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甑山: 1871~1909)은 진멸지경에 처한 선천을 뜯어고쳐 천지도수(天地度數)를 정리하고 후천선경(後天仙境)을 세울 것을 선언하고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다. 이러한 그의 언행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그를 광인으로 매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그의 비범한 언행을 흠모한 사람들은 스스로 제자를 자처하였다. 그들이 소위 말하는 증산의 종도들이다. 일정한 방법이 없이 풍우(風雨), 상설(霜雪), 뇌전(雷電)을 마음대로 용사(用事)하는 증산의 권능(權能)을 목격한 종도들은 증산이 단순한 스승을 넘어 이 세상을 구원해줄 구세주, 대선생(代先生)1), 도통군자(道通君子)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증산을 따르면 증산의 권능에 힘입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고, 나아가 증산이 가진 권능을 자신들이 이어받아 도통을 할 수 있다고 기대하였다.
종도들은 증산이 화천(1909) 한 후, 이러한 기대감으로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을 설립하였다. 증산이 남긴 태을주를 통해 많은 신비체험을 하게 된 종도들은 1911년 고 부인을 중심으로 모여 교단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는 한일합방 이후 일제의 총독부가 우리 국민을 지배하는 암울한 시대로 일제의 압박과 수탈이 극심한 시기였으나, 이 때 종도들이 행한 신비 체험과 치병효과의 포교방법은 일제의 수탈과 억압으로 인해 질곡의 상황에 처해 있던 사람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게 되어 교세는 급속히 확산되었다.
1) 『전경』, 권지 1장 11절. ……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도다.
1914년에 이르면 교단의 기반이 다져지고 교세가 성장하게 되자 차경석이 야심을 드러내어 교단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에 분개한 종도들은 교단을 떠나 따로 종교단체를 형성하여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게 되었고, 각자 종통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이 때 이후로 고 부인의 선도교,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열의 미륵불교, 안내성의 증산대도교, 이치복의 제화교 등 수십개의 교단이 설립되어 부침을 거듭하였다. 이 시기는 그야말로 증산계 교단이 창궐하던 시기로 일제의 집요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증산 교단들의 교세는 1920년대 중반 이후까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2)<표 2> 1919년 10월 차경석이 '60방주제'를 선임하는 고천제(告天祭)를 행할 때 조직된 인원총수가 557,700명이라고 기록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탄압과 지도층의 무능과 비리, 그리고 이 때문에 교단내의 갈등으로 점차 쇠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차경석 교단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925년부터 십일전을 건축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인들의 경제적 공황이 심각해지고 배교하는 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그 결과 1936년 이후에는 거의 모든 교단이 소멸하거나 심각하게 쇠퇴하였다.
도주 조정산(趙鼎山, 1895~1958)은 증산이 화천하던 해인 1909년, 15세의 나이로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였다. 그로부터 9년간의 입산수도 끝에 증산으로부터 계시(啓示)를 받아 감오득도한 후 귀국하여(1917년) 증산의 누이동생,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남긴 봉서를 전해 받은 것이 1919년, 25세 때였다. 증산계 교단의 역사에서 보면 이 시기는 교세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로 이미 수십만의 교세를 자랑하던 시기였다. 증산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고 증산이 행하던 천지공사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던 많은 종도들에 비해 정산은 인세에서 증산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 때문에 1917년에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정산은 귀국 후 2년간은 안면도 우일재에서 수도 공부하며 증산상
2) 村山智順, 「全鮮敎別年次別敎勢表, その二」(東學 · 吽哆 · 佛敎系), 『朝鮮の類似宗敎』, pp.531-539.
제의 강세지지(降世之地)라는 정읍 객망리, 대각지지(大覺之地)라는 모악산의대원사, 공사지지(公事之地)라는 김제의 금산사와 동곡 등 유적지를 두루 답사하며 인세에서의 증산의 자취를 확인해 나갔다.
정산은 1919년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비밀리에 남긴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이 적혀 있는 봉서를 전해 받고 곧바로 백일공부를 시작하여 봉서의 내용, 즉 증산이 짜 놓은 도수에 따른 대도(大道)의 진리를 체득하였고, 곧이어 증산이 남긴 둔궤와 증산의 성골을 찾아 증산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자각하면서 공부와 도수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공부와 도수에 몰두하면서 각고의 노력으로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여 자신이 자각한 증산의 진리를 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정산의 종교활동 과정은 당시 증산계 교단을 주도해 가던 종도들과는 전혀 다른 행보라고 할 수 있다.
1936년 일제의 종교해산령 이후 많은 증산계 교단들은 해체, 소멸의 길을 걸었다. 1911년에서 일제의 종교해산령 시기까지 증산에 대한 신앙을 주도하던 당시의 증산계 교단들은 그 맥이 거의 끊어진 상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1969년~1970년에 작성된 문화공보부의 『한국 · 신흥 및 유사종교 실태 조사보고서』 에는 이상호의 동도교 증산교회의 신도수가 50,000명, 보천교는신파 200명, 구파 2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3) 1985년 한국종교학회의 『한국 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에는 선도교(고 부인), 미륵불교(김형렬), 증산교 안내성파(안내성)를 거의 멸실된 것으로, 보천교(차경석)나 동화교(이상호)도 세력이 미미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1996년 한국종교연구회의 『한국 신종교 조사 · 연구 보고서』 에는 보천교구파 2,000명, 보천교신파 10,000명, 증산교본부 10,600명, 대한불교법상종 0, 증산교안내성파 0, 태을교 0, 태극도 187,749명, 대순진리회 6,000,000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96~1997년 한국종교사회연구소 『한국종교연감』 에는 나머지는 대동소이
3) 『한국신흥 및 유사종교 실태조사보고서』, 문화공보부, 1969~1970년.
하고, 대순진리회를 8,335,462명으로 보고하고 있으며4), 『한국신종교실태조사 보고서』 5)는 1996년 한국종교연구회의 『한국 신종교 조사 · 연구 보고서』와 나머지는 같고, 증산교 안내성파(노장파) 30명, 선도교 30명으로 기록되어 새로이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당시 창궐하던 증산계 교단들이 현재는 거의 맥이 끊어졌거나 소멸하였고, 오히려 당시 가장 후발주자로 종교활동에 뛰어든 정산의 교단만이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산의 교단만이 현재까지도 건재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정산이 50년 동안 종교활동을 한 내용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정산의 종교활동은 크게 무극도기와 태극도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무극도기에는 신앙대상 확립, 의례의식 법제, 이론적인 교리체계 발표 등으로 종단의 기본 골격을 세우는 것에 중점을 둔 시기였고, 태극도기에는 증산의 천지공사의 원리에 따른 수도법을 완성한 시기였다. 이로써 정산이 50년 동안의 종교 활동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인 내용이 교리를 형성하고 체계화하여 수도법을 완성하는 것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정산의 교리체계가 증산계 교단의 교리 · 사상과는 어떻게 다른지 연구한다면 그 의의를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하나의 종교 내에서 일컬어지는 교리가 기본적으로 교조의 종교체험에 대한 지적인 내용을 담는다고 할 때, 정산이 정립한 교리는 그 고유한 종교 체험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과 학계에서 증산에 대한 연구는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정산에 관한 연구는 전혀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정산의 교리체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것은 증산이 천지공사의 내용을 더욱 확실히 알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며, 또한 정산의 교리체계를 바르
4) 『한국종교연감』, 한국종교사회연구소, 1996~1997년.
5) 김홍철 · 유병덕 · 양은용,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전북: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 1997.
게 이해하기 위해서 이다.
본 연구에 앞서 증산계 교단과 무극도에 관한 선행연구를 검토해보면, 이능화(1869~1943)는 1918년에 지은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에서 1911년9월경에 창립된 태을교에 대해 최초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을 남겼다. 이능화는 태을교의 신행 방법과 신비체험에 대해서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고, 23자 주문 즉 태을주를 정확히 기록하고 있다.6) 그러나 이 책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은 전통적인 증산계 교단의 해석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리고 이능화는 『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 를 통해서 「자칭 유불선 합종의 교(自謂儒佛仙合宗之敎)」 라는 장명(章名)에서 미루어 알 수 있듯이 신종교를 '묵은 말을 주워 모아 억지로 만든 비기(秘記)'로 평가하거나 미륵신앙의 폐단에 부쳐 훔치교(吽卩多敎)를 설명하고 있다7) 이것은 신문기사 등의 단편적인 자료 등을 토대로 하였고, 인물중심으로 보천교를 이해하는 등 증산의 종교사상에 대한 본질적 연구 성과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8)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이 쓴 자료로 증산교단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나 일반적인 기술로 발행된 책들이 있다. 길천문태랑(吉川文太郎)은 『조선의 종교(朝鮮7)宗敎)』 회라는 책에서 일본어로 조선의 종교를 소개한 책으로 「종교유사의 단체(宗敎類似の團體)」 라는 부분에 태을교를, 일 년 뒤 『조선제종교(朝鮮諸宗敎)』 10)에서 국한문 혼용체로 「조선특유의 종교」 란 부분에 같은 내용으로 태을교의 역사적 전개와 당시 상황을 정리하여 발표하였다.
그리고 무극도를 최초로 언급한 사료는 『무극대도교개황(無極大道敎槪況)』 11)으로 연혁과 무극도 취지서, 주문, 치성 등과 조직, 간부의 이름까지도
6) 김탁, 「이능화와 한국신종교의 연구」, 『종교연구』 9, 1993, pp.153-154.
7) 이능화 지음 · 이종은 역, 『조선도교사』, 서울: 보성문화사, 1977. pp.319_323.
8) 윤재근, 「대순사상의 인간형성이론」, 박사학위논문, 동국대학교. 2001. p.6.
9) 吉川文太郞(1921), 『朝鮮の宗敎』, 경성: 朝鮮印刷.
10) 吉川文太郞(1922), 『朝鮮諸宗敎』, 경성: 朝鮮興文會.
11) 『無極大道敎槪況』 은 조선총독부 관료 와타나베 시노부[渡邊忍, 1883~1955]가 전라북도 지사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1926~1929) 중에 보고 받은 내용이며, 전라북도 고등 경찰에 의해 작성된 내부 보고용 비밀문건이다. 이 책에 간부일람표가 대정 14(192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1926년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無極大道敎槪7兄』, 동경: 우방문고, 1926)
낱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 무극도의 조직 체계와 교리를 알 수 있다. 『보천 교일반(普天敎一般)』 12)도 『무극대도교개황』 과 같은 시기에 기록된 자료로 교리, 내부조직, 치성, 보천교 내홍(内訌), 보천교 교헌, 내부조직의 규정 등 구체적인 내부 자료를 상세히 기록하여 교리적인 부분보다는 보천교 내부의 조직체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촌산지순(村山智順)이 쓴 『조선의 유사종교(朝鮮の類似宗敎)』 는 일제강점 기에 조선총독부가 식민지통치를 위한 자료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촌산지순은 근세 동학을 시초로 하여 당시 70여 종에 달하는 종교를 유사종교라고 설정하고 모든 단체의 교의 및 신앙을 종합하여 썼다. 이 책은 무극도(無極道)에 대한 사료는 『무극대도교개황』, 보천교에 대한 사료는 『보천교일반』 의 영향을 받아서 기록하고 있다. 위의 책들은 식민지 통치시대에 일본인이 쓴 것으로, 조선에서 발생했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비난 조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증산사상에 대한 사상적 측면에서의 연구는 이상호(李祥昊, 1888~1966). 이정립(李正立, 1985~1968) 형제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증산의 행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1926년)가 있으며, 이후 최초로 경전화(經典化)한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을 1929년 7월에 간행하였다. 『대순전경』 은 1933년에는 2판이, 1947년에는 증보판인3판이 간행되었으며, 최종 증보판인 6판은 1965년에 발행되었다. 현재는 12판이 1995년에 발행하여 널리 보급되었다. 이상호가 지은 경전은 모두 증산사상에만 치중되어 있다. 그러나 이정립은 『대순철학(大巡哲學)』 13)에서는 증산의 사상을, 『증산교사(甑山敎史)』 에서는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들이 수록되어 있다. 현재 증산계 교단을 연구하는 자료는 이정립이 쓴 증산교사에 수록된 것
12) 『普天敎-般』, 동경: 우방문고, 1926.
13) 1947년, 여강출판사에서 발간하였으며, 이후 1986년 이 내용을 한글화하여 도서출판 인동에서 『증산 사상의 이해』 라는 제목으로 재발간하였다.
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증산계 교단에 대한 보다 본격적인 연구를 시도한 사람은 이강오이다.14) 그는 증산계 교단의 연혁과 교리 · 주축(呪祝)과 부적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객관적으로 잘 기술하고 있으며, 증산계 교단의 주요한 교파의 하나인 보천교에 대해서는 상세한 부분까지 조사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강오의 증산계 교단의 연구는 있는 그대로 자료제공이란 측면에서는 훌륭한 연구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되지만, 교단의 교리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를 밝혀내는 점에서는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홍범초는 『범증산교사(汎甑山敎史)』 (1988)를 통하여 증산을 도조(道祖)로 받드는 교단과 증산이 창도(倡道)한 대도(大道)를 교의로 채택한 교단 전체 가운데 24교단의 자료를 수집하여 교사(敎史)를 논(論)하였다. 각 교단의 방대한 교사(敎史)를 다 논하지는 못하고 개략(概略)만 언급하는데 그쳤다.
대순진리회에서 편찬한 『대순논집(大巡論集)』 「교운 2장 연구」 에는 도주조정산이 종단을 조직한 과정을 시대적으로 구분15)하여 종단의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는 정산이 증산의 종통을 계승한 것과 정통성을 규명한 점에서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남식16)은 구천상제의 천지공사로 처결한 포교 50년 공부종필에 따라 정산에게 천부적인 종통계승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산은 전교를 발표하여 선천의 종교사를 정리하고, 나아가 시운(時運)의 흐름이라는 순환적 우주관 속에서 종지를 선포하여 도수에 따라 순차적으로 50년 공부를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50년 공부를 통해 구천상제의 천지공사를 풀어나간 종통계승자인 정산의 위상을 밝힌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4)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1-3, 서울: 도서출판 대흥기획, 1993.
15) 대순진리회연구위원, 『대순논집』, 서울: 대순진리회출판부, 1992. '정산이 증산의 천지도수를 풀어가는 과정을 시대적으로 종통계승기(1909년~1919년), 무극도기(1919년~1941년), 무극도 수난기(1941년~t945년), 태극도기(1945~)로 구분하여 분류하였다.'
16) 고남식, 「종지와 종통계승」, 『대순사상논총』 6, 1998.
이경원17)은 대순진리회의 연원인 조정산의 종교활동을 역사적으로 조명하였다. 오늘날 한국 신종교의 수많은 계파에서 증산을 신양하는 교단이 하나의 큰 부류(部類)를 이룬다고 할 때, 도주 조정산의 종교활동은 증산의 사상과 아울러 그 신앙적 전승을 살피기 위해서 분명히 주시해야 할 가치가 있음을 시사하였다.
경전에서 최초로 정산의 기록이 있는 것은 대순진리회에서 편찬한 『전경(典經)』 (1974년)이다. 이 책은 행록, 공사, 교운, 교법, 권지, 재생, 예시의 7편과 17장, 839절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부분 증산의 행적 및 천지공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면, 「교운 2장」 부분에서는 정산의 생에 및 종교활동, 교단의 창립과 교리 등이 수록되어 있다. 뒤를 이어 태극도에서 『진경전서(眞經全書)』 를 1987년에 발간하였다. 그 내용은 무극진경과 태극진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무극진경에는 증산의 생애와 업적, 태극진경에는 정산의 생애와 업적에 관한 내용을 연도별로 기록하고 있다. 2년 뒤 발간된 『진경(眞經)』 (1989)은 『진경전서』 를 보완 수정하여 편찬하였다.
대진대학교 부설 대순사상학술원에서 1996년부터 발간한 『대순사상논총』은 15집까지는 정산의 핵심교리인 종지(宗旨) · 신조(信條) · 목적(目的)을 주제로 하여 발행하였으며, 16집부터는 여러 학자와 교류를 통해 정산의 교리와 연계성을 가지고 다각적인 방법으로 연구되어 19집까지 출간되었다. 개편을 통해 대진대학교 대진학술원이라 하고, '대순진리학술논총'으로 책명을 달리하여 발간되고 있으며, 대순사상논총의 주제와 같은 내용으로 고정된 집필진이 논문을 게재하는 형식으로 발간하고 있다.
17) 이경원, 「대순진리회 연원, 도주 조정산의 종교체험연구」, 『대순진리학술논총』 1, 2007.
본 연구는 증산의 종통을 계승한 도주 조정산이 종교체험으로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교리가 어느 시기에 어떻게 정립되었으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변천 과정을 거쳐서 체계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먼저 정산의 교리가 어떻게 체계적으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첫째, 정산의 개인적 경험과 재세하였을 당시 사회적 상황이 정산의 교리 성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둘째, 정산은 증산의 종통계승자로서 50년 동안 증산의 천지공사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 점차 체계화 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대종교가인 증산이 인간세계에서 펼쳤던 천지공사는 우주의 질서와 운행원리를 새롭게 조정하여 천지도수(天地度數)18)를 재편하였다. 증산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 사물이 상극에 지배되어 원한이 쌓인 세상이라고 진단하였고 그것으로 인해 세상이 참혹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했다. 이 세상을 구제하는 방법으로써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우는 순서로 천지도수를 단행하였다.19) 이와 같이 근본적인 원인을 진단하고 순차적인 방법으로 진행된 천지공사는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는' 목적의식이 분명히 나타나 있으며 후천의 선경을 건설한다는 명확한 종교적 지향성이 내재되어 있다.
18) 천지도수 또는 도수라는 개념은 순서절차 즉 프로그램(program)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신명계에서 결. 집된 신명들의 총력을 발동하여, 과거의 세계 질서가 점진적으로 해소될 프로그램과 새로운 질서가 점진적으로 생성될 프로그램을 결정함으로써 세계 역사 및 사회의 변혁이 그 프로그램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이정립, 「대순철학」, 전북: 증산교 본부, 1984, 1011141가42.)
19) 상제께서 「선천에서는 인간 사물이 모두 상극에 지배되어 세상이 원한이 쌓이고 맺혀 삼계를 채웠으니 천지가 상도(常道)를 잃어 갖가지의 재화가 일어나고 세상은 참혹하게 되었도다. 그러므로 내가 천지의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相生)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워서 세계의 민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릇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신도로부터 원을 풀어야 하느니라.먼저 도수를 굳건히 하여 조화하면 그것이 기틀이 되어 인사가 저절로 이룩될 것이니라. 이것이 곧 삼계공사(二界公事)이니라. (『전경』,공사 1장 3절)
이를 종합하면 천지공사란 우주를 주재하는 권능을 지닌 증산이 파멸의 위기에 처한 인간과 신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주적 통치기관을 설치하여 선천 세계를 뜯어고쳐 후천의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업하는 것을 의미한다.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어서 정산은 그것을 제도화 · 현실화시키는 길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정산은 증산의 천지공사 도수를 정확하게 풀고 이행하여 증산이 의도한 대로 진리가 정착되고 도수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도록 조화시켜 나가도록 하였다.
정산은 여타 증산계 교단과 다르게 증산의 도수를 풀어나가는데 철저한 준비로써 행하고 공부와 도수를 통해서 50년 공부 종필 할 때까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로 교리를 완성하게 된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연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 할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증산을 신앙하는 각 교단에서 발행한 경전 및 서적을 1차 자료로 할 것이다. 특히 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대표적 교단인 대순진리회20)의 『典經』, 태극도에서 발행한 『진경전서』 (1987), 『태극진경』(1990)과 초기 증산계 교단21)에서 발행한 간행자료를 사용할 것이며, 시간적 범위로는 이상호가 『大巡典經』 6판을 간행한 1965년까지로 한다. 그렇지만 교리가 어떻게 해석되어 이해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은 현재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이용하려고 한다.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산의 교리 형성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규명하고자 한다. Ⅰ장에서는 선행연구의 유형을 분석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연구의 범위과 방
20) 대순진리회는 조정산 도주께서 만주 봉천에서 강성상제로부터 그 천부의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은 데서 비롯하여 유명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도전께서 영도하시는 우금까지 반세기를 훨씬 넘은 60여 년간의 발전사를 가진 종단의 명칭이다(『대순진리회요람』, 대순진리회교무부, 1969).
21) 초기 증산계 교단이란 증산을 신앙하고, 증산을 가까이 모셨던 종도들이 각자의 종교를 펼쳐나간 교단을 일컫는다.
법을 기술할 것이다. Ⅱ장에서는 증산이 화천한 후 종도들은 포교를 통해서 교단을 건립하는 과정과 그 이후 증산계 교단이 각기 분열하면서 다양한 종교활동을 펼치는 양상들을 살펴볼 것이다. 증산계 교단이 분열하면서 비교적 종교로서 면모를 갖추고 있는 고 부인의 선도교,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안내성의 증산대도교, 이상호의 동화교 등 교리가 성립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Ⅲ장에서는 정산의 봉천명, 입산수도와 감오득도를 통한 종통계승, 무극도의 창도, 태극도의 종교활동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증산이 9년간의 천지공사를 통해 짜 놓은 도수를 정산은 그 도수에 맞게 모든 신앙적 법제를 갖추기 위한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정산이 정립한 교리의 특징으로 무극도와 태극도에서 행한 도수와 공부를 들 수 있다. 그 도수의 변화에 따라 주문, 의식, 조직이 바뀌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V장에서는 모든 연구결과를 종합하여 정산의 교리를 개괄하고 특징과 의의를 정리하면서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정산의 교리 전개와 창립과정이 밝히질 것이며, 차후의 연구과제도 분명해질 것이다.
증산의 재세 시 증산을 따랐던 종도들은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기보다는 증산이 가진 권능으로 조선에 왕국을 건설할 것이고, 그를 따르는 자신들은 커다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증산이 제시하는 공부나 수련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빨리 천지를 개벽하여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를 희망하였다
그런 가운데 증산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화천은 종도들에게 배신감과 좌절감을 안겨 주었다. 좌절감을 느낀 종도들은 일시 사방으로 흩어지기도 하였으나, 증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금산사에 가서 수련하는 등 정신적 공황상태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김경학이 신비체험을 통하여 처음으로 포교하게 되자 종도들도 서서히 태을주를 외우면 신안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알게 되어 수련을 시작하였다. 이들은 고 부인이 신비체험을 통해서 최초로 교단을 창설하자 이에 같이 참여하였다. 그 당시 체계적인 교리나 문서화된 경전은 없었지만 태을주(太乙呪)의 신이한 효력은 희망을 잃은 당시의 민중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던져주었다. 이 기운은 급속히 확산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의 기반이 다져지고 급속히 교세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야심을 드러내어 교단을 장악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종도들은 교단을 떠나 각자가 따로 종교단체를 형성하게 되니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게 된다. 이들은 고 부인을 통해서 증산의 권능을 다시 보게 되었고, 자신들도 그 권능을 이용한다면 현실적으로 고 부인과 다르지 않은 신비적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판단에서 각자 종통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교세 확장에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11년 최초의 종단창설 이후 1920년대 중반 이후까지 증산 교단들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하여 갔다. 그러나 이후로는 일제의 탄압과 지도층의 무능과 비리, 그리고 이로 인한 교단내의 갈등으로
점차 쇠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여기서는 증산 사후 초기 증산계 교단의 변화발전 양상을 알아보기 위해, 수많은 교파 가운데 비교적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교단 몇 개를 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대체로 고 부인의 선도교, 차경석의 보천교, 김형렬의 미륵불교, 안내성의 증산대도교, 이상호의 동화교가 이에 해당한다. 증산계 교단은 각 교파마다 증산을 이해하는 관점이 서로 다르므로 따라서 교리에서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초기 증산계 교단에서는 증산에 대한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였다가 각 교단이 분열하면서 호칭이 달라지며, 교리 면에서도 그 교단의 현실적 상황에 의해 달라지고 있다.
증산이 대원사에서 49일 동안 불음불식의 공부를 통해 오룡허풍의 천지대도를 열었다는 소문을 듣고 처음으로 증산의 가르침을 받들어 종도가 된 사람은 김형렬이다.22) 김형렬은 원래 동학 신도로서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였다가 종군 도중 위난에 봉작하였을 때, 증산의 도움으로 모면한 사람이었다. 형렬은 원평 장터에서 증산을 처음 만난 후 자기 집에 모시기를 원하여, 증산은 임인(1902)년 4월 13일 하운동에 위치한 형렬의 집에 갔다.23) 증산은 형렬의 집에 머무는 동안 천지공사를 행하면서 형렬에게 신안을 열어주어 신명의 회산과 청령(聽令)을 참관케 하였다.24) 이후 형렬은 가까운 일가친척과 전에 동학신도였던
22) 홍법초, 『법증산교사』, 서울· 도서출판 한누리. 1988, pp.174-175.
23) 『대순전경』 1, 3장 2절.
24) 『典經』, 예시 17절.
친구들에게 천지공사를 행하던 증산의 이야기와 자기의 신비한 체험을 일러주어 종도가 되도록 하였다. 종도가 된 사람도 자신과 의기가 상합한 사람들을 다시 천거하여 증산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여 종도들의 수효가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25)
증산은 후천선경을 이루기 위한 천지공사에 여념이 없었으나 종도들은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증산이 가진 법력이 가져올 수 있는 현실적인 결과를 기대하였다. 증산의 의도와는 달리 그들은 증산이 천지공사를 통해 조선에 왕국을 건설할 것이고, 그를 따르는 자신 0 커다란 부귀영화를 누릴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증산이 제시하.는 공부나 수련에는 관심이 없었고, 하루빨리 천지를 개벽하여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기를 회 망하였다
신원일이 고청(固請)하여 가로대, 「선생님은 늘 천지를 개벽하고 세상에 선경을 건설한다고 하며 공사를 한 지 오래되었으되 세상은 조금도 변함이 없사오니 제자의 의혹이 나날이 자심(滋甚) 하나이다. 선생님 하루바삐 세상을 뒤집어서 선경을 건설하여 남의 조소를 받지 않도록 하시고 애달프게 기 다리는 우리에게 영화를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선생이 말씀하시길, 「인사(人事)는 기회(機會)가 있고 천리(天理)에는 도수(度數)가 있으니 그 기회(機會)를 지으며 도수(度數)를 운화함이 당연한 일이라. 이제 기회와 도수를 어기고 억지로 사권(私權)을 쓰면 이는 천하에 재(災)를 끼침이 더욱 억조의 생명을 빼앗음이니 차마 할 일이 아니다.」 고 하시되, 원일이 말하기를 「당장 천하가 혼란무도(混亂無道)하야 선악(善惡)을 가리기 어려우니 빨리 잔멸하고 새 운수를 여심이 옳습니다.」 고 하였다. ·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 제생의세(濟生醫世)는 성인(聖人)의 도(道)요, 재민혁세는 웅백(雄伯)의 술(術)이라. 이제 천하(天下)가 웅백(雄伯)에게 괴로운지 오랜지라. 내가 상생(相生)의 도(道)로써 화민정세(化民靖世)하리니 새 세상을 보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마음을 고치기가 어렵다」 고 하였다. 26) 김광찬(金光贊)이 동짓달에 개벽을 속히 붙이지 아니하심을 조급하게 생각하여 모든 일에 불평을 품어 항상 좌석을 시끄럽게 하며 말하기를 「내가 집안일을 돌보지 아니하고 여러 해 동안 선생을 따르기는 하루바삐 새 세상을 보자는 일이거늘 이렇게 시일만 천연함에 집에 돌아가서 처자권속을 대할 낮이 없으니 차라리 스스로 생명을 끊음만 같지 못하다」 고 하였다.27)
25) 홍범초, 「증산대성의 생에」, 『증산사상연구』 1, 증산사상연구회, p.138.
26) 『대순전경』 1, 3장 36절.
위의 예에서 보면, 종도들이 기다리는 새 세상은 증산의 생각과는 달리 자신들이 부귀영화를 누려야 하는 새 세상이요, 그것도 하루빨리 얻어야 하는매우 조급한 일이었다. 증산이 자신들에게 가져다줄 현세 이익적인 복락, 그것이 종도들이 증산을 따르는 이유였던 것이다.
증산은 그런 종도들의 기대와는 달리 그들의 다급한 마음을 회유하여 대도를 바르게 수도하도록 오묘한 가르침을 베푸는28) 한편 천지공사에 매진하였고, 9년간의 천지공사를 마무리할 단계에 이르러서는 서서히 자신의 죽음을 예시하기 시작하였다. 증산이 38세 되던 해에 여러 종도들에게 「내가 비록 죽을지라도 너희들이 마음을 변치 않고 믿겠느냐」 고 종도들에게 다짐하였으며,29) 동짓달에는 「너희는 죽는 일을 장차 나에게서 보라」 30)고 예시하였다. 그러나 종도들은 아무도 증산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증산의 나이가 40세를 넘지 않은 장년이었고, 무엇보다도 무소불능(無所不能)한 권능을 지닌 증산이 장생불사(長生不死)할 것임을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증산이 「사람의 죽는 길이 먼 것이 아니라 문턱 밖이 곧 저승이니 나는 죽고 살기를 뜻대로 하노라」 31)고 한 말과 화천하기 하루 전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쉬우니라. 몸에 있는 정기만 흩으면 죽고 다시 합하면 사나니라」 32) 고 한 말에서도 증산이 화천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증산이 화천하기 전 몇 사람에게 당부의 말을 하였는데, 먼저 자현에게
「네가 나를 믿느냐」 고 다짐하고는 「내가 장차 어디로 가리니 내가 없다고
27) 『대순전경』 2, 10장 3절.
28) 증산종단친목회, 『종산종단개론』, 대순백주년기념회, 1971, pp.34-35.
29) 『대순전경』 3, 9장 1절.
30) 『선도진경』, 9장 5절.
31) 『대순전경』 2, 10장 7절.
32) 『선도진경』, 9장 30절.
핑계하여 잘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다 잊으리라. · 내가 가서 일을 행하고 돌아오리니 그때까지 믿고 기다리라. 만일 나의 그늘을 떠나면 죽을 것이다.」 고다짐하였다.33) 또 22일 날 김형렬에게 증산은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다」 형렬이 「재질이 둔박하와 감당치 못할까 하나이다」 고 대답하는 것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무한 유사지 불명(無眼有司之不明)하라. 마속(馬謖)은 공명(孔明)의 친우로되 처사를 잘못함으로써 공명이 휘루참지(揮淚斬之)하였으니 삼갈지어다.」 고 일러 주었다.34) 화천하던 날 이른 아침에는 경석을 불러 흘겨보시면서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이냐」 고 나무랐다.35)
증산은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36) 「나의 얼굴을 똑바로 보아두라. 후일 내가 출세할 때에 눈이 부셔 바라보기 어려우리라.」 37)고 말하고 잠자는 것과 같이 화천38)하니, 갑자기 뭉게구름이 사방을 덮어 뇌성벽력이 일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화천한 지붕으로부터 서기가 구천(九天)에 통하였다. 때는 단기 四千二百四十二년 이조 순종 융희 三년 기유 六월. 十四일 신축 사시이고 서기로는 -九0九년 八월 九일이었다.
증산의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화천은 새로운 선경세계가 도래할 것을 갈망했던 종도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대다수의 종도들은 증산이 화천하자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실망한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촌산지순이 쓴 『조선의 유사종교』 에 따르면 종도들은 「이제까지의 신앙은 자신들의 미신이었고, 교조에게 기만당한 데 불과하다」 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39) 배신감을 느낀종도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조차도 꺼렸다. 장례식에는
33) 『대순전경』 1, 12장 21절.
34) 『대순전경』 1, 12장 23절, 24절.
35) 『대순전경』 1, 12장 28절.
36) 『전경』, 행록 5장 33절.
37) 『전경』, 행록 5장 25절.
38) 화천(化天). 절대권능을 지니고 강세한 증산 상제가 그 광구천하의 역사를 다 끝내고 다시 본래의 신계로 되돌아가는 것이다.(대순종학 교재연구회, 『대순사상의 이해』, 경기 포천 : 대진대학교출판부,2007, p.100.)
39)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 경성: 朝鮮總督府, 1935, p.300.
김형렬 · 차경석 · 박공우 · 김자현 · 김덕찬 여섯 사람만이 치상하여 성체(聖體)를 구릿골 뒷산 장탯날 기슭에 초빈(草殯)하였다.40)
증산의 장례식에 참석한 종도들이 불과 몇 명밖에는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많이들이 현실적인 이익, 즉 왕후장상의 꿈을 이루기 위해 증산을 스승으로. 삼았던 것에 불과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례식에 참석했던 김형렬도 자기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저세상으로 가버린 증산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1902년부터 그를 따라 8년간이나 고락을 같이하던 지난 세월이 너무나 허망했다. 형렬은 수일간 침식을 잊고 슬픔에 잠겨있었다고 한다. 차경석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장례식을 마친 뒤 고향인 정읍 대흥리로 돌아왔으나, 심한 좌절감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는 때때로 대흥리 남쪽 비룡산에 올라가 하늘을 우러러 옥황상제를 부르면서 땅을 치며 통곡하곤 했다. 촌산지순의 해설에 의하면, 차경석의 행위는 증산에 대한 신앙심이 근본적으로 파탄 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증산은 전지전능한 신인(神人)으로서 천지의 권능을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불사신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보통사람과 마찬가지로 죽었다는 것이다. 증산에 대한 믿음에 깊은 의문이 생겨 이를 고뇌하느라고 먹고 자는 것도 며칠씩 잊었으나, 하등 얻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통곡했다고 한다.41)
증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종도들은 정신적 공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금산사 미륵전에 가서 치성을 올리기도 하고, 증산과 같은 능력을 갖춘 이 가 또 있을까 하여 두서너 명씩 짝을 지어 사방으로 돌아다니기도 하였다.42)김형렬과 차경석도 역시 다른 스승을 찾기 위해 전북 부안군 변산 일대를 수소문하였다.
그런 와중에 증산이 화천 한 이듬해 2월에 김경학이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
40)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145.
41) 村山智順, 같은 책, pp.299-300.
42) 증산종단친목회, 같은 책, p.76.
왔는데, 노모(老母)가 급병으로 사망하여 장례 지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만고대신인(萬古大神人)을 따르다가 노모 상(喪)에 종신까지 못하게 되었으니 스스로도 믿지 못하겠노라」 고 탄식하면서 통곡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음을 돌려 증산을 향하여 태을주를 외우니 돌아가신 노모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다. 김경학은 이때부터 「태을주로 사람을 많이 건지리라」 고 한 증 산의 말을 깨닫고 이웃마을에 병자가 생기면 자청하여 태을주를 외워서 고쳐 주자, 경학이 신의(神醫)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43)
그때 마침 유의경이 장티푸스에 걸려서 죽게 되었는데, 여기에 김경학은 밤에 청수를 올려 기도할 때 태을주를 외우니 며칠 만에 완쾌되었다. 유의경은 경학에게 치유되기 어려운 병이 어떻게 완치되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경학은 증산의 신성한 주문에 대해서 말하고는 의경을 신앙의 길로 인도하였다.44)그리고 경학은 의경을 데리고 금산사 미륵전에 가서 치성을 드리고 동곡약방에 가서 증산의 유적을 돌아보며 수일 동안 머물렀다. 약방에 머물던 어느 날, 유의경은 약방 동편 문지방 위 한가운데 벽지에 십자형(十字形)의 칼끝 흔적이 보여 떼어보니 봉명개훈(奉命開訓) 넉 자가 있었다. 의경이 이상하게 여기고 다른 곳을 두루 살펴보자 약방 아랫목 벽 위에 또 십자형의 칼끝 흔적이 있어 떼어보니 한자 길이가 되는 큰 일자(日字)가 씌어 있었다. 봉명개훈(奉命開訓)이란 '명을 받들어 교의(敎義)를 밝혀 세상에 펴기 시작하라'45)는 뜻으로, 이 구절을 교인들은 태을주로서 수행하여 널리 전파하라는 뜻으로 해석했다
그 후 유의경은 집에 돌아와 저녁에 청수를 올리고 태을주 수련에 몰두하다가 신안이 열리는 기적이 나타났다. 이 소문을 듣고 유의경을 찾아오는 사람이 날로 많아져서 비로소 포교가 시작되었다.46)
43) 이정립, 『증산교사』, 전북 김제: 증산교본부, 1977, p.42.
44) 김탁, 「증산교의 교리체계화 과정」, 『증산교학』, 서울: 미래향 문화, 1992, pp.123_124.
45) 홍범초, 「일제하 증산종단의 개창과 추구한 민족운동」, 『일제하 증산종단의 민족운동』, 충남 예산: 증산종단연합회, 1997, pp.14-15.
46) 이정립, 같은 책, p.43.
증산의 화천 후 종도들이 느낀 좌절감이나 그로 인한 방황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종도들 자신의 문제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종도들은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이나 증산이 설파하는 진리의 내용에 천착하기보다는 증산의 무소불능한 권능에 의해 자신들에게 주어질 현실적 이익에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증산이 행하는 천지공사를 단편적으로 이해하여 증산이 제시하는 미래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오직 증산으로부터 도통이라는 능력을 부여받거나 증산이 새 세상을 건설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질 현세적 이익에 집착하였으므로 증산의 화천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증산은 누차 자신이 화천하려는 계획에 대해 언질을 주었음에도 종도들은 눈치채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들에게는 증산의 화천이 너무나 갑작스러운 사건으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으로 비춰졌던 것이므로 그들이 느껴야 하는 좌절감과 그로 인한 한동안의 방황은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두 번째 이유는 증산이 재세시에 일정한 규모를 갖춘 종교로서의 교단조직을 형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단을 조직하는 목적은 자신이 의도한 어떤 진리를 펼치고자 하는 것으로, 일차적으로는 그 진리를 어느 정도이해하는 사람을 양성하여 이를 기반으로 인원의 확대 재생산을 위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산의 언행을 살펴보면 증산은 이러한 의도를 가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증산은 천지신명의 하소연에 의해 인신으로 강림한 우주를 관령하는 조화주로서 '천지도수(天地度數)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도로 후천의 선경'을 세우기 위한 천지공사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증산에게는 진리를 전달하는 현실적인 인간의 조직보다는 이보다 근원적인 문제, 즉 천지인 삼계를 조화하는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당시 종도들의 인원수에 대해서 후인(後人)들은 유불선서도(儒佛仙西道)에
응하여 네 명의 종도(四宗徒)가 있었다고 하고, 팔괘에 응하여 팔봉(八封)을 맡긴 여덟 명의 종도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이십사절후에 응하여 이십사명의 종도, 이십팔장에 응하여 이십팔 명의 종도, 또는 사십팔 장에 응하여 사십팔 명의 종도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종도들의 확실한 수효를 밝히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증산은 종도들을 일정한 장소에 모두 모아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 계속하여 어떤 율(律)을 세워 교화하거나 도(道)를 강명(講明)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천지공사를 행하면서 그때 접견(接見)하는 종도들에게 한 말이 법인이었고 훈회였으며, 종도들에게 보여준 모는 일들이 기행이적이었다. 그리고 병자를 다스린 수많은 일들이 치병이었으며, 종도들의 궁금증을 풀어서 한 말이 예시였다. 그러므로 증산의 가르침을 받았던 종도들의 수효가 몇이라고 분명히 밝히기는 어렵다. 증산의 언어와 행적을 잘 살펴보면 종도들의 성품과 기질에 따라서 천지공사의 많은 분야 가운데 어느 한 曰야를 그 사람에게 맡기거나 또는 천지공사로 결정된 어느 한 분야의 일을 그 사람에게 맡겨서 이루도록 한 사명이었을 따름이었다.47) 증산의 주목적은천지공사의 집행이었고, 그 의미를 모두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이에 참관하고 돕고 심부름하고 쓰이는 종도들에게 일정한 규모나 격식이 없는 그때그때의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던 것이다.
이러한 증산이기에 인세에서 후계구도를 정하지 않았다. 증산은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 48) 라고 함으로써 종도들이 그토록 열망하는 도통은 '대두목'이라는 증산의 대행자를 통해 성취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또 다음의 내용을 보면 그 대행자는 당시의 종도들에 속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47) 증산종단친목회, 같은 책, PP. 30-31.
48) 『전경』, 교운 1장 41절.
상제께서 동곡에 머물고 계실 때 교운을 펴시니라. 종도 아홉 사람을 벌여 앉히고 갑칠에게 푸른 대(竹)나무를 마음대로 잘라 오게 명하셨도다. 갑칠이 잘라 온 대가 모두 열 마디인지라. 그중 한 마디를 끊고 가라사대 「이 한 마디는 두목이니 두목은 마음먹은 대로 왕래하고 유력할 것이며 남은 아홉 마니는 수교자의 수이니라」 그리고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하늘에 별이 몇이나. 나타났는가 보라』 하셨도다. 갑칠이 바깥에 나갔다 들어오더니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나 복판이 열려서 그 사이에 별 아홉이 반짝입니다」 고 아뢰니라. 상 제께서 「그것은 수교자의 수에 응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도다.49)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의 상징성을 이해하면, 아무렇게나 잘라온 대나무가 열 마디인데, 잘라낸 한마디는 대두목이고 나머지 아홉 마디는 수교자에 해당하며, 당시 참가한 종도가 아홉 명, 그리고 그 수교자의 수에 응해 아홉 개의 별이 나타났다는 것은 증산의 재세 시 증산을 따르던 종도들 중에는 후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종도들 자신의 천지공사에 대한 이해부족과 증산 재세시 교단조직 부재, 그리고 증산의 후계구도 미정 등으로 인해 종도들은 커다란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증산과 종도들 사이를 연결해주던 구심점의 상실은 이들에게 좌절과 패배의식만을 가져다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종도들은 증산이 천지공사를 단행한 목적을 이해하기보다 세상을 변화시켜 자신들에게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증산이 화천하자 많은 종도들이 흩어졌고, 남아 있던 종도들은 목적 의식없이 증산을 원망하며 세월만 보냈다. 그때 김경학이 신비 체험을 통해서 처음으로 포교하게 되자 종도들도 서서히 태을주로 수련을 시작하였다.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태을주의 기적은 점차로 증산이 어떤 인물이었던 가에 대해 구전으로 전해졌고, 신앙의 형태를 띠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9) 『전경』, 교운 1장 38절.
교단창립을 선포하고 교단을 처음으로 조직한 인물은 증산의 천지공사와 관련이 깊은 고 부인50)이다. 고 부인(高夫人)은 1907(정미)년에 차경석의 이종매(姨從妹)이며 수부로 천거된51) 인물이다. 증산이 동곡약방에서 화천 하였을때, 종도들이 이 사실을 고 부인에게 숨기고 증산은 청국공사를 보려고 남경에 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고 부인은 '신안'이 열리는 현상을 종종 체험했다. 1910년 9월 초 어느 날 저녁에 부인이 주문을 읽다가 광명 속에 문득 대흥리에서 구릿골까지 가는 길이 나타나며 구릿골 뒷산에 초빈(草殯)이 보이고 초빈아래 시추물 묻은 모습까지 보여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이튿날 저녁에 문득 증산이 들어오면서 「내가 죽었는데 어찌 나의 묻힌 곳을 찾아보지 않느냐」 는 꿈을꾸었다. 고 부인은 밤을 새워 고민하다가 이튿날 새벽에 전날 밤 광명 속에 나타났던 길을 따라서 걸음을 재촉하니 팔십 리를 한나절에 당도하여 증산의 초빈(草殯) 앞에 이르렀다. 초빈을 파헤쳐 널 천개(天蓋)를 떼어서 고 부인이 가지고 왔던 진주를 증산의 입술 안에 넣고 한삼(汁衫)을 가슴에 덮고선 그 위에 옥황상제라 쓴 백로지를 덮고 천개(天蓋)를 다시 덮은 뒤에 준비하여 온주과포로 전(奠)을 올리고 초빈을 다시 봉하였다.52)
그 뒤 1911년 4월에 고 부인은 차경석과 함께 증산이 49일 불음불식을 한 대원사 칠성각에 가서 수련하였고, 고부 와룡리 신경수의 집에 가서 100일 동안 수련하기도 하였다.53) 이 해 9월 19일에 고 부인이 증산의 강세치성을 올
50) 본명은 고판례(1880-1935)로 전라도 담양군 무면 성도리에서 탄생하였다. 각 교단에 따라 고 부인, 태모 고수부(太母高首婦), 천후(天后), 사모님 등으로 불리어 진다. 『선도진경』 에는 이름 없이 일반호 칭인 '고 부인(高夫人)'으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에 따르기로 한다.
51) 『선도진경』 (1965), 2장 58절.
52) 李正立, 『高夫人神政記』, 전북 김제. 甑山大道會本部, 1963. pp.19-24.
53) 이정립, 『증산교사』, p.232.
렸는데 증산의 강세치성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증산의 강세치성을 올린 다음 날 아침에 고 부인이 마당에서 혼도(昏倒)하여 정오쯤에 갑자기 일어나 기괴한 음성으로 경석에게 몇 가지를 물었는데, 그 음성이 증산의 음성과 흡사하였다고 하며, 그로부터 고 부인은 신력을 통해 신이한 기적을 일으키고 명철한 지혜를 얻게 되었다고 한다.54) 극적인 신비체험을 한 고 부인은 차경석을 시켜 증산이 생전에 천지공사를 주로 행하던 동곡약방에 가서 증산의 유물을 모두 가져오도록 하고, 종도들을 불러 모아 교단 창립을 선언하여 대흥리 경석의 집을 본소로 지정하였다. 고 부인은 증산의 천지공사 중 남녀평등, 여성해원공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띠는 수부(首婦)로 천거되었으므로 당시의 종도들에게는 나름대로 일정한 권위가 인정되었고, 증산의 화천 후 위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신비적 체험을 보여 주었으므로 많은 종도들이 고 부인의 교단 창립 과정에 같이 참여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성은 증산이 3년간 태을주를 읽으라는 명령에 증산이 화천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교단을 장립할 때 참가하였으며, 김형렬도 1913(계축)년에 교단에 협력하였다.
종도들은 유의경이 수련하던 방법을 채택하여 각처에서 포교에 힘쓰니 교세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3년 동안에 전라남북도, 충청남도, 경상남도와 서남해중(西南海中) 모든 섬 일대에는 거의 태을주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914년 순천 장기동에 의하여 교실(敎室)을 짓게 되어 비로소 본소(本所)의 면목을 세우니 이에 더욱 교세가 날로 흥성하였다.55)
초기 고 부인이 교단을 장립할 때에는 체계적인 교리와 문서화된 경전도 없었다. 그런데 단기간에 급격한 교세 확장을 가져온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첫째는 태을주 수련의 효과였다. 태을주를 주송하며 수련을 하면 영적인 신비체험을 느끼게 되고 심지어는 병이 치유되는 효과까지 얻게 되었다. 치병이 동
54) 이정립, 『天后神政記』, 전북 김제: 증산교본부, 1963, 1기120-21.
55) 이정립, 『증산교사』, pp.49-51.
기가 되어서 입교하더라도 치병은 주문을 읽는 생활을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계시(啓示), 전신(轉身), 개안(開眼) 같은 여러 가지 효험 가운데 하나의 신비 체험이므로 치병과 함께 신비체험은 그 당시 교인들에게 아주 신선한 매력이었고, 이것은 훌륭한 포교 수단이었다.
동아일보 1922년 2월 25일 자 「풍설이 전하는 태을교」 라는 제하(題下)에서 '개안(開眼)은 여하(如何)한 것'이라는 소제(小題)를 달고 풍문으로 들은 개안 현상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7일을 밤낮 그 주문(呪文)만 외우면 눈뜨고 앉았는데 무엇이 나타나는데 나타나는 것은 혹은 사람이 오고 혹은 호랑이가 오고 혹은 산이 나오고 혹은 강이 나와 세상에 있는 것은 모두 나오는데 이것을 개안이라 하고 1년이나 2년 동안 주문을 읽으면 점잖은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그 교(敎)에서는 승 안(承顏)이라 하고 주문을 외우다가 펄펄 뛰게 되는 것을 전신(轉身) 혹은 강령(降靈)이라 하고 혹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게 된다.
위와 같은 전신 혹은 개안을 통한 신비체험에 의한 포교운동은 초기 증산교단의 성립 과정에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둘째,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갈망한 민중의 꿈이 급격한 교세 확장의 한 조건이 되었다. 고 부인이 교단을 개창하여 포교를 시작할 때는 일제강점기 시대로 총독부가 우리 국민을 억압하는 야만정책을 실행하여 하루하루가 공포에 쌓인 암울한 때였다. 이러한 시대에 포교에 성공하여 점차 교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왕조의 폭정에 착취당하고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나라를 잃고 절망에 빠진 민중들에게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희망을 안겨준 데 있었다. 유 · 불 · 도 삼교나 동학 또는 각종 비결에도 미래에 대한 예언이나 이상이 없지 않았으나 증산계 교단의 그것에 비하면 하찮은 것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당시 민중들에게 큰 매력은 증산의 권능이었다. 증산이 삼계(三界)의 모든 권능을 한 손에 쥔 조화주(造化主)임이 들림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증산에 대해 들었던 사람은 신도가 되고 그가 또 다른 사람을
권유하게 되어 포교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종도들이 들려주는 말은 민중들에게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었던 것이다.56)
증산계 교단 초기의 교인들이 구화전언(口話傳言)한 내용이 어떠하였는지 당시의 동아일보 1922년 2월 23일 자 '풍설(風説)이 전하는 태을교'라는 제목의 기사 일부이다. 「스스로 옥황상제라고 칭하며, 신축년부터 그가 죽은 기유 년까지 아흡해 동안에 천지공사를 행한 일은 비를 오라하면 맑은 하늘이 금시에 비가 오고 바람이 불으라고 하면 금시에 바람이 대작하여 어지러히 티끌을 날리어 풍운조화를 마음대로 부리었다는데 제일 교도의 입에 전파되는 일은 49일 동남풍을 불게 한 것과 큰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한 것이라 하며 자기만 그러할 뿐 아니라 자기 제자에게도 내가 네게 용기(龍氣)를 준다고 하면 그 제자는 마음대로 비를 오게 할 수 있었고, 병든 사람을 한말로 고치며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려내어 그 신기한 품이 귀신을 울릴 만 하였다」 고 쓰고 있다.
길천문태랑(吉川文太郎)이 1921년에 쓴 『朝鮮の宗敎』 와 1922년에 쓴 『朝鮮諸宗敎』 에서 태을교에 대해 '전라북도에서 처음으로 창도하여 1920년이 이르러서는 충청남도 각지에 유입하여 교지(敎旨)의 선전을 시작하더니, 그 후에 다시 경상남도 부산 부근에도 많은 수의 신도가 있게 되었다. 부산 부근에 거주하는 사람이 약 4만 명에 불과한데 그 가운데 2만여 명이 태을교 신자가 되었는데, 가히 그 추세를 알만하다.' 라고 하였다. 그 당시 부산에만 해도 부산 인구의 절반이 태을교 신자였다고 하니 교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겠다.
고 부인이 종도들을 모아서 최초로 교단을 조직한 것은 증산사상에서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된다. 비록 경전은 없었더라도 태을주의 효력은 희망을 잃은 민중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여 급속히 확산하었다. 이러한 결과는 고 부인에게 집중되던 교단이 이제 각 종도들에게도 증산의 권능을 이
56) 홍범초, 「일제하 증산종단의 개창과 추구한 민족운동」, pp.24-25.
용한다면 어떠한 것이라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해 주었다.
증산이 화천한 후 2년 뒤 고 부인이 교단을 장립할 때 차경석은 누구보다도 적극적이었다. 이 교단은 처음에 뚜렷한 교명(敎名)이 없었는데 교인들이 태을 주로 기도를 하므로 세간에서 태을주를 외우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태을교'라고 부르게 되었다.57)
고 부인의 주재 하에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립하고 운영하니, 찾아오는 교인들은 고 부인을 숭앙하는 대상이었다. 반면에 차경석은 대흥리 자기의 집이 본소로 지정되어 교단의 안팎일을 총괄하여 차츰 상당한 인권을 쥐게 되었지만, 교단의 주인은 고 부인이었고, 차경석은 어디까지나 고 부인을 보좌하는 지위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이것에 불만을 품은 경석은 교단의 기초가 다져지고 교세가 불어나자 교단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먼저 종도들과 교인들 사이에 이간질을 붙여 불신감을 조장하고, 다음에는 고 부인의 법소에주렴을 걸어놓고 예문(禮門)이라 하여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교인들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겉으로는 부인을 높이는 척하였지만 실상은 부인을 만나려는 교인과의 사이에 간격을 멀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이것을 본 종도들은 경석의 야심을 간파하고 모두 분개하여 교단을 떠나 따로 종교를 창립한 사람도 있고, 경석을 따돌리고 부인의 법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운동한 사람도 있었다.58)
본소에 종도들의 발걸음이 끊어지고 오직 경석과 그 아우들이 부인을 모시
57) 고 부인의 교단을 세간에서 태을교라고 불렀는데, 『朝鮮の宗敎』 (1921)를 지은 길천문태랑(吉川文太郞)이 ‘태을교를 창개(倉開)한 사람이 증산’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와 차별하고자 하여 이정립이 1961년에 동도교 및 증산계분파도에서 고 부인이 세운 교단을 선도교라 한(홍범초, 『범증산교사』, p.35)것을 수용하여 필자는 '선도교'라 지칭하기로 한다.
58) 이정립, 『天后神政記』, pp.27-28.
며 교인들을 응접할 뿐이었다. 이에 경석은 심복신도 24인에게 방주의 임명장을 주어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교도들을 수습하고 교권을 장악한 뒤에 교인들이 고 부인을 만나는 길을 막아버리고 1917년에 유람의 길을 떠났다. 경석이 떠난 뒤에 부인은 1년 동안 교인들을 만나지 못하고 한가한 세월을 보내다가 1918년 9월에 대흥리를 떠나 김제군 백산면 송삼리 천종서의 집으로 옮겨서 선도교를 세웠다. 부인이 자유로이 포교활동을 펴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이 부인을 추종하게 되었다.59)
이와 같이 고 부인과 차경석의 교단분립은 증산교계 분열의 시초가 되는데, 이후 증산을 따르던 종도들은 각자 정통한 교통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씩 교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차경석이 증산에게서 교통을 받았음을 빙자하여 스스로 교주가 되면서부터 야기된 교통전수 주장은 바로 교단이 분열하는. 있어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고 부인과 차경석의 교단분립은 초기 증산계 교단이 갖고 있었던 교단 조직상의 취약점이 그대로 표출된 것으로 고 부인이 종도들로부터 전폭적인 신뢰를 얻지 못했음을 뜻하기도 하였다. 말하자면 종도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경험이나 증산의 권능을 내세우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종도들은 증산이 재세시에 자신에게 주었던 공사의 내용이나 훈회를 바탕으로 자신의 법통을 내세우거나, 또는 증산의 유해(遺骸)나 유품소유로 연계성을 강조하면서 새로운 교단들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의 교단 내에서도 약간의 의견대립이 발생할 경우, 증산과의 연계성이나 새로운 종교적 경험을 내세우면서 교단이 분열하는 사례가 번번이 발생하곤하였다.
최초로 교단을 이탈한 사람은 김형렬이다. 그는 고 부인의 교단에 합류한 지 불과 1년도 안 되어 그곳을 떠났다. 그 이유는 차경석이 장기동 · 장기준
59) 이정립, 『증산교사』, pp.239-240.
과 김형렬의 교류를 끊으려고 한 사실이다. 차경석은 장기동에게 「증산께서형렬을 불길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이 뒤로는 고 부인과 내왕하고 형렬과 상종하지 않는 것이 옳다」 고 권했다. 장기동은 차경석이 종도들 사이에 중상모략하여 이간질하는 것에 실망하여 형렬에게 가서 그 일의 전말을 말하였다. 김형렬은 크게 분노하여 본소에 발을 끊어버리고 여러 종도들에게 이 사실을 공개하고 나서 자신을 따르는 교인들과 함께 미륵불교라는 교단을 세웠다.60)
그 이면에는 사실 차경석이 교단 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다. 그는 장기준 · 장기동과 같은 영향력이 있는 교인들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여 종도들의 연합교단이라는 조직 위상을 자기중심의 일원적 체계로 바꾸고 싶었다. 김형렬은 이런 차경석의 독단적인 체계의 교단운영방식을 차마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분노하고선 떠나버린 것이다.
김형렬의 이탈은 교단 내에 심각한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고 부인을 정점으로 하는 종도들의 단결이 와해되었음을 의미했으며, 김형렬에 뒤이어 다른 종도들도 교단을 속속 떠났다.
안내성도 1914년 봄에 분파하였다. 전남 · 순천 · 여수 등지에 가서 포교에 종사하다가 1914(갑인)년 봄에 내성이 사치한 옷을 입고 말을 타고 교인 두어 사람을 데리고 본소에 왔다. 경석이 교금을 당비한다고 꾸짖으니 내성이 불평을 품고 돌아가서 교단을 이탈하고61) 여수옵 가국리에서 따로 교단을 창설하여 증산대도교라 하였다.
같은 해 박공우는 정읍군 흥덕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후일 박인암 교단을 세웠다.62) 그리고 문공신은 증산이 화천하신 뒤 수도에만 전념하자 사람들이 명망이 있는 도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을 가르치다 보니 1928(무진)
60) 홍범초, 『범증산교사』, 11180.
61) 이정립, 『증산교사』, p.68.
62) 홍범초, 『범증산교사』, p.224.
년에는 치성 때 오륙십 명이 모였다. 후일 문영상교단이라는 새 교단이 세워지게 되었다.63)
1916년에 이치복이 원평에 제화교를 세웠지만 교세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고, 1920년에 김광찬이 도리원파를 세웠는데 문인 이근하가 전승(傳承)하여 신화교라고 했다가 이씨 사후 소멸된 것도 있다.64)
차경석이 고 부인의 도와서 교단을 창설했지만, 교단을 장악하려는 야망의 표출로 많은 종도들이 본소를 떠나 각자의 교단을 형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대표적으로 고 부인은 선도교, 김형렬은 미륵불교, 안내성은 증산대도교를 세웠으며, 그 외에도 많은 종도들이 우후죽순으로 교단을 형성하여 일제강점기에 증산계 교단의 수효가 한때 100여 개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나, 하나의 교단이 재차 삼차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은 초기 교단분열의 개연성이 입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65)
증산계 교단이 형성되어 종도들의 활발히 포교활동을 하던 기간은 일제강점기였다. 당시 신교(信敎)나 집회(集會), 결사(結社) 등의 자유가 철저하게 통제되었던 만큼, 종도들의 종교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을사늑약 체결(1905년)부터 한일합방까지를 전 단계로 본다면, 그 후의 일제강점기는 기미독립운동 발발(1919년)까지를 제1기, 만주 사변발발(1931년)까지를 제2기, 조국광복(1945년)까지를 제3기로 구분해 볼 수
63) 홍범초, 「일제하 증산종단의 개창과 추구한 민족운동」, p.21.
64) 이강오, 같은 책, p.195.
65) 노길명, 「일제하 증산교운동」, 『한국근대종교사상사』, 전북 : 원광대출판국, 1984, p.1005.
있다.66) 이들 시대를 성격지운다면 제1기는 무단통치시기, 제2기는 문화정치시기, 제3기는 병참 기지화 및 전시동원시기라는 특징이 드러난다. 일제시대에 있어서 증산계 교단의 종교운동을 시대구분과 관련해서 보면 그 성격이 명료해진다.
먼저 일제강점기의 제1기(1910~1919)에는 종도들에 의해 많은 교단이 형성되는 시기이다. 1911년 고 부인을 중심으로 교단을 창립한 때부터 조 드 드 이 교단을 이탈하여 각자 종교를 펴기 시작한 시기로 그 교단의 명칭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 시기의 증산계 교단은 증산의 가르침이 매우 상징적인 것처럼 교단 체제 역시 조직화나 법제화 등의 제도적인 장치가 뚜렷하지 않았고,67)교리서 내지 언행록이 갖추어지지 않은 기간이다. 따라서 화천 후의 종도들은 통일된 체계 아래서 그 가르침을 전하기보다는 각각의 경우와 처지에 따라 그 가르침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시기의 교단으로는 선도교. 보천교 · 미륵불교 · 증산대도교 · 순천교 등이 있었다.
차경석의 보천교가 일제로부터 최초로 탄압을 받은 것은 1914년이다. 그 해 5월에 「차경석은 대사상(大思想)과 신통묘술이 있어 새로운 정부를 조직하려한다」 는 내용의 밀고자가 있어 차경석이 천원헌병대에 구속신문을 받았다.68)또 1915년에 차경석은 머지않아 조선을 독립하여 황제가 된다는 말로 농촌의 어리석은 농민들을 꾀어서 금전을 편취하고 정치적 음모를 획책한다고 고발되어 일본헌병들의 조사수색을 당하였다.69)
김형렬은 1916(병진)년 봄 독신자 360명을 선발하여 전국 360군(郡)에 파견하고, 모두 한날한시에 물형부인 육무(六戊)를 전시주 밑에 묻으라고 하였다. 육무를 묻으면 한 달 이내에 일본에 큰 변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
66) 조용만, 「일제하의 우리 신문화운동」, 『일제하의 문화운동사』, 서울: 현음사, 1982. p.4.
67) 노길명, 같은 책, p.1004. '강일순 생존시의 증산종교운동에서는 창시자와 추종자간의 수직적 관계만 존재할 뿐, 추종자간의 수평적 관계나 교단조직은 발전되어 있지 못하였다.'
68)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전북정읍: 보천교편집국, 1935, PP.2-3.
69) 이영호, 같은 책, PP.5-6.
였다. 그 결과 아무런 변란도 일어나지 않아 교인들에게는 실망만 안겨주었지만, 당시 김형렬의 마음속에 일본에 대한 적개심 내지는 민족해방에 대한 염원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917년 박금곡, 곽법경과 3인이 결의하여 독립운동 군자금을 보급키로 하고, 김형렬은 모금 대표자가 되어 미륵불교의 6천여 신도를 대상으로 모금 운동을 일으켜 백성욱을 통하여 극비리에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70)
1918년 10월 제주도의 보천교교인 문인택이 교금 10여만 원을 면화포대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오다가 목포의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검거되었다. 이로 인해 인택의 구초(冂招)로 고 부인과 차윤칠, 방주 18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뒤이어 보천교인 검거 선풍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때 이런 검거를 당한 것은 그 해 9월에 제주도인 김연일(金延日)이란 술사(術士)가 국권회복의 미명아래 우란분회(盂蘭分會) 때 제주도 법정사에서 교도 약 30명을 소집하여 「왜노(倭奴)는 우리 조선을 병합하고 동포를 학대하니 우리 조선 민족의 구적(仇敵)이 되었다」 고 하고 머지않아 자신은 불무황제(佛務皇帝)가된다고 하였다. 신도들을 모아서 전선을 절단하고 내지인(内地人:望芒) 의. 사 외 2명을 부상시켰으며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 방화전소한 사실이 드러나 138명을 검거했다71)고 일제 측에 기록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보천교와 연관이 있는가 하여 검거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당시 보천교에 대한 사찰은 당시 한국사회의 정황을 잘 드러낸다. 통치차원에서 단속하는 종교 활동인 만큼 민중의 신뢰가 보호막일 수밖에 없었고, 종도들을 통해 포교 되던 당대의 증산계 교단의 운동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 을 제정 · 공포하였는데, 이것은 처음으로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구분하여 법제화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70) 『대한불교법상종지』, 대한불교법상종편, 대전: 호서출판사, 1975, pp.137-138.
71)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제1권분책』, 민족주의운동편, 동경: 원서방, 1967, p.247.
「포교규칙」 제1조에 의하면 일제가 공인한 종교는 신도(神道),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만으로 제한하였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와 일본의 국체를 승상하는 신도교는 조선총독부가 정책적으로 확산을 시도한 종교이다. 불교는 일본문화의 중추를 이루는 종교이기 때문에, 조선불교라고 해서 공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찰령에 따라 한국의 불교는 이미 구조적으로 통제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다만 기독교의 경우는 외국 선교사와 그 배후 서양의 국제세력, 그리고 일본이 근대화의 모델로 삼고 있던 서양 선진국의 기독교에 대한 우대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기독교를 종교로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처럼 일본은 제국주의의 정치적 목적에 이로운가 해로운가가 종교공인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종교적 자질에 대한 합리적, 객관적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신도, 불교,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들은 공인종교의 조직체로 인정되지 않고, 유사종교, 사교, 사이비종교의 굴레로 지칭되었다.72) 이런 상황이라도 증산계 교단의 교인 수는 1911년 교단 설립 후 줄곧 교세가 확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73)<표2>
제2기(1919~1931)에는 3 · 1운동 후 보천교의 교단 공개 등 증산계 교단의 종교활동이 확산하는 시기이다. 이때 일본은 1919년 3· 1운동과 같은 거국적인 저항을 경험하면서 1920년대부터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시행하기에 이른다.1920년대의 문화정책은 무단정치에 비하면 민족진영의 운동방향을 일제에 덜 위협적인 방향으로 그 색채를 전환하고,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민족항일세력을 분열 · 약화시키는 한층 지능적인 분할통치정책이었다. 이때 실시된 일제의 종교정책은 본격적으로 비공인종교인 유사종교를 표면으로 공개하여 분열, 분리, 분쇄한 것이다. 그 예로 동학계열, 증산계열, 단군 또는 유교계열 등을 유
72) 윤이흠, 『한국종교연구』 5, 집문당, 2003, pp.247-254.
73) 村山智順, 「全鮮敎別年次別敎勢表,,:로)二」, 『朝鮮の類似宗敎』, pp.531-539. '1%9년다%4년대 증산. 계열 신도숫자의 증가율'
사종교로 규정하였다.74) 비공인종교라고 한 것은 종교 신앙상의 이유에서가 아니라 종교의 탈을 쓴 정치비밀결사단체로 본 때문이었다. 일제의 탄압과 감시에도 불구하고 3 · 1운동 이후 증산계 교단의 교인은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하여 1929년까지 계속된다. 이러한 현상은 3 · 1운동의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을 종교적 신앙을 통해 극복하겠다는 민중들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보친교는 1919년 10월 이후부터 수백만 명의 신도와 557,700명의 교직자를 거느린 대교단으로 급성장하고, 1921년 9월에는 차경석이 시국을 선포하고 천자로 등극하는 천제를 거행하였다. 차경석이 천자로서 황제에 등극하였다는 사실은 단순한 종교신양운동의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권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는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직첩(職帖)을 팔고, 막대한 재정을 확보함으로써 하나의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넘어 세속적인 권력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민족적인 당위와 어느 정도 유착하게 되었고, 이러한 동기가 민중에게 절대적인 호소력을 갖게 되었다. 자연 일제 당국은 차경석과 그 일행의 활동을 주시하게 되었으며, 그들이 강조하는 혹세무민의 실상 못지않게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불온세력으로 간주하여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탄압하였다.75)
1921년 1월에는 안동재판소에서 보천교도들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어 방주(方主)가 체포되면 6년 징역, 육임(六任)이 체포되면 4년 징역, 십이임(十二任)은 2년 징역, 팔임(八任)은 1년 징역, 십오임(十五任)은 구류 벌금을 정하여 보천교도를 체포하면 그 임직에 따라 처벌하고 차경석 교주의 체포령이 강화되어 1920년 겨울부터 1922년 봄까지는 보천교의 대수난기가 되었다.76) 상황이 이렇게 되니 총독부의 권유를 받아들여 1922년에는 교명을 보천교라 하고, 신양의 대상 및 교리를 발표하였다. 차경석은 자유롭게 종교활동을 하기 위해
74) 朝鮮總督府警務局, 『最近朝鮮治安現況』, 嚴南堂, 1966, p.107.
75) 황선명, 『민중종교 운동사』, 서울: 종로서적, 1980, pp.247-248.
76)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p.28.
점차 친일정책에 동조하여 시국대동단을 조직하고 친일적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저들의 간교한 정책에 말려 들어간 것이었다.77) 시국 대동단을 조직한 본래의 목적은 동양을 한 가족과 같이 보고 같은 동양인종 간에 전쟁의 참화를 피하고 서세(西勢)의 침해를 방지하여 평화시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많은 금전을 투입하고 정신상의 노고(勞苦)를 인내하면서 먼저 조선과 일본사회에 그 취지를 널리 알리고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장차 대대적인 사업을 경영하려 한 것이다.78) 그러나 시국대동단의 본 취지가그릇되게 전해짐으로써 결국 친일적 인상만 민중에게 심어준 결과가 되고 말았다. 그 결과 대동단 활동으로 인한 민중의 교단훼방, 교단 간부들의 배교, 배교자들에 의한 교산(敎産)갈취 등의 금전사고가 빈발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밖으로 일제당국이 민심의 향방을 읽어 교묘한 방해공작과 안으로는 교단경영의 부실에 따른 것이었다.
제3기는 만주사변 이후 일제가 전쟁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조선사회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고, 증산계 교단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며 그에 따라 교단도 쇠퇴하게 된다. 1930년대에는 공인종교와 유사종교를 불문하고 일제의 문화시책을 따르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을 정도로 한국의 종교는 모두 탈진한 상태였다. 더욱이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황국신민화 정책에 따라 우리의 민족종교는 새로운 활로를 찾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분열과 쇠퇴의 행로를 거듭하였다.79)
대표적으로 보천교 같은 경우 1930년을 넘어서면서 차경석은 개인적 사찰을 받게 된다. 같은 해 6월 정읍 검사국에서 차경석을 소환해 20여 일간에 걸쳐 심문 취조를 했다. 그 이유는 황제로 등극한 후 관작을 준다는 조건으로 금전을 사취 했다는 혐의였다.
77) 이영호, 같은 책, pp.97-98.
78) 이영호, 같은 책, p.102.
79) 윤이흠, 같은 책, p.276.
보천교는 1936년 차경석의 사망과 함께 교단해체라는 최대수난을 겪게 된다. 5월 20일에는 협정원장 김흥식을 불러 보천교의 해체를 종용하더니 6월 6일에는 협정원장 각(各) 사장(司長) 등 간부 24인을 정읍경찰서에 불러 보천교의 해산, 신축건물의 포기, 교도의 삭발 등을 명하고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겠다고 했다. 6월 8일에는 정읍경찰서에서 수십 인이 나와 성전 안에 있는 제기와 금은으로 된 정문위의 일월상, 삼광영화본(三光影畫本) 족자와 도금으로 만든 제단을 모두 뜯어갔다. 신축건물의 경매를 강행, 수백만원을 들여 지어 놓은 건물을 불과 수천 원에 낙찰시켜 뜯어가 버리고, 1만 8천근의 거대한 종은 4천 원에 경매하여 부숴버렸다.80)
일제강점기에 증산계 교단의 기본자세는 대항이나 대립이 아닌 포월적(包越的) 관망(觀望)의 입장이었다. 증산은 천지공사 할 때 서구열강에 대응하고 우리나라를 구제하고자 일본을 일시적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는 일제의 한민족에 대한 탄압은 일시적 현상이고 결국 그들은 우리의 일만 해주고 빈손으로 쫓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81) 그렇기 때문에 일제와 대항해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증산과 그의 종도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증산 사후 억압을 가해오는 일제에 대해 비밀결사와 강력한 민족 주체의식을 드러내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운동이 전개되었다.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뜻있는 사람들은 보천교의 교인이 되는 것 자체가 애국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보천교만이 이 나라의 독립을 찾고 우리의 잃었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힘을 가진 단체로 여겼던 것이다. 결국, 일제의 간교한 와해공작에 말
80) 홍범초, 『범증산교사』, pp.122-124.
81) 『전경』, 공사 2장 4절, 상제께서 어느 날 가라사대 「조선을 서양으로 넘기면 인종의 차별로 학대가 심하여 살아날 수가 없고 청국으로 넘겨도 그 민족이 우둔하여 뒷감당을 못할 것이라. 일본은 임진란 이후 도술신명 사이에 척이 맺혀 있으니 그들에게 맡겨 주어야 척이 풀릴지라. 그러므로 그들에게 일시 천하 통일지기(一時天下統一之氣)와 일월 대명지기(日月大明之氣)를 붙여 주어서 역사케 하고자 하 나 한 가지 못 줄 것이 있으니 곧 인(仁)이니라. 만일 인 자까지 붙여주면 천하가 다 저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므로 인 자를 너희들에게 붙여 주노니 잘 지킬지어다」 고 이르시고 「너희들은 편한 사람이 될 것이오. 저희들은 일만 할 뿐이니 모는 일을 밝게 하여 주라. 그들은 일을 마치고 갈 때에 품삯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리니 말대접이나 후덕하게 하라」
려들어 교단 자체가 해체되는 최대의 수난을 겪게 되었다. 보천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증산계 교단은 일제로부터 심한 억압을 받았고, 1936년에는 교단해체라는 극도의 탄압을 면치 못하고 구심점을 상실한 채로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소멸되어 갔다.
증산계 교단은 세계종교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없을 정도로 수많은 교파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증산계 교단이 이처럼 분파를 거듭하는 것은 증산이 종도들 중에서 후계자 지목을 하지 않은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증산이 화천한 후 종도들은 목적의식을 잃어 증산을 원망하는가 하면, 다른 선생을 찾아다니기도 하고, 금산사 미륵불에 가서 치성을 드리기도 하면서 세월을 보냈던 것이다. 그 후 김경학, 고 부인 등 몇몇 신비체험에 자극되어 다른 종도들도 증산의 권능에 접근하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종도들은 증산이 평상시 남긴 「내가 평천하 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五十년 공부이니라. 매인이 여섯 명씩 포덕하라」82)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 주면 되려니와 도통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83) 등등의 수많은 내용을 각자 자신들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증산의 제시하는 고부와 도통, 천지공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은 증산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연유되는 바도 있었으나 점차 자신들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증산의 의도 자체보다
82) 『전경』, 행록3장 31절.
83) 『전경』, 교운 1장 41절.
는 각자의 처지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교단이 생겨난 것이다. 독자적인 판단에 의한 해석은 반드시 상대방과의 견해 차이를 일으켰으며, 이는 곧바로 교단의 분열로 나타났다. 증산을 신앙한다는 사실만 일치할 뿐, 그에 대한 호칭도 다르고, 더욱이 그를 이해하는 방식도 달라 혼란상만 노출시키고 있었다.
가) 전기교단의 교리형성기
차경석(車京石, 1880~1936)84)은 1907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증산을 만나게 된다. 경석의 아버지 차치구는 동학의 교주였으나 갑오동학란 때에 관병에게 체포되어 흥덕에서 분살형을 당하였다. 이때 차경석의 나이는 15세였다. 그는 20세 때에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이사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동학에 종사하던 중, 22세 때에는 당시 친일파인 '일진회'에 가담하여 전라남북도 순회관으로 있었다.85) 그가 28세 되던 1907년 5월에 전주 재무관과의 소송관계로 정읍에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에 들렀는데, 이 때 증산이 종도들과 함께 같은 주막에 오게 되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경석은 증산의 의표와 언어 동작을 살피고 그 비범함에 그를 따르기 작정하고는 떠나지 않았다.86) 증산은 마지못해 경석을 종도로 허락하였으니 그때가 증산이 화천하기 2년 전이었다. 경석은 다른 종도들 보다 늦게 종도가 되었으나, 천지공사에 참여하기도 하였고, 증산이 행한 권능의 위대함도 보았다.
84) 이름은 윤홍, 호는 월곡, 아명은 관순(寬舜)이다. 경석은 자이다. 그는 1880년 음력 6월 1일 전라도 흥덕군 부안면 호암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의 성함은 중필이고, 자는 치구이며, 모친은 밀양 박씨이다.(보천교중앙총정원, 『普天敎誌』, 경남 진주: 동양인쇄소, 1965, p.387)
85)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서울: 대흥기획, 1993, p.237.
86) 『선도진경』, 7장 50절.
차경석은 교권을 장악한 뒤 교단의 정비에 착수하여 1916년 11월 동지에 24 방주를 임명하여 조직적인 포교의 시발을 내디뎠다. 이때 차경석이 포교활동을 할 때, 항간에서는 차경석이 증산의 신적(神的) 권능을 받았기 때문에 누구든지 보천교에 들어가서 태을주 수련을 하면 난치병도 쾌유되는가 하면 개안 영통이 되어 신통묘술을 행할 수 있게 된다는 풍설이 떠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차경석이 축천축지(縮天縮地)하며 신출귀몰하는 도술은 장차 한국의 참주인으로 등극하리라는 설이 포교자들의 입을 통하여 선전되고 있었다.87) 당시에 『정감록비결』 을 믿고 새 왕조의 출현을 고대하던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정부의 주인공으로 차경석이 틀림없다는 것을 믿고 입교하는 사람의 수가 나날이 증가하였다.
교세는 확장되어 갔지만, 그와 반대로 교단 내외에서 차경석을 관에 고발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17년 6월에 교도 김경범의 아들이
「아비가 경석을 신앙하여 많은 금전과 물품을 사기당했다」 고 일본헌병대에고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경석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10일간 취조당했으나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석방되었지만,88) 이 일이 있은 후 집에 있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고는 10월에 친모(親母)의 생신을 기회로 하여 집을 떠났다.
고 부인이 조종골로 떠나 교단을 형성한 뒤, 채규일 · 이상호 · 문정삼 세 사람이 중지(衆智)를 모아 교인들을 수습하고 교세를 만회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포교하던 방법을 허령이라 배척하고 근본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증산의 행장과 경석의 이력을 그 당시 민중들의 최대 관심사인 서전의홍범도해(洪範圖解)와 김일부의 정역팔괘 · 정감비결 · 풍수설 등 각종 민간신앙과 교묘하게 연결한 이론으로 포교방법을 새롭게 정하였다.89)
그리고 고 부인에게 집중되었던 교인들의 신뢰를 경석으로 옮기기 위해서
87) 이강오, 같은 책, 11240.
88) 이영호, 『普天敎沿革史』 上, 전북 정읍: 보천교편집국, 1935, p.8.
89) 홍범초, 「보천교 초기교단의 포교에 관한 연구」, 『한국종교』 10, 1985, pp.177-178.
경석이 증산으로부터 교통을 이어받았다고 선전하였다. 그 증거로 증산이 화천하기 전 1909년 1월 3일에 경석에게 교통을 전수하였다90)는 것이고, 또 증산이 경석에게 「곤이내 짐제지 곤이외 장군제지(閫以內朕制之 閫以外將軍制之)」 라고 한 말은 곧 경석에게 종통을 전한 공사라는 것이다. 교단 측 기록인 『보광』 4권에 1월 3일은 「증산께서 천지공사를 종필(終畢)하신 후에 교(敎)의 대통(大統)을 들어 성사(聖師)께 전수(傳授)하신」 기념일이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제 차경석이 정면에 나서서 세계의 경제를 통치할 대사명을 실천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증산이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 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萬方日月銅雀臺)」 란 글을 써서 벽에 붙인 이유는 경석의 진짜 성이 정씨(鄭氏)임을 암시한 의미라고 주장하였다.91) 그 결과로 교리의 도참적 해석에 의하여 보천교의 교인들은 새로운 후천의 운수가 증산과 증산의 교통을 이어받은 차경석의 출세에 있다고 믿게 되었다.
1919년 10월에는 경남 함양군 병곡면 덕기리 후록 대황산에서 '24 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 '60 방주제'를 정하고, 60 방주를 선임하는 고천제(告天祭)를 행하였다. 차경석은 60 방주에게 각 방면을 새긴 상아방인(象牙方印)과 교주의 직인이 찍힌 교첩을 주었다. 60 방주는 수 · 화 · 금 · 목에 응하는 4명의〈교정(敎正)>과 · 동 · 서 · 남 · 북 · 춘 · 하 추 · 동에 응하는 8명의 <교령(敎領)>, 24 방위에 응하는 24명의 <포주(胞主)>, 24 절후에 응하는 24명의 〈운주(運主)>로서 되어 있다. 60 방주 아래에는 방주의 대리 한 사
90) '1909(기유)년 설날 증산이 경석의 집에서 현무경(玄武經)을 쓰시어 흰병에 물을 담은 뒤에 양지에 글을 써서 권축(卷軸)을 지어 병(甁)입을 막아 놓고 그 앞에 백지를 깔고 백지 위에 현무경을 놓아 두시니라. 증산이 화천(化天)하신 뒤에 병마개를 빼어서 펴보니 「吉花開吉實 凶花開凶實」 이라는 글과 병세문(病勢文)도 쓰여 있었다.'(『대순전경』 3, 4장 107절)와 '이튿날 모든 일을 마치시고 사흗날 고사를 지내려 하실 새 차문경이 술이 취하여 고샅에 돌아다니며 경석의 집에서 강모(姜某)가 역모(逆謀)한다고 큰 소리로 외치니 이 말이 천원 병참(兵站)에 들리어 헌병이 출동하려 하는지라 천사 알으시고 고부인과 경석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집을 지키고 나를 대신하여 내일 자정에 문틈을 봉하고 모든 제수(祭需)를 화로에 구으며 술병은 마개만 빼고 지성으로 심고하라 이것이 곧 고사(告祀)니라 하시고 떠나시니라 사흘날 새벽에 고 부인과 경석이 명하신 대로 행하였다.'(「대순전경」 3, 4장 1(刃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차경석이 주장하는 증산교통의 전수라는 것이다.
91) 이정립, 『증산교사』, pp.60-63.
람씩과 6임(任)을 조직하고, 다시 6임 밑에는 12임(任)을 조직하였으며, 12임 밑에 8임을 조직하고, 8임 밑에는 15임을 조직하였다. 이 조직활동은 3년 동안 이루어졌으며, 조직된 인원총수가 모두 557,700명이었다.92)
차경석은 자신의 최고야망인 제위등극에 대비하기 위하여 교중에 많은 장사와 도인을 양성하려는 커다란 희망을 품고, 신상만이라는 술사를 초대하여 1919년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300일 동안 선발된 60명의 교인에게 면우차(麵牛借 ; 밀가루로 소모양을 만들어 하루에 7두식(頭式)을 먹으면서 차력공부를 하는 것)라는 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그중 한 사람도 성공하는 자가 없었다. 다시 동년 10월에 60방주에게 49일 수련공부를 시켜서 도통하도록 했으나,역시 한 사람도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93) 두 번의 실패에도 경석은 또다시 1921(신유)년에 큰 전염병이 유행하리라고 예언하고 김장을 내년 가을까지 먹을 수 있도록 많이 준비할 것과 명년 봄에는 여름 채소를 절대로 먹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 전염병의 요약(要約)인 목과(木果)를 많이 사서 저장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예언이 맞지 않아 각처에 저장하였던 목과는 쓸모가 없어서 버리게 되었다. 이에 공부의 실패와 더불어 예언이 실패하자 오직 교주뿐만 아니라 수많은 교인의 실망만 자아냈던 것이다.94)
이런 와중에도 경석은 1921년 일제의 감시를 피해 9월 24일 경남 함양군에 있는 황석산에서 대규모의 제단과 풍성한 제수를 갖추어 고천제(告天祭)를 행하였다. 이 때 9층의 제단에는 천지일월성신(天地日月星辰)을 그린 〈일월병(日月屏)>을 두르고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感之位)'라고 크게 위패를 세웠다. 제례 집전시 축문에 교명(敎名)을 보화(普化)라고 고천(告天)하였다.95)
92) 村山智기贋, 같은 책, [畢.303-305
93) 이영호, 같은 책, p.26.
94) 이정립, 『증산교사』, p.81.
95) 『普天敎沿革史』 上 1139, 『普天敎言志』, 11405, 두 군데 모두 '敎名曰普化敎'만 기재되어 있으나, 축문의 실재 내용은 ‘國號曰時’라고 씌어졌다고 한다.
당시 보천교 운동을 봤던 많은 사람은 위의 고천제 행사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선의 왕위가 일제에 의해 끊겼으니, 다시 조선의 왕권을 복원시켜야 하는데, 그것을 보천교가 하려했다. 보천교는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 세울 나라 이름을 '시(時)'라 했고, 그 나라를 통치하는 왕 또한 일본의 천황이나 중국의 천자와 격이 같은 '천자(天子)'라 했으니, 이는 필경 조선의 독립을 하려함이E뇨96)
고천제에서 국호는 '시(時)', 교명은 '보화'라 했다는 것은 경석이 보천교를 통해 추구하자 한 운동의 목적을 드러낸 것이다. 교단의 제문에 나라 이름이 등장하고, 또 조선의 왕권을 복원시켜야 한다고 증언한 것은 이미 보천교의목적이 순수하게 종교를 통한 사회구원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고천제는 차경석이 교주 취임을 목적으로 시행했지만, 실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상실감에 빠져있던 민중의 기대를 하나로 모으는데 엄청난 힘이 되었다. 민중들의 희망이요 경석의 야망이기도 했던 새로운 왕조, 새로운 국가 건설을 공개적으로 천명했던 행사였다.
'보천교'라는 교명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서울 창신동에 큰 건물을 짓고 간판을 걸게 된 뒤였다. 차경석으로부터 교단공개에 관해 전권을 위임받은 이상호는 관(官)의 의심을 받을까 우려하여 고천제에서 고천(告天)한 보화교의 첫 글자와 당시에 공인된 종교로서의 천주교(天主敎)와 천도교(天道敎)의 첫 글자를 취하여 보천교라는 교명을 내기로 하였다. 이상호는 1922년 2월에 교단의 이름을 보천교, 사무소를 진정원이라 일컫고 십여 년간의 비밀운동을 공개운동으로 전환하였다.97)
96) 안영승의 증언 외, 당시 교인들의 증언도 위와 같다.(안후상, 「보천교운동 연구」, 석사학위논문, 성균관대학교, 1992, p.30)
97) 이정립, 『증산교사』, p.90.
보천교의 전기교단에서는 60 방주를 조직할 만큼 그 당시 우리나라 증산계 교단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가진 교단임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차경석은 증산의 교통을 전수하였음을 알려 교주로서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고천제에서 새로운 왕조를 선포한 것은 일제의 탄압을 받는 우리 민족을 구원할 것을 예정하였으며, 신앙의 대상이 옥황상제라는 것을 천명하였다. 보천교라는 교명을 선언하고 공개적으로 교단을 전환한 것은 비로소 종교가 지녀야 할 면 목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나) 후기교단의 변용
보천교는 종교의 면목을 갖추고 당시 최고의 교단으로 등극하였지만 항상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시대일보 경영의 실패로 교직을 파면당한 이상호 형제와 이달호 등이 혁신운동을 일으켜 교주 차경석의 비행을 성토하고, 관에서는 사찰과 위압이 점차 심해지기만 하고 교주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져 있는 상태였다.
차경석은 이러한 난경(難境)을 타개할 전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에 차경석은 언제까지나 지하에서 은피(隱避)생활을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차라리 정부에 수만금을 바쳐 당시 김태식(일제에 아부하여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경시 된 者)의 동광회와 같은 일등친일단체가 되는 한이 있을지라도 광명천지에 떳떳하게 나서서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하고 싶다는 충동을 일으키게 되었다.98) 그 방법으로 차경석은 일본관헌의 권고로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국대동단은 일본 관헌의 어용단체로 보천교 측의 주장을 모두 무시하였다. 그 예로 취지서의 문안에 관해서 사전양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연 연사를 선정하는 것도 보천교 간부는
98) 이강오, 「보천교」, p.22.
한 사람도 채용되지 않았으며, 친일단체 즉 '십일 연맹(十一聯盟)'에 가담한 인사들로 전부 메워졌다. 그뿐만 아니라 보천교 본소(本所)에서는 발회일(發會日)도 통고받지 못하였는데, 강연일정이 보천교의 명의를 도용하여 통지서가 각지로 발송되었다.99) 십일 연맹의 인사들이 강연하자 보천교의 취지보다는 친일사상을 고무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민족감정에 통분을 금치 못하였다. 청중들은 보천교를 친일교단으로 몰아 각지의 강연장에서 연단에 뛰어올라 연사에게 모욕을 주는가 하면, 교의 간판을 파괴하기도하고 혹은 교도를 무례하게 구타하기도 하였다. 강연의 질서를 위해 온 경관들은 이 사실을 보고도 금지하기는커녕 도로 교사(敎唆)도 하고, 혹은 교도들이 청년 무리와 충돌하면 경관은 오히려 교도만 억제하고 암암리에 청년들을 도와주어 교도들이 무차별 난타당하고 유혈이 당자하여도 방관하기만 하였다.강연장은 순간 무법천지로 변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100) 그러한 가운데 보천교의 간부들은 배교하여 이탈하는 자가 많아졌으며, 각기 자신들의 종교를 펴는 자들도 있었다.101)
혼란한 가운데에서도 보천교 내부는 대동단의 조직에 의하여 어느 정도의 종교활동이 보장되자 수백만 교도를 가진 거대종교 단체의 체면을 세우고 위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중앙교당 <십일전(十一殿)>을 세우기로 하였다. 1925년 1월에 신축공사를 시작하여 4년 뒤 1929년 3월에 준공을 하였다. 이 때 신축된 십일전의 규모는 동 · 서 · 남 · 북의 4대문이 세워졌고, 정화당, 총령 원, 총정원, 태화헌, 연진원 등 45동의 부속건물, 그리고 높고 견고한 석탑 등이 세워졌다. 그 규모는 경복궁 근정전보다도 크고 호화로워 실로 대궁궐을
99)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상, p.86.
100) 이영호, 같은 책, p.94.
101) 김영두는 배교하여 태을교를 세웠고, 채경대는 1924년 객망리에 성전을 지어 중앙에 증산대성, 왼편에 진묵대사, 오른편에 주회암 선생 삼위를 모시어 삼성교라고 하였다. 이상호는 동화교를 세웠고, 강상백은 이탈하여 제주도에서 수산교를 세웠고, 채규일, 임경호, 강동회가 분립하였다. 박인택은 원군교를 세웠으며, 한병수는 인천교를 세웠다. 이달호, 민영성, 문정삼, 이중창은 보천교 본소를 공격하기도하였다. (홍범초, 같은 책, 1羽.116-119.)
연상시킬 정도였다고 전한다. 뒤에 1936년 차경석이 선화하자 일제 당국에서는 보천교가 십일전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고는 몰수하여 버렸다.102)
무리한 십일전 건축으로 인하여 가산과 전답을 모두 방매하는 탄갈자(殫竭者)가 속출하였다. 또한 보천교의 대업을 하루속히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면서 가산을 정리하고 대흥리 본소 부근으로 이주한 몇천 호의 교인들도 재산이 바닥나 끼니를 걱정하는 매우 급한 지경에 이르렀다. 교인들의 경제적 공황이 심각한 상태임을 깨달은 차경석은 1929년 교인들에게 벽곡(辟穀)을 명하게 된다. 이로 인하여 연명은 고사하고 오히려 수천 명에 달하는 사상자만 속출하는 참극을 발생시킨 일이 되고 말았다. 따라서 이에 경악한 교인들은 배교하고 퇴거하는 자가 많았고, 간부급에서까지 배신하여 교주비행의 고발 무고 등이 속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관헌의 단속은 전보다 더 격심하여지고, 교단 자체 내의 분열과 알력은 마침내 교단의 약화를 초래하는 결과에 이르렀L뇨103)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자 차경석은 어떤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경석은 증산의 권능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증산께서 말씀하신 성훈(聖訓)의 실천에 성경신을 다한다면 큰 운수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고서 이제까지 어떤 어려움도 감수하고 지켜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21년 60 방주의 수련공부에서 한 사람의 도통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위 심복이라고 믿었던 간부들이 점차로 배교하여 자기에게 대항하였고, 또한 국내를 풍미하던 등극설은 무수한 모욕과 조소거리만 되어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결국 경석은 증산의 권화를 의심하기 시작하였고, 심지어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믿었던 신앙대상까지도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그는 자기가 처음 창교할 때에 포교선전의 유일한 방법이었고, 또한 모든 교인이 그에 의하여 입교하게
102) 성전 십일전은 현재 서울 조계사를 건축할 때 십일전의 건축자재를 썼으며, 보광문은 처음에 부안의 모인(某人)에게 이전되었던 것이 거듭 이전되어 현재 정읍 내장사 대웅전이 되었다.
103)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1, P. 262.
된 '태을주'의 수련공부도 증산이 사람을 기만한 사술이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104) 그러므로 차경석은 혁세제민(革世濟民)의 이상이 수포로 돌아가자 증산의 신권만을 숭상해 오던 종전의 신양태도를 버리고 실천적인 도덕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신로(神路)를 완전히 수정하기에 이른다.
이영호는 그가 저술한 『보천교연혁사』 하권의 첫머리에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무진(1928)년 정월 4일 차교주가 교도 수백 명이 모인 앞에서 하도와 낙서를 걸어놓고 음양진퇴소장(陰陽進退消長)의 이치와 천지인배합의 도를 3일간 설법하였다. 이때 말하기를 보천교는 포교 이래로 혹자의 전도오류로 인하여 허령미신의 설에 기울어지는 폐단이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동양도덕의 정종(正宗)이 되는 원리를 전 세계에 포양(褒揚)해야 할 것」 이라고 하였다.무진설법이 있었던 후 연중 7대치성인 정월 1일, 정월 3일, 춘분, 하지, 8월 15일, 추분, 동지로 정해졌다.105)
이 차경석의 설법은 보천교의 신로변경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으로서 증산의 신권을 완전히 부정한 표현이며, 증산의 탄강일과 화천일이 치성에서 제외된 것 또한 증산을 완전히 배신한 것이라 하겠다.
일설에 의하면 「1929(기사)년 정월 초 3일 치성 때 차경석의 부인 전주이 씨가 영안(靈眼)으로 다음과 같이 보았다고 한다. 즉 삼광영(三光影)에 옥황상제의 자리인 월광영(月光影)에 있어야 할 증산이 철망에 씌어 나병환자와 같 은 험상으로 신단 아래 내쳐져 있고, 그 대신으로 시부(媤父)가 옥황상제의 신위에 앉아 있음을 보았다」 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경석은 더욱 의심하였다고 전한다.
차경석은 증산의 권화에 일말의 희망을 가졌는지, 1929(기사)년에 경석은'기사(己巳) 삼월기망(三月既望)'은 증산께서 큰 운수를 받을 자는 많이 읽으라고 정녕 말씀하신 서전서문의 끝 문구인즉 이번만은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
104) 이강오, 「보천교」, p.33.
105) 이영호, 『보천교연혁사』 하, p.l.
었다. 그러나 십일전의 봉안식까지 금지당하게 되자 이제까지 증산을 신앙하여 온 일이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었다고 생각하였다. 1931년 1월 3일 치성 후 경석은 4방주를 불러 「수십 년 동안 노력해온 일이 허사로 돌아갔으니 그대들은 나에게 속았고 나는 증산에게 속았고 증산은 옥황상제에게 속은 일이라.1(퍼) 이제부터는 종전과 같이 증산을 옥황상제로 믿고 그의 권화에 의하여 신통묘술이 나올 것을 믿지 말 것이며, 오직 고성(古聖)이 전수한 인의(仁義)대도를 준수함이 가하다.」 라고 하였다. 차경석이 새로 믿으라는 고성(古聖)은 공맹(孔孟)을 지칭하는 것이었다.107)
교주의 이와 같은 발언은 이제까지 증산의 신권(神權)을 믿어오던 교인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어 여방주 신정심은 현장에서 반대의사를 표현하다가 분을 못 이겨 졸도하고, 한로주(寒露主) 이중창은 이에 반대하여 할복투쟁 하였 으며, 망종주(亡種主) 이용두 등 많은 교인이 적극 투쟁을 벌였다. 이로부터 배교자가 속출하여 혹은 작파대항(作派對抗)하고 혹은 타교에 귀의하였다. 원래 교인들은 차경석의 축천축지(縮天縮地)하는 능력과 혁명주가 될 운수가 오직 증산에 의하여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여 신도적 교리 면에서 차경석을 추종했다. 그러나 이제 새삼스럽게 증산의 신권을 부정하고 인의(仁義)만을 중시하는 유교에 가까운 신앙으로 표변한 경석의 주장을 따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배교항쟁을 벌인 것이다.108)
한편 교단 내에 증산을 추종하는 교인들은 경석의 카리스마에 눌려 혁신교리를 따르면서도 신앙 면에서는 여전히 교조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봉하였다.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증산의 신도(神道)를 사도(詐道)라고 배척하고, 증산의 성령(聖靈)을 부정하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닐 수 없다고 판단하여 경석이 신로 변경한 것을 증산의 교리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경석의
106) 이정호, 『증산교사』, p.182.
107) 이강오, 「보천교」, p.34.
108) 홍범초, 『범증산교사』, p.131-132.
지지자들은 상제는 더 이상 인격적인 신이 될 수 없다는 신념하에 상제를 우주 자연을 용사하는 조화의 힘으로만 해석하였으니 이미 그 분열은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109)
그런데 1934(갑술)년 10월 10일 보천교에서는 촌산지순(村山智順)과 차경석의 문답기를 들어서 차경석이 증산을 배신한 일이 없고, 신로를 변경한 것이 오히려 증산을 허황하게 믿는 오류에서 벗어나 성훈(聖訓)에 가까운 종교생활로 들어서게 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차경석과 촌산지순이 문답한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촌산이 묻기를 「증산교조를 만나서 3년만에 교통(敎統)을 전하고 천화(天化)하셨다 하니 그 때 제자 중에 수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교통을 전하셨습니까? 아니면 전할만한 자격이 있어서 전하시게 된 것입니까?」 차경석이 대답하기를 「교조(敎祖)께서 나를 만나시기 전에는 삿갓만 쓰고 다니시다가 나를 만난 후부터는 나도 만날 사람을 만났으니 의관(衣冠)을 하겠다 하셨고 이곳을 떠나실 때에는 내가 받은 증거가 있습니다. 1909(기유)년 정월 초 3일 고사치성을 올릴 때에 우양제물(牛羊祭物)을 준비하게 하시고 벽에 설위하여 배례와 제법(祭法)을 가르치신 후에 나로 하여금 대신하여 제사하도록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듣고 전하는 말에 의하면 동곡에서 천화하시기 전에 여러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지신명공판에 내가 정읍 차경석을 정하여 실수(失手)가 없게 하였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110)
위의 문답기에서 알 수 있듯이 차경석은 증산을 자연스럽게 교조로 숭경(崇敬)하고 교통(敎統)을 받았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차경석은 증산을 신앙하는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로서의 종교운동을 전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보천교의 후기교단은 차경석이 증산의 권능에 회의를 품고 전기교단의 형태와 완전히 다르게 신로를 변경한다. 신앙의 대상도 상제라는 인격신에서 우주
109) 박종렬, 『차천자의 꿈』, 경기 고양: 도서출판 장문산, 2003, pp.123-125.
110) 『교전』, 전북 정읍: 보천교중앙총정원. 1981.
자연을 용사하는 조화의 힘이라 해석하였고, 교리도 인의(仁義) 대도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치성일도 증산의 강세 · 화천치성을 빼버렸다. 이 사실로 보았을 때 차경석은 증산의 권능에만 힘입어 교인들을 지도하다가, 보천 교를 쇄신하여 새로운 종교활동을 펴기 위해 후기교단의 신로를 변경한 것이다.
김형렬(金亨烈, 1862-1931)은 1862년 5월 5일에 출생한 전라북도 김제 출신이며, 호는 태운이라 하였다. 그는 증산의 종도가 되기 이전 1984(갑오)년에 증산의 성예(聲悪)를 듣고 찾아가서 함께 글 읽기를 청할 정도로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그 뒤에 증산이 1897(丁酉)년에 정남기(鄭南基)의 집에 서당을 차리고 아우 영학(永學)과 형렬(亨烈)의 아들 찬문(贊文)과 그 이웃 학동들을 가르쳤다고 한다.111)
그러나 김형렬은 증산이 1901(신축)년에 대원사에서 공부한 다음 해인 1902(임인)년에 종도가 되었다. 증산은 형렬에게 1902(임인)년 4월 보름에 심 법을 전수하고 九월 十九일까지 수련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증산은 모든 천지공사에 신명을 모으고 흩어지게 하는 일과 영을 듣는 일에 무리를 참관케 하 고 또 풍우를 짓게도 하면서 그 참관한 공사의 조항을 일일이 묻고 그 본 바의 확실 여부를 시험하였다.112) 이렇게 함으로써 증산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공사의 확신을 얻게 하였고, 또 이 시험을 통하여 형렬은 증산에게 있어 최초의 종도가 되었다. 경전에 기록된 바는 없지만 김현식(김형렬의 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증산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에 있는 금산사 돌무지개 문 위에서 김형렬을 부르곤 하였다. 그 당시 김형렬은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
111) 『선도진경』, 1장 25절.
112) 『선도진경』, 7장 5절.
도리 하운동에서 살았는데, 그 거리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둔 먼 거리였다. 그런데 “형렬아! 형렬아!”하고 증산이 부르는 소리가 나면 김형렬은 돌무지개문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는 것이다.
김형렬은 증산을 1902(임인)년부터 증산이 화천할 때까지 8년 동안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정성껏 수종을 들었으며, 천지공사에도 많이 참여하였다. 『전경』 에 김형렬에 관한 기록이 무려 107구절이나 된다. 전경의 구절 가운데 종도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 구절의 상당 부분도 증산이 형렬에게 한 말이었다는 설이 있다. 증산이 화천하기 전 형렬을 불러 「네가 나의 사무를 담당하겠느냐.」 라고 특별히 부촉(咐囑)한 말은 형렬에게 그만한 그릇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증산이 수부공사를 볼 때 김형렬은 자신의 딸을 내세워 그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다.113) 공사에 참여한 김수부는 이름이 김말순으로 1890(경인)년에 출생하여 22세 되던 해에 작고하였다고 전한다.
증산이 화천한 다음 달 차경석과 김광찬이 김형렬을 방문하고 장래 일을 의논할 때 차경석이 말하기를 「증산께서 당신이 미륵불이라고 말씀하셨고 또 화천하실 때 금산사로 들어가리라 하셨으니 우리가 이제 미륵전에 참배하여 당신을 대한 듯이 정성을 들여 취(取)할 길을 생각하면 반드시 당신의 감화를 받아 깨달음이 있으리라」 고 말하자 모두 찬성하였다. 일행은 치성물을 준비하여 금산사 미륵전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종이에 “옥황상제지위(玉皇上帝之位)”라고 써서 미륵불 몸에 붙이고 치성을 올린 뒤에 그 위패 종이를 떼어 사실에 가서 벽에 붙여 모시고 각기 정심하여 증산을 사모하였다. 형렬이 문득 신안이 열리는데, 대장전에 들어가서 석가불에게 장래 일을 묻자 석가불이 책을 들고 입을 열어 가르치려 할 즈음에 미륵불이 들어와서 책을 빼앗고 입을 막아버렸다. 형렬은 하는 수없이 물러 나와 일행에게 사유를 말하고선 집으로 돌아왔는데, 이날이 실로 8월 1일인 것을 깨달았다.114) 즉, 증산이 화천하기 4
113) 『전경』, 행록 5장 31절.
114) 이정립, 『증산교사』, pp.41-42.
일 전 6월 20일 종도들에게 「8월 1일에 환궁(還宮)하리라」 115) 고 하였는데, 바로 8월 1일에 형렬이 미륵불을 신안으로 뵙게 된 것을 알았다.
1911(신해)년 9월 19일 고 부인이 신력을 통하자 5일 뒤인 24일에 경석을 시켜 형렬에게 구릿골 약방에 있는 기물을 인도하도록 요구하고는 모두 가지고 가 버렸다. 김형렬은 증산의 최초의 종도이면서 수제자로, 증산의 모든 사명이 자신에게 내릴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수부로 세웠던 딸을. 산이 화천한 뒤에 개가케 한 과실 때문에 사명이 고 부인에게 옮겨졌으며, 결 국 약방 기물까지 고 부인에게 넘겨줬던 것을 몹시 괴로워하고 있었다.116)
그러나 1913(계축)년 가을에 김형렬은 장기동(張基東) · 장기준(張基準)과 함께 본소(本所)로 가서 고 부인을 뵙고 교단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117) 1914(갑인)년 정월에 차경석과 뜻이 맞지 않아 교단을 이탈하고 정부인(鄭夫人:晉を早剌)을 수련시켜 신력을 통하면 교단을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정부인이 수련석에서 실진(失眞)하여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 버렸다.
1915(을축)년 봄에 김형렬은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가서 백일동안 수련한 후 신안이 열려 교단을 형성하였다.118) 당시에 교단의 이름을 짓지 않았는데, 금산사 미륵불을 받드는 종교단체로 알려졌다. 형렬은 포교에 전력하자 따르는 교인들이 나날이 많아졌다. 형렬은 입교자에게 태을주 대신에 동학에서처럼 시천주로 수련하도록 하였으며, 또 각자의 생년지지에 해당한 동물을 그린 물 형부를 날마다 수십 장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성명을 새긴 사각형인장을 찍어서 불사르게 하였다.119) 그 이유인 즉 「선천에는 문자부를 사용하나 후천에는 물형부를 사용하여 조화권능을 부리게 된다. 인간의 생년지지는
115) 이정립, 같은 책, p.40.
116) 이정립, 같은 책, p.63.
117) 홍범초, 같은 책, pp.179-180.
118) 이정립, 같은 책, p.64.
119)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I, pp.193-194.
곧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지정된 물형부의 자료니 그 지지인 동물을 많이 그리면 필력(筆力)을 얻고, 몸에 주력(呪力)을 쌓으면 능히 그 물형부로 조화 권능을 부릴 수 있다.」 라고 하였다.120)
1916(병진)년 봄에 교인 중에서 독신자 360명을 선발하여 전국 360군(郡: 구한국시대에는 전국에 360군(郡)을 두었었다)에 파견하고, 모두 한날한시에 물 형부인 육무(六戊)를 전신주 밑에 묻으라고 하였다. 육무를 묻으면 한 달 이내에 일본에 큰 변란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 일이 허사로 돌아가 버려 교인들이 크게 낙망하였다. 특히 장기준은 형렬과 관계를 끊어버리고 따로 교단을 세워 그 명칭을 법문파(法文派) 혹은 순천교라고 하였다.121)
1917(무오)년에 형렬은 전주 위봉사 주지 곽법경과 협의하여 위봉사 전주포교당을 근거로 하여 교단을 재건하고 흩어진 신도들을 수습하기에 진력하였다. 1919(기미)년 9월 증산강세일에 형렬은 신도 수십 명을 거느리고 금산사 미륵전에 가서 치성을 행할 때 금산사 주지 김윤창이 「김형렬과 곽법경이 공모하여 금산사에 수백 명의 동지를 모아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키려고 획책한다」 고 일본경찰에 밀고하였다. 일본경찰은 금산사를 둘러싸고 형렬과 법경을 비롯하여 모인 신도 80여 명 전부 체포하였다. 그중 28명을 제령 제7호 위반혐의라는 이유로 전주 일본검사국에 송치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제 측 기록을 보면 대정 8년(1919) 12월 26일 자 고등 제36610호에 '태을교도 검거에 관한 간이라는 제하(題下)의 전라북도지사 보고. 요지에 김형렬, 곽법경 등이 태을교를 믿으면 질병이 쾌유되고 제원(諸願 : 조선독립의 성효를 의미)이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신자들의 금품을 절취했다는 죄명으로 김형렬 · 장기헌 · 정동훈 · 곽법경 · 김문중 · 김백현 등 16명을 검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122) 전주검사국 예심정에서 여섯 달 동안 취
120) 이정립, 같은 책, p.67.
121) 홍범초, 『범증산교사』, pp.182-183.
조한 결과 확실한 증거를 찾지 못하자 이듬해 경신년 삼월에 전부 불기소로 석 방하였 다.123)
김형렬은 1921(신유)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곽법경, 장기동 등과 불교진흥회를 조직하였다가 이듬해 1922(임술)년 9월에 다시 불교진흥회를 미륵불교로 고치고 본부를 금산사로 옮겼다.
1923년 봄에 김형렬은 일본정부 고급관리 · 조선총독부 관리 · 각도 부군(府郡) 관리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그 사람들의 이름에 부(符) 한 장씩 그려 이름을 쓴 뒤에 심복신도 360명을 뽑아 한 고을씩 맡아서 부(符)를 나누어주고 각 군 전선주 밑과 신사문 앞에 돼지고기 한 점과 문어, 전복 한 개씩과 호주(胡酒) 한 잔씩을 부(符)에 싸서 묻게 한 뒤에 가을철에는 일본에 근 재앙이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과연 그해 추석 무렵에 대진재(大震災)가 일어났다.124) 같은 해 6월 24일 신도들에게 가을이 되면 보천교가 무너지리라고 예언하였다. 26일 이상호 · 이종익 · 임경호 등이 금산사에 구경 왔다가 형렬을 방문하고 갔을 때 신도들에게 상호가 뒷날 반드시 자기 문하에 들어오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해 추석 무렵에 과연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나 형렬의 예언이 적중하자 교세가 크게 발전하였다.125)
장기동이 영서(靈書) 중에 '서백미(西白米)가 입차정중(入此鼎中)하야 위일식지반(爲日食之飯)'이라는 문구를 해설하여 말하기를 '서백미는 곧 군산쌀이니 군산 기미시장에서 이득을 얻어서 교단 운영자금을 조달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그는 모든 신도에게 기미취인(期米取引)자금을 조달하라고 명령하여 군산에 가서 취인(取引)을 행하였다. 그러나 기미취인(期米取引)은 크게 실패하여 온 신도들이 재산을 당진하게 됨에 1924년 봄부터 교세가 다시 침체되었
122) 김정명편, 「조선독립운동 제1권분책」, 『민족주의운동편』, 동경: 원서방, 1967, pp.247-250.
123) 홍범초, 같은 책, p.183.
124) 이정립, 같은 책, pp.128-129.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이해 10월에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일본에 큰 혼란과 피해를 가져다주었다.
125) 증산종단친목회, 같은 책, p.92.
c뇨126)
1924년 9월에 형렬이 경성에 가서 체류하고 있자, 마침 보천교를 탈퇴한 이상호가 찾아와서 증산의 성적(聖蹟)에 관한 강설(講説)을 청하며 함께 머물렀다. 이상호는 형렬의 미륵불교에 개종하여 보천교 신도 수천 명을 권고하여 함께 종사하니 교세가 다시 떨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127) 형렬은 이상호를 신임하여 교무의 일을 보게 하였다. 상호는 여러 간부에게 교단 사무소를 금산사에 두는 것은 불가하니 교당을 건축하자고 역설하여 지방에 가서 돈을 마련해서 돌아왔다. 그동안 간부들은 형렬이 상호를 신임하는 것에 시기하다가 상호가 교당을 짓는다고 하니, 상호가 전횡(専横)한다고 중상모략하기에 이른 것이다.
상호가 돌아왔을 때 형렬은 상호에게 「누에가 먹을 것을 다 먹은 뒤에야 집을 짓나니 건축을 중지하라」 하고 수합된 건축비로 구릿골에 작은 집 한 채를 사서 간판을 걸고 남은 돈은 모두 소비하여 버렸다. 상호는 크게 실망하여 교무의 직을 사퇴하고는 용화동에 은거하였다.128)
형렬은 1929년 12월 26일에 증산이 출세(出世)한다고 하여 교인 수백 명을 모아 큰 치성을 거행하였다.129) 치성 일주일 동안 소 2마리, 개 15마리, 염소 15마리를 잡고 대추 한 가마를 너댓평되는 안반에 고이는 등 풍성한 음식을 진설하게 하면서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전답이 있는 사람을 다 팔아 올려야 된다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위답(位沓) 7마지기까지 팔아 올린 교인이 300명이 넘었다고 전한다. 형렬의 예언이 헛되어짐에 따라 교인들이 모두 흩어져서 다시는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1931년 10월에 형렬이 선화함에 미륵불교는 해산되어 버렸다.130) 미륵불교는 김형렬이 작고한 후에 해산되었다가 김자현의
126) 이정립, 같은 책, p.185.
127) 이정립, 같은 책, pp.130_131.
128) 홍범초, 같은 책, pp.186-187.
129) 이정립, 같은 책, p.133.
130) 홍범초, 같은 책, p.187.
아들 김태진이 지도하는 김태진파와 유제봉이 지도하는 용화계로 나누어 졌는데, 용화계는 최선에에게 이어졌다.131)
미륵불교는 증산을 미륵불이라 하여 곧 미륵불의 용화회상(龍華會上)이 도래될 것을 믿는 증산계열의 종교였으나, 최선에가 이끄는 '법상종'은 증산을 미륵으로 보면서도 불교에 연맥을 대고 있다.132) 최선에는 1970(경술)년 2월 20일에 문화공보부에 대한불교법상종이라는 종교단체 제24호로 등록하였으며, 현재는 '미륵불교법상종'으로 존재하고 있다.133)
증산의 수제자인 김형렬은 증산이 생전에 스스로 “나를 보고 싶으면 금산사로 오라"는 말을 한 것에 근거하여 금산사 미륵불을 증산의 영체(靈體)로써 신봉하였다.134) 그리고 형렬은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의 내용을 구술(冂述)하여 이상호가 경전을 편찬할 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단의 형성에는 김형렬 자신의 종교체험 즉 신력(神力)이라고 하는 신비체험에 근거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미륵불교의 쇠퇴를 가져온 요인이 되었다.
안내성(安乃成)은 1867(정묘)년 10월 25일 경남 함안군 가야면 도음곡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갓난아기였을 때 집을 떠난 아버지를 찾기 위해 9세에 어머니와 함께 집을 떠나 여기저기를 방랑하다가 정읍 대흥리에서 몇 년간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대흥리에 계시고 내성은 아버지를 반드시 찾고야 말리라는 일념으로 집을 떠나 방랑하였다. 떠돌아다니면서도 불경을 배워 8년간을 염송하였는데 하루는 진주 촉석루에 이르러 낮잠을 자는데, 갑자기 정신이 황홀하
131) 증산종단친목회, 같은 책, p.93.
132) 류병덕, 「일제시의 미륵하생신앙」, 『한국미륵사상연구』, 서울: 동국대학교출판부, 1987, p.226.
133) 김홍철 · 유병덕 · 양은용,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종교문제연구소,1997, p.170.
134)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I, p194.
여지더니 하늘에서 「내성아 노래를 받으라」 는 음성이 들리고 “임천가" 노랫가락 소리가 들렸다. 노래를 다 부르더니 「석가모니 부처는 지나간 부처이니 염불은 그만하고 이제부터 너는 천선생을 찾아 모시도록 하라」 는 말을 들었다.
이때부터 내성은 아버지와 천선생을 함께 찾았는데,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까지 가서 찾아 헤맸다. 중국에서 이진사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찾는 천선생은 조선에 계시다」 고 말하여 다시 귀국하였다고 전한다.135) 그 후 마흔이 되던 1907(정미)년 음력 6월 22일에 내성은 태인에서 혼자 정읍으로 내려가고 증산은 정읍에서 올라오다가 대각교(大覺橋)에서 만나 종도가 되었다. 안내성은 종도들이 모인 방에는 들지 못하고 항상 겉돌고 있었는데, 하루는 증산이 구릿골에서 그를 종도들의 방에 들게 하고 시조를읊게 하였다. 김형렬, 차경석 두 종도만이 각기 평조(平調)한 장씩 하고 내성의 차례에 와서 시조를 하였더니, 증산은 듣고 한 장 더 읊으라고 하여 촉석 루에서 들은 '임천가'를 하게 되었다. 임천가를 듣고서 증산은 「네가 진주 촉 석루는 어이 갔던고」 하였다. 깜짝 놀란 안내성은 비로소 증산이 바로 천선생이며 하느님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136)
안내성은 증산이 「3년간 떠나지 말고 앉아서 태을주를 읽으라」 는 분부에주문을 송독하는데 몰두하여 증산이 화천한 줄도 몰랐다. 내성은 1911(신해)년 초까지 집에서 수련하다가 이해 9월 19일 고 부인이 차경석의 집에 본소를 정하고 종도들을 소집하여 교단을 창설할 때 여기에 참가하였다. 안내성도 형렬과 마찬가지로 경석과 마음이 맞지 않아 여수옵 가국리에서 따로 교단을 창립하였다.
1915(을묘)년에 순천군 도산면 게표리로 옮기고, 1916(병진)년에 무안군 해제면 삼봉리로 옮기고, 1918(무오)년에 전북 김제군 청도리 백운동으로 옮겨
135) 홍범초, 같은 책, p.197.
136) 홍범초, 같은 책, pp.196-198.
전남 각지로부터 신도 수백 명을 이주케 하여 교인촌을 건설하였다. 내성은 증산의 수제자로서 증산이 새 시대의 문명을 조종하는 권한을 본인에게 주었다고 역설(力説)하며, 교인들에게 일심으로 수도하면 멀지 않아 증산이 환생하여 큰 복을 줄 것이라 하였다. 그는 교인들에게 통용하는 주문을 한 가지씩기한을 정하여 읽게 하고 그 기한이 차면 다른 주문을 읽으라고 명할 때에 새 운수가 나오니 받아가라고 하였다.137)
안내성은 1927(정묘)년에 전주군 우림면 청도리 백운동에 이주하고 신도 4 백 명을 이주케 하여 교인촌을 건설한 뒤에 교세확장에 진력하였으며, 1929(기사)년 겨울에 보천교를 탈퇴한 문정삼, 채규일을 비롯하여 많은 교인이 입문하여 교세를 떨쳤다. 안내성은 1930(경오)년에 교명(敎名)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 하고138) 증산을 옥황상제라 하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삼대 종지와 팔조 수행요목을 발표하였다.
내성은 교인 가운데 처녀 십여 명을 뽑아서 첩으로 정하고 또 증산의 부인과 사망한 아우 중선의 부인과 동서남북 사방선관(四方仙官)의 부인을 정하여 놓고 예대(禮待)하였다. 내성은 풍류로서 신도들을 가르치고 청소년의 학교 교육을 금지하며 또 신도들에게 죽음은 흉한 일이니 시체를 보면 신기를 손상한다 하여 신도들의 상사(喪事)에 조위(弔慰)를 금하였다. 이로 인하여 세간에 악평이 크게 일어나고 간부들이 이반(離反)하게 되어 1931(신미)년부터 교세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139)
내성은 82회 생일되는 1949(기축)년 음력 10월 25일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손톱 발톱까지 깎고 새 옷을 갈아입은 후 부인의 무릎을 베고 잠자듯이 선화(仙化) 하였다. 안내성이 선화한 후 신도들은 노장파의 유영주, 곽상곤, 백운기, 소장파의 안문환으로 나누어졌다.140)
137) 이정립, 같은 책, p.69.
138) 촌산지순, 같은 책, p.342.
139) 이정립, 같은 책, p.181.
140) 이강오, 「한국의 신흥종교, 제 1부 - 증산교계 총론-」, 『전북대 논문집』 제7집, 1966, p.18.
안내성은 비록 글자를 몰랐지만 증산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확신하였고, 자신이 증산의 수제자였다고 주장하며 정통성을 인정받으려 하였다. 증산은 단순히 죽음으로 끝나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곧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오는 존재로 믿어져 구원의 절대자로 이해되었다.141)
이상호는 1888(무자)년 음력 2월 27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송정리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호는 청음이고, 자(字)는 상호이며 본관은 연안이다. 그는 부모슬하에서 16세까지 한학을 배우고 20세부터 3년간 해남미산중학에서 신학문을 공부한 뒤에 상해 북경 등지에 나가 3년간 외유하다가 27세 되던 해(1915년)에 귀국하여 그 해에 태을교에 입교하였다.142)
이상호와 함께 경전을 편찬한 동생 이정립은 1895(을미)년 음력 2월 19일에 출생하였는데, 관명은 성영, 자는 정립, 아호는 남주라 하였다. 이정립은 10세까지 한학을 배웠고 10세부터 14세까지 전남 목포 영흥소학교에서 공부하고 18세에서 20세까지 해남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20세 되던 1914(갑인)년에 태을교에 입교하여 뜻한 바가 있어서 일본에 건너가 다음 해(1915년)에 동경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25세 되던 1919(기미)년 3월에 귀국하여 보천교의 포교에 종사하였다.143)
1919년 차경석이 60 방주 간부를 조직할 때 이상호는 중앙 팔교령(八敎領)의 하나인 서방주에 선임되고, 이정립은 24운주(運主)의 첫머리인 동지방주에 선임되었다. 보천교에 주요한 간부로 있던 이상호와 이정립은 보천교의 교리를 체계화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성종교와 같은 종교로서의 공인을 요청하였다.
141) 김탁, 『증산교학』, 서울: 미래향문화, 1992, p.130
142) 이현택, 「증산교」, 『한국종교』 8, 원광대학교종교문제연구소, 1983, pp.251-252.
143) 홍범초, 같은 책, p.507.
이상호는 일찍이 보천교경성진정원장을 역임한 바 있고 시대일보사를 경영한 사람이었으며, 이정립은 「보광」 이라는 잡지를 출판하는 등 보천교를 위하여 숱한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144) 1924(갑자)년에 이상호와 이정립은 시대일보 경영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보천교에서 그 책임을 물어 방주인을 회수당하였다. 결국 상호와 정립은 교직이 파면된 뒤에 동료 간부였던 이종승(李鍾昇) · 이종익(李鍾翊)과 함께 서울에서 보천교 혁신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나 생각한 대로 되지 않자 외유의 뜻을 정하고 만주로 갔다.
1924(갑자)년에 보천교를 탈퇴한 이상호는 당시 교단운동이 증산의 참된 교리를 드러내지 못하고 한갓 권모술수와 괴이한 변설로 세상을 미혹하고 있는 것을 개탄(慨歎)하고 교경(敎經)을 편찬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1925(을축)년 9월에 경성에서 김형렬을 만나 자신의 뜻을 전하고 동의를 구하여 곧 전라도 김제군 수류면 금산리 용화동으로 이거(移居) 하였다. 그 뒤에 날마다 형렬을방문하여 증산 재세 시 언행을 직접 들은 대로 또는 직접 본대로 자세히 강화(講話)하여 주기를 청하여 낱낱이 필기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형렬은 이미 늙었고 또 수십 년이 지나버린 옛일이므로 잊어버린 일이 많아서 대번에 조리 있게 강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형렬의 기억이 회복되는 대로 하루에 한 두절씩 혹은 며칠 만에 한 두절씩 필기하게 되었다.145)
이리하여 1926(병인)년 7월에 형렬에게서 필기한 것을 수집(蒐集)하고 과거 차경석에게서 들었던 것을 보태어 증산의 행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증산 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를 간행하였다. 김탁은 이 책에 대해서 3가지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증산의 생애와 그의 종교적 행위와 사상에 대해 최초의 경전이라는 것이다. 둘째, 편년체로 구성된 자료 모음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후대에 증산교단의 경전인 『대순전경』 이 나올 수 있게 되는 결정적 근거 요, 자료제공처가 된다고 하였다. 셋째, 내용기술의 표현이 전체적으로 볼 때
144)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I, p.196.
145) 이정립, 같은 책, pp.151-152.
직접적이고 다듬어지지 않은 채로 기록되어 있어서 후대의 기록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경전이라는 것이다.146) 『증산천사공사기』 는 증산이라는 인물이 신비적인 존재로만 여겨지던 것에서 벗어나 역사적인 인물로 드러낸 최초의 경전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증산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던 교인들도 문서를 통해 그 가르침을 접하게 되었다.
상호는 이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김경학 · 박공우 · 안내성 · 김송환류찬명 · · 김덕찬 · 김준찬 · 이치복 · 김자현 · 문공신 · 최덕겸 등 모는 종도들을 방문하여 그 강화를 청하였다. 또 증산이 천지공사를 위해 다닌 지대(地帶)를 답사하며 증산과 지면이 있었다는 촌로(村老)들을 찾아서 그 강화를 청하여 자료수집을 계속하였다.147)
1928(무진)년에 뜻이 같은 신도들을 모아 교단을 조직하고 증산의 참된 교의를 드러내어 새로운 종교운동을 일으키기로 작정하였다. 이상호는 동지를 口으는 한편 종도들을 초청하여 12월 22일 동지 오전 1시에 신도 300여 명이 모여 박공우의 집례로 증산에게 개교(開敎) 봉고치성(奉告致誠)을 올리고 교명을 동화교라고 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최고 교임(敎任)인 통정(統正)에는 이상호로, 통섭(統攝)에는 임경호로 임명하였다.148)
동화교의 간부는 대개 상당한 유식계급이고, 또한 보천교의 혁신을 기도하다 이루지 못하고 교단을 이탈한 자들로써 증산의 유교(遺敎)를 미신의 영역에서 탈피하여 참다운 종교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교인의 다수는 증산의 기적을 믿었고 현실적인 제재초복(除災招輻) 혹은 개인적인 통령을 원하였기 때문에 교조를 숭배하며 각자의 정신수양 및 기도로 병, 흉년, 전쟁의 3 난을 면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본교에서는 통령, 즉 정신수양의 결과 신명의 영역에 달하는 것을 개안(開眼) 혹은 합안(闔眼)이라고 한다.
146) 김탁, 같은 책, 11155.
147) 홍범초, 같은 책, p.513.
148) 홍범초, 같은 책, pp.514-515.
이교에서의 개안법은 보통 때보다도 좋은 옷과 음식을 먹고, 속된 일에 마음이 흐트러지는 것을 피하며 상당한 기간 주문을 읊어서 정신을 통일하는 것으로, 교인 중에도 이렇게 하여 개안하는 자가 수명 있다고 한다.)149) 이상호와 간부들은 증산의 참된 뜻을 펼치기 위해 교단을 창립하였으나, 다른 증산계 교단처럼 일부 교인들은 현실적 복락에 마음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929(기사)년 3월 16일 총독부로부터 출판허가를 얻어 최초로 경전화(經典化)한 『대순전경』 을 출판하였다. 이 책을 간행할 때 일제에 불리한 구절은 모두 빼고 혹은 삭제당하기도 하여 국한문으로 간행하였다. 『대순전경』 은 증산사상의 사상적 근거를 확립하였다.
1931(신미)년 동화교에서는 개교 3주년 기념치성을 올리고 조종골 교단과 동화교를 합하여 합동교단을 조직하였다.150) 고 부인이 주재하여 대교령 한 사람과 부교령 두 사람을 두어 교단을 운영케 하고, 대보 한 사람과 아보와 찬보 각 두 사람씩으로 구성된 보화원을 두어 교무를 협찬하도록 하였다.
한편 일본은 전쟁을 준비하느라고 국내의 사상통제를 단행할 때, 증산의 교인들은 민족의식을 고집하는 준민족운동(準民族運動)으로 규정하여 1936(병자)년 4월에 총독부는 증산계 각 교단에 대대적으로 폭압 명령을 내렸다.151) 김제경찰서장은 동화교 이상호 · 이정립 · 임경호와 선도교주 안내성, 태을교주 박공우를 불러서 교단의 해체와 포교금지를 엄명하였다. 그리고 옥구경찰서에서는 증산의 영정을 압수하여 성산면 면장의 집에 보관하도록 하고 증산을 신봉하는 크고 작은 10여 파 교단 모두 해산시켰다.152)
해방되어 9월 19일에 증산 강세치성을 올리고 나서 이정립이 대법사를 조직하자고 제안하여 다시 증산교의 재건에 노력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1933년에
149) 촌산지순, 같은 책, p.344.
150) 이정립, 『증산교요령』, 전북 김제: 증산교본부, 1990, p.57.
151) 이정립, 『증산교요령』, p.58.
152) 이정립, 『증산교사』, p.296.
는 『대순전경』 을 순한글본으로 간행하였다. 1946년에 이정립은 빠진 구절을 전부 넣어서 증보하여 한자현역(漢字懸譯)한 국문본의 원고를 완성하였고, 또 교리서인 『대순철학』 을 저술하였다.
1949(기축)년 1월 11일에 증산교 17개 교파의 대표들이 서울역 앞 도동 김 국보의 집에 모여서 증산교단통정원(甑山敎團統整院)을 조직하고 증산교단 선언 · 교의체계 · 신앙체계 · 증산교단 규약을 채택 선포한 뒤에 직원을 선임하고 총본부를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 72번지 원 시천교 교실(敎室)에 두었다. 이 단체는 다음 해 1950년 6 · 25사변이 일어나 통교 유동열이 납북된 후 와해되고 말았다.153)
동화교는 1952년 증산교대법사로 개칭하였다가, 1955년 교명을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라 개칭하였다. 1961년 민족종교단체 통합정책에 따라 동도교증산교회(東道敎甑山敎會)로 바꾸고, 1963년에 다시 교명을 증산교본부로 바꾸었다154)
1947년에 이상호는 증산사상의 자료수집과 그 사상을 연구 · 보충하여 한 자현역국문체(漢字懸譯國文體) 『대순전경』 3판을 간행하였다. 3판 이후로는 절(節)의 증보만 있을 뿐이지 분류체제인 장(章)은 변함이 없으므로 『대순전경』 의 구조적 틀이 확정되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78세에 그가 죽기 한해 전에 직접 발행한 마지막 판본인 대증보(大增補) 6판을 간행하였다.155) 이상호는 6 · 25사변 후 전라북도 김제에 본부를 정하고 경전 및 교리, 사상의 정비와 교세 확장에 주력하다가 1966(병오)년 음력 12월 18일 79세로 선화 하였다.
초대 종사인 이상호가 선화한 후 그의 친동생이며 창립 초기부터 같이 교단을 이끌어왔던 이정립이 대를 이어 교주가 되었으나, 그 역시 1968(무신)년 10월 11일 74세에 선화하였다.
153) 이정립, 『증산교요령』, pp.60-63.
154) 이정립, 『증산교요령』, pp.63-64.
155) 이현택, 같은 글, p.253.
이상호는 증산의 종도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경전을 편찬한 것은 경전이 없던 시대에 종교로서의 위상을 갖추었다. 그는 한때 보천교, 미륵불교에 몸을 담았지만, 선화할 때까지 증산계 교단을 통합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으며, 증산의 사상을 바르게 설파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증산 재세 시 대부분의 종도들은 증산을 선생, 또는 선생님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156) 김일부는 증산과 함께 옥경에 올라가 상제를 만나는 꿈을 꾸고요운이라는 호를 주었다. 김병욱은 순검대에 잡히기 직전에 증산의 도움으로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자, 증산을 천신(天神)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57) 동학신 도 박공우는 증산을 '하느님의 강림이라고 생각했다.158)
증산 화천 후 종도들은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나 각 교단이 분열하면서 그 교단의 명칭과 교리에 맞게 호칭도 달라진다. 그 호칭이 유교식으로, 불교식으로, 도교식으로, 기독교식으로, 민간신앙식으로 각각 다르게 인식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증산에 대한 호칭이 53가지나 되고 있음을 볼 때 명백히 확인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호칭을 살펴보면, 아버님, 천사(天師), 대법천사(大法天師), 유황상제(惟皇上帝), 옥황상제(玉皇上帝), 상제(上帝), 성부(聖父), 천부(天父), 증산(甑山)어머니, 미륵세존성조(彌勒世尊聖祖), 대선생(大先生), 삼계대도사(三界大導師), 대법천사(大法天師), 신성(神聖), 후천
156) · - · ·先生은 곳 天神이시라. 만일 先生의 도으심이 아니엇드면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경성: 상생사, 1926, p.22.)
157) 이상호, 『증산천사공사기』, p.22.
158) 『대순전경』 6, 2장 67절
국조(後天國祖), 천황(天皇), 하누님, 새한울님, 후천하나님, 증산상제(甑山上帝), 천지상제(天地上帝), 미륵세존(彌勒世尊), 미륵불(彌勒佛), 존불(尊佛), 진주(眞主),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 구천상제(九天上帝)159) 등으로 부르고 있다.
초기 증산계 교단이 분열하면서 증산에 대한 호칭이 어떻게 변했는지, 대표적인 호칭의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초기 증산계 교단에서는 증산에 대한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였다.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하는 이유는 먼저 보천교에서는 1909년 정월 3일에 증산이 차경석과 고 부인에게 고사를 지내게할 때 백지에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고사를 마친 뒤에 소각하도록 명한 바 있었다고 한다. 그 하나의 이유와 더불어 특히 증산이 옥황상제의 전신으로 강세하여 천지공사를 보았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60)
증산이 화천한 후 차경석과 김광찬, 김형렬이 금산사 미륵전에 들어가 참배를 하고 종이에 '옥황상제지위(玉皇上帝之位)'라고 써서 미륵불상에 붙이고 치성을 올린 뒤에 그 위패를 떼어 사실(私室)에 가서 벽에 붙이고 각기 정심하였다고 한다. 다음 해 9월에 고 부인이 증산의 초빈에 가서 널 천개(天蓋)를 떼고, '옥황상제'라 쓴 백로지를 덮었다161)는 기록이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 증산을 옥황상제라는 이유는 하늘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던 옥황상제가 인간 증산으로 화현하여 지상에 내려왔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제로
159) 홍범초, 『증산교개설』, 서울: 창문각, 1982, pp.282-285.
160) 이강오, 『한국신흥종교총람』 1, p.269.
161) 이정립, 『고부인신정기』, p.24.
서의 권위와 능력이 지니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증산이 중요한 주문으로 제정 했던 진법주(眞法呪) 첫머리에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라 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옥황상제가 구천에 계신다는 표현이 된다.162) 그러니까 구천에 있던 옥황상제가 인세에 하강하여 인간 증산이 되었다가 다시 하늘에 올라가 있다는 것이고 바로 이 옥황상제 즉 증산을 신앙하는 신앙체계가 형성되는 것이다.163)
역사적으로 옥황(玉皇) 혹은 옥제(玉帝)란 말이 문헌기록으로 처음 등장하는 것은 남조(南朝) 양대(梁代) 도홍경의 『진령위업도』 에서 보인다. 이때의 지위는 하위에 속하는데, 그중에서 옥황도군(玉皇道君)은 옥청삼원궁(玉淸三元宮) 우위(右位) 제11위에, 고상옥제(高上玉帝)는 옥청(玉淸) 우위(右位) 제19위에 배열되어 있다.164) 옥황대제(玉皇大帝)가 공식적인 최고 신격으로 승격하게 된 것은 북송 진종(眞宗, 997-1022), 휘종(徽宗, 1100-1125) 때였다. 도교에 국가 지원이 최고조에 달하였던 때, 옥황을 昊天玉皇上帝(太上開天執符御歷含眞體道玉皇大天帝)라는 존호를 쓰게 되었다.(1116년) 이것은 옥황이 천제(天帝)혹은 대제(大帝)에서 상제(上帝)로 승격된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국가 최고 사전(祀典)체계의 주신(主神)인 호천상제(昊天上帝) 숭배와 결합하였음을 뜻한다. 이로부터 옥황상제는 관방(官方)과 민간, 도교 모두에 지고신(至高神)으로 인정되었으며, 옥황상제 신앙이 광범위하게 유행하게 되었다.165) 옥황상제는 도교에서 가장 높은 신으로서, 도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었을 때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무교(巫敎)에서 전통적으로 심겨오던 천신(天神 : 하늘신)을 의미하기도 하고, 인간에게 수명장수를 주고 인간의 모는 문제를 풀어주는 신이다.166) 증단계 교단에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지칭할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
162) 배용덕 · 임영창, 『증산신학개론』 하, 서울: 증산사상연구회, 1984, p.67.
163) 김홍철, 『증산교사상연구』, 원광대학교출판국, 2000, p.118.
164) 陳建憲, 『玉皇大帝信仰』, 北京· 學苑出)阪社, 1994, p14에는 옥황대제신양의 민간신양적 성격과 중국 본토 종교인 도교와의 상관성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다. 민간신앙적 성격으로는 주로 『서유기』 를인용하고, 도교와의 상관성은 문화적이고 풍속적인 면에서 약술하고 있다.
165) 진건헌, 같은 책, p.19.
장 높은 신(神)으로서 보편적으로 불리던 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증산계 교단 가운데 선도교와 보천교, 증산대도교는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하여 신앙하였다. 특히 보천교에서는 신앙대상에 대한 호칭을 정립하는 과정이 잘 드러나 있으므로 살펴보고자 한다.
차경석은 1917년 10월에 대흥리를 떠난 뒤로 계속 소식이 없다가 1919년 4월에 송대선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
무릇 천지(天地)의 대운(大運)은 그 사람이 아니면 명령(命令)을 내려 주지 않으며, 인간(人間)의 대사업(大事業)은 그 명령(命令)이 아니면 성공(成功)하지 못하니라. 사람도 그 사람이 있고 운수도 그 운이 있고 그 일을 하는 데에도 또한 그 때가 있는 법인데 이와 같이 대창(大創)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으리오 …… 덕(德)이란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根源)이요 만사가 이루이지는 바당이다. 예로부터 성인과 영웅들을 보건데, 덕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했으니 흥하고 망함이 나뉘어짐은 그 덕이 있고 없음을 돌아 볼 뿐이다. 그러므로 덕은 도에 있고 화(化)는 덕(德)에 있으니 도(道)도 없고, 덕(德)도 없으면 화생(化生)의 기운이 어디를 쫓아서 나올까? 도가 있으면 덕이 있고 덕이 있으면 화가 있는 것은 천리의 고연(固然)함이요, 인사의 원기(元氣)라. 대장부(大丈夫)가 한 번 일으킬 업(業)이니 이를 두고 무엇을 할까? 오직 우리 교(敎)는 본래 대선생이 명령한 도덕이다. 우물로부터 근원하여 · 사해에 그치니 그 광대함을 어찌 말할 수 있으리오 · 오직 나와 제군들이 전날의 힘씀을 계속해 나가 사지에 빠진 무리들을 건진다면 산이 우러러보고 바다가 축복할 것이라. …… 일에는 선후가 있고 각각 그 때가 있으며, · 때의 움직임에는 시운(時運)이 아님이 없음이라. · 망령된 행동을 적게 하고 마음과 기를 화합하여 봄날의 화창함을 기다리도록 하라.167)
위의 편지로 봐서는 전체적으로 유교적인 느낌이 들고, 시운(時運)을 강조하여 숙명적으로 정해진 법칙에 따라 세상일이 되어간다는 “예정조화"를 말하고
166) 조흥윤, 『한국의 巫』, 서울: 정음사, 1983. p.95.
167) 보천교중앙총정원, 같은 책, pp.462-464. 보천교 총정원, 『道訓』, 전북 정읍: 보천교전문사, 1986,pp.11-13.夫天地大運非其人不命人間之大業非其命不成人有其人運有其運其之所爲亦有其時如此大創何以易言哉…德者萬物之生原萬事之成質自古聖雄順德者興逆德者亡興亡之分顧其德之存不存如何如何耳然德在於道化在於德無道無德化生之氣從何而出乎有道有德有德有化是天理之固然人事之元氣唯我所敎本大先生所命之道德也自井源瀰于四海其之廣大何可言哉…唯我諸君永加前日之力以濟幾死之衆山仰海祝…事有先後各有其時時之所動莫非時運…小勿妄動心和氣和以待春和.
있다. 증산과 관계되는 내용으로 짐작되는 것은 「오직 우리 교(敎)는 본래 대 선생이 명(命)한 도덕이다.」 라는 부분이다. 차경석이 이 편지를 쓴 1919년 4월만 해도 증산에 대한 호칭이 '대선생'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신앙의 대상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증산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증산에 대한 이해도 부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168)
뒤에 이상호가 1922년에 보천교를 공개할 때, 이때에도 증산이라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이 다만 '천사'라고만 「보천교 종지」 에 쓰고 있다. '천사께서 대순의 성인으로 이 땅에 내려와 이미 그 운이 다한 선천을 종결짓고, 후천의 새로운 운을 여는 분’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있다.169)
1923(계해)년 5월에 진정원 내의 보광사를 설치하여 정기 간행물 『보광』 을발행하였다. 최초의 활자 인쇄물인 『보광(普光)』 창간호에 아래와 같은 문답이 있다.
(문) 보천교는 몇 해 전에 장설하였으며 교조(敎祖)는 누구신가요?(답) 거금(距今) 15년 전에 증산천사께서 개종(開宗)하시엿소. (문) 천사(天師)의 씨명(氏名)은? (답) 천사의 성은 강서요 본은 진주요 휘는 일순이오 자는 사옥이요 호는 증산이심니다. (문) 천사의 행장(行狀)과 귀 교(敎)의 역사를 대강(大綱)말삼하야주시오(답) 천사께옵서 거금 52년전 신미년 9월 19일 자시 전북 고부군 서산리 향제(鄕第)에서 탄강하시고 14년전 기유 6월 24일 39세의 수로써 천화(天化)하시엿습니다. 천사께서는 과거(過去) 천만대(千萬代) 백천만억원혼(百千萬億冤魂)의 무고(無告)함을 불인(不忍)하시고 금후(今後) 천만대(千萬代) 백천만억 생명(百千萬億生命)의 고통(苦痛)할 것을 불인(不忍)하야 무량무변(無量無邊)의 대자비로써 천지공사를 행하샤 죄마쿠 원만흔 구세계(舊世界)의 최후막(最后幕)을 닷치시고 장엄하고 행복스러운 후천세계의 제일문(第一門)을 여러주섯나이다. 천사의 행하신바 이적(異跡)이 만치마는 우리의 상식으로나 과학으로는 도저히 측모(測模)하든지 증명(証明)할수업는 귀신막측(鬼神莫測), 불가사의의 신비적의 일임으로 우리가 말함은 참월(僭越)이안이면 황당(荒唐)이겟소 차라리 탕탕무능명(蕩蕩無能名)이란 오자(五字)로써 덥허둘수밧게업슴니다.
168) 김탁, 같은 책, p.133.
169) 이정립, 『증산교사』, pp.90-91.
위의 글에서 볼 때 증산의 행적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처음으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증산의 생몰년대가 밝혀지고, 천지공사근 르 기행한 증산이 역사상 실존인물이었다는 것이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신앙의 대상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보광』 2호에는 「배고심(拜古心)을 혁파(革破)하고 오직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천사(天師)께만 절하라」 는 제목의 글 속에는 · · 보천교는 스스로 보천교요 유(儒) · 불(f)弗) 도(道)는 스스로 유(儒)불(佛) · · 도(道)이니 공불노(孔佛老)의 도제(徒弟)가 되려면 완전한 공불노(孔佛老)의 도제(徒弟)가 되고, 천사(天師)의 제자가 되려면 철저한 천사(天師)의 제자가 되라. 그리고 먼저 공불노(孔佛老)에 배(拜)하고 그 여성(餘誠)으로 천사께 배(拜)하려는 신보천심유불(身普天心儒佛)인 회색정신(灰色精神)을 혁파하라. 회색정신__ 이중신앙은 무치(無恥)가 심한 자이며 죄악이 큰 자이다. 오직 순일한 정성으로 천사께만 절하라. 오직 일심으로 천사의 교의(敎義)만 신봉(信奉)하라. 순성(純誠)이 아니면 일심(一心)이 아니면 천사의 원기(遠棄)하신 바 될 것이다.'라고 하여 증산에 대한 철저한 신앙을 요구하고 있다.
보천교 초기에는 체계적인 교리와 문서화된 경전이 없었다. 종도들이 구술한 이야기를 듣고 태을주 수련을 하였고, 증산의 위대함만이 구전(口傳)으로 뚜렷이 부각되어 있을 때였다. 그러나 보광지를 보면 보천교의 신앙의 대상이 증산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뒤에 이영호가 지은 『교조약사』(1935년)에도 보천교의 교조(敎祖)가 증산임을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다.
「유황상제(惟皇上帝)께옵서 창생의 무도(無道)함을 애련(愛憐)히 여기사 천하를 대순(大巡)하시다가 삼계신망(三界神望)으로 이 땅에 화현(化現)하사 선천(先天)의 기진(旣盡)한 수(數)를 폐하고 후천(後天)의 운(運)을 열으시며 위인(偉人)을 선택하사 교통(敎統)을 전하시니 즉 교조이시다. 교조의 호(號)는 증산(甑山)이요, 성은 강(姜)씨요 휘(諱)는 일순(-淳)이요, 자(字)는 사옥(士玉)이요 진주인(晋州人)이라. 신미(辛未)년 9월 19일 자시(子時)에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지금 정유군 덕천면 신월리) 향제(鄕第)에서 탄생하시다. 신축년으로부터 천지공사를 행하실새 상제의 권능을 임의로 행하시고 내가 옥황상제(玉皇上帝)라는 말씀이 유(有)하셨다. 그 기행이적은 필설(筆舌)로 진기(盡記)키 불능(不能)하고 다만 무능명(無能名) 삼자(三字)로써 형언할 수밖에 없더라.
위의 글에서도 보천교의 신앙의 대상은 증산이라는 것과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할 때 상제의 권능으로써 행하고 '내가 옥황상제(玉皇上帝)이다'는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는 증산이 곧 옥황상제로서 이 땅에 강림한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보천교에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한 기록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이미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여 신앙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1909년 정월 3일에 고사 지낼 때 백지에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라고 쓴 일과 증산이 화천한 후 금산사에 가서 치성드릴 때 위패를 올린 일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차경석이 1921년 황석산에서 고천제를 지낼 때, 천상의 일(日) · 월(月) · 성(星)을 그린 〈일월병(日月屏)>을 제단 위에 세우고, 그 앞에 '구천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 · 삼태칠성응감지위(三台七星應感之位)' 라고 크게 쓴 삼위신표를 설치하였다. 그 다음 해 5월 15일 본부 성전[호천금궐]에 신단을 설치하였는데, 여기에 일(日). 월(月) · 성(星)을 상징하는 <삼광영(三光影)>을 봉안하였다. 신단에는 단상의 후면 벽에 천지 · 일 · 월 · 성신의 자연현상을 그려서 옥황상제의 처소인 호천금궐의 내용을 표상(表象)하고 그 앞 우측에 일광영[日塔이라 함] · 중앙에 월광영[月塔이라 함] · 좌측에 성광영[星塔이라 함]의 삼광영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이 일광영은 구천(九天)을, 월광영은 옥황상제를, 성광영은 삼 태칠성을 각각 상징한다는 것이다.170)
증산의 천지공사이념에서 볼 때에 옥황상제는 보천교의 제신(祭神)으로 우
170) 홍범초, 『범증산교사』, PP. 91-98.
주를 주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을 말하고, 구천은 구요(九曜), 즉 아홉 개의 성(星)을 말한다.171) 우주를 체와 용, 운행의 삼면에서 볼 때, 구천(九天)은 우주의 체요, 옥황상제는 우주의 용사신(用事神)이요, 삼태칠성은 우주의 운행상(運行象)이라고 한다. 그리고 천상의 日 · 月 · 星이 나열되어 있음은 이것이 곧 체 · 용 · 운행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즉 일(日)은 우주의 체상(體象)이오, 월(月)은 우주의 용사상(用事象)이오, 성(星)은 우주의 운행상(運行象)이라고 본다.
보천교는 증산을 '대선생', '천사'라고 기록한 것을 토대로 해서 보면 처음부터 증산에 대한 호칭이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경석이 1909년 고사 지낼 때 옥황상제라고 위패를 올린 일, 그리고 뒤에 황석산에서 고천제를 지낼 때 분명히 증산을 우주의 체로는 '구천'이고, 우주의 용사신으로 '옥황상제'라고 신표를 내걸었다. 보천교의 전기교단, 선도교, 증산대도교에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하여 신앙하였다. 그러나 선도교의 경우 고 부인이 사망한 뒤 증산을 '옥황상제'서 '건존증산(乾尊甑山)'으로 호칭이 달라지며, 고 부인을 증산과 동격의 위치에 놓고 '곤존고씨(坤尊高氏)'라 하여 신앙하고 있다. 보천교에서도 후기교단으로 가면 신앙의 대상이 옥황상제에서 이법적인 천(天)으로 바뀌게 된다.
미륵불신앙은 불교에서 신앙하는 것이지만, 미륵불교를 세운 김형렬은 증산을 미륵불이라고 호칭하였다. 그 이유는 증산이 옥황상제이면서 바로 미륵불이라는 것이다. 증산이 일찍이 「나는 미륵불의 재생이다」 라든가 「나는 곧 미륵이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미륵을 보라 하시고, 금산사 미륵은 여의
171) 『普天敎-般』, 동경: 우방문고, 1926. p.31.
주를 손에 들었으나 나는 입에 물었노라고 하시며 아랫입술 안에 붉은 점을 보이시더라」 172)고 하였다. 그리고 증산은 얼굴이 원만하여 금산사 미륵불과 흡사했으며,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고 왼 손 바닥에 북방임자(壬字)무늬와 오른 손 바다에 별무자(戊字) 무늬가 있었다.173) 이 표현에서 증산은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이었고,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미륵불의 모습을 하였다고 형렬은 생각했다. 형렬은 집이 가난하여 보리밥으로 증산에게 공양(供養)하다가 추석이 되어 할 수 없이 솥을 팔아서 반찬을 장만하려고 하자, 증산은
「솥이 들썩이니 미륵불이 출세함이로다」 고 하였다.174) 여기서 증산은 자신이 미륵불의 화신임을 알게 해주기 위함인 것으로 풀이된다. 왜냐하면 금산사 미륵불만은 유독 솥 위에 입불로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대순전경』 초판에 증산이 천하를 대순하다가 석가모니의 당래불찬탄설게(當來佛讚嘆說偈)에 위거(爲據)하야 승려 진표가 당래(當來)의 비음(秘音)을 감 통(感通)하고 모악산 금산사에 금신(金身)을 세워 지심기원(至心祈願)하여 오던 곳에 이르러 30년을 지냈다고 한다.175) 여기 이 말도 증산 자신이 바로 미록임을 뜻하는 내용이라 하겠다.
또 김형렬에게 「너는 좌불(坐佛)이 되어 처소(處所)를 잘 지키라 나는 유불(遊佛)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은 증산은 자신이 활동하는 부처임을 자인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증산은 주로 활동하던 용화동을 '용화회생의 기지로 생각했고 그가 천지공사를 통해서 건설했다는 후천선경도 바로. 용화회상과 같은 모습이었다. 어쨌든 증산은 종도들에게 자신이 미륵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하였다고 전한다.176)
이와 같이 김형렬이 가장 결정적으로 증산을 미륵이라고 한 것은 증산사후
172) 『대순전경』 1, 13장 1절.
173) 『대순전경』 3, 2장 121절.
174) 『대순전경』 1, 6장 2절.
175) 『대순전경』 1, 9장 11절.
176) 김홍철, 같은 책, p.23.
금산사에 가서 치성을 드릴 때 신비체험을 한 날인 8월 1일에 미륵불을 신안으로 보게 된 이후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증산이 스스로 미륵으로 이 세상에 내려와 후천선경을 건설하였다는 것을 믿고 신양하였다.
차경석은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신앙하여 지극정성을 다하였으나 내외 안팎에 끊임없는 교인들의 이탈, 조선총독부의 감시 등으로 잠시도 편한 날이 없었다. 결국 경석은 무진(1928)년 정월에 3일간 교도 수백 명을 모아 놓고 이제까지 증산의 신권(神權)에 의하여 신통묘술(神通妙術)과 경세(經世)의 운수가 모두 증산의 신적권화(神的權化)에 있다고 믿었던 것을 부정하는 설법을 하였다. 또한 보천교는 7대 치성일 가운데 증산의 탄강일과 화천일을 치성에서 제외하였는데, 이것은 보천교의 신로변경을 구체적으로 증명한 것이라 하겠다.
신로변경을 통해 드러난 보천교의 교리는 유교적인 면에서 윤리도덕을 강조하고 역학적인 이론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면 천(天)과 신(神)의 문제 같은 경우 성리학적인 천명(天命)과 역학적인 음양의 작용이라 하였다. 즉 천(天)은 음양 · 오행의 작용으로써 만물이 생성하고 발육하는 도(道)의 대원(大源)이고, 신(神)은 음양이 작용하는 신묘불가사의 한 힘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 간과 만물의 주재자라고 하는 상제신(上帝神)도 음양이 작용하는 근본적인 힘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천(天)은 도(道)의 체(體)요, 상제(上帝)는 도(道)의 용(用)이라고 보는 것이다. 또한 천은 움직이게 하는 마음이라면 상제는 그 마음에 의하여 작용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재신인 상제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상제의 본체인 천을 받들어야 한다는177) 것이다. 사람이 천을 공경한다
177) 村山智順, 같은 책, p.317.
는 것은 곧 인의(仁義)의 천심(天心)을 공경하는 것이며, 또한 도의 근원인 천(天)을 공경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상제는 이 인의(仁義)의 천심을 작용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사람도 이 인의(仁義)의 천심(天心)을 내 마음으로 하여 활동하는 자라면 곧 상제와 동일한 지위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천(敬天)의 입장에서 보면, 교조 강증산이 옥황상제의 재생이며, 그가 천지공사를 직접 행한 것은 곧 증산 자신이 능히 천심(天心)을 체득하여 상제의 행위를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인정할 수 있지만, 그가 천상의 '옥경대'에 옥황상제로서 내려왔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178)
차경석이 후기교단에서 신앙대상을 종전의 상제님에서 '천'으로 신앙태도를 바꾼 것은 새로운 종교운동으로 전개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보천교는 무진설법 이후로 차경석의 신앙태도에 찬동하는 신파와 증산을 옥황상제로 신앙해야 한다는 구파로 나누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았다.
동화교를 창립한 이상호는 신앙대상으로 증산을 통천상제라 하였다. 증산은 하느님으로 강림한 절대권능자이기 때문에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쓴다는 것이다.179) 그러므로 『증산교요령』 에 「구천신단에서는 결정한 모든 공사를 온세상에 이루어지게 할 삼계의 대권을 천사께 맡기시고 천사께서는 온 세계의 문신과 무신을 거느리시고 모든 공사를 이루어지도록 추진하시나니, 천사께서는 곧 통천상제시니라」 180)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증산은 「내가 삼계 대권을 주재(主宰)하여 천지를 개벽하여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고 조화정부를
178) 이강오, 같은 책, pp.273-274.
179) 『대순전경』 6, 2장 67절.
180) 이정립, 『증산교요령』, p.7.
열어 재겁에 쌓인 신명과 민중을 건지려 하니…… 」181)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천지개조와 조정하는 권능과 주재권능으로써 신명계와 인간계를 동시에 구제하는 절대적 구제권능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권능을 실현하는 기지로써 선택된 곳이 동토라는 것이다. 이 동토에 거주해온 민중은 자연히 선민(選民)의 은택(恩澤)을 입게 된다는 귀결이 된다.182) 그러므로 그 지역과 그 지역의 민중은 불가불리(不可不離)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 그 지역과 민중의 조상에 대한 고려가 없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동토에 출현하려면 인신화권(人身化權)의 질서를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삼단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의 근거를 갖는다. 삼단신앙체계(三段信仰體系)란 단군 · 수운 · 증산의 연맥을 계통으로 한다.183)
이것은 『대순전경』 에 「이 시대는 원시반본하는 시대라 혈통줄이 바로 잡히는 때니 환부역조하는 자와 환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184)고 한 것처럼 시조신과의 연맥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민족의 시조인 환인 · 환웅 · 단군이 개국 때 지녔던 천부인 3개로써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두 가지 큰 이념과 증산의 권능과 신권으로 전한 태을주와 의통인패가 같은 맥락을 갖는다는 것이다.185) 뿐만 아니라 천지공사의 깊은 뜻은 원시반본하는 시대에 있어서 후천운도의 재조정이기 때문에 선후천의 질대(迭代)와 계승이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선천신으로는 시조신, 후천신으로는 이상신을 받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천신으로 받들게 된 시조신은 환인천제, 환웅 천왕, 단군임검이고, 중간 매개는 수운이며, 이상신으로 받들게 된 신은 증산이다. 증산은 단군시대의 신교사상(神敎思想)을 중광(重光)하여 새로운 세계
181) 『대순전경』 6, 4장 1절.
182) 이정립은 『민족적 종교운동』, 전북 김제: 증산교대법사, 1953. pp.31-32에서 「새 세계 건설의 인간 공작을 개시할 기점으로 택정되었으며 새 세계건설의 인간공작을 개시할 사도로 택정되었다」 고 하였다.
183) 이정립, 『증산교요령』, p.47.
184) 『대순전경』 6, 6장 124절.
185) 홍범초, 한배검시대의 신교의 重光, pp.10-11.
통일문화를 건설하는 창조원리가 되도록 한 사상적 연맥을 가진다.186) 삼단신 양체계도에 보면 그것을 뚜렷이 알 수 있다.
동화교의 이상호는 절대권능자로써 천지조화를 마음대로 조정하는 증산을 통천상제라 호칭하였다. 그는 증산의 권능을 실현할 곳이 동토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민중은 자연히 선민(選民)의 은택(恩澤)을 입는 것이므로 선민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증산이 그…·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187)고 한 말을 상기해 볼 때, 오랫동안 쌓인 조선의 원(冤)을 먼저 풀어주어 조선을 상등국으로 만들려는 증산의 배려심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증산이 삼계의 대권을 가지고 상극으로 지배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천지공사를 단행한 것은 우주적인 차원의 문제이지 한 나라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상호가 선민사상을 강조한 것은 오히려 증산의 사상을 축소시키고 있다.
초기 증산계 교단에서 신앙대상의 호칭은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나 증산계 교단이 분열되었을 때, 선도교는 고 부인이 사망한 뒤 증산을 건존증산(乾尊甑山)이라하고, 고 부
186) 이현택, 같은 글, p.259.
187) 『전경』, 권지 1장 11절.
인을 곤존고씨(坤尊高氏)라 하여, 고 부인을 증산과 동격의 위치에 올려놓고 신앙대상으로 하고 있다. 보천교는 전기교단의 경우 구천과 옥황상제를 제용 관계로써 같은 신격으로 보았으며, 후기교단의 경우 유교적인 면으로 전향하여 신앙의 대상이 '천'으로 바뀌게 된다. 미륵불교는 금산사에서 신비체험을 한 날을 계기로 미륵불이라고 호칭하고, 증산대도교는 그대로 옥황상제라 신양하였으며, 동화교는 증산이 하느님으로 강림한 절대권능자이기 때문에 통천 상제라 하였다.
증산계 교단에서는 신앙대상의 호칭에 대해 처음에는 옥황상제라고 하였다가 각 교단이 분열되면서 그 교단의 특징에 따라서 호칭도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증산이 유일하게 남긴 저술은 『현무경』 이다. 이것은 부적과 같은 상징으로 채워져 있어 일반인이 알기 어려운 내용이다. 그리고 증산이 생전에 교단의 제도나 조직의 운영, 그리고 포교나 종도들의 교육 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증산 자신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리 강론이 없어서 그의 사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하면서도 상징적인 편편의 언행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을 필요로 하게 된다.
최초의 교단인 선도교(1911년)는 체계적인 교리와 문서화된 경전이 없었다. 그럼에도 창립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급격히 교세가 확장된 것은 태을주 수련을 통한 신비체험과 치병의 효과,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민중의 대망이 응집된 결과였다. 증산교단이 어느 정도 종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것은 차경석이 1921년 황석산에서 행한 2차 고천제 이후였다. 차경석은 경전의 필요성을 느끼고 이상호와 이정립 형제를 교경편찬위원으로 임명하여 증산의 성
훈에 관한 경전을 편찬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뒤 이상호는 1926(병인)년 7월에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1929년 『대순전경』 을 간행하였다.증산계 교단의 교리가 성립되는 것은 교단이 분열되고 나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형성하게 된다. 각 교단은 교주 체험에 의해서 증산을 이해하는 폭에 따라서 교리를 성립하게 되는 데, 그 과정을 교단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고 부인은 1918년 9월에 차경석과 분리하여 김제군 백산면 조종골에 교당을 신축하여 새로운 교단인 선도교를 세우고 자유로이 포교활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부인은 신도들의 두통 · 치통 · 안질 · 종기 등 사소한 질병의 치료는 물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잉태를 시켜주는가 하면 남의 병을 대신 앓아주며 많은 치병활동을 하고 기행이적을 행하였다. 1928년이 되면 부인은 화가 채용신을 시켜 증산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다. 이것이 증산계 교단에서최초로 그려진 증산의 초상화였다.188) 그리고 그 해 5월에 간부들을 불러 모아 7개 항목의 계잠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 남에게 척을 짓지 말라. ㉩거짓말을 하지 말라. ㉭ 자존심을 갖지 말라 ㉦ 도적질 말라 ㉭ 간음(姦淫)하지 말라 ㉭ 무고(無故)히 살생하지 말라 ㉩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자기의 허물을 생각하야 천지에 사죄하라.189)
1931년에 동화교와 선도교가 합하여 통합교단을 조직하였다.190) 그러나 동화교는 기대에 반하여 고 부인의 생활비조차 지급할 수 없을 만큼 교세가 점차 쇠퇴하여 졌다. 이에 1933년 고 부인은 동화교와 분리하여 새로 오성산(五聖山)에 수양사(修養舍)라는 교당을 신축하여 교세의 신장을 획책하였으나 교
188) 김홍철, 같은 책, p.347.
189) 이정립, 『천후신정기』, pp.57-58.
190) 이정립, 『증산교사』, pp.275-278.
세가 부진하여 차차 쇠퇴하였다.191)
이정립은 그의 저서 『고부인신정기』 에서 고 부인이 교단을 창립하고 관여했던 시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제1교단시대는 고 부인과 보천교를 장립한 차 경석 종도와의 관계로 얽힌 1911년부터 1918년까지이고, 제2교단시대는 고 부인이 대흥리를 떠나 조종골에 들어와서 교단을 창립하고 교화해나간 1918년부터 1931년까지이며, 제3교단시대는 고 부인이 용화동에서 동화교와의 통합교단을 조직하여 수양사로 떠날 때 까지 머물렀던 만 2년간을 가리킨다.
선도교의 순수한 교의와 의식을 비롯하여 그 당시 교단의 상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제2교단시대를 살펴보는 것이 더 낫다. 교의는 증산의 유교(遺敎)를 받들고 증산을 존숭하며 늘 경주(經呪:七星經・五呪文・書傳序文)를 읊으라고 하였다. 이 주문을 읊으면 신령과 같은 의통(醫通)을 얻어(어떠한 병도 고칠 수 있는 신비력을 얻는다) 장래에 다가올 질병시대에 자신를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교만이 오직 훌륭한 종교로서 틀림없이 번창할 수 있다고 믿었다. 기도법은 강일순의 상(像)을 본존으로 하여 여기에 경문을 읊고 주문을 왼 후 자기가 희망하는 바를 고하는 것이다. 제일(祭日)은 정월 1일, 3월 15일, 6월 24일, 8월 15일, 9월 19일, 동지로 정하고 있다.192) 현재는 고 부인을 보좌하여 총애를 받았던 고민환이 저술한 『선정원경』 (1960년)193)에 선도교의 교리가 남아있다.
가) 계명10조(戒銘十條)
부인이 교도(敎徒)들에게 가르친 계명은 아래와 같다.
⑴ 물위투도(勿爲偸盜): 도적질 하지 말라
191) 촌산지순, 같은 책, pp.345_346.
192) 촌산지순, 같은 책, 11346.
193) 고민환이 지은 『선정원경』 을 구하러 '오성산 도장에 찾아7갔으나 현재 원본이 남아있지 않았다. 선학의 자료를 존중하여 홍범초의 『범증산교사』 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기본 자료로 취하였다.
⑵ 물위간음(勿爲姦淫): 간음을 하지 말라 ⑶ 물위작척(勿爲作慼): 척을 짓지 말라 ⑷ 물위시기(勿爲猜忌): 시기를 하지 말라 ⑸ 물위망언(勿為妄言): 망령된 말을 하지 말라 ⑹ 물위기어(勿爲綺語)· 말을 꾸며서 하지 말라 ⑺ 물위자만(勿爲自慢): 자만심을 갖지 말라 ⑻ 물위도박(勿爲賭博): 도박을 하지 말라 ⑼ 물위무고살생(勿爲無故殺生): 함부로 죽이지 말라 ⑽ 물위과다음료(勿爲過多飮料): 술을 너무 마시지 말라
위의 고 부인의 계명 10조의 오른편 풀이는 홍범초가 하였다. 위와 같은 계명을 통하여 고 부인은 신앙체계를 바르게 하였다.194)
나) 6대보은
이 6대 보은은 고민환이 고 부인의 말씀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⑴ 천지보은(天地報恩): 천지가 우주만유 가운데 오직 사람에게만 천품을 주어 무궁무극무량(無窮無極無量)의 대복(大輻)으로 생명을 지속 보존하는 0해를 아는 것이다. ⑵ 일월보은(日月報恩): 일월이 사시질대(四時迭代)로 기후를 조절하여 만물을 생성케 하고 명암광휘(明暗光輝)케 하여 만사만리의 요도(要道)에 무량한공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⑶ 부모보은 (父母報恩): 부모가 나에게 만물의 영장인 근본이 되는 형체를 주셨고 회건취습(回乾就濕)과 열고토감(咽苦吐甘)하시고 유포양육(乳哺養育)하사 인생요도(人生要道)를 교양(敎養)한 공을 아는 것이다.
194) 『천후신정기』, 『고부인신정기』 에 의하면 1928년 5월에 간부들을 모아 7개 항목의 계잠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이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고민환이 고 부인의 뜻을 재해석한 것이 아닌가 한다.
⑷ 사교보은(師敎報恩): 스승이 오직 인도의 범절을 설효(説曉)하여 인류 사회에 만능을 장려지준(奬勵指遵)한 공을 아는 것이다. ⑸ 군왕보은(郡王報恩): 통치하는 자리에 있는 이가 천명을 받들어 성정만화(聖政萬化)를 베풀어 강역(疆域)을 수호하고 여민(黎民)을 보호한 공을 아는 것이다. ⑹ 신농씨보은(神農氏報恩): 신농씨가 인지미개시대(人智未開時代)에 농공 의약 제반을 시설한 공을 아는 것이다.
다) 오도수행요목(悟道修行要目) ⑴ 명심견성(明心見性): 밝은 마음으로 타고난 천성을 안다. ⑵ 파사현정(破邪顯正): 사악한 생각을 버리고 올바른 도리를 따른다. ⑶ 기망취진(棄忙就眞): 급한 마음을 버리고 진실을 이루는 것이다. ⑷ 폐악수선(廢惡修善): 악을 폐하고 선을 닦는다.
⑸ 관선징악(觀善懲惡): 선을 바라보고 옳지 못한 마음이나 행실 따위를 징계하는 것이다. ⑹ 내원해인(耐怨害忍): 다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당할 때 인욕하며 지혜롭게 피해를 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⑺ 안수고인(安受苦忍) : 추위와 더위 등 나쁜 조건을 극복하고 죽음이 닥쳐올 만큼 어려운 고통을 겪어도 이를 능히 참으면서 수행하는 것이다.
라) 6화명심(六和銘心)
⑴ 신화동주(身和同住): 몸의 화합으로 함께 살며 한 몸같이 일하는 자세.
⑵ 구화무쟁(口和無諍): 입의 화합으로 다툼없이 지내는 자세.
⑶ 의화무위C意和無違): 뜻의 화합으로 어기는 일없이 한마음으로 수행하는 자세.
⑷ 견화동해(見和同解): 견해의 화합으로 함께 이해하는 자세. ⑸ 계화동준(戒和同遵): 계율의 화합으로 함께 참되게 수행하는 자세.
⑹ 이화동균(利和同均): 이익의 화합으로 고르게 분배하여 평등심을 갖고 남을 존중하는 자세.
선도교의 교리는 고 부인은 단지 7개 항목의 계잠만 발표하고 선화 하였으나, 뒤에 1960년에 고민환이 고 부인의 말을 정리하여 7개 항목에서 10개 항목으로 늘인 계잠과 교리를 『선정원경』 에 기록하고 있다.
가) 전기교단의 교리체계
(1) 교리
차경석이 고 부인과 분리하여 보천교를 운영할 때 태을주의 수련으로 교세를 확대하였다. 총독부의 권유로 이상호가 교단의 종지를 아래와 같이 선포하고 십여 년간의 비밀운동을 공개운동으로 전환하였다. 이때 「보천교 종지」 에교리에 대해서 간단하게 ‘거병 해원’을 언급하고 있다.
天道純然하여 漸移成化라. 聖人이 則之하여 芋我蒼生하여 各正其性하고 各遂其名하니 天地位焉하고 萬物이 育焉하여 其行也 至强하고 其德也 至大로라. 叔季以降으로 人慾이 肆行하여 泥於無道하니 天下皆病하여 及有萬邦之寃과 萬物之寃과 萬事之寃일새 唯我天師 以大巡之聖으로 降于斯土하사 閉先天旣盡之數하고 開後天無窮之運하시니 去病解寃에 天成之平하고 布敎宣化에 北機-新이라 欽哉라 天道與人道 -也니 心乃其中에 渾然-體니라.195)
위의 「보천교 종지」 는 교리를 대내외에 표명하는 것인 만큼 보천교의 독특성을 강조하여 선포한 글이다. 이 세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말세가 가까워지자 인욕(人慾)이 방자하게 행하여 무도하여 졌으니 “천하가 모두 병들게되었다”고 현세를 진단하고 있다. 천사께서 대순의 성인으로 이 땅에 내려와“후천의 새로운 운"을 여는 “구원"을 행하셨음을 알리고 믿도록 하고 있다. 그러한 “구원”의 구체적인 행위는 “병을 물리치고 원을 풀어 없애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196)
1923년 5월에 경성진정원내에 보광사를 설치하여 이성영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인쇄소를 두어 기관 잡지 『보광』 을 발행하였는데, 차경석의 간섭이 너무심해 4호까지 발행하고 마침내 폐간하였다고 전한다.197) 『보광』 은 창간호가1923년 10월 25일에 발간되었고, 마지막 제4호는 1924년 3월에 발간되었다.198)그 당시에 보천교의 교리의 성립정도를 파악하는 데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195) 이정립, 『증산교사』, pp.90_91. 천도(天道)는 순연(純然)하여 점차 화(化)를 이루는데 나아간다. 성인(聖人)이 이를 본받아서 우리 창생(蒼生)으로 하여금 각기 그 성(性)을 바르게 하고 그 명(名)을 따르게 하니, 천지(天地)가 제대로 서고 만물(萬物)이 번성하여 그 행함은 지극히 굳세고 그 덕(德)은 지극히 크도다. 그러나 멸망에 가까운 때를 당하여 인욕(人慾)이 제멋대로 행해져 무도(無道)에 빠져서 천하(天下)가 모두 병들어 만방(萬邦) · 만물(萬物) · 만사(萬事)가 원(寃)을 품게 되었도다. 이에 우리 천사(天師)께서 대순(大巡)의 성인(聖人)으로서 이 땅에 내려오사, 선천(先天)의 이미 다한 운수(運數)를 닫으시고 후천(後天)의 무궁(無窮)한 운수(運數)를 여시니, 병(病)이 물러가고 원(寃)이 풀리니 천(天)은 태평함을 얻고, 가르침을 널리 베푸니 조화(造化)의 기틀이 열리도다. 공경할 만하도다. 천도(天道)와 인도(人道)가 하나이니 마음이 그 가운데 있어 혼연(渾然)히 한 몸이 되도다.
196) 김탁, 같은 책, pp.135_136.
197) 이정립, 증산교사, pp.106_107.
198) <보광지>

『보광』 을 분석하는 것이 적합하다.
『보광』 창간호의 첫 장에 있는 선포문을 살펴서, 창간호가 나올 당시의 교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선천개벽(先天開闢)이래 오인류사회(吾人類社會)에는 공상적(空想的) 신앙(信仰)이 현실(現實)을 희생(犧牲)하얏스며, 우상적(偶像的) 도덕(道德)이 양심(良心)을 마비(麻痺)하얏스며 오류(誤繆)의 학설(學說)이 이지(理知)를 교란(攪亂)하고, 허위(虛僞)의 문명(文明)이 생존(生存)을 유린(蹂躪)하도다. 그리하야 세계(世界)는 암흑(暗黑)과 죄악(罪惡)으로 전충(塡充)하고 병(病)과 원(寃)이 육합(六合)에 미만(瀰蔓)하얏도다. 이에 오인(吾人)의 양심(良心)이 과거(過去)의 모든 불합리(不合理)한 전통(傳統)을 부인(否認)하고 저주(咀呪)하는 동시(同時)에 대생명(大生命)의 진리(眞理)를 갈구(渇求)하고 이상적(理想的) 신세계(新世界)를 동경(憧憬)하는. 천몰락(先天沒落)의 최후기(最後期)에 제(際)하야, 아(我) 천사(天師)거압서 사세(斯世)에 대순(大巡)하샤 천지(天地)의 현기(玄機)를 조정(調正)하시고 신인(神人)의 숙원(宿寃)을 화해(和解)하샤 선천기진(先天旣盡)의 수(數)를 폐(閉)하시고 후천무궁(後天無窮)의 개운(開運)을 하시니 이것이 천지공사(天地公事)이며, 우주(宇宙)의 진리(眞理)를 기초(基礎)로 하샤 신화(艸化), 일심(一心), 상생(相生), 거병(去病), 해원(解寃), 후천선경(後天仙境)의 교의(敎義)를 홍선(弘宣)하시니 이것이 만화귀일(萬化歸-)이며, 후천(後天)의 신운(神運)을 제회(際會)하야 천사(天師)의 교의(敎義)를 신봉(信俸)하고 선포(宣布)하야 사해형제(四海兄弟)로 더부러 장엄(莊嚴)한 선경(仙境)을 개척(開拓)하고 영세태평(永世泰平)의 무량행복(無量幸輻)을 공향(供享)코자함이 아(我) 보천교(普天敎)의 목적(目的)이요, 사명(使命)이로다. 만천하대중(滿天下大衆)이여 귀의(歸依)하라. 신앙(信仰)하라, 천사(天師)의 은택(恩澤)과 자광(慈光)에 욕(浴)하라.
「선포문」 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선천의 세계로 공상적 신앙, 우상적 도덕, 오류의 학설, 허위의 문명이 암흑과 죄악, 병과 원이 가득 찬 세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선천 몰락의 최후기에 천사께서 대순하여 천지의 현기(玄機)를 조정(調正)하고 신인(神人)의 숙원(宿寃)을 화해하여 후천무궁(後天無窮)한 운수를 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선천과 후천을 대비하여 천지공사를 통해 우주의 진리를 기초로 하여 교리를 내놓은 점은 「보천교 종지」 에서 선
천과 현세를 설명했던 것보다 훨씬 새롭고 직접적인 표현인 것이다.
또한 「보천교 종지」 에서는 거병과 해원만이 교의로 이해되었으나, 「선포 문」 에서는 신화(神化), 일심(一心), 상생(相生), 거병(去病), 해원(解寃), 후천선경(後天仙境)의 교의(敎義)가 확대되어 있다. 이렇게 교의가 확대된 것은 거병과 해원을 이룰 수 있는 실제적 요체로서 일심과 상생이 덧붙여졌으며, 신화하여 후천선경을 세우자는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의 제시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199)
그 교리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는 『보고는 창간호에 실린 「답객난(答客難)」 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에 실린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선포문」 에 언급한 신화(神化)의 교리에 대한 해석이 「답객난(答客難)」 에서 는 빠져 있다. 그러므로 1926년에 발간된 『보천교 일반』 에 신화의 내용과 함 께 교리가 실려 있는데, 신화의 교리는 『보천교 일반』 에 나와 있는 내용을참고하고자 한다. ㈎ 신화(神化)라는 것은, 신의 천위(天位)에 도달하는 것, 즉 해탈의 경계(境界)를 말하는데, 본교 구경(究竟; 사리(事理)의 마지막, 궁극)의 목적은, 우리의 신에 대한 개념에 있다. 고대에는 우주를 창조한 만물 주재(主宰)의 유일무이한 신, 즉 공상의 신을 경외하거나, 석가모니 부처, 노자의 선(仙)에 이르는 이상적인 신을 말하지만, 본교는 교조 증산천사(天師)에 의해 일심이 되는 보편타당성을 얻어, 영육일치의 실재적 신이 될 수 있다. 즉 인류는 일심으로 신이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200) ㈏ 일심(一心)은 내적일심과 외적일심이 있으며, 내적일심은 상대의 경계를 초월하여 절대평등(絶對平等) 무차별(無差別)적인 고유신성(固有神性)으로 환원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의식C意識)을 정일(精-)하여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중(中)을 잡아 상제(上帝)로부터 명계(冥契)를 교(交)하는 것이
199) 김탁, 같은 책, pp.136-138.
200) 『普天敎-般』, pp.27-28.
다. 이 일심공부의 법문은 첫째, 심고, 둘째, 주송이다. 이 공부로 말미암아 신통(神通)됨을 일러 개안(開眼)이라고 한다. 그리고 외적일심이라는 것은 만사(萬事)에 유시유종(有始有終)함과 만인(萬人)이 동심동덕(同心同德)함을 이른다.(『보광』 1호, p.30) ㈐ 상생(相生)은 자연(自然)의 법칙, 생존의 원리로부터 생긴 본능적(本能的) 충동(衝動)이다. 천지 만물이 상생으로 생성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상생이란 실로 우주 만유의 원기(元氣)요, 생물진화의 요소(要素)이다. 그 기원은 인류가 있기 전에 모는 도덕의 본원이 되었다. 인(仁) · 이1(愛) · 자비 겸양 등 덕목이 온통 상생수(相生水)의 비말(飛沫 : 물거품)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오행상극, 생존경쟁 같은 모순이 있음은 한 혜성적(彗星的) 우연성도 있고, 대부분은 상생의 목적을 위하여 영양의 필요를 느낀 부득이한 방편이다. 예로부터 우리 인류사회에서는 이 방편을 남용한 결과, 이기심, 경쟁성을 유발하여 약육강식(弱肉强食), 우승열패(優勝劣敗)의 대참극이 생기 인간의 사회적 생활이 근본적으로 복멸(覆減)되려 한다 이에 천사께서 상생1의 덕을 세워 인류를 상애호조(相愛互助)의 방면으로 선도(善導)하였다.(『보광』 1호, p.31)㈑ 거병(去病)을 알기 위해서 먼저 병이란 생리적 병 이외에 모든 인습적 도덕과 불합리한 제도, 또는 주아적(主我的) 일체의 죄악을 총칭한다. 이와 같은 병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일러 거병이라고 한다.(『보광』 1호,p.31) ㈒ 해원(解寃)이란? 원(冤)이란 빈자약자(貧者弱者)가 사회에 대한 불평과 또는 생노병사와 같은 불가피한 고뇌를 일컫는다. 이것을 푸는 것이 곧 해원이다. 그 푸는 방법은 전자에는 거병상생(去病相生)이면 그만이고, 후자에는 스스로 참회하는 것이다.(『보광』 1호, p.31) ㈓ 후천선경은 자유의 꽃이 난만(爛漫)하고 평화의 바람이 탕양(蕩漾)한 후천세계를 가르친 말이다. 이 세계는 극락천국과 같이 출세간(出世間)적이 아
니요, 대동세태상경(大同世太上境)과 같이 태고시대에 있었다는 것도 아니요, 화서국(華胥國)과 같이 서방요원(西方遼遠)의 땅에 있는 것도 아니요, 헬스카의 자유국여행기 같은 의작(擬作)의 기행문도 아니요, 벨라미의 회고와 같은 유토피아적 꿈이야기도 아니다. 후천선경은 우리 인류가 밟고 다니는 지구 위에 건설될 것이다. 우리의 손으로 개척할 지상천국이다. 선경의 내용은 미래의 일이라 나도 상세히 알지 못하나 대강은 이러할 것이다. 양반 상놈이 없을 것은 물론이지만, 황금만능시대는 아닐 것이다. 배불러 체증만난 사람이나, 굶어 죽은 원귀는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노동은 할지라도 상품(商品)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사람마다 교육은 받을지라도 돈벌이 할 목적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봄바람 평화 속에 꽃같이 사랑스럽고 새같이 서로 노래하고 나비처럼 서로 춤추는 낙원일 것이다.(『보광』1호, p.32)
촌산지순은 『조선의 유사종교』 에서 강증산이 종교를 창시하여 교의를 발표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증산은 천지공사를 행한 증산계 교단의 신앙대상이 되는 최고신으로서 종교를 개창한 적은 없었다. 『조선의 유사 종교』 에 '강증산의 교의'라는 부분을 보면, 보천교의 전기교단의 교리와 거의 같다. 촌산지순은 보천교의 교리를 증산의 교리로 오인(誤認)한 듯하다. 그리고 또 『조선의 유사종교』 에서 증산의 교리는 '신화일심, 인의상생, 거병해원, 후천선경의 4강령이고, 이에 도달하려면 오로지 주문을 읊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도 '인의(仁義)'는 보천교의 전기교단의 교리가 아니라 후기교단의 교리로, '인의'가 중심이 되는 용어이며, 4강령에 도달하기 위해서 일심공부의 법문으로, 첫째, 심고, 둘째, 주송이라고 보천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이 점은 보천교의 교리와 촌산지순이 쓴 『조선의 유사종교』 에서 쓰여진 교리의 내용이 서로 다른 점이라 할 것이다.
⑵ 12계명(誡命)
1922년 정월에 차경석이 임실군 고덕리에 은거하고 있으면서 방주 몇 사람을 불러 12계명을 교중에 선포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교리 일부가 되었다.
㈎ 존상제(尊上帝): 상제님, 즉 교조 강일순을 존숭하는 것이다.201)㈏ 숭도덕(崇道德): 도덕을 숭상한다.
㈐ 친목동인(親睦同人): 동포 · 동족 간에 친애하고 화목토록 할지라.
㈑ 망난음양(罔亂陰陽): 남녀 간에 난잡함이 없이 예의를 지킬지라. ㈒ 이재공정(理財公正): 재물을 공평하게 하고 정직하게 처리할지라. ㈓ 절용후생(節用厚生): 절약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라. ㈔ 불유탄망(不有誕妄): 사람을 속이며 망령된 일을 하지 말라
㈕ 무위자존(無爲自尊): 자기 이상이 없다 하여 사람을 멸시하지 말지라.
㈖ 막회탐욕(莫懷貪欲): 남의 물품을 탐하거나 욕심을 가지지 말지라.
㈗ 신물시기(愼物猜忌): 사람의 기술과 재주를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며 항상 삼갈지라. ㈘ 정직물아(正直勿阿): 항상 사람을 상대할 때에 공명정직하게 하고 아유구용을 하지 말지라. ㈙ 물훼타인(勿毀他人): 타인을 험담하지 말고 자신의 양심을 가질지라.
이상의 계명을 범하면 강등(降等) 또는 출교(黜敎)를 시킴.202)
나) 후기교단의 교리체계
차경석이 신로변경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1928년 정월 3일 이후에는 보천교의 후기교단의 형태로 이루어진다. 1933년 3월 1일에 차경석은 교리에 대해서
201) 촌산지순, 같은 책, pp.317-318.
202) 보천교 총정원, 『도훈』, 전북: 보천교전문사, 1986, pp.24-26.
「년전(年前)에 이상호가 간판을 걸고 있을 때에 신화 · 일심 · 상생 · 거 병 · 해원 · 후천선경 등의 말로 교리를 정하여 선전 포교하였으나 그것은 하등의 교리가 아니다. 일심이라 함은 보천교에서 뿐만 아니라 누구나 말하는 것이므로 독특한 교리라 할 수 없고, 해원이라 함은 이 세상의 누구나 다 말한다. 온 세상이 천연적(天然的)으로 그러한데 독특한 교리라 할 수 없고, 거 병이라 함은 이 세상에 병을 낫게 한다는 것이니 교리가 아니다. 정당한 방침으로 말하면 자연(自然) 낫는다. 만일 이것을 교리라 하면 어떻게 치병한다는 조목이 없으니 교리가 아니 되며 후천선경이라 함은 세상에서 미신으로 말을 하니 병이 다 나으면 선경(仙境)이 소용이 없으며 보천교는 더 진보 할 수 없고 해원이 다 되면 더 진보할 수 없다. 세상은 항시 병과 원으로만 지내는 것이 아니고 그러면 정당하게 교인이 되는 대도(大道)가 아니다. 그때에 나의 몸이 활발치 못하고 산곡(山谷) 중(中)에 숨어있었으므로 나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발명하여 온 것을 갑자기 변동하지 못하여 지금까지 왔다. 그러므로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仁義)이고,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은 대동(大同)이니 앞으로 포교하는데 이 교리로 하라」 고 설명하였다.203)
1934년 5월에 중앙전문사(典文司)를 통하여 혁신된 교의강령을 발표하였는데, 후기교단의 교리 내용이 『대도지남』 에 소개되고 있다.
⑴ 교리
㈎ 인의(仁義): 인(仁)으로 생(生)하고 의(義)로서 이루나니 인의(仁義)를 행함은 인도(人道)의 시작과 끝이다. 인의는 높고 멀어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사람마다 고유한 성명 가운데 갖추어 있으나 사람이 스스로 포기하여 행하는 이가 드물기 때문이다. 사람이 인의를 알지 못하면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인의도 또한 사람이 아니면 인의라 할 수 없는 것이다.
203) 보천교 총정원, 같은 책, pp.74-75.
하늘에서는 원리(元利;円可スl)가 되고 사시(四時)는 춘추(春秋)가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측은수오(惻隱羞惡)가 되니 사람이 살고 죽음이 그 이치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공자는 사람의 도를 말하여 인(仁)과 의(義)라 하고, 맹자도 인의(仁義)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204) 덧붙인다면, 교조의 “대인대의(大仁大義)하면 무병한다"는 유훈에 따른 것이고 인(仁)은 생(生)이고 의(義)는 성장, 생성은 천지의 화육으로 곧 도(道)이다. 사람도 또한 이 화육에서 출발하여 화육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고로 만일 득도하여 인생에 안심입명을 이루려는 자는 모름지기 인도(人道)의 인의가 바로 천지 생성화육임을 알고 인의의 도를 준수하여 생성의 공을 배워야 한다.205)
이것에 근거한다면 보천교후기교단의 교의는 증산의 성훈을 전통적인 유교에 가깝게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사대강령(四大綱領)
인의(仁義)를 실현하기 위해서 내세운 네 가지 윤리실현의 벼리이다. ㈎ 경천(敬天): 낳고 기름이 천지의 은덕이 아님이 없으니 일심으로 공경하여 그 은혜를 보답해야 한다. 하늘은 음양오행으로 만물을 생성하니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인의예지의 성품을 받았기 때문에 가장 존귀한 것이다. 사람이 태어남에 부모의 정혈(精血)을 받아 골육이 되었으나 성정(性情)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며, 심중(心中)에 있는 영(靈)은 천지의 기(氣)다. 곧 나의 육신을 낳은 이는 부모요 나의 심령을 명(命)한 이는 하늘이니 천지는 내 부모요 부모는 천지와 같다. 그러므로 사람의 자식된 이는 마땅히 부모 심기는 마음으로 하늘을 심기고 부모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해야 한다.206)
204) 보천교중앙총정원, 『大道指南』, 전북 정읍: 보천교편집국, 1958. PP.1-2, 仁以生之하고 義以成之하니 行仁行義는 人道之始終也라. 仁義는 非高遠難行者也라 人所固有於性命之中而人自暴棄하야 存之者鮮矣니 人而不知仁義則不可以爲人이오 仁義亦非人則不可以爲仁義矣니 在天에 爲元爲利하고 在四時에 爲春爲秋하고 在人에 爲惻隱羞惡而人之-生-死莫非其理也라 故로 孔子曰立人之道曰仁與義라 하시고 孟子曰仁義而已矣라 하시니라.
205) 村山智順, 같은 책, pp.317.
㈏ 명덕(明德): 스스로 그 덕을 밝히는 것을 이름이니 선(善)을 위주로 하여 스승으로 삼으니 가운데로부터 밖으로 화(化)하는 것이다. 덕의 본체는 밝으나 물욕이 가리어 아기[赤子]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덕성(德性)의 어둡고 캄캄함이 비유컨대 밝은 거울에 티끌이 낀 것과 같고 깨끗한 그릇에 때가 낀 것 같아서 갈고 닦으면 본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덕(德) · 인(仁) · 경(敬) · 성(誠)이라 함은 말은 비록 다르나 이치는 하나이다. 덕(德)은 가운데로부터 밖으로 화하여 나오는 것이므로 비유하면 난초의 싹이 들 때 싹의 가운데가 허한 고로 팔괘의 위(位)가 나누어질 때는 반드시 그 중심이 허(虛)한 것이다. 천하 만물이 덕이 아니면 화(化)하지 못하니, 도(道)에는 덕(德)이 있고 덕에는 화(化)가 있으니 화(化)한 즉 천지가 서고 만물이 길러지는 것이다.207) ㈐ 정륜(正倫): 윤(倫)이란 질서이니 인도(人道)를 바르게 하여 금수에 근접하지 말아야 한다. 요순(堯舜)이 비로소 인륜을 밝혀 구족(九族)을 화목하게 함으로써 백성이 온화하게 변화하였으나 성인이 이미 멀고, 교화는 오랑캐보다 못하고 풍속이 퇴폐하여 사람이 오상(五常)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아비는 그 자식을 자식으로 보지 않고 자식은 그 아비를 아비로 보지 않아,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니, 부부가 반목하고 노인과 젊은 사람 사이에 예의가 없으며 같은 동포 간에 서로 상잔하여 금수와 다르지 않으니 이제 만일 바로 잡지 아니하면 인도(人道)는 끊어질 것이요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208)
206) 보천교중앙총정원, 『大道指南』, PP.2-3, 生之養之無非天地之恩德이니 -心恭敬하나 恩報其恩者也라. 天이 以二氣五行으로 化生萬物하야 萬物之中에 惟人이 得仁義禮智之性 故로 爲最貴하니 人之生也에 以父母之精血로 爲骨肉而性情則受於天也라. 心中有靈하니 靈者는 天地之氣也라. ……則生我者는 父母오 命我與我者는 天也니 天地는 卽父母오 父母는 卽天地니 爲人子者 當以事父母之心으로 事天하고 敬父母之心으로 敬天이 可也라.
207) 보천교중앙총정원, 『大道指南』, PP.3-4, 自明其德之謂也니 主善爲師하야 自中而化外者也라 德之體本明而爲物欲所蔽하야 失其赤子之心故로 其德性之昏暗이 如鏡之有塵하고 器之有垢하야 磨之拭之則本色이 自現이니 曰德曰仁曰敬曰誠은 言雖殊而理則-也라 德者는 自中而化故로 比如蕉蘭之萌芽時에 中心이 虛하야 及其出于地上則中之兩便이 分而又分하니 中心이 虛故로 八卦之分位必虛其中心也라. 天下. 萬物이 非德則不化니 道有德하고 德有化하고 化則天地位焉하고 萬物이 育焉하나니라.
㈑ 애인(愛人): 내 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늘이 만민을 낼 때 너와 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은 자식으로 보아 차등을 두지 않고 사랑하는 고로 동포형제라 한다. 마땅히 사람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하여 악을 숨겨주고 선을 드러내며 단점을 덮어주고 옹졸한 것은 감싸면 오월(吳越) 같은 원수까지라도 다 형제가 될 수 있다. 남의 근심을 나의 일처럼 근심하면 남도 내 근심을 자기 근심처럼 하고, 남의 즐거움을 나의 일처럼 즐거워하면 남도 나의 즐거움을 자기 즐거움처럼 하니 저절로 오만과 질투하 는 마음이 없어진다. 다른 사람의 재주 있음을 미워하여 질투하는 이는 소인이요, 다른 사람의 재주 있음을 자신이 가진 듯이 하는 이는 군자이다.209)
⑶ 주의(主義): 상생(相生)
노인을 편히 하고 어린이를 품에 안으며 만물과 내가 차이가 없으면 한집안과 · 같이 이 우주 안을 볼 수 있게 된다. 강령에 경천(敬天) · 명덕(明德)정륜(正倫) · 애인(愛人)과 주의(主義) 상생(相生)이 인의(仁義)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나 인의(仁義)가 있음을 알고 행하지 아니하면 열매 맺지 아니하는 헛꽃이요 궤안에 든 명주(明珠)와 같아서 공효를 끝내 드러내서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사강령과 상생은 인의(仁義)를 행하는 요령이다.210)
⑷ 목적: 대동(大同)
208) 보천교중양총정원, r大道指南」, p5, 倫者난 序也니 正其人道하야 使不近於禽獸者也라. 堯舜이 始明人倫하샤 以親九族하신대 黎民이 於變是雍이러니 聖人이 旣遠하고 敎化陵夷하고 風俗이 頹弊하야 人不知有五常而以至於父而坏子其子하고 子而不父其父하고 君不君臣不臣하고 夫妻反目하고 老少無禮하고 同類相殘하야 其違禽獸者 不遠矣니 今若不正이면 人道絶矣오 人類滅矣라.
209) 보천교중앙총정원, 『大道指南』, pp.9_10, 以愛己之心으로 及於人者也. 天生烝民에 無論離我하고 均昰赤子니 -視之下에 愛無差等故로 曰同胞兄弟라하니 當愛人如己而隱惡揚善하고 掩短護拙則正卵謂吳越이 皆兄弟라 憂人之憂則人亦憂其憂하고 樂人之樂則人亦樂其樂하야 自無侮慢猜妬之心矣리니 人之有技를 媢疾以惡之者는 小人之心也오 人之有技를 若己有之者는 君子之心也니라.
210) 보천교중앙총정원, 『大道指南』, pp.10-11, 安老懷幼하고 物我無間하야 視宇內如-家者也라. 綱領之敬天明德正倫愛人과 主義之相生이 莫非仁義中出來나 然이나 徒知有仁義而不能行之則所謂仁義如無實之虛花오 蘊櫝之明珠니 二者之功效終無著見故로 以右丑條로 次之하니 此五者는 行仁行義之要領也니라.
천하로 하여금 공변되게 하여 상하사방(上下四方)이 균제방정(均齊方正)케 하고 동귀일치(同歸一致)케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가 힘을 다투어 오직 이(利)를 추구하여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삼키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여 백방연구(百方研究)의 소산인 신비발명이 사람을 죽이는 기계에 불과하고, 오대(五大) 회의에 이른바 평화조약은 트집 잡아서 함부로 전쟁을 일으키는 모략이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나라는 안전한 나라가 없어 방휼지세(蚌鷸之勢)로 지탱하고 사람은 친신(親信)이 없어 사갈(蛇蝎)처럼 서로 독을 품듯 하니, 만약 이것을 그치지 않으면, 천하생령(天下生靈)이 자식을 잃고 서로 물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과 같으니, 이를 건지는 도(道)인 인의를 버리고 어찌하겠는가. 인(仁)으로써 상생하고 의(義)로서 서로 붙잡으면 인심(人心)이 같아져 천하가 대동(大同)이 된다.211)
보천교는 증산계 교단 가운데 최초로 교리를 형성하여 종교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보광』 의 창간호에 교리를 언급하고 있는데, 신화(神化), 일심(一心), 상생(相生), 거병(去病), 해원(解寃), 후천선경(後天仙境이라고 실려 있.다. 후기교단으로 가면 보천교의 교리는 인의(仁義)이고,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은 대동(大同)이다. 차경석은 교리에서도 후기교단은 유교로 전향하여 새로운 종교운동을 펼친 것임을 알 수 있다.
211) 보천교중양총정원, 『大道指南』, pp.11-12, 使天下로 爲公하야 上下四方이 均齊方正而同歸-致者也라. 今列國爭權하야 惟利是求而以大呑小하고 以强侵弱하야 百方硏究에 所謂神秘發明이 不過殺戮機具오 五大會議에 所謂平和條約이 無非惹鬧謀略이니 是故로 國無安全之國而如蚌鷸之相支하고 人無親信之人而如蛇蝎之財毒하니 若此不已則天下生靈이 靡有子遺而淪胥矣리니 拯救之道舍仁義何以哉리오 仁以相生하고 義以相扶則人心所同에 天下大同也리라.
미륵불교의 김형렬은 태을주 보다는 시천주를 주송하였으며, 또 증산이 그렸던 『현무경』 의 부(符)보다 수련하는 신자 각자의 생년지지(生年地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를 그리게 하였다. 수련 시에는 이 물형부를 날마 다 수십 장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성명을 새긴 4각형의 인장을 찍어서 불사르게 하였다. 그 의미는 선천에는 문자부(文字符)를 사용하였으나 후천에는 물형부로 조화권능을 부리는 것이라 하였다. 인간의 생년지지는 곧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지정된 물형부의 자료니 그 지지인 동물을 많이 그리면 필력을 얻고 몸에는 주력이 쌓인다고 가르쳤다.
김형렬 사후 현재 최선애가 이끄는 '법상종'의 『대한불교법상종지』 에 보면
「법상종의 본존불은 용화구주이시며 금세 천주이신 자씨미록불」 이라 하여
「진표율사가 당래불 강세의 비음을 듣고 오랫동안 기원한 끝에 미륵불을 뵙게 되었고 미륵불의 화신인 증산이 이 땅에 강림하게 되었다」 고 되어 있다.최선에는 증산을 미륵으로 보면서도 금산사 미륵전을 세운 진표율사에 그 연 맥을 대고 있다. 주요경전으로는 『미륵하생경』, 『미록상생경』 등 미록경 일체, 『금강경』, 『반야경』 등 불교경전과 『현무경』, 『대순전경』 등 증산교 단 경전을 사용하고 특히 『대한불교법상종미륵불총본산종지』 라는 서적을 발행하여 포덕용으로 사용한다.212)
가) 法相宗旨
미륵불은 그 불상부터 입상(立像)으로써, 재가실천(在家實踐) 곧 속세풍진을 버리지도 않고 능히, 티끌 기운을 가시는 마치 백련(白蓮)과 같은 정신으로 온 인류를 한 집안으로 삼아 이타홍익(利他弘益)을 위한 수도입덕(修道立德)으로써 인간생활의 유기적인 상관성 및 복합성을 가진다.
212) 김홍철 · 유병덕 · 양은용, 같은 책, p.170.
이러한 미륵 본래의 정신을 선양하여 미륵 외 십선도(十善道)의 교리로써 나라와 사회에 이바지해서 현실 극락을 이룩하는 것을 종지로 한다.213)
나) 십선도(十善道) ⑴ 산목숨을 함부로 하지 마라. ⑵ 모든 도둑심리를 버리라. ⑶ 음란한 행위를 삼가면 깨끗한 세상이 된다. ⑷ 망령된 말을 아니하면 성실한 세상이 된다. ⑸ 모략중상과 이간질 아니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라. ⑹ 좋은 말은 많이, 말씨를 곱게 하자. ⑺ 실없는 말을 하지 말라. ⑻ 내 것을 인색하게 하지 않고 먼저 주고받을 생각을 하자. ⑼ 남을 미워하거나 질투하지 말고 사랑해라 ⑽ 삿된 견해를 버리고 인과법을 소중히 하자.214)
김형렬은 태을주보다는 기도주를 외우도록 하였으며 물형부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증산이 유일하게 남긴 현무경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한다. 김형렬의 뒤를 이어 최선에에게로 이르러서야 비로소 종지와 십선도의 교리를 선포하였다.
안내성은 1930(경오)년에 교명(敎名)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 일컫고 삼
213) 최선에, 『법상종지』, 대전: 호서출판사, 1975. p.26.
214) 한국종교학회, 『한국신종교실태조사보고서』, 1985. p.754.
대종지와 팔조 수행요목을 발표하니 아래와 같다.
가) 삼대종지(三大宗旨)
⑴ 시봉(侍奉): 천지인삼신(天地人三市中) - 하늘의 상제(上帝) 땅의 후토(后土) · 사람의 선령(先靈) (2) 통솔(統率): 선 유 삼도(仙佛儒三道) - 선도(仙道)로써 심령.(心靈)을 수련하고, 불도(佛道)로써 육체를 양생(養生)하고, 유도(儒道)로써 범절을 이행함. ⑶ 일심(一心): 성 · 경 · 신 삼자(誠敬信三字) - 신도(神道)에 기도를 일심으로 하고, 인도(人道)에 이행을 일심으로 함.
나) 팔조신앙요목(八條信仰要目)⑴ 수도포덕(修道布德) ⑵ 신인합덕(神人合德) ⑶ 거병해원(軼病解冤) ⑷ 안심안신(安心安身) ⑸ 강기불란(綱紀不亂) ⑹ 구령송사(救靈送死) ⑺ 정치불범(政治不犯) ⑻ 산업근무(産業勤務)215)
증산대도교의 교리는 안내성의 사후 노장파와 소장파로 나뉘어져 현재는 거의 멸실 단계에 이르러 교리가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215) 촌산지순, 같은 책, pp.342-343.
가) 홍범(弘範)
홍범(弘範)이란 반드시 지켜야 할 큰 규범이란 뜻이다. 제2대 이정립 종사가 저술한 『증산교요령』 216)(1991년 발간)에 기재된 증산교 홍범은 다음과 같다.
⑴ 교의(敎義) - 천지공사(天地公事)
본교의 교의는 천지공사이다. 증산천사께서 세계지방신과 세계문명신을 모으시고 만고원신과 만고역신에 맺힌 원한을 풀으사 통일신단을 결성하시니 이른바 구천이라. 이 구천신단에서 생화삼신 즉 조선지방신의 수장이시고 조선 민족의 시조이신 환인천제 · 환웅천왕 · 단군임검 주재 하에 우주 신명들이 회의하여 선천구시대의 모든 그릇된 이법(理法)과 어그러진 생활방법을 뜯어고치고 후천시대 · 대전협동 · 조화선경의 생활이법과 윤리 · 경제 · 정치 등 모든 생활부문의 새로운 질서규범을 규정하시고 또 선천말기에서 후천 시대로 옮기어 갈 과정에서 세계정세가 변천되어갈 계급계단(階級階段)의 오묘한 기틀과 도수까지 규정하셨으니 이것이 천지공사니라. (『증산교 요령』,PP.2-3)
⑵ 교화이념
이정립은 증산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기본이념이 거병(去病) · 해원(解冤)보은(報恩) · · 상생(相生) · 조화(造化) · 대전협동(大全協同)이라 밝히고 이 기본이념의 세상의 가치를 드러내어 본교의 교화이념으로 정하였다. ㈎ 거병(去病): 천지공사에서는 선천구시대의 모든 그릇된 이법(理法)과
216) 『증산교요령』 의 초판은 1957년, 재판(再版)은 1967년, 3판은 1984년, 4판은 1987년, 5판은 1989년, 6판은 1991년에 발간되었다.(이정립, 『증산교요령』, 전북: 증산교본부,1991)
어그러진 규범을 모두 병통(病痛)이라 규정하고 그 병통을 고쳐야 후천 새시대 대전협동의 큰 운수가 열리리라는 것을 결정하였나니 우리는 거병의 세간적(世間的) 가치를 법받아 선천백대에 역사적으로 맺어 내려온 모는 그릇된 전통과 더러운 인습을 깨뜨려 버리고 새 이념을 세우며 새 정신을 차려야 조화선경의 큰 운수를 받을 지니라. (『증산교요령』, p.4) ㈏ 해원(解冤): 천지공사에서는 만고원신(萬古冤神)과 만고역신(萬古逆神)의 원한을 푸는 것으로 첫 출발을 하였나니, 우리는 해원의 세간적 가치를 법받아 모든 척을 풀며 억울한 일을 짓지 아니하여야 새 이념의 기초를 닦게 될지니라.(『증산교요령』, PP.4-5) ㈐ 보은(報恩): 천지공사에서는 보은 줄로서 우주신명을 집결하여 신단(神團)을 결성하였나니 우리는 보은의 세간적 가치를 법받아 은의를 저버리지 않고 갚음으로서 서로 연결하는 연쇄정신을 일으켜 협동질서의 토대를 정할지니라. (『증산교요령』, p.5) ㈑ 상생(相生): 천지공사에서는 선후천교대기(先後天交代期)의 큰 겁액에 빠진 세계인류와 우주신명들을 건져내며 새 세계를 육성하고 구천신단(九天神團)의 위대한 동력으로 축적한 것이 상생이념이니 우리는 상생이념의 세간적 가치를 법받아 서로 살리기를 힘써서 협동도덕의 거룩한 새 생명을 발전케 할지니라. (『증산교요령』, PP.5-6) ㈒ 조화(造化): 천지공사에서는 후천 새 세상의 새로운 이법과 새로운 기들을 창조하여 새 세상의 비약적 진화를 이루게 하노니 우리는 조화의 세간적 가치를 법받아 위대한 창조능력을 발양(發揚)하여 인문진화(人文進化)의 비약(飛躍) 계단을 뛰어넘어 새생활의 거룩한 질서를 건설할지니라. (『증산교요 ㈓ 대전협동(大全協同): 천지공사의 구경이상(究竟理想)이 대전협동 조화 선경의 건설이니 우리는 대전협동의 세간적 가치를 법받아 세계일가(世界-
家) 인류대동포사회의 큰 이상을 세우고 이것을 목표로 하여 용왕매진(勇往邁進) 할지니라.(r증산교요령」, PP.6-7)
⑶ 계잠(戒箴) ㈎ 마음을 속이지 말라 ㈏ 척 짓지 말라 ㈐ 언덕(言德)을 잘 가지라 ㈑ 남 잘되게 하라. ㈒ 반술 밥의 은혜라도 반드시 갚으라. (『증산교요령』, pp.10-11)⑷ 강령 ㈎ 제생의세(濟生醫世) ㈏ 화민정세(化民靖世). (『증산교요령』, p.37) ⑸ 신앙의 목적 ㈎ 대전협동(大全協同) ㈏ 선경사회건설(仙境社會建設). (『증산교요령』, p.37)
위의 교리내용은 이정립이 교인들의 신앙지침서로 저술한 『증산교요령』 에담겨 있는 내용이다. 초판이 나올 때 이미 동화교는 해산되었고, 김제에 본부를 정하고 나서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증산교요령』 에 실려 있는 교리는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와 거의 비슷하다. 그 이유는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는 이상호가 보천교의 간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종교 공인 신청 시 제시한 것이고, 『증산교요령』 에 실려 있는 교리는 이상호가 보천교를 탈퇴하고 동화교를 창립하고 나서 내세운 교리이다. 이 교리 그대로 『증산교요령』 에실린 것이 아닌가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산계 교단의 교리 성립은 교단이 분열되고 나서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교리를 형성하였다. 각 교단 교주의 체험에 증산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씩 다름을 알 수 있었다.
증산계 교단의 각 교파간의 공통점은 첫째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종교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었다.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 을 제정 · 공포하였는데, 제1조에 의하면 일제가 공인한 종교는 신도(神道), 불교(佛敎), 기독교(基督敎)만으로 제한하였다. 증산계 교단은 망국의 한에 빠져 있는 국민에게 새로운 왕조가 건립될 것이란 희망을 주었고, 민족의 통합에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했다. 이 사실을 간파한 일제는 그만큼 증산계 교단의 탄압을 꾀했던 것이다.217) 결국 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해서 대부분 교단이 축소되거나 소멸단계에 이르게 된다.
둘째, 증산계 교단은 교리체계가 불완전한 점이다. 종도들은 종교의 기본요건을 갖춘 후 교단을 장립한 것이 아니라 증산의 권능을 이용하면 교단이 흥성할 것으로만 믿었기 때문이다. 교단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종교의 기본요건이 되는 교리도 체계를 갖추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 교단의 특성에 따라 교리도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선도교는 고 부인이 7개 항목의 계잠만 발표하였으나 뒤에 고민환이 『선정 원경』 (1960년)에 교리를 남겼는데, 고 부인의 계잠에 더하여 10개 항목, 그리고 6대보은, 오도수행요목, 6화명심이 실려 있다. 보천교에서 전기교단의 교리는 4대강령인 신화 · 일심 · 상생 · 거병 · 해원이고, 목적은 후천선경이다. · 후기교단의 교리는 인의(仁義)이고, 벼리는 경천(敬天) · 명덕(明德)정륜(正倫) · 애인(愛人)이다.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은 대동(大同)이다. 미륵불교는 김형렬이 교인들에게 후천에는 물형부로써 조화권능을 부린다고 가르쳐 종교로서의 교리체계는 갖추지 못하였다. 뒤에 최선애에게 이어지
217) 윤이흠, 『일제의 한국민족종교말살책』, 서울: 모시는사람들, 2007, pp.17-18.
면서 종지와 십선도(十善道)의 교리를 내세웠다. 증산대도교는 삼대종지(三大宗旨)와 팔조신앙요목(八條信仰要目)이며, 동화교의 교리체계는 교의로는 천지공사이며 교화이념은 거병(去病) · 해원(解冤) · 보은(報恩) · 상생(相生)조화(造化) · · 대전협동(大全協同)이라 하였다.
위의 사실로 볼 때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와 동화교의 교리가 거의 비슷하다. 그 이유는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는 이상호가 보천교의 간부로 있을 때 조선총독부에 종교 공인 신청 시 제출한 내용이고, 동화교의 교리는 이상호가보천교를 탈퇴하고 동화교를 세울 때 내세운 교리이다. 그러므로 보천교 전기 교단의 교리와 동화교의 교리 둘 다 이상호가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비슷하다.
증산계 교단 가운데 증산의 천지공사를 가장 많이 이해한 사람은 이상호라 할 것이다. 이상호는 최초의 경전 『증산천사공사기』, 3년 뒤에는 『대순전경』 을 지은 인물이다. 그는 종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증산의 행적을 기록하고 덧붙여서 경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교리부분에도 다른 증산계 교단보다는 증산의 뜻에 가장 근접하게 선포한 것으로 보여진다. 증산계 교단에서는 신앙대상의 호칭과 마찬가지로 분열하고 나서 그 교단에 맞게 교리도 체계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증산이 천지공사를 단행한 것처럼 종도들도 증산의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증산의 대순한 진리를 이해하기보다 차경석의 차력공부, 도통공부, 김형렬의 물형부를 그린 것 등의 그 이면에는 증산의 천지공사를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초기 증산계 교단은 분열하여 흥망을 거듭하다가 결정적으로는 일제의 탄압인 종교해산령으로 인해 거의 교단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정산의 생에는 크게 1. 탄생 - 1909년 봉천명 2. 입산수도와 감오득도 - 종통계승 3. 무극도 창도 4. 태극도 창도로 나눌 수 있다. 1895년에 탄생한 정산은 증산이 화천하던 해인 1909년 15세에 구국제민의 뜻을 품고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9년간의 입산수도 끝에 증산의 계시로 감오득도하고 귀국하여 증산이 남긴 봉서를 인수함으로써 종통계승을 받게 된다. 그로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여 증산이 천지공사를 통해 설파한 진리를 바탕으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10여 년의 활동으로, 증산 사후 난립하던 증산계 교단들 중 가장 후발주자로서 다른 종단들을 능가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종교단체해산령으로 무극도가 해산되니, 정산은 10여 년의 잠복기를 거쳐 해방 후 1948년 다시 태극도를 창설하게 된다. 무극도 시기는 신앙대상 확립, 의례의식 법제, 이론적인 교리체계 발표 등으로 종단의 기본 골격을 세운 시기였다면, 태극도의 시기는 증산의 천지공사의 원리에 따른 수도법을 완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정산의 종통계승 과정과 무극도, 태극도기의 종교활동을 바당으로 정산의 수도법 완성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정산이 탄강한 1895년은 구천상제이신 증산이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여 25세가 되던 해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기류로 사회적 · 정치적으로
격변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서구 열강이 각축하고, 이미 서구화의 길에 들어선 일본이 동아시아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던 때였다. 정산의 탄강과 관련하여 『전경』 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낳으니라. 이 아기가 장차 상제의 공사를 뒤 이을 도주이시니 때는 을미년 십이월 초나흘(十二月四日)이고 성은 조(趙)씨이요, 존휘는 철제(哲濟)이요, 자함은 정보(定普)이시고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慶南咸安郡漆西面會文里)이도다. 이곳은 대구(大邱)에서 영산 · 창령 · 남지에 이르러 천계산 · 안국산 · 여항산 · 삼족산 · 부봉산으로 연맥되고도덕골(道德谷)을 옆에 끼고 있는 문동산 · 자고산의 아래로 구미산을 안대하고 있는 마을이로다.기.8)
도주(道主)의 성은 조(趙)씨이고, 이름은 철제, 호는 정산(鼎山)이며, 탄강한 곳은 경남 함안군 질서면 회문리이다. 회문리라고 지은 유래는 1997년에 발행한 『함안군지』 에서 찾아볼 수 있다. 회문리는 한 도사가 풍수지리를 본 결과, 동쪽에는 작대산이 마주 보이고 마을 앞에는 광려천이 유유히 흘러 앞으로 문인(文人)이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회문(會文)이라 지었다고 한다.
회문리를 끼고 있는 주변의 산세를 보면, 천계산은 칠서면 천계리에 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계명산 혹은 구인봉이라 부른다. 계명산은 옛날 민가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이 산을 너머 들려왔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고, 구인봉은 이 산의 정기를 받고 장차 아홉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고 한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또한 안국산은 임진왜란 전까지 안곡산(安谷山)이라 불렀는데, 임진왜란 당시 관군들이 왜군을 이 산에서 물리치면서 나라를 안정시켰다 하여 안국산으로 개명되었다.
218) 『전경』, 교운 2장 1절, 정산의 최초 기록은 『태극도 통감』 (1956)에 '도주약력'으로 쓰여 있으나 내용이 아주 간략하다.
여항산은 조선 선조 16년 함주도호부사로 부임된 정구(鄭逑. 1543-1620)가 풍수지리학적으로 남고북저한 함안의 지세를 지명으로 보완하기 위해 함안에서 가장 높은 여항산을 배가 다니는 낮은 곳을 의미하는 남을 여(餘), 배 항(航)을 써서 여항산이라 하였다. 일제시대에 한자 여(餘)가 여(餘)로 바뀌어 버렸다. 산인면 부봉리에 있는 삼족산(三足山)은 삼발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며, 부봉산은 가마솥 모양으로 생겨서 가매봉이라고도 한다. 도덕 골은 대산면 · 산인면 · 질서면 · 칠원면을 연결하는 고개로 대통골, 도둑골, 활빈당골이라고 부른다. 도덕골이라는 이름은 이 고개를 넘을 때 서로 도와주며 넘는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대통골이란 대통처럼 골짜기가 좁고 길게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옛날에는 산적이 많이 출몰했던 곳이라 하여 도둑골 혹은 활빈당골이라고 했다. 활빈당이란 의적이 있었다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일제시대 때 애국지사가 활동하던 곳이란 이야기도 전한다. 문동산은 회산리 어령마을에 있는 산이며 문동(問童)재로 부르고 있고, 자고산(紫皐山)은 현재 자양산(紫陽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자(紫)란 자줏빛의 의미도 있지만, 천자나 신선이 거처하는 집의 빛깔을 의미하기도 한다. 중국 북경의자금성(紫禁城)과 중국 고대 천문학에서 북두칠성 북쪽에 자미궁(紫微宮)은 천제(天帝)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용례가 그것이다.
정산의 선대 가문이 함안의 회문리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27대조로 거슬러 올라간다. 28대조 휘(諱) 정(鼎), 시(諡) 충장C忠壯)은 고려 개국 벽상공신(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고, 27대조 휘 열(悅)은 고려말의 공조전서(工曹典書)로 고려가 망하자 함안으로 낙향하여 조선왕조의 부름에 불응하여 이후 후손이 함안에서 살게 되었다 한다. 17대조 휘 여(旅), 호 어계(漁溪), 시(諡) 정절(貞節)은 단종때 생육신의 한 분이시며, 13대조 휘 방(梆), 호 두암(斗巖)은 임진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기여한 공로로 돌아가신 뒤 호조 참판으로 추증되었다. 11대조 휘 함익(咸益), 호 임계(林渓)는 문장과 덕망이
높았으며 고조부 휘 화식(華植) 호 죽헌(竹軒)은 효행으로 조정에서 내린 정려(旌閭: 나라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왕의 명에 의해 그 고향에 정문을 세워 기리는 일)의 명을 받았다. 증조부 휘 성의(性義), 호 벽봉(碧峯)은 도학(道學)과 신망으로 고향마을의 사표(師表: 세상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가 되었다 한다.219) 이상으로 볼 때 도주 조정산의 선대 조상은 대대로 우국충절과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가풍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조부 취당공에서 시작된 배일사상은 우국충절의 절정을 이룬다. 홍문관 정자220)를 지낸 정산의 조부221)는 굴욕적인 을사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이에 통탄한 나머지 분사(憤死)하였다. 당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지춘추관(知春秋館), 기사관(記事官), 승정원(承政院), 주서(注書)등 관직에 계시며 민영환, 이상설, 이동녕 등과 친분을 가졌는데, 을사보호조약의 체결 단계에 그 부당성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심화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온 후 피를 토하며 서거하였던 것이다.222) 1905년 가을 취당공은 일본의 강압으로 인한 한일보호조약의 부당성을 알리는 상소에도 불구하고 체결됨에 이르자 그 원통함으로 인한 심화병(心火病)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내 나이 사십유오(四十有五)에 이제까지 한 가지 일도 성취함이 없이 나라를 위한 일조차 실패함으로써 나라를 잃게 되고 또한 노모께 앞서 가는 불효가 되었도다. 나 죽은 후에 라도 너희들은 부디 수신제가(修身齊家)와 우국애민(憂國愛民)에 힘써 나의 나라 잃은 한을 풀어주기 바라노라.」 는 유언을 남기고 운명하였다.223) 조부로부터 이어진 배일사상의 가풍은 정산의 부친224)에게도 이어졌으며, 부친
219) 『진경전서』, 1장 7절.
220) 홍문관은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 ·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정자는 정9품의 벼슬이다.
221) 휘는 영규(瑩奎)이며, 배일 사상가로서 민영환(閔泳煥) 등과 교우하며 활약하다가 을사보호 조약에 분개(憤慨)하여 심화(心火)로 토혈 서거하였다. (『대순진리회요람』, p.11.)
222) 『태극진경』, 1장 6절.
223) 『태극진경』, 1장 25절.
224) 휘는 용모(鏞模)이고, 자함은 순필(順弼)이고 호는 복우(復宇)이며, 조부(祖父)의 유의를 승봉(承奉)하여 그 아우(휘 용의(鏞懿) · 용서(鏞瑞) 두 사람과 반일운동(反日運動)에 활약하였다.(『전경』, 교운 2장 2절, 『대순진리회요람』, p.11)
께서 반일운동에 활약하면서부터 정산은 그 사상적 영향을 받고 자라게 되었다.
정산의 탄생과 어린 시절을 살펴보면, 평범하지 않은 모습들이 보인다. 부친과 모친의 태몽으로 천지가 별안간 밝아지며 천상옥경(天上玉京)에서 오색구름을 탄 한 선관(仙官)이 좌우에 시종을 거느리고 유유히 내려와서 두 분께 경배하며 아뢰기를 「저는 천제님의 명에 따라 진멸지경(殄滅之境)의 삼계(三界)를 광구(匡救)하기 위하여 이 동토에 인간의 몸으로 강세(降世)하고자 하오 니 어여삐 받아 주옵소서.」 하며 부인의 품에 안겼다고 한다.225) 또 출산 시에는 3일간의 난산 끝에 천상에서 손에 약탕기(藥湯器)를 는 한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내려와서 부인께 경배하며 말하기를 「소녀는 천존상제(天尊上帝)님의 명을 받들었사 온바 지금 탄생하시는 옥동자께서는 천제님의 명에 따라 삼계를 광구하실 진주(眞主)이심을 전하옵고 조산하고자 시름을 놓으시고 이 약을 드시옵소서.」 하며 약탕기를 기울여 입에 드리웠다는 것이다.226) 선관이 출현한 태몽이나 선녀가 하강하여 출산을 돕는 광경은 매우 이색적이다.
1895년 12월 4일 탄강한 정산은 자라면서 그 음성이 웅장하고 안광이 부시어 범의 눈초리와 같고 목은 학의 목과 같고 등은 거북의 등과 같고 이마가 해나 달과 같이 빛이 나서 관상이 평범한 사람들과 달랐다.227) 또 온몸에서 후광을 발하고 천중천정(天中天庭。]可)이 넓고 크며 일월각(日月角 : 이마 양편의 솟은 곳)이 풍륭(豊隆)하고, 등에는 7성문(星文) 오른쪽 다리에 3적자(赤子 : 세 개의 붉은 점), 왼쪽 다리에 72적자, 양족장(兩足掌)에 각각 3적자가 완연하고 우레 소리와 같은 음성을 지녔다고 한다.228) 생후 6개월 만에 걸음과 말을 익히고 첫 돌에 이미 총명 영특하여 보고 듣는 일을 잊지 않았고,
225) 태극도편집원, 「태극도주 조정산 傳記」, 부산: 태극도출판부, 1992, 1121.
226) 『태극진경』, 1장 10절.
227) 『전경』, 교운 2장 3절.
228) 『태극진경』, 1장 12절.
한 가지를 배우면 많은 일을 깨달으니 주위에서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신인 출현(神人出現)이라고 찬탄이 자자하였다고 한다.229)
7세가 되던 1901년 봄에 한문서당에 입학하였는데, 재질이 뛰어나 하루에 수십 장을 배워도 다음 날 강의에 막힘이 없었다.230) 이 시기에 매우 특이한 일로 역법(暦法)을 스스로 고안한 일을 들 수 있다. 이해 가을 어느 날 홀로 육갑(六甲)과 월력(月暦)의 구성법을 고안하고 스스로 그 신이함을 기뻐하였다. 훈장은 이것이 비록 세상에서 이미 사용되는 역서(暦書)와 같으나 7세 소년으로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창안함에 경탄하였다고 한다.231) 천지운행의 질서를 담고 있는 역법을 불과 7세의 소년이 스스로 깨우치고 그 구성법을 고안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산의 남다른 총기를 보여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훈장의 칭송과 동료 학생들의 선망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양하였다. 또 종손이자 독자로서 총애를 받았으나 「안빈낙도는 처신의 의방(義方)이요, 검소준절(儉素撙節)은 접물(接物)의 요결(要訣)이며 호의호식은 몸을 망치는 천습(賤習)이요, 이기해인(利己害人)은 오명G盾名)의 만행(蠻行)이라. 군자는 오직 의방과요결을 취함이니라.」 라고 하며 솔선궁행(率先躬行) 하였다.232)
그런데, 남다른 총기와 돈후한 심성 때문인지 13세 되던 1907년부터는 공부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서당에 간지 불과 몇 년에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諸子百家)까지 섭렵하고 홀로 궁리진성(窮理盡性)에 몰두할 뿐, 훈장과는 대응하지 않으므로 도장께서 다른 서당으로 전학시키거나 다른 훈장으로 바꾸어도 별다른 효과가 없었다.233) 이러한 변화는 조부의 유언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조부 취당공은 운명 직전 정산에게 「부디 학문과 도덕을 닦아 선 조 정절공과 같이 위국충절(爲國忠節)로 가문을 빛내도록 하라. 또 남모르는
229) 『진경전서』, 1장 14절.
230) 『태극진경』, 1장 17절.
231) 『태극진경』, 1장 18절.
232) 『진경전서』, 1장 19절.
233) 『태극진경』, 1장 18절.
공부와 남 잘되게 하는 공부로써 세상 사람의 스승이 되라.」 고 하였고, 다시가족들에게 「이 아이는 일찍 태몽을 얻은 바와 같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라. 후일 도덕(道德)으로 널리 사람을 구하며 가문을 일으켜 대성(大成)하리니 부디 공부를 잘 시키라.」 고 부탁하였다.234) 조부 취당공이 당부한 위국충성과 남모르는 공부를 항상 염원하여 이미 충분히 섭렵한 기존의 공부를 등한시하고 새로운 차원의 공부를 모색하였던 것이다.
다시 학문에 전념할 것을 충고하는 부친에게 「소자 감히 아버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하오나 소자의 생각으로는 학문은 도시 문자 공부에 불과하온바 문자는 지난 시대의 성현군자나 문장재사들의 생각에 불과하오니 이로써 어찌 할아버님의 유명이신 구국제민(救國濟民)의 큰 뜻을 이루오리까. 공부는 남모르는 공부라야 성공(成功)한다 하심을 소자 깨닫지 못하옵다가 이제는 확연한 심증을 얻었사옵기에 앞으로는 남모르는 공부에 전념하오리니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235) 라고 한 정산의 답변에서 당시의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이때부터 정산은 대청 건넛방에 경서(經書)와 제가서(諸家書)를 비치하고 방문을 잠근 채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식사도 방에서 하였다. 부친이 걱정하여 누누이 물어도 「전일 말씀 드린 대로 남모르는 공부를 하는 중이오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는 말이 너무 진지하고 근엄하므로 다시 캐묻지 않았다.236).
한편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르는 이 시기는 1907년 정미 7조약, 1909년 기유각서 등의 조약이 체결되어 사실상 조선은 외교권 경찰권 · · 사법권 등을 이미 강탈당한 상태였으며, 주권을 완전히 박탈하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은 하나의 요식절차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일본은 점차 일반 행정, 사법 경찰까지 간섭하며 국민 생활 전반을 감시하고 억압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조선인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 등 국
234) 『진경전서』, 1장 24절.
235) 『진경전서』, 1장 29절.
236) 『태극진경』, 1장 31절.
권을 되찾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자는 일본과의 직접적인 무력항쟁을 통해서 국권을 쟁취하자는 것이었고, 후자는 국민의 실력양성을 도모하여 배양된 국민의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두 방면에서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은 1910까지 계속되었고 이후에는 항일민족독립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정산의 부친은 1905년에 취당공(聚堂公)께서 순국하신 후에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이 더욱 열렬하였다. 부친은 삼 형제237)가 있었는데, 삼 형제는 선대부터 배일사상(排日思想)이 충만하여 일본이라면 무조건 혐오하였다. 이때 마산에서 산본(山本)이란 왜인이 금광업과 고리대금업으로 한인재산을 착취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도산시켜 그 자금으로 화약을 제조하여 구국운동에 사용할 계책을 세우게 되었다. 1907년 춘궁기(春窮期)에 돈을 빌려 추수 후에 배로 돌려주는 소위 농사장려금을 얻기로 하고, 삼 형제의 가산 전부를 담보로 하여 질서, 칠북, 칠원의 일대 주민이 넉넉히 쓸 만한 정도의 거금으로 제의하여 가장 좋은 논 수십만 평에 상당하는 거금을 빌렸다.238) 삼 형제는 이 거금으로 장차 거사 시에 사용할 화승총(火繩銃)을 구입하고, 칠원 도덕곡 심처에 공장을 차려 화약을 제조하다가 일본 헌병에 밀고되어 은신하게 되었다239). 이때 정산이 진언하기를 「저도 이제는 머지않아 호패를 찰 연령이옵고 세상 물정도 다소나마 짐작하므로 어른들의 대사도모에 감히 말씀드릴 수 있사옵니다. 저의 요량으로는 이번에 거금을 얻으심은 실로 하늘의 감응이오며, 조상의 보살핌이옵니다. 그러나 이대로 구국운동을 추진하심에는 때가 늦사옵고 국외에서가 아니면 불가능할 듯하오며 지금 만주의 간도 지방에는 우국지사(憂國志士)가 많이 망명 중이오니 활동의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옵니다. 이 기회에 아
237) 큰 아우의 휘(諱)는 용의(鏞懿), 자는 은필(殷弼), 호는 서산(曙山)이며 중방(中房)어른으로 호칭하였고, 작은 아우의 휘는 용서(鏞瑞), 자는 윤필(允弼), 호는 신산(晨山)인데 양동(陽洞)어른으로 호칭하였다.
238) 『진경전서』, 1장 32절.
239) 『진경전서』, 1장 33절.
버님께서는 둘째 아버님과 함께 간도로 가셔서 근거지를 정하시고 이어 전 가족도 그곳으로 가서 대사도모에 보좌하도록 하심이 좋은 계책이겠나이다.」 240)하여 삼형제는 만주행을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정산은 부친, 삼촌과 함께 만주 봉천241)지방으로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정산의 나이는 15세이며 1909년(기유년) 음력으로 4월 28일이었다.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歳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242)
기록에 따르면 정산은 망명 도중 대전역 부근에서 황금색 용포의 신인(神人)으로부터 「내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노라. 그대는 삼계의 진주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그대가 나의 도통을 이어 치천하도수(治天下度數)로 무극대운(无極大運)의 대공사를 성취하되 내 명교(命敎)를 받들어 태극(太極)의 진법(眞法)을 용(用)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는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로라.」 라는 현시를 받았다고 한다.243)
봉천명 이후 만주에서의 생활은 농사와 독립운동 참여, 그리고 입산공부로 대별된다. 서간도 요령성 유하현의 수둔구를 정착지로 택하고 전답 약간과 개간할만한 황무지 십여 만평을 매수하여 이를 인근의 가난한 동포들에게 분할 대여하여 개간 경작하게 하였다.244) 당시 정산의 부친이 촌장으로 추대된 이 지역의 한인촌은 단결이 굳고 명성이 전파되어 서간도 일대 망명지사들의 연락처가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245) 이를 바당으로 가족들은 고국에 있는 동포
240) 『진경전서』, 1장 34절.
241) 현재 지명은 중국의 요령성에 속해 있는 심양이다.
242) 『전경』, 교운 2장 4절.
243)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27.
244) 『태극진경』, 1장 35절.
들의 망명길을 돕기도 하고 만주 각처에 망명 중인 동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일체의 비용을 전담할 뿐 아니라 의지할 곳이 없는 동포들에게 집과 식량을 나누어 주어 정착시키시니 불과 수년에 수둔구는 한인집단촌으로 변하였다.246)
정산의 부친은 한인들이 각출한 성금을 군관 김혁, 이석대 등을 통하여 독립군에게 전달하였으며 동생인 서산공은 만주사람으로 변장하고 만주 각지의 동지와 연락을 취하며 일본군의 실정을 염탐하여 독립군에 제보하였는데,247)현명에게 붙잡혀 31i1 징역을 선고받아 안동형무소에서 복역하기도 했다”).또한 과거 취당공과 함께 구국운동에 활약하였고, 당시 북간도 용정에 망명하여 독립군을 양성 중이던 이동녕에게 수차 자금을 마련하여 전달하였다.249)이러한 활동 중에 원세개(袁世凱)의 관헌에 의하여 청조의 복구를 도모하는 보황당(保皇黨)과 같은 무리라는 협의를 받기도 했으나,250) 구국운동의 동지이동녕, 이시영 등이 간도 지방의 흉년과 일본헌병의 횡포로 인해 상해로 근거지를 옮겨 활동하며 자금에 어려움을 겪자 1916년 8월에 자금을 마련하여 상해로 전달하였다.
정산은 만주 이주 후 당시의 주 생업이던 농사일을 돕기도 하고, 독립운동활동을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으나, 정산의 주된 목적은 공부에 있었다. 정산은 한동안 힘써 주경야독하다가 1909년 추수 후 부친에게 「이는 천기이므로 아버님께만 은밀히 말씀드리옵는바 저는 지난 4월 28일 망명길에서 '15세에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주(定眞主)의 도수와 치천하(治天下)의 도수로 광구
245) 『태극진경』, 1장 44절.
246) 『태극진경』, 1장 40절.
247) 『태극진경』, 1장 43절.
248) 『진경전서』, 1장 52절.
249) 『태극진경』, 1장 45절.
250) 이 사건으로 정산의 부친은 요령성도 심양에서 극형을 선고 받게 되었는데, 정산이 심양까지 부친을 모시고 가서 그곳 관헌에 교섭하셨으나 해결되지 않으므로 부친의 명의로 「우리는 한국인으로서 항일운동의 일념뿐이니 어느 겨를에 다른 나라의 일에 간여하리요.」 하는 요지의 진정서를 북경의 원세 개에게 직접 전하셨더니 원세개(袁世凱)가 이를 받아보고 그 문장과 충정에 감탄하며 급히 심양에 명령하여 부친을 무죄방면하고 사과하며 본댁까지 호송하여 주었다(『태극진경』, 1장 48절.).
삼계하라' 하시는 천명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모셨나이다. 주경야독의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이제부터 상제님의 천명을 받들어 노고산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眞法度數工夫)에만 전념하려 하오니 준비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고하고.251) 노고산에 홀로 입산하여 이후 2년간 남모르는 공부에 전념하였다. 고국만이 아니라 동양 천지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 도력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할 큰 뜻을 품고 입산수도 공부에 진력하였던 것이다.252) 또 1912년 5월부터는 시작으로 6개월간 북경 일대와 산동 태산(泰山)의 공자묘(孔子廟), 화남의 남경, 상해, 장안, 하남 고현(苦縣)의 노자묘(老子廟), 등봉의 소림사(少林寺), 산서 운성의 관왕묘(關王廟) 등 유명한 산천의 사당과 절을 돌아보며, 명산대천(名山大川)에서 공부하고 도수를 보았다253).
이후 노고산에서의 계속된 공부 끝에 1917년 드디어 증산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받게 되었다. 정산이 초패왕(楚霸王)의 고향인 절강성 회계의 여관에 머물 때 새벽에 구천상제가 명하기를 「이제 나의 도수에 따른 그대의 대중화 보은(報恩) 공사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 다시 나의 명교에 따라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도통의 연맥(連脈)과 인계(人界)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 곧득도이니라.」 하였다.254) 이어서 「이 글은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건질 주문이니 잘 기억하라.」 하며 기도주255)와 태을주256)를 전해주었다.257) 이는 증산의 삼계 대순한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여,258) 증산으로부터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은 것이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전경』 에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기
251) 『태극진경』, 1장 41절.
252) 『전경』, 교운 2장 5절.
253) 『태극진경』, 1장 51절.
254) 『태극진경』, 2장 1절.
255) 「기도주(祈疇呪)」 :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 원위대강(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256) 「태을주(太乙呪)」 : 훔치훔치 태을천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 사바아(吽哆吽哆 太乙天上元君吽哩哆啷都來 吽哩喊哩 娑婆啊)
257) 『태극진경』, 2장 2절.
258) 『전경』, 교운 2장 6절.
록이 있다.
도주께서 어느날 공부실에서 공부에 전력을 다하시던 중 한 신인이 나타나 글이 쓰인 종이를 보이며 「이것을 외우면 구세제민(救世濟民) 하리라」 고 말씀하시기에 도주께서 예(禮)를 갖추려 하시니 그 신인은 보이지 않았으되, 그 글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至氣今至願爲大降)」 이었도다.259)
다시 노고산으로 돌아와 2개월간 공부에 임하다가 구천상제의 계시로 득도 치성(得道致誠)을 올리니 이날이 1917년 2월 10일 양력 4월 1일 계유(癸酉)이고 시각은 계축시(癸丑時)였다.260) 이때 구천상제는 「그대가 이제 득도하므로써 인계(人界)에서의 나의 도통을 다졌으니 기쁘도다.」 계시하고 운장주261), 칠성주262), 오주263) 등의 주문을 외워 주었다고 한다.264)
위에서 정산이 '신인으로부터 받은 기도주는 바로 동학을 창도한 최수운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주문이다.265) 증산은 강세하여 자신의 신격이 구천상제라고 밝히면서 금산사 미륵불에 영으로 머물러 있을 때 최수운에게 계시를 내
259) 『전경』, 교운 2장 7절.
260) 『태극진경』, 2장 4절.
261) 「운장주(雲長呪)」 : 천하영웅 관운장 의막처 근청천지 팔위제장 육정육갑 육병육을 소솔제장 일별병영 사귀 음음 급급 여율령 사바아(天下英雄 關雲長 依幕史 謹請天地 八位諸將 六丁六甲 六丙六乙 所率諸將一別兵營邪鬼睫睫急急如律令娑婆呵)
262) 「칠성주(七早|呪까 : 칠성여래대제군 북두구신 중천대신 상조금궐 하부곤륜 조리강기 통제건곤 대괴탐랑 문곡거문녹존염정 무곡파군 좌보우필 고상옥황 자미제군 대주천제 세입미진 하재불멸 하복부진원황정기 내합아신 천강소지 주야상륜 속거소인 호도구령 원견존의 영보장생 삼태허정 육순곡생 생아양아 호아형아 허신형 괴작관행 필보표 존제 급급 여율령(七星如來大帝君 北斗九辰 中天大神 上朝金闕下覆崑崙調理綱紀統制乾坤大魁貪狼文曲巨門祿存廉貞武曲破軍左輔右弼高上玉皇紫微帝君大周天際 細入微塵 何災不滅 何福不臻 元皇正氣 來合我身 天罡所指 晝夜常輪 俗居小人 好道求靈 願見尊儀永保長生 三台虛精 六淳曲生 生我養我 護我形我 虛身形 魁작관행 필보표 尊帝 急急 如律令)
263) 「오주(五呪)」 : 신천지 가가장세 일월일월 만사지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복록성경신 수명성경신 지기금지 원위대강 명덕관음 팔음팔양 지기금지 원위대강 명덕관음 팔음팔양 지기금지 원위대강 삼계해마 대제신위 원진천존 관성제군(新天地 家家長世 日月 日月 萬事知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幅祿誠敬信壽命誠敬信至氣今至願爲大降明德觀音八陰八陽至氣今至願爲大降三界解魔大帝祺位願趁大奪關聖帝君)
264) 『태극진경』, 2장 5절, 6절.
265) 최수운이 받은 주문은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로 순서에 차이가 있다.
렸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계시가 실현되지 못하고 1864년(갑자년)에 최수운에게 준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서 1871년(신미년)에 직접 강세하여 교운을 펼쳤다.266) 이 때 최수운의 종교체험에 나타난 하느님의 존재가 바로 증산이 강세하기 이전의 상제로서의 신격이었으며, 주문 또한 그 신격으로부터 주어진 글임을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정산이 받았던 신인으로부터의 글은 최수운의 종교체험과 유사하게 동일한 신격으로부터 주어진 하나의 계시체험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267) 이처럼 정산의 종교체험은 같은 시대에 살았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상제님에 대해서 먼저 그 신격을 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 었다.268)
그 후에 정산은 공부실을 정결히 하고 정화수 한 그릇을 받들고 밤낮으로 그 주문을 송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느냐. 태인에 가서 나를 찾으라」 는 명을 받게 되었다.269) 태인은 구천상제이신 증산께서 재세시에 자주 머물고 활동하신 곳이었다.270) 이 계시를 받은 정산은 즉시 돌아오게 되니 만주로 봉천명 공부에 매진한 지 9년째의 일이다.
266) · 『전경』, 교운 1장 9절, ·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과 보살이 회집하여 인류와 신명계의 이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헌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
267) 이경원, 「대순진리회 연원, 도주 조정산의 종교체험연구」, 『대순진리학술논총』 1, 2007, p.256.
268) 이경원, 같은 글, p.257.
269) 『전경』, 교운 2장 8절, 『태극진경』 2장 11절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그대의 중국 공부도수(中國工夫度數)는 마쳤느니라. 속히 환국하여 나의 본소(本所)를 찾고 나의 삼천(三天) 중 천서(天書)와 천보(天寶)를 받도록 하라.」 는 계시를 받고 환국 길에 오르게 되었다.
270) 『전경』, 행록 4장 6절, 상제께서 무신년 초에 본댁에서 태인에 가셨도다. 상제께서 자주 태인에 미물고 계신 것은 도창현(道昌峴)이 있기 때문이었나니라. 그곳에 신 경원(辛敬元) · 최 내경(崔乃敬) · 최 창조(崔昌祚) · 김 경학(金京學) 등의 종도들이 살고 있었도다.
만주에서 귀국한 정산은 안면도의 우일재(宇-齋)에서 수도하며 증산이 계시한 본소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입도인들에게 치성, 포덕과 기도주 또는 태을주를 수련시키는 등 기초적인 종교활동을 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또 증산 상제의 강세지지(降世之地)라는 정읍 객망리, 대각지지(大覺之地)라는 모악산의 대원사, 공사지지(公事之地)라는 김제의 금산사와 동곡 등 유적지를 두루 답사하며 인세에서의 증산의 자취를 확인해 나7갔다.27D 그 후 황새마을 공부처에서 수도하며 포덕하던 중 1919년 정월 대보름에 증산의 누이동생인 선돌 부인으로부터 봉서(封書)를 전해 받게 되었다.
도주께서 다음 해 정월 보름에 이 치복(호 : 석성)을 앞세우고 정읍 마동(馬洞) 김 기부의 집에 이르러 대사모님과 상제의 누이동생 선돌부인과 따님 순임(舜任)을 만나셨도다. 선돌부인은 특히 반겨 맞아들이면서「상제께서 재세시에 늘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을 것이로다」 라고 말씀하셨음을 아뢰이니라. 부인은 봉서(封書)를 도주께 내어드리면서 「이제 내가 맡은 바를 다 하였도다」 하며 안심하는도다. 도주께서 그것을 받으시고 이곳에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도다.272)
봉서는 현무경(玄武經과) 주문서(呪文書)였다. 현무경은 13장 26면에 문자와 부도(符圖)가 기록되어 있고, 주문서는 표지에 『주문』 이라 쓰여 있고 7장 13 면에 11종의 주문이 기록되어 있으니, 이는 이미 계시로 받은 5종의 주문과 다음의 주문이었다.273)
진 법주(眞法呪) 九天 下鑑之位 玉皇上帝 下鑑之位 釋迦如來 下鑑之位 冥府十王 應鑑之位五岳山王 應鑑之位 四海龍王 應鑑之位 四時土王 應鑑之位 關聖帝君 應鑑之位 七星大帝 應鑑之位 直先祖 下鑑之位 外先祖 應鑑之位 密直使者 來待之位 右直使者 來待之位 左直使者 來待之位 冥府使者 來待之位 天藏吉方하야 以賜眞人하시나니 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271) 『태극진경』, 2장 21절.
272) 『전경』, 교운 2장 13절.
273) 『태극진경』, 2장 51절.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 角亢氐房心尾箕 斗牛女虛危室壁 奎婁胃昴畢觜參 井鬼柳星張翼軫 鄧禹 魔性 吳漢 王梁 賈復 陳俊 耿弇 杜茂 寇恂 傅俊 岑彭 堅鐔 馮異 王霸 朱祐任光祭遵 李忠 景丹 萬脩 蓋延 邳彤 銚期 劉植 耿純 臧宮 馬武 劉隆 諸大神將 所率諸將 一般兵營 唵唵 急急 如律令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 立春 雨水 驚蟄 春分淸明穀雨立夏小滿芒種夏至小暑大暑立秋處暑白露 秋分 寒露 霜降 立冬 小雪 大雪 冬至 小寒 大寒 長孫無忌 孝恭杜如晦魏徵 房玄齡 高士廉 尉遲敬德 李靖 蕭瑀 段志玄 劉弘基 屈突通 殷開山柴紹長孫順德 張亮 侯君集 張公謹 程知節 虞世南 劉政會 唐儉 李世勣 秦叔寶 諸大神將 卽通 天文地理 風雲造化 八門遁甲 六丁六甲 智慧勇力 唵唵 急急 如律令
도통주(道通呪) 天上元龍 坎武太乙星 斗牛君 神아神아 參아參아 以道通道德으로 上通天文하고 下達地理하고 中察人事케 하옵소서
개벽주(開闢呪)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 玉京玉樞守門將軍 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 白馬元帥大將軍 雷聲霹惡將軍 惡鬼雜鬼禁亂將軍 三首三界都元帥 地神霹靂大將軍 天動地動陰陽霹靂大將軍 左剖關元帥 右剖馬元帥 天地造化風雲神將 陰陽五行奇門神將 六丁六甲遁甲神將 太極斗破八門神將 山上吹嘯猛虎將軍 多率神軍百騎將軍 龍盤虎踞鬼哭神將 千萬惡鬼打首神將 魑魅魍魎揮致神將 法律邪魔盡滅神將 風濤殺首呼天神將 五百年間一享神將 三台七星諸大神將 二十八宿諸位神將 啓明長庚二府神將 九辰太白禁令神將二十四節諸大神將 十二辰諸剖神將 天地五方號令神將 上下八位巡察神將萬里風雲轉化神將 六丁六甲所率神將 九靈三精應元神將 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 統合天四將 四十八大將軍 四萬神將 八萬四千諸大神將 感我微誠助我宇一 大運大事 改改降臨降臨 侍衛我奉命身 大運大命 太一聖哲 常隨不離 大道通 大位定 與天地合 與四時合 與陰陽合 與五行合 通天地 通萬古 通五方 通四海 四海應身 力拔山岳 威振乾坤天地 道通天地造化 無窮不息 進退有法 吾奉九天上世君 勅速勅速 唵唵 急急如律令
해마주(解魔呪)
三界解魔大帝神位願趁天尊關聖帝君신성주(神聖呪) 神聖大帝 太乙賢首 於我降說 範於靈極
정산은 곧바로 백일공부를 시작하여 봉서의 내용, 즉 증산이 짜 놓은 도수에 따른 대도(大道)의 진리를 체득하였다. 정산은 이후 증산의 유가족인 선돌 부인과 따님 순임을 극진히 대우하여 보살폈으며 선돌부인도 평생토록 정산의 창도 사업을 도우니 도호는 선덕부인(宣德夫人)이고 도중고모(道中姑母)로 존칭되었다.
정산이 봉서를 받을 당시 증산을 신앙하는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고 있는 과정이었다. 증산의 화천 후 종도들이 종교를 펴나가는 과정에서 각자 종통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교세를 확장하는데 주력하고 있었다. 1911년 고 부인이 최초로 교단을 장립하자 많은 종도들이 참여하였다. 그 당시에는 체계적인 교리나 문서화된 경전이 없었지만 태을주의 효력은 희망을 잃은 민중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여 급속히 확산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의 기반이 다져지고 교세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야심을 드러내어 교단을 장악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종도들은 교단을 떠나 각자가 따로 종교단체를 형성하게 되니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게 된다. 이들은 다시 고 부인을 통해서 증산의 권능을 보게 되었고, 자신들도 그 권능을 이용한다면 현실적으로 고 부인과 다르지 않는 신비적 능력을 갖출 수 있다는 판단에서 각자 종통계승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교세 확장에 주력하게 되었던 것이다. 김형렬은 1915년에 미륵불교를 세웠고, 안내성은 1914년 교단을 떠나 여수읍 가국리에서 따로 교단을 창설하여 증산대도교를 세웠다. 박공우도 1914년 정읍군 흥덕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후일 박인암교단을 세웠다. 1916년에 이지복이 원평에제화교를 세웠지만 교세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고, 1920년에 김광찬은 도리원파를 세웠다. 차경석은 증산의 종도들이 모두 대흥리 교단을 떠난 뒤인 1916
년 11월 동지에 교인대표 24명을 선발하여 24 방주로 임명하고, 각기 연원체계를 조직하였다. 1919년 10월에는 대황산에서 '24 방주제'를 확대 개편하는'60 방주제'를 선임하는 고천제(告天祭)를 행하였다. 이 조직활동은 3년 동안 이루어졌으며, 조직된 인원총수가 모두 557,700명이었을 정도였으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에서의 정산의 종교 활동은 여타 종도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길이었다. 정산을 제외한 모든 증산계 교단들은 증산의 직접적 가르침 또는 그것이 전해져 온 인세의 인연을 강조하여 자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데 비해 정산은 증산으로부터의 계시와 봉서의 전수를 종통계승의 근거로 삼는다. 정산은 인세에서 증산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사람 중 증산을 신앙하는 교단을 조직한 최초의 인물이다. 정산은 이후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게 되니 이것은 방계 계열의 최초 교단이 되었다. 그리고 정산의 종교 활동의 특징으로, 종도들은 우연한 신비적 체험에 의해 별다른 준비 없이 교단을 창설하였던 것에 비해 정산은 수도와 종통계승이라는 선행의 준비과정 후에 활동을 시작한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봉서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많은 공부와 도수는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종통계승자로서의 기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산이 증산의 봉서를 전해 받은 사실은 정산에게는 종통계승의 확고한 증표였다. 이때 받은 주문은 그에게 앞으로 오십년공부종필의 내용이며 과제였다. 알 수 없는 부와 문자로 이루어진 현무경은 정산의 오십년공부종필하는 도수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이후 정산은 다시 청도리 구성산의 학선암에서 백일공부를 마친 후 선돌부인의 권유로274) 증산이 남긴 둔궤를 찾을 것을 계획하였다. 통사동 공부처에서 가족과 도인들에게 「이 말씀은 천기에 속하여 부모 형제간이라도 함부로
274) 『전경』, 교운 2장 14절, 선돌부인이 하루는 정산에게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 라고 아뢰었다. 이때 정산은 도수에 따라 통사동에 있는 이준세(李俊世)의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있었다.
말해서는 안되는 큰일이므로 누설하면 아니 되는 일임을 명심하시고 들어주시기를 먼저 사뢰옵니다. 저는 15세에 봉천명하고 도강이서(渡江而西)하여 정진 주지도수(定眞主之度數)하였사오며 그 후 만 10년의 공부로써 무극대도(无極大道)의 진주가 갖추어야 할 삼천중의 두 가지는 이미 받들었사오니 이번에 천보만 받들면 되옵니다. 사사(私事)로이는 어른들께 죄송하오나 이러한 대운 대사(大運大事)의 성취를 위한 공사에는 인간세계의 척분(戚分)에 얽매일 수 없사오니 이해하여 주시옵소서.」 275)라고 밝히고, 당시 보천교 본부에 있던 둔구기를 통사동 공부처로 옮겨왔다276) 이 둔궤는 원래 증산이 화천 전년(1908)여름에 동곡약방을 차릴 때 약장과 함께 만들어 「이 궤 속에 번개가 들어야한다」 「이는 나의 도지(道旨)와 도통(道統)을 숨겼으므로 숨길 둔자 둔궤니라」 277)하며 약방에 비치하고 많은 도수공사를 본 신성한 유물이었다. 증산이 화천한 후에는 김 수부(金首婦:鬯9]可望)가 간직하다가 고 부인이 교단. 을 차릴 때 가져갔는데 고 부인이 교단을 떠난 후에도 이때까지 보천교에서 간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정산은 이 둔궤를 공부실 상좌(上座)에 안치하고 대치성을 봉행한 다음
「구천상제님께서 짜놓으신 삼천의 도수로서 내가 받들어 행하여야 할 큰 도수 중의 하나다」 라고 하며 이날부터 둔궤도수공부(遁櫃度數工夫)를 시작하였다. 둔궤도수공부 일개월이 되던 날 정산은 이 둔궤를 경남 함안 대산면 용화산의 반구정(伴鷗亭: 정산의 13대조의 재실)에 옮겨 모시고 백일공부를 하였다. 낮에는 반구정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단 위에 등불을 밝히고 검무도수로 공부하는데 그때마다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이 구름 같은 안개가 일어 시종들은 공부하는 내용을 볼 수 없었고 다만 안개 속에서 간간이 칼 부
275) 『태극진경』, 2장 63절.
276) 『전경』, 교운 2장 17절, 조 용의와 권 태로. 권 영문. 이 정무. 김 사일. 박 붕래외 두 명이 대흥리로 가니라. 이들이 보천교 본부에 당도하니 9월 4일 새벽 한시경이 되니라. 본부의 사람들이 모두 깊이 잠이 든 때인지라. 그들이 한방에 들어가 병풍으로 가리어 놓은 둔궤와 약장을 찾아 가지고 나왔으나 약장만은 도중에 놓고 왔기에 옮겨지지 못하였다.
277) 『무극진경』, 8장 22절.
딪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백일공부를 마치던 날 둔궤가 열리니, 둔궤 속에는 호피 한 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 있고 양피(羊血) 스물넉 점이 궤에 찍혀 있으며 오강록C음江錄) · 팔문둔갑(八門遁甲) · 설문(舌門)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다.278) 정산은 둔궤 내부를 살핀 다음, 「과시(果是) 천보로다. 수운(水雲)의 거년(去年) 경신(庚申) 4월 초 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경신 4월 초 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이며 태극도수가 분명하도다」 고 하였다.279)
정산은 단오절 이후 다시 반구정 아래 강가 백사장에 단(壇)을 모으고 그 위에서 밤마다 장 · 중 · 단검 세자루(밀양 운문산 천황봉 아래에 철공소를 차리고 성기춘 등 기술자를 시켜서 풀무불에 만국지도를 매일 1장씩 50장을 소화하며 만든 칼)로 100일간 검무(劍舞) 도수로 공부하였다. 공부 후에 통사동으로 돌아올 때 칼은 가져오고 둔궤는 반구정에 두었는데 수종(隋從)하던 조 주일(曺周一)이 몰래 가지고 진주지방으로 도망가서 사술(詐術)을 부리다가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상우가 정산께 둔궤를 찾자고 아뢰니,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280)고 하며 찾지 않 았다. 정산은 또다시 11월 초부터 안면도 쇠심에서 가로, 세로 6간의 정방형으로 높이 3척의 단을 만들고, 단위에 24방위를 설치하여 방위마다 13척의 긴 대나무를 3개씩 총 72개를 세우고 중앙에는 사방이 3간 높이 3척의 단을 쌓게하고 또다시 백일 동안 단도수를 보며 공부하니 엄동설한(嚴冬雪寒)에 바람막이 하나 없는 심에서 동상으로 수족이 붓고 손마디가 터져 피가 나는데도 계속하였다.281) 이듬해 2월 중순에 백일공부를 마치고는 부안 변산반도 우금바
278) 『전경』, 교운 2장 20절, 도주에서 경신년에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면서 공부하시던 중 이월 열 이레에 둔궤가 봉안된 곳에서 벼락소리가 나더니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다. 그 속에 호피 한장과 반쯤 핀 국화 한 송이가 그려있고 양피 스무넉점이 궤에 찍혀있고 오강록 팔문둔갑 설문이란 글자가 궤에 쓰여 있었다.
279) 태극도 편집원, 같은 책, p.45.
280) 『전경』, 교운 2장 20절.
281) 태극도 편집원, 같은 책, pp,45-48.
위 아래에 공부설석하고 쇠심에서와 같이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단 위에서 단도수와 검무도수를 보았다.282)
1921년 봉천명일 대치성 후 봉축주를 신설하고 진법주의 일부를 다음과 같이 변경하였다.283)
봉축주(奉祝呪)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무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소원성취(无極神 大道德 奉天命 奉神敎 无極道主 趙鼎山 大運大事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를 신설한다. 진 법주(眞法呪) 「구천 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를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하감지위()L天뼌元 雷聲普化 天尊 姜聖上帝 下鑑之位」 로 물비소시하사소원성취케(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케)」 를 「물비소시하사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무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 소원성취케(勿秘昭示하사 无極神大道德奉天命奉神敎无極道主趙鼎山大運大事所願成就刻)」
이날 정산은 도주(道主)의 위격으로 도인들의 하례(賀皚)를 받고 비로소 도의 체제를 정하여 상우, 태로, 영문, 정두, 붕래 등을 임원으로 임명하고284) 다시 백일공부에 들어갔다. 8월 중순에 통사동 공부처에서 백일공부를 마치고, 선덕부인과 순임을 대동하고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공부설석하고 10여 일간 도수를 본 후, 증산의 성골(聖骨)을 통사동 공부처로 모셔와 선덕부인을 위시한 유가족과 임원들을 대동하여 조석상식(朝夕上食)과 삭망절사(朔望節祀)를 상례절차(喪禮節次)에 준하여 봉행하는 삭망도수(朔望度數)를 봉행하였다.285)이어 성체(聖體)를 모신 공부실에서 이해 12월 중순까지 이 도수에 따른 백일 공부를 마치었다.
282) 『태극진경』, 3장 3절.
283) 『태극진경』, 3장 10절.
284) 『태극진경』, 3장 11절.
285) 『태극진경』, 3장 14절.
1922년에는 서울 마포 도화정(桃花町)에서 1차 백일공부, 윤5월 그믐에 돈암 정에서 제2차 백일공부, 9월 중순에 다시 적선정에서 제3차 백일공부를 하고 1923년 새해 치성을 공부파석치성(工夫罷席致誠)과 아울러 올렸다. 1월 중순에 밀양 세천리의 도인 김병문의 집을 공부처로 정하고 백일공부를 하며 둔도수(遁度數)와 납폐도수(納弊度數)를 보았다.286) 5월 초에는 밀양 상동면 유천리의 도인 장득원의 집에 공부설석하고 다시 백일 간의 단도수를 보며 진인보두 법(眞人歩斗法)으로 수도하였다.287) 이 해 증산의 화천일에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이라 하며 전교를 내렸다. 또 청도 화악산 적천사의 도솔암에 공 부설석하고 백일 간의 단도수를 보았는데, 암자 옆 칠성각 위의 비어있는 땅에 단을 쌓고, 단 위에 수십 개의 태극기와 신장명패(神將名牌)를 세우고 반구정에서의 검무도수와 같이 밤에 장검을 들고 단에 임하여 「우보상최등양명(禹步相崔登陽明)」 또는 신장명호(神將名號)를 외며 진인보두법(眞人歩斗法)으로 공부하였다.288)
이상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우국충절을 중시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정산은 을사조약에 분사한 조부의 영향으로 남의 나라를 침탈하는 일본을 배격하고 구국에 뜻을 둔다. 남다른 총기를 지녔던 정산은 13세 즈음부터는 기존의 공부에서 탈피, 남 잘되는 공부로 전향하여 매진하던 중, 구국의 일환으로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 할 뜻을 세워 만주 봉천으로 망명하게 된다. 개인의영락을 추구하기보다 우국충정, 구국이념 등 헌신봉사의 정신이 가문 대대로 몸에 배어 있었고, 타고난 총기를 가졌던 정산이 13세 이후에 새로운 공부로 전향한 것은 큰 의미를 갖는다.
정산은 봉천에서 구국제세에 뜻을 두고 남모르는 공부에 진력하던 중, 1917
286) 『진경전서』, 3장 47절.
287) 『태극진경』, 3장 51절.
288) 『태극진경』, 3장 54절.
년 증산으로부터 계시로서 감오득도하였다. 귀국한 정산은 1919년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비밀리에 남긴 현무경과 주문이 담긴 봉서를 전해 받게 되었는데, 정산에게는 이것이 증산으로부터의 종통계승의 확고부동한 증표였다. 당시는 종통계승을 자처하는 수십 개의 종파가 난립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산은 또다시 증산이 남긴 둔궤와 증산의 성골을 찾게 되어, 증산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공부와 도수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봉서를 인수하여 종통계승을 확인한 정산은 도장건립을 추진하던 중 1923년에 전교를 발표하였다. 전교의 발표는 무극도 창도의 필연성을 설명해 주고 있어 그 의미가 크다. 이는 봉천명과 종통계승에 의해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을 자각한 후, 천지공사가 새로운 후천시대의 운을 조화하기 위한 공사이므로 이에 맞추어 그 새로운 운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진리를 전할 종단으로서의 무극도의 개창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도주께서 그후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두 직책을 마련하고 전교의 임무를 담당하게 하시니라. 이해 유월 치성일 전날에 밀양의 이우형 · 김용국 · 최창근 · 안병문 그리고 부산의 박민곤과 안동의 권태로와 의성의 조원규와 예천의 이종창 · 신용흠 그리고 봉화의박붕래 · 김천의 김규옥과 풍기의 조진명과 청도의 장득원 외 여러 사람들이 회문리에 모인 자리에서 도주께서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계해년이라」고 말씀을 마치고 전교를 내리시니라.289)
전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傳 敎
① 七閏十九世爲章 二十七章是會當
按 間一年置閏則有餘日 間二年置閏則日不足 及至十九年 置七閇則無餘不
足 故以十九年爲一章 二十七章爲一會 一會凡五百十三年也 孟子所謂五百
年必有王者興者此也
② 三會爲統 二統爲元 循環往復互無彊
按 一會各五百十三年則 三會合一千五百三十九年也 一統各一千五百三十九
年 則一統合四千六百十七年 是爲一元
③ 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軒轅立極 肇期元
按 黄帝距今四千六百十七年前丁巳(上元甲前計算)
④ 萬像萬事 皆有是 諸法諸書 總此源
按 天文地理人事 皆黄帝之所始敎而 史記記年 亦自黄帝始也
⑤ 傳囂頂譽勛華禹初統初會 世世聖
按 自黄帝室於舜禹 五百年矣 初統初會者 以黄帝為始 則以黄帝元年計 以
至於舜禹五百十三年者也
⑥ 日出萬暈同發明春回品物共華盛 初統之中降中季 聖不承承但一時
按 初統者 黄帝以後 凡一千五百三十九年之謂而 五百十三年以後則初統之
中會也 一千二十六年以後則謂初統之計會也
⑦ 禹後有湯湯後文 一會一聖應會期 中統由來世漸降 聖不道行但敎傳
按中統者黄帝卽位後千五百三十九年以後爲仲統也
⑧ 釋後有孔孔後耶 一會一敎各門筵
按 釋迦如來距今二千九百五十年(癸亥年計)癸丑生 孔子距今二千四百七十
四年庚戊生 耶蘇距今二千九百二十三年辛酉生
⑨ 季統敎亦無肇聖 惟有述聖斷啓來
按 季統者黄帝印位 後三千七十八年以後之季統也 距今一千五百年前六朝及
新羅之時佛道中興其後五百年距今略一千年前大宋之時濂洛諸賢一時傳道 其
後五百年以後羅馬法王以耶蘇敎爲西洋之盟主
佛梁儒宋耶羅馬 一敎一昌應會回290)
289) 『전경』,교운 2장 26절.
위 내용은 모두 9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는데, 원문과 그에 대한 해설, 혹은 부연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편의상 단락별로 번호를 붙이고 풀이해 보자.
㉦ 일곱 번의 윤달이 19년 있는 것이 장(章)이다. 27장은 이에 회(會)에 해당
된다.
살펴 보건데, 1년 사이에 윤달을 두면 날짜가 남고 2년 사이에 윤달을 두면 날짜가 부족하다. 19년에 이르러 7번의 윤달을 두면 남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19년으로써 1장을 삼았다. 27장은 1회가 된다. 1회는 무릇 513년이다. 맹자가 말하기를 오백 년에 반드시 왕자(王者)가 있어 세상을 흥하게 하 는 것이 이것이다. 2 세 번의 회는 통(統)이 된다. 3통은 원(元)이 된다. 순환하고 왕복하는 것이 서로 끊어짐이 없다. 살펴 보건데, 1회가 각각 513년이면 3회는 합하여 1539년이다. 1통이 각각 1539년이면 3통은 합하여 4617년이다. 이것이 1원(元)이 된다. 지금으로부터 4617년 전 정사년에 헌원이 왕위에 올라 비로서 원이 시작. 되었다. 살펴 보건데, 황제는 지금으로부터 4617년 전 정사년이다 (上元甲 前으로. 계산) ㉦ 모든 상황과 모든 일이 다 여기에서 있었다. 여러 법과 여러 책이 전부 다 이것에 근원한다. 살펴 보건데, 천문 · 지리 · 인사가 모두 황제가 처음으로 가르친 것이고 사기 책에 기록한 연대가 역시 황제로부터 시작한다. ㉦ 효(소호 금천씨), 욱(전욱 고양씨), 곡(제곡 고신씨), 훈(제요 도당씨), 화(제순 유우씨), 우(제우 하우씨) 임금으로 전해져 초통 초회에는 대대로 성인이 이어졌다. 살펴 끄데, 황제로부터 순, 우임금에 이르는 시간이 오백년이다. 초통 초회. 는 황제로서 시작하며 황제 원년으로 계산하여 순, 우임금에 이르기까지 513년이다
290) 『전경』, 교운 2장 26절.
㉭ 태양이 뜨면 수많은 햇살이 함께 밝음을 발하고 봄이 돌아오면 물상들이 함께 화창하게 성장한다. 초통의 가운데를 지나 중회와 계회로 내려오면 성인이 이어지지 못하고 이어지더라도 다만 한때이다. 살펴 보건데, 초통은 황제 이후 무릇 1539년을 말하고 513년 이후면 초통의중회이고, 1026년 이후면 초통의 계회다. ㉩ 우임금 후에 당왕, 당왕 후에 문왕이 있었다. 1회에 한 분의 성인이 회에 응한 기간이다. 중통으로부터 대대로 점차 내려가면 성인의 도가 행해지지 않고 다만 가르침만이 전해졌다. 살펴 보건데, 중통은 황제즉위 후 1539년 이후가 중통이 된다. 석가모니 후에 공자가 있었고 공자 후에 야소가 있었다. 1회에 한 가르침.이 각각 교문(敎門)의 터전을 잡았다. 살펴 보건데, 석가모니는 지금으로부터 2950년 전 계축생이다. (계해년으로부터 계산) 공자는 지금으로부터 2474년 전 경술생이다. 야소는 지금으로부터 1923년 전 신유생이다. 9 계통시기에는 가르침이 역시 성인으로부터 시작되지 않고 오직 구술만이 있었고 성인이 끊어진 채 가르침만 내려 왔다. 살펴 보건데, 계통은 황제즉위 후 3078년 이후이다. 지금으로부터 1500년 전 육조와 신라시대에 불도가 중흥했고 그 후 오 백년 지금으로부터 대략 1천년 전 대송시대에 염락의 여러 현인이 한 때 도를 전했다. 그 후 오 백년 이후 라 마법왕이 야소교로서 서양의 맹주가 되었다. 불(佛)은 양나라, 유(儒)는 송나라, 야(耶)는 라마에서 한 가르침이 한번 창성했는데 회의 운회에 응한 것이다.
19년 7윤법은 중국에서 장법(章法)이라 불렀으며, 19태양년에 윤월 7개월을 넣어서 235삭망월로 하는 역법이다.
19태양년 = 365.242196일x19년 = 6939.6017일 235삭망월 = 29.530588일x 235월 = 6939.6882일 =(12월x19년)+7삭망월
동양에서는 6,940일을 장주기(章週期)라 하며 춘추시대(B.C.589년경)에 알려졌다. 서양에서는 메톤 주기라 하여 B.C.433년경에 아테네의 천문학자 메톤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이 주기는 태음태양력이 계절과 일치되는 주기인 동시에
삭망이 계절에 대하여 복귀하는 주기이다. 19년이라는 짧은 주기에서 계절과 월상(月相)이 거의 올바르게 반복된다는 점으로 보아 매우 훌륭한 주기이다.291)
첫 ㉦, 2번은 현재 인류가 사용하고 있는 정확한 역법(暦法), 19년 7윤법에 기초를 두고 시간의 범주를 설정한 내용이다. 비유하자면 복잡하고 거대한 시대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하기 위해 설정해 보는 시대구분과 같은 원리이다. 이는 문명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기 위한 기본 들로 기능한다. 시간의 단위는 원(元) · 통(統) · 회(會) · 장(章)을 기초로 한다. 1章 = 19年(7閏),1會 = 27章, 1統 = 3會, 1元 = 3統이 된다.
1章 = 19年(기쀱)1會 = 27早 1統 = 3會 1元 = 3統
으로 한 눈에 정리된다. 또 1원(元)을 초통, 중통, 계통으로 하고 1통(統)을 ~회, 중회, 계회로 설정하면

291) 이은성, 『역법의 원리분석』, 서울: 정음사, 1985, pp.168-169.

가 된다.
연도 수로 환산해 보면 아래와 같은 결론이 나오게 된다.
1장(章) = 19年(7閏) 1회(會) = 27장(章) = 513년(年: 27x19年)1통(統) - 3회(會) = 1539년(年: 3x513年)1원(元) = 3통(統) = 4617년(年. 3Ⅹ1539年)
㉭번 이후는 이렇게 정리된 시대의 기본 들에 역사적 사실들을 대입해 본다. 그러면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문명의 부침이 어떤 일정한 패턴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각 시기마다 문명, 혹은 시대정신, 혹은 종교사상, 혹은 문화의 흐름이 거대한 물줄기의 용틀임처럼 변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초통은 원(元)의 출발 이후 대략 1539년까지의 기간이며 이 원(元)의 시작은 황제 헌원씨이다. 만상만사가 황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여러 법과 책이 모두 황제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사마천이 『史記』를 쓰며 과거 역사의 기록을 황제 때로부터 적은 것이 그 이유이다. 중통은 초통의 그 다음 1539년 시간대인데, 이 시기는 성인을 말할 수 없으며 다만 성인의 가르침만이 전해 오다가 석가모니, 공자, 야소가 차례로 세상에 교를 전했던 시기로 나타난다. 중통의 초회의 시기는 1923년으로부터 2950년 전(B.C.1027년)에 석가모니가 계축생으로 태어나 가르침을 전했던 때가 된다. 중회에는 1923년으로부터 2474년 전(B.C.551년) 공자가 경술생으로 태어나 가르침을 펼친 시기이며, 계회는야소가 신유생(A.D.1년)으로 태어나 교를 전한 때이다. 마지막 계통은 황제 즉
위 후 3078년 이후부터 서기 1923년까지이다. 이때는 오직 구술에 의하여 교가 전해오고 성인이 단절된 기간이다. 계통의 초회 시기는 1923년으로부터 대략 1천 오백년 전으로 중국 육조시대와 신라시대로 불도가 중흥했던 시기이다. 이로부터 대략 오백년이 지나면 중국 송나라 시기로서 염락(濂洛)의 여러 현인이 성리학을 중심으로 한 시기 동안 진리를 전했던 기간이다. 마지막 계 회기간에는 서양 라마 법왕이 야소교를 기반으로 서양의 맹주 역할을 했던 시기이다. 이상과 같이 전교의 내용은 진리의 출현이나 부침이 천지의 운도수와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림번호1 황제입극·, 元의 출발은 황제 헌원(軒轅)씨로부터 시작되며 여러 법과 책이 모두 황제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림번호2 - 초통초회; 효 · 욱 · 곡 · 훈 · 화 · 우임금의 성인이 대대로 이어짐 그림번호3 - 초통중회; 탕왕의 치세기 그림번호4 - 초통계회; 문왕의 치세기 그림번호5 - 중통초회; 석가모니가 가르침을 전했던 시기 그림번호6 - 중통초회, 공자가 가르침을 전했던 시기 그림번호7 _ 중통계회; 야소가 가르침을 전했던 시기 그림번호8 _ 계통초회; 중국 육조시대와 우리의 신라시대로 불도가 중흥했던 시기 그림번호9 - 계통중회; 중국 송나라 시대로, 염락(濂洛)의 여러 현인들이 성리

학을 발전시켰던 시기 그림번호10 - 계통계회; 서양 라마법왕이 야소교를 기반으로 서양의 맹주 역할을 했던 시기
이러한 시대의 변천 또는 새로운 운(運)의 도래에 대한 개념은 증산의 것과 일치한다.
상제께서 「이후로는 천지가 성공하는 때라. 서신(西神)이 사명하여 만유를 제재하므로 모든 이치를 모아 크게 이루나니 이것이 곧 개벽이니라. 만물이 가을 바람에 따라 떨어지기도 하고 혹은 성숙도 되는 것과 같이 참된 자는 큰 열매를 얻고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할 것이오. 거짓된 자는 말라 떨어져 길이 멸망하리라. 그러므로 신의 위엄을 떨쳐 불의를 숙청하기도 하며 혹은 인애를 베풀어 의로운 사람을 돕나니 복을 구하는 자와 삶을 구하는 자는 힘쓸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도다292)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후 천하지 대금산(天下之大金山)모악산하(母岳山下)에 금불(金佛)이 능언(能言)하고 육장 금불(六丈金佛)이 화위 전녀(化爲全女)이라 만국 활계 남조선(萬國活計南朝鮮) 청풍 명월 금산사(淸風明月金山寺)문명 개화 삼천국(文明開花三千國) 도술 운통 구만리(道術運通九萬里)293)
이 내용은 증산의 천지 공사의 도수를 따라 후천개벽이 일어나는, 즉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말한다. 불완전한 선천이 증산의 천지공사를 통해 「文明開花三千國 道行運通九萬里」의 후천 선경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선천을 개벽 이후로 이제 증산의 천지 공사의 도수에 따라 후천이 열리는 개벽이 일어나는 시기임을 보여준다. 여기서 천지가 성공하는 때와 개벽의 개념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뜻하는 신원(新元)과 일맥상통한다.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은 전교에서 본다면 초통 초회에 해당되는 존재들일 것이고, 육장금신 화위전녀(六丈金佛化爲全女), 즉 증산이 새로
292) 『전경』, 예시 30절.
293) 『전경』, 예시 14절.
운 원을 주관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향후 새로운 종교사상, 새로운 진리의 출현이 필요함을 보인 것이다. 정산이 암시하는 바는 아마도 그것이 후천개벽 공사를 행한 증산의 진리이고, 또 그 종통을 계승하여 앞으로 자신이 펼쳐나갈 법과 진리일 것이다. 이에 무극도의 창도하여 구천상제의 천지공사의 대지(大志)를 체계화시킨 교리(敎理)와 새로운 법을 선포할 것이라는 선언이다.
정산은 1921년부터 도장건립을 계획하였는데294), 1923년 전교 발표 후 박차를 가하여 25년에 도장건립을 완성하였다. 전북 구태인 도창현 치마바위가 있는 곳에 도장을 건설하고 종단 무극도를 창도하니 곧 초기 교단의 형태가 이루어지게 된다.
도장의 형태는 주요 건물로 영대(靈臺)와 도솔궁(兜率宮)이 있고, 이를 중심으로 각종 회관과 사무실, 거실과 주방, 창고와 작업실 등의 건물이 있었으며, 도장 주위에는 장원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에 사대문을 내었다. 전체 건물의 동 수는 증축한 부분을 합하여 19동이고 총 간수는 240여 간이며, 구조는 나무로 짓고 지붕을 기와로 하고 단청을 한 전통 고전형이었다. 영대는 종 48간의 건물로서 상층에 구천상제의 영위(靈位)를 봉안하고 2층과 하층은 집회장으로
294) 도장 건립의 준비는 『태극진경』, 3장 16절, 이어 명하시기를 「내가 지금까지는 임시로 남의 재실을 쓰고 있으나 지금부터는 도의 근본이 되시는 구천상제님의 성령봉안처(聖靈奉安處)로서 도장이 긴요하니 그대들은 이의 영건(榮建)을 위한 방책을 세우도록 하라.」 하시니라. 『태극진경』, 3장 17절, 임원들이 명을 받들고 전 도인에게 명령을 공포한 후 성금으로써 영건비(營建費)에 충당하기로 협의 결정하고 도장영건추진위원회(道場榮建推進委員會)를 조직하니라.위원회의 도유사(都有司)에는 서산공 각도 유사(有司)에는 전라도에 권태로, 경상도에 이정두, 충청도에 이상우, 경기도에 정치성 등을 선정하였으며 그 밑에 다시 각군 유사로 정읍에 박붕래, 김제에 김사일, 부안에 박순태, 서산에 김창규, 보령에 이문삼, 한양에 박돌영, 평택에 김성균, 안동에 권영수, 풍기에 조진명, 금 롱에 김태윤,밀양에 이종태, 진주에 김윤진 등을 선정하니라. 이를 상제님께 보고하고 재가를 받들어 즉시 임명을 모신 후 유사들의 활동으로 이해 연말에 도장기금 3만원이 성금으로 모여져 상제님께 올리니 도인들은 이를 원납도수(願納度數)라 일컬으니라.
하여 내부는 3층이나 외부는 2층의 구조이고, 도솔궁은 증 72간의 건물로서 상층은 33천(天)을 봉안하여 도솔궁이라 하고, 3층은 칠성신명(七星神明)을 봉안한 칠성전, 2층은 육정신(六丁神)과 제대신명(諸大神明)을 봉안한 봉령전(奉靈殿), 하층은 상제께서 도수를 보시며 공부하시는 중궁(中宮)이라 하신 내부는 4층이나 외부는 3층의 구조이다295).
당시 이 도장의 모습을 일본의 촌산지순(村山智順)은 이렇게 그리고 있다.
도장은 수도의 대상으로 도솔천과 교조 강일순이고, 도솔천에는 도 소 천신인 33천과 함께 칠성신, 그 외의 천신, 지신도 모시고 있다. 이 본존 관에 따라서 교본부에서는 성전과 영전을 짓고 전자에는 도솔천을, 후자에는 교조의 영을 모시고 있다. 성전은 도솔궁이라고 통칭되는 4층 건물인데, 4충을 도솔궁이라고 하며 여기에서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의 4대절에 도솔천신 33천을 모신다. 3층을 칠성전이라 하고 여기에서 7시신(七時神)을 모신다. 2층을 봉령전(奉靈殿)이라 하고 여기에서 33천신 이외의 천신 및 지신을 모신다. 1층을 도주실 또는 중궁(中宮)이라하고 도주가수도공부하는 곳으로 삼고 있다. 영전은 또 영대(靈臺)라고도 하는 3층 건물인데(1922년 낙성) 3층은 강일순의 영을 모시고 그의 생일(9월 19일), 서거일(6월 24일)에 2회 여기서 성대한 제사를 지낸다. 2층은 제사 때 교 간부가 참석하는 곳, 1충은 교도가 모이는 곳으로 쓰인다.296)
정산은 1925년 4월 28일 영대봉안치성을 봉행하기 전날 구천상제의 존호를 신격위(神格位)로서는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 天尊上帝), 인격위(人格位)로서는 강성증산상제(姜聖甑山上帝)로 정하고, 치성 시에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曾姜聖上帝)로 추존하신 성령위지(聖靈位紙)와 33천(天)을 비롯한 제대신명(諸大神明)의 위지(位紙)를 친히 봉안하였다.297)
신앙의 대상인 증산을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
295) 『진경전서』, 3장 61절, 62절.
296) 촌산지순, 같은 책, p.336.
297) 『태극진경』, 3장 70절.
天尊 姜聖上帝)로 인식한 것은 증산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는 교단 가운데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많은 증산계 교단에서의 증산에 대한 호칭은 모두 제각각인데 반하여, 정산은 '강세하신 강증산이 구천상제'라고 밝힌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상을 어떠한 존재로 이해하느냐 하는 문제이므로 교리 전반, 나아가 신앙인들의 수행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데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산의 교리를 신봉하는 대순진리회의 『대순진리회요람』 에 따르면,298)
무상한 지혜와 무변의 덕화와 위대한 권능의 소유주이시며 역사적 대종교가이신 강증산 성사께옵서는 구천대원조화주신(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서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하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인세에 대강(大降)하사 상도(常道)를 잃은 천지도수를 정리하시고 후천(後天)의 무궁한 선경의 운로(運路)를 열어 지상천국을 건설하고 비겁에 쌓인 신명(神明)과 재겁(災劫)에 빠진 세계창생(世界蒼生)을 널리 건지시려고 순회 주유하시며 대공사를 행하시니299)
라고 하여 역사적 인물로 탄생한 강증산이 구천대원조화주신의 화현(化顯)임을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구천대원조화주신은 삼계대권을 주재하는 절대 능력의 소유주이며 천하 대순을 통해 이 땅에 몸을 드러내는 신통자재한 최고신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구천은 막연한 하늘이 아닌 위계적 구분의 하늘을 가리키며, 이러한 하늘의 세계에 머무는 으뜸가는 존재로서 대원(大元)을 말하고 나아가 지상 세계의 모든 변화와 생성을 담당한다고 하여. 화주(造化主)로서 명명하고 있다30()) 여기서 볼 때 상제는 우주를 관령하는 조화주로써 최고신이며, 이 최고신의 주재 하에 천지신명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298) 대순진리회의 『대순진리회 요람』 의 내용이 들어간 이유는 과거 당시 자료를 살펴볼 때 현대에 알맞도록 분석된 것이 없기 때문이고, 또한 대순진리회는 정산을 따르는 종단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종단이기 때문이며, 정산의 뜻에 가장 가깝게 교리체계가 정밀하고 체계적이므로 인용하였다.
299) 『대순진리회 요람』, 대순진리회교무부, 1969, p.8.
300) 최동희 · 이경원, 『대순진리의 신앙과 목적』, 대순사상학술원, 2000, pp.159-160.
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면서 우주의 질서를 유지해 왔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즉 세계의 구체적인 일에 대하여 상제는 직접 관여하지 않고 하위의 신명들에게 맡겨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추론은 다음의 상제의 말씀을 통해서 보다 확실해진다.
상제께서 어느날 종도들에게 「내가 이 공사를 맡고자 함이 아니니라. 천지신명이 모여 상제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 잡을 수 없다 하므로 괴롭기 한량없으나 어찌할 수 없이 맡게 되었노라」 고 말씀하셨도다.301)
세상의 일에 직접적으로 간여해 오던 천지신명이 세계를 구제할 방안을 찾지 못하고 결국 상제에게 하소연하였다는 내용인데, 이를 통해 신적인 질서와 체계 속에서 그 위계적 차이에 따라 문제해결의 능력도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지신명의 호소가 있기 전까지 상제는 세상사에 관여하기보다는 하위신인 천지신명에게 맡겨놓고 있었으나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세상사에 관여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유사한 형태로서 상제가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리는 과정을 수운이 고백한 내용에서 볼 수 있다.
「무서워 말고 두려워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上帝)라 하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라는 대답이 있었다. 까닭을 물으니, 「나 또한 일한 공적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할 것이니, 부디 의심하지 말라!」 고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서도(西道)로써 사람들을 가르칩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그렇지 않다. 내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僊藥)이요 그 모양은 태극과 같고 궁궁(弓弓)과도 같다. 내게서 이 영부를 받아 사람들을 질병에서 구하고, 나의 주문을 받아 그들이 나를 위하도록 가르치라! 그리하면 너도 장생할 것이고 덕을 천하에 펼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302)
301) 『전경』, 공사 1장 9절.
302) 『東經大全』,「布德文」,勿懼勿恐世人謂我上帝汝不知上帝耶問其所然日余亦無功故生汝世間敎人此法勿疑勿疑日然則西道以敎人乎日不然吾有靈符其名仙藥其形太極又形弓弓受我此符濟人疾病受我呪文敎人爲我則汝亦長生布德天下矣.
위의 글에서는 일을 맡기는 대상이 천지신명에서 인간으로 바뀌는 형태로 나타난다. '일한 공적이 없다는 상제의 말씀을 볼 때 상제는 수운과 종교적인. 만남이 있기 전까지는 인간사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세계를 창조하거나 주재하는 최고신으로서의 위격을 지니나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 신을 종교학 또는 신학적 용어로 '격절신(隔絶神)'303)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격절신은 라틴어의 'Deus otiosus'를 번역한 말로 '감추어진 신'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지고신은 너무 추상화되어 있고 또 멀리떨어져 있어 평소에는 잘 찾지 않다가 아주 긴급한 위난 때에만 찾는 신이기도 하다. 평소에는 보다 낮은 기능신들에게 양위하고 있다고 한다3()4)
이러한 격절신적인 성격이 상제와 수운의 만남에서 직접적으로 인간의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즉 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림으로써 상제의 역사(役事)가 인간을 통해 세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수운을 대면한 상제님은 특별한 공적(功績) 없이 지냈던 이전의 모습을 뒤로 하고 수운을 통해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으로 나타난다.305)
상제가 인간계에 대한 참여가 인간을 통한 간접적인 차원을 넘어 보다 더 적극성을 띠게 되는 것은 수운으로부터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직접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면서이다.
내가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 천하를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東土)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母岳山金山寺) 삼층전(三層殿) 미륵금불(彌勒金佛)에 이르러 三十년을 지내다가 최 제우(崔濟愚)에게 제세대도(濟世大道)를 계시하였으되 제우가 능히 유교의 전현을 넘어 대도의 참 뜻을 밝히지 못하므로 갑자년(甲子年)에 드디어 천명과 신교(神敎)를 거두고 신미년(辛未年)에 강세하였노라.306)
303) 격절신에 대한 내용은 ‘미르치아 엘리아데 · 이은봉 역, 『종교형태론』, 서울: 한길사, 1996,pp.105_110.
304) 미르치아 엘리아데 · 이은봉 역, 같은 책, p.105, 역주 4.
305) 수운이 신비체험을 통해 만난 상제님의 적극적 측면에 대해서 '최종성, 『동학의 테오프락시』, 서울: 민속원, 2009, pp.66-76.' 참조.
즉 최고신이 인신화현(人身化顯)하여 직접 세계 역사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고신이 인간의 몸으로 강림하였다는 믿음은 종교관념으로 볼 때 권화 사상의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권화(權化)라 함은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여러 성현(聖賢)이 근원적으로는 동일한 절대자의 다양한 화현(化顯)이라고 보는 사상을 말한다. 구천대원조화주신이 권화를 통해 인신화현하신 증산 성사는 모습을 감추고 있는 '숨은 신(deus absconditus)'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현현의 신(deus revelatus)'으로서 적극적인 활동과 능동적인 참여의지를 지니고 있는 활력 넘치는 '일하는 신'이라 할 수 있다.307)
세계의 역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습이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은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라 할 수 있다. 천지공사를 통해 나타났던 인신의 현현(顯現)한 증산은 세상에 대한 적극적 개입과 참여는 계속 이어진다. 이는 증산이 화천하기 직전에 한 「내가 천하사를 도모하고자 지금 떠나려 하노라」 308)라는 의지 표명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하늘은 삼십 육천(三十六天)이 있어 상제께서 통솔하시며 전기를 맡으셔서 천지 만물을 지배 자양하시니 뇌성 보화 천존 상제(雷聲普化天尊上帝)이시니라.」 309)라는 정산의 말에서도 알 수 있다. 존재양태는 변하였으나 여전히 우주의 모든 사물을 주재 · 관령하시는 적극적인 상제로서 임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증산의 위격을 정산이 밝혀줌으로써 현재 대순진리회에서는 그 호칭에 관해 『대순진리회요람』 에서 구체적으로 풀 이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요람에 있는 내용을 토대로 신앙의 대상이 지니고
306) 『전경』, 교운 1장 9절.
307) 최종성, 같은 책, p.69.
308) 『전경』, 행록 5장 33절.
309) 『전경』, 교운 2장 55절.
있는 호칭에 대해서 상세한 풀이를 하고자 한다.
구천(九天)이라 함은 전경(典經)에 『···모든 신성(神聖) 불(佛)보살(菩薩)들이 회집(會集)하여 구천(九天)에 하소연 하므로 · (교운 1장 9절)』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우주(宇宙)를 총할(總轄)하시는 가장 높은 위(位)에 계신 천존(天尊)께 하소연 하였다는 말이니 그 구천(九天)은 바로 상제(上帝)께서 삼계(三界)를 통찰(統察)하사 건곤(乾坤)을 조리(調理)하고 운화(運化)를 조련(調錬)하시고 계시는 높은 위(位)임을 뜻함이며, 응원(應元)이라 함은 모는 천체(天體)뿐만 아니라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천명(天命)에 응(應)하지 않고 생성(生成)됨이 없음을 뜻함이며, 뇌성(雷聲)이라 함은 천령(天令)이며 인성(人聲)인 것이다. 뇌(雷)는 음양이기(陰陽二氣)의 결합(結合)으로써 성뢰(成雷)된다. 뇌(雷)는 성(聲)의 체(體)요, 성(聲)은 뇌(雷)의 용(用)으로써 천지(天地)를 나누고 동정진퇴(動靜進退)의 변화(變化)로 천기(天氣)와 지기(地氣)를 승강(昇降)케 하며만물(萬物)을 생장(生長)하게 하고 생성변화(生成變化) 지배자양(支配滋養)함을 뜻함이며, 보화(普化)라 함은 우주(宇宙)의 만유(萬有)가 유형무형(有形無形)으로 화성(化成)됨이 천존(天尊)의 덕화(德化)임을 뜻함이며, 천존(天尊)이라 함은 군생만물(群生萬物)을 뇌성(雷聲)으로 보화만방(普化萬方)하시는 지 대지성(至大至聖)한 삼계(三界)의 지존(至尊)임을 뜻함이며, 강성상제(姜聖上帝)라 함은 우주(宇宙)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삼계대권(三界大權)으로 주재(主宰) 관령(管領)하시며 관감만천(觀鑑萬天)하시는 전지전능(全知全能)한 하느님의 존칭(尊稱)임을 뜻함이다.
요람의 글은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강성상제에 대해 각각을 설명한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천체와 삼라만상이 구천의 상제에 응하여 존재하며 강성(姜聖)상제는 뇌성으로서 만물을 두루 지배하고 자양하는 덕화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도교 경전의 집체인 도장에 기록된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玉樞寶經』 에 적혀 있는 부분과 내용상 다소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인 의미로는 유사한데 집주(集註)에서는 신격 위에서 구천응원뇌성보화까지의 각각 한 글자씩 설명하고 천존에 대한 풀이를 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강
성상제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는 구천상제가 신양화되어 강씨 성으로 인간 세상에 온 증산에 대해 신격위가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로 된 면에 연유한 것이다.
또 구천상제는 '구령삼정주'에 4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玉淸眞王'이라 하여 옥청진왕(玉淸眞王)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옥청진왕은 삼청의 진왕 중에서 한 존신(尊神)이다. '오방주'에는 '吾主人太-聖哲 奉三淸眞王 이라. 하여 삼청진왕(三淸眞王)을 받든다는 내용도 보이는데 이 주문들이 무극도에서 쓰였다는 것은 삼청신양이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은 일체의 뇌신(雷神) 가운데 최고신으로 삼청(三淸) 중 옥청경(玉淸境)에 주재하며 다르게는 옥청진왕의 화신이다.31(羽
이처럼 신앙의 대상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확립한 정산은 무극도취지서(无極道趣旨書)와 교리의 핵심인 신조, 사강령, 삼요체를 함께 발표하였다. 무극도취지서가 무극도라고 명명하는 새로운 교단을 장립하는 취지를 밝힌 것이라면 신조, 사강령, 삼요체는 신앙의 대상인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의 가르침을 응축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무극도취지서(无極道趣旨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도라는 것은 하늘이 명하여 사람이 행하는 것이고, 하늘에 무극한 대도가 있어 무극한 이치로써 인간을 화생시킨다. …… 무릇 도는 곧 이(理)요, · 이(理)는 곧 무극(無極)이요, 무극은 곧 천(天)이다. · 어리석은 중생은 물욕에 사로잡혀서 천을 생각지 못하여 많은 족속의 인은화육(綱縊化育)은 모두 이 하늘이 주신 것이로되 알지 못하고 만류(萬類)의 운용동식(運用動息)함도 이 하늘이 그렇게 한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영욕(榮辱), 사생(死生)을 자기의 능력이라 생각하고 빈궁과 영달, 걱정과 즐거움을 · 문득 저절로 되고 우연이라고 생각한다. · 오직 하늘만이 백성을 · 버리지 않고 대도를 주셨으니 · 오직 도(道)로써 하여 인 · 의 예 · · 지 · 신(仁義禮智信)은 천의 품부한 바이라 반드시 행하고, 삼강오륜(三綱五倫)은 천륜이라 반드시 질서를 지키며, 농사에 힘쓰고 경제를 절약하며 상공은 힘에 따라서 하라. 하늘이 부여하신 직업이므로 반드시 힘써 사람을 상하게 하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며, 잡다한 것에취하지 말고 함부로 지껄이는 말을 듣지 말며, 분수에 넘치고 망령된 일을 · 하지 말라. · 정신이 오로지 하나로 되어 마음과 기가 화합될 수 있다. 뚜렷이 하여 위에 계시고 넓고도 넓게 좌우에 있으니 잠시라도 싸움을 겨루고 홀로 편안할 때에도 반드시 삼가하며 출입하는 거처에도 오직 하늘을 생각하고, 시청언동(視聽言動)에 오직 도를 받들어 몸가짐에도 바로하고 익혀 지성을 이른 즉 하늘은 반드시 감응하여 심령이 스스로 통할 것이다. 심령이 통한 즉 무극(無極)한 이치를 통명(通明)하고 하늘을 알게 된다. 하늘을 체(軆)로 하여 천인(天人)이 합덕하고 천지와 더불어 참여할 것이니 무릇 나의 도우는 힘써 노력하여 성취하도록 할지어다. 311)
310) 고남식, 「증산의 도가적 경향과 무극도의 도교적 요소」, 『대순사상논총』 17, 2004, p.21.
다음으로 신조, 사강령, 삼요체에 관한 내용이다.
신조(信條); 음양합덕(陰陽合德) · 신인조화(神人調和)
해원상생(解寃相生) · 도통진경(道通眞境)
4강령(四綱領)·, 안심(安心) · 안신(安身) · 경천(敬天) 수도(修道)
3요체(三要諦); 성(誠) · 경(敬) · 신(信)312)
311) 편!曇極大道敎빠兄』, 동경 · 우방문고, 1926, pp.25-35 『태극진경』, 3장 72절, 취지서(趣旨書) 夫道也者天所命而人以行之者也天有无極大道以无極之理化生人矣人生於此无極之理故此道與理人皆所有者也然而人鮮能行此者何也蓋道卽理也理卽无極也无極卽天也凡志道者必須念天也念天也故敬天敬天也故必對天有誠有誠也故明明而至至而變變而化可以得贊乎天地化育矣然而蚩蚩衆生弊於物慾而不念天不知萬物之綱綿化育皆是天之所賜不覺萬有之運用動息皆是天之所使榮辱死生皆歸自己能力窮達吁樂輒日自然偶然適陷於非常窮地者呼天訴天而裳免危急則輒稱吾智吾力祈天求命謂之惑敬天事神謂之虛此非自絶於天者而何唯天不棄期民賜我以大道日无極无極者天地無極之理天以理授人人以道受於天須感天授克念受道専念對天専事以道必行仁義禮智信必守三綱五倫勤於耕織節約經濟應力商工職皆天之所授也則必其務也毋傷人不害物無爲凶雜鬪怒之事不可爲分外之妄事皆是天厭之穢德也故敎人務其廣布勤之勉之信之至誠同是天生赤子必如一身憶念誦讀經文使煩思雜慮不得生於心中然則精訷専一可以得心和氣和矣天明明乎在上洋洋乎在左右造次戰兢燕獨必愼居坐出人唯大是念視聽言動惟道是遵敬以持身習與性成以至至誠大必感應心靈自通矣心靈通則明通乎无極之至理以知天體天以與天地合其德以至參乎天地矣惟我道友皆以勤而成就也.
312) 『태극진경』, 3장 74절, 『전경』, 교운 2장 32절에는 종지(宗旨): 음양합덕 · 신인조화 · 해원상생 · 도통진경(陰陽合德祺人調化解冤相生道通眞境)신조(信條): 사강령(四綱領)…안심(安心) · 안신(安身) · 경천(敬天) · 수도(修道) 삼요체(三要諦)…성(誠) · 경(敬) · 신(信) 목적(目的): 무자기(無自欺) 정신 개벽(精神開闢) 지상 신선 실현(地上神仙實現) 인간 개조(人間改造) 지상 천국 건설(地上大國建設) 세계 개벽(世界開闢) 으로 약간 다르게 표현되어 있고, 오늘날 종단에서는 이것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무극도와 태극도를 거치는 동안 시대의 변화에 따른 편집상의 변화일 뿐, 내포하고 있는 진리의 기본 골격이나 내용에는 거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정산사상의 골격이 되는 그 핵심적인 가르침인 신조는 바로 증산이 천지공사를 행한 그 뜻을 정산이 총 집결하고 압축하여 나타낸 요지이다. 사강령과삼요체는 수도인들이 진리를 신앙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행동하고 실천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담겨 있다.
음양합덕은 분열하였던 음양을 하나로 통합하고 음양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을 서로 합하여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증산에 의하면 선천은 음양의 불균형으로 인해 그것이 지니는 덕이 발현되지 못하였고, 그 폐해로 선천은 진멸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음양 부조화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증산은 일음일양과 정음정양의 원리를 바당으로 천지공사를 처결하였다.
신인조화(神人調化)는 음(陰)인 신(神)과 양(陽)인 인간의 '조화(調和)'를 목적으로 한다. '조화(調化)'는 균형과 화합과 합일을 의미하는 '조화(調和)'에 미물지 않고 변혁과 창조와 탄생을 의미하는 '조화(造化)'를 포함하고 있는 특이한 용어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느 한편이 우위에 서거나, 지배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힘이 합쳐져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인조화는 정음정양을 바당으로 인존(人尊)이 실현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원상생은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가장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다. 선천은 상극이 모든 것을 지배하여 원이 쌓였으며 이 원이 천지인 삼계를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여 참혹한 재화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증산은 천지 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원리로 새로운 선경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으로 인하여 진멸지경에 처한 선천을 해
원을 위주로 구제하고, 나아가 상생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도통진경에서의 도통은 증산이 제시한 대순의 진리에 완전히 통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개인을 넘어 만천하, 전체 우주에 충만한 상태를 도통진 경이라고 한다. 이 도통진경은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의 완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후천선경의 이상향, 즉 지상신선이 실현되는 지상천국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음양합덕이 운도를 개조하는 천지공사의 기본적인 원리라고 한다면, 신인조화는 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해원상생은 천지공사에 방법론으로서 적용되는 핵심 축이자 인간세계에서의 사회적 실천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을 개조하는 신인조화와 사회의 실천덕목인 해원상생은 인존시대를 실현하고 후천선경을 건설하여 최종적으로 도통 진경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강령(四綱領)과 삼요체(三要諦)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 경'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론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강령(四綱領)은 증산의 진리를 봉행(奉行)하는 것으로 그 벼리를 삼는다. 그 주요한 내용은 안심(安心) · 안신(安身) · 경천(敬天) · 수도(修道)가 있다. 안심이란 곧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여 궁극적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데 있다. 본연의 양심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며, 때 묻지 않은 순결한 마음이다. 안신(安身)이란 몸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몸은 마음의 현상이며,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몸으로 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마음이 바로될 때 몸의 행동은 법례에 따라 의리와 예법이 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 신은 안심과 떨어질 수 없고 안심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천과 수도는 곧 천(天)으로 대표되는 신앙대상에 대한 설명과 신앙주체인 인간과의 관계를 상정하고 그 합일적 과정으로서의 수도를 통해 달성되는 이상적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경천(敬天)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님과 천지신명에 대한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일컫고 있다. 자
신의 잘못됨과 마음의 사곡(邪曲)함을 신명과 상제님의 권위에 비추어 조심하는 자세가 곧 경천(敬天)인 것이다. 수도는 종교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단련이다. 수도는 수행(修行)이라고도 하며 넓은 의미에서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단련하는 것을 말한다. 수도란 늘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하며 정심(正心)에 이르도록 하여 영통의 통일을 위해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 하겠다. 수도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부 수련 · 기도(평일기도, 주일기되로 구분한다. 수련은 자기 자신의 현재의 심성(心性)과 기질(氣質)을 닦아.서 맑고 바른 본래의 심성과 기질로 환원시키도록 마음과 몸을 단련하며, 기도는 신앙의 대상인 상제에게 기원하고 신명과 소통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바 소원성취를 축원한다. 그리고 공부는 도장의 일정한 장소에서 지정된 방법으로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것이다.
성(誠)은 늘 끊임이 없이 조밀(調密)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不足)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말하고, 경(敬)은 심신(心身)의 움직임을 받아 일신상(一身上) 예의(禮儀)에 알맞게 행(行)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信은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변하지 않고 나아가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일제의 조선총독부 관료 와타나베 시노부[渡邊忍, 1883~1955]가 1926년 보관한 『無極大道敎槪況』 이라는 자료에는 無極道綱領으로 1. 敬天修道 2. 誠信養性 3. 安心安身으로 적고 있는데, 이것은 다소 오류가 섞인 것으로 보인다.
정산은 이어 도규(道規)를 공포(公布)313)하고, 도규에 따라 상급 각 임원을
313) 「도규(道規)」 1. 본도(本道) 도인은 본도의 취지 강령을 마음으로 숭상하여 지원하는 사람으로 한다.2. 본도 도인은 취지 강령을 실체(實體)하고 심공(心工)을 정성되고 경건히 하여 일체중생(-切衆生)에 선각(先覺)한다. 3. 본도 도주는 도리(道理)를 천명하여 일반도인의 도통(道通)과 일체중생(-切衆生)의 진선(進善)에 지성심력(至誠心力)한다. 4. 본도의 본부는 전라북도 정읍군 태인면 태흥리에 둔다. 5. 본도의 임원(任員)은 아래와 같다. 본부임원(本部任員) (1) 정위원(庭衛元) 1인(人) (2) 승정원(承正元) 1인(人) (3) 판정(判正) 약간인(若干人) (4) 순찰(巡察) 약간인(若干人) 지방임원(地方任員) (1) 수포감(首布監) 약간인(若干人) (2) 포감(布監) 약간인(若干人) (3) 선포장(宣布長) 약간인(若干人) (4) 포덕(布德) 약간인(若干人) 6. 본도 임원의 임무는 아래와 같다. (1) 정위원과 승정원은 본도의 전반도무(全般道務)를 총할(總轄)한다. (2) 판정은 승정원을 보좌하여 도중업무를 분장처리한다. (3) 순찰은 본부로부터 지방에 파견하여 포감과 그 지방의 도무(道務)를 협리(協理)한다.(4) 수포감은 포감 선포장 포덕을 독려하고 본부와 지방도인과의 연락사무를 맡는다. 단, 2인이상의 선포장을 도솔(道率)하는 사람을 포감이라 칭한다. (5) 선포장은 도인 일백이십인을 교도(敎導) 관리한다. (6) 포덕은 포덕(布德)에 종사한다. 7. 본도의 임원은 수도의 실험(實험)과 포덕(布德)의 공효(功效)에 따라서 임명한다. 8. 본도의 도인은 입도시에 수인금(數人金, 入道禮으로 일원오십전을 납입)하고 매월 오전이상의 월성금(月誠金)을 납입한다. 9. 본도 도인중에 본도의 강령과 규약을 위반할 시는 출도 처분한다. 10. 본도의 도인은 심성을 시시(時時)로 수련하고 치성을 힘대로 봉행(奉行)하여 성의(誠意)를 표한다.11. 본도의 치성은 아래와 같다. (1) 기념치성(紀念致誠) 음력 9월 19일 증산상제탄일(甑山上帝誕日) 음력 6월 24일 증산상제둔일(甑山上帝遁日) (2) 임시치성(臨時致誠) 도인이 수의(隨意)로 봉행(奉行)한다. 12. 본도의 지용(支用)은 수인금, 월성금 혹은 도인의 자원표성(自願表핍如하는 물화(物貨)로써 충용(充用)한다. 13. 본규에 미비한 조건은 관례에 의한다. 14. 본규는 필요에 의하여 개정함을 득(得)한다.
임명하는 등 조직체를 정비하였다. 「도규(道規)」 에 '본도(本道) 도인은 본도 의 취지 강령을 마음으로 숭상하여 지원하는 사람으로 한다.' 고 명시하고, 임원으로는 본부임원(本部任員)과 지방임원(地方任員)으로 분리하여 관리하였다. 본부임원(本部任員)은 정위원(庭衛元) 1인, 승정원(承正元) 1인, 판정(判正) 약간인(若干人), 순찰(巡察) 약간인(若干人)을 두고, 지방임원(地方任員)은 수포감(首布監) 약간인(若干人), 포감(布監) 약간인(若干人), 선포장(宣布長) 약간인(若干人), 포덕(布德) 약간인(若干人)을 둔다고 규정하였다. 본부임원은 본부에
근무하며 전국의 도인들을 관리하는 행정사무원이고, 지방임원은 각 지역에서 포덕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이다.
또 치성의 절차순위(節次順位)는 ‘시립(侍立) 명촉(明燭) 진설(陳設) 분향(焚香) 배례(拜禮) 초헌(初獻) 아헌(亞獻) 삼헌(三獻) 배례(拜皚) 고유(告諭) 퇴갱(退羹) 유식(侑食) 하시(下匙) 배례(拜皚) 예필(禮畢)' 으로 법제(法制)하고,314)입도치성은 일반치성에 준하되 명촉 후에 성령위지(星靈位紙)를 봉안하고 법수(法水)를 받들어 올리며 고유 후에 납명지(納名紙)를 에필 전에 위지(位紙)를 소화하도록 법제하였으며,315) 갑기(甲己)일을 주일(主日)로 정하고 도인의 기도봉행(祈疇奉行)도 법제하였다.316) 기념치성(紀念致誠)은 음력 9월 19일 증산상제강세일(甑山上帝降世日)과 음력 6월 24일 증산상제화천일(甑山上帝化天日)을 정하였다. 이때 수련 또는 기도 시에 봉송(奉誦)하는 주문으로는 봉서의 주문 이외에 음양경(陰陽經) · 운합주(運合呪) · 옥추통(玉樞統) · 명이주(明耳呪) · · 오방주(五方呪) · 오장주(五臟呪) · 구령삼정주(九靈三精呪)태극주(太極呪) · 예고주(曳妓呪) · 학도희선주(學道希仙呪) 등의 주문이 있었다.317)
이해 연말에는 운장주(雲長呪) 중의 「일별병영(一別兵營)」 을 「일반병영(一般兵營)」 으로, 칠성주(七星呪) 중의 「좌보우필(左輔右弼)」 을 없애고 호.아형아 허신형(護我形我虛身形)」 을 「호아신형(護我身形)」 으로, 24절주(節呪) 중의 「입춘 우수(立春雨水)」 를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冬至 小寒大寒 立春 雨水)」 로 「대한 장손무기(大寒長孫無忌)」 를 「대설 장손무기(大雪 長孫無忌)」 로 「제대신장 즉통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지해용력 음 음(諸大神將 卽通 天文地理 風雲造化 八門遁甲 智慧勇力 唵唵)」 을 「제대신장 소솔제장 일반병영 음음(諸大神將 所率諸將 -般兵營 唵唵)」 으로 변경하
314) 『태극진경』, 3장 77절.
315) 『태극진경』, 3장 78절.
316) 『태극진경』, 3장 79절.
317) 『태극진경』, 3장 80절.
였다. 개벽주(開闢呪)는 전문(全文)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변경하였다. 「천상 옥경천존신장 천상옥경태을신장 상하변국뇌성벽력장군 백마원수대장군 뇌성벽악장군 악귀잡귀금란장군 삼수삼계도원수 지신벽력대장군 천지조화풍운신장 육정육갑둔갑신장 태극두파팔문신장 음양오행조화신장 삼태칠성제대신장 이십팔수제위신장 이십사절제대신장 감아미성 조아대력 역발산 오봉구천응원 뇌성 보화천존 강성상제 칙속칙속 음음 급급 여율령 사바아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白馬元帥大將軍雷聲霹惡將軍惡鬼雜鬼禁亂將軍三首三界都元帥地神霹靂大將軍天地造化風雲神將六丁六甲遁甲神將太極斗破八門神將陰陽五行造化神將三台七星諸大神將二十八宿諸位神將二十四節諸大神將感我微誠助我大力力拔山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勅速勅速 唵唵 急急 如律令 娑婆)」 318) 그리고 도인들이 기도 시에 봉송하는 주문 12종류의 봉송순위(奉誦順位)와 회수(回數)를 '봉축주(奉祝呪) 1회 / 기도주(祈疇呪) · 태을주(太乙呪) 이상 각4회 / 진법주(眞法呪) · 칠성주(七星呪) · 운장주(雲長呪) ·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 ·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 · 도통주(道通呪) · 개벽주(開闢呪) · 해마주(解魔呪) · 신성주(神聖呪) · 태을주(太乙呪) 이상 각1회’로 제정하였다.319)
이 해 증산의 강세일에는 다음과 같은 각도문(覺道文)320)을 발표하여 새로
318) 『태극진경』, 3장 85절, 증산으로부터 받은 개벽주(開闢呪)의 원형은 「天上玉京天尊神將 天上玉京太乙神將玉京玉樞守門將軍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白馬元帥大將軍雷聲霹惡將軍惡鬼雜鬼禁亂將軍二首三界都元帥地神霹靂大將軍天動地動陰陽霹靂大將軍左剖關元帥右剖馬元帥天地造化風雲神將陰陽五行奇門神將六丁六甲遁甲神將 太極斗破八門神將 山上吹嘯猛虎將軍 多率神軍百騎將軍龍盤虎踞鬼哭神將千萬惡鬼打首神將魑魅魍魎揮致神將法律邪魔盡滅神將風濤殺首呼天神將五百年間一享神將三台七星諸大神將二十八宿諸位神將啓明長庚二府神將九辰太白禁令神將二十四節諸大神將十二辰諸剖神將天地五方號令神將上下八位巡察神將萬里風雲轉化神將六丁六甲所率神將九靈三精應元神將萬古歷代英雄豪傑諸大神將統合天四將四十八大將軍四萬神將八萬四千諸大神將感我微誠助我宇一大運大事改改降臨降臨侍衛我奉命身大運大命太一聖哲常隨不離大道通大位定與天地合與四時合與陰陽合與五行合通天地通萬古通五方通四海四海應身力拔山岳威振乾坤天地道通天地造化無窮不息進退有法吾奉九天上世君勅速勅速睫睫急急如律令」。1吽
319) 『태극진경』, 3장 86절.
320) 『전경』, 교운 2장 33절. 覺道文 夫聖人之經典不求文章之色彩而求其眞理眞人之心求其實而不求外飾求其物之事理則求其大然而不求造作也故聖人明心達道而不求聞逹書不求文章之色彩衣不求綾羅也求於文章者聖人之心法難得求乎外飾者聖人之眞實難得大哉聖人之道德元亨利貞大經大法道正天地數定千法而理定心法正大光明仙佛儒大道正通是以天命代語先後天道理氣生大矣至矣聖矣惟我奉敎後學以光大道以承大德以弘大業淸華五萬年龍華仙境一一同躋之地千萬幸甚焉.
이 출현한 도의 깨달음을 촉구하였으며, 1928년에는 포유문(布喩文)321)으로 도인들의 수도를 독려하였다.
이상과 같이 정산은 무극도를 창도하고 무극도장을 건립하면서 신앙의 대상을 확립하고 교리체계를 발표하여 신앙체계를 완비하였고, 도의 기구(機構)와 조직체계를 완비하여 종단의 기본골격을 완성하였다.
정산은 무극도를 창도하여 많은 신도가 모이자 종교적 신념의 사회실천운동으로서 진업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진업단은 수리 또는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간척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단원도수(團員度數)라 일컬었다. 어느 사업장에서도 성경신(誠敬信)을 기본정신으로 근무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많은 신임을 얻고 좋은 실적을 거두게 되었다. 이것은 산업을 장려하여 도가의 생활안정과 빈민구제를 위한 활동이었으며 나아가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 사회에 구현하는 하나의 실천항목이었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二十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장기 리에 있는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 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32기.
321) 『전경』, 교운 2장 41절, 布喩文 日人生處世惟何所欲惟名惟榮日名日榮人所共欲而求之難得是何故也都是無他未知捷徑捷徑非他求也吾之所求有無量至寶至寶卽吾之心靈也心靈通則鬼神可與酬酢萬物可與俱序惟吾至寶之心靈無路可通汨沒無形之中一世虛過幸於此世有無量之大道正吾之心氣立吾之義理求吾之心靈任上帝之任意洋洋上帝在上浩浩道主奉命明明度數無私至公引導乎無量極樂五萬年淸華之世肅我道友嚴我道友極誠極敬至信至德難求之欲虛過一世之冤至于斯而豈不解冤哉喜吾道友勖哉勉哉.
진업단은 1928년(戊辰)에 조직되었는데 이때부터 황무지 개간사업이나 간석지 간척사업 등에 매진하였다. 1930년 봄에는 각처의 진업단원들을 전부 소환하고 증원 개편하여 2개단으로 나눈 다음 1개단 200여명은 북만주 목단강 근처로 1개단 300여명은 함경도 무산으로 보내 각기 산림벌채사업에 종사하게하였고, 함경도 무산으로 간 단원들이 1년 만에 사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다시 목단강 사업장에 합류시켜 그 후 2년간에 많은 실적을 거두었다.323) 진업단이 2년 후에 돌아올 때까지 왜경에서는 만주지방의 독립군과 합류할까 의심하여 그 해산을 강요하거나 귀환 종용, 벌채허가를 취소하는 등 여러 가지로 방해하고 위협 했으나 굴하지 않았다.324)
1932년에는 만주로부터 진업단이 벌채사업을 마치고 돌아오자, 미리 측량, 설계 등 면밀히 계획하였던 안면도(安眠島)와 원산도(元山島)의 간석지 간척사업을 착공하게 하였는데, 안면도는 창기리(倉基里) 앞바다를 막아 80여 정보, 원산도는 50여 정보의 논과 염전(田)을 확보하게 되었다.325) 또 이해 여름에는 전주 이서면의 사금광(沙金鑛)과 충북 음성의 무극광산(無極鑛山) 등 전국의 금광 72광구를 출원(出願)하고 그 일부를 채굴하여 많은 수익을 올렸다.326) 이 외에도 개간공사, 하천공사, 수리공사, 도로공사 등 수많은 사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정산의 진업단 활동은 주변으로부터 많은 이목을 끌었는데, 특히 일본은 일사불란하고 집단적인 진업단의 활동을 항시 경계하고 예의주시하여
322) 『전경』, 교운 2장 35절.
323) 『태극진경』, 3장 99절.
324)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65.
325) 『태극진경』, 3장 105절.
326)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66.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본교는 증산을 받드는 사람인 현 도주 조철제란 사람이 대정(大正) 8년(1919년)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창설한 단체이다. '안심안신, 경천수도'를 요지로 하여 포교에 힘을 기울인 결과 점차 교세가 확장되어 대정 11년(1922년)에 현 지역에 성전(도솔궁) 및 영전(영대) 등 2개의 건축물을 완정하였다. 이를 교본부로 삼고 안심 안신이라는 본지로 수도를 하는데, 제일 먼저 의식주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정 14년(1925년) 교도들로 진업단이라는 노동단체를 조직해서 각지의 교도들을 수리조합, 삼림벌채, 개간사업 등에 종사케 하였다. 또 간척사업을 일으켜서 교도들을 이주시키는 등(간척지는 충청남도 안면도에 두 곳, 원산도에 두 곳, 투자 약 2만여원에 달하여 멀지않아 완성될 것이다.) 오로지 농업노동에 중점을 두고 교도들의 생활안정을 주안점으로 삼았다. 이 노동생활에 근거해서 '안심(安心)을 구했고, 생활의 안정을 얻어 수도를 함으로써 영통(靈通)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기약하고 있다.327)
또한 최근까지 생존하여 진업단의 활약상을 증언하는 사람이 있으니 당시 진업단의 규모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진업단을 구성하여 안면도 2곳(김제방조제, 참새골방조제)과 원산도 간사지 2곳에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간척사업을 하셨다. 진업단은 원산도의 간사지마을 원산염전 4만평과 함께 약 140,000평(46정보)의 농지를 개간하고, 구치(鳩峙)마을 오복염전 2만평과 함께 약 75,000평의 농지를 개간하게 되었다. 구치마을 간사지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원산염전의 간사지는 작업을 하던 중 1935년 일제강점기에 무허가로 개간했다고 하여 보상을 받지 못하고 보령군에 넘어7갔다. 간사지 마을을 다르게 '장'이라 불렀는데 간사지 무극도 진업단 작업 시 '공사장'이라는 명칭이 전해 내려오면서 줄여서 '공장'이라 불렀다고 한다. 간사지 마을에는 그때 진업단의 인부들이 자던 숙소가 약 50평 규모의 토담을 쌓아 만든 초가집으로 있었는데 현재는 그 터에 원산염전을 운영하는 김영권씨가 새롭게 집을 지어 살고 있다.328)
327) 촌산지순, 같은 책, pp.332-333.
328) 김영권의 인터뷰 내용.
정산은 간척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직접 공사장에 가서 단원들을 위로, 격려하였고, 안면도 쇠섬(鐵島)에서 공부설석하고 해변에 단을 모으게 하여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단 위에서 조수의 간만조석(干滿朝夕)을 철야 관찰하며 도수를 보며 백일공부를 하였다.329) 이것을 보면 진업단의 활동이 단순히 현실적인 생업의 필요성만이 아니라 증산의 천지공사와 연관된 내면의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후일(1955년) 일제시대에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운동에 대한 서훈신청(敍勳中請)과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척한 농지에 대해 다시 · 거두어들이라는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330) 1956년에 「· 안면도에 개간한 땅만 가져도 감천 도인 전체가 먹고살기에 충분하리라. 그러나 상제님의 도수가 그렇지 않으므로 못하느니 당분간만 고생을 참으면 머지않아 큰 고생은 면하게 하여주리라.」 331)와 같은 정산의 말을 상기해 보면 진업단의 활동은 돈을 벌어서 일신상의 안락을 추구하기 위한 직업노동이 아니라 현실적인 생업 이상의 어떤 성스러운 의미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35년(乙亥)부터는 일본의 방해공작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완공되어 농토화한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척지에 대해 허가서류가 미비, 불법공사 등 트집을 잡고, 불령선인(不逞鮮人) 집단의 반일(反日)운동이라는 명목으로 이 간척지들을 수탈당하는 사건이 생겼던 것이다. 이로써 안면도 간척지는 왜인 회사인 마생(麻生)의, 원산도 간척지는 보령군(保寧郡)의 소유로 넘어가는 결과가 되었는데 단돈 한 푼의 보상도 없었다. 임원들의 울분에 찬 하소연에 정산은
「망국민(亡國民)의 억울함이 어찌 이뿐이랴? 모든 것이 도수니라. 그러나 이로써 조수와 토지를 조화시켜 해원하였으며 또 많은 빈민이 노임을 얻었고 소작이나마 경작지가 생겨서 구제되었으면 족할 뿐, 그 소유가 누구에게 돌아감
329) 『태극진경』, 3장 106절.
330) 『태극진경』, 6장 49절.
331) 『태극진경』, 7장 95절.
을 탓하랴. 장차 오늘의 시범(示範)을 알게 되리라」 하고 임원들이 서두르는 송사(訟事)를 중지시켰다.332)
1936년에는 일제의 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해 무극도가 해산되었다. 무극도 창도 이후 정산은 도수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쏟아 신도수가 수십만에 이르렀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 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고 선포하였다.333) 도장은 조선총독부에 기증되었다. 정산은 일찍이 진업단을 시작하던 1928년(戊辰)에 「나의 도가 지금 포덕이 많이 되고 있음은 도운성화(道運盛花)의 격국이니라. 그러나 개화(開花)에는 낙화(落花)의 도수가 따르느니라.」 하고, 「무진년래개화기(戊辰年來開花期) 기사정녕만발기(己巳정녕滿發期) 경오신미무한량(庚午辛未無限量) 을병지간낙화기(乙丙之間落花期)」 334)라는 시를 남긴 적이 있었는데, 그대로 실현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정산이 만주 봉천으로 망명(1909년)한 이후로 종교해산령이 내릴 때까지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시대였다. 무극도는 일제의 끊임없는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발전을 거듭하여 1920년대 말에 들어서는 도인의 수가 수십만에 이르는 거대한 종단이 되자 당국의 감시와 탄압도 그만큼 거세어져,335) 결국 무극도가 강제로 해산되는 수난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종교해산령으로 1936년 이후 모습을 감춘 정산은 대외적인 종교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巡廻) 주환(周環)하며 수도하였고, 전주(1937년), 마산(1938년) 등지에서 공부설석하고 도수를 보기도 하였다. 1939
332)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68.
333) 『전경』, 교운 2장 43절.
334) 『태극진경』, 3장 97절.
335) 홍범초, 「일제의 증산종단 탄압과 수난사 개요」, p.212.
년에는 회문리 고가로 가서 회룡재에 설석하고 두문불출하며 공부하다가 1942년부터는 이곳을 회문도장(會文道場)으로 명명하고 1945년까지 계속 공부와 도수에 침잠하였는데 이 시기를 10년 잠룡도수라 한다.
1945년(乙酉) 8월에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정산은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활동을 부활하였다. 1948년에 태극도를 창설하고 본인을 무극도주에서 태극도주로 바꾸었다. 9월에 도본부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고 보수동,감천동(1955년 이후)을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전개하여 새로운 도수에 주력하게 된다. 이 시기의 종교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영대의 신위를 확정하는 일과 시학 · 시법공부를 설법 시행한 것이다.
정산은 1949년 새로이 늘어나는 도인들을 효율적으로 교화 육성하기 위하여 조직을 정비하고,336) 55년에는 도장을 영건하였는데 봉천명일(4월 28일)을 기하여 도장영건과 영대봉안 치성을 아울러 봉행하며 치성에 앞서 몸소 영대를설위하니 그 위차와 배례의 회수는 다음 표와 같다. 337)

1956년에는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출판하여 태극도의 도의 기원338)과
336) 『태극진경』, 5장 22절, 도인을 지도하고 교화할 임원체계를 정비하여 지방임원의 임명기준을 지방 단위로 포덕호수가 5백호 이상은 포감(布監), 그 관하의 150호 이상은 선도사(宣導師), 또 그 관하의 50호 이상은 선도원(宣導員)으로 하였다.
337) 『태극진경』, 6장 10절.
취지339), 도통, 신조의 강령, 요체와 도인의 수칙340)을 발표하였다.
338) 『태극도통감』 은 도주 조정산이 1956년 3월 1일에 도전 박한경(경호)에게 謹抄하도록 한 것이다.「기원(起源)」 道之謂道也者는 定而無極하고 動而太極하야 太極이 生兩儀하고 兩儀生四象하고 四象이 生八卦하나니, 太極之理生生之數는 無盡無量하야 變通造化之功德을 不可思議일새 惟我 九天礱元雷聲普化天尊上帝管領主宰太極之天尊이시라.太極이 生兩儀者는 陰陽也니 陰陽者는 天陽地陰이며 日陽月陰이며 人陽神陰이 是也오, 又有五行相生之理하니 金生水하고 水生木하고 木生火하고 火生土하고 土生金이 是也며, 又有天地人三才之道하니 天開於子하고 地闢於丑하고 人生於寅이 是也라.天地陰陽이 合德하야 萬物이 始生하고 明陰陽이 合德하야 萬物이 育焉하며 人神陰陽이 合德하야 萬有가 歸依하나니 神無人이면 7麥無托而所依하고 人無神이면 前無導而所依하나니 故로 陰陽이 合德하고 三才가 確立하고 五行이 具備하야 調理乾坤하며 統御萬有하나니 至奧至密하며 至玄至妙하야 不可則度_라. 九天上帝觀感萬天하시며 大巡三界하실새 神人依導의 因緣으로 人間에 下降하사 大道의 眞理眞法을 傳하사 九年間天地公事를 行하시고 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帝位에 昇化臨御하시니 卽 姜聖甑山上帝이시다. 盛哉라 道也여 神人依導之眞理로 神人調化 解冤相生 道通眞境之理 具而備焉하니 愼哉 勖哉어다
339) 『태극도통감』, 「趣旨書」 宇宙之宇宙는 元有 基神秘之妙 _ 在乎太極이니 外此·g鳳極로 口太極이요 唯-!!!k二 故로 曰太極也라. 惟是太極也는 至理之所以載也요 至氣之所由行也며 至道之所自 出也라 天地日月之爲天地日月과 風雷雨露之爲風雷雨露와 群生萬物之爲 群生萬物이 何莫非 太極神妙造化之機動作用也리요. 然而 其機動作用之妙는 至奧至密하며 至玄至微하며 無窮無盡하며 無間無息하야 不可則度며 不可思議일새 必有靈聖其人이 往來乎宇宙之間하고 屈伸乎太極之機하며 應證乎神秘之妙하야 管領天地하고 乘行日月하며 調理乾坤하고 度濟衆生者 間千萬年而-出하나니 所言胃與天地合其德하며 與日月合其明하며 與四時合其序하며 與鬼神合其吉凶者也라. 以帝王而來者는 伏羲 檀君 文王也요 以師道而來者는 孔子 釋迦 老子而今我甑山聖師也시라 惟我聖師는 應九天大元造化主神으로 從至氣而願爲大降于世하사 大巡三界而設大公事하시고 分定上下諸司命하사 或以律令하시며 或以法論하시며 或以暗示하시며 或以諷諭하사 隨因緣 說許多方便하시며 神通自在로 試鍊道術로 度世濟衆하사 解放數千百年積積久久 無數無盡之冤唜于4!(k形/4!(k迹之中而無所不用其極하시며 竪大功德하시고 垂大律統하사 優遊陟降하시며 巡廻周環하신 四十年間에 旣了人界事하시고 更立大願念하사 解脫超身으로 往住上界하사 御普化天尊帝位하셔서 統察三界하사 調鍊至運至化하사 以臨無限無量世界하시니 大矣至矣盛矣시니라 惟我奉敎諸子及受緣衆生은 宜卽隨聞隨得하야 體念奉行으로 各盡其心하며 各服其力하야 以承大德하고 以光大道하며 以弘大業으로 崇神大巡遺意하야 以爲依歸之地也일새 此吾太極道之所由設也而惟我道는 以誠敬言 三法言으로 爲修工要諦하고 安心安身 二律令으로 爲修行訓典하야 以誠誠心하고 以敬敬身하며 以信信事로되 先誠吾心하야 以誠他心하고 先敬吾身하야 以敬他身하고 先信吾事하야 以信他事을 刻刻念念에 念念以誠하고 時時律律에 律律以敬하며 地地踏踏에 踏踏以信하야 以吾後天之心之身之事로 照吾先天之心之身之事하고 又以所照吾先後天之心之身之事로 以至乎萬萬億億 吾先先天之心之身之事와 萬萬億億吾後 後天之心之身之事히 久久有感하고 深深有悟하야 透f二界하고 融乎三生則是乃敬天也며 是乃修道也라. 靈之通이 在茲矣며 道之通이 亦在茲矣리라. 凡我有心 有靈 有聞 有緣 諸衆生은 趁趁就道하며 早早從緣하야 同躋乎普化聖域케로 庸此宣辭云爾
340) 『태극도통감』, 도인의 수칙(守則) 1. 국법을 준수하며 사회도덕을 준행하야 국리(國利) 민복(民福)에 기여하여야 한다.2. 삼강 오륜은 음양합덕(陰陽合德) 만유조화(萬有造化) 차제도덕(次第道德)의 근원이라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며 부부화목하야 평화로운 가정을 이룰 것이며 존장을 경례로써 심기고 수하를 애휼지도(愛恤持導)하며 친구간에 신의로써 하여야 한다. 3. 무자기(無自欺)는 도인의 옥조(玉條)니 양심을 속임과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언행과 비리괴려(非理乖戾)를 엄금하여야 한다. 4. 언동으로써 남의 척을 짓지 말며 후의로써 남의 호감을 얻을 것이요 남이나의 덕을 모름을 괘의치 말아야 한다. 5. 일상 자신을 반성하야 과부족이 없는가를 살펴 고쳐 나아가야 한다.
기원은, 도(道)는 정(定)하여 무극(無極)이 되고 동(動)하여 태극(太極)이 되는데,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가 이를 관령 주재하는 천존임을 선언하고 있다. 취지는, 우주(宇宙)의 본연(本然)의 법칙(法則)은 태극이고, 오늘날 이 태극의 기운으로 창생(創生)을 광제(廣濟)하시는 분이 바로 삼계(三界)를 대순하여 대공사(大公事)를 설정(設定) 하신 증산상제님임을 밝히고 있다.
도통(道通)과 강령(綱領) 은
1. 도명(道名): 태극도(太極道) 2. 도주(道主): 정산(鼎山) 조철제(趙哲濟) 3. 도(道)의 원천(源泉): 태극(太極)의 진리(眞理) 4. 신앙(信仰)의 대상(對象):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天曾上帝) 5. 신앙(信仰)의 목적(目的): 진리(眞理)의 도통(道通) 6. 수도(修道)의 요강(要綱) ㉦ 안심(安心) · 안신(安身) · 경천(敬天) · 수도(修道) 성(誠) · · 경(敬) · 신(神) ③ 무자기(無自欺)
이고, 신조는
본도(本道)의 음양합덕(陰陽合德), 신인조화(神人調化), 해원상생(解寃相生),도통진경(道通眞境)의 태극진리(太極眞理)를 면이수지(勉而修之)하며 성지우성(誠之友誠)하야 일단(一旦) 활연관통(豁然貫通)하면 삼라만상(森羅萬象)을 곡진이해(曲盡理解), 무소불용기극(無所不用其極)하야 침지재전(瞻之在前)에 홀연재후(忽然在後)하며 방지즉(放之則)미육합(彌六合)하나니 차소위요체지진경(此所謂要諦之眞境)이니라.
으로 · 발표하였는데, 다시 사강령(四綱領) _ 안심(安心) 안신(安身) · 경천
(敬天) · 수도(修道)과 삼요체(三要諦) -성(誠) · 경(敬) · 신(信)에 설명을 덧붙였다.
1. 사강령(四綱領) ① 안심(安心) 인간(人間)의 기동작위(起動作爲)의 기능(機能)을 주관(主管)함은 심(心)이니 무편무사(無偏無私)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며 진지순전(眞至純全)한 본연양심(本然良心)으로 환원(還元)토록 연마(錬磨)하야 태극원천(太極源泉)에 귀일(歸一)케 하되 유혹(誘惑)에 부동(不動)하고 허영(虛榮)에 불혹(不惑)하야 소기(所期)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토록 상시(常時) 안정(安定)하라. ② 안신(安身) 심(心)의 표현(表現)은 신(身)이니 처신(處身)의 기거동작(起居動作)이 법례(法禮)에 합당(合當)하며 도리(道理)에 적중(適中)케 하고 비의비례(非義非禮)의 허영(虛榮)에 망동(妄動)치 말라. ③ 경천(敬天) 기거동작(起居動作)과 오매사려(寤寐思慮)를 수유불식(須臾不息)하야 항시(恒時) 상제님(上帝)의 관감(觀鑑)하심을 권권복응(권권服膺)하라. ④ 수도(修道) 심신(心身)을 침잠추밀(沈潛推密)하야 대월상제(對越上帝)의 영시(永侍)의 정신(精神)을 취회(聚會)하야 단전(丹田)에 마련(磨錬)하며 영통(靈通)의 통일(統一)을 목적(目的)하야 경지우경(敬之友敬)하며 성지우성(誠之友誠)하야 염념자재(念念自在)하며 각각염념(刻刻念念)하야 지성봉축(至誠奉祝)하라. 2. 삼요체(三要諦) ① 성(誠) 도즉아(道卽我) 아즉도(我卽道)의 경지(境地)에서 심령(心靈)을 통일(統-)하야 만화도제(萬化度濟)에 기여(寄與)할지니 심(心)은 일신(一身)에 군림(君臨)하야 만기(萬機)를 통솔이용(統率理用)하나니라. 고(故)로 일신사려동정(一身思慮動靜)이 유심소도(惟心所到)라 유기심즉유지(有其心則有之)하고 무기심즉무지(無其心則無之)하나니 항상(恒常)면면밀밀(綿綿密密)하며 무간무식(無間無息)하야 유공부족(惟恐不足)하라. ② 경(敬) 심신(心神)의 동작(動作)을 받아 일신상(一身上) 예의(禮儀)에 적중(適中)케 행려(行勵)하라. ③ 신(信) 일심소정(一心所定)에 이해(利害) 사정(邪正) 편의(偏倚)로 개역(改易)변천(變遷) 차착(差錯)이 무(無)하며 불일이이(不一以二)하고 불삼이삼(不三以三)하며 불피이차(不彼以此)하고 부전이후(不前以後)하야 통만고(通萬古) 여사시주야지 무위(如四時書夜之無違)하고 경만겁(經萬劫) 여하악지부동(如河岳之不動)하야 여기이지(如期而至)하고 여한이정(如限而定)하야 진지이진(進之以進)하며 성지우성(誠之友誠)하야 소기목적(所期目的)에 달(達)케 하라.
이 내용은 사실 1925년 무극도 창도 당시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편집 방법 면에서의 약간의 차이만 있을 뿐 내용의 큰 골격은 대동소이한 것이다.
1957년에는 감천에 대강전을 짓고 영대봉안 치성 시에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였는데, 후일 정산의 화천 시 정산으로부터 유명으로 종통계승을 받은 도전도 이 영대 봉안도를 기준으로 모두 영대봉안을 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1957년 11월에 이르러 정산은 자신의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의 정수이며 결실이라고 표현한 시학 · 시법공부를 시행하였다. 『전경』 에는 다 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도주께서 이해 十-월에 도인들의 수도공부의 설석을 명령하고 공부는 시학(侍學) 시법(侍法)으로 구분케 하고 각 공부반은 三十六명으로 하며 시학은 五일마다 초강식(初降式)을 올리고 十五일마다 합강식(合降式)을 올리며 四十五일이 되면 봉강식(奉降式)을 행하게 하고, 시법은 시학공부를 마친 사람으로서 하되 강식을 거행하지 않고 각 공부 인원은 시학원(侍學員) 정급(正級) 진급(進級)의 각 임원과 평신도로서 구성하고, 시학원은 담당한 공부반을 지도 감독하고 정급은 시간을 알리는 종을 울리고 진급은 내빈의 안내와 수도처의 질서 유지를 감시하여 수도의 안정을 기하게 하고, 시학관(侍學官)을 두어 당일 각급 수도의 전반을 감독하도록하셨도다.341)
정산은 1957년 동지치성(冬至致誠)을 마치고 전 임원에게 「내 이제 50년공부를 종필할 도수니라. 도의 규모가 무극도 때만 못하고 성전도 옥경대를 본뜬 태인도장만은 못하나 원래 허는 외화내빈(外華内貧)한 법이라. 대강전도 이만하면 쓰리로되 앞으로 남은 일은 도인들의 수심연성(修心錬性)과 천지음양(天地陰陽) 이기(理氣)에 대응상속(對應相續)하여 대강과 도통의 전제가 되는 진법공부 한 가지 뿐이니라. 내가 50년공부로써 이룬 광구천하의 공부법방이니 유일무이한 진법(眞法)이요, 진법(陳法)이며 천지대학(天地大學)이요 청학이니라. 이는 삼십육궁도수(三十六宮度數)니 임원들은 이 일을 명심하여 받들어 행하되 우선 각 방면 책임자는 관하도인 중에서 신심과 정성이 두터워 공부할 만한 사람을 임선하여 그 명단을 일주일내로 제출하라.」 342)고 하였다. 이후 수도사무원들에게 공부 방법을 상세히 가르쳐 어느 날 자시(子時)부터 시학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자신은 법단에서 백일공부를 시작하였다.
공부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공부반은 밤 10시에 영대에 올라가 봉심행사(奉審行事)를 봉행한다.2. 전일반(前日班)과 후일반(後日班)의 교체시각은 저녁 11시로 한다.3. 공부반원은 공부실에서 지정된 주문을 봉송한다. 4. 각 반원은 지정시각, 지정 공부실에 들어가되 전(前) 반원이 물러나는 자리에 부복, 궤좌, 분향한 다음 법좌하여 좌배하고 전반원의 송주(誦呪)가 끝남과 동시에 지정된 주문을 한 시간 연송한다. 5. 소정시간이 끝나면 들어오는 반원에게 자리를 비켜주고 법좌 송주를 계속하다가 그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송주를 마치고 좌배, 심고(心告)한 다음 되실 한다. 6. 지정주문을 연송하기 전에 봉축주 1회, 태을주 각 4회를 봉송하되 갑 · 병 · 무 · 경 · 임(甲丙戊庚壬)의 양일(陽日)에는 태을위 시 (太乙爲始)로 · 을 · 정 · 기 · 신 · 계(乙丁己辛癸)의 음일(陰日)에는 기도위시(祈疇爲始)로 하여 일진의 음양에 맞준다. 7. 평일의 진 · 술 · 축 · 미시(辰戌丑未時) 4회와 주일의 자 · 오묘· · 유(子午卯酉) 진 · 술 · 축 · 미시(辰戌丑未時) 8회의 기도는 전 반원이 합동으로 한 시간을 모신다. 주문을 평상시 봉송한 다음 기도주와 태을주를 일진음양(日辰陰陽)에 맞추어 호선(互先)로 반시간씩 연송한다. 다만 그 시간에 공부한 반원은 다음 시간에 보충기도를 모시되 평상시처럼 한다. 8. 공부를 마친 반은 밤 11시에 합동으로 영대에 올라가 봉심행사를 봉행한다.
341) 『전경』, 교운 2장 62절.
342) 『태극진경』, 8장 83절.
다시 첨부하여 설명하면, 남자수도인 12명, 여자수도인 12명, 남녀 구분 없이 임원급 12인 총 36인이 한 반을 이룬다. 임원급 중에 책임자인 시학원 1인, 정급 2인, 진급 3인이 있고 나머지 6인은 회원이다. 이 36인이 한 반을 이루어 하루씩 공부를 한다. 남자수도인 1명, 여자수도인 1명, 임원급 1명이 한 조가 되어 각기 다른 정해진 장소에서 일정한 주문(3인의 주문이 다르다)을 1시간 동안 염송하고, 1시간이 지나면 다음 조와 교체하는데 이때 주문은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게 한다. 12조이므로 하루에 2시간씩 담당하게 되고 그 나머지 시간도 일정한 공부과정이 있어 24시간 동안 수면 없이 공부한다. 다음날 자시가 되면 같은 형태로 다음 반이 교체되니 24시간 365일 주문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5일이 지나면 이전 5일 동안 공부했던 인원이 동시에 모여 초강식을 봉행하고, 15일째 되는 날은 앞의 초강식반 3개 조가 모여 합강식을 봉행한다. 다시 합강식 3개 조가 모여 봉강식을 봉행한다.343)
343) 『진경전서』, 9장 16절, 봉강식에는 다음의 주문을 함께 봉송한다. 봉강문(奉降文) 대강식(大降式)은 생략하옵고 후일을 기하오나 날자나 기념하기 위(爲)하옵서 봉강 중이오니 봉강식으로 현알(見謁)올리옵니다. 금수대도술(禽獣大道術) 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인간대적선(人間大積善) 시호시호(時乎時乎) 귀신시호(鬼神時乎) 시구시구(矢口矢口) 조을시구(鳥乙矢口)제호 제반 刈1立刻1 〈한 반의구성 인원〉 1958년에는 시학공부를 시작할 때 함께 명한 시법공부를 시행하였다.시법 반은 전에 시학공부를 마친 사람들이 동일하게 모여 동일한 반 편성을 하게 되는데,사람이 교체되면 안된다.시법반의 공부 방법은 시학과는 다르다.시 법반은 삼인일석(三人一席)으로 진행하는데,책임자,정급,진급,회원 등의 조 장 1인과 남자 수도인과 여자 수도인 각 1인씩 3인을 1조로 하여 총 12개조 가 되어,각 조가 오전,오후에 각 한 시간씩 순차로 시법공부실에 들어가 중 양에 조장 그 우측에 내수,좌측에 외수가 횡렬로 법좌하고 진법주를 합동으 로 연송하며 공부한다.시법공부의 교체방법,인원점검,봉심행사,기도방법, 시간교체,대기 등은 전부 시학공부방법과 동일하나 강식을 봉행하지 않음이 시학공부와 다르다. 정산은 이 공부 법방을 자신의 50년 공부의 결정,삼계 광구의 유일한 진 법344)만고에 없는 법방345),도의 생명인 동시에 널리 세상을 구제할 오직 하 대강대강(大降大降)해원신(解寃神)
시학반 편성표(侍學班 編成表)
344) 『태극 진 경』,8장 108절.

나뿐인 진법이라고 강조했다. 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통인데, 수도 없는 도통이 없고, 진법 없는 법방이 없으며 법방은 도통의 첩경이요, 기초동량(基礎棟樑)이라는 것이다.346) 또 이 법방은 개인의 도통성취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도 단 곧 전체 도인을 위하고 나아가 군생광구(群生匡救)를 위한 법방이며347), 총체적으로 천지 우주의 구성과 운행의 도수인 동시에 개별적으로는 반원 각자의 기도 수련의 정진이다.348) 그러므로 정산에게 있어 자신이 만든 이 법방과 견줄 법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간에 수도인도 많고 공부군도 많으나 진법 의 법방이 아닌데 수도하면 무엇하고 공부하면 어찌 하리요.」 349) 「내가 설한 공부 법방은 전만고(前萬古) 후만고(後萬古)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뿐인 진법이므로 다른 날 누가 아무리 모방한다 하여도 그것은 가법(假法)일 뿐이니라」 350)고 한 것처럼 전후고금에 유일무이한 법방인 것이다.351)
그러므로 시학을 마치고 시법만 하면 누구나 도통의 경지를 찾아 선경에 참여할 수 있고352), 사람이 죽으면 중천신(中天神) 또는 황천신(黃泉神)이 되나 시학과 시법을 마치면 죽더라도 선경의 신명이 될 수 있다353) 하였다. 「이 공부를 잘하면 나와 서로 문답할 날이 있으리라. 그리고 이 방은 선방(仙房)이니 너희들은 구천상제님께서 말씀하신 신선을 보게 될 것이며 너희들이 곧 신선이 되리라.」 354) 오직 이 공부를 통해서 신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공부에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아니 되는 엄격성이 요구되었
345) 『태극진경』, 8장 110절.
346) 『태극진경』, 8장 108절.
347) 『태극진경』, 8장 119절.
348)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219.
349) 『태극진경』, 8장 109절.
350) 『태극진경』, 8장 123절.
351) 『전경』, 교운 2장 18절, 도주께서 통사동(通士洞) 재실에서 어느 날 「오도자 금불문 고불문지도야(吾道者今不聞古不聞之道也)라 믿고 닦기가 어려우니라」 하시고 다시 추종하는 여러 사람들을 앞에 모으고 무극대운(无極大運)의 해원상생 대도(解冤相生大道)의 진리를 설법하시어 도(道)를 밝혀 주셨도다.
352)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218.
353) 태극도편집원, 같은 책, p.219.
354) 『태극진경』, 8장 101절.
다. 어느 날 공부반 녹명지의 착오가 있자 정산은 도장 내에 있는 전 임원을 급히 불러 안마당에 꿇어앉히고 너희들이 내 50년 공부를 망치려 드느냐? 너회는 때를 금년이냐 명년이냐 하고 기다리지마는 나는 푼각을 두고 다투느니라. 왜 녹명지를 제 시각에 올리지 않았느냐? 내가 50년 공부로서 만고에 없는 이 법방을 짰는데 만약 도수를 어기면 내가 50년 공부를 다시 하여야 하리 니 그 책임은 누가 지며 그 죄는 무엇으로 대신 할 것이냐?』 라고 꾸짖고,355) 「앞으로 더욱 명심하여 분초의 차착도 없이 하라. 더욱이 공부는 우리도의 생명인 동시에 널리 세상을 구제할 오직 하나뿐인 진법임을 재삼 명심하라」 356)고 강조하였다.
이상과 같이 1957년 11월에 행해진 시학 · 시법 공부는 정산 자신의 말처럼 정산의 종교 활동의 열매이자 결정체이다. 그것은 1909년 구천상제의 화천과 더불어 신양적 과제로서 남겨진 '도통'이 바로 정산이 제시한 수행방법을 통해서 비로소 실현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정산이 제정한 시학 · 시 법공부는 신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제도적 초석을 다진 것이라 하겠다. 증산의 말 가운데 「천지의 조화로 풍우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 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三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다 하느니라」 (『전경』, 교운 1장 35절)고 한 것을 상기해 본다면 정산이 내놓은 공부들은 곧 도통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길잡이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357)
355) 『진경전서』, 8장 76절.
356) 『태극진경』, 8장 110절
357) 대순종학교재연구회, 같은 책, p.113.
시학 시법 공부법을 설법하여 수도 공부의 모든 법제를 완료하고 백일공부를 마친 정산은 그 직후인 1958년(戊戊)에 정산은 모든 종교활동을 마감하고 화천하였다. 정산은 1958년 2월 하순경에 최고 간부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박한경을 도전으로 임명하고,358) 유명으로 종통을 전수하여 도의 운영 전반을 물려주었다. 세수는 64세이다.
도주께서 정유년 十-월 二十-일 자시부터 무술년 三월 三일까지 도장에서 불면불휴하고 백일도수를 마치시니라. 五일에 심히 괴로워 하시므로 한의사와 양의사를 불러왔으되 「때가 늦었도다」 고 이르시니라. 도주께서 이튿날 미시에 간부 전원을 문 밖에 시립케 한후 도전 박한경을 가까이 하고 도전의 머리에 손을 얹고 도의 운영 전반을 맡도록 분부를 내리고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 금지 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고 말씀하시고 다시 문밖을 향하여「도적놈」 을 세번 부르시더니 화천하시니라. 무술년 三월 六일 미시요. 양력으로 -九五八년 四월 二十四일이요. 수는 六十四세로다.359)
정산은 1909년 봉천명으로부터 1958년까지 종교활동을 행하였는데, 그 연수는 총 50년에 이르는 대장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라고 한다. 이 표현은 증산의 말에서 유래한다.
상제께서 어느날 류찬명과 김자현 두 종도를 앞세우고 각각 십만인에게 포덕하라고 말씀하시니 찬명은 곧 응낙하였으나 자현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상제의 재촉을 받고 비로소 응낙하느니라. 이때 상제께서 「내가 평천하할 터이니 너희는 치천하 하라. 치천하는 오십년 공부이니라. 매인 이 여섯명씩 포덕하라.」 고 이르시고 또 「내가 태을주(太乙呪)와 운장주(雲長呪)를 벌써 시험해 보았으니 김병욱의 액을 태을주로 풀고 장효순의 난을 운장주로 풀었느니라.」 고 말씀하셨도다.360)
358) 『전경』, 교운 2장 64절.
359) 『전경』, 교운 2장 66절.
360) 『전경』, 행록 3장 31절.
는 구절에서는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평천하 후에 지천하 50년 공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또
상제께서 六월 어느날 천지공사를 마치신 후 「포교 오십년 공부종필(布敎五十年工夫終畢)」 이라 쓰신 종이를 불사르시고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윤(伊尹)이 오십이 지 사십 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를 깨닫고 성탕(成湯)을 도와 대업을 이루었나니 이제 그 도수를 써서 물샐틈 없이 굳게 짜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하셨도다.361)
포교 즉 증산의 가르침을 펴는 일이 오십년 공부인데, 이윤의 일로서 도수를 삼아 물샐틈없는 도수를 짜 놓았다는 것이다.
증산이 화천 할 때 종도들에게 종통을 내리지 않았던 이유를 이 단락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수제자인 김형렬은 1862년생으로 나이가 증산보다 10살이 많아 1931년에 선화한다. 차경석, 고 부인 같은 경우도 1880년생으로 증산보다 나이가 10살 어렸지만 고 부인은 1935년에, 차경석은 1936년에 선화하며, 가장 오래 살았던 안내성은 1867년생으로 1949년에 선화한다. 증산의 지천하 50년을 위해서는 종도들이 이미 나이가 들어 할 수 없었기 때문에 50년 도수에 맞는 정산에게 종통을 준 것이 아닌가 유추해 본다.
그 도수는 중국 은(殷)나라 초기의 재상이었던 이윤(伊尹)이 50년이 되어서야 49년 동안의 삶이 헛되었음을 깨닫고, 그동안 실행할 여건이 되지 못해 마음으로만 품고 있었던 뜻을 성탕(成湯)과 함께 펼쳤다고 설명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윤은 의(義)가 아니고 도(道)가 아니면 천하를 녹으로 준다 해도 돌아보지 않고, 수천 필의 말을 준다 하여도 거들떠보지 않았을 정도로 성품이 강직했다. 이윤의 성품을 알아본 당임금은 정중히 폐백을 갖추어 그를 초빙하려하였으나 여러 번 당임금의 호의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같은 그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당임금은 이윤 같은 어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수차례에
361) 『전경』, 공사 3장 37절.
걸쳐 이윤에게 자신의 신하가 되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자 이윤이 당임금을 도와 은나라의 재상이 되었고, 당임금이 정치 · 교육 · 문물을 완비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오십이지사십구년지비(五十而知四十九年之非)란 그 같은 이윤의 인품과 더불어 성탕(成湯)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묘사한 고사이다. 정산과 증산의 관계는 이러한 성당과 이윤의 관계로 대비해 볼 수 있다. 이 때 정산의 업적은 이윤의 경우처럼 성당을 도와 새 나라를 정비한 것과 같이, 묵은 하늘을 뜯어고쳐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어서 그것을 제도화 · 현실화시키는 길을 마련하였던 것이다.362) 정산은 증산이 9년 공사로 도수를 짜 놓았고, 자신은 그것을 기틀로 오십년공부종필로 수도 법방을 완성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산은 봉천에서 구국제세에 뜻을 두고 남모르는 공부에 진력하던 중, 1917년 증산으로부터 계시로서 기도주. 태을주 · 운장주 · 칠성주 · 오주 등의 주문을 받고 감오득도하였다. 귀국한 정산은 1919년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비밀리에 남긴 현무경과 주문이 담긴 봉서를 전해 받게 되었는데, 정산에게는 이것이 증산으로부터의 종통계승의 확고부동한 증표였다. 증산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공부와 도수에 주력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전교 발표 후 1925년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 치마바위가 있는 곳에 도장을 건설하고 종단 무극도를 창도하였다. 이때 정산은 신앙의 대상을 구천 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정하고, 신조, 사강령, 삼요체를 발표하여 이론적 교리체계를 완성하였다. 도의 기구(機構)와 조직체계를 완비하고, 치성의 절차순위(節次順位)와 입도치성은 법제하여 의식 의례를 기초하여 종단의 기본골격을 완성하였다. 또 많은 신도들이 모이자 종
362) 최동희 · 이경원 공저, 『대순진리의 신앙과 목적』, 대순사상학술원, 2000, p.118
교적 신념의 사회실천운동으로서 진업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진업단은 수리 또는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간척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은 산업을 장려하여 도가의 생활안정과 빈민구제를 위한 활동이었으며 나아가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 사회에 구현하는 하나의 실천항목이었다.
일제의 종교해산령으로 1936이후 모습을 감춘 정산은 대외적인 종교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전국 명산대천을 순회(巡廻) 주환(周環)하며 수도하였고. 전주(37년), 마산(38년) 등지에서 공부설석하고 도수를 보기도 하였다. 1939년에는 회문리 고가로 가서 회룡재에 설석하고 두문불출하며 공부하다가 1942년부터 이곳을 회문도장(會文道場)으로 명명하고 1945년까지 계속 공부와 도수에. 침잠하였는데 이 시기를 10년 잠룡도수라 한다.
1945년(을유년) 8월에 조국광복을 맞이하여 정산은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활동을 부활하여 1948년에 태극도를 창설하였다. 도본부를 경상남도 부산시에 설치하고 보수동, 감천동(1955년 이후)을 중심으로 종교 활동을 전개하여 새로운 도수에 주력하게 된다. 이 시기의 종교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시학 시법공부를 설법 시행한 것이다. 이것은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이 집약된 공부방법으로 정산의 오십년 공부 종필의 결실이었다.
정산의 종교적 사명은 증산의 유지를 파악하여 그 사상을 세상에 천명하고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증산이 9년간의 천지공사를 통해 후천선경을 이루어지는 도수를 짜 놓았다면, 정산은 그 도수에 맞게 현실화될 수 있도록 모든 신앙적 법제를 갖추는 것이다.
정산의 전 생애는 특히 감오득도와 봉서인수 이후 종교활동 과정은 고행에 가까운 수많은 공부와 도수를 보는 것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것은 기존의 많은 종교가가 신력을 얻기 위해 또는 심경 고백을 통한 절대자와의 합일을 위해 기도에 치중했던 것에 비해서 볼 때 특이한 점이라 할 것이다. 특히 증산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종도들이 우연한 신비적 체험에 의해 그리고 막연한 어떤 기대감에 의해 준비 없이 교단을 장립하였던 것에 비하면 증산의 계파 내에서도 매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증산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정산에게 있어서도 공부의 뜻은 일반적인 공부의 의미와는 매우 다르리라 생각된다. 기존의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차원이 분명 아니다. 정산은 어린 시절 당시 학문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내용을 이미 간파하고 13세 이후에는 남들이 알지 못하는 또는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차원의 공부, 즉 남모르는 공부를 지향하고 매진했던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증산의 공부는 우주의 전모를 세세히 살피는 것, 그리고 잘못된 부분을 어떻게 조화하여 고칠 것인가 계획하여 결정하는 것, 신명을 조화하고 도수를 정리하는 일련의 과정 등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산은 아마도 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파악하고, 그리고 그 도수에 맞추어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증산의 천지인 삼계를 망라한 천지공사가 인간의 영역이 아니며 인간이 이해하기 쉬운 일이 아니듯이 정산의 공부와 도수도 이해하기 어렵다.
무극도 창도 이전에는 백일공부 등 공부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뒤로 갈수록 도수를 풀어가는 내용이 많아진다. 이것은 초기 즉 감오득도와 봉서인수 이후에는 증산의 천지공사 내용이나 봉서의 내용, 증산이 짜 놓은 도수 등을 파악하는 과정이 필요하였고, 이후에는 그것을 풀어가고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
인 것으로 짐작된다. 또 일제의 종교해산령 이후 10년간의 잠복기에도 공부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것으로 관찰된다. 이로 볼 때 무극도 창도나 태극도 창도 등 중요한 일 전에 상당한 준비가 선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탄생과정에서의 신이한 현상, 우국충절 정신의 가풍, 타고난 총명함으로 인한 남다른 공부의 진전, 남모르는 공부를 향한 집념, 증산이 화천하던 해인 1909년 봉천명 후의 구세제민을 위한 9년간의 입산공부 등은 증산으로부터 계시를 법巨 丁 있는 조건이 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증산이 요구하는 어떤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증산으로서는 도수에 맞추어 자신의 일을 감당할 존재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준의 능력을 배양할 필요가 있었고, 정산은 자신의 노력으로 일정한 정도에 부합될 때 그에 상응하는 기운과 합치되는 것이다. 마침내 계시를 받고 감오득도에 오름으로써 봉천명의 시기는 마무리된다. 따라서 봉천명에서 감오득도에 이르는 시점은 정산의 입산공부와 그에 상응하는 증산의 계시로 대표될 수 있겠다.
귀국 후 일정 기간은 증산의 행적과 계시 내용의 전모를 파악하는 시간으로 보인다. 안면도 우일재에서 공부(1917. 10~1918. 10)하면서 증산이 공사를 본 정읍 객망리, 모악산의 대원사, 김제의 금산사와 동곡약방 등을 두루 답사하였다. 이는 증산이 九년 동안 이룩한 공사를 밟은 것이고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좇은 것이다.363) 정산은 인세에서 증산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확인과정을 거친 것이다. 그러나 황새마을 공부처에서 수도 공부
363) 『전경』, 교운 2장 10절.
(1918. 1(广1919. 1. 15)하면서 초패왕 원칙을 풀었다364)는 것은 감오득도에 의해 증산의 해원공사를 이해하고 이미 초보적 수준의 공사를 이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산의 공사는 도수가 부합되어 그때가 되어야 그 일이 진행된다. 그러므로 정산이 귀국하여 봉서를 인수하기 전 증산의 여러 행적과 공사를 확인한 것도 진행상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정월 보름 봉서를 인수받은 이후 무극도 창도 전까지의 수년간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공부와 수많은 백일공부, 도수공부가 진행된다. 구전되거나 기록된 정산의 행적에서 온갖 공부나 도수를 본 시간을 연결해 보면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다. 거의 모든 시간이 공부와 도수로 채워진다고 할 수 있다. 본소에서 봉서인 현무경과 주문서를 받들고 곧바로 시작한 백일공부(1919. 1. 20~1919. 5. 초)는 봉서의 진리를 체득하고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도수에 따라 진행하여야 할 모든 것을 파악하는 공부로 생각된다. 이것은 백일공부를 마치고 「이번 공부로 천서의 진리를 체득하여 이제 진주(眞主)로서 구천의 도수에 따른 대도(大道)를 선포하여야 할 방책이 확립되었다」 365)라고 한 정산의 말에서 확인된다. 그 이전은 계시를 받고 이를 확인하는 준비단계였다면, 이때부터는 증산이 정한 도수를 순차적으로 이행하는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창도 준비의 본격적인 시작인 것이다.
이 백일공부에 이어서 바로 구성산 학선암에서 백일공부(1919. 5″1919. 윤7. 그믐)를 하고, 다시 통사동 영모재에 공부설석하여 증산이 남긴 둔궤를 가져온 후 둔궤도수공부를 시작하였다. 한달 후에는 둔궤를 함안 용화산 반구정366)에 옮겨 모시고 백일공부(1919. 10~1920. 2. 중순)를 하는데, 낮에는 공부
364) 『태극진경』, 2장 36절, 「나는 오늘 초패왕(楚霸王)의 원칙을 풀었노라. 이제 후천 해원도수의 이 공사로써 그 원칙을 풀었으니 이로부터 인간세상의 모든 원칙이 차츰 풀리어 상생(相生)의 새 판국이 열리리라. 천지간의 원칙이 신명과 사람 사이에도 쌓여 있고 또 나라와 나라 사이 금수초목(禽獸草木)까지 없는 곳이 없어서 군생(群生)이 척신 망령에 시달림을 받으니 어찌 영일(寧日)이 있으리요. 그러나 이 해원도수에 따라 모두 해원 광구되어 장차 5만년 청화선경(淸華仙境)이 절로 이루게 하리라.」
365) 『태극진경』, 2장 57절.
366) 반구정은 정산의 13대조 두암공(斗巖公)이 임진왜란 때 곽재우장군 등과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의거하여 전공을 세우고 정란 후 만년에 낙동강과 정암강이 합류하는 도흥진 옆 층암절벽 위에 지은 정사(精舍)로서 두암공이 시와 글을 즐기며 때로 곽재우, 장현광 등 오래 사권 벗들과 함께 경(經)을 토론하고 시를 읊던 곳이며 공의 묘사재실(墓祀齋室)이다. 집의 뒤와 왼쪽, 오른쪽에는 용화산의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수목이 울창하며 집 앞에는 절벽아래 낙동강이 흐르고 강 건너에는 남지에서 수산으로 이어지는 강변평야와 이를 둥글게 에워 싼 종남산, 화악산, 화왕산의 전망이 절경을 이룬 곳이며 사람의 발결1이 닿지 않아 조용한 곳이다(『태극진경」, 2장 79절)
하고 밤에는 낙동강 백사장에서 검무(劍舞)도수 공부를 하였다. 직후 다시 반구정에서 낮에는 수도공부, 밤에는 백사장 단 위에서 검무도수 공부(1920. 5.초순~1920. 8. 중순)를 하고, 이어 안면도 쇠심에서 100일간 단(壇)도수 공부를 하였다.(1920. 9. 말~1921. 2. 중순)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단 위에서 반구정에서와 같이 검무도수를 보는데, 그 혹심한 고행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다시 변산반도 최석래 집에 공부설석하여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그 집 후원에 설치한 단 위에서 단도수와 검무도수를 보다가(1921. 2. 그믐 ~) 4월 중순 통사동 공부처로 가서 수도하였다.(1921. 4. 중순~ 1921. 8. 중순)
이 해 봉천명 치성 후에는 「내가 13년 전 오늘 천명과 신교를 받들어 모신 이래 구천상제님께서 물샐 틈 없이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 맞추는 공부에 진심갈력(盡心竭力)하여 이제 그 도수의 제1단계 공사를 성취하였노라. 대저 상제님의 도수는 현묘하고 심오한 진리로서 이루 다 형언할 수는 없지마는 그 원강(原綱)은 오직 무극대도(无極大道)라. 천명 · 천서 · 천보의 삼천대운(三天大運)에 부합하여 수많은 도수를 마쳤으니 이는 내가 구천상제님의 도통 계승자임이 실증됨이라. 이에 나 스스로 무극대도의 주인임을 세상에 고하노라」 하고 도주의 위격으로 올랐다고 한다.
이후 증산의 성골(聖骨)을 통사동 공부처로 옮겨와 모시고 삭망(朔望)도수를 보았는데, 성골를 모신 공부실에서 이 도수에 따른 백일공부(1921. 9. 5~1921.12. 중순)를 하였고, 원납()願納)도수로 도장영건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서울 도화동에서 제1차 서울도수 백일공부(1922. 3. 중순~1922. 윤5. 말), 돈암동에서 제2차 서울도수 백일공부(1922. 6. 초~1922. 9. 중순), 적선동에서 제3차
서울도수 백일공부(1922. 9. 중순~1923. 1. 1), 밀양 세천리에서 둔도수, 납폐도 수로 백일공부(1923. 1. 중순~1923. 4. 말), 유천리 장득원의 집에서 단도수를 보며 진인보두법(眞人歩斗法)으로 백일공부(1923. 5. 초~1923. 8. 중순), 청도화악산 적천사 도솔암에서 진인보두법으로 백일공부(1923. 8. 중순~1923. 11. 말), 무극도 창도 직전인 1924년에는 밀양 종남산 영성정에서 납폐도수로 보던 백일공부를 반구정에서 마치고(1924. 5. 초~1924. 8. 중순) 정산을 따르는도인들도 각자 십만 장씩의 납폐지를 소화하도록 하였다. 반구정에서 공부를 마친 후 대구 남산정(南山町)으로 가서 공부하며, 수시로 팔공산으로 가서 엽총으로 사냥하고는 「내가 지금 이 총을 발사하여 산을 울리게 함은 12월은축(丑)이고 구(邱)는 언덕이니 소가 언덕에 비비는 격도 되지마는 후일 나라의 운이 어려울 때 이곳 대구가 대구(大救)의 보루가 되어 나라를 구할 언덕이 되게 하려 함이니라.」 는 말을 하였다.367) 그 뒤 9월에 홀로 만주 노고산과 중국 강동지방 등 망명 당시 공부하던 곳을 두루 순행하며 도수를 본 후에 대구로 돌아왔다. 1925년 1월에 칠원의 무릉에서 공부하였다.
이상으로 봉서를 인수한 이후 정산이 백일공부와 도수를 보는 시간을 연결해 보면, 거의 쉬는 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연결 된다. 오로지 공부와 도수의 연속이었다.
무극도 창도 이후에도 공부와 도수는 계속되었다. 1926년 3월에 담뱃대도 수368)라 하며 담배통과 물부리에 태극문양을 새긴 크고 작은 담뱃대 여러 개를 맞추게 하여 임원들에게 그 직위에 따라 나누어주고 일반도인들에게도 이
367) 『태극진경』, 3장 66절.
368) 증산이나 정산에게 있어서는 도수를 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행위나 의식이 필요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에 의해서 천지우주에 어떤 변화를 꾀하고 그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이 증산 정산의 해법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1926년 당시 조선인의 종교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작성된 『무극대도교개황』 의 기록을 보면 「신도는 두루마기 겨드랑이 아래를 꿰매고, 반원(班員) 이상은 태극문양이 있는 담배대를 소지하여 그 신도임을 증명하여야 하며 한다」 고 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당시의 정산에게 있어 도수에 따른 한시적으로 행한 의식행위였으나, 이 책에서는 무극도 전체의 단체행동으로 착각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데, 다만 우리는 여기서 당시에 그러한 도수가 실제로 행해졌음을 제 3자의 눈과 기록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러한 담뱃대를 지니게 하였다.369) 이 해 여름에는 금강산도수의 전제라고 하며 서울 도염정에서 백일공부를 마치고 이어서 유점사에서 금강산도수로 백일 공부를 하였다. 이때 밤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낮에는 시종이나 안내 없이 홀로 산에 올라 도수를 보았다. 1927년 9월에는 통사동 재실에 설석하고 백일 공부로서 주(籌) 도수를 보았다. 주대를 올려놓는 판[籌板]은 오동나무, 주대는 대나무로 만들었는데, 주대를 판 위에 굴리면 그 소리가 밖에까지 울리고 밤에는 주대에서 섬광이 일어났으며 주판 표면의 한 부분이 타기까지 하였다.370) 1928년 정산이 진업단을 조직하고 나서, 도중에서는 진업단원이 어느 사업장에서도 성경신(誠敬信)을 신조로 근무하므로 신임을 얻고 좋은 실적을 거두니 이를 단원도수(團員度數)라 하였다. 이해 8월 추석치성 후에 말씀하시기를 「나의 도가 지금 포덕이 많이 되고 있음은 도운성화(道運盛花)의 격국이니라. 그러나 개화(開花)에는 낙화(落花)의 도수가 따르느니라.」 371)라고 하여 앞으로 몇 년 후 어려움이 닥치리라는 내용의 낙화(落花)도수를 분부하였다. 1931년 겨울에는 도장 동편 오리허(五里許)에 있는 관왕묘(關王廟)의 관왕 상(關王像) 앞에 병풍을 치고 마루에서 백일공부를 하며 추운 겨울임에도 불을 때는 것을 금했는데, 관왕상의 수염이 없어졌으므로 후에 복원하였다 한다.1933년에는 안면도 쇠심에서 조수의 간만조석 도수로 백일공부(1933. 봄~1933.5)를 하니, 낮에는 공부실에서 수도하고 밤에는 단 위에서 조수의 간만조석(干滿朝夕)을 철야 관찰하며 도수를 보았다. 1934년 새해아침 인덕도수라 하며 전 도인에게 각자 납폐지 십만 장씩을 100일 이내에 소화하도록 하였다. 이후일제의 종교단체 해산령으로 인덕도수와 잠복도수를 말하고 「그대들은 포덕하여 제민하였도다. 각자는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처자를 공양하되 찾을 날을 기다리라.」 한 다음 잠룡도수에 들어갔다.
369) 『태극진경』, 3장 89절.
370) 『태극진경』, 3장 94절.
371) 『태극진경』, 3장 97절.
무극도 해산 이후의 잠복시기는 한 단계의 도수가 끝나고 다음으로 전환하기 위한 준비기라고 할 수 있다. 무극도 도수가 지나고 태극도가 시작되기 전의 과도기, 전환기인 것이다. 이 시기에도 정산은 극심한 고초를 겪으며 공부와 도수에 전념하였다. 1936년 전주, 1938년 마산 교방동의 공부 이후 1939년 가을 회문리 고가로 가서 회룡재에 설석하고 두문불출하며 공부하였다.
이때는 일본의 폭정이 극에 달하여 경제적 수탈과 정신적 압박이 극심하였다. 심지어 민족 고유의 성명마저 고쳐서 바꾸도록 강요하였으나 정산이 끝까지 거부하니, 일본은 재산 소유권을 박탈하고 배급제로 한 식량, 비료 등 생활필수품에 이르기까지 압박을 가하였다. 더구나 경찰에서는 정산의 가족이 과거에 항일운동을 한 전력을 내세워 감시대상으로 정하고 일체의 행동을 감시 단속하였다. 정산의 삼촌인 서산공은 이를 감당할 수 없어 다시 만주 또는 일본으로 떠돌아다니기도 하였다. 농작물은 수확하면 전부 공출(供出)로 빼앗기고 식량은 잡곡과 대두박(大呈粕)이 배급될 뿐이며 경찰의 감시가 심하여 행동의 부자유는 물론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어 생활의 궁핍함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372)
정산은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룡재에서 주공부(籌工夫) 등의 공부에 진력하였다. 추운 날씨에도 회룡재 공부실에 불을 때지 못하게 하고 법좌하여 법수 두 그릇을 양쪽 손에 받쳐 들고 철야 공부하였다. 법수가 넘쳐 손에는 고드름이 달리고 발은 동상으로 터져 배접을 하였으나 그 겉에 피가 맺혔으며 손과 발에는 얼음이 박혀 부어올랐다. 이용직이 이를 보고 참을 수 없어 명령을 어기고 몰래 불을 때기 시작하니 「네가 내 몸을 걱정함은 가상하나 내가 이렇게 함으로써 천하사가 성취되리니 너는 나의 공사를 방해하지 말라」
372) 『태극진경』, 4장 14절.
고 엄중히 꾸중하므로 끝내 불을 때지 못했다고 한다.373)
1941년 새해 아침 정산은 진시삼천지반(盡是三千之班)의 회룡도수가 다가옴을 말하고 이용직에게 지방으로 내려가서 다시 포덕에 힘쓸 것을 명하였다.374) 또 이때까지 도를 잊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문경의 박내익, 영주의 김 명구, 김천의 김태만 등에게도 친서 또는 인편으로 불러 용직과 함께 포덕하도록 명하니 이로부터 도운이 다시 싹트기 시작하였다.375) 4월 중순 정산은 숭도부인과 아들 준래를 무릉산 장춘사에 보내 백일공부를 시키고,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자 후원 대나무 숲 속에 동 · 서 · 중앙의 3군데 단을 세우게하시고 동단에는 숭도부인, 서단에는 숭정부인, 중앙단에는 준래로 하여금 매일 밤 자정에 단에 올라 법수를 모시고 3시간씩 법좌하여 진법주를 연송하며백일공부를 하도록 하고, 이 공부를 3년간 매년 1회씩 시켰다.376) 12월 중순정산은 상설도수(霜雪度數)라 하며 회룡재 뒤뜰에 짚을 펴고 공부설석하여 15일 간을 철야하였다. 이때 매일 밤 서리와 눈이 내려 의관을 덮었다.377) 1942년 봄에는 머지않아 새 옷으로 갈아입을 것을 예시하며 회룡재를 회문도장(會文道場)이라 부르도록 하였다.378) 가을 어느 날 정산은 도갑신(逃甲神) 도수379)를 보았다.
1944년 가을 「내 나이 이제 지천명(知天命)이며 득도한지는 만 27년이라. 그동안 구천상제의 도수공부에 나의 성과 열을 다하였으며 잠거한지도 어언 9년이니 머지않아 정기(旌旗)를 일으킬 기틀이 열리리라. 이제 이윤이 50에 비로소 49년의 잘못을 알은 것과 홍성문의 27년간 허공부의 도수를 마침이니 앞
373) 『진경전서』, 4장 41절.
374) 태극도편찬원, 같은 책, p.74.
375) 『태극진경』, 4장 18절.
376) 『진경전서』, 4장 45절.
377) 『태극진경』, 4장 20절.
378) 『태극진경』, 4장 21절.
379) 정산은 「도갑신은 천지신명계에 소속되지 못한 한을 품었으므로 독갑신(獨甲神)이 되었느니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는 도갑신의 호응을 받지 못하여 성공하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받았으나 이제 내가 이 도수로써 도갑신을 해원시켜 안정하게 하리니 앞으로는 그 해로움이 없으리라.」 하시니라.(『태극진경』, 4장 23절)
으로는 인덕도수의 법공부라야 함을 새삼 느끼는 바이다.」 라고380) 하여 이윤(伊尹)의 도수, 홍성문의 도수, 인덕도수의 법(法)공부 등을 말하였다. 9월 하순「이는 창생해박(蒼生解縛)을 위하여 시행하는 해방도수(解放度數)공부의 연속이니라.」 하며 창원 천주산에서 백일공부에 임하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화기(火氣)를 금하여 법수의 얼음이 솟아 수염의 고드름과 연결될 정도였다고 한다.381)
1945년 새해 아침에 명절치성을 올리신 후 정산은 「내가 봉천명한 지는 올해로써 만36년이며 잠룡한 지는 10년째가 되었도다. 그 잠룡도수 9년간에 그대들이 숨도 쉬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하며 냄새조차 풍기지 못하는 어려움을 참고 견디어 왔음을 치하하느니 이 실로 잠룡 지각도수(知覺度數)였느니라. 이제야 큰 도수는 고비를 넘겼으므로 새해에는 나도 정말 새 옷을 바꾸어 입으리니 태아도 10달이면 출생하고 잠(潛)도 회(廻)하면 현(見)하고 비(飛)하는 법이라 나의 도는 이제 이름만 지으면 되느니라.」 382)하여 새로운 도수가 돌아와 종교의 태동을 알리는 징조가 되었다. 2월 정산은 대도회룡의 백일공부를 시작하였는데, 「내가 지난 3년간 태극의 기동(機動)과 해박(解縛) 현룡(見龍)의 대도수로 삼팔동방목운(三八東方木運)을 돌려 천하창생을 구제할 도운과 국운의 회룡도수를 성취하고자 계속하여온 공부의 마지막 백일공부에 들어가노라. 이는 회룡재 공부의 종결이며 대도회룡(大道廻龍)의 큰 전환의 시기니 그대들도 도장에 올라오나 지방에 내려가나 더욱 근신하고 각자의 본분을 다하라.」 하고 공부에 들어가니 6월 중순까지 두문불출 독수고행(獨修苦行)하였다.383) 이 도수 공부 중에 정산은 공부실에서 법좌 송주하던 평소의 공부방법과는 달리 양손에 법수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서 불철주야 송주하니 그 고초가 더욱 심하였다.384) 이 도수 공부로 옥체가 수척하여 피골이 상접하였으며 몸
380) 『태극진경』, 4장 26절.
381) 태극도편찬원, 같은 책, p.75.
382) 『태극진경』, 4장 28절.
383) 『진경전서』, 4장 51절.
을 가누지 못하고 여러 번 쓰러지기까지 하므로 시종하던 이용직이 「아무리창생구제를 위하는 일이시라도 옥체를 보전하옵소서」 라고 간할 정도로 보던 사람들이 안타까워서 보기가 민망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정산은 「이 고행을 ·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 · 내가 이렇게 신고하여도 천하창생을 다 살릴 수는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 고 하며 공부를 계속하였다고 한다.385)해방 후 1947년에는 운달산의 김룡사로 가서 법당에 설석하고 며칠간을 공부한 다음 절 뒤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화장암에서 대장부(大丈夫) 대장부(大丈婦)도수와 천지일월 음양도수로 백일공부를 하였다.386)
1948년 태극도를 개창하고 부산 보수도장을 영건한 후에는 다시 동래의 금 련산 마하사에서 설석하고 백일공부를 하였다. 1951년 3월 도장 뒷산 중턱에 집을 지어 공부설석하고 지난 2년간 불철주야로 계속하는 공부를 「복중 80년도수에 따른 휴전도수라.」 하고 납폐지를 태우며 공부하였다.387) 이후 계속된 도수와 공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952년 1월 단도수(壇度數), 3월 납폐도수, 11월 왕자 수금도수(王者收金度數)와 남신 헌금도수(南信獻金度數), 생사(生死)판단 도수, 1954년 1월 구마이당로(九馬而當路)도수, 서역도수(書役度數),3월 청주 화양동의 황극신도수(皇極神度數)와 대신문도수(大神門度數), 1955년 1월 도장영선공사 기간의 백일공부, 10월 오강록도수C弓江錄度數)와 도강이서도수(渡江而西度數), 12월 낙서구궁도수(落書九宮度數), 1956년 1월 범질도수(范質度數), 5월 수륙병진(水陸併進), 동래독성제도수(東來獨聖帝度數), 동학사 염화실 만고충신신명의 해원도수공부, 6월 용담수도수(龍潭水度數), 합천 해인사 다로경권(茶爐經卷)공부, 1957년 1월 진시삼천지반(盡是三千之班)도수, 4월 청학도수(靑學度數), 8월 백의군왕, 백의장상도수 등이다. 마지막으로는 시학시 법 공부를 설석할 때 이를 삼십육궁도수(三十六宮度數)라 하며 시학공부 시작
384) 『태극진경』, 4장 33절.
385) 태극도편찬원, 같은 책, 1176.
386) 『진경전서』, 4장 87절.
387) 『태극진경』, 5장 28절.
과 동시에 법단에서 백일공부(1957. 11. 18~1958. 2. 28)를 시작하였다.
이 백일공부를 마치고 하명하기를 「이제 내가 이 세상에서 볼 도수는 모두 마쳤으니 이로써 종필(終畢)이니라. 앞으로 남은 일은 오직 너희들이 나의 50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로써 짜놓은 진법의 법방을 수행하여 대도를 성취함에 있느니라.」 고 하였다.388)
많은 백일 공부와 도수를 보았으나 그 전모를 모두 파악하기는 어렵다. 앞뒤 정황으로 짐작할 수 있는 내용도 있으나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많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일을 모두 알 수도 없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것처럼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그런데 도수가 실제로 무엇인가를 정산 스스로 보여준 사례가 있는데, 1945년 도수가 무언지를 보여주겠노라 하며 21척의 대나무에 태극의 깃발을 달고 동구 밖에 3일 동안 세우고, 회룡재로 옮겨서 공부를 계속하여 해방이 된 것389)이 그것이다. 또 31년 겨울 도장 동편 오리허(五里許)에 있는 관왕묘(關王廟)의 관왕상(關王像) 앞에서 백일공부를 마치자 관왕상의 수염이 없어진 일390), 34년 구천상제님이 제위에 임어(臨御)하시게 되므로 전 도인에게 납폐지 십만 장씩을 100일 이내에 소화하도록 하니, 100여일 지나서 금산사의 미륵존불(彌勒尊佛)이 원인불명의 화재로 소실되었던 일391), 청주 화양동의 만동묘(萬東廟)에서 황극신 도수를 보니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다음 날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넉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넉 자가 나타난 일392), 48년 마하사에서 49일 공부 후 불상이 고개를 숙인 일393) 등으로 정산이 말하는 공부와 도수의 의미를 다소 짐작할 수 있다. 1922년이나 1950년의 경우처럼 음해도수(陰害度數)라 하여 좋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예고하
388) 『진경전서』, 9장 32절.
389) 『태극진경』, 4장 35절 ~ 4장 46절, 『전경』, 교운 2장 46절.
390) 『태극진경』, 3장 102절.
391) 『태극진경』, 3장 111절.
392) 『전경』, 교운 2장 50절.
393) 『전경』, 교운 2장 47절.
고 준비하도록 한 예도 있었다. 1928년에는 수년 뒤에 닥칠 낙화도수(落花度數)로서 예시하기도 했다.
정산은 사회적 사건이나 도의 중대한 사건 등 어떤 중요한 사건에 즈음하여서는 공부나 도수를 보거나 또는 특별한 행위 같은 의식을 하였다. 대부분 정산 자신이 주도하였고 때로는 도인들에게 행위를 유발해 참여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이후에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변화가 있어 왔다. 정산은 공부를 통해 도수를 풀어서 어떤 영향을 주면, 그때 나타나는 어떤 현상은 도수대로 이루어지도록 한 작용이 있었다는 증표로 보인다.
정산이 증산과 관련된 주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봉천명시 입산수도할 때였다. · 당시 정산은 증산으로부터 계시로 기도주(祈疇呪) · 태을주(太乙呪)운장주(雲長呪) · 칠성주(七星呪) · 오주(五呪) 등의 주문을 받았다. 이후 귀국하여 증산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남긴 비기인 봉서를 받았을 때 그 봉서 안에 상기한 5개의 주문 외에 진법주(眞法呪) ·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 ·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 · 도통주(道通呪) · 개벽주(開闢呪)해마주(解魔呪) · · 신성주(神聖呪) 등의 주문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정산의 수도법을 따르는 종단에서는 정산의 오십년공부종필로 최종적으로 제시한 주문을 그대로 사용하는데, 그것은 정산의 독자적인 창작물이 아니라 증산으로부터 이미 그 원형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산은 1921년 봉천명 치성 후에 봉축주를 신설하고, 증산으로부터 전해 받은 진법주를 일부 변경하였다.394) 이때 신설된 봉축주(奉祝呪)는 「무극신 대
도덕 봉천명 봉신교 무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소원성취(无極神 大道德 奉天命奉神敎 无極道主 趙鼎山 大運大事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이다. 봉축주는 주문 봉송시 가장 첫 번째 봉송하는 것으로 주문의 시작을 나타낸다. 이 봉축주는 정산이 새로이 만들어 첨부한 것이고, 뒤이어 이어지는 주문은 증산이 계시와 봉서로 전해준 내용이다. 봉축주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하는 것'이라는 뜻에서 보면, 증산이 남긴 주문의 내용을 염송하여 그 기운을 체득하고자 하는 사람이 먼저 그 내용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고백이라고 할 수 있다. '无極神 大道德을 奉天命 奉神敎하는 无極道主 趙鼎山이 大運大事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无極道主 趙鼎山 大運大事' 부분은 이후 정산이 행한 도수에 따라 바뀌는 경우가 있었고, 또 주문을 봉송하는 주체에 따라 바뀌게 된다.
변경된 「진법주」 의 내용은
1. 「구천 하감지위(九天下鑑之位)」 -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 상제 하감지위(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下鑑之位)」 2. 「물비소시하사 소원성취케(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케)」 - 「물비소시하사 무극신 대도덕 봉천명 봉신교 무극도주 조정산 대운대사 소원성취케(勿秘昭示하사 无極神 大道德 奉天命 奉神敎 无極道主 趙鼎山 大運大事所願成就케)」 395)
이다. 이것은 증산이 남긴 원형의 진법주인 「九天下鑑之位 玉皇上帝下鑑之. 位釋迦如來下鑑之位冥府十王應鑑之位五岳山王應鑑之位四海龍王應鑑之位四時土王應鑑之位關聖帝君應鑑之位七星大帝應鑑之位直先祖下鑑之位外先祖應鑑之位密直使者來待之位右直使者來待之位左直使者來待之位冥府使者來待之位 天藏吉方하야 以賜眞人하시나니 勿秘昭示하사 所願成就케 하옵소서」 에서 밑줄 친 부분에 해당되는 것으로, 앞부분은 정산이 도수를 풀어.
394) 『태극진경』, 3장 10절.
395) 『태극진경』, 3장 10절.
확정한 증산의 신위를 그대로 넣은 것이고, 뒷부분은 향후 계속하여 도수를 풀어갈 정산의 역할의 중요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25년 무극도 장도 후에는 운장주(雲長呪) 중의 「일별병영(一別兵營)」 을
「일반병영(一般兵營)」 으로, 칠성주(七星呪) 중의 「좌보우필(左輔右弼)」 을없애고 「호아형아 허신형(護我形我虛身形)」 을 「호아신형(護我身形)」 으로, 24절주(節呪) 중의 「입춘 우수(立春雨水)」 를 「동지 소한 대한 입춘 우수(冬至小寒大寒立春雨水)」 로 「대한 장손무기(大寒長孫無忌)」 를 「대설장손무기(大雪 長孫無忌)」 로 「제대신장 즉통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지혜용력 음음(諸大神將卽通天文地理風雲造化八門遁甲智慧勇力 唵唵)」제대신장 소솔제장 일반병영 음음(諸大示i申將 所率諸將 -般兵營 唵唵)」으로 변경하였다. 개벽주(開闢呪)는 전문(全文)을 바꾸어 다음과 같이 변경하였다. 「천상옥경천존신장 천상옥경태을신장 상하변국뇌성벽력장군 백마원수 대장군 뇌성벽악장군 악귀잡귀금란장군 삼수삼계도원수 지신벽력대장군 천지 조화풍운신장 육정육갑둔갑신장 태극두파팔문신장 음양오행조화신장 삼태칠성제대신장 이십팔수제위신장 이십사절제대신장 감아미성 조아대력 역발산 오봉 구천응원 뇌성보화천존 강성상제 칙속칙속 음음 급급 여율령 사바아 (天上玉京天尊神將天上玉京太乙神將 上下變局雷聲霹靂將軍 白馬元帥大將軍 雷聲霹惡將軍惡鬼雜鬼禁亂將軍三首三界都元帥地神霹靂大將軍天地造化風雲神將六丁六甲遁甲神將太極斗破八門神將陰陽五行造化神將三台七星諸大神將二十八宿諸位神將 二十四節諸大神將 感我微誠 助我大力 力拔山吾奉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 姜聖上帝 勅速勅速 唵唵 急急 如律令 娑婆啊)」 그리고 도인들이 기도 시에 봉송하는 주문 12종류의 봉송순위(奉誦順位)와 회수(回數)를 「봉축주(奉祝呪) 1회 / 기도주(祈疇呪) 태을주(太乙呪) 이상 각 4회 / 진법주(眞法呪) 칠성주(七星呪) 운장주(雲長呪) 이십팔수주(二十八宿呪) 이십사절주(二十四節呪)도통주(道通呪) 개벽주(開闢呪) 해마주(解魔呪) 신성주(神聖呪) 태을주(太乙呪)
이상 각 1회」 로 제정하였다.396) 이후 1948년 태극도 창설 후에는 주문의 무극도주(无極道主)를 태극도주(太極道主)로 고쳤다.397) 1957년 정월 15일에 주문을 변경하여 봉축주와 진법주의 무극신(无極神)을 통극신(通極神)으로 고치고, 23일에는 기도시간에 주문을 다 봉송한 다음 기도주와 태을주를 각각 24회씩 연송하도록 지시하였다.398)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한 대강전 영건과 영대 봉안 치성 직전인 4월 26일에는 봉축주와 진법주의 통극신을 무극신으로 환원시키고, 「내 이제 무극과 태극을 통한 황극을 세웠노라.」 하였다.399)
주문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바로 신위이다. 신위는 신명의 각자의 위치를 말하고 주문은 이 신명의 위치에 따라 그대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도장은 정산에게는 진리를 설파하는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도인들에게는 진리를 배우고자 하는 집회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진리의 원천이자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와 천지신명을 봉안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하겠다. 신위는 도인들의 공부 시에 사용하는 주문이나 기도, 수련, 치성 등 각종 의식의례에 근본적인 영향을 준다는 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정산의 종교활동 과정에서 신위를 모신 것은 크게 무극도장, 보수동도장, 감천도장인데, 처음부터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변화를 보인다.
1925년 4월 15일 무극도장의 주요 건물인 영대(靈臺)와 도솔궁(兜率宮)이 영건(榮建)되었다. 이 때 영대에는 상층에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 天尊 姜聖上帝)로 추존하신 영위(靈位)를 봉안하고, 2층과 하층은 집회장으로 하였다. 도솔궁에는 상층은 33천(天)을 봉안한 도솔궁, 3층은 칠성신명(七星神明)을 봉안한 칠성전, 2층은 육정신(六丁神)과 제대신명(諸大神明)을 봉안한 봉령전(奉靈殿), 하층은 정산이 도수를 보며 공부하는 중궁(中
396) 『태극진경』, 3장 86절.
397) 『진경전서』, 5장 1절.
398) 『태극진경』, 8장 10절.
399) 『태극진경』, 8장 39절.
宮)이라 하였다.400) 무극도장의 건물 형태로 볼 때, 영대에는 구천상제를 모시고 도솔궁에는 각 층에 각기 다른 신명을 모셨으니 신명들이 각기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태극도 개창 후 1955년 부산 보수도장에서 영대(靈臺)를 모실 때, 건물 내부 전체를 개조하여 상층은 영대와 공부실 하층은 임원들의 회관과 거실로 정하였다. 봉천명일을 기하여 도장영건과 영대봉안 치성을 아울러 봉행하기에 앞 서 몸소 영대를 설위하니 그 위치와 배례의 회수는 다음 표와 같다.401)

이때의 영대봉안은 무극도장과는 다른 모습이다. 증산으로부터 받은 진법주에 따라 구천상제를 중심으로 옥황상제, 서가여래가 우좌에 배석하고 관성제군과 칠성대제가 그 옆에 배석한다. 진법주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지만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극도 당시에는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兀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와 다른 신명들이 분리되어 있었음에 반해 여기서는 구천응원 뇌성보화 천존 강성상제(九天應元 雷聲普化 天尊姜聖上帝)를 중심으로 다른 신명들이 모여들고 있다.
1957년에는 대강전(大降殿)을 영건하였는데, 상층은 중궁(中宮), 중궁의 영위 봉안실(靈位奉安室)은 영대(靈臺)라 하고 몸소 도수를 볼 공부실은 법단(法壇),
400) 『진경전서』, 3장 61절.
401) 『진경전서』, 6장 6절.
중궁의 동문은 대동문(大同門),남문은 영불문(迎佛門),팔각창문(八角窓門)은 정갑문(丁甲門)이라 하고,중궁의 북서측에 전수실(奠需室),동남측의 서편에 봉심실(奉審室),그 동편에 공부실을 두고 그 옆에는 남북으로 공부실 두 개를 두었다.402) 4월 28일에 봉천명일 치성을 겸하여 대강전 영건과 영대 봉안의 치성을 봉행하기로 정하고 먼저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니 그 위차 배례절차 笠斗せ403) ー匸-0 다음 표와 같다.403)
영대봉안도(靈臺奉安圖)

비로소 영대에 진법주 원형대로 봉안되었다.정산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영대신위를 정하기 위해서 많은 과정의 노력,공부 의식의 행위,변화가 선행되었으며 그것은 수도법의 완성과 관계되는 그 무엇이 있다.
402) 『진경전서』, 8장 27절.
403) 『진경전서』, 8장 28절.
무극도장을 건립하고 무극도를 창도한 때를 기점으로 주문과 더불어 의식의례도 제정하였다. 치성의 절차순위(節次順位)는 ‘시립(侍立) 명촉(明燭) 진설(陳設) 분향(焚香) 배례(拜皚) 초헌(初獻) 아헌(亞獻) 삼헌(三獻) 배례(拜皚) 고 유(告諭) 퇴갱(退羹) 유식(侑食) 하시(下匙) 배례(拜禮) 예필(禮畢)'로 법제(法制)하고,404) 입도치성은 일반치성에 준하되 명촉 후에 성령위지(星靈位紙)를 봉안하고 법수(法水)를 받들어 올리며 고유 후에 납명지(納名紙)를 에필 전에위지(位紙)를 소화하도록 법제하였으며.405) 당시에 기념치성(紀念致誠)으로 음력 9월 19일 증산상제강세일(甑山上帝降世日)과 음력 6월 24일 증산상제화천일(甑山上帝化天日)을 정하였으나 치성은 향후 계속 증가하였다.
정산은 뒤에 1955년 12월 5일에 납향치성(臘享致誠)406)을 하교한 내용이 보인다. 정산은 「이 치성은 옛날 제후가 황제를 위하여 드리던 제향(祭享)이므로 각 포감방면별로 올려야 하나 금년에는 내가 몸소 모범을 보임이니라.」 고하교하였다.407) 이 치성을 다음 해부터 각 방면별로 올리게 하였다. 정산은 항상 검소 절약을 몸소 행하여 치성에 올릴 음식이라도 큰 도수치성 이외에는 알맞게 제한하고 치성금이 남을 때는 그 두미(頭尾)를 사용하도록 하며 함부로 허비하거나 쓰지 않게 엄히 금하였다고 전한다.408)
404) 『태극진경』, 3장 77절.
405) 『태극진경』, 3장 78절.
406) 납향(臘享)치성 : 납(臘)은 섣달의 뜻이고, 향(享)은 제사지내다의 뜻으로 납향이란 섣달에 올리는 제사라는 말이다. 그 명칭의 유래는, 하(夏)나라 때는 가평(嘉平)이라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청사(淸祀)라 하였고, 주(周)나라 때는 대사(大蜡)라고 하다가 한(漢)나라 때에 비로소 남향이라 하였다. 남향 치성일의 변천을 알아보면, 우리나라 신라 때는 당(唐)을 본받아 인(寅)일로 하다가, 고려 때는 송(宋)을 본받아 술(戌)일로 바꾸고, 조선조 태조 때 우리나라의 방위가 동쪽의 목(木)자리에 있으므로 청제(靑帝)에 해당하니 미(未)일을 납일로 삼는 것이 옳다고 하여 그렇게 정하고 지금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조선조부터 미(未)일을 납일로 잡은 이유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에서는 채옹(蔡邕)의 설을인용하여 “청제(淸帝)는 미랍(未臘)으로 목(木)에 속하며 동방은 목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날 종묘와 사직에 공물을 바치고 제사를 지냈다(대순종학교재연구회, 같은 책, p.205).
407) 『태극진경』, 6장 73절.
408) 『태극진경』, 7장 97절.
1925년 5월 5일에 기도 날짜, 시간, 장소, 절차 등 도인의 기도봉행(祈疇奉行)도 법제하였다. 주일(主日)은 갑기(甲己)일로 정하고, 시간을 평일에는 축(丑)미(未)시 · 2회, 주일에는 자(子) · 오(午) · 묘(卯) · 유(酉)시 4회로 하며, 장소는 자신의 집 정침(正寢)으로 하되 절차는 사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설석하여 법수를 모시고 분향(焚香) 배례(拜禮)한 다음 법좌하여 몇 가지의 주문을 연송(連誦)하고 배례 후 예필(禮畢)하도록 정하였다.409) 1957년 11월 18일 시학공부 시작 때부터는 평일 기도 시에 진(辰) · 술(戌)시를 추가하여 · 진(辰) · 술(戌) · 축(丑) · 미(未)시로 4회 정하고, 주일에는 자(子)오(午) · 묘(卯) · 유(酉)시 4회를 더하여 8회로 기도를 모시도록 하였다.410)
또한 정산은 기도의 중요성을 도인과의 대화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어느 날 지방도인 이규섭이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신이나 부처 또는 칠성이나 용왕에게 빌어 화를 면하고 복을 받으려 하옵는 바, 진정 비는 대로 영험(靈驗)이 있사옵니까?」 하고 물었다. 「신불에게 하는 기원, 기도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로되 기도를 하여도 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일심이 부족한 까닭이니 지극한 정성이면 하늘이 감동하느니라. 그러나 탐음진치(貪淫瞋癡)의 마(魔)가 마음 바탕에 깔려 있는 기도는 마의 기도가 되어 좋은 보응이 없으리니 도둑질 잘되도록 기도하고 도박 잘되도록 빌어서야 어찌 복을 받을 수 있으랴? 또 도인의 일상생활에 송주 수도가 몸에 배면 절로 악귀, 악령의 침범이 없을 것이요. 위태로움과 액운을 면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잘되는 영험이 있으리니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성경신을 다한 수도와 치성이니라.」 고 대답하였다.411) 그리고 「인간의 정성과 의약의 효능이 도수에 합하면 수명이 연장되기도 하고 기도의 영험으로도 늘릴 수 있으며 전생 악업으로 이승에 업보를 받기도 하나, 이승에서 쌓은 태을주 공부와 나라와 사회를 위하여 힘써 일
409) 『태극진경』, 3장 79절.
410) 태극도편찬원, 『수도정전』, 부산: 태극도출판부, 2002. p.75.
411) 『진경전서』, 5장 20절.
해 쌓은 선한 업이 묵은 죄로 인한 장애도 녹일 수 있느니라. 오직 닦을 수(修)자 하나가 모든 운명과 길흉의 근원이니라.」 고 하였다.412) 정산은 기도할 때 마음가짐과 장소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집에서 열 번보다, 회의실에서 한 번이 낫고, 회의실에서 열 번보다, 도장에서 한 번이 나으니라.」 고 하였다.413) 정산은 도인들에게 기도 할 때 항상 일심으로 기도하면 어떠한 액운도다 물리칠 수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정산은 기도 시 도수에 따라서 방법을 변경하기도 하였다. 1945년 회룡재 마지막 백일공부 시작 시에는 지방임원들에게 명하여 지방마다 성심 있는 도인을 선발하여 그들로 하여금 매일 축시기도에는 법수12기(器)를 올리고 뉘와싸라기를 가려낸 쌀로 메를 지어 올리게 하였고, 공부를 마친 후에는 법수를낙반사유(落盤四乳)라 하며 4기로 변경하였다,414) 그로부터 만 5년 뒤인 1950년 3월, 즉 6.25 사변 수개월 전에 법수를 1기로 고정하였다.415) 감천으로 도장을 이주하고, 보수동의 부산도장을 보수도정(寶水道庭)으로 개칭하고 감천동 구덕정사의 정침(正寢)은 회룡재(廻龍齋), 공부실은 산회당(山會堂), 감천도장 경내를 부산도장으로 명명하며 「이곳에 장차 대학도수(大學度數) 청학공부(靑學工夫)를 열 것이며 영대(靈臺), 계대(繼臺)가 있게 되리라.」 416)한 후인 1956년 8월 23일 축시 기도 시간을 기하여 도인들의 기도행사방법을 변경하도록하였는데, 다른 주문은 그대로 봉송하되 태을주, 해마주, 신성주는 각 3독하고납폐지는 기도주 15장, 도통주 9장, 운장주 8장을 소화하며 배례는 전부 15배를 드리고 향남읍(向南揖)을 하게 하였다.417) 그 해 11월 5일에는 도통주의 납폐지를 7장으로 변경하고, 9일에는 납폐지에 산회당 또는 구덕정사를 넣도록 명하였다.418)
412) 『태극진경』, 6장 94절.
413) 『태극진경』, 8장 52절.
414) 『태극진경』, 4장 32절.
415) 『태극진경』, 5장 34절.
416) 『태극진경』, 7장 87절.
417) 『진경전서』, 7장 66절.
1957년 1월 5일 축시 기도시간을 기하여 기도행사 방법을 다시 변경하니, 납폐지는 각각 3장씩 9장을 태우고 주문은 모두 종전대로 봉송하게 하였다.419) 15일에 주문을 변경하였는데, 봉축주와 진법주의 무극신(无極神)을 통 극신(通極神)으로 고치고 납폐지의 무자(无字)도 통자(通字)로 고쳤다.420) 4월 26일에는 봉축주와 진법주의 통극신을 무극신으로 환원시키고, 납폐지에도 그와 같이 환원하였다.421)
정산의 공부와 도수에는 납페지가 많이 쓰였다. 납폐(納幣)의 뜻은 비단, 돈, 예물 등을 바치거나 헌납하는 행위이다. 납폐지(納幤紙)는 혼인 때 신랑 집에서 예단과 함께 신부 집에 보내는 서간으로 혼서, 또는 예장지라고도 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도가(道家)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이는데, 일정한 규격의 종이에 신명의 이름이나 부 또는 어떤 중요한 내용을 넣어 태움으로써 인간사의 일을 신명계에 고하는 것으로 인계와 신계의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도인들이 기도 모실 때 납폐지를 소상하는 것은 양위상제님과 천지신명께 정성으로 기도를 모시며 납폐의 예를 다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도인들이 글자나 문서를 태우면 모두 천상신명계에 알려져 감정을 받게 되느니 잘못된 것은 신명계를 혼란시키므로 그 글자를 알아볼 수 없도록 잘게 찢어서 태워야하느니라.」 422)라는 내용에서 볼 때 정산에게 있어 신계와 인계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납폐지를 태우는 것은 신명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식 행위인 것이다.
정산은 도수를 보거나 공부를 할 때 납폐지를 활용한 경우가 많이 보인다.1923년 1월 밀양 세천리의 공부처에서 백일공부를 하며 둔도수(遁度數)와 납폐도수(納弊度數)를 볼 때 많은 납폐지를 사용하였고, 이곳 도수에 쓰인 납폐
418) 『태극진경』, 7장 101절.
419) 『태극진경』, 8장 6절.
420) 『진경전서』, 8장 8절.
421) 『태극진경』, 8장 39절.
422) 『태극진경』, 7장 120절.
지(納弊紙)를 보존하였다가 후일 태인도장을 영건할 때 영대(靈臺) 터에서 이 납폐지를 소상하였다.423) 무극도 창도 1년 전인 1924년 5월 초에는 밀양 종남산의 영성정(靈聖亭)에 자리를 정하여 백일공부로 납폐도수를 보고 도인들도 각자 납폐지 십만 장씩을 소화하게 하였다.424) 1934년 새해 아침에는 「내가봉천명(奉天命)한지 이제 26년이니 머지않아 무극주(无極主)께서 구천상제님 제위에 임어(臨御)하시게 되느니라. 전 도인은 각자 납폐지 십만장씩을 100일 이내에 소화하라」 고 하여 도인들은 지성으로 이를 봉행하였다.425)
1951년 3월에는 지난 2년간 불철주야로 계속하는 공부를 「복중 80년 도수에 따른 휴전도수라」 하고 납폐지를 태우며 공부하였는데, 그 연기가 너무 많아 공부방에 별도의 연통을 내게 하였다.426) 이어 1952년 3월 15일에 도인들의 납폐도수를 명하였는데, 납폐지는 가로로 1촌 3푼, 세로로 3촌의 선화지(仙花紙)에 기도주 또는 태을주, 도통주를 도장으로 찍어서 만들고 이를 1인당 5 만장씩 송주 수련 중에 태우게 하였다.427) 1954년 1월 하순에 정산은 납폐도수공부(納弊度數工夫)를 계속하며 시봉 박재승, 이장로 등으로 하여금 8괘, 64 괘와 유불선, 제경(諸經) 또는 성수명(星宿名) 등을 그리거나 쓰게 하여 태우며 「이는 서역도수(書役度數)니라.」 고 하였다.428) 1956년 1월에도 「나의 일은 범질도수(范質度數)의 연속이니 전 도인에게 태을주 납폐지 각기 3천 장씩을 소화하도록 하고 1952년 3월에 명한 납폐지를 아직도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도인이 있으면 7일 내에 마치도록 하라」 고 하였다.429)
이상으로 정산은 무극도 창도시에 의식의례의 원형은 확립하였으나 어떤 도수에 임해서는 그에 따라 변화를 주었다는 것을 살필 수 있었다. 중요한 도수
423) 『진경전서』, 3장 46절.
424) 『태극진경』, 3장 64절.
425) 『태극진경』, 3장 111절.
426) 『태극진경』, 5장 48절.
427) 『진경전서』, 5장 41절.
428) 『태극진경』, 5장 77절.
429) 『태극진경』, 7장 4절.
공부인 무극도장 영건이나 무극도 창도, 구천상제의 제위 임어, 태극도 재건 등의 도중사의 중요한 사건, 나아가 6.25전쟁의 휴전과 같은 일에 즈음하여 일시적으로 변화를 보였으며 납폐지를 소상하며 도수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산에게 있어 도수에 따른 어떤 중요한 일을 그렇게 되도록 작동하는, 이루도록 자극하여 조화(造化)시키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신 · 법 · 원리 · 도 등으로 불리는 초월적 · 절대적 존재에 대한 체험을 공유하고 또 공유하고자 형성되는 일정한 공동체(종교조직)는 결국 그 공동체에 의해 이상이 실현된다는 면에서 절대적 경험에 도달하기 위한 교리적 이론적 체계나 궁극적 실재와 합일(合一)하기 위한 실천 체계 못지않게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신앙대상의 가르침을 숙지한 사람들은 결국 그 사람들에 의해 진리는 정착되고 전파되며 그 이상이 실현된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가능성을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정산은 자신이 설법한 진리를 추종하는 도인들을 관리 양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정산의 주변에는 정산을 추종하여 수도에 임하고, 정산이 추진하는 많은 일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시봉한 인물이 많았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가까운 인물로는 부친 삼형제를 들 수 있다. 이들은 만주 봉천명 시기부터 정산의 사업을 돕기 시작하여 이후 줄곧 평생을 정산의 창도사업과 포덕사업을 도운 인물들이다. 증산의 유가족인 선덕부인도 여기에 해당된다. 만주에서 귀국한 후에 최초의 신봉자들은 안면도의 이정률을 비롯한 30인이었는데, 이후 급속도로 늘어나는 신봉자들로 인해 조직적인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조직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1921년 봉천명 치성 후 임원을 임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날 정산은 도주의 위격으로 도인들의 하례(賀皚)를 받
고, 비로소 도의 체제를 정하였는데, 상우, 태로, 영문, 정두, 붕래 등을 임원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430)
1925년 무극도 창도 이후에는 「도규(道規)」 에 따라 '본도(本道) 도인은 본도의 취지 강령을 마음으로 숭상하여 지원하는 사람으로 한다.' 고 명시하 고, 임원으로는 본부임원(本部任員)과 지방임원(地方任員)으로 분리하여 관리하였다. 본부임원(本部任員)은 정위원(庭衛元) 1인, 승정원(承正元) 1인, 판정(判正) 약간인(若干人), 순찰(巡察) 약간인(若干人)을 두고, 지방임원(地方任員)은 수포감(首布監) 약간인(若干人), 포감(布監) 약간인(若干人), 선포장(宣布長)약간인(若干人), 포덕(布德) 약간인(若干人)을 둔다고 규정하였다. 본부임원은 본부에 근무하며 전국의 도인들을 관리하는 행정사무원이고, 지방임원은 각 지역에서 포덕사업을 관장하는 임원이다.
6. 임원의 임무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⑴ 정위원과 승정원은 본도의 전반도무(全般道務)를 총할(總轄)한다. ⑵ 판정은 승정원을 보좌하여 도중업무를 분장처리(分掌處里)한다. ⑶ 순찰은 본부로부터 지방에 파견하여 포감과 그 지방의 도무(道務)를 협리 (協理)한다. ⑷ 수포감은 포감 선포장 포덕을 독려하고 본부와 지방도인과의 연락사무를 맡는다. 단, 2인 이상의 선포장을 도솔(道率)하는 사람을 포감이라 칭한다. ⑸ 선포장은 도인 일백이십 인을 교도(敎導) 관리한다. ⑹ 포덕은 포덕(布德)에 종사한다. 7. 본도의 임원은 수도의 실험(實驗)과 포덕(布德)의 공효(功效)에 따라서 임명한다. 8. 본도의 도인은 입도시에 수인금(數人金, 入道禮으로 일원오십전을 납입)하고 매월 오전이상의 월성금(月誠金)을 납입한다. 9. 본도 도인중에 본도의 강령과 규약을 위반할 시는 출도 처분한다.10. 본도의 도인은 심성을 시시(時時)로 수련하고 치성을 힘대로 봉행(奉行)하여 성의(誡意)를 표한다.431)
430) 『태극진경』, 3장 11절.
431) 『태극진경』, 3장 75절.
도규에 따라 상급 임원을 임명하고 조직체계를 정비하여 포덕에 매진하니 도인수가 일층 증가하였다. 당시의 조직 규모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려우나 여러 자료에 의거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다. 촌산지순의 『조선의 유사종교』 에는 당시 증산교단의 교인분포도를 연도별로 기록하고 있는데, 무극도의 신도수를 1916년부터 차례로 50명(1916년), 50명(1917년), 369명(1918년), 369명(1919년), 395명(1920년), 1,004명(1922년), 1,031명(1923년), 2,498명(1924년),2,937명(1925년)<표2>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산이 만주에서 귀국한 해가 1917년이니 1916년부터 기록된 것은 오류로 볼 수 있고, 봉서를 인수한 1919년의 369명에서 많이 증가하기 시작하여 무극도 창도한 해인 1925에는 2,937명으로 많이 증가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의 보천교 인원을 35,106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면 다소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책 303″305쪽에는 차경석이 1919년 60 방주를 조직할 때 이 조직활동은 3년 동안 이루어졌으며, 조직된 인원총수가 모두 557,700명이었다432)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는 35,106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니 의도적인 축소라고 의심된다. 따라서 같은 해 2,937로 기록한 무극도의 숫자도 축소된 숫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무극대도교개황』 에는 「무극도 교도는 경상남도 밀양군, 울산군, 부산부, 경상북도 예천군, 봉화, 안동, 의성, 청송, 김천, 상주, 선산 각 군을 중심으로 정유군 관할과 김제군에 소수가 있고 기타 전국에 걸쳐 약 수천 명의 신도가 있다」 433)고 기록하고 있고, 간부급 명단만 150명 이상을 기록하고 있으니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종교해산령 이후 10여 년 동안 쇠퇴도 하였으나, 잠룡도수 동안에는 일제의 눈을 피해 연락하고 정산을 시봉하는 임원들이 있었다. 이를 기반으로 태극도가 열리자 다시 흩어졌던 도인들이 모이고 새롭게 포덕이 되어나갔다.
432) 촌산지순, 앞의 책, pp.303-305.
433) 『무극대도교개황』, p.8.
이에 따라 1949년 4월 28일 도인을 지도하고 교화할 임원체계를 정비하여 지방임원의 임명기준을 정하였으니, 지방단위로 포덕호수가 5백호 이상은 포감(布監), 그 관하의 150호 이상은 선도사(宣導師), 또 그 관하의 50호 이상은 선도원(宣導員)으로 정하였다.434) 이는 각 지방에서 날마다 늘어나는 도인들을 관리 양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였다. 도의 체계가 확립됨에 따라 지방에서는 포덕이 더욱 활발하고 이로 인해 부산도장에 드나드는 임원과 도인이 많아져도장이 협소할 지경이 되었다.
1951년에는 부산지역을 중부, 여타지역을 지방이라 하고 연고지명을 붙여 방면 명으로 호칭하게 하였다.435) 1955년에는 임원체계를 단원제에서 양원제로 개편하였는데, 그 하나는 포덕을 전담하는 포덕원이고 또 하나는 교화를 전담하는 교화원이었다. 포덕원에는 종전대로 포감, 선도사, 선도원을 두고 교화원에는 새로운 직책인 순찰, 순찰보, 순무, 순무보를 두었다.436) 1956년 2월 20일에는 도전직(都典職)과 부전직(副典職)을 신설하였고,437) 4월 5일 또다시 조직체계를 개편하였는데, 양원의 명칭은 포덕원(布德院)이 포정원(布正院), 교화원(敎化院)이 호정원(護正院)으로 개정되어 포정원에는 포장(布丈), 포정(布正), 포령(布令), 호정원에는 호장(護丈), 호정(護正), 호령(號令), 부령(副令)을 두고 종래의 포감(布監), 선도사(宣導師), 선도원(宣導員)과 순찰(巡察), 순찰보(巡察補), 순무(巡務), 순무보(巡務補)가 위계대로 보임되었다. 본부에는 새로이 시봉원(侍奉院), 보정원(補正院), 전학원(典學院), 편찬위원회(編纂委員會)와 청년부(靑年部)를 설치하였다. 시봉원에는 종래의 도전, 부전이 보임(補任)되었고438), 보정원에는 현직이 아닌 공로자 가운데서 임명되었다. 전학원은 원래는 교역자 교육기관이지만 피난 중 취학을 하지 못한 도인자녀의 교육을 담당할
434) 『진경전서』, 5장 16절.
435) 『태극진경』, 5장 23절.
436) 『진경전서』, 6장 17절.
437) 『태극진경』, 7장 21절.
438) 이 당시에는 도전이란 직책이 정산을 시봉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으나 정산의 화천 1년 전부터는 도의 전반 업무를 관리 감독하는 총관리자로서의 임무로 바뀌었다.
기구로서 천덕공민학교(天德公民學校)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편찬위원회는 도의 경전과 도의 역사의 편찬 간행을 담당할 기구라고 할 수 있다.439) 또 일반도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임원들이 협의하여 의결하고 처리할 기관으로서 협의회(協議會)와 의사회(議事會)를 설치하였는데, 협의회는 포장, 호장을 의원으로 하고 의사회는 포정, 호령을 의원으로 하여 구성하였다. 협의회는 도중 최고의결기관이고 의사회는 그 보좌기관이었다.440)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후대로 갈수록 다양한 기구 증설되어 조직이 완성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정산의 법을 따르는 종단들의 조직운영 방법은 사실상 정산의 화천 직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자신의 화천 일을 알고 있었던 정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조직체계 구성을 점차 구축해 간 것은 자신의 오십년공부종필 이후를 준비하여 전수하고자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기할 것은 여타 증산교단들이 36년 이후 거의 소멸되어 간 반면, 정산은 무극도 시절의 도인들이 다시 태극도에 참여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볼 때 수십 년간의 설법과 조직운영의 방법이 누적되어 이후 커다란 힘으로 작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람이 모이고 조직이 형성되면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문제가 바로 그 조직을 지탱할 수 있는 재정문제이다. 정산이 활동하던 시기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혼치 않은 시련의 시기였다. 역사상 유례없는 일제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 직후에는 다시 6.25라는 전쟁기를 거치게 된다. 이러한 질곡의 역사에서 일반 민중들이 겪어야 했던 시련은 매우 큰 것이었다.
정산은 자신의 주요 임무인 공부와 도수에 전념하였으나 도인들의 포덕 교화에도 항시 관심을 기울였고 나아가 자신을 따라 수도하는 사람들의 생계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귀국 직후 우일재에서 공부할 때에도 가족들의 농지를 마련하여 생계를 안정시켰다. 1925년 도장 건립 후에는 태인에 있는 상등
439) 『진경전서』, 7장 41절.
440) 『태극진경』, 7장 55절.
급의 논 20여 정보를 매입하고 본부의 직영(直營)으로 경작하여 그 수확으로 식량을 자급하게 하고, 도창현 너머에 오천여 평의 치성답(致誠沓)을 두어 치성에 쓸 쌀을 자족하게 하였다.441) 도장을 중심으로 하여 생활하는 도인들의 식량을 자급하고, 정기적, 임시적인 치성과 그 행사에 쓰이는 물품도 스스로 자급하게 됨으로써 생활이 안정되고 도세가 안정되어 발전의 기틀이 되었던 것이다. 앞장에서 서술하였듯이 1928년부터 시작한 진업단의 활동은 일제의 점령기라는 당시의 사회상황에서는 극히 드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산업을 장려하여 도가의 생활안정과 민생의 빈민구제를 위한 정산의 대표적인 활동이었다.
태극도 시절에도 6.25로 인해 피난을 위해 남하한 도인들이 부산도장 근처로 모여들어 판옥, 토옥 등 임시건물을 짓고 생활을 하게 되자 정산은 생계보조와 직장알선 등 여러 가지로 애휼하여442) 도인들을 보살폈다. 1955년에는 감천으로 이주하여 분주한 가운데, 대책위원회 사무실 옆에 쌀가게를 내어 위원회의 직영으로 도매상에서 양곡을 받아 도인들의 실정에 맞도록 공급하게하고, 그 규모가 커지자 다음 해 봄에는 시내 충무로 3가(속칭 자갈치 시장)에 부산 굴지의 양곡위탁판매업체인 협동상회와 감만동에 있는 대규모 도정업체(搗精業體)인 대원산업주식회사를 인수하여 경영하게 하였다.443) 1956년 8월도인들이 정착사업에서 막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 실정을 조사하여 생활이 곤란한 도인들에게 구휼금을 내려 주고, 도인들을 위시한 천하창생의 기재 양복(棄災養輻)을 위하여 치성을 올리기도 하였다.444) 또 피난의 와중에 도인자녀가 교육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천덕공민학교를 설립하니 불과 몇 달 만에 주야간 학생이 1,200여 명에 달하였다.445)
441) 『진경전서』, 3장 70절.
442) 『태극진경』, 5장 38절.
443) 『진경전서』, 6장 35절.
444) 『태극진경』, 7장 93절.
445) 『태극진경』, 7장 61절.
정산에게 있어 수도와 생업도 음양합덕이고, 육체와 정신도 음양합덕이었던 것이다. 다음의 말에서 정산의 생업에 대한 관이 잘 나타난다. 「육체현실과 심령이상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음양의 도리니 육체만 위주로 하여 심령을 버리거나 이상만 앞세워 현실을 외면함도 음양합덕이 아니니 육체와 심령의 조절이 곧 합덕이니라. 돈을 벌기 위하여 공부를 버리면 그것은 짐승의 일이요, 이상만 찾고 현실을 버리면 아표신(餓孳神)이 될 뿐이니 도는 합덕이라야 이루어지리라. 또 도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농사에도, 장사에도 있으니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심적기도(心的祈疇)와 아울러 도를 함께 닦아야 함이 합덕이니라」,446) 「인간이 먹고 산다는 일은 생명을 지탱하는 본능일뿐더러 또 인류의 문명이 그런 욕망으로 발전하기도 하느니라. 육체를 위하여 먹고 살고부모와 처자를 책임지는 생업에 충실함은 그것이 바로 생의 도리며 직업의 신성성이니라. 그러나 그것이 지나치면 탐욕이 되느니 명심하라.」 447)
이처럼 정산이 도인을 교화 육성하는 과정에서 생업에까지 관리한 것 등을 볼 때 여타 다른 증산교단들이 무리한 재정운영, 헌금갈취 등으로 인해 민중들을 고난에 빠트리고 소멸에 이르게 한 사실과는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해 볼 때, 정산은 증산이 천지공사를 통해 남긴 진리를 천명하고 그에 따른 가치실현의 방법으로서 수도공부법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의 종교적 사명으로 삼았다. 이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종단을 창설하였는데, 무극도 태극도를 거치는 동안 증산계 교단을 창설했던 많은 종도들과는 몇 가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감오득도와 봉서인수로 이어지는 진리 전승 과정이다. 증산은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446) 『진경전서』, 5장 88절.
447) 『태극진경』, 5장 113절.
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 448) 라고 하여 대두목을 암시했을 뿐, 종도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목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종도들은 증산 화천 후 우왕좌왕하였고, 나중에는 각기 자신들이 종통을 받았다는 근거를 찾기에 열중하였다. 한 예를 들면 차경석은 「곤이내 짐제지 곤이외 장군제지(闘以内朕制之闖以外將軍制之)」라는 증산의 말을 자신의 종통계승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것과 비교하면 증산의 계시와 누이동생을 통해 봉서를 전해준 것은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감오득도 이후 정산의 종교활동 과정은 수많은 공부를 통한 철저한 준비과정을 거친다. 1919년 정월 보름 봉서를 인수받은 이후 무극도 창도 전까지의 수년간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공부와 수많은 백일공부, 도수공부가 진행된다.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와 도수 보는 것으로 사용한다. 정산의 책무가 증산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파하는 것이라면, 우선 증산의 진리내용, 천지공사의 내용, 봉서 안에 남긴 증산의 의도 등을 먼저 완벽하게 숙지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 순서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정산의 공부는 증산의 진리를 체득하고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도수에 따라 진행하여야 할 모든 것을 파악하는 공부로 생각된다. 따라서 봉서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많은 공부와 도수는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종통계승자로서의 기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증산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종도들이 우연한 신비적 체험에 의해 그리고 막연한 어떤 기대감에 의해 준비 없이 교단을 창설하였던 것과는 대조적 인 모습이 다.
셋째, 무극도 창도 이후에도 정산의 행보는 도수공부로 이어진다. 이것은 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도수의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인 이전의 공부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도수를 정확하게
448) 『전경』, 교운 1장 41절.
풀고 이행하여 증산이 의도한 대로 진리가 정착하고, 도수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도록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천지인 삼계를 총망라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정산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 또는 어떤 특별한 행위나 의식으로 사회적 사건, 도중사의 사건 등 어떤 중요한 사건에 작용하고 변화를 주어 증산이 그리고 정산 스스로 의도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공부나 도수의 장기간의 과정에서 주문 · 신위 · 의례의식에 변화를 주었다. 이것은 도수의 변화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필수불가결한 과정으로 해석된다. 정산에게 있어 그것은 도수에 따른 어떤 중요한 일을 그렇게 되도록 작용하는, 이루어지도록 자극하여 조화(造化)시키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 주문이나 신위는 증산이 봉서로 남긴 내용으로 귀결되고, 최종적으로 수도법 완성의 법방인 시학시법공부로 집약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무극도 시기에는 이론적 교리와 의식의 원형이 완성되었고, 태극도 시기에는 주문, 신위 그리고 시학시법이라는 실제의 공부법이 완성되었다.
다섯째, 정산은 이 모든 공부와 도수의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감수하였다. 백일동안 밤을 새워 검무도수를 본다거나, 한겨울에 법수 두 그릇을 양쪽 손에 받쳐 들고 철야로 공부하니, 법수가 넘쳐 손에 고드름이 달리는 때도 있고, 양손에 법수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서 불철주야 송주하는 등 수없이 많은 예가 있다. 「이 고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여도 천하창생을 다 살릴 수는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 449)등의 내용은 증산에서 정산으로 이어지는 암묵적 계시로 일반인들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여섯째, 정산은 도인들 관리에 철저하였다. 많은 시간을 공부와 도수에 치중하였으나 도인들의 포덕 교화는 물론 도인들을 조직 관리 육성하는 데에도 매
449) 『태극진경』, 4장 33절.
우 엄중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생계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타의 종단들이 한순간 흥성하다가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맥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해 정산의 경우는 오십년 공부 종필이라는 장시간의 과정에 증산의 진리가 도인들의 몸과 마음에 철저하게 스며들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증산을 따르던 종도들은 자신들이 증산으로부터 도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증산의 권능을 믿은 그들은 자신들이 수년간 증산의 천지공사 현장에 참여하였고, 또 증산의 설법을 직접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9년 증산이 화천하자 처음에는 충격과 배신감으로 방황하였다. 그러던 중 태을주에 의한 신비적 체험으로 다시 믿음이 회복되었고, 신비적 체험이 확산되어 수많은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자 증산으로부터 도통, 권능을 얻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11년 고수부에 의해 초기 형태의 교단이 창설되었다. 그 당시 체계적인 교리나 문서화된 경전은 없었지만 태을주의 효력은 희망을 잃은 민중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역할을 하여 급속히 확산하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단의 기반이 다져지고 교세가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4년경 차경석이 야심을 드러내어 교단을 장악하게 되자, 이에 분개한 종도들은 교단을 떠나 각자가 따로 종교단체를 형성하게 되니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게 된다. 차경석이 고 부인을 고립시키고 교단 내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려고 시도하면서 김형렬을 시작으로 종도들은 하나둘 종단을 이탈하여 독자적인 종단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처음 증산을 향한 믿음은 점차 증산의 권능에 의지해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질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이 교단 장악 시도는 이미 그가 순수한 종교적 열정보다는 현실적 권력욕으로 기울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정당성을 뒷받침해줄 근거를 찾아 각자가 증산으로부터 종통계승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증산을 향한 자신들의 믿음과 기대감에 대해 현실적 대체 수단을 찾은 것을 의미한다. 종통의 확인은 자신들에게 권위를 부여해 포교의 확대로 이어지고, 신도수의 증가는 재정과 권력의 확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증산의 권능에 기대어 의지해
빌어서 현실적 부귀영화와 권위를 누릴 수 있는 간단한 방법이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증산 교단들의 교세는 1920년대 중반 이후까지 빠르게 확산되어 갔다. 1919년 10월 차경석이 '60 방주제'를 선임하는 고천제(告天祭)를 행할 때 조직된 인원총수가 557,700명이라고 기록될 정도로 번창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탄압과 지도층의 무능과 비리, 그리고 이로 인한 교단내의 갈등으로 점차 쇠퇴, 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차경석은 교단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1925년부터 십일전을 건축하였는데, 이로 인해 교인들의 경제적 공황이 심각해지고 배교하는 자가 속출하였다고 한다.
초기 증산계 교단의 신앙대상의 호칭은 여러 가지의 호칭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증산을 '옥황상제'라고 호칭하였다. 그러나 증산계 교단이 분열하고 나서 각 교단의 특징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지게 된다. 선도교는 고 부인이 사망한 뒤 증산을 건존증산(乾尊甑山), 고 부인을 곤존고씨(坤尊高氏)라 하여, 고 부인을 증산과 동격의 위치에 올려놓고 신양대상으로 하였다. 보천교는 전기교단의 경우 구천과 옥황상제를 체용관계로 구천은 우주의 체로, 옥황상제는 우주의 용사신으로 보아 같은 신격으로 보았으며, 우주를 주재하는 전지전능한 신으로 옥황상제를 신앙하였다. 그러나 후기교단으로 가면 유교적인 면으로 전향하여 신앙의 대상이 '천'으로 바뀌게 된다. 미륵불교는 김형렬이 금산사에서 신비체험을 한 날을 계기로 미륵불이라고 호칭하고, 증산대도교는 그대로 옥황상제라 신앙하였으며, 동화교는 증산이 하느님으로 강림한 절대권능자이기 때문에 통천상제라 하여 신앙하였다.
증산계 교단 같은 경우 분열하고 각각 교단을 장립할 때 교리적인 부분에 있어서 미약하게 시작하여 뒤에 교단의 기초를 다질 때 교리를 선포하게 된다. 먼저 선도교에서는 고 부인이 7개 항목의 계잠만 발표하였고, 뒤에 고민환이 『선정원경』 (1960년)에 교리를 남겼는데, 고 부인의 계잠에 더하여 10개항목, 그리고 6대보은, 오도수행요목, 6화명심이 실려 있다. 보천교에서 전기교단
의 교리는 4대강령인 신화 · 일심 · 상생 · 거병 · 해원이고, 목적은 후천선경이며, 후기교단의 교리는 인의(仁義)이고, 벼리는 경천(敬天) · 명덕(明德) · 정륜(正倫) · 애인(愛人)이다. 주의(主義)는 상생(相生), 목적은 대동(大同)이다. 보천교 같은 경우 교리적인 부분에서도 후기교단은 유교로 전향하여 새로운 종교로서의 면목을 갖추게 된다. 미륵불교는 김형렬이 교인들에게 후천에는 물형부로써 조화권능을 부린다고 가르쳐 종교로서의 교리체계는 갖추지 못하였다. 뒤에 최선애에게 이어지면서 종지와 십선도(十善道)의 교리를 내세웠다. 증산대도교는 삼대종지(三大宗旨)와 팔조신앙요목(八條信仰要目)이며, 동화교의 교리체계는 교의로는 천지공사이며 교화이념은 거병(去病) · 해원(解冤) · 보은(報恩) · 상생(相生) · 조화(造化) · 대전협동(大全協同)이라 하였다.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와 동화교의 교리가 거의 비슷하다. 그 이유는 보천 교 전기교단의 교리는 이상호가 보천교의 간부로써 조선총독부에 종교를 공인 신청할 때 제출한 내용이고, 동화교의 교리는 이상호가 보천교를 탈퇴하고 동화교를 세울 때 내세운 교리이다. 그러므로 보천교 전기교단의 교리와 동화교의 교리 둘 다 이상호가 발표한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비슷하다.
증산계 교단 가운데 증산의 천지공사를 가장 많이 이해한 사람은 이상호이다. 이상호는 최초의 경전 『증산천사공사기』, 3년 뒤에는 『대순전경』 을 지은 인물로, 그는 종도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증산의 행적을 기록하고 덧붙여서 경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교리부분에서 다른 증산계 교단보다는 증산의 뜻에 가장 근접하게 선포한 것으로 보여 진다.
증산계 교단은 증산의 권능에 힘입어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를 창립하여 그 교단의 개창자가 증산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신앙대상의 호칭과 교리가 그 교단의 특징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었다. 초기 증산계 교단은 1936년 일제의 종교해산령을 기점으로 거의 소멸하거나 심각하게 쇠퇴하여 지
금에 이르렀다.
정산의 경우는 증산계 교단과 달리 생애 내내 50년 공부 종필할 때까지 증산의 천지공사를 풀어가는 과정에서 공부와 도수로 점철된다. 정산의 생애를 크게 나누어보면 탄생에서 1909년에 봉천명과 입산수도, 감오득도와 봉서인수를 통한 종통계승, 무극도 시기, 태극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탄생에서 봉천 명과 입산수도에 이르는 시기는 준비기라고 할 수 있고, 감오득도와 봉서인수의 시기는 증산으로부터의 종통을 자각하고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이후 무극 도와 태극도 시기는 증산이 남겨놓은 과제와 유지를 완성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895년 탄생한 정산은 남다른 총기를 지녀 13세 즈음부터는 기존의 공부에서 탈피하고선 남 잘되는 공부로 전향하여 매진하였다. 을사늑약의 충격으로 분사한 조부의 영향으로 일본을 배격하고 구국에 뜻을 둔다. 증산이 화천하던 해인 1909년 15세에 구국제민의 뜻을 품고 만주 봉천지방으로 망명하게 된다.9년간의 입산수도로 남모르는 공부에 진력하던 중, 1917년 증산의 계시로 감오득도하였다.
귀국한 정산은 1919년 선돌부인으로부터 증산이 비밀리에 남긴 현무경과 주문이 담긴 봉서를 전해 받게 되었는데, 정산에게는 이것이 증산으로부터의 종 통계승의 확고부동한 증표였다. 당시는 종통계승을 자처하는 수십 개의 종파가 난립하던 상황이었으므로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때 받은 주문은 앞으로의 오십년 공부 종필의 내용이며 과제였다. 알 수 없는 부(符)와 문자로 이루어진 현무경은 정산의 오십년공부종필의 도수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정산은 곧바로 백일공부를 시작하여 봉서의 내용, 즉 증산이 짜 놓은 도수에 따른 대도(大道)의 진리를 체득하였고, 다시 증산이 남긴 둔궤와 증산의 성골을 찾게 되어, 증산으로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공부와 도수에 주력하기 시작하여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기까지 수많은 공부와 도수에 몰두하였다. 봉서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많은 공부와 도수는 증
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이해를 바당으로 해야 하는 종통계승자로서 의 기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은 다른 종도들이 우연한 체험에 의해 교단을 창설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그로부터 각고의 노력 끝에 1923년 전교 발표 후 1925년 무극도를 창도하여 증산이 천지공사를 통해 설파한 진리를 바탕으로 종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신앙의 대상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강성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姜聖上帝)로 확립하고, 교리의 핵심인 종지 · 신조 · 목적을 함께 발표하여 이론적 교리체계를 완성하였다. 종지 · 신조 · 목적은 신앙의 대상인 구천 상제(九天上帝)의 가르침을 함축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정산은 증산이 행한 천지공사의 내용과 그 사상을 집약하여 '음양합덕, 신인 조화, 해원상생, 도통진경'으로 표현하였다. 음양합덕은 분열하였던 음양을 하나로 통합하고 음양의 조화와 균형을 통해 그것이 지니고 있는 덕을 서로 합하여 이상세계를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증산에 의하면 선천은 음양의 불균형 으로 인해 그것이 지니는 덕이 발현되지 못하였고, 그 폐해로 선천은 진멸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음양 부조화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방안으로 증산은 일음일양(-陰-陽)과 정음정양(正陰正陽)의 원리를 바탕으로 천지공사를 처결하였다.
신인조화(神人調化)는 음인 신과 양인 인간의 '조화(調和)'를 목적으로 한다.'조화(調化)'는 균형과 화합과 합일을 의미하는 '조화(調和)'에 머물지 않고 변혁과 창조와 탄생을 의미하는 '조화(造化)'를 포함하고 있는 특이한 용어로,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어느 한 편이 우위에 서거나, 지배적인 입장에 서 있지 않고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힘이 합쳐져서 새로운 세계가 전개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인조화는 정음정양을 바탕으로 인존(人尊)이 실현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해원상생은 증산의 천지공사에서 가장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사상이다. 선천은 상극이 모든 것을 지배하여 원이 쌓였으며 이 원이 천지인 삼계를 소통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참혹한 재화가 발생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증산은 천지도수를 정리하고 신명을 조화하여 만고의 원한을 풀고 상생의 원리로 새로운 선경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원으로 인하여 진멸지경에 처한 선천을 해원을 위주로 구제하고, 나아가 상생의 원리로 대체하는 것이다.
도통진경에서의 도통은 증산이 제시한 대순의 진리에 완전히 통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개개인을 넘어 만천하, 전체 우주에 충만한 상태를 도통진 경이라고 한다. 이 도통진경은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의 완성과 함께 이루어지는 후천선경의 이상향, 즉 지상신선이 실현되는 지상천국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다. 음양합덕이 운도를 개조하는 천지공사의 기본적인 원리라고 한다면, 신인조화는 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을 조화시키는 것이고, 해원상생은 천지공사에 방법론으로서 적용되는 핵심축이자 인간세계에서의 사회적 실천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을 개조하는 신인조화와 사회의 실천덕목인 해원상생은 인존시대를 실현하고 후천선경을 건설하여 최종적으로 도통 진경에 도달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강령(四綱領)과 삼요체(三要諦)는 '음양합덕, 신인조화, 해원상생, 도통진 경'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론에 해당하는 것이다. 사강령(四綱領)은 증산의 진리를 봉행(奉行)하는 것으로 그 벼리를 삼는다. 그 주요한 내용은 안심(安心)안신(安身) · · 경천(敬天) · 수도(修道)가 있다. 안심이란 곧 본연의 양심을 회복하여 궁극적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는 데 있다. 본연의 양심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이며, 때 묻지 않은 순결한 마음이다. 안신(安身)이란 몸이 평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몸은 마음의 현상이며, 마음은 몸의 주인이다. 몸으로 바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을 바로 해야 한다. 마음이 바로될 때 몸의 행동은 법례에 따라 의리와 예법이 맞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안 신은 안심과 떨어질 수 없고 안심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경천과 수도는 곧 천(天)으로 대표되는 신앙대상에 대한 설명과 신양주체인
인간과의 관계를 상정하고 그 합일적 과정으로서의 수도를 통해 달성되는 이상적 경지를 지향하고 있다. 경천(敬天)은 구체적으로 말해서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님과 천지신명에 대한 경건하고 조심스러운 마음을 일컫고 있다. 자신의 잘못됨과 마음의 사곡(邪曲)함을 신명과 상제님의 권위에 비추어 조심하는 자세가 곧 경천(敬天) 것이다. 수도는 종교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한 몸과 마음의 단련이다. 수도는 수행(修行)이라고도 하며 넓은 의미에서 행동을 통해서 마음을 단련하는 것을 말한다. 수도란 늘 마음과 몸을 고요히 하며 정심(正心)에 이르도록 하여 영통의 통일을 위해 공경하고 정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수도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공부 · 수련 · 기도(평일기도, 주일기도)로 구분한다. 수련은 자기 자신의 현재의 심성(心性)과 기질(氣質)을 닦아서 맑고 바른 본래의 심성과 기질로 환원시키도록 마음과 몸을 단련하며, 기도는 신앙의 대상인 상제에게 기원하고 신명과 소통하면서 자기가 바라는 바 소원성취를 축원한다. 그리고 공부는 도장의 일정한 장소에서 지정된 방법으로 정해진 시간에 행하는 것이다.
성(誠)은 늘 끊임이 없이 조밀(調密)하고 틈과 쉼이 없이 오직 부족(不足)함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말하고, 경(敬)은 심신(心身)의 움직임을 받아 일신상(-身上) 예의(禮儀)에 알맞게 행(行)하여 나아가는 것이며, 信은 한마음을 정(定)한 바엔 변하지 않고 나아가 정성(精誠)하고 또 정성(精誠)하여 기대(企待)한 바 목적(目的)에 도달(到達)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정산은 이어 도규(道規)를 공포(公布)하고, 도규에 따라 상급 각 임원을 임명하는 등 도의 기구(機構)와 조직체계를 완비하였고, 치성의 절차순위(節次順位), 입도치성의 절차순위(節次順位), 기도봉행(祈疇奉行) 방법도 법제하는 등 의식의례를 기초하여 종단의 기본골격을 완성하였다.
1928년에는 종교적 신념의 사회실천운동으로서 진업단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수리 또는 황무지 개간과 간석지 간척 등의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산업을 장려하여 도가의 생활안정과 빈민구제를 위한 활동이었으며 나아가 증산의 천지공사를 이 사회에 구현하는 하나의 실천항목이었다.
1936년 일제의 종교단체해산령으로 무극도가 해산되니, 정산은 10여 년의 잠복기 동안 또다시 수많은 공부와 도수에 주력하였고, 해방 후 신앙자유의 국시(國是)에 따라 종교 활동을 부활하여 1948년 다시 태극도를 창설하였다. 태극도 시기는 부산시 보수동과 감천동(55년 이후)을 중심으로 종교활동을 전개하여 새로운 도수에 주력하였다. 정산은 1949년 새로이 늘어나는 도인들을 효율적으로 교화 육성하기 위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55년에는 도장을 영건하였고, 56년에는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출판하여 태극도의 도의 기원과 취지, 종통, 신조의 강령, 요체와 도인의 수칙을 발표하였다. 이때 신조의 강령, 요체는 무극도 당시의 것과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 시기의 종교활동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일은 영대의 신위를 설위한 것과 시학 시법공부를 설법 시행한 것이다. 정산은 1957년 감천에 대강전을 짓고 영대봉안 치성 시 영대에 15신위를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증산이 봉서로 전해 준 주문 중 진법주에 맞춰진 것이었다.
그 해 11월 정산은 자신의 오십년 공부 종필(五十年工夫終畢)의 정수이며 결실, 그리고 광구천하의 공부법방, 유일무이한 진법(眞法) 등으로 표현한 시학 · 시법공부를 시행하였다. 정산은 또 이 공부법방은 전만고(前萬古) 후만고(後萬古) 천상천하에 오직 하나뿐인 진법이고 전후고금에 유일무이한 법방이라고 강조하였다.
무극도 시기가 신앙대상 확립, 의례의식 법제, 이론적인 교리체계 발표 등으로 종단의 기본 골격을 세운 시기였다면, 태극도 시기는 증산의 천지공사의 원리에 따라 신위를 확정하고 수도법을 완성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시학 · 시법 공부는 1909년 증산의 화천과 더불어 신양적 과제로서 남기진 '도 부을 가능케 하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으로 정산에 의해 제시된 것이니.
그 중요성은 참으로 크다 하겠다. 증산이 말하는 도통은 바로 정산이 제시한 이 수행방법을 통해서 비로소 실현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정산은 종통계승 이후 증산이 천지공사를 통해 남긴 진리를 천명하고 그에 따른 가치실현의 방법으로서 수도공부법을 완성하는 것을 자신의 평생의 종교적 사명으로 삼았다. 이 사명을 완성하기 위해 종단을 창설하였는데, 무극도 태극도를 거치는 동안 증산계 교단을 창설했던 많은 종도들과는 몇 가지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감오득도와 봉서인수로 이어지는 진리 전승과정이다. 증산은 「내가 도통줄을 대두목에게 보내리라. 도통하는 방법만 일러주면 되려니와 도통 될 때에는 유 불 선의 도통신들이 모두 모여 각자가 심신으로 닦은 바에 따라 도에 통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어찌 내가 홀로 도통을 맡아 행하리오」 라고 하여 대두목을 암시했을 뿐, 종도들 중에서 후계자를 지목한 적이 없었다. 때문에 종도들은 증산 화천 후 우왕좌왕하였고, 나중에는 각기 자신들이 종통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기에 열중하였다. 한 예를 들면 차경석은 「곤이내 짐제지고이외 장군제지(闘以内朕制之闖以外將軍制之)」라는 증산의 말을 자신의 종 통계승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이것에 비해 증산이 계시와 누이동생(선돌부인)을 통해 봉서를 전해준 것은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둘째, 감오득도 이후 정산의 종교활동 과정은 수많은 공부를 통한 완벽한 준비과정을 거친다. 1919년 정월 보름 봉서를 인수받은 이후 무극도 창도 전까지의 수년간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의 공부와 수많은 백일공부, 도수공부가 진행된다. 거의 모든 시간을 공부와 도수 보는 것으로 사용한다. 정산의 책무가 증산의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설파하는 것이라면, 우선 증산의 진리내용, 천지공사의 내용, 봉서 안에 남긴 증산의 의도 등을 먼저 완벽하게 숙지해야 하는 것은 필연적 절차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정산의 공부는 증산의 진리를 체득하고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도수에 따라 진행하
여야 할 모든 것을 파악하는 공부로 생각된다. 따라서 봉서 인수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많은 공부와 도수는 증산의 천지공사에 대한 확고부동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야 하는 종통계승자로서의 기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증산의 후계자를 자처했던 종도들이 우연한 신비적 체험에 의해 그리고 막연한 어떤 기대감에 의해 준비없이 교단을 장립하였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셋째, 무극도 창도 이후에도 정산의 행보는 도수공부로 이어진다. 이것은 증산이 짜놓은 도수를 풀어나가는 것으로, 도수의 의미를 파악하는 단계인 이전의 공부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증산의 천지공사에 의한 도수를 정확하게 풀고 이행하여 증산이 의도한 대로 진리가 정착하고, 도수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도록 조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증산의 천지공사는 천지인 삼계를 총 망라하는 것이었으니, 우리가 정산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공부 또는 어떤 특별한 행위나 의식으로 사회적 사건, 도중사의 사건 등 어떤 중요한 사건에 작용을 하고 변화를 주어 증산이 그리고 정산 스스로 의도하는 방향으로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넷째, 이러한 공부나 도수의 장기간의 과정에서 주문 신위 의례의식에 변화를 주었다. 이것은 도수의 변화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필요불가결한 과정으로 해석된다. 정산에게 있어 그것은 도수에 따른 어떤 중요한 일을 그렇게 되도록 작동하는, 이루어지도록 자극하여 조화(造化)시키는 행위임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을 거쳐 주문이나 신위는 증산이 봉서로 남긴 내용으로 귀결되고, 최종적으로 수도법 완성의 법방인 시학시법공부로 집약된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무극도 시기에는 이론적 교리와 의식의례의 원형이 완성되었고, 태극도 시기에는 주문, 신위 그리고 시학시법으로 완성되는 실제의 공부법이 완성되었다.
다섯째, 정산은 이 모든 공부와 도수의 과정에서 상상할 수 없는 고초를 감
수하였다. 백일동안 밤을 새워 검무도수를 본다거나, 한겨울에 법수 두 그릇을 양쪽 손에 받쳐 들고 철야 공부하니, 법수가 넘쳐 손에 고드름이 달리는 경우도 있고, 양손에 법수를 들고 부동자세로 서서 불철주야 송주하는 등 수없이 많은 예가 있다. 「이 고행을 내가 아니면 누가 하리요.」,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여도 천하창생을 다 살릴 수는 없으니 한스러운 일이로다.」 등의 내용은 증산에서 정산으로 이어지는 암묵적 계시로 일반인의 상상을 불허한다.
여섯째, 정산은 도인들 관리에 철저하였다. 많은 시간을 공부와 도수에 치중하였으나 도인들의 포덕 교화는 물론 도인들을 조직 관리 육성하는 데에도 매우 엄중하였으며 이들에 대한 생계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타의 종단들이 한순간 흥성하다가 흩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맥이 이어지지 않았던 것에 비해 정산의 경우는 오십년 공부 종필이라는 장시간의 과정 속에 증산의 진리가 도인들의 몸과 마음에 철저하게 스며들도록 작용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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