讓과 率이란 가정과 국가교육의 기틀이 제 자신에게서 결정지어짐을 말하는데, 이에 한 걸
32) 같은 책, 雙峰饒氏.
음 더 나아가 誠(心誠求之)이니, 好(反其所好)니, 恕(所藏……不恕)니 하는 글자
들은 교육의 기틀이 마음에 있다는 점을 말하였다.
수신 이상은 모두 스스로 닦아야 할 제 자신의 학문에 관한 일이며, 그 아래 조목은 모두 타인을 가르치는 데 해당된다. 이는 "국가의 교육은 반드시 집안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주로 하여, 아래 문장에서는 모두 이 뜻을 거듭 밝히고 있다. 대체로 집안을 말한 곳은 모두 수신에 근본하며, 孝者 이하 세 구절은 가정과 국가란 일맥상통하는 이치가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所謂治國이 必先齊其家者는 其家를 不可敎요 而能敎人者 無之하니 故로 君子는 不出家而成敎於國하나니 孝者는 所以事君也요 弟者는 所以事長也요 慈者는 所以使衆也니라
이른바 나라를 다스림에 앞서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것은, 제 집안의 사람을 가르치지 못하고서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란 가정교육에서 벗어나지 않고 국가의 교육을 이루는 것이니, 효도는 임금을 섬기는 것이며, 공손함은 어른을 섬기는 것이며, 사랑함은 뭇 백성을 부리는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집안을 가지런히 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까? 몸을 닦으면 집안을 가르칠 수 있고, 집안을 가르친 뒤에야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몸을 닦지 않고서는 한 집안도 가르칠 수 없으니, 나라의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만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은 몸을 닦고 집안을 가르치는 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로 그 가운데에 가르침이 성립되어 국가교육이 스스로 형성되는 것이다. 그처럼 되는 까닭은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가 한 가정의 효도·공손· 사랑과 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어버이가 있는데, 집안에서 어버이를 섬기는 효도란 나라의 임금을 섬기는 도리이며, 집안에는 형님이 있는데, 집안에서 형님을 섬기는 공손함이란 곧 나라의 관리와 어른을 섬기는 도리이며, 집안에는 어린아이가 있는데, 집안에서 어린아이를 보살피는 사랑이란 나라의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이다. 이는 위정자, 즉 군자가 집안에서의 도리인 효도·공손·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고 나라의 가르침을 이루는 것이다.
身修면 則家可敎矣니 孝弟慈는 所以修身而敎於家者也라 然而 國之所以事君事長使衆之道 不外乎此하니 此所以家齊於上 而敎成於下也라
몸이 닦여지면 집안을 가르칠 수 있으니, 효도·공손·사랑은 몸을 닦고집안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에서 임금을 섬기고 어른을 섬기고 뭇 백성을 부리는 도 또한 여기(효도·공손·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집안이 위에서 가다듬어지고 가르침이 아래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바이다.
修身 이상의 일은 모두 자신에 관한 학문임에 반하여, 齊家·治國은 사람을 가르치는 일이기에, 이 장의 첫머리에서 敎라는 한 글자를 더 쓰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교육이 성립될 수 있는 바 또한 일신상에서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孝·悌·慈는 몸을 닦아 집안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도리이다.33)
33) ≪大全≫, 雲峰胡氏.
여기에서는 효도·공손·사랑 가운데 사랑만을 예로 들어 나머지 효도와 공손까지 함께 말해 주고 있다. 갓난아이를 보호[保赤子]하는 것은 모성애의 지극한 사랑이며, 갓난아이를 보호하듯 한다[如保赤子]라는 것은 위정자가 백성을 다스리는 도리를 말하는 것이다. 진실된 마음으로 추구한다[心誠求之]는 것은 갓난아이가 원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를 추구함이며, 멀지 않다[不遠]는 것은 반드시 그 갓난아이의 마음에 적중됨을 나타낸 말이다. 이 문장의 중점은 誠 자에 있다. "……있지 않다[未有]"라는 구절은 진실한 마음으로 내면에서 추구하여 백성을 그와 같이 편안하게 보살펴주어야 함을 말한다.
康誥에 曰 如保赤子라 하니 心誠求之면 雖不中이나 不遠矣니 未有學養子而后에 嫁者也니라
≪강고≫에 이르기를 "갓난아이를 돌보듯 한다" 하니, 진실한 마음으로 갓난아이가 원하는 것을 찾으면, 비록 적중하지 못할지라도 멀리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기 기르는 법을 배운 뒤에 시집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효도·공손·사랑이란 인위적 作爲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갓난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말해보기로 한다. ≪강고≫에 의하면, "임금이 백성을 보살피되 갓난아이를 돌보듯이 한다"라고 하였다. 갓난아이란 원하는 바 있어도 이를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애틋한 모성애에 근본하여 갓난아이가 원하는 바를 더듬어 생각하면, 그 아이가 원하는 욕구에 꼭 맞게 응해줄 수는 없다 할지라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빗나가지는 않는다. 이로 보면 진실된 모성애의 본초적인 사랑을 어떻게 후천적으로 배운 뒤에 습득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에는 시집가기에 앞서 자식 기르는 법을 배우고 출가한 여인을 찾아볼 수 없다. ≪강고≫의 "갓난아이를 보살피듯……"이라는 말은 이처럼 자연스러운 원초적 사랑의 마음에 근본하기 때문이다. 백성을 다스리는 도는 어린이를 사랑하는 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 또한 强作이 아니다. 이로 미뤄 보면 임금을 섬길 수 있는 효도와 어른을 섬길 수 있는 공손 또한 어찌 이와 다르다 하겠는가.
此는 引書而釋之요 又明立敎之本은 不假强爲요 在識其端而推廣之耳라
이는 ≪서경≫을 인용하여 해석하였고, 또한 가르침을 세우는 근본은 强爲(强作)를 요하지 않으며, 그 실마리를 알고서 이를 미루어 넓혀 나아가는 데 있음을 밝힌 것이다.
여기에서는 保赤子와 如保赤子의 관계, 그리고 慈와 孝弟의 본연적 良知· 良能의 동일한 면을 밝히고자 한다. 갓난아이를 보살핀다는 뜻의 '保赤子'는 집안에서의 사랑이며, 갓난아이를 보살피듯이 한다는 뜻의 '如保赤子'는 나라의 백성을 사랑함이다. 갓난아이를 보호하는 것은 사랑의 마음이며, 갓난아이를 보호하듯이 한다는 것은 뭇 백성을 부리는 마음가짐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갓난아이가 원하는 바를 구한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원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다. 위정자 또한 백성들이 스스로 말 못하는 바를 찾아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요구에 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효도와 공손의 마음은 모든 사람이다 같이 가지고 있으나, 이를 잃지 않고 지켜오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갓 태어난 제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 누구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일반적으로 쉽게 알 수 있는 사랑의 한 측면을 들어 말한 것이다. 이는 또한 맹자가 말한 "어린아이가 우물로 빠지
는 모습을 보면 모두가 측은한 마음을 느낀다"라는 것과 같은 뜻이다.34) 이 같은 사랑[慈]의 良知·良能으로 인하여 효도와 공손의 양지·양능 또한 모두 천성에 근본하여 강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실마리의 發見處를 알아 이로부터 미루어 넓혀 나아가는 것이기에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아이가 원하는 바를 추구해 나가면 비록 적중할 수는 없지만 동떨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으로써 효도와 공손 또한 실재로 하나의 이치임을 증험할 수 있다. 이에 특별히 이 사랑의 일단을 들어서 그밖의 것까지 유추하여 그 도리를 다하고자 함이다. 율곡 또한 新安陳氏의 말을 수긍한 바 있기에 이를 수록하여 참고로 삼은 것이다.35)
이 절은 집안이 다스려지면 나라가 스스로 교화됨을 말하고 있다. 아래의 仁과 讓은 대등한 관계로 볼 수 없다. 그것은 讓이란 仁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기에, 다음 ≪堯舜節≫에서는 仁 자만을 들어 말한 것이며, 한 집안의 仁讓이란 몸소 이를 제창하고 모범이 되어 거느려야 한다는 뜻까지보완하여 보아야 한다. 위의 여섯 구(一家仁……作亂)는 백성이 보고 감동하는 바 매우 빠르다는 점을 표현한 말로서, 機 자의 뜻을 포괄하여 아래 구절과 연결지었다. 그리고 ≪장구집주≫의 所由 두 글자를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이는 그 기틀이 그들에게서 나오지 않고 나에게서 나온다는 교육적인 측면을 주로 말하며, 貪戾 作亂 구절에 가벼운 뜻을 두면서 僨事구절은 作亂을 그리고 定國 구절은 興仁·興讓을 증명하고 있다.
一家仁이면 一國이 興仁하고 一家讓이면 一國이 興讓하며 一人이 貪戾하면
34) 같은 책, 朱子.
35) 같은 책, 新安陳氏. ≪栗谷全書≫ 32권, ≪語錄≫ 下.
一國이 作亂하나니 其機 如此하니 此謂一言이 僨事며 一人이 定國이니라
한 집안이 어질면 온 나라에 어진 기풍이 일어나고, 한 집안이 겸양하면 온 나라에 겸양의 기풍이 일어나며, 한 사람이 탐욕을 부려서 도리를 어기면 온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니, 그 기틀이 이와 같다. 때문에 이를 일러"한 마디 말이 일을 그르치게 하며, 한 사람이 나라를 안정시킨다"라고 말한 것이다.
참으로 군자가 효도·공경·사랑의 도리를 극진히 다하여 한 집안을 가르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화기애애하여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질고 후하면 온 나라의 백성이 그 같은 기풍에 진작되어 사랑으로 향하여 나아가지 않을 자 없다. 겸양으로 한 집안을 가르쳐 온 식구가 질서정연한 예절이 있으면, 온 나라의 백성들이 그 같은 기풍에 진작되어 겸양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곧 "국가의 교육은 집안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함이다. 그러나 통치자 한 사람이 탐욕스럽고 예의에 어긋난 몸가짐으로 어짊과 겸양의 덕이 없으면 온 나라가 어지럽게 되어 어질고 겸양했던 기풍이 사라지게 된다. 한 나라가 어질고 겸양해지는 것은 한 집안에서 유래하며, 한 나라에 혼란이 일어나는 것은 한 사람에게서 연유함을 뜻한다. 윗사람이 그 같은 감동을 주면 아랫사람은 그에 따라서 감응해오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機關의 발동처럼 그 감응이 지극히 빠르고 또한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이는 이른바 "잘못된 한 마디 말은 일을 실패로 이끌고, 한 사람의 올바름은 나라를 안정으로 이끈다"라는 것을 말한다. 이로 보면 군자는 탐욕과 예의에 어긋나는 일들을 경계하여 재앙과 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미리 끊고, 효도·공손·사랑을 실행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는 근본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一人은 謂君也요 機는 發動所由也요 僨은 覆敗也라 此言敎成於國之效라
一人은 임금을 말하며, 機는 발동이 일어나는 곳, 僨은 전복되고 패배함이다. 이는 나라에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공효를 말한다.
機란 弩牙(쇠뇌의 시위를 거는 곳. 요즘의 방아쇠 기능)를 말하니, 화살의 발동이 일어나는 곳이다. 나라의 안정에 대해서 '一人'으로 말한 것은 일신에 관한 言行 전체로 말한 것이지만, 일을 그르치게 된 데 대해서 '一言'으로 말한 것은 하찮은 한 마디 말에 의해서 그처럼 엄청난 폐해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는 좋은 일은 이루기 어렵고, 나쁜 일은 이처럼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말하니, 깊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36)
이 절에서는 수신·제가를 미루어 치국에까지 이르기에 요순을 인용하여 표본으로 삼은 것이다. 率이란 몸소 백성의 모범이 되어 솔선수범해야 하는 것이기에 흥기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과 하나가 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桀紂 이하는 별 의미 없이 위 구절에 따라 쓰인 구절[帶來句]이다. 위 ≪一家節≫의 一家 이하 4구는 백성 스스로가 감화됨을 말한 데 반하여, 이의 '有諸……非諸人' 2구는 이를 가지고 백성들에게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나라를 다스림 또한 조칙과 敎條와 호령을 가지고 있으며, 백성들에게 선을 권유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것이기에, 원래부터 "남에게 선하기를 구하고 잘못을 꾸짖는다[求人·非人]"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다만 恕
36) ≪大全≫, 仁山金氏.
로써 그들에 앞서 솔선적으로 모범이 된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 "자신에게 선이 있고 ……악이 없다 한다[有諸己·無諸己]"라는 구절에는 제가의 뜻이 포괄되어 있다. 所藏乎身 不恕의 藏 자는 存在라는 存 자의 뜻과 같은 뜻으로 볼 뿐, 너무 깊은 의미로 보아서는 안 되며, 恕 자는 국가의 교육을 형성할 수 있는 기본적 핵심으로서, 이는 아래 ≪治平節≫의 絜矩와 일관된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堯舜이 帥天下以仁하신대 而民이 從之하고 桀紂 帥天下以暴한대 而民이 從之하니 其所令이 反其所好면 而民이 不從하나니 是故로 君子는 有諸己而后에 求諸人하며 無諸己而后에 非諸人하나니 所藏乎身이 不恕요 而能喩諸人者 未之有也니라
요임금과 순임금이 천하를 어짊으로써 다스리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고, 걸왕과 주왕이 천하를 포악함으로써 다스리니 백성들이 그를 따랐다. 그 명령하는 말이 그가 좋아하는 마음에 반대되면 백성들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으므로 군자는 자기에게 선을 갖춘 뒤에야 남에게 선하도록 요구하며, 자기에게 잘못이 없는 뒤에야 남에게 잘못하였다고 꾸짖을 수 있다. 자기의 몸에 간직한 바로써 미루어 가지 못하고서 남을 깨우쳐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미력한 사람의 몸으로 광활한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한 국가의 덕화란 위정자 한 사람으로부터 나오며, 한 국가의 政令이 위정자 한 사람으로부터 미루어 나가기 때문이다. 요·순이 몸소 효도·공손·사랑의 덕을 실천하여 천하 백성을 어짊으로 거느렸기에, 백성 또한 이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그의 어짊을 따랐다. 그러나 걸주는 불효·불공 그리고 자애롭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천하를 포악한 정치로 거느렸기에, 백성 또한 그를
본받아 그의 포악함을 따랐다. 이는 백성이 위정자의 감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은 마치 기관의 발동처럼 신속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걸주는 포악한 임금이지만 일찍이 백성들에게는 어진 일을 행하라고 명하지 않았었겠는가. 그러나 걸주가 마음속 깊이 좋아한 것은 포악함이었다. 그저 말로만 어진 일을 행하라 명하였기에, 그가 좋아하는 마음에 반대가 되는 명령을 내린 것이다. 백성들이 어떻게 마음속 깊이 좋아하는 그의 포악함을 버리고 어진 일을 행하라는 그의 명령만을 따를 수 있겠는가. 백성은 임금이 좋아하는 속마음을 따르는 것이지 명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효도·공손·사랑의 선을 실천하여 그 같은 덕을 몸소 지닌 뒤에야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 선을 하도록 꾸짖을 수 있으며, 불효·불공 그리고 자애롭지 못한 악을 말끔히 없앤 뒤에야 백성에게 명령을 내려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금지시킬 수 있다. 이는 나의 몸으로 미루어 사람에게 미쳐가는 것으로 이른바 恕라 한다. 만일 나의 몸에 선을 가지지 못하거나 악을 없애지 못한 처지에서, 백성들에게 선을 행하도록 하고 악을 버리도록 하면, 이는 나의 몸에 간직한 바로써 미루어 나가지 못함이다. 따라서 백성으로 하여금 그의 명을 따라서 허물을 고치고 선을 옮겨 가도록 할 수 없다.
此는 又承上文一人定國而言이라 有善於己然後可以責人之善이요 無惡於己然後可以正人之惡이니 皆推己以及人이니 所謂恕也라 不如是면 則所令 反其所好而民不從矣라 喩는 曉也라
이는 또한 윗글의 '一人定國' 구절에 이어서 말한 것이다. 자기의 몸에 선이 있은 후에야 남에게 선을 하도록 꾸짖을 수 있고, 자기에게 악이 없는 후에야 남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 이는 모두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감이니, 이른바 恕이다.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명령하는 바 그 자신의
좋아하는 것에 반대가 되어 백성이 따르지 않게 된다. 喩는 깨우침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恕에 대해 논하기로 한다. 忠과 恕는 하나이면서도 나누면 둘이 된다. 이 절에 쓰인 恕 자는 모두 推己의 恕로 말했지만, '藏乎身' 세 글자 속에 盡己의 忠이 포함되어 있다. 忠과 恕는 마치 형체와 그림자, 근본과 지엽의 관계와 같기에 忠이 없는 恕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몸에 선이 있고 악이 없다는 것이 자신의 도리를 극진히 다한 것으로 盡己의 忠이며, 자기의 몸을 미루어 저 사람의 잘못을 꾸짖는다거나 또는 바르게 해주는 것은 忠으로 말미암아 恕를 하는 것이다. 이로 보면 忠이란 곧 恕가 그 내면에 감춰져 있으며, 恕는 忠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때문에 자신에게 있는 것으로 미루어 나가지 못한다는 것은 즉 내면의 忠을 가지지 못하고서 恕를 행하려는 것이다. 정자가 말했듯이 忠이 없고서는 恕를 할 수 없다. 이는 형체 없는 그림자, 뿌리 없는 나뭇가지와 같이 존재할 수 없다.37)
이는 본 장 전체의 뜻을 끝맺음이니, 위의 4절을 종합하여 이를 보아야 한다.
故로 治國이 在齊其家니라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이 그 집안을 가다듬음에 있다고 한 것이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한 몸의 거동은 한 집안의 귀추에 관계되며, 한 집안의
37) 같은 책, 雲峰胡氏·新安陳氏 ; ≪性理大全≫ 37권, 忠恕條, 上蔡謝氏·朱子 ; 陳淳의 ≪性理字義≫ 상권, 忠恕條
풍습은 한 나라의 온 백성이 우러러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나라를 다스림은 몸을 닦아 집안을 가지런히 하는 데 있다.
通結上文이라
위 문장을 모두 끝맺은 것이다.
≪시경≫을 세 차례 인용하여 읊는 가운데 이 역시 차례가 있다. ≪桃夭篇≫은 문왕과 后妃의 덕화를 입어 어진 덕을 이룬 여인에 대해 찬미한 시이다. 이 세상에 가장 감화시키기 어려운 사람을 꼽는다면 그것은 곧 부인들이다. 그러므로 한 집안의 식구를 잘 다스려야 한 집안이 가다듬어진다. 세 곳의 而后 글자에는 모두 그처럼 감화시키기 어렵다는 뜻이 담겨 있으며, 반드시 먼저 몸소 실행하여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복숭아나무를 살펴보면 복숭아나무는 먼저 꽃이 피어 꽃잎이 떨어진 뒤에 열매가 맺고, 그 뒤에 나뭇잎이 점차 돋아나는데, 이는 ≪桃夭篇≫ 셋째 장으로 그 무성한 잎에 대해 읊은 시이다.
詩云 桃之夭夭여 其葉蓁蓁이로다 之子于歸여 宜其家人이라 하니 宜其家人而后에 可以敎國人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복숭아나무의 아름다움이여! 그 잎이 무성하여라, 그 아가씨 시집을 감이여! 그 집안의 사람에게 잘하리라" 하니, 그 집안사람들에게 잘한 후에야 백성을 가르칠 수 있다.
집안을 가다듬고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대하여 일찍이 ≪시경≫에서도 읊은 바 있다. ≪주남·도요편≫에 의하면, "복숭아나무여, 여리고 아름
다우니 그 잎이 무성하고 아름다워라, 아리따운 아가씨여, 이 좋은 계절에 시집가오니 온 집안사람에게 잘하리라"라고…….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는 반드시 몸을 닦아 한 집안 사람을 잘 다스린 후에야 나라의 백성을 가르쳐, 백성 또한 그 집안사람들을 이처럼 잘 다스리게 할 수 있다.
詩는 周南桃夭之篇이라 夭夭는 少好貌요 蓁蓁은 美盛貌니 興也라 之子는 猶言是子라 此指女子之嫁者而言也라 婦人謂嫁曰歸요 宜는 猶善也라
시는 ≪주남·도요편≫을 말한다. 요요는 여리고 어여쁜 모양, 진진은 아름답고 무성한 모양을 말하니 이는 興體이다. 之子는 그 이[是子]라는 말과 같으니, 출가하는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인이 시집가는 것을 歸라 한다. 宜는 善과 같다.
≪蓼蕭篇≫은 천자가 제후를 위하여 잔치를 베풀면서 노래한 시이다. 숱한 인정 가운데 가장 쉽게 잃어버리는 것이 형제간의 정이다. 집안을 가다듬음에 있어 형제 사이를 잘 다스리면서 집안이 다스려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편의 주를 살펴보면, "제후란 대를 이어 왕위에 오르므로 형제 사이에는 서로가 의심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형과 아우에게 잘한다[宜兄宜弟]"는 말로써 그를 찬미함과 동시에 또한 이로써 그들을 경계하고 있다.
詩云 宜兄宜弟라 하니 宜兄宜弟而后에 可以敎國人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형에게 잘하고 아우에게 잘한다" 하니 형과 아우에게 잘한 후에야 나라의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小雅·蓼蕭篇≫에서 제후를 찬미한 바 있다. "군자는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아우는 형에게 잘하고 형은 아우에게 잘한다"라고 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는 반드시 몸을 닦아 형과 아우에게 잘한 뒤에 나라의 백성을 가르쳐, 백성 또한 형제 사이에 그처럼 잘하도록 만들 수 있다.
詩는 小雅蓼蕭篇이라
시는 ≪소아·육소편≫을 말한다.
≪鳲鳩≫는 제후를 찬미한 노래이다. 이는 위의 2편을 종합하여 말한 것으로, 아내에게 법이 되어 형제에게 이르고, 더 나아가 한 집안과 나라에까지 이른다는 뜻이다. 儀란 나의 모든 것이 백성의 표본이 되는 것이며, 四國은 四境이라는 말과 같다. 본절에서 其儀不忒이라 말한 데 그친 것은 몸을 닦아서 집안을 가다듬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의의 구체적인 사실성이 결여되어 있기에 또 다시 이를 뒤이어서 "부자와 형제들이 백성의 법이 되어야 한다[父子兄弟足法]"는 구절로써 이를 보완해주고 있다. 宜其家人 또는 宜兄宜弟의 宜는 애틋한 정의가 깊숙이 젖어 있어 조금이라도 서로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父子兄弟足法의 法이란 질서정연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없음을 뜻한다.
詩云 其儀不忒이라 正是四國이라 하니 其爲父子兄弟 足法而后에 民이 法之
也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그 몸가짐에 잘못이 없어야 사방의 나라를 바르게 할 수 있었다" 하니, 그의 부자와 형제들이 남들에게 법이 되기에 넉넉한
뒤에야 백성이 그를 본받게 된다.
≪曹風·鳲鳩篇≫에서 일찍이 군자를 찬미한 바 있다. "임금의 거동이시여 떳떳하여 어긋남이 없으시니, 사방 나라의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시 리……." 나라를 다스리는 군자는 반드시 제 부모와 자식과 형제들이 모두 백성의 법이 될 수 있어야만이, 백성들의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들이 모두 그를 보고서 감동을 받아 그를 본받음으로써 그들 또한 그와 같이 행하게 될 것이다.
詩는 曹風鳲鳩篇이요 忒은 差也라
詩는 ≪조풍·시구편≫이요, 忒은 어긋남을 말한다.
나의 부자와 형제가 남의 법이 되기에 넉넉한 뒤에 백성이 스스로 법을 받게 되는데, 요순은 아들을 감화시키지 못하였고, 周公은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하였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성현의 경전은 그 떳떳한 법도만을 논한 것인데 요순과 주공은 變道에 처했기 때문이다. 요순이 제 아들에게 천하를 전하지 않고 어진 이에게 전한 것은 변도에 있어서 가장 훌륭하게 대처함이며, 만일 주공이 管叔을 처벌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周나라가 평온할 수 있었겠는가?38)
此謂란 위에서 인용한 세 수의 시를 종합하여 말한 것이므로, 여기에 다시 孝·弟·慈 따위를 붙여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시경≫으로써 경문을
38) ≪大全≫, 朱子.
해석한 것이다.
此謂治國이 在齊其家니라
이것을 일러 나라를 다스림이 그 집안을 가다듬는 데에 있다고 한 것이다.
세 편의 시 가운데 집안만을 말하고 나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나라만을 말하고 집안을 말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처럼 인용한 시들이 각기 다르다. 그러나 이 모두가 몸을 닦아 집안을 가다듬고, 집안을 가다듬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근본한 말들임에는 매한가지므로, 이는 ≪시경≫과 경문이 서로 어우러져 깊은 뜻을 밝혀주고 있다.
此三引詩는 皆以詠歎上文之事 而又結之如此하니 其味深長이라 最宜潛
玩이니라 여기에서 세 차례 ≪시경≫을 인용한 것은 모두 위 문장의 일을 咏歎하였고 또한 이와 같이 끝맺음이니, 그 의미가 심장하다. 마땅히 침잠한 마음으로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옛 사람들은 문장을 서술함에 있어서 끝부분에 이르러 대체로 말을 끝마치고서도 그 의미를 다 표현하지 못할 때에는 대부분 시를 인용하여 그 여운을 읊고 있다.39) 그러나 무엇 때문에 이 장에서는 유독 두 차례나 끝맺음의 말을 쓰고, 또 다시 세 차례나 시를 인용하였을까? 그것은 신민의 조목이 평천하에 이르고 있으나, 천하와 국가는 원래 둘이 아니며, 그 의의 가 이미 治國의 가운데 다하였으므로 ≪치국장≫에 앞서, "帥天下……"라는
39) 같은 책, 三山陳氏.
말이 있고, 제10장 ≪평천하장≫ 또한 치국의 도를 말하고 있는 바, 이는 하나의 일로써 미루어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 이미 두 차례나 끝맺었기 때문에 아래의 ≪평천하장≫에는 맺음말이 없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는 신민에 대한 傳의 끝이 되는 까닭에 특별히 세 차례나 시를 인용하여 亂體를 쓰고 있는데, 앞 ≪止至善章≫의 亂體와 상응되는 것으로 傳者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40)
* * *
右는 傳之九章이니 釋齊家治國이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아홉째 장이니, 집안을 가다듬고 나라를 다스림에 대한 해석이다.
이 장은 치국평천하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천하의 평정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다"라는 첫 절의 몇몇 구절을 살펴보면 아래 문장은 모두 이를 통해서 천하가 평정된다는 점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군자는 나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리는 絜矩의 도가 있다"라는 구절을 주로 하였음을 볼 수 있다. 제1 ≪平天≫, 제2 ≪所惡≫節에서는 평천하는 혈구에 있음을 말했고, 제3 ≪樂只≫, 제4 ≪南山≫ 2절은 혈구의 도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공정히 한 데 있음을, 제5 ≪殷之≫절에서는 처음으로 득실[得衆則得國, 失衆則失國]을 말하여, 위의 한 단락을 끝맺으면서 백성을 얻는 데
40) ≪秋淵文集·大學問目≫.
[得衆] 중점을 두어 '민심의 向背'를, 제6~10 ≪先愼≫, ≪德者≫, ≪外本≫,
≪財聚≫, ≪言悖≫ 5절은 財貨上에 있어서의 好惡를 공정히 해야 한다는 점을, 제11 ≪康誥≫절에서는 두 번째 득실[善則得之, 不善則失之]을 말하여, 위의 한 단락을 끝맺으면서 '善' 자에 중점을 두어 '임금의 몸가짐'을, 제12~13 ≪楚書≫, ≪舅犯≫ 2절은 아래 문장에 이어서, 아래의 ≪秦誓≫, ≪唯仁≫, ≪見賢≫, ≪好人≫ 4절은 사람을 등용할 때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공정히 해야 함을, ≪大道≫절에서는 세 번째 득실[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을 말하여 한 단락을 끝맺으면서 忠信에 중점을 두어 '임금의 마음가짐'을 주로 말했다. ≪生財≫절 이하는 理財의 조목을 말하면서 특별히 취렴하는 신하를 등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계하고 있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는 혈구의 의의를 미루어 넓혀가는 것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백성과 함께하여, 재리를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경계한 것이다.
上老老……而民不倍 이하 3구는 윗사람이 행하면 아래의 백성들이 본받는다는 점을 말하였다. 집안이 가다듬어지면 나라가 다스려지고 천하가 평정되는 것 또한 이와 같다. 혈구의 도는 곧 정사를 말한다. 천하는 그처럼 광활하지만 백성을 흥기시키는 것은 교화이며, 백성의 흥기를 성공으로 이끄는 것은 바로 정사이다. 만일 정사를 통하여 각 개인이 제자리를 얻도록 마련해 주지 못하면, 설령 교화에 의해 흥기하였을지라도 그 또한 부질없는 일이다. 是以는 앞 문장에 이어서 말한 것으로, 군자는 마땅히 혈구의 도를 행하여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絜矩의 矩란 마음의 이치를 비유함이니, 이는 矩로써 도를 행한다는 것으로 絜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所謂平天下 在治其國者는 上이 老老而民이 興孝하며 上이 長長而民이 興弟하며 上이 恤孤而民이 不倍하니 是以로 君子는 有絜矩之道也니라
이른바 천하를 평정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는 것은, 윗사람이 늙은이를 늙은이로 대접하면 백성에게 효의 기풍이 일어나며, 윗사람이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면 백성에게 공경의 기풍이 일어나며, 윗사람이외로운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면 백성이 배반하지 않으므로, 군자는 자기의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絜矩의 도가 있는 것이다.
경문에서 말한 "천하를 평정함은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라고 함은 무슨 뜻일까? 시험삼아 한 나라의 백성을 교화하는 근본이 집안을 가다듬는 데에 있다는 점으로 살펴보면, 천하 평정의 근본이란 나라에 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집안과 나라 그리고 천하의 수많은 사람들은 한 사람이 아니지만, 어른 노인 어린이 세 부류로서 그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 그 때문에 위정자가 나의 노인을 노인으로 받들어 집안을 효도로 가르치면, 나라의 백성 또한 이를 보고 느낀 바 있어 효도의 기풍이 진작될 것이니, 어버이를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위정자가 나의 어른을 어른으로서 받들어 집안을 공경으로 가르치면, 나라의 백성 또한 이를 보고 느낀 바 있어 공경의 기풍이 진작될 것이니, 어른에게 공경하지 아니할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위정자가 나의 어린이를 불쌍히 여겨 집안을 사랑으로 가르치면, 나라의 백성 또한 이를 보고 느낀 바 있어 배반하지 않고 사랑의 기풍이 진작될 것이니, 어린이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할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이처럼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은 한 집안 식구들의 마음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천하 모든 사람의 마음이라 하여, 어찌 한 나라 백성들의 마음과 다를 바 있겠는가. 이 때문에 천하를 다스리는 군자에게는 자기의 마음으로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혈구의 도가 있다.
이는 반드시 다 같은 마음으로 헤아려 각자의 마땅한 도리를 다하여, 천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효도와 공경과 사랑을 그들의 분수에 따라서 지극히 다하도록 함이니,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老老는 所謂老吾老也요 興은 謂有所感發而興起也라 孤者는 幼而無父之稱이라 絜은 度也요 矩는 所以爲方也라 言此三者는 上行下效 捷於影響하니 所謂家齊而國治也며 亦可以見人心之所同 而不可使有一夫之不獲矣라 是以君子必當因其所同하야 推以度物하야 使彼我之間으로 各得分願이면 則上下四旁이 均齊方正而天下平矣라
老老는 이른바 나의 늙은이를 늙은이로서 공경함이다.41) 興은 느낀 바 있어 흥기함을 말하며, 孤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은 자를 일컫는다. 絜은 헤아림, 矩는 모나게 만드는 기구이다. 이 세 가지(효도·공경·사랑)를 위에서 행하면 아래에서 본받음이 그림자와 산울림보다도 더 빠르다. 이른바 집안이 가다듬어지고 나라가 다스려짐이며, 또한 사람의 다 같은 마음으로서,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있어서는 안 됨을 볼 수 있다. 이로써 군자는 반드시 다 같은 마음으로 인하여 이를 미루어 남을 헤아려, 저 사람과 나의 사이에서 제각기 분수에 맞는 소원을 얻게 되면 위아래와 사방 주위가 모두 고르고 반듯하게 되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다.
혈구에 대해 다시 논해보기로 한다. 矩란 직각의 자로서 네모 반듯하게 만드는 기구이다. 이 때문에 矩를 속칭 곡척이라 하기도 한다. 이는 법칙과 같다는 뜻으로 쓰인 假借의 글자로서 사람의 마음을 비유한 것이다. 마음의 본연법칙을 가리킨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자는 矩란 마음이니, 내가 하고
41) ≪맹자·梁惠王≫ 上
자 하는 바는 타인도 원하는 마음이라 이해하였다. 絜이란 헤아림이니, 크기를 헤아리고 분량을 비교하여 저울질한다는 뜻이다. 이를 종합하여 말하면 명덕의 지극한 선이 곧 내 마음의 본연 법칙이므로, 격물치지는 이 법칙[矩]을 밝히는 바이며 성의정심은 이 법칙을 보존하는 바이며, 제가는 이로써 한 집안을 헤아리는 것이며, 치국은 이로써 나라를 헤아리는 바이며, 평천하는 이로써 천하를 헤아리는 바이다. 혈구의 도는 즉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것이니, 명덕이 矩요, 신민이 絜인 셈이다. 이 때문에 주자는 "만에 하나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으면 얄팍한 각막 사이라도 胡越만큼이나 먼 거리가 생기게 되므로, 비록 혈구를 하려고 해도 통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나의 私 자를 推恕[혈구]할 수 없는 장본으로 인식한 것으로, 사심이 있다는 것은 명덕을 밝히지 못한 데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42)
이는 혈구의 표본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마음이란 즐거웠던 일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비위에 거슬리는 일은 가슴에 맺혀 있기 십상이기에 증오의 측면에서 이를 말하게 된 것이다. 上下는 현격한 지위의 격차로, 전후는 평등한 가운데에서 장유의 차례로, 좌우는 같은 무리의 사람으로 말한 것이다. 싫어하는 그 마음은 다 같이 지니고 있는 마음이니 곧 矩이며, 이를 가지고 남을 대하지 않는 것[毋以……]이 바로 혈구이다. 위에서는 사람의 마음이란 본디 나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음을 말했기 때문에 '是以'로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나의 마음이 저 사람과 벽이 없어야 함을 말한 까닭
42) ≪大全≫, 朱子·玉溪盧氏·雲峰胡氏·雙峰胡氏. ≪大學或問≫.
에 '此之謂'라 말한 것이다. ≪장구집주≫에서는 뒤 단락의 "모든 것은 내가 하는 바에 따라서 얻어진다"라는 것으로 바른 뜻[正意]을 삼고 있다.
所惡於上으로 毋以使下하며 所惡於下로 毋以事上하며 所惡於前으로 毋以先後하며 所惡於後로 毋以從前하며 所惡於右로 毋以交於左하며 所惡於左로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也니라
윗사람에게 느꼈던 싫어하는 바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며, 아랫사람에게 느꼈던 싫어하는 바로써 윗사람을 섬기지 말며, 앞의 사람에게 느꼈던 싫어하는 바로써 뒤의 사람에게 먼저 행하지 말며, 오른편에게 느꼈던 싫어하는 바로써 왼편 사람을 사귀지 말며, 왼편에게 느꼈던 싫어하는 바로써 오른편 사람과 사귀지 않음을 일컬어 혈구의 도라고 한다.
혈구의 의의는 무엇일까? 사람이 처한 곳에는 상하 전후 좌우의 차이가 있으나, 마음은 한가지이다. 예컨대 내가 남의 아래에 있을 때 나를 부리는 윗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같은 일을 가지고서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그 일로써 아랫사람을 부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남의 위에 있을 때 나를 섬기는 아랫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같은 일을 가지고서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그 일로써 나의 윗사람을 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람의 뒤에 있으면서 나의 앞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같은 마음을 가지고서 뒷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일을 뒷사람에게 앞서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남의 앞에 있을 때 나를 추종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러한 마음으로 앞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일을 앞사람에게 그처럼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사람의
왼편에 서서 나와 사귀는 오른편의 사람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 같은 마음으로 왼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바로써 왼편 사람을 사귀지 말 것이다. 내가 사람의 오른편에서서 나와 사귀는 왼편 사람이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그러한 마음으로 오른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내가 싫어했던 마음으로 오른편 사람을 그처럼 사귀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면 그 스스로 친한 바를 얻게 되어 나의 상하 사방의 주위가 모두 가다듬어지고 바르게 됨으로써 남거나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혈구의 도란 이를 말한다.
此는 覆解上文絜矩二字之義라 如不欲上之無禮於我면 則必以此度下之心하야 而亦不敢以此無禮使之요 不欲下之不忠於我면 則必以此度上之心하야 而亦不敢以此不忠事之라 至於前後左右하야도 無不皆然이면 則身之所處 上下四旁 長短廣狹이 彼此如一하야 而無不方矣요 彼同有是心而興起焉者 又豈有一夫之不獲哉아 所操者 約 而所及者 廣이니 此平天下之要道也라 故 章內之意는 皆自此而推之니라
이는 위의 혈구 두 글자의 뜻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만일 윗사람이 나에게 무례함을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아랫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서 또한 감히 이 같은 무례한 일로써 그들을 부리지 말 것이며, 아랫사람이 나에게 불충함을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로써 윗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또한 이 같은 불충으로써 그를 섬겨서는 안 된다. 전후 좌우에 이르러서도 모두 그와 같이 하면 나의 몸이 처해 있는 상하·사방과 長短廣狹이 피차 하나같이 되어 반듯하지 않은 것이 없을 것이다. 다 같은 그 마음을 지니고 흥기하는 자 또한 어찌 한 사람이라도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있겠는가. 잡은 바는 간략하지만 미치는 바 광범하니, 이것이 평천하의 요긴한
도이다. 때문에 이 장 내에서의 대의는 모두 이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혈구란 推恕로서, "仁을 행하는 것이다"라는 의의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恕는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혈구 또한 恕와 같다고 볼 때, 혈구 역시 이 두 가지 방법으로써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서고자 하면 이를 미루어 저 사람을 세워 주고……[己欲立而立人……]"43)라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己所不欲, 勿施於人]"44)라는 것은 소극적인 恕의 방법으로 자기의 몸으로써 타인을 헤아려보는, 즉 두 번 접어보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혈구의 예로 제시한 바, 예컨대 내가 윗사람이라고 가정할 경우, 내가 아랫사람의 입장에 서서 윗사람이 나를 대하는 바를 통해서, 또 다시 아랫사람에게 대하여야 할 도리를 생각하는, 즉 세 겹 접어보는 적극적인 방법을 말한다. ≪중용≫의"아들에게 바라는 바로써 아버지를 잘 섬기지 못하였고……[所求乎子, 以事父未能……]"45)라는 구절 또한 이와 같은 예이다. 그러나 ≪중용≫에서는 그 좋아하는 면으로만 말했는데, 여기에서는 싫어하는 면으로 말한 것이 차이점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의 방법은 "그처럼 해준다"라는 베풂[施]과 "그처럼 해서는 안 된다"라는 베풀지 말라[勿施]는 뜻으로 집약해 말할 수 있다.46)
43) ≪논어·雍也≫.
44) ≪중용≫ 제13장.≪논어·(위령공,안연)≫.
45) 위와 같음.
46) ≪大全≫, 朱子, 周何 等 主編, ≪國學導讀叢編≫ 上, 273쪽, 康橋出版事業公司印行, 1969년.
위에서는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라고 말하였는 바, 이를 미루어 좋아하는 일 또한 그처럼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여기에서는 좋아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을 함께 열거한 것이다. 好惡 두 글자는 아래 문장까지를 포괄하고 있다. 그들이 좋아하고 그들이 싫어하는 것이 곧 법도[度矩]이며, 안으로는 자신이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백성과 함께 좋아하고 싫어하며, 또한 백성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로써 나 또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함께 한다는 것은 모두 이 법도에 따라서 행하는 일들이다. 此之謂란 이 전문을 기록한 자가 많은 사람을 각성시키고자 이를 말한 것으로, 이처럼 하였을 때만이 "임금이란 백성의 부모"라는 그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다. 이는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하여야 한다는 책임이 주어지는 말이지, 부질없이 군자를 찬양한 말은 아니다.
詩云 樂只君子여 民之父母라 하니 民之所好를 好之하며 民之所惡를 惡之此之謂民之父母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화락하신 군자여! 백성의 부모이시다" 하니, 백성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고, 백성이 싫어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것을 일컬어 백성의 부모라 말한다.
혈구의 도를 얻으면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나 이를 잃으면 천하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小雅·南山有臺篇≫에 의하면, "화락하신 군자여! 백성의 부모이시다"라고 한다. ≪시경≫에서 이와 같이 제후에 대해 찬미하였는 바, 그렇다면 군자(위정자)가 어떻게 해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었을까? 부모의 마음이란 자식과 함께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군자 또한 백성이 좋아하는 바 있으면 그들과 함께 좋아하여
그들이 원하는 바를 따르고, 백성이 싫어하는 바 있으면 그들과 함께 싫어하여 그들에게 해가 되는 바를 없애 주었다. 이는 위정자가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면 백성 또한 그를 부모처럼 사랑하게 됨을 말하니,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으로 혈구를 잘한 데에서 얻어진 공효를 말한다.
詩는 小雅南山有臺之篇이라 只는 語助辭라 言能絜矩而以民心爲己心이면 則是愛民如子 而民愛之如父母矣라
시는 ≪소아·남산유대편≫을 말하며, 只는 어조사이다. 혈구를 잘하여 백성의 마음으로써 나의 마음을 삼으면, 백성을 자식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백성이 그를 부모와 같이 사랑하게 된다.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꼽는다면 그것은 단연 富와 貴 그리고 가난과 비천함이다. 이 때문에 丁茶山은 인재의 등용과 理財의 문제로서 백성의 好惡의 감정을 이해하였다. 위정자의 큰 정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인재등용'과 '재물을 다루는 일'이다. 사람이 대체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 두 가지 큰 욕심을 가지게 되는데, '높은 지위를 얻는 것'과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상자의 욕심은 높은 지위를 얻는 데 있고, 아랫사람의 욕심은 재물을 향유하는 데 있다. 이처럼 벼슬의 등용 여부와 재물의 향유 문제는 세인의 최대 관심 사인 까닭에, 사람을 천거하여 쓸 때에는 그들의 賢愚·邪正을 가려서 升降· 黜陟함에 있어서 백성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며, 세금을 징수하여 거둬들일 때는 賦稅·財賄의 出納·收支에 있어 백성의 마음에 어긋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처럼 민심에 어긋나는 바 없으면, 백성의 마음이 고루 미더워지면 이로 인해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못한다면 災禍가 곧장 일어나게 되므로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정의 治亂
得失은 항상 현인의 등용 여부에 달려 있으며, 野人의 苦樂·恩怨은 항상 재물을 거둬들이는 데에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이다.47)
위의 ≪樂只節≫은 백성과 함께 좋아하고 싫어하는 데에서 얻어진 효험을 말했고, 여기에서는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함께 하지 못한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백성이 모두 우러러본다[具瞻]"라는 것은 매우 두렵다는 뜻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이 시는 본디 신하를 풍자하여 읊은 시구인데, 여기에서는 임금을 꾸짖는 뜻으로 전용된 까닭에 '有國者' 세 글자로 이를 해석하였고, '不可不愼' 구절은 임금에게 바라는 바 더욱 크므로 그 책임은 더욱 깊다는 뜻을 가지고 있기에, '愼' 자에 포괄된 뜻은 더욱 광범위하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원류를 밝게 하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터전을 드넓게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愼' 자에 달려 있다. 戮이란 죽음 또는 모욕을 말한다.
詩云 節彼南山이여 維石巖巖이로다 赫赫師尹이여 民具爾瞻이라 하니 有國者 不可以不愼이니 辟則爲天下僇矣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깎아지른 듯 저 남산이여! 큰 바위 우뚝우뚝하여라. 빛나고 빛나는 태사 윤씨여! 백성이 모두 그대를 우러러보노라"라고 하니, 나라를 맡은 사람은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편벽되면 천하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小雅·節南山篇≫에 의하면 "깎아지른 듯 저 높은 남산이여! 큰 바위가
47) ≪國譯 與猶堂大學≫. 92쪽.
우뚝우뚝하여라. 하물며 오늘날 빛나고 빛나는 태사 윤씨여! 백성이 모두 그대를 우러러보지 않으랴"라고 하니, 이는 ≪시경≫에서 윤씨의 불공정한 정치를 풍자하여 읊은 시이다.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위정자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삼가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찾아볼 수 있다. 만일일신의 사리사욕에 치우치면 몸과 나라를 모두 잃고 천하에 큰 죽음을 겪게 될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는 혈구의 도를 행하지 못한 데에서 얻어지는 災禍이다.
詩는 小雅節南山之篇이라 節은 截然高大貌요 師尹은 周太師 尹氏也라 具는 俱也요 辟은 偏也라 言在上者는 人所瞻仰이니 不可不謹이요 若不能絜矩而好惡徇於一己之偏이면 則身弑國亡하야 爲天下之大戮矣라
시는 ≪소아·절남산편≫이며, 節은 깎아지른 듯이 높고 우람찬 모양이며, 師尹은 주나라 태사 윤씨이다. 具는 俱 자와 같고, 辟은 편벽을 말한다. 윗자리에 있는 자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바이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혈구를 잘하지 못하여,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한 몸의 편벽된 바에 따르면, 몸은 시해당하고 나라를 잃게 되어, 천하에 큰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는 위의 ≪樂只≫·≪南山≫ 2절의 뜻을 총괄하여 끝맺고 있다. 克配上帝는 탕임금의 창업과 太甲의 守成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이 시에서 상제의 명을 得衆과 失衆으로 해석한 것은, 백성이 있는 곳에 천명이 있음을 뜻한다. 道得衆……失國 두 구절은 峻命(천명)을 얻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며, 道得衆의 '道' 자를 음미해 보면, 이 또한 본절에 인용된 ≪文王篇≫을 해석하면서 위 2절의 뜻을 끝맺고 있다.
詩云 殷之未喪師엔 克配上帝러니 儀監于殷이라 峻命不易라 하니 道得衆則得國하고 失衆則失國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은나라가 백성을 잃지 않았을 때에는 상제와 짝했었는데……,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 삼아야 할 것이다. 큰 천명을 보존하기란 쉽지 않다"라고 하니, 백성을 얻으면 나라를 얻고, 백성을 잃으면 나라를 잃게 됨을 말한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백성과 함께 하면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지만, 편벽되면 천하의 사람에게 큰 죽임을 당하게 된다. 잘잘못에 의한 결과 가 어쩌면 그처럼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大雅·文王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은나라가 민심을 잃지 않았을 때에는 상제와 짝하여 임금이 될 수 있었는데, 周에 이르러서 은나라가 백성을 잃음으로써 천명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므로 후세 사람들은 마땅히 은나라를 거울 삼아야 하며, 천명이란 쉽사리 보존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시경≫을 살펴보면 주공은 위의 말로써 그의 조카 成王을 경계하였는 데, 다음과 같다. 은나라의 선왕들이 도가 있어 백성을 얻었을 때에는 상제와 짝이 되어 나라를 얻을 수 있었다. 이는 이른바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삼가 백성의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은대의 후왕들이 무도하여 백성을 잃음에 미쳐서는, 천명을 보존하기 어려웠고, 마침내 나라를 잃기에 이르렀다. 이로 볼 때 혈구를 하느냐 못하느냐를 어떻게 하찮은 일로 여길 수 있겠는가.
詩는 文王篇이라 師는 衆也요 配는 對也라 配上帝는 言其爲天下君하야 而對乎上帝也라 監은 視也요 峻은 大也요 不易는 言難保也요 道는 言也라 引詩
而言此하야 以結上文兩節之意라 有天下者 能存此心而不失이면 則所以絜矩而與民同欲者 自不能已矣라
시는 ≪문왕편≫이며, 師는 뭇 사람, 配는 마주 대함이니, 配上帝는 천하의 임금이 되어 상제와 마주함을 말한다. 監은 거울 삼다, 峻은 큼이며, 不易는 보전하기 어려움을 말하며, 道는 말하다의 뜻이다. ≪시경≫을 인용, 이를 말하여 위 2절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천하를 소유한 자가 이 마음을 보존하여 잃지 않으면 혈구로써 백성과 더불어 원하는 바를 함께 하는 바 스스로 그만둘 수 없을 것이다.
은나라가 백성을 잃음은 紂가 민심을 잃었음이며, 은나라가 백성을 잃지 않음은 선왕이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민심을 얻음은 상제와 짝이 되는 바이며, 민심을 잃음은 곧 천명을 보존하지 못함이다. 천명의 去留는 민심의 向背에 있으며, 민심의 향배 또한 군주의 혈구 여부에 달려 있다.48)
혈구란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백성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가운데 재물보다도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이 때문에 好惡를 말하고 곧 이를 뒤이어 재물을 말한 것이다. 先愼乎德의 '先' 자는 위의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를 삼간다"라는 뜻을 상대로 하여 쓴 것이지, 아래의 有人·有土·有財·有用의 대칭으로 쓴 것은 아니다. 덕이란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의 근원이며, 혈구는 곧 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라서'덕이 있다[有德]'라는 것은 이미 내면에 혈구를 포괄하고 있음이며, 有土란 백성이 찾아오고 백성의 보살핌까지를 겸해서 말함이며, 有財란 府庫의
48) ≪大全≫, 玉溪盧氏.
재물을 가리키며, 有用은 경비를 가리킨다. 네 개의 此(此有人, 此有土, ……) 자는 이것이 있으면 곧 그것이 있다는 것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므로 밖에서 구할 게 없음을 말하고, 또한 오직 이것이 있어야 바야흐로 그것이 있다는 것이지, 억지로 끌어온 것이 아님을 말한다는 두 뜻을 지니고 있다. 이 네 가지는 평천하를 하려면 반드시 덕이 있어야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한다.
是故로 君子는 先愼乎德이니 有德이면 此有人이요 有人이면 此有土요 有土면 此有財요 有財면 此有用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니, 덕이 있으면 이에 사람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이에 국토가 있고, 국토가 있으면 이에 재물이 있고, 재물이 있으면 이에 경비를 쓸 수 있다.
은나라가 천명을 얻느냐 잃느냐는 백성을 얻느냐 잃느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혈구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혈구를 행함에 있어 덕을 삼가는 것보다 더 급선무는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먼저 덕을 삼가되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근본을 삼가는 것이다. 덕을 삼가면 덕을 지니게 되어 천하 사람의 민심이 돌아오므로 이에 사람이 모여들게 되며, 사람이 있는 곳은 모두가 땅이다. 이는 모두 왕의 국토이므로 이에 국토를 소유하게 되며, 국토가 있으면 곡물이 생산되므로 재물이 있게 되며, 재물이 있으면 비용이 넉넉하게 되므로 이에 경비가 있는 법이다. 덕을 삼가는 데 먼저 힘쓰면 이에 따라서 스스로 재용이 이르러 오게 된다. 이는 재물에 대한 혈구를 잘한 데에서 얻어지는 효험이다.
先謹乎德은 承上文不可不謹而言이요 德은 即所謂明德이요 有人은 謂得
衆이요 有土는 謂得國이니 有國이면 則不患無財用矣라
먼저 덕을 삼감이란 위 문장의 "삼가지 않을 수 없다"라는 구절을 이어서 말함이다. 덕은 곧 이른바 명덕이다. 有人은 뭇 백성을 얻음이요, 有土는 나라를 얻음이니, 나라가 있으면 財用이 없음을 근심하지 않아도 된다.
장구에서는 ≪성의장≫의 '德潤身'의 德 자에 대해 아무런 해석이 없다가 이의 '先愼乎德'의 德 자에 대해서 특별히 명덕이라 해석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성의란 명명덕의 일이기에 굳이 德 자를 해석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평천하는 신민의 일이므로 이에 특별히 명덕이라 해석하여, 그 근본이 되는 바를 밝힌 것이다.49)
이는 위 ≪先愼節≫에 이어서 아래 ≪外本節≫의 뜻을 일으키고 있다. 呂氏는 본말을 德과 財를 들어 대칭으로 말하였다. 그러나 이는 재용만을 말한 것이므로, 여기에서 말한 덕을 愼德으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로 생각된다.
德者는 本也요 財者는 末也니
덕은 근본이요 재물은 끝이니,
덕을 삼가면 財用이 절로 이르러 오게 된다. 때문에 덕이란 천하 평정의 근본이며, 재용은 반드시 덕을 삼간 데서 연유하니, 재용은 천하 평정의 끝임을 알 수 있다. 근본이란 마땅히 안으로 중시해야 하고, 끝이란 반드시
49) ≪秋淵文集·大學問目≫.
바깥으로 멀리 해야 한다.
本上文而言이라
위 문장에 근본하여 말한 것이다.
≪愼德節≫에서는 財貨의 혈구를 말하였는데, 이 절에서는 재화상에 있어서 혈구를 하지 못하였을 때의 잘못을 말함으로써 위의 有德과 상반되는 말이며, 쟁탈에는 천심의 차이가 있지만 다투는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반드시 강탈에 이르게 된다.
外本內末이면 爭民施奪이니라
근본을 가볍게 여기고 끝을 중시하면, 백성을 다투게 만들어 탈취하는 것을 가르치는 격이다.
만일 임금으로서 근본이 되는 명덕을 밖으로 멀리하여 삼가지 아니하고, 끝이 되는 재물을 안으로 중시하여 백성의 재물을 빼앗으려고 들면, 이는 서로 다투는 기풍으로서 백성을 겁탈로 유도하는 가르침의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백성이 서로 다투게 되면 어떻게 백성을 얻을 수 있겠는가.
人君이 以德爲外하고 以財爲內면 則是爭鬪其民 而施之以劫奪之敎也라 蓋財者는 人之所同欲이니 不能絜矩而欲專之면 則民亦起而爭奪矣라
임금이 덕으로써 바깥을 삼고 재물로써 안을 삼으면, 이는 그 백성을 싸우게 하여 겁탈의 가르침을 베풂이다. 재물이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원하는 바인데, 혈구로써 함께 하지 않고 이를 독차지하려 들면 백성 또한
일어나 재물을 다투게 된다.
백성이란 원래 쟁탈을 벌이려고 하지 않지만, 위정자가 덕을 도외시한 채 가렴주구로써 착취를 일삼으면 백성은 더 한층 이를 본받아 서로 쟁탈을 벌이기에 이르게 된다. 이는 위정자가 그들을 이처럼 만든 것이다.50)
이는 위의 有人·有土와 상반되는 문장이다. 民散은 민심의 분산을 말하는 데, 이 절의 핵심은 위 구절에 있으며 아래 구절은 帶來說이다.
是故로 財聚則民散하고 財散則民聚니라
이런 까닭에 재물이 모이면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흩어지면 백성이 모이게 된다.
그러므로 근본을 바깥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하여, 위에서 재물을 모으면 백성은 반드시 서로 빼앗고 싸우게 되므로, 아래에서 백성들이 흩어지게 되니, 덕을 삼가 아랫사람에게 재산을 나누어 줌으로써 백성이 모두 덕으로 귀의하여 모여들게 하는 것만 같겠는가.
外本內末이라 故 財聚요 爭民施奪이라 故 民散이니 反是면 則有德而有人矣라
근본을 바깥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한 까닭에 재물이 모아지고, 백성을 다투게 하고 강탈의 가르침을 베푼 까닭에 백성이 흩어지게 된다. 이와
50) ≪大全≫, 朱子.
반대로 하면 덕이 있고 백성이 모여들게 된다.
이는 위의 有財·有用과 반대로 言悖·貨悖 두 구절을 말하여 특별히 아래의 두 구절을 일으키고 있다. 위에서 말한 쟁탈이란 백성 스스로가 서로 강탈하는 것을 일컬었지만, 여기에서 말하는 悖出이란 바야흐로 백성이 임금 재물을 강탈하는 것을 일컫는다.
是故로 言悖而出者는 亦悖而入하고 貨悖而入者는 亦悖而出이니라
이런 까닭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또한 그대로 되돌아오고, 부정하게 들어온 재물은 또한 부정하게 나가는 법이다.
위에서 재물이 모이면 아래의 백성은 흩어지게 된다. 백성이 흩어지면 재물 또한 길이 보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임금이 도리에 거슬리는 말을 하면 백성 또한 거슬리는 말을 되돌려주기 마련이다. 하물며 재물이야……. 도리에 벗어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면 백성 또한 도리에 어긋난 행위를 통하여 그 재물을 강탈하기에 이른다. 이는 재물상의 혈구를 하지 못한 데서 빚어진 재화를 말한다.
悖는 逆也라 此는 以言之出入으로 明貨之出入也라 自先謹乎德以下로 至此는 又因財貨하야 以明能絜矩與不能者之得失也라
悖는 거슬린다는 뜻이다. 이는 언어의 들어오고 나가는 것으로써 재물의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밝힘이다. 先愼乎德 구절 이하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재물로 인하여, 혈구를 잘한 자와 잘못한 자의 득실을 밝힌 것이다.
이는 앞의 ≪先愼≫·≪言悖≫ 두 절에 뒤이어서 전체를 일관하여 말하고 있다. ≪文王篇≫에서 언급한 得失 두 글자는 민심의 향배로 말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말한 선과 불선은 임금의 덕성과 정사를 모두 겸해 말한 것으로, "천명은 영원하지 않다[惟命不于常]"라는 점이 모두 여기에 달려 있다. 때문에 두 개의 則(道善則……, 不善則……) 자는 갑자기 문장을 전환시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두 개의 之(……得之, ……失之) 자는 천명을 지칭하는 지시대명사로 쓰인 글자이다. 道(道善則……) 자에 근거해 보면, 이 또한 ≪서경≫의 뜻을 해석하면서, 거듭 앞의 愼德과 "끝을 안으로 한다[內末]"라는 뜻을 결론짓고 있다.
康誥에 曰 惟命은 不于常이라 하니 道善則得之하고 不善則失之矣니라
≪강고≫에 이르기를 "오직 천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니, 선하면 얻고 선하지 못하면 잃음을 말한 것이다.
덕을 삼가면 그와 같이 되고, 끝을 안으로 하면 이와 같이 되어지는 득실의 기틀들이 어쩌면 이처럼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인지……. ≪강고≫에 의하면, "하늘의 명이란 영원히 너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임금이 되어 행하는 바 선하면 천명이 그에게 내려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만일 조금이라도 불선한 일이 있으면 천명을 잃게 된다. 덕을 삼가 재물을 생산하는 것이 선이다. 이로써 백성이 있고 국토가 있어 천명이 이르러 옴을 알 수 있으며, 끝을 안으로 하여 혈구로 하지 못하면 이는 불선이다. 이로써 백성이 흩어지고 재물이 잘못 나가게 되어 마침내는 천명을 잃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천명이란 이처럼 무상한 것으로 보아이른바 "천명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라는 말을 더욱 믿어 의심치 않는다.
道는 言也라 因上文引文王詩之意 而申言之하니 其丁寧反覆之意 益深切矣라
道는 말함이다. 위 문장에서 ≪문왕편≫을 인용했던 뜻으로 인하여 거듭 이를 말하니, 반복하여 간절히 고한 뜻이 더욱 깊고 절실하다.
이는 아래의 ≪舅犯節≫과 아울러 모두 옛 글을 인용하여, 外本內末의 불가함을 밝히고 있다. 楚나라 王孫圉와 晉나라 舅犯은 천하를 평정할 만큼 큰 지략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아니지만, 그들의 말은 금은옥백의 보화를 가벼이 여기고 선을 중시하여 외본내말의 불가함을 밝히는데, 채록할 만한 명언들이다.
楚書에 曰 楚國은 無以爲寶요 惟善을 以爲寶라 하니라
≪楚書≫에 이르기를, "초나라는 보배로 삼을 게 없고, 오직 선한 사람을 보배로 삼는다"라고 하였다.
근본을 바깥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초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옛날 王孫本(초나라 사람. ≪楚語≫에는 王孫圉로 쓰여 있다)이 晉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진나라 趙簡子와의 대화에서 "초나라에서는 흰 구슬을 보배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觀射父·左史(倚相) 등 훌륭한 인재를 보배로 생각한다"라고 하였다. 황금과 구슬 따위는 지엽적인 것이며, 선한 사람은 근본이다. ≪초서≫에는 외본내말의 불가함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뜻이 담겨 있다.
楚書는 楚語라 言不寶金玉 而寶善人也라
≪초서≫는 ≪楚語≫를 말한다. 황금과 구슬을 보배로 생각지 않고 선한 사람을 보배로 생각함을 말한다.
≪楚書≫의 고사에 대해 보완해 보고자 한다. ≪초서≫는 초나라 사관이기록한 策書로서, 楚 昭王 때의 글이다. ≪國語·楚語≫를 살펴보면, 王孫圉(초나라의 대부)가 晉 定公을 맞아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때 趙簡子(趙鞅 진나라 대부)가 옥을 쟁그랑거리면서 물었다. "초나라에도 이 같은 흰 구슬[白珩]이 있는가? 이 같은 보배가 얼마나 있는가?" "초나라에서 보배로 여기는 것은 觀射父이다. 그는 訓辭에 능하여 제후들에게 사신으로 가면 우리임금에게 시비 소리가 없도록 만들어 주었고, 또한 左史 倚相은 訓典에 능통하여 우리 임금을 경계시켜 줌으로써 선왕의 왕업을 잊지 않도록 해주었다. 이들 때문에 우리 임금은 제후들에게 죄를 짓지 않게 되었고, 나라의 백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들은 초나라의 보배이다. 흰 구슬이란 선왕들의 노리개일 뿐, 어떻게 이를 보배라 할 수 있겠는가."51)
이는 舅犯이 秦나라의 사신을 맞이한 公子(晉 文公)에게 다음과 같이 대처하도록 가르쳐준 말이다. 일개 국가의 왕위를 가볍게 여기고 아버지의 초상을 중시한다는 것, 또한 外本內末의 불가함을 잘 이해하고 있는 자이다.
舅犯이 曰 亡人은 無以爲寶요 仁親을 以爲寶라 하니라
51) 같은 책, 三山陳氏·古括鄭氏.
晉 文公의 외삼촌인 子犯이 말하였다. "망명한 사람[晉 文公]은 보배로 삼을 것이 없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배로 삼아야 한다."
外本內末의 불가함을 결코 ≪초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옛날 진 문공의 외삼촌인 子犯이 秦나라의 사신을 맞이한 진 문공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망명하는 그대는 나라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보배로 생각지 말고, 오로지 어버이의 초상에 정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배로 삼아야 한다." 나라를 얻음은 끝이며, 어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근본이다. 이는 진 문공의 외삼촌 자범이 외본내말로써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이익으로 생각하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
舅犯은 晉文公舅狐偃이니 字는 子犯이라 亡人은 文公 時爲公子로 出亡在外也라 仁은 愛也니 事見檀弓하다 此兩節은 又明不外本而內末之意라
舅犯은 진 문공의 외삼촌 狐偃이며, 자는 子犯이다. 亡人이란 문공이 당시 공자의 신분으로서 망명하여 국외에 있었다. 仁은 사랑함이다. 이 일은 ≪禮記·檀弓篇≫에 나타나 있다. 이 2절 또한 근본을 바깥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 또한 이의 고사를 보완하고자 ≪예기·단궁≫을 살펴보기로 한다. 晉 獻公의 초상에 秦 穆公이 사람을 보내 公子 重耳를 조문하고 이어서 말하였다. "내 듣자니, '나라를 잃은 것도 항상 여기(초상 때를 말함)에서 비롯되고, 나라를 얻을 수 있는 것도 항상 여기에서 비롯된다'라고 한다. 조카(孺子, 重耳)는 이 점을 잘 생각해보도록 하라."
이에 진 문공의 외삼촌인 子犯이 그에게 대답할 바를 일러주었다. "孺子(조카)는 이를 사양해야 할 것이다. 부모를 여읜 사람은 보배를 삼을 것이 없고,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모의 초상을 잘 치르는 일을 보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아버지의 주검을 앞에 두고, 어떻게 이처럼 해괴망측 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이 초상으로 인하여 왕위를 얻고자 하는 이익의 기회로 삼는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뭐라 말하겠는가!"
여기에서는 좋아해야 할 대신과 미워해야 할 대신을 인용하여, 아래의 ≪惟仁≫ ≪見賢≫ ≪好人≫ 3절의 내용 가운데 임금이란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그 근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또한 여러 가지 혈구 가운데에서 보다 비중이 큰 것을 들어 말하였다. 一介臣이란 하나의 가상적인 인물을 등장시켜 말한 것이며, 斷斷兮 또한 일찍이 두 사람의 전형적 표본을 포괄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인재를 시기하여 미워하는[媢疾]……" 이하 한 문장은 위에서 언급한 "마음이 아름다운 신하"와 반대되는 글귀로서, 원래 秦 穆公의 의중에 없는 傍人이다. 斷斷은 외견상 나타난 것으로 말하여, 겉으로 꾸밈이 없는 그것은 誠이며, 자질구레하게 지엽적인 일이 없는 그것은 一이다. "다른 기예가 없다[無他技]"라는 것은 재주를 드러내 보인다거나 자신을 과시하지 않음을 말하니, 이는 그의 斷斷함을 표현한 말이며, 其心休休란 그 마음이 담담하여 사사로운 욕심이 없음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물을 다 포용할 수 있으며, 지극한 선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천하의 많은 아름다움을 모두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래의 문장에서 如有容 구절을 잇대어 쓰게 된 것이다. 有技는 재예에, 彦聖은 덕성에 속한다. 誠 자는 광의로 말하면 모든 선의 극치를 말하지만, 협의로 말하면 밝음과 통달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그리고 寔能
容之와 其如有容 구절의 뜻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以能(이로써 능히 …… 할 수 있다)이란 이 때문에 그처럼 자손과 백성을 보호할 수 있다는 뜻으로, 여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자손은 國統에 관계되며, 백성이란 나라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자손과 백성을 보호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으로, 대신으로서 나라에 이로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不啻口出이란 타인이 지닌 재덕을 자신이 소유한 것처럼 중시함이며, "違之俾不通"이란 거듭 시기하고 미워함이다. 仇滄柱의 말에 의하면, ≪진서≫에서 말한 뜻은 蹇叔(주나라 사람)을 가리킨 것인데, 傳文은 평천하라는 대의명제하에서 재상을 삼가 잘 가려야 한다는 뜻으로 전용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 伊尹과 周公 같은 인품을 지닌 사람으로서 후세의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줄 만한 인재를 말하는 것이지, 한낱 패 업을 이룰 수 있는 신하를 말한 데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秦誓에 曰 若有一个臣이 斷斷兮요 無他技나 其心이 休休焉한대 其如有容焉이라 人之有技를 若己有之하며 人之彦聖을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이면 寔能容之라 以能保我子孫黎民이니 尙亦有利哉인저 人之有技를 媢疾以惡之하며 人之彦聖을 而違之하야 俾不通이면 寔不能容이라 以不能保我子孫黎民이니 亦曰殆哉인저
≪진서≫에 말하였다. "만일 어느 한 신하가 있는데, 겉보기에 그저 진실하고 소박할 뿐 다른 재주를 찾아볼 수 없지만, 그 마음만은 그지없이 아름다워 남을 포용할 만한 아량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남이 가지고 있는 재주를 마치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아름답고 성스러운 덕을 둔 사람을 마음으로 좋아하여 한낱 칭찬하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면, 이는 실제로 남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자손과 모든 백성을 보전할 것이니, 오히려 나라에도 이로움이 있을 것이다. 남이 가진 재주를 시기하여
미워하며, 아름답고 성스러운 덕을 가진 사람을 가로막아, 위로 임금에게 통하지 못하게 하면, 그런 사람은 남을 용납할 수 없다. 우리 자손과 모든 백성을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나라에도 또한 위태로움이 있을 것이다."
혈구의 도는 어찌 재물의 이익 추구에만 그치겠는가. 인재를 임용함에 있어서도 더욱 구차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서경≫의 ≪주서·진서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나에게 어떤 한 신하가 있는데, 외견상으로 살펴보면 그저 진실하고 믿음직하고 한결같이 변함없을 뿐, 아무런 재능이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의 마음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욕심이 없이 담담하며, 또한 순수하고 선하여 그의 도량은 남들을 용납해줄 듯이 보였다. 남들에게 재예가 있으면 마치 자기가 가지고 있기나 한 것처럼, 반드시 그의 장점을 다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고, 슬기로운 덕을 지닌 자를 보면 말을 잘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진정 마음속 깊이 그를 좋아하였다. 그는 참으로 재예가 있는 자와 슬기로운 자를 용납해줄 수 있다. 그와 같은 신하는 반드시 선한 사람을 이끌어 들여, 나의 자손을 보호하여 오랜 부귀를 향유토록 할 것이며, 나의 백성으로 하여금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도록 할 것이니, 그는 나라에 유익한 인물이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어느 신하가 있는데, 그는 전혀 믿음직하다거나 한결같은 마음, 그리고 넓은 아량이 없어, 재예가 있는 자를 보면 시기하고증오하고, 슬기로운 자를 보면 그의 길을 방해하고 억눌러 벼슬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니, 진정 천하에 재예가 있는 이와 덕이 있는 자를 용납하지 못할 인물이다. 장차 선한 사람을 해치고 어질지 못한 자를 등용하여 반드시 나의 자손과 백성을 보존치 못할 것이니, 나라를 위태롭게 할 자가 아니겠는가."
≪진서≫는 임금이 하나의 재상을 가려 뽑는 데에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지적해주는 말이라 하겠다.
秦誓는 周書라 斷斷은 誠一之貌요 彦은 美士也요 聖은 通明也요 尙은 庶幾也요 媢는 忌也요 違는 拂戾也요 殆는 危也라
≪진서≫는 ≪주서≫를 말한다. 斷斷은 진실하고 한결같은 모양, 彦은 아름다운 선비, 聖은 통달하고 명철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尙은 거의 (……에 가깝게), 媢는 시기, 違는 어긋나게 함, 殆는 위태로움을 뜻하는 말이다.
≪좌전≫ 僖公 32년조를 살펴보면, 杞子가 鄭나라에서 秦나라를 찾아가 말하였다. "정나라 사람들이 나로 하여금 북문을 지키도록 하였으니, 만일 보이지 않게 군사를 보내오면 정나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秦 穆公이 이 사실을 蹇叔에게 묻자, 건숙이 이를 불가하다고 여겨 진 목공에게 이를 거절하도록 했지만 진 목공은 이에 孟明을 보내 정나라를 정벌토록 하였다. 이에 晉 襄公은 군사를 거느리고서 진나라 군사를 맞아 殽 땅에서 패배시켰고 진나라의 세 장수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진 목공은 이를 후회하고서 많은 신하들에게 고하였는데, 사관이 이를 기록하여 ≪秦誓≫를 만들게 되었다.52)
어진 사람[仁人]이란 평천하를 주관하는 자를 말한다.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부정을 바로잡아야 할 사명이 있기에 정직한 인재를 등용하여 부정
52) ≪備旨≫.
한 자를 교화시키며, 이 세상에는 용납할 수 없는 간악한 인물이 있기에 그를 추방하고 유배하여 멀리 끊어 버리는 것이다. 放이란 어느 한 곳에 안치함이며, 流란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하도록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것이다. 此謂 구절은 불인자를 미워함으로써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게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소인을 멀리 추방하는 것은 군자를 벼슬에 나오도록 하는 것이며, 소인을 끊어 버리는 것은 군자를 편안하게 하기 위함이다. 能愛·能惡 두 구절은 대등한 관계로 쓰면서도, 그 중 한 부분에 중점을 두어 오묘한 뜻을 표현하고 있다.
唯仁人이야 放流之하야 迸諸四夷하야 不與同中國하나니 此謂唯仁人이야 爲能愛人하며 能惡人이니라
오직 어진 사람만이 악한 자를 멀리 추방하여 사방 오랑캐의 땅으로 내쫓아 나라에서 함께 살지 못하도록 하니, 이것을 일러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라고 한다.
어진 인재를 포용하는 나라에 유익한 인물은 마땅히 좋아하여야 할 사람이며, 어진 자를 훼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자는 마땅히 미워해야 할 사람이다. 그러나 선한 자를 시기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어진 이의 혜택을 입지 못하도록 하고, 후세에 재화를 끼치는 불선한 자를 깊이 미워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어진 사람뿐이다. 이에 불선한 자를 추방하되 또한 오랑캐 나라의 밖, 저 멀리 추방하여 중국 사람들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는 중국 가까이에 추방하면 혹시라도 다시 그의 해가 미칠까를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또한 시기하는 자에게 엄한 벌을 내리는 것이 도리어 천하 후세에 은혜를 끼쳐 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사랑할 줄 알고 사람을 미워할 줄도 아는 것이다." 이것이 곧 혈구의 도를
능히 행한 자의 일이다.
迸은 猶逐也라 言有此媢疾之人이 妨賢而病國이면 則仁人이 必深惡而痛絶之하되 以其至公無私라 故 能得好惡之正 如此也라
迸은 쫓다는 뜻이다. 시기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어진 사람을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하면, 어진 사람은 반드시 그를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끊되, 지극히 공정히 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는 까닭에,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이와 같이 바르게 할 수 있었음을 말한다.
네 곳의 不能(……擧, ……先, ……退, ……遠)은 앞 ≪唯仁節≫의 能愛人·能惡
人이라는 能 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懈怠와 忽略을 命(慢)이라 하며, 優柔와 寬縱을 過라 한다. 인재를 등용하는 일을 게을리하는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혹 벼슬이라 하는 지위[名器]란 신중한 것이어서 시간을 끌면서 멈칫거린다거나,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생각을 지니고 있어 이를 실행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를 가까이 두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거나, 승진의 자격에 구애받는다거나, 후인을 등용하기 위해 잠시 남겨 두는 따위이다. 그리고 멀리 추방하지 못하는 데에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혹 임금의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후하여 일을 다그치지 못하고 어물쩍 용납한다거나, 그 어느 누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로 인해 의법조치하지 못한다거나, 혹 이미 붕 당이 형성되어 그를 처벌키 어렵다거나, 아니면 약간의 관직 삭탈을 가하여 소극적인 방법으로 무마해 버리는 따위를 말한다.
見賢而不能擧하며 擧而不能先이 命(慢)也요 見不善而不能退하며 退而不能遠이 過也니라
어진 사람을 보고서도 등용하지 않으며, 등용하고서도 먼저 하지 않는 것은 태만함이요, 착하지 않은 사람을 보고서도 물리치지 못하며, 물리치면서도 멀리하지 않는 것은 잘못이다.
어질지 못하여 좋아해야 할 바와 미워해야 할 바를 모르는 임금은 좋아해야 할 현인을 보고서도 천거하지 못하고, 설령 천거한다 해도 우선적으로 등용하지 않음은, 어진 사람을 경홀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했기 때문이니, 이를 태만이라 한다. 또한 불선하여 미워해야 할 자를 보고서도 물리치지 않고, 설령 물리칠지라도 먼 곳으로 추방하지 못한 것은 우유부단한 마음으로써 착하지 못한 자를 대했기 때문이니, 이를 잘못이라고 한다. 이처럼 좋아하는 것인지 미워하는 것인지 불투명한 마음은 또렷이 공정함도 아니요 또한 사사로움도 아닌, 어정쩡한 중간 상태로서, 혈구의 도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命은 鄭氏云 當作慢이라 하고 程子云 當作怠라 하니 未詳孰是라 若此者는 知所愛惡矣로되 而未能盡愛惡之道니 蓋君子而未仁者也라
命 자에 대해서 鄭氏(鄭玄)는 "마땅히 慢 자로 바꿔 써야 한다" 하고, 程子는 "마땅히 怠 자로 바꿔 써야 한다"라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자상하지 못하다. 이처럼 어정쩡하게 하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해야 할 바를 알면서도 사랑과 미워함의 도를 다하지 못함이니, 이는 군자이기는 하지만 어질지 못한 자이다.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인간의 감정인데 이를 본성이라 말한 것은, 그 감정의 근원을 추구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백성의 감정을 어기는 것이
곧 재앙이며, 災必逮夫身의 身 자는 자손과 백성의 대칭으로, 그 참화가 더욱 혹독함을 말해 주고 있다. 위의 ≪秦誓≫·≪唯仁≫·≪見賢≫ 등 네 절은 인재등용으로써 好惡公私의 극치를 거듭 말하여 仁人이 어떻다는 점을 제시해 주기는 하였지만 이로 끝맺지 않고, 여기에서 또 다시 "군자이기는 하지만 어진 자는 되지 못한다"라는 점을 말하여, 아직 어질지 못한 자에 대해서 깊이 있게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혈구란 恕의 일이요, 恕는 仁을 행하는 바이기에 여기에서 이처럼 仁을 말한 것이다.
好人之所惡하며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이라 菑必逮夫身이니라
사람들이 싫어한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이 좋아한 것을 싫어함을 일러 사람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라 말하니, 반드시 그의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어진 이를 우선적으로 등용하지 않고, 어질지 못한 자를 멀리 추방하지 못한 자는, 그래도 좋아해야 할 것과 미워해야 할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어진 이를 훼담한 자는 많은 사람들이 미워할 수밖에 없는 자이므로, 그들과 함께 미워해야 할 사람임에도 도리어 그를 좋아한다거나, 어진 자를 용납하는 자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자이므로, 그들과 함께 좋아해야 할 자임에도 도리어 그를 미워한다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인간의 떳떳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다. 때문에 인심과 천명이 떠나게 되며, 어려움이 그의 몸에 닥치게 될 것이다. 이는 혈구를 행하지 못한 자를 경계한 말이다.
拂은 逆也라 好善而惡惡은 人之性也니 至於拂人之性이면 則不仁之甚者也라 自秦誓至此는 又皆以申言好惡公私之極하야 以明上文所引 南山有臺
節南山之意라
拂은 거스름이다.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사람의 본성인데, 사람의 본성을 어기기에 이르면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이다. ≪진서≫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또한 거듭 好惡에 대한 공사의 극치를 말하면서, 위에서 인용한 ≪남산유대≫와 ≪절남산≫ 2절의 뜻을 밝힌 것이다.
是故 두 글자는 樂只 이하의 문장에서 언급된 두 차례의 득실을 총괄하여 말하고 있다. ≪장구집주≫에 의하면 ≪大道節≫의 修己治人은 혈구의 大道라 하였는데, 이는 사람을 다스린다는 것은 몸을 닦는 데에서 떠날 수 없음을 말한다. 忠信·驕泰는 모두 내면의 마음에 관한 것이기에 ≪장구집주≫에서 "……말하여 나아갈수록 더욱 간절하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忠信이란 참으로 좋아하고 미워하여 마음을 속이지 않음이니, 이는 마땅히 좋아하고 미워해야 할 도리에 부합되는 일이며, 驕泰란 공정하게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른 마음에 가림이 생기게 되어, 마땅히 좋아하고 미워해야 할 도리를 어기는 일이므로, 득실의 구분이 여기에서 나누어지게 된다.
是故로 君子 有大道하니 必忠信以得之하고 驕泰以失之니라
이런 까닭에 군자에게는 큰 도가 있으니, 반드시 진실함과 믿음으로써 얻고, 교만함과 방자함으로써 잃게 된다.
어진 사람은 저처럼 혈구를 잘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그처럼 하지 못함으로써 득실의 계기가 어쩌면 그렇게도 다른 것인지……. 그러므로 군자가 자신의 몸을 닦아 사람을 다스리는 큰 도리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외부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요, 또한 억지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마음에 근본하고 있을 뿐이다. 반드시 충성과 믿음으로 하면 천만인의 마음이 바로 나의 마음이요, 나의 마음이 곧 천만인의 마음이다. 이 마음에 따라서 그들과 더불어 좋아하고 미워하면 백성이 원하는 바를 함께하여 평천하의 큰 도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교만과 태만으로써 사심이 가득하여, 나의 몸에 피아의 差別相이 생기게 된다. 이는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백성과 함께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며, 평천하의 큰 도리를 이로 인해서 잃게 된다. 이로 보면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군자는 격물치지, 성의정심으로 忠·信에 힘써 혈구의 도를 지극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君子는 以位言之요 道는 謂居其位而修己治人之術이라 發己自盡이 爲忠이요 循物無違 謂信이라 驕者는 矜高요 泰者는 侈肆라 此因上所引文王康誥之意而言이라 章內에 三言得失而語益加切하니 蓋至此而天理存亡之幾 決矣라
군자는 벼슬의 지위로써 말함이요, 道는 그 지위에 있으면서 몸을 닦고 사람을 다스리는 법을 말한다. 나의 마음에서 발하여 스스로 다함을 忠이라 하고, 物의 이치를 따라서 어김이 없음을 信이라 말한다. 驕는 矜高, 泰는 사치를 말한다. 이는 위 문장에서 인용한 ≪문왕≫ ≪강고≫ 2절의 뜻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治平章≫ 안에서 세 차례 득실을 말하였는데, 말할수록 더욱 더 절실하다. 그것은 이에 이르러서 천리를 보존하느냐 잃느냐의 기틀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치평장≫ 내에서 세 차례 득실을 말하였는데, 맨 처음 得衆 失衆은 민심의 향배로, 두 번째 善則得 不善則失은 일신상의 선악으로, 세 번째 忠信驕泰는 내면 심리상의 문제이다. 천리의 존망이 여기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이는 외면에서부터 내면으로 이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역으로 말하면 내면의 심리, 천리의 존망이 일신상의 선악으로 나타나고,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신상의 선악이 민심의 향배에 깊이 관련지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충신과 교태는 치란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이의 첫 구절은 가운데 4구절(生之……者舒)을 모두 포괄하여 大道에 의미를 두고서 쓴 것이며, 끝 구절은 그 공효를 가리키고 있다. 大道란 聚斂이라 하는 小術의 대칭으로 쓰인 말이다. 이는 앞 ≪大道節≫의 "군자의 大道"
가운데 한 부분에 불과하다. 生財의 生 자는 生之者·食之者·爲之者·用之者
를 모두 포괄하여 말한 것이며, 생산자가 많고 일하기를 빨리 한다는 것은 근본(농업)에 힘씀이니, 그 근본적인 財源을 넓혀가는 것이 재물을 생산할 수 있는 도이며, 먹는 자가 적고 쓰기를 늦춘다는 것은 비용을 절약함이니, 이는 낭비의 流弊를 예방하려는 것으로 이 또한 재물을 생산하는 도에 해당되는 일이다. 恒足이란 常變豊凶을 모두 겸하여 말한다.
生財 有大道하니 生之者 衆하고 食之者 寡하며 爲之者 疾하고 用之者 舒하면 則財恒足矣리라
재물을 생산하는 데에는 큰 도가 있으니, 생산하는 사람이 많고, 소비하는 사람이 적으며, 일하는 것을 부지런히 하고, 쓰는 것을 늦추면, 재물이 항상 풍족할 것이다.
덕이란 근본이요 재물은 끝이라 하지만, 재물 또한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서 절대 필요로 하는 것이므로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된다. 다만 공명정대한 도리에 따라서 재물을 생산하여야 하며, 사사로운 마음과 얄팍한
지혜로써 백성의 재물을 교묘하게 착취하는 술수를 부려서는 안 된다. 재물이란 생산자가 많음에 따라서 넉넉하게 되므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이 없으면 생산자가 많을 것이다. 재물이란 소비하면 없어지는 것이므로 조정에서 헛된 녹을 먹는 자가 적어야 할 것이다. 또한 농사철을 어기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할 수 있으며, 수입을 계산하여 지출을 하면 쓰임새가 늦춰질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끊임없이 수입이 확대되는 반면 지출이 절제될 것이다. 따라서 자연히 아래로는 백성이, 위로는 위정자 모두가 항상 여유를 가지게 됨으로써, 백성이 풍요롭고 임금 또한 풍요롭게 되어 국가 경제에 항상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큰 도리에 따라서 경제력을 향상시키는 공효가 이와 같은데, 굳이 外本內末의 弊政을 결행하면서까지 재물을 축적할 필요가 있겠는가.
呂氏曰 國無遊民이면 則生者 衆矣요 朝無幸位면 則食者 寡矣요 不奪農時면 則爲之 疾矣요 量入爲出이면 則用之 舒矣라 愚按 此因有土有財而言하야 以明足國之道 在乎務本而節用이요 非必外本內末而後 財可聚也라 自此以至終篇이 皆一意也라
呂氏(呂大臨)가 말하였다. "나라에 노는 백성이 없으면 생산하는 자가 많고, 조정에 요행으로 벼슬하는 자가 없으면 먹는 자가 적고, 농사철을 빼앗지 않으면 할 일을 빠르게 하고,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면 쓰임이 늦춰지게 된다." 내가 살펴보니, 이는 "有土·有財"에 이어서 말한 것이다. 이로써 나라를 풍요롭게 하는 도는 근본(농업)에 힘쓰고 쓰기를 절약하는 데 있으며, 반드시 근본을 바깥으로 하고 끝을 안으로 한 뒤에야 재물이 모아지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이로부터 이 책의 끝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 가지 뜻이다.
어진이란 愼德과 忠信의 大道로써 재물을 생산하여, 취렴하지 않은 자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재산을 흩어서 몸을 일으킨 자로서, 백성을 얻을 수 있는 도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천하 백성들이 그를 사랑하고 추대하여, 그의 몸이 높아지고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재산을 흩은 데에서 비롯된 까닭에 以財發身이라 하며, 아래의 구절은 별 의미가 없는 帶來說이다.
仁者는 以財發身하고 不仁者는 以身發財니라
어진 사람은 재물로써 몸을 일으키고, 어질지 못한 사람은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킨다.
어진 사람만이 재물을 생산하는 데 도가 있음을 알아서 소유물을 사사로 이 하지 않기에 스스로 사람이 모여들고, 따라서 그 자신이 추앙받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재물로써 몸을 일으켜 세움이다. 그러나 어질지 못한 자는 큰 도리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재물을 모으는 데에 힘씀으로써 자신의 위태로움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는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켜 세움이다.
發은 猶起也라 仁者는 散財以得民하고 不仁者는 亡身以殖貨라
發은 일으킴이라는 뜻과 같다. 어진 자는 재물을 흩어서 민심을 얻고, 어질지 못한 자는 몸을 잃어 가면서까지 재물을 불린다.
이 절은 위에서 말한 以財發身 구절의 뜻을 거듭 말한 것으로, 어진 자는 재산을 흩어도 결국은 재산을 잃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다. 上好仁 구절에는
혈구의 뜻이 포괄되어 있으며, 好義란 백성의 마음이 너그러움을 말하며, '일을 끝맺는다'라는 것은 대체로 공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은 아니다. 단지 府庫의 재물을 잘 지킬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 쓰인 글이므로, 아래 세 곳의 未有 구절과 연계지어 전체적으로 음미해 보아야 한다.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니 未有好義요 其事不終者也며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니라
위에서 어짊을 좋아하는데, 아래에서 의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으니, 백성이 의를 좋아하면 일마다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창고의 재물이 그의 재물이 아닌 경우가 없을 것이다.
몸으로써 재물을 일으켜 세웠을지라도 몸을 잃으면 재물 또한 잃는 법이다. 그러나 재물로써 몸을 일으켜 세운 자는 일신이 영화롭고 재물 또한 풍요롭다. 이것이 곧 두 가지 모두 얻을 수 있는 도요, 위아래 사람이 모두 감응할 수 있는 필연의 이치이다. 윗사람이 근본을 높이고 비용을 절약하여, 이로써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지 않고 좋아하는 바 仁에 있으면 아랫사람은 정성과 충성을 다하여 의리를 좋아함으로써 윗사람에게 보답하고자 하지 않을 자 없을 것이며, 아래에서 의리를 좋아하면 임금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여 반드시 힘을 다하여 성취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의리를 좋아하면 윗사람의 일을 따라하지 않을 자가 없다. 따라서 의리를 좋아하면 임금의 재물을 마치 자신의 재물처럼 보호하고 지키게 된다. 때문에 창고의 재물이 부정한 방법으로 돌아온다거나, 또는 잘못 지출되어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는 우환이 없을 것이다. 이로 보면 윗사람이 어찌 仁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며, 이익을 독차지할 수 있겠는가.
上好仁以愛其下면 則下好義以忠其上이니 所以事必有終而府庫之財 無悖出之患也라
윗사람이 인을 좋아하여 아랫사람을 사랑하면 아래에서는 의리를 좋아하여 윗사람에게 충성을 하게 되므로, 반드시 일마다 끝을 맺을 수 있고, 창고의 재물이 잘못 나가는 우환이 없을 것이다.
≪仁者≫·≪未有≫ 2절은 의리로써 이익을 삼아야 함을 밝히고 있다. 이는 임금이 재물을 취렴하기 위하여 소인을 부림으로써 나라를 그르치게 될까를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인용하여 증명한 것이다. 선비[士]는 飾車와 騈馬를 사용하므로, 대부 이상이어야 네 마리의 말을 탈 수 있다. 伐氷이란 斬氷을 말한다. ≪주례≫에 의하면 "凌人이란 얼음을 관장하는 관리인데, 해마다 12월이 되면 얼음을 켜서 얼음을 저장할 창고, 凌을 세 곳에 설치하여 저장하였다가 봄이 되면 처음으로 鑑을 다스린다"라고 한다. 凌이란 氷室을 말하며, 鑑이란 얼음을 담는 그릇이다. 제사에는 氷鑑을 제공하고, 빈객에게는 얼음을 제공하고, 큰 초상이 나면 夷槃氷을 제공한다고 한다. 王氏의 말에 의하면, 伐氷의 伐 자를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한다. 국록을 먹는 집안은 노인과 그리고 질병 시까지 모두 얼음을 내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내려준다고 말해야지, 伐이라 말할 수 없다. 여기에서 말한 伐이란 상례·제례의 俎豆에 사용할 때에는 스스로 그 자신이 凌人을 명할 수 있음을 말한다. 맹헌자는 百乘을 소유한 집안이다. 백승은 경대부로서 큰 采地(식읍)를 소유한 자이다. 采란 관직[官]을 말하는데, 관직으로 인해서 식읍을 소유하게 된 까닭에 이를 采地라 말한다. 이 세 단락은 모두 대등한 관계로 열거된 것처럼 보이지만, 문장의 맥락으로 보아 취렴하는 신하를
길러서는 안 된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與其……盜臣" 두 구절을 살펴보면 간절한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아 이러한 뜻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此謂란 도리 측면에서 논했을 뿐이다. 맹헌자의 본뜻은 집안을 소유한 대부를 대상으로 말한 것이지만, 전문에서는 국가를 소유한 임금을 대상으로 전용해 말하였으니, 이는 집안과 나라가 하나임을 보여준 것이다. 위 ≪未有節≫ 好義의 義 자는 백성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만, 이의 "의리로써 이로움을 삼는다"라는 義란 임금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孟獻子曰 畜馬乘은 不察於雞豚하고 伐冰之家는 不畜牛羊하고 百乘之家는 不畜聚斂之臣하나니 與其有聚斂之臣으론 寧有盜臣이라 하니 此謂國은 不以利爲利요 以義爲利也니라
맹헌자가 말하기를 "네 마리 말을 기르는 대부는 닭과 돼지를 보살피지 아니하고, 얼음을 켜는 경대부 이상의 집에서는 소와 양을 기르지 아니하며, 백승의 식읍을 소유한 집안에서는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신하를 길러서는 안 된다. 세금을 많이 거둬들이는 신하를 둘 바에는 차라리 나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신하를 두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이를 일러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리로써 이로움을 삼지 아니하고, 의리로써 이로움을 삼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일찍이 맹헌자는 이익을 독차지해서는 안 된다는 데 대해 말한 바 있다. 대부의 富의 척도를 물을 때면 으레 말의 수효로 대답하는 법이다. 네 마리 말을 기르는 자의 신분은 대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닭과 돼지를 길러 자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아랫사람들과 다투어 윗사람의 체모를 잃는다는 것은 비루한 일로, 대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대부 이상의 관리는 초상과 제사 때에 얼음을 사용하므로 이를 伐氷家라 말한다. 그들에게는 후한 국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소와 양을 길러 이익을 도모한다면, 그보다 더 큰 욕심은 없을 것이다. 百乘이란 卿의 집안이다. 그 또한 네 마리의 말을 기르는 대부와 벌빙가의 卿과 견줄 수 없으리만큼 높은 신분에 있는 자이다. 만일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신하가 있으면, 백성의 재물을 빼앗아 윗사람을 받들고자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니, 어떻게 이를 옳은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는 신하를 두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기의 재물을 도적질하는 신하를 두어야 할 것이다. 도적질을 하는 신하는 주인의 재물을 도적질하겠지만, 백성의 재물을 착취하지는 않으므로, 그 폐단과 피해는 그래도 조금은 나은 편이다. 맹헌자가 이처럼 말한 것은 한 집안을 소유한 대부들을 훈계한 데에 그치지 않고, 국가를 소유한 군주는 재리를 독차지하여 재리를 이로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그 이익을 백성들에게 공정하게 나누어주는 의리로써 이익을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孟獻子는 魯之賢大夫니 仲孫蔑也라 畜馬乘은 士初試爲大夫者也요 伐冰之家는 卿大夫以上이니 喪祭用冰者也요 百乘之家는 有采地者也라 君子는 寧亡己之財而不忍傷民之力이라 故寧有盜臣而不畜聚斂之臣이니 此謂以下는 釋獻子之言也라
맹헌자는 노나라의 어진 대부 仲孫蔑이다. 畜馬乘이란 선비가 처음 급제 [初試]하여 대부가 된 자이며, 伐氷之家란 경대부 이상으로 초상과 제사 때 얼음을 사용하는 자이다. 百乘之家는 采地를 소유한 자이다. 군자는 차라리 자신의 재물을 잃을지언정 차마 백성의 재물을 손상시킬 수 없으므로, 차라리 도적질하는 신하를 둘지언정 취렴하는 신하를 기르지 않는 것
이다. 此謂 이하의 구절은 맹헌자의 말을 해석한 것이다.
나라의 녹을 먹으면서 백성과 재물을 다투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때문에 公儀子는 후원의 해바라기를 뽑아냈고, 臧文仲의 첩이 갯버들로 돗자리를 짜는 것을 보고서, 공자는 이를 不仁한 일이라고 배척하였으며, 冉求가 季氏를 위해서 세금을 많이 거두자, 공자는 북을 울려 그의 죄를 성토하였다.53) 이는 財利上의 혈구로써 이익을 독차지하지 않고, 공정한 의리로써 모두가 함께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위의 ≪孟獻節≫에 이어서 취렴하는 신하를 길렀을 때 일어나는 禍에 대한 반증이다. 이에 국가의 首長을 직접적으로 말한 것은 백성의 부모이자 만백성이 모두 우러러보고 있다는 책임을 나타낸 것이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재물과 비용에 힘쓴다는 것은 혈구에 힘쓰지 않음을 말한다. 必自小人의 自 자는 소인이 임금의 마음을 사치·방종 등으로 유도한 데 대한 꾸짖음이며, 使爲國家의 使 자는 임금이 그에게 큰 권력을 빌려준 데 대해 꾸짖고 있다. 그리고 彼爲善之라 하여 임금에게 彼 자를 쓰게 된 것은 그를 도외시하는 말이며, 之 자는 소인을 가리킨 것이다. 이로 보면 彼爲善之의 善之란 소인의 능력을 가상히 여기는 말이니, 소인을 훌륭하다고 잘못 생각하여 그를 부리는 것을 말하며, 天災가 이른다는 것은 天心이 떠나감이요, 人災(人害)가 이른다는 것은 민심의 떠남을 말하며, 선한 사람[善者]이란 어려운 일을 풀어주고 혼란을 다스려 주는 군자를 말한다. 그러나 정작 소인이 큰 혼란을 야기한 이후에는 이를 어찌할 수 없기에 치유할
53) ≪大學或問≫
방법이 없다. 여기에서 말한 재리는 모두 이해의 측면에서 말한다. 의리를 숭상하고 이익을 배제하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다 함을 말한다.
長國家而務財用者는 必自小人矣니 彼爲善之小人之使爲國家면 菑害 並至라 雖有善者나 亦無如之何矣니 此謂國은 不以利爲利요 以義爲利也니라
국가의 우두머리로서 재물을 모으는 데에 힘쓰는 것은, 반드시 소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소인을 부려 나라를 다스리면 天災(흉년, 홍수, 한발 따위) 와 人害(도적, 병란 따위)가 한꺼번에 닥치게 된다. 이때는 비록 선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또한 어찌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재리로써 이로움을 삼지 않고, 의리로써 이로움을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재리 그 자체를 이로움으로 생각하는 것을 과연 참다운 이익이라 할 수 있을까? 국가 원수인 군주로서 재물에 힘쓰는 자는, 그 모든 허물이다 군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소인에 의해 유도된 것이다. 임금이 이를 살피지 못하고서 도리어 그를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국가의 중임을 맡긴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 같은 사람은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려준 것이며, 백성이 지극히 염원하는 것임을 알지 못한 자이다. 만일 소인이 국가를 다스리되 오로지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것으로 일을 삼는다면, 아래로는 민심을 잃게 되고 위로는 하늘의 노여움을 사게 되므로, 그 사태 의 추이는 반드시 천지의 재앙과 인간의 폐해가 일시에 이르러 오게 된다. 이럴 때에는 비록 군자를 등용하여 이를 막으려 해도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이내 그 재앙을 구제할 수 없으니, 선한 사람이 있을지라도 또한 이를 어찌할 수 있겠는가. 막상 재리를 구하려다가 얻지 못하고, 도리어 이와 같은 해가 뒤따르게 된다. 국가 원수는 소인배들이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여 얻은 재리를 이익으로 생각하지 말고, 반드시 의리의 편안한 바로 이익
을 삼아야 함을 말한다. 이익을 독차지하지 않고서, 백성과 더불어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함께 하면 혈구의 도를 얻을 수 있고, 효도·공경·사랑이라는 본분상의 원하는 바를 제각기 이룰 수 있다. 이는 이른바 "천하를 평정함이 그 나라를 다스림에 있다"라는 것이다.
彼爲善之 此句上下에 疑有闕文誤字라 自는 由也니 言由小人導之也라 此一節은 深明以利爲利之害하야 而重言以結之니 其丁寧之意 切矣라
彼爲善之라는 이 구절의 위아래에 빠진 문장이 있거나, 아니면 오자가 있을 것으로 의심된다. 自는 말미암음이니, 소인으로 말미암아 유도됨을 말한다. 이 한 구절은 재리로써 이익을 삼은 데서 일어나는 폐해를 깊이 밝히고, 거듭 이를 말하여 끝맺었으니, 그 부탁의 뜻이 간절하다.
* * *
右는 傳之十章이니 釋治國平天下니라 오른편은 전문의 열 번째 장이니, 나라를 다스림과 천하를 평정하는 데 대한 해석이다.
此章之義는 務在與民同好惡而不專其利니 皆推廣絜矩之意也라 能如是면 則親賢樂利 各得其所而天下平矣라 이 장의 뜻은 백성으로 더불어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함께 하여, 그 이익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이 모두가 혈구의 뜻을 미루어 넓혀감이다. 능히 이와 같이 하면 親·賢·樂·利(親其親, 賢其賢, 樂其樂, 利其利의 준말. 傳 제3장 참조)로써 제각기 제자리를 얻게 되어 천하가 평정될 것이다.
凡傳十章에 前四章은 統論綱領旨趣요 後六章은 細論條目工夫라 其第五章은 乃明善之要요 第六章은 乃誠身之本이니 在初學에 尤爲當務之急이라 讀者 不可以其近而忽之也니라
전문은 모두 10장인데, 앞의 4장(제1~4장)은 삼강령의 취지를 종합하여 논하였고, 뒤의 6장(제5~10장)은 팔조목의 공부를 자세히 논술한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5장 ≪격물치지장≫은 선을 밝히는 要諦이며, 제6장 ≪성의장≫은 몸을 진실하게 하는 근본이므로,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는 더욱 힘써야 할 곳들이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그 말이 비근하다고 하여 이를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대학≫ 전체를 살펴보면 好惡에 대해 논급한 바 많다. ≪성의장≫에서는 "선은 어여쁜 여인을 사랑하듯 좋아하고 악은 악취를 싫어하듯 미워한다[如好好色, 如惡惡臭]"라 하였고, ≪제가장≫에서는 "좋아하면서도 그의 잘못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아름다움을 알아야 한다[好而知其惡, 惡而知其美]", "그 명령하는 말이 그의 좋아하는 마음에 반대되면……[其所令, 反其所好]"이라 하였고, ≪평천하장≫에서도 "백성이 좋아하는 바와 싫어하는 바를 함께 하며……", "사람이 싫어하는 바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바를 싫어하면……"이라 하여, 여러 차례 거듭 논급하고 있다. 이는 결국 인류가 생활하는 사회란 선과 악이라 하는 이 두 가지의 도리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반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격물치지의 초기 단계에서는 善惡의 好惡 두 사이를 명백히 알아야 하는 것이며, 성의 이후의 공부는 다만 마땅히 좋아해야 할 일을 좋아하고 마땅히 싫어해야 할 일을 싫어하는 것이다.54)
54) ≪大全≫, 雙峰胡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