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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權智)1장


류 서구(柳瑞九)는 상제의 부친과 친분이 있는 분으로서 상제의 예지(豫知)에 크게 놀라 상제를 경송하게 되었도다.
 상제께서 그의 내왕을 언제나 미리 아시고 주효를 준비한 사실을 부친이 서구에게 알렸으되 그가 믿지 않았도다. 임인년 정월 七일에 상제께서 그가 다시 오는 것을 마당에서 맞으면서 「세전에 공사가 있어 오신 것을 대접하지 못하여 부친에 대한 예가 안 되었나이다」고 말씀하시고 아우 영학으로 하여금 책력의 틈에 끼워 둔 종이 쪽지를 가져오게 하여 펼쳐 보이시니 「인일에 인간방에서 사람이 오는데 마당에서 만나게 되니 그는 꼭 류 서구였도다(寅日人來寅艮方 逢場必是柳瑞九)」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도다. 이에 류 서구는 놀라 그 후 상제를 경송하게 된 것이니라.


상제께서 가시는 여름의 폭양 길은 언제나 구름이 양산과 같이 태양을 가려 그늘이 지는도다.   


상제께서 「제갈 량(諸葛亮)이 제단에서 칠일 칠야 동안 공을 들여 동남풍을 불게 하였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라. 공을 들이는 동안에 일이 그릇되어 버리면 어찌 하리오」 말씀하시고 곧 동남풍을 일으켜 보였도다.   


「공부하는 자들이 방위가 바뀐다고 말하나 내가 천지를 돌려놓았음을 어찌 알리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농부들이 九월에 일손 바쁘게 밭을 갈고 보리를 심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들 신고하나 수확이 없으리니 어찌 불쌍치 아니하랴」고 탄식하시는 말씀을 엿듣고 형렬은 결단하고 그해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하였도다.
  


이듬해 봄 기후가 순조로워 보리농사가 잘 되어 풍년의 징조가 보이는지라. 농부들과 김 보경ㆍ장 흥해는 지난 가을에 상제께서 들판을 보시고 보리농사가 실패될 것을 염려하시기에 보리농사를 짓지 아니한 형렬을 비웃으니라. 이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그것은 신명 공사에서 작정된 것인데 어찌 결실하기도 전에 농작을 예기할 수 있으리오」 하시고 종도들의 성급함을 탓하시니라. 五월 五일에 폭우가 쏟아지니라. 보리이삭에 병이 들어 이삭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결실이 되지 않는도다. 쌀값이 뛰고 보리 수확이 없게 되자 보경과 농부들이 상제의 말씀을 깨닫고 감복하기만 하였도다.   


이해 七월에 이르러 쌀값이 더욱 뛰고 거기에 농작물마저 심한 충재가 들어 인심이 더욱 사나워지기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신축년부터 내가 일체의 천지공사를 맡았으니 금년에는 농작물이 잘 되게 하리라」고 이르시니라. 이해에 비가 적절히 내리고 햇볕이 쪼이더니 들판에서는 온통 풍년을 구가하니라.   


이것을 보시고 상제께서 가라사대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면서부터 일체의 아표신(餓莩神)을 천상으로 몰아 올렸으니 이후에는 백성이 기근으로 죽는 일은 없으리라」고 하셨도다.   


상제께서 언제나 출타하시려면 먼저 글을 써서 신명에게 치도령(治道令)을 내리시니라. 상제께서 계셨던 하운동은 원래 산중이라 길이 매우 좁고 험하고 수목이 우거져 길에 얽혀 있느니라. 치도령을 내리시면 여름에는 나무에 내린 이슬을 바람이 불어 떨어뜨리고 겨울에는 진흙길이 얼어붙기도 하고 쌓인 눈이 녹기도 하였도다.   


최 운익(崔雲益)의 아들이 병으로 인해 사경을 헤매므로 운익이 상제께 달려와서 배알하고 살려주시기를 애걸하니라. 상제 가라사대 「그 병자가 얼굴이 못생김을 일생의 한으로 품었기에 그 영혼이 지금 청국 반양(淸國潘陽)에 가서 돌아오지 않으려고 하니 어찌하리오.」 운익이 상제께서 병자를 보신 듯이 말씀하시므로 더욱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굳이 약을 주시기를 애원하니라. 상제께서 마지못해 사물탕(四物湯) 한 첩을 지어 「九月飮(구월음)」이라 써 주시니라. 운익이 약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니 아들은 벌써 숨을 거뒀도다. 운익이 돌아간 후에 종도들이 구월음의 뜻을 여쭈었더니 가라사대 「구월 장시황어 여산하(九月蔣始皇於驪山下)라 하니 이것은 살지 못할 것을 표시함이로다. 그 아들이 죽을 사람이지만 만일 약을 굳이 원하다가 얻지 못하고 돌아가면 원한을 품을 것이므로 다만 그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약을 주었노라」 하셨도다. 


상제께서 어느 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三十리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하시고 고부 송월리(松月里)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 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도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 또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과 함께 동곡으로 가시는데 길이 진흙으로 심히 험하거늘 치도령을 내리시니 질던 길이 곧 굳어지니라. 마른 짚신을 신고 동곡에 가실 수 있었도다. 그 당시 쓰신 치도령은 「어재 함라산하(御在咸羅山下)」의 여섯 글자인바 상제께서 이것을 불사르셨도다.   


상제께서 농암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그곳을 떠나려 하실 때에 차 경석이 와서 배알하고 「길이 질어서 한 걸음도 걷기 어렵나이다」고 아뢰는도다. 상제께서 양지에 「칙령 도로 신장 어재 순창 농암 이우 정읍 대흥(令道路神將 御在淳昌籠岩 移于井邑大興里)」라 쓰시고 물에 담궜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손으로 짜신 후에 화롯불에 사르시니라. 이때 갑자기 큰 비가 내리다가 그치고 남풍이 불더니 이튿날 땅이 굳어지는도다. 상제께서 새 신발을 신고 경석을 앞장세우고 정읍에 가셨도다.   


그 후에 상제께서 김제 반월리(金堤半月里) 김 준희(金駿熙)의 집에 계셨을 때 전주 이동면 전룡리(全州伊東面田龍里)에 사는 이 직부의 부친이 상제를 초빙하는도다. 상제께서 그 집에 옮겨 가셨는데 그 집 훈장이 상제의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는 것을 미리 아셨도다. 상제께서 줏대를 갖고 산을 두시며 그 동네 호구와 남녀 인구의 수를 똑바로 맞추시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줄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라. 그와 직부가 이상히 여겨 동네 호구를 조사하니 一호 一구의 차이도 없었고 사흘 안에 한 사람이 죽었도다.   


상제께서 아우 영학(永學)에게 부채 한 개에 학을 그려 주시고 「집에 가서 부치되 너는 칠성경(七星經)의 무곡(武曲) 파군(破軍)까지 읽고 또 대학(大學)을 읽으라. 그러면 도에 통하리라」고 이르셨도다. 영학이 돌아가는 길에 정 남기의 집에 들르니 그 아들도 있었는데 아들이 부채를 탐내어 빼앗고 주지 않으니라. 영학이 그 부채의 내용 이야기를 말하니 아들은 더욱 호기심을 일으켜 주지 않으니 하는 수 없이 영학은 빼앗기고 집에 돌아왔도다. 아들은 부채를 부치고 대학의 몇 편을 읽지도 않는데 신력이 통하여 물을 뿌려 비를 내리게 하며 신명을 부리게 되는지라. 남기는 기뻐하여 자기 아들로 하여금 상제의 도력을 빼앗고자 아들과 함께 하운동에 가는데 때마침 상제께서 우묵골(宇默谷)로부터 하운동에 오시는 길이었도다. 남기의 아들이 상제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겁을 먹고 도망가거늘 남기가 붙들고 와서 상제께 배알하니 상제께서 그의 속셈을 꿰뚫고 남기의 무의함을 꾸짖으시며 그 아들의 신력(神力)을 다 거두신 후에 돌려보내셨도다. 


상제께서 전주 용두치(龍頭峙)에서 우사(雨師)를 불러 비를 내리는 공사를 보셨도다. 이 치복이 전주 김 보경을 찾고 상제를 배알하니 상제께서 가라사대 「이런 때에 나이 적은 사람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절을 받느니라.」 치복이 상제께 사배를 올리니 상제께서 「금년에 비가 극히 적으리라.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천지에 동과혈(冬瓜穴)이 말라 죽으리라. 그러므로 서양으로부터 우사를 불러서 비를 주게 하리라」 말씀하시고 술상을 차리고 치복에게 술 두 잔을 주시며 한 잔을 요강에 부으셨도다.   


백 남신의 친족인 백 용안(白龍安)이 관부로부터 술 도매의 경영권을 얻음으로써 전주 부중에 있는 수백 개의 작은 주막이 폐지하게 되니라. 이때 상제께서 용두치 김 주보의 주막에서 그의 처가 가슴을 치면서 「다른 벌이는 없고 겨우 술장사하여 여러 식구가 살아왔는데 이제 이것마저 폐지되니 우리 식구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고 통곡하는 울분의 소리를 듣고 가엾게 여겨 종도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 남장군만 있으랴. 여장군도 있도다」 하시고 종이에 여장군(女將軍)이라 써서 불사르시니 그 아내가 갑자기 기운을 얻고 밖으로 뛰어나가 소리를 지르는도다. 순식간에 주모들이 모여 백 용안의 집을 급습하니 형세가 험악하게 되니라. 이에 당황한 나머지 그는 주모들 앞에서 사과하고 도매 주점을 폐지할 것을 약속하니 주모들이 흩어졌도다. 용안은 곧 주점을 그만두었도다.   


상제께서 김 덕찬ㆍ김 준찬 등 몇 종도를 데리고 용두리에서 공사를 행하셨도다. 이곳에 드나드는 노름꾼들이 돈 八十냥을 가지고 저희들끼리 윷판을 벌이기에 상제께서 저희들의 속심을 꿰뚫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저 사람들이 우리 일행 중에 돈이 있음을 알고 빼앗으려 하나니 이 일로써 해원되니라」 하시고 돈 五十냥을 놓고 윷을 치시는데 순식간에 八十냥을 따시니라. 품삯이라 하시며 五푼만을 남기고 나머지 돈을 모두 저희들에게 주며 말씀하시니라. 「이것은 모두 방탕한 자의 일이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서 직업에 힘쓰라.」 저희들이 경복하여 허둥지둥 돌아가니라. 종도들이 상제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윷이 되는 법을 궁금히 여기는 것을 알아차리시고 상제께서 말씀하시기를 「던지는 법을 일정하게 하면 그렇게 되나니 이것도 또한 일심이라」 하셨도다.   


박 공우가 한때 일진회의 한 간부였으나 상제를 따른 후의 어느 날 가만히 일진회 사무소에 일을 보고 돌아왔는데 상제께서 문득 공우에게 이르시기를 「한 몸으로 두 마음을 품은 자는 그 몸이 찢어지리니 주의하라」 하시기에 공우는 놀라며 일진회와의 관계를 아주 끊고 숨기는 일을 하지 않으니라.   


상제께서 어느 날 공우를 데리시고 태인 새울에서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문득 관운장(關雲長)의 형모로 변하여 돌아보시며 가라사대 「내 얼굴이 관운장과 같으냐」 하시니 공우가 놀라며 대답하지 못하고 주저하거늘 상제께서 세 번을 거듭 물으시니 공우는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관운장과 홉사하나이다」고 아뢰니 곧 본 얼굴로 회복하시고 김 경학의 집에 이르러 공사를 행하셨도다. 


상제께서 「내가 삼계 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선천의 모든 도수를 뜯어고치고 후천의 새 운수를 열어 선경을 만들리라」고 종도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말씀하셨도다. 그 때가 더딘 것에 종도들이 한탄하면서 하루 바삐 상제께서 개벽을 이룩하시기만 기다리는도다.   


상제께서 청도원(淸道院)에서 동곡에 돌아와 계시던 어느 날 「풍ㆍ운ㆍ우ㆍ로ㆍ상ㆍ설 ㆍ뇌ㆍ전(風雲雨露霜雪雷電)을 이루기는 쉬우나 오직 눈이 내린 뒤에 비를 내리고 비를 내린 뒤에 서리를 오게 하기는 천지의 조화로써도 어려운 법이라」 말씀하시고 다시 「내가 오늘 밤에 이와 같이 행하리라」 이르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과연 눈이 내린 뒤에 비가 오고 비가 개이자 서리가 내렸도다.   


상제께서 어느 해 여름에 김 형렬의 집에 계실 때 어느 날 밤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강 감찬은 벼락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며 좌우 손으로 좌우 무릎을 번갈아 치시며 「좋다 좋다」 하시니 제비봉(帝妃峰)에서 번개가 일어나 수리개봉(水利開峰)에 떨어지고 또 수리개봉에서 번개가 일어나 제비봉에 떨어지니라. 이렇게 여러 번 되풀이 된 후에 「그만하면 쓰겠다」 하시고 좌우 손을 멈추시니 번개도 따라 그치는지라. 이튿날 종도들이 제비봉과 수리개봉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번개가 떨어진 곳곳에 수십 장 사이의 초목은 껍질이 벗겨지고 타 죽어 있었도다.   


신 원일이 건재 약국을 차리고 약재를 사려고 공주 감영으로 가는 길에 김 보경의 집에 들러서 상제께 배알하였도다. 이 자리에서 그는 여러 이야기 끝에 「길이 질어서 행로에 불편을 심하게 받았나이다」고 여쭈니라. 상제께서 웃으시고 아무 말씀이 없었는데 원일이 이튿날 아침 길에 나서니 길이 얼어붙은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기뻐하였느니라.   


상제께서 농암에 계실 때에 황 응종과 신 경수가 와서 배알하고 「눈이 길에 가득히 쌓여 행인이 크게 곤란을 받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장근(壯根)으로 하여금 감주를 만들게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잡수시니라. 쌀쌀하던 날씨가 별안간 풀리면서 땅의 눈이 녹아서 걷기가 편하여졌도다. 


한겨울에 상제께서 불가지 김 성국의 집에 계셨도다. 김 덕찬과 김 성국은 꿩이 많이 날아와서 밭에 앉기에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였는데 이것을 상제께서 보시고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말씀하셨도다. 이상하게도 그 많은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아니하니라.   


상제께서 약방에 계시던 겨울 어느 날 이른 아침에 해가 앞산 봉우리에 반쯤 떠오르는 것을 보시고 종도들에게 말씀하시니라. 「이제 난국에 제하여 태양을 멈추는 권능을 갖지 못하고 어찌 세태를 안정시킬 뜻을 품으랴. 내 이제 시험하여 보리라」 하시고 담배를 물에 축여서 세 대를 연달아 피우시니 떠오르던 해가 산머리를 솟지 못하는지라. 그리고 나서 상제께서 웃으며 담뱃대를 땅에 던지시니 그제야 멈췄던 해가 솟았도다.   


상제께서 갑진년 二월에 굴치(屈峙)에 계실 때 영학에게 대학을 읽으라 명하셨으되 이를 듣지 않고 그는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와 엄자릉 묘기(嚴子陵廟記)를 읽으니라. 상제께서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하시며 이 도삼을 불러 시 한 귀를 영학에게 전하게 하시니 이것이 곧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吊無人)」이니라.   


처음부터 영학(永學)은 도술을 배우기를 원했으나 상제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대학을 읽으라 하셨는데도 명을 어기고 술서를 공부하기에 시(詩)를 보내어 깨닫게 했으나 상제의 말씀을 듣지 않더니 기어코 영학이 죽게 되었느니라. 상제께서 내림하셔서 영학의 입에 엄지손가락을 대시고 「이 손가락을 떼면 곧 죽을 것이니 뜻에 있는 대로 유언하라」 하시니 영학이 부모에게 할 말을 모두 마친 후에 엄지손가락을 떼시니 곧 사망하니라.   


갑진년에 김 덕찬이 모친상을 입고 장례를 지내려고 전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용두치(龍頭峙) 주막에서 상제를 배알하니 가라사대 「오늘 장사는 못 지내리니 파의하라」 하시니라. 덕찬이 이를 듣지 않고 돌아가서 장례를 그대로 행하여 지정한 땅을 파니 큰 의혈(蟻穴)이니라. 다시 다른 곳을 파니 그곳도 역시 마찬가지라. 덕찬이 그제서야 상제의 가르치심의 어김을 뉘우치고 부득이 토롱(土壟)을 하였도다. 


상제께서 섣달 어느 날 종도들을 이끌고 모악산 용안대(龍眼台)에서 여러 날을 머무르셨도다. 마침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교통이 두절되고 따라서 양식이 두 끼니의 분량만이 남으니라. 상제께서 종도들이 서로 걱정하는 것을 듣고 남은 양식으로 식혜를 짓게 하시니 종도들은 부족한 양식을 털어서 식혜를 지으면 당장 굶게 되리라고 걱정하면서도 식혜를 지어 올렸도다. 상제께서 종도들과 함께 나누어 잡수시는데 눈이 멈추고 일기가 화창하여 쌓인 눈도 경각에 다 녹고 길도 틔어 종도들과 함께 돌아오셨도다.   


하루는 원평(院坪)에서 음식을 드시고 여러 사람들을 향하여 외쳐 말씀하시기를 「이제 곧 우박이 올 터이니 장독 덮개를 새끼로 잘 얽어 놓아라」 하시니 여러 사람은 무심히 들었으나 오직 최 명옥(崔明玉)만이 말씀대로 행하였더니 과연 두어 시간 후에 큰 우박이 내려 여러 집 장독이 모두 깨어졌도다.   


천도교 손 병희(孫秉熙)가 호남 일대를 순회하고자 전주에 내려와서 머물렀도다. 상제께서 공우에게 「네가 전주에 가서 손 병희를 돌려보내고 오라. 그는 사설로 교도를 유혹하여 그 피폐가 커지니 그의 순회가 옳지 않다」고 분부를 내리셨도다. 이에 그가 복명하였으되 이튿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씀이 계시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겼느니라. 며칠 후에 손 병희는 예정한 순회를 중지하고 경성으로 되돌아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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