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문 許衡
許衡의 思想과 元代朱子學의 定立
― 實踐躬行과 朱子學 官學化와 關聯하여 ―
金 洪 徹
漢陽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 2004年 2月 · 指導敎授 任 桂 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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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지>

중국 理學의 발전 과정에서 元代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宋에서 비롯된 理學이 元을 거쳐 明으로 이어지는데, 주지하듯이 원은 송·명과 달리 몽고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였다. 한족 고유의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는 이학이 맥을 이으며 발전될 수 있었던 데는 원 왕조의 역할이 매우 컸다. 元에서는 朱子學을 官學으로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보급하였다. 왕조 차원에서 주자학을 수용한 데에는 나름대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한족 중심의 중국 전역을 통치하기 위한 사상적 구심점이 절실하였고, 漢族을 지도하는 士大夫 階層을 회유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 결과 주자학은 널리 보급되었고, 이 토대 위에서 明代에서의 부흥을 가져올 수 있었다.

元에서 朱子學의 보급과 官學化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 바로 許衡(1209-1281)이었다. 허형은 당시 華北地域의 사상계를 주도하던 漢唐的 詞章 중심의 儒學에 맞서 朱子學이 주류로 자리 잡게 하였다. 그가 주자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데에는 몽고의 중원 정복으로 빚어진 정치사상적 혼란이 배경이 되었다. 이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라고 생각하였고, 경세적인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것이다. 실천을 중시한 朱子學은 그에 부합되었다.

許衡은 朱子學을 매개로 元朝의 정치·교육에 직접 참여하여 효율적으로 중국을 지배하기 위한 정책의 입안에 영향을 끼쳤다. 몽고족이 중국에서 정복왕조를 구축해가는 과정인 世祖代에 입조하여 漢法 施行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여기에는 정치적으로는 지배를 받는다 하더라도, 한족 고유의 문화를 보호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기존 華夷論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없이는 불가능했다. 허형은 이민족 지배라는 당시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주자의 논리에 수정을 가하였다. 주자가 설정한 中國과 夷狄과의 상하적 차별을 벗어나 蒙古를 中國 또는 漢的인 것으로 보았다. 夷狄도 漢法을 받아들여 쓸 수 있다면 중국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주자의 血統中心的 華

夷觀에서 文化中心的 華夷觀으로 외연을 확대시킨 것이다. 그의 정치적 행보는 이러한 화이관의 바탕에서 가능하였다. 중앙집권적 전제관료체제를 모색하고 있던 세조에게 行漢法의 정견을 상주하였고, 중국 고대의 文物制度를 채택하도록 유도하였다.

國子學은 주자학 보급의 핵심기지였다. 허형은 이를 주도하여 후학들을 양성하였는데, 行漢法을 주장하고 朱子學을 治人之學의 理念으로 교화하는 등 實踐躬行을 강조하였다. 국자학에서의 교육원칙은 오로지 小學과 四書를 중심으로 주자학적 도리를 실천궁행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의도는 교육제도와 과거제에 관철되었다. 이를 통해 관계 전반에 주자학을 교육받은 관료들이 양산되었고, 이들이 國學을 장악하고 계통을 이어갈 수 있었다. 漢人은 물론이고 蒙古人·色目人의 子弟들까지 小學과 四書을 수학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중앙에서 비롯하여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朱子學은 許衡으로 인해 중국 전체로 널리 퍼졌다고 할 수 있다. 南宋에서조차 학문적 위치가 불안정했던 주자학이 이민족의 元朝에서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던 것은 허형의 노력에서 말미암은 결과이다. 이때의 주자학적 학문풍토는 사장적인 漢唐儒學을 대신하여 明·淸代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가 도통을 계승한 성인으로 불리는 것은 여기에서 연유된 바이다. 허형의 노력으로 중국의 문화가 원조에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許衡은 주자학의 이론적 토대를 절대적으로 고수하면서 몸소 실천하고자 했으며, 군주됨의 도리, 민을 위한 국정의 운영, 경제의 부흥을 통한 국가의 부강 도모 등에 힘을 기울였다. 이런 점에서 허형은 理論家 내지 思想家라기보다는 오히려 儒師의 역할을 강조한 經世家였다. 元朝는 강력한 무력을 배경으로 北魏·遼·金·淸 등 여타의 정복왕조에 비해 고압적인 민족차별정책을 시행하여 중국을 지배하였던 만큼 그 시대상황에서 나름대로 대처의 방안을 찾아 漢法의 시행을 관철시키고, 그 사상적 토대가 되는 朱子學을 널리 보급한 허형의 업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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序 論

中國 宋 · 元 · 明 理學史上에서 특히 蒙古族이 지배하던 元代 儒學의 위치는 異民族의 지배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거의 無視되거나 忽視되었던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1) 이는 이민족 왕조에 대한 正統論과 中華主義 중심의 華夷論에 입각한 부정적 평가2)와 南宋 朱子學 이후 學術史的 系譜가 아직까지 체계적으로 규명되지 못한 것이 주요 원인이라 하겠다.3)

그러나 朱子가 생존했던 南宋 시기에서조차 ‘僞學’으로 간주되었던 朱子學은 元代에 몽고족의 漢人支配를 위한 統治理念으로 그 位相이 정립되고, 官學으로 정착되었다. 朱子學의 官學化는 문화적인 면에서나 수적으로 열세에 처해 있던 蒙古族이 통치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다수인 漢族지배에 대한 정당성 확보와 漢族을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士大夫層을 懷柔하기 위한 필수적인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4) 한편 元代 朱子學의 官學化에는 이미 현실화된 몽고족의 이민족 지배 하에서 漢文化, 특히 朱子學을 보호 육성하고 이를 계승시키고자 하는 漢人 儒士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도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元代에 이르러 朱子學이 官學으로 정착됨으로써 朱子學이 보급 계승되었음은 물론 국가적 공인 학문으로서 사상계의 지배적인 위치를 확

1) 黃宗羲, 『宋元學案』(臺北: 世界書局, 1973); 侯外盧 · 邱漢生 · 張豈之 主編, 『宋明 理學史』上 · 下(北京: 人民出版社, 1984).

2) 그 대표적인 사람은 明의 丘濬(1418-1495)과 明末淸初의 王夫之(1619-1692)를 들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주5) 참조.

3) 福田殖, 「元代の經學者 許衡 -その思想的 特徵」, 『九州中國學報』37輯(1999), p.81-83에서는 趙復은 北中國에 程朱學을 전한 중요인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生卒年이나 그의 程朱學의 特色도 불명확하고, 다만 趙復 - 姚樞 - 竇黙 · 許衡 · 劉仁으로 전해진 것으로 推察된다고 하였다. 羅光, 『中國哲學思想史(元明篇)』(臺北: 學生書局, 1981), p.3에서는 趙復이 南宋 理學者 眞德秀의 弟子라고 기술하고 있다.

4) Hok-Lam Chan & Wm. Theodore ed, Yüan Thought( New York: Columbia Univ.Prees, 1982), pp.197-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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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더 나아가 朱子學의 보급과 이후 明代 理學의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元代 朱子學의 보급 및 관학화와 관련하여 許衡(1209-1281)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핵심인물이었다. 許衡에 대한 이제까지의 전통적인 평가는 正統論과 華夷論에 입각하여 이민족 지배에 협력한 반민족적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평가5)가 있는 반면, 주자를 계승한 道統의 전수자로서 유학 발전사에서의 정통적 지위를 인정하는 긍정적 평가6)도 있다. 이러한 상호 극단적인 평가는 名分論과 現實論에 입각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를 반영하는 것으로서, 당시 시대적 상황 또는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許衡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와 이해를 위해서는 許衡의 사상적 특징과 당시의 시대 상황,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思想的 志向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분석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까지 許衡에 대한 연구는 1) 許衡의 生評과 사상 내력에 대한 개괄적인 연구,7) 2) 허형의 주자학 수용과정과 그의 주자학적 특징에 대한 평

5) 明의 丘濬은 『世史正綱』卷31·32,「取意」에서 許衡이 元에 入仕하여 夷狄의 주인을 섬김으로써 中國帝王의 전통을 끊은 것은 바르지 않다고 크게 비난하였고, 王夫之는 讀通鑑論』卷17에서 시서예악을 夷狄의 조정에 파는 사람은 요적이라고 하면서 姚樞 許衡 등을 비난하였다.

6) 그 대표적인 예로 명초의 주자학자 薛瑄(1389-1464)은 “許魯齋에 이르러 오로지 小學과 四書로서 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가르치는 방법으로 삼았으며 문사를 숭상하지 않고 실행을 돈독히 하는 것에 힘썼으므로 주자의 道統을 이은자는 魯齋이다”(“至許魯 齋, 專以小學四書, 爲修己敎人之法, 不尙文辭, 務敦實行, 是則繼朱子之統者魯齋也.”『魯齋遺書』,권14, 「薛文淸公讀書錄」)라고 하였고, 명말청초의 주자학자 張履祥은 “許魯齋는 篤信好學하는 人士이다. 그 얻은 바는 金履祥이나 許謙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런데 後人은 그가 元朝에 入仕한 까닭에 그를 비난하는 것이 지나칠 뿐이다.”(『楊園全集』,卷41,「備忘」三)라고 하여 許衡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주지하다시피 許衡은 朱子 이후 道統의 繼承者로 인정되었다. 元朝는 1313년(皇慶3年)에 許衡을 周敦頤, 程顥, 程頤, 朱熹 등과 함께 孔廟에 배사했는데, 이것은 그가 元朝에서 극히 존중받았고 道統의 繼承者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7) 福田殖,「許衡に っぃて」,『九州大文學論集』31, 1985, pp.89-111; 安部健夫,「元代知識人と科擧」『元代史硏究』(東京: 創文社,1972), pp.3-56; 岩間一雄,「元代儒敎の問題-異民族元支配下の儒者」,『Nagoya Daigagu Hosei Ronshu』32(1965); 周采赫,「元 萬卷堂의 設置와 高麗儒者」『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論叢』(서울: 知識産業社,1988); 金鍾圓,「元代 蒙古‘國子學’과 ‘太學’에 대하여」, 『東洋史學硏究』3(1969); 袁國潘, 『許魯齋評述』(臺灣: 商務仁書館,1978); 孫克寬, 『元代漢文化 之活動』(臺灣: 中華書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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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8) 3) 허형의 학술상의 계보에 대한 이해,9) 4) 元代 儒學의 麗末鮮初 性理學과의 연계성을 추적한 연구10)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상을 보면 연구는 주로 許衡의 개인적 평전이나 학문적 편력, 그리고 사상적 특징을 설명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元代 朱子學의 官學化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분석이 미흡할 뿐만 아니라, 元代 朱子學의 정착에 기여한 許衡의 역할에 대해서도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실정이다.

본 연구에서는 우선 먼저 蒙古族 지배 하에서 朱子學이 어떻게 北傳되었는가를 살펴보고, 그 다음으로 주자학의 관학으로 정착과 보급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許衡이 어떻게 주자학을 수용하였는가와 그의 학문

8) 三浦秀一, 「許衡試論-金元の際における朱子學の受容者として-」, 『日本中國學會報』 第49集(1999), pp.134-148; 陳正夫·何植靖, 『許衡評傳』, -附『許謙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1995); 鄭仁在,「元代의 朱子學-元儒의 道統意識을 중심으로」,『東洋文化』3(1983); 徐遠和,『理學與元代社會』(北京: 人民出版社, 1992); 秦志勇,『中國元代思想史』(北京: 人民出版社, 1994); 歐陽周, 『中國元代敎育史』(北京: 人民出版社,1994); 陳榮捷, 「元代之朱子學」, 『朱學論集』(臺北: 學生書局, 1982); 權重達, 「元朝의 儒學과 그 傳播」, 『人文學硏究』22(中央大, 1995), pp.95-131; 金承炫, 「元代 孔子思想의 展開 - 劉因 · 許衡 · 吳澄의 理學思想을 中心으로」『孔子學』2(1996), pp.19-40; 李東熙, 「元代 및 元初 朱子學의 전개 양상-도덕적 실천주의-」『東洋哲學硏究』22(동양철학연구회,2000), pp.465-490; 金承炫,「元代北許南吳理學思想硏究-附惀它對高麗理學的影響」,輔仁大學哲學硏究所 博士論文(1988).

9) Hok-Lam Chan & Wm. Theodore ed., Yüan Thought, (New York: ColumbiaUniv. Press, 1982); 福田 殖,「元代の經學者 許衡-その思想的特色-」,『九州中國會報』 37集, 1999, pp.75-92; 三浦秀一,「許衡試論-金元の際における朱子學の受容者として-」,『日本中國學會報』第49集, 1999, pp.134-148.

10) 대표적인 것으로 포은사상연구원 편, 『元代 性理學』(포은사상연구원, 1993)이 있는데이것은 고려 주자학 수입의 연원이 원대라는 것에 착안하여 원대 주자학에 대한 여러 편의 논문이 게재되어 있다. 이 외에 文喆永, 「麗末 新興士大夫들의 新儒學 受容과 그 特徵」, 『한국문화』3(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2), pp.97-123; 鄭玉子, 「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李齊賢을 中心으로-」, 『震檀學報』51(震檀學會, 1981), pp.29-54; 池富一, 「元·明 交替期 朱子學의 東傳과 朝鮮初의 鄕村敎化」,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2; 「元代 朱子學의 東傳」, 『仁川專門大論文集』 17, 1992; 「고려후기 수용된 朱子學의 성격」, 『白山學報』, 1995 등의 논문이 있고, 저서로는 高惠玲, 『高麗後期 士大夫와 性理學 受容』(서울: 一潮閣, 2001); 邊東明, 『高麗後期 性理學 受容 硏究』(서울: 一潮閣, 1995); 李源明, 『高麗時代 性理學受容硏究』(서울: 國學資料院, 199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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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경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끝으로, 이민족 왕조인 元朝의 지도자를 許衡이 어떻게 설득하여 주자학을 수용 · 보급하려고 하였는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硏究範圍와 構成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1장에서는 원대 주자학의 북전 배경과 許衡의 주자학 수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金 · 南宋 對峙期와 蒙古族에 의한 金의 정복, 이에 따르는 政治 · 社會的 격변기에 강남의 南宋地域과 北方 華北地域의 思想界의 동향은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보고, 趙復에 의한 주자학의 북전과 許衡의 주자학 수용과정을 통해 몽고족의 중원 정복 초기 주자학이 북방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연구 분석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주자학적 사유에 기반을 둔 許衡의 本體論, 心性論, 修養論 등을 살펴봄으로서 그의 朱子學 수용의 기반 또는 학문적인 경향을 분석할 것이다. 이를 통해 許衡이 자신이 공언하듯이 오로지 朱子學에 충실하였는지의 여부와, 그가 朱子學을 수용하기 이전에 가졌던 학문과의 내적인 연관성은 어떠하였는지, 그리고 그가 살았던 時代的 條件은 그의 思想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제3장에서는 쿠빌라이 칸 시기(1260-1294) 許衡이 주자학을 실천궁행하는 입장에서 몽고를 漢化하기 위해 노력한 구체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許衡은 명분론에 입각한 중국 본위의 夷狄觀을 표방한 朱子와는 달리 어떻게 포용적인 夷狄觀을 정립하였는가, 이를 바탕으로 夷狄인 蒙古 統治者들이 漢法을 수용하여 전통적인 儒家의 정치원리에 따라 정치를 하도록 어떻게 유도하였는가, 그리고 당시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현실적으로 蒙古族에 의한 漢法의 수용과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으로서 어떻게 朱子學을 전달 보급하였는가를 연구 분석하고자 한다.

본 논문의 연구 방법은 기존 연구성과를 토대로 許衡의 사상적 특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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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펴볼 수 있는 許衡의 語錄인 『魯齋心法』11)과 許衡의 文集 및 그에 대한 평가가 수록된 『魯齋全書』12) 『魯齋遺書』13) 등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 외에 그에 대한 기록인『元史』「許衡傳」,14)『新元史』,15)『宋元學案』,16) 그리고 그에 대한 평가로서 丘濬의 『世史正綱』17) 등 文獻史料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11) 『魯齋全書』가 간행된 이후 寫本으로 전해지던 것을 韓士奇가 입수하여 嘉靖 元年(1522)에 간행한 것이다. 이 책은 주로 許衡의 행적과 문장을 기술해 놓은 ‘어록’ 부분만을 摘出해 놓았다.

12) 何瑭이 그 동안 산재해 있던 許衡의 遺書를 모아서 明의 正德 13년(1581) 간행한 것이다.

13) 欽定四庫全書 중에 수록되어 있는 『魯齋遺書』는 1525년(嘉靖 4年) 蕭鳴鳳이 간행한것으로, 총 14卷으로 구성되어 있다. 1卷에서 11卷까지는 著述이고, 12卷은 그를 追封하는 내용과 후대 자손들의 정황을 기재하고 있다. 13卷은 「元勑辭」, 「神道碑」, 「元史本傳」, 「通鑒」, 「考歲略」, 「國學事蹟」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4卷은 「先儒議論」, 「古今題詠」이 실려 있다. 이 저술 가운데 「讀易私言」은 卦爻位에 관한 논의로서 50세 이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大學要略」, 「大學直講」, 「中庸直解」, 「稽古千文」, 「編年歌括」은 60세 이후에 태학에서 가르쳤던 내용들이다.

14) 『元史』(臺灣: 開明書店 影印本, 1974) 卷158, 列傳 第45, 「許衡傳」.

15) 『新元史』(臺灣: 開明書店 影印本, 1974), 卷170, 列傳 第67, 「許衡傳」.

16) 黃宗羲, 『宋元學案』(臺北: 世界書局 影印本, 1973)

17) 丘濬, 『世史正綱』 , 卷31-32, 1488刊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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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章朱子學 北傳과 許衡의 思想 形成

1) 蒙古의 中原征服과 漢人儒士들의 대응

南宋 寧宗 開禧 2年, 金 章宗 泰和 6年(1206년) 蒙古族을 통일한 鐵木眞(1167-1227)은 斡難河에서 열린 부족장 회의(쿠릴타이)에서 成吉思汗으로 추대된 후 정복전쟁을 시작하였다. 千戶制, 怯薛 등 遊牧民族 특유의 군사조직을 기반으로 기동력이 강한 기마군단을 가진 몽고족은 매우 빠른 속도로 주변 국가들을 차례로 정복하였다. 1211년 金朝의 中部를 공격함으로써 중원정복을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고, 1213년에는 또다시 金朝를 공격하여 中部, 東平, 大名 등 11개의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하였으며 곧이어 1215년에는 中都를 함락시켰다.18)

이후 서아시아의 호라즘 왕국을 정복한 成吉思汗이 1227년 西夏(1032-1227)를 공격하던 중 病死하자 중원정복의 대업은 太宗 窩闊台汗(1186-1241)이 계승하였다. 1229년 怯魯連河의 쿠릴타이에서 汗位에 오른 그는 1232년 親征을 시작하여 1234년 마침내 金朝를 멸망시킴으로서 유목민족인 몽고족이 農耕定着地域인 漢人社會를 지배하게 되었다.19)

이어서 太宗은 南宋 침공을 추진하였다. 太宗의 南宋 정벌의 빌미는 南宋이 제공하였다. 몽고에 의해 金이 멸망하자 南宋은 그 遺址인 河南의 회복을 기도하게 되었다20). 그리하여 1234년 7월 南宋의 知州 全子才가 군사 일만 여 명을 이끌고 汴梁으로 進駐하였고, 徐敏子는 洛陽으로 진군

18) 『新元史』, 卷三, 「太祖本紀」, 頁2a-b, 辛未條 · 癸酉條.

19) 『元史』, 卷二, 「太宗本紀」, 頁1b-2a, 壬辰條 · 甲午條.

20) 蒙古와 宋이 연합하여 伐金戰爭을 수행할 때 金의 멸망 후 그 河南地域은 宋의 영토로 한다는 약속이 있었다. 즉 몽고의 太宗은 王織이라는 사신을 宋에 보내 연합하여 伐金하는 것을 담판하고 일이 성공된 후에는 河南은 宋에 歸還한다고 했던 것이다. 韓儒林 主編, 『元朝史』(北京: 人民出版社, 1986),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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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자 太宗 窩闊台汗은 皇子 曲出 등에게 명하여 宋의 征伐을 계획하였고, 1236년에는 南宋의 湖北省 德安을 점령하였다.21)

太祖 成吉思汗과 太宗 窩闊台汗이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피정목민에 대한 정책 성격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成吉思汗이 서역원정에 필요한 재원의 확보를 위해 피정목민을 무차별적으로 약탈하였던 것에 반해, 窩闊台汗은 지속적인 물자의 원활한 공급과 재생산을 염두에 두고 영토를 직접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방향으로 바꾸었던 것이다.22) 이는 蒙古族의 중국정복 전쟁 초기에 定着農業地區의 생활방식과 이에 대한 통치방법에 대해 무지한 蒙古族 정복자들의 극심한 약탈과 유린으로 인해 크게 황폐화되었던 중원지역의 漢人들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물론 다소 과장된 면이 있겠지만 당시 蒙古族에 의한 漢地의 파괴 양상은 1207년(金 章宗 泰和 7年)의 인구가 768만여호, 4,580여만 이었던 것이 1233년(元 太宗 5年)과 1235년 두 차례의 조사에서 人口 총계는 100만여호에 불과하였다는 기록23)이 있는 것을 보면 그 파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피정복민에 대한 窩闊台汗의 정책변화는 무절제한 파괴와 약탈로 인한 피해의 감소를 의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부 정책의 변화는 蒙古族이 유목지역에 경제기반을 둔 정복자의 입장이었으므로 여전히 일정한 한계를 지닌 것이었다. 이는1235년 몽고지배층에게 봉건적 특권을 부여하는 投下制가 실시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24) 이것은 농업지구와 유목지구의 환경적 차이와 이에 따

21) 『新元史』, 卷四, 「太宗本紀」, 頁4a-b, 甲午條 · 乙未條 · 丙申條.

22) 韓儒林 主編, 『元朝史』(北京: 人民出版社, 1986), pp.213-215; 金浩東, 「蒙古帝國의形成과 展開」, 『講座中國史 III』(서울大東洋史學硏究室 編, 지식산업사, 1989), pp.259-272; 周采赫,「元萬卷堂의 設置와 高麗儒者」,『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 國史論叢』(서울: 識産業社,1988), pp.202-204 참조.

23) 『莊靖集』 (文淵閣四庫全書1190, 臺灣: 商務印書館, 1983), 「澤州圖記」 참조. 周采赫교수는 金朝下에 있던 1207년에는 53,532,151명이었던 江北人口가 元朝의 1290년에는 6,042,325명으로 줄어들었음을 당시 호구 통계로 제시하고 있다. 周采赫,「元萬卷堂의 設置와 高麗儒者」,『孫寶基博士停年紀念韓國史論叢』(서울: 知識産業社,1988),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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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생활방식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유목적 생활방식을 그대로 中原에 옮겨 정착농민의 토지를 징기즈칸의 蒙古親族들에게 봉토로서 分與해 준 것이었다.25), 그 결과 몽고지배층들은 봉토를 경영할 노동력 확보를 위해 漢人들을 家奴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뿐만 아니라 漢人의 농경사회에 대해 무지한 蒙古人들은 이를 유목사회로 전환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심지어 太宗代의 近臣 別迭 등은 “漢人은 무용지물이니 모두 죽이고 초목을 무성하게 심어 목지를 만들자”26)고 황제에게 상주하는 일까지 있었다. 이러한 상주는 당시 황제를 비롯한 蒙古人 將相들이 漢地 농경지구의 사회 경제적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초기 蒙古人들 사이에 ‘九儒十丐’27)이라는 속어가 유행했다는 사실도 그들이 중국 특유의 유교적 통치술과 유교문화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었음을 입증해 준다 하겠다.28) 그러므로 당시 金朝 치하에 있었던 漢人 사대부들은 蒙古軍에 투항하거나 漢人世家에게 의탁하지 않으면 유랑인, 포로,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24) 安部健夫, 「元代 ‘投下’ の 語原考」, 『東洋史硏究』3-6,1938, pp.9-14.

25) 蕭啓慶, 「忽必烈‘潛邸舊侶’考」, 『大陸雜誌』, 第52卷, 1-3号, 1962, p.268

26) “別迭等僉言, 雖得漢人亦無所用, 不若盡去之, 使草木暢茂以爲牧地.” 蘇天爵, 『元朝名臣事略』, 卷5, 「中書耶律文正公」, 頁3b; “近臣別迭等言 漢人無補於國 可悉空其人以爲牧地.” 『元史』, 卷146, 列傳 第33, 「耶律楚材」傳, 頁2b 참조. 한편 蒙思明, 『元代社會階級制度』(北京: 中華書局,1980), p.20에서는 民田을 몰수하여 牧場을 만드는 이러한 사례가 남송정벌을 기도하던 1275년(至元 12년)까지도 계속되었다고 한다.

27) 이는 元代 儒者의 社會的 地位가 매우 낮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 유래는 宋末元初의 反蒙古 人士인 謝枋得, 鄭思肖 등이다. “滑稽之雄, 以儒爲戱者曰: 我大元制典, 人有十等, 一官二吏, 先之者貴之也. 貴之者謂有益於國也. 七匠八娼, 九儒十丐. 後之者賤之也. 賤之者謂無益於國也.” 謝枋得, 『謝疊山集』(叢書集成) 卷2, pp.20-21; “撻法 一官, 二吏, 三僧, 四道, 五醫, 六工, 七獵, 八民, 九儒, 十丐 各有所統轄.” 鄭思肖,『鐵函心史』下卷(臺北: 世界書局,1957), p.77; 權重達, 「元朝의 儒學과 그 傳播」, 『人文學硏究』22(中央大, 1995)에서 재인용.

28) 元代의 漢人學者 胡祗楺(1225-1293)는 『紫山大全集』에서 蒙古族의 中國支配方式의단점을 “(몽고족 지배자들은) 군사적 명성과 재정적 비대화를 우선적으로 존중한다.”라고 서술하였다. John, D. Langlois Jr., China under Mongol rule(New Jersey: Princeton Univ. Press, 1981), p.10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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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遊牧帝國期(1206-1259)의 초기 몽고족 정복자들은 정착농업지역의 생활방식과 이에 대한 통치방법을 알지 못하고 주로 정복활동을 통한 유목약탈경제와 華北 농업지역에서의 약탈적인 稅制를 그 경제기반으로 하고 있었다.29) 이처럼 초기 蒙古政權의 약탈경제체제는 中原 정착농업지역의 경제적 기반을 근본적으로 붕괴시키고 있었다. 그 결과 중원지역이 제대로 통치되지 않았고, 그들은 이러한 농업사회의 생산, 재생산을 고려하지 않은 지배방식이 결국 한지통치의 경제기반과 인적기반을 붕괴시키고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시적으로 몽고 정복자들이 金朝를 공략하던 초기부터 자신들에게 협력했던 漢人世侯들을 통한 간접지배를 도모하였다.30) 농경정착사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몽고통치자들로서 직접지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漢人世侯들에 의한 간접지배가 일시적인 약탈보다 정치 · 경제 · 사회적으로 안정을 도모할 수 있어 그들의 통치에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蒙古族 통치자들은 漢地 · 漢人에 대한 통치기술의 습득을 위해 漢人學者들의 충고와 조언을 수용했다. 漢人 지식인들은 蒙古人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방법에 의한 통치방법과 기득권 유지에만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탈피하고, 유교의 통치원리에 바탕을 둔 도덕적인 정책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자주 충고함으로써 漢文化의 전통적인 儒敎倫理에 입각한 통치자가 되도록 유도하였다. 당시 漢人들은 강렬한 蒙古至上主義에 대항하여 漢人 및 漢文化의 보호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을 적극 지지한 대표적 인물은 거란인 耶律楚材(1190-1244)였다.31) 窩闊台汗의 정치고문인

29) 韓儒林 主編, 『元朝史』(北京: 人民出版社, 1986), pp.213-215; 羅賢佑,「元代民族史」(成都: 四川民族出版社, 1996), pp. 24-26; 金鍾圓, 「元代 蒙古 ‘國子學’과 ‘太學’에 대하여」, 『東洋史學硏究』 제3집(1969), p.32.

30) 周良霄, 「李壇之亂與元初政治」, 『元史論集』, 南京大學歷史系元史硏究室 編, (南京: 人民出版社, 1984), pp.126-128.

31) 余大釣, 「論耶律楚材對恢復發展中華文化的貢獻」, 『元史論集』, 南京大學歷史系元史硏究室 編, (南京: 人民出版社, 1984), pp.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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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蒙古人들의 被征服民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을 목격하고 進言하기를 “將士를 얻기 위해서는 數十年이 걸린다. (征服은)土地와 人民을 얻고자 함인데 土地를 얻고도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32)라고 하였다. 그는 또 중국을 牧地化하자는 別迭 등의 近臣들의 의견에 대해 “무릇 넓은 천하와 풍부한 사해로서 어찌 얻지 못할 것이 있는가? 地稅, 商稅, 酒, 鹽鐵, 山澤의 利로서 매년 銀 5천만 냥, 絹 8만 필, 栗 40만 석의 稅量이 가능하다.”33)고 하여 蒙古族 통치자들에게 토지와 사람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농경민의 세금이 국가운영에 커다란 도움이 됨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耶律楚材는 漢地에 대한 지배권 강화의 일환으로 戶稅 징수를 원칙으로 하는 세제개혁을 건의하였다. 그 결과 중원지역에서 戶口調査 實施(1233년과 1234년)에 이은 新稅制가 施行(1236년)되었다.34) 또한 耶律楚材는 1234년 太宗에게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그릇을 만드는 데는 반드시 우수한 匠人을 써야 하고 나라를 守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儒臣을 기용하여야 합니다. 儒臣이 事業(儒學)을 일삼는 데는 수십 년이 걸리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렵습니다.35)

이것은 ‘守成者’로서 儒者의 效用價値를 太宗에게 인식시키고자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儒臣의 기용을 강조하면서 이들을 徵稅

32) “將士暴路數十年, 所欲者土地人民耳, 得地無民, 將焉用之.” 『元史』, 卷146, 列傳 33, 「耶律楚材」傳, 頁2b.

33) “夫以天下之廣四海之富, 何求而不得, 但不爲耳, 何名無用哉, 因奏地稅商稅酒醋鹽鐵山澤之利, 周歲可得銀五十萬兩絹八萬匹栗四十萬石.” 蘇天爵, 『元朝名臣事略』, 卷5, 「中書耶律文正公」, 頁3b.

34) 陳高華, 「元代稅粮制度初探」, 『元史論集』(南京大學歷史系元史硏究室 編, 人民出版社,1984), pp.340-349.

35) “楚材奏曰, 制器者必用良工, 守成者必用儒臣, 儒臣之事業, 非積數十年, 殆未易成也.” 『元史』, 卷146,列傳 33, 「耶律楚材」傳, 頁3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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吏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36) 이에 太宗은 十路課稅所를 설치하고 그 장관과 차관인 徵收課稅吏, 副使에는 士人 즉 儒學을 수학한 사람을 임명하였다.37) 이러한 新稅制의 시행은 漢人世家들의 民政과 財政權을 약화시킨 반면, 몽고정권의 직접지배체제를 강화시켰다. 한편 이 때 徵稅吏로 발탁된 儒者들은 세금징수에 있어서의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몽고지배층의 儒者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耶律楚材가 제창한 조치들은 蒙古貴族, 色目商人과 漢人世侯들의 강렬한 반대와 저항에 부딪혀 이러한 漢化의 주장은 실질적으로 부분적인 실현에 그쳤다. 이처럼 耶律楚材는 몽고지배층의 정책결정에 영향을 주어 당시 漢文化와 漢人의 보호에 앞장섰다. 이 외에 漢人世侯들은 몽고지배층의 신임을 바탕으로 문화유산과 儒者들을 보호하고자 했다. 예를 들면 眞定의 史天澤 · 東平의 嚴實 · 順天의 張柔 · 齊南의 張榮 등의 漢人世侯들은 한문화의 보존을 위해 문화유산을 수집 · 보존하였으며, 漢人儒者들을 초빙하거나 또는 이들에게 은신처 · 활동장소를 제공해 주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던 것이다.38)

이와 같이 정복자인 몽고지배층과 피정복자인 漢人들의 서로 다른 입장, 즉 漢地에 대한 수취체제를 확립하려는 몽고정권의 입장과 한문화를 보존하려는 漢人들의 입장은 결국 漢人儒者의 보호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이로써 몽고정권하에서 전통적인 지배권을 상실했던 儒者들도 꾸준히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해 나갔다. 耶律楚材는 때때로 太宗에게 周公과 孔子의 사상을 이야기하고, 학교를 설치하여 몽고 대신의 자제들에게 孔子의 윤리도덕을 가르치는39) 등의 노력을 기울였는다. 또한 그는

36) 蘇天爵, 『元文類』, 文淵閣四庫全書 1367(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57, 「中書令耶律公神道碑」, p.832. 참조.

37) 蘇天爵, 『元朝名臣事略』, 卷5, 「中書耶律文正公」, 頁3b.

38) 金陽燮, 「遼 · 金 · 元 三史編纂에 대하여」, 『中央史論』6(1989), pp.233-234 참조.

39) 趙振績 · 王民信 撰, 「耶律楚材 · 許衡」, 中華文化復興運動推行委員會, 『中國歷代思想家』(臺北: 商務印書館,1978),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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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상층 지도자들에게 漢代 太子太保 陸賈의 진언을 인용하여 “비록 馬上에서 천하를 얻었을지라도 馬上에서 통치할 수 없다.”40)라고 하며 漢地統治에 있어 儒臣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太宗에게 儒學者를 선발하는 시험의 실시를 건의41)하여 1238년 戊戌選試가 시행되었다. 이 戊戌選試는 儒人의 1/4에 해당하는 4,020여 명만이 賦役을 면제받고 관직을 얻은 자도 극소수였지만, 당시 망국으로 침체되어 있던 漢人 · 女眞人 · 契丹人 지식층에게 커다란 광명을 던져주었다.42) 이러한 사실들은 蒙古族 지배층이 점차로 한지 통치에 있어서의 漢人儒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당시 한지의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儒者層을 선별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趙復에 의한 朱子學 北傳

南宋의 朱子學이 趙復에 의하여 화북지역으로 전파된 시기는 耶律楚材 같은 金朝 관료출신 한인세후들이 몽고 정복에 대하여 한문화를 보호하려고 노력하였고, 漢人儒者들을 기용하도록 황제에게 조언하여 漢人儒者들이 어느 정도 蒙古族 왕조의 관료사회로 진입하고 있던 시기였다. 본문에서는 金의 북송정복 이후 지리적으로 양분된 남북이 각각 어떠한 사상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南宋에서 집대성된 朱子學이 南宋에서는 어떻게 인식되었으며 또 어떻게 북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40) “天下雖得之馬上, 不可以馬上治.” 蘇天爵, 『元朝名臣事略』, 卷5, 「中書耶律文正公」, 頁3b. 이 내용은 漢 高祖時 儀禮를 제정했던 太子太傅 陸賈가 高祖에게 “去馬上得之 寧可以馬上治之乎”라고 儒治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진언한 말이다. 司馬遷, 『史記』(全) (景仁文化社, 影印本), 卷97, 列傳 第37, 「麗生 陸賈」, p.2698.

41) 安部健夫, 「元代知識人と科擧」, 『元代史の硏究』(東京: 創文社,1972), p.7.

42) 安部健夫, 위의 논문,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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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漢 · 唐의 經學과 구별되는 새로운 儒學으로서의 程朱學 또는 朱子學은 北宋代의 周敦頤 · 張載 · 程顥 · 程頤 · 邵雍 등에 의해 그 이론적기초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의 학문은 정치 · 사회적인 상황의 변동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程顥는 당시 학문적 명성이 대단히 높았는데, 그가 사대부들에게 어떻게 추앙받았는지는 더 程顥 · 程頤 형제의 문집인 『二程集』에 잘 나타나고 있다.

관직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程顥)를 본받고자 하였으며 그에게 질의하여 의혹을 풀었다. 마을의 사대부 모두가 그를 높이 숭앙하고 그와 交遊하는 것을 즐거워하였고, 學士들은 모두 그를 宗師로 삼아 道를 講論하고 義를 좋아하게 되었다. 여행 중에 洛陽을 지나는 사람조차도 이름을 알고 見識이 있기만 하면 반드시 찾아가서, 허연히 왔다가 갈때는 마음이 뿌듯해져 돌아가며, 마음으로 감동하여 옷깃을 여미고 진실로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선생은 몸은 비록 더욱 뒤로 물러나고 地位가 더욱 낮아졌으나 그 名聲은 세상에 더욱 높아졌다.43)

이처럼 程顥는 당시 사대부의 존경과 숭앙을 받았으며, 극히 높은 명성과 명예를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王安石의 新法을 반대하여 핍박을 당하였다.44) 程頤 역시 哲宗 元祐年間(1086-1093)에 舊法黨의 領袖인 司馬光의 支持로 得勢하였으나 이후 程顥 · 程頤를 중심으로 하는 洛黨과 蘇軾을 중심으로 하는 蜀黨의 당쟁에 말려들어 20여 년간 학술이 금지되는 등 이들의 학문적 역정은 결코 평탄치 않았다.45)

金의 中原征服 이후 北宋의 황실, 귀족, 관료, 그리고 당시 학풍을 주도

43) “在任者皆慕化之, 從之質疑解惑, 闀里士大夫皆高仰之, 樂從之游, 學士皆宗師之, 講道勤義, 行李之往來過洛者, 苟知名有識, 必造其門, 虛而往, 實而歸, 莫不心醉斂衽而誠服. 于是先生身益退, 位益卑, 而名益高于天下.” 『二程集』(中華書局, 影印本, 1981), 「門人朋友敍述幷書」, p.332.

44) 徐遠和, 『洛學源流』(山東: 齊魯書社,1987), p.372.

45) 徐遠和, 앞의 책,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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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던 학자들이 대거 남쪽으로 이동한 후 南宋에서는 이들의 理學的 學風이 계속적으로 이어지면서 대체로 乾道年間(1165-1173)에는 朱熹 · 呂祖謙 · 張栻, 淳熙年間(1174-1189)에는 朱熹 · 呂祖謙 · 陸九淵, 이후에는 朱熹 · 陸九淵 · 葉適 등이 당시의 학풍을 주도하였다.46)

南宋의 高宗 初期에는 北宋 멸망의 책임을 물어 王安石의 新法을 배척하고 舊法黨과 관계있는 楊時 · 胡安國 · 朱震 등 理學者들이 등용되고 科擧에 이학이 중시되었다.47) 그러나 1138년에 秦檜(1090-1155)가 金과의 화의를 성공시키고 大權을 장악하자 趙鼎 · 尹淳 · 胡宏 등이 이를 반대하였다는 이유로 1144년 또다시 이학이 대대적으로 금지되었다.48) 1155년 秦檜가 죽은 후 12년간 금지되었던 이학이 다시 중시되자 朱熹 · 呂祖謙 · 陸九淵 등의 저명한 理學家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紹興29년(1159) 周

46) “謝山(全祖望)同谷三先生書院記曰 ; 宋乾淳以後, 學派分而爲三, 朱學也, 呂學也, 陸學也, 三家同時皆不甚合, 朱學以格物致知, 陸學以明心, 呂學則兼取其長.” 『宋元學案』, 卷51, 「東萊學案」; “祖望謹案. . .乾淳諸老旣沒, 學術之會總爲朱陸二派, 而水心斷斷其間, 遂稱鼎足.”『宋元學案』「水心學案, 序錄」.黃公偉는 남송 사상계의 흐름을 다음과 같이 系譜化하여 정리하였다. 黃公偉, 『宋明淸理學體系論史』(臺北: 幼獅文化事業公司, 1971), p.190.

47) 袁征, 『宋代敎育』(廣東: 廣東高等敎育出版社. 1991), p.53

48) 袁征, 위의 책, p.55.

각주 48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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敦頤의 사당이 건립되고, 二程을 配祀함으로써 周敦頤 · 二程에게 理學의 정통적인 지위를 부여하였다.49)

그러나 이학은 淳熙(1174-1189)와 紹熙(1190-1194)연간에 다시 배척되는 등 수많은 수난을 겪었다. 그 중에서도 혹심했던 것은 慶元 僞學之禁이었다. 즉 權臣 韓侂冑로 인해 1195년에 道學은 ‘僞學’으로 지탄을 받게 되어 다음 해에 금지되기에 이르렀다. 對金 强硬路線을 주장하던 韓侂冑는 그의 노선을 반대하는 趙如愚를 몰아내고, 朱子도 趙如愚와 정치 · 사상적 보조를 같이 한다는 이유로 ‘僞學之黨’으로 지목되어 관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1196년 조정에서는 이들의 저작을 傳習하는 것을 금지하였으며 太學과 州縣學에서 매월 실시하는 考試의 답안을 심사하여 理學의 관점을 인용한 자가 있으면 敎授와 관련 관원을 처벌하였다.50) 그러나 1209년 북벌계획을 실패한 韓侂冑가 처단되자 僞學之禁은 점차 풀리게 되었다. 이로써 1211년 李道傳이 학술금지를 해제하는 조칙을 내려줄 것을 청하였고, 1220년에는 魏了翁 등의 청원에 의하여 周敦頤는 元, 程顥는 純, 程頤는 正, 張載는 明이라는 시호를 추증하는 등 理學의 지위가 크게 상승하였다.51) 이후 1241년(理宗 淳祐 元年)에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리게 되었다.

짐은 孔子의 道가 孟家 이후에는 전해지지 못하였으나 우리 조정의 周敦頤 · 張載 · 程顥 · 程頤에 이르러 진실로 실천되었고, 聖域을 깊이 탐구하여 천 년 동안 끊어진 학문이 비로소 귀착하는 바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중흥한 이래 또 朱熹의 정밀한 생각과 밝은 변별을 얻어 안팎이 종합되고, 『大學』 · 『論語』 · 『孟子』 · 『中庸』과 같은 책의 본말을 꿰뚫게 되었으며, 공자의 도가 세상에 더욱 크게 밝아졌다. 짐이 매양 다섯 신하의 논저를 보면 (그 내용이) 알차면서도 훌륭한 점이 많으니 이제부터 학문을 배울 때 학관에 명령하여 종사에 배열하게 하여 이로써 널리 권장하는 뜻을 나타낸다.52)

49) 徐遠和, 앞의 책, p.376.

50) 袁征, 앞의 책, p.68.

51) 徐遠和, 앞의 책, p.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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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오랜 동안의 이학의 수난이 마감되는 신호였다. 이때부터 南宋에서는 理學이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南宋은 金과의 군사적 대치국면으로 인한 재정의 고갈로 官學이 쇠퇴하였고53), 당시 학교가 구태의연한 註疏와 詞章의 연마에 치중하며 科擧를 준비하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함으로서 교육과 학문의 내용이 空疎해졌다.54) 이러한 상황에서 理學者들은 科擧 위주의 학교교육을 비판하고 의리의 학문을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학문적 입장을 반영할 수 있는 교육 · 강습의 장으로서의 서원 건립에 적극 앞장서게 되었다. 그 결과 南宋代 총 203개소에 달하였다. 특기할 것은 慶元의 ‘僞學之禁’ 시기에 관직을 잃고 낙향한 朱子 등은 서원에서 講學을 통해 자신들의 학문을 전파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理學은 서원을 근거지로 하여 면면히 계승 발달하여 전국의 서원 가운데에 理學을 전수하는 곳이 약75%를 점하였다.55) 더구나 이 시기에 이르면 서원의 官學化 현상이 나타나고 國子監과 太學 州縣學의 교학내용도 서원과 유사하게 되었으며, 대다수의 서원에서는 朱子의 「白鹿洞書院揭示」를 강령으로 채택하였다.56) 결국 南宋代의 朱子學은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점차 사상계의 지배적 위치를 확보해 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2) "朕惟孔子之道, 自孟軻後不得其傳, 至我朝周敦頤 · 張載 · 程顥 · 程頤, 眞見實踐, 深探聖域, 千載絶學, 始有指歸. 中興以來, 又得朱熹精思明辯, 表裏混融, 使大學論語孟子中庸之書, 本末洞徹, 孔子之道, 益以大明于世. 朕每觀五臣論著, 啓沃良多, 今視學有日, 其令學官列諸從祀, 以示崇獎之意." 『宋史』, 卷42, 「理宗三」, pp.821-822.

53) 葉鴻灑, 「論宋代書院制度之産生及其影響」 『宋代史論集』第9集(臺北,1997)pp.431-432.

54) 寺田剛, 『宋代敎育史槪說』(東京,1965), pp.244-248.

55) 楊愼初 · 朱漢民 · 鄧洪波, 『岳麓書院史略』(湖北省: 新華書店, 1965), p.61.

56) 袁征, 앞의 책,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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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에서 南宋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사상계의 흐름과는 달리 北宋의 멸망과 함께 金의 통치하의 華北地域은 南宋과 단절된 상태로 南宋과는 다른 형태의 문화를 형성해 가고 있었다. 南宋과 金의 대치로 말미암아 南宋의 理學 특히 理學의 발전 종합된 형태로서의 朱子學은 전파되지 못하였으므로 동으로 淮水, 서로 大散關에 이르는 국경선 이북에는 詞章 중심의 漢唐的인 儒學風이 성행하였다. 당시 북방 사대부 계층 중에는 理學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全眞敎의 三敎同源이라는 관점이 유행하였고57) 오히려 金 나라에서 가장 성행한 학문은 佛學이었으므로 漢族 士人들은 배불적인 성향을 가진 二程 理學에 큰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고도 할 수 있다. 대체로 당시 中原은 武勇의 기풍이 현저했고, 학술적으로는 蘇家의 학풍이 현저하였으므로 朱子學은 강습되지 않았으며58) 그만큼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蒙古의 對金 정벌 이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는 1215년 金 황실이 汴京으로 천도한 후 흩어진 儒生들이 金代의 漢文化를 보존하기 위해 華北 각지의 크고 작은 漢人世家59)에게 의지하면서 金의 士風을 계속 유지하고 있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다. 漢人世家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東平의 嚴實(1198-1256)이었는데 東平의 學風은 완전히 舊金의 詩賦, 經術의 學이었다.60) 金의 멸망 이후 1238년에 실시된 戊戌選試에서 金代의 科擧방법을 그대로 답습하고, 합격하여 徭役免除의 특권을 받은

57) 姚大力, 「金末元初理學在北方的傳播」,『元史論叢』第2集(北京; 中華書局,1983, 4), p.219;福田殖, 「元代の經學者 許衡 - その思想的 特徵」, 『九州中國學報』37輯(1999), pp.74-76.여기서 理學이란 北宋의 二程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새로운 儒學氣風을 말한다. 南宋에서 성립된 朱子學이 北方으로 전래된 시기는 趙復이 蒙古軍의 포로가 된 1235년 이후이지만 당시 舊金地域에는 北宋 理學의 잔재가 남아있었던 것이다.

58) 狩野直喜 箸, 吳仁煥 譯, 『中國哲學史』(서울: 乙酉文化社, 1988), p.441.

59) 당시 漢人世家 중에서 특히 東平(山東省)의 嚴實, 順川(河北省)의 張柔, 眞定(河北省)의 史天澤 등이 가장 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八田眞弓, 「元の世祖と漢人知識層」,『史窓』36號(1979, 3), p.96.

60) 姚大力, 앞의 논문,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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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중에 詞賦 혹은 詩賦科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詞賦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舊金代의 학풍에 연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61)

그러나 宋 황실의 남천 이후 華北地域에도 北宋의 理學은 家學의 형태로 다소간 잔존하였다. 元初의 理學家 劉因(1249-1293)이 澤州(지금의 山西 晉城)理學의 淵源을 설명하면서 澤州에서도 理學이 학습되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처음에 택주의 풍속이 순박하여 사람들이 학문을 알지 못하였다. 宋 治平 연간에 이르러 明道 정호 선생이 晋城을 3년간 다스리면서 모든 고을에 학교를 세우고 틈틈이 친히 가서 아동들의 讀書와 句讀를 지도하였다. 그 가운데 빼어난 자를 선발하여 學舍와 양식을 마련 몸소 가르쳤다. 진성을 떠난지 10년도 못되어 儒學에 종사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이로부터 宋金을 통털어 택주에는 선비가 많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62)

郝經도 자신의 가문에서 이학을 가학으로 삼아 내려온 내력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高祖와 曾祖의 윗대로부터 程선생의 門下에 들어가 家學으로 삼았다. 6代에 걸쳐 전해지고 내려오면서 남아 있는 가학을 받들어 옴에 있어서 감히 이를 실추시키지 않았다.63)

61) 安部健夫, 「元代知識人と科擧」, 『元代史の硏究』(東京: 創文社,1972), p.12.

62) “初, 澤俗淳朴, 民不知學, 至宋治平中, 明道先生爲晋城三年, 諸鄕皆立校. 暇時親至, 爲正兒童所讀書句讀.擇其秀異者, 爲置學舍 · 糧具而親敎之, 去邑才十余年, 服儒服者已數百人. 由是盡宋與金, 澤恒號稱多士.”『靜修集』 (文淵閣四庫全書1213, 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16, 「段直墓碑銘」.

63) “高曾而上, 亦及程先生之門, 以爲家學. 傳六世至經, 奉承余緖, 弗敢失墜.”『陵川文集』(文淵閣四庫全書1192, 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27, 「兩宋先生祠堂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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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을 보면 북방지역에도 미미하게나마 理學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金朝의 士風은 아직도 漢唐 이래의 전통 經學的인 注疎·記誦에 치중되어 前人을 답습할 뿐이었고, 많은 사람은 詞章 聲律에 潛心하였다. 理學에 대해서 약간 알고 있는 소수의 士人들조차도 대부분 그것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때문에 理學은 적당한 傳授環境과 명확한 師承授受 체계가 없었다.64)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이학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북방 사상계로의 朱子學의 수용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알려지고 있다. 1235년 太宗의 湖北省 점령시 포로가 되었던 南人 朱子學者 趙復에 의하여 전파된 경우65)와, 朱子의 제자인 黃幹(1152-1221)으로부터 宋末의 何基(1188-1268) · 王柏(1197-1274), 元의 金履祥((1232-1303) · 許謙(1270-1337)에게 전해진 경우, 그리고 黃幹의 제자인 饒魯(?-1256)로부터 程若庸(?-1268)과 吳澄(1249-1333)으로 계승되었다는 견해이다.66) 이 중에서 元朝 朱子學의 주류는 趙復에 의하여 이

64) 姚大力, 앞의 논문, p.219.

65) 黃公偉는 조복에 의해 시작된 강한학파의 계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黃公偉, 『宋明淸理學體系論史』(臺北: 幼獅文化事業公司, 1971), pp.281-284. 程朱學所傳 - 趙復(江漢)

66) Wing-tsit Chan, "Chu Hsi and Yüan Neo-Confucianism," Hok-lam Chan & Wm.Theodore de Bary eds, Yüan Thought (New York: Columbia Univ. Press, 1982), p.197.

각주 66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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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졌다는 것이 통설이다.

趙復에 의해 朱子學이 北方 舊金地域의 蒙古族에게 전해진 것은 蒙古軍이 南宋을 정벌하고자 할 때였다. 1235년 太宗은 태자 曲出에게 명하여 宋을 치게 했는데, 다음해 南宋 德安(현 湖北省 安陸)이 함락되었다. 이때 蒙古의 權臣 楊惟中(1205-1260)의 從軍(참모) 姚樞(1203-1280)는 太宗으로부터 儒 · 道 · 釋 · 醫 · 卜 · 占 등의 기능을 지닌 자를 찾으라는 명을 받고 있었다.67) 姚樞는 이들 중 南宋의 儒者 趙復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포로가 되어 燕京에 도착한 趙復은 姚樞에게 程朱의 여러 經과 傳註를 전해 주고 이를 敎授해 주었다.68) 楊惟中은 姚樞와 함께 趙復이 朱子學을 議論하는 것을 듣고 1238년 燕京에 太極書院을 짓고 周子祠를 세웠다.69) 여기에 程顥(1032-1085, 明道) · 程頤(1033-1107, 伊川) · 張載(1020-1077, 橫渠) · 楊時(1053-1135, 龜山) · 游酢(1045-1115, 廣平) · 朱子(1130-1200) 등 六君子를 配享하고 儒書 8,000여권을 選取하여 趙復으로 하여금 주자학을 講義하도록 청하였다.70) 이로부터 100인 이상의 학자가 燕京에 세워진 太極書院에 와서 趙復과 함께 講學함으로써 朱子學 전파의 기초를 마련했다.71) 이로써 金과 南宋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으로 인해 단지 南宋地域에만 국한되었던 程朱學이 비로소 예전의 금나라지역인 華北으로 전해지게 되었다.72)

67) 『元史』, 卷158, 列傳 第45, 「姚樞傳」, 頁1b; 『宋元學案』(臺北: 世界書局, 1973), 卷90, 「魯齋學案」, 頁1.

68)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4.

69) 『新元史』, 卷133 「楊惟中傳」, 頁4b에는 “凡得知名士數十人收伊洛諸儒著述, 送燕京立宋大儒周敦頤祠, 建太極書院 延趙復王輝講學其間, 慨然欲以道學濟天下.”라고 되어 있고, 『新元史』, 卷4, 「太宗本紀」, 頁6b. 戊戌條에는 “十年. . . 冬十月. . . 楊惟中建太極書院於燕京.”라고 기록되어 있다.

70)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4.

71) 『新元史』(臺灣: 開明書店 影印本, 1974), 卷二三四, 「趙復傳」, 頁1b;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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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復에 의해 朱子學이 北方地域으로 전해짐에 따라 北方의 유학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종전에는 詞賦를 위주로 하는 漢唐風의 儒學이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에 반해, 修己治人을 근본목적으로 하는 도리의 學問인 朱子學이 점차 확산되었던 것이다. 趙復은 북방 사상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漢 · 唐代의 經學과 자신이 강의한 朱子學을 구별하기 위하여 『傳道圖』를 만들어 伏犧 · 神農으로부터 周 · 程 · 張 · 朱로 이어지는 道統을 확립했고, 또한 그 뒤에 조목별로 書目을 나열하였다. 이것은 二程 이후의 書冊이 너무나 廣博하여 학자들이 일목요연하게 이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별도로 『伊洛發揮』를 저술하여 그 宗旨를 標하고, 朱子門人의 계통을 알 수 있도록 『師友圖』를 만들었으며 또한 伊尹 · 顔淵의 言行을 수록한 『希賢錄』을 지어 학자들이 알도록 하였다.73) 이와 같이 太極書院, 周子祠를 짓고 舊金의 지식인들이 운집한 燕京에서 朱子學을 공개적으로 講授한 것은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74) 이를 기반으로 朱子學은 蒙古族 治下의 옛 金나라 지역으로 확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국가 공인의 학문으로 채택되어 중국전역으로 점차 流傳, 擴散되었다.75)

이상과 같이 趙復은 1236년 德安에서 蒙古軍의 포로가 되어 燕京에 가

72) 淸의 黃百家는“石敬瑭의 後晉시에 燕雲 16주가 분할된 이후 북방은 異域이 된지오래였다. 비록 宋에는 뛰어난 儒者들이 다투어 나왔지만 이렇게 성행했던 (주자학의)가르침이 북방에는 통하지 못하였다. 조복이 南冠의 죄수가 됨으로써 理學이 북전하여 姚樞 · 竇黙 · 許衡 · 劉因 등이 程朱學을 얻어 그것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북방 이학이 왕성하게 되었다.(百家謹案. 自石晉燕雲十六州之割, 北方之爲異域也久矣, 雖有宋諸儒疊出, 聲敎不通. 自趙江漢以南冠之囚, 吾道入北, 而姚樞竇黙許衡劉因之徒, 得聞程朱之學以廣其傳, 由是北方之學鬱起.)”라고 하였고, 『宋元學案』卷九十, 「魯齋學案」, 皮錫瑞는“북방 민족은 주자가 있는 줄이야 알았지만 그의 책을 다 보지는 못하였다”라 하여 모두 조복을‘道北第一人者’으로 간주하고 있다.皮錫瑞, 『經學歷史』(臺灣: 商務印書館,1984), p.56.

73) 위와 같음.

74) 安部健夫, 「元代知識人と科擧」, 『元代史の硏究』(東京: 創文社,1972), pp.34-35.

75) 黃公偉, 앞의 책,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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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程朱의 經書와 傳注를 전해주고 그 학풍을 직접 강연함으로써 宋朝의 朱子學이 蒙古人들과 舊金 漢人 지식인들에게 전해지도록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北方에 전해진 朱子學은 점차 北方의 한인 지식인들에게 확산되기 시작했는데, 許衡은 사회,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經世를 위한 학문을 추구하던 중 姚樞로부터 이 朱子學을 전해 받고 급격한 사상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3) 許衡의 朱子學 受容

許衡의 사상적 경향은 그가 34歲(1242년)에 朱子學을 수용하는 것을 계기로 하여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朱子學을 접하기 이전에는 易, 兵, 刑, 諸子百家說 등을 토대로 漢·唐的인 詞章風의 儒學을 위주로 하던 그가 朱子學으로 전향한 이후에는 오직 朱子學의 기본원리를 바탕으로 實踐躬行하는 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許衡의 朱子學 수용은 그 자신의 사상에서도 커다란 전환점이 된 것이었지만, 후에 元朝의 漢法受容政策 수립과 朱子學의 전파, 보급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許衡이 朱子學을 수용하는 배경과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生評을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許衡은 懷慶府(河南省)의 河內 사람으로 字는 仲平으로,76) 그의 집안은 대대로 金의 統治下에 농업에 종사해 왔는데 부친 通은 蒙古가 金을 정벌할 때 전란을 피하여77) 河南으로 이주하였고, 1209(金, 泰和9년) 9월 新鄭縣에서 衡을 낳았다. 許衡은 7세에 서원에 입

76) 『元史』, 卷158, 列傳, 第45, 「許衡傳」, 頁3a; 蘇天爵, 『元朝名臣事略』(文淵閣四庫全書451, 臺灣: 商務印書館)卷8, 「左丞許文正公」에 “公名衡, 字仲平, 懷慶, 河內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77) 당시는 금말기의 혼란기였으니 1208년 금의 장종이 죽고 위소왕이 즉위하였다. 그는몽고인의 안목으로 볼 때 유약하고 무위적이었다. 징기즈칸은 이에 금조정복을 계획하였는데, 이것이 혼란의 시작이었다. 趙振績·王民信 撰, 위의 책,「耶律楚材 · 許衡」1977, 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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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하였는데 서적을 읽으면 반드시 그 뜻(志)을 궁구하고 항시 학문을 즐겼다.78) 이에 스승은 부모에게 말하기를 “아이의 깨달음이 범상치 않으니 후일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79)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許衡은 1234년 金이 멸망할 때까지 그가 태어난 新鄭에서 살았다. 1224년 16세 때는 郡의 기록을 담당하는 從事가 된 적도 있었으나 당시 金 宣宗의 陵을 건립하는 데에 백성이 크게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사직하였는데, 이 경험은 그가 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80) 그리하여 그는 世亂家貧한 와중에서도 좋은 책을 구해 학문을 익히기에 힘을 기울였다. 심지어 日者(점장이)의 집에서 『尙書疏義』를 빌려 보고 爲學과 治世의 法을 考究하고 언행을 조심하여 實踐躬行에 노력하였다81)는 것은 그 한 예이다. 그러던 중 許衡은 1232년에 蒙古軍에게 포로가 되어 이후 金이 멸망할 때까지 포로로서 新鄭에 머물러야 했다. 金朝를 멸망시킨 太宗이 다시 南宋을 정복하려고 南征을 개시했을 때 許衡은 山東 泰安縣의 俎徠山에 은거했다가 다시 1235년 27세 때 東館鎭으로 이주하였다.82)

許衡이 이곳에서 생활했던 시기는 北方 理學史上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南宋의 儒者 趙復이 北方 舊金地域에 朱子學을 전해준 것이 바로 이 시기이며, 楊惟中과 姚樞가 趙復으로 하여금 燕京에 太極書院과 周子祠를 건립하고 講學을 시작함으로서 북방에 새로이 朱子學이 전파될 수 있는

78) 허형은 이 때 그 스승에게 묻기를 “독서는 무엇을 위함입니까?” 라고 묻자 그 스승이대답하기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허형은 “그것뿐입니까?” 라고 응했다. 스승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고, 감당치 못하여 떠난 스승이 3명이라고 한다.『元史』, 卷158, 列傳, 第45, 「許衡傳」 頁3b.

79) 『元史』, 卷158, 列傳, 第45, 「許衡傳」, 頁3a.

80) 蘇天爵, 『元朝名臣事略』(文淵閣四庫全書 451, 臺灣: 商務印書館), 卷8, 「左丞許文正公」, 頁21b.

81) 蘇天爵, 『元朝名臣事略』, 卷8, 「左丞許文正公」. 頁22a.

82) 歐陽玄, 『圭齊集』, 文淵閣四庫全書 1210(臺灣: 商務印書館), 卷九, 「許先生神道碑」, 項2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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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가 마련되었던 것도 이 시기였던 것이다.83) 이 때 許衡은 단지 泰安縣의 東鎭館에서 王弼(226-249)의 저서인 『易經王輔嗣說』을 얻어 兵亂의 혼란 속에서도 晝夜로 이에 전념하였다. 당시 그의 학문하는 태도에 있어 특히 주목할 것은 ‘몸소 실천하는 것’이었다.84)

1242년 許衡은 魏의 大名에서 그의 사상형성에 있어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두 인물, 즉 竇黙(1196-1280)과 姚樞(1203-1280)를 만났다. 許衡은 당시 大名에 살고 있던 竇黙85)과 百家의 說과 醫卜兵刑, 貨殖水利, 算數之術 등을 깊이 토론하였다.86) 그리고 許衡은 姚樞로부터 朱子學을 접하고 그것을 수용함으로써 생애 최대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당시는 許衡이 34세가 되어 蘇門山의 姚樞를 방문하였는데 이때 그는 伊川의 『易傳』, 주자의 『論孟集記』, 『中庸章句』, 『或問』, 『小學』 등을 얻어서 돌아왔다.87) 이를 읽고 크게 깨달아 반성하여 문도들에게 말하기를 “옛날의 授受는 참으로 猛狼하였다. 이제 비로소 進學하는 순서를 들었으니, 만약 나와 꼭 相從하려면 前日의 배운 바를 버리고 『小學』의 灑掃應對에 종사함이 進德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라”88)고 하였다고 한다. 또 朱子의 『小學』을 근본으로 하여 “小學과 四書는 내가 敬信하기를 神明과 같이 한다. 능히 이것을 보고 얻음이 있으면 他書를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89)고 주장

83)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4.

84) “. . .身體而力踐之 言動必揆諸義而後發. . .” 『元史』,「許衡傳」, 頁3a.그의 실천적인 학문태도와 倫理道德觀은 다음과 같은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署中過河陽, 溫甚, 道有梨, 衆爭取琰之, 先生獨危坐樹下, 或問之, 曰; 非其有而取之不可, 人曰;世亂此無主, 先生曰;梨無主吾心獨無主乎”. 張伯行, 『正誼堂文集』(1708, 淸. 康熙 戊子年刊. 卷11, 「許魯齋先生傳」.

85) 竇黙은 中書省의 楊惟中이 釋, 道 , 儒士를 소집하라는 朝廷의 명을 받고 있을 때 그를 따라 1237년 大名으로 왔었다. 『元朝名臣事略』, 卷八, 「內翰竇文正公」, 頁2a.

86) 『元史』, 卷158, 「許衡傳」, 頁3a.

87) 『元朝名臣事略』, 卷8, 「左丞許文正公」, 頁22b.

88) “昔者授受, 殊孟狼也. 今始聞進學之序, 若必欲相從, 當率棄前日所學, 從事小學之灑掃應對, 以爲進德之基.” 『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4-5.

89) “小學四書, 吾敬之如神明, 自汝孩提便令講習望於此有得也, 他書雖不治無憾也.” 張伯行,『正誼堂文集』, 卷之四, 「與子師可」, 頁12b; 『魯齋遺書』 卷13, 「國學史蹟」, p.4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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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許衡은 朱子學을 접하기 전에도 漢唐的인 詞章風의 學問으로 大名 일대에서 이미 名望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하는 특성은 경세적 의지를 바탕으로 실천을 중시하였으므로 이러한 경향을 가진 그가 朱子學을 접하자 완전히 朱子學으로 전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學問上의 변화로써 許衡은 후에 더욱 聲名이 현저해졌고, 朱子學의 實踐倫理를 바탕으로 世祖의 幕府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이에 요추는 "선생의 학문은 한결같이 朱子의 말씀을 스승으로 삼았다" 고 지적하였고 明初의 朱子學者인 薛瑄도 "허노재는 오로지 小學과 四書로서 수기 교인의 法으로 삼았다”90) 고 평가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朱子學은 北宋(960-1127)의 周敦頤 · 程顥 · 程頤 등에서 시작되어 南宋의 朱熹(1130-1200)에 의해 집대성된 새로운 儒學理論이다. 이것은 形式的인 訓詁에 치우친 漢 · 唐儒學에 반발하고 당시 성행했던 道敎 · 佛敎에 哲學的, 倫理的인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다. 朱子는 “秦漢이래로 聖學이 전하지 못하였으며, 儒者는 오직 章句만 알고, 訓詁를 일삼아 聖人의 참뜻을 궁구하지 아니하고, 性命道德의 歸約点을 밝힐 줄 몰랐다”91)고 함으로써 秦漢이래의 訓詁的인 儒學風土를 비판하고 性命道德을 목적으로 하는 朱子學의 특성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朱子學은 章句에 대한 훈고보다는 堯, 舜, 禹의 心法傳授를 추구하게 되었고 직접 孔孟에 소급하여 맹자이후 중단된 천여 년의 道統을 잇는다고 하였던 것이다.92) 許衡은 金 말의 戰亂期를 겪으면서 治世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학문에 정진하던 중 南宋 말 朱子 문인들과 조복의 實踐, 經世 傾向의 朱子學을 수용하여 자신의 實踐重視的인 학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90) 『魯齋遺書』, 卷14, 「先儒議論」, pp.1a-5b.

91) 朱熹, 『中庸集解序』.

92) 姚大力, 「金末元初理學在北方的傳播」, 『元史論叢』第2集(北京: 中華書局, 1983),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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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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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章許衡 思想의 特徵과 朱子學

許衡은 元代 朱子學의 官學化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계승한 朱子學의 특징에 대한 이해는 元代 朱子學의 성격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초가 된다고 할 수 있다. 元代에도 다른 시대와 마찬가지로 학문 전승의 계보에 따라 각각의 학문체계가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개별적으로 전개되었다. 특히 許衡이 수용한 朱子學은 중앙의 國子學에서 채택되었기 때문에 그 영향력에 있어 다른 학문체계와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본 章에서는 許衡이 朱子學을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하였는지를 살펴보고, 許衡 사상의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第1節 本體論 : 理氣와 命義

1) ‘道生太極’의 理와 ‘變通 · 度數’의 氣

許衡은 理와 氣를 설명함에 있어“理는 宇宙의 本體로서 萬事萬物의 存在의 原因이 되고, 氣는 이 理에 근거하여 萬物을 形化하고 생성한다”는 주자의 理氣論을 대체로 수용, 계승하여 자신의 理氣論으로 전개하였다. 그러나 許衡의 理氣論의 일반적인 흐름은 朱子의 논리와 흡사하지만, 부분적으로 논리적 결함이나 불완전성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許衡의 理氣論에서는 여러 개념상의 혼돈, 용어 사용의 불명확성 등으로 朱子에게서 볼 수 있는 엄격한 개념화와 논리적 이론의 전개가 분명하지 않다. 이는 朱子가 道敎와 佛敎의 사상체계에 대하여 儒學의 철학적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이론적 완비에 부단히 노력했던 것과는 달리, 許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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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論的 완성의 추구보다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 즉 蒙古族의 中原 침탈로 인한 사회적 혼란상에서 朱子의 학문적 실천에 역점을 두었다는 점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許衡의 이론을 면밀히 고찰해보면 그가 이해하고 있는 道 · 太極 · 理 · 天 등은 사실상 거의 동일한 의미이자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許衡의 주자학 서술에서 보여지는 이론 전개에 상의 논리성이 결여되기 때문에 많은 오해와 억측을 불러일으킨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許衡의 理氣論이나 宇宙論은 朱子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우선 먼저 許衡의 사상 중 本體論의 중요 개념인 理에 대해 고찰해보기로 하겠다. 許衡은‘道生太極’이라고 전제하여 道를 太極보다 본원적인 것으로 규정하였다. 즉 道는 許衡의 사상에서 가장 근원적인 본체가 되는 것이다. 그는 道와 太極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太極의 앞에 이 道가 독립해 있고, 道가 태극을 낳고, (태극은) 셋을 內函하여 하나(一氣)가 되었다. 一氣가 나누어진 뒤에 天地가 상하의 位置를 정했다. 萬物은 신령함을 갖고 있는데 오직 인간만이 가장 귀하다.93)

이는 道 · 太極 · 天地 · 萬物로 이어지는 우주의 생성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許衡이 설정한 본체론의 중요한 핵심이었다.94) 許衡은 우선적으로 道를 제시하고, 이 道에서 太極이 生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道를 太極보다 근원적인 실체로 상정한 許衡의 관점은 太極을 宇宙의 本源으로 규

93) “太極之前, 此道獨立, 道生太極, 函三爲一, 一氣旣分, 天地定位, 萬物之靈, 惟人爲貴.”『魯齋遺書』, 卷10, 「稽古千文」, p.421.

94) 「稽古千文」은 伏犧부터 元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흥망성쇠를 千字로 적어 놓은글로서, 이것은 許衡의 나이 60세에 「大學要略」「大學直講」「中庸直講」「編年歌括」등과 더불어 太學 교학의 필요에 의해 저술된 것이다. 陳正夫 · 何植靖, 『許衡評傳 -附 許謙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1995),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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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 朱子의 이론과 구별된다.

許衡의 道와 太極의 관계정립에 대한 이해와 해석에 대해서는 많은 異論이 있는데, 해석상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첫째,‘太極의 앞에 이 道가 독립해 있었다(太極之前, 此道獨立)’는 것과 둘째,‘道가 太極을 낳음(道生太極)’그리고 셋째,‘셋을 포함하여 하나가 되었다(函三爲一)’는 부분이다. 이것은 곧‘道’와 ‘太極’그리고‘三’과‘一’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老子』 · 『周易』 · 王弼의 『周易注』 등과 연계해서, 또는 周廉溪와 程朱의 이론에 기초해서 매우 다양한 해석이 전개되어 있다.95) 이제 許衡의 本體論의 핵심적인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면, 먼저‘太極之前, 此道獨立’은“혼돈한 物이 있는데, 천지보다 앞서 생겨났고, 고요하고 적막하여 홀로 서서 고쳐지지 않으며 두루 운행하여도 위태롭지 않다”96)라는 老子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道는 太極의 本源을 이룬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둘째,‘道生太極’은

95)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하였다. 徐遠和는 王弼의 『周易注』와 周敦頤· 程朱의 이론을 연결시켜 太極을 天 · 地 · 人 三才로 설정하고, 태극을‘函三爲一’로 해석하였다.‘三’은 천 · 지 · 인이고‘一’은 태극이다. 또 周敦頤와 程朱의 太極論에 근거해서 太極을 太極의 理와 太極의 氣로 구분하였다. 이에 따르면 道에서 太極 이 나오고, 太極이 다시 陰과 陽으로 나뉘어져 천지가 자리 잡는다. 徐遠和, 『理學與元代社會』(北京: 人民出版社, 1992), pp.42-43; 侯外廬는 『노자』와 『周易』에 근거하여 許衡의 道와 太極을 우주생성론과 도덕실체의 두 개념으로 분석하였다. ‘此道獨立’ 에서의 道는 『노자』의 “獨立不改”에, 그리고 ‘函三爲一’도 역시 『노자』의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았다. 또 太極은 『주역』에서 그 연원을 찾았다. 그리하여 道는 程顥의 ‘天之自然’ 혹은 理를 가리키며, 이 道 혹은 理로부터 一氣가 파생되어 천지만물을 생성변화시킨다고 설명하였다. 侯外廬, 『宋明理學史』 上卷(서울: 이론과 실천, 1995), pp.693-694; 文載坤은 道를 우주생성론적 측면으로 보는 것을 부정하고 도덕적 실체로서 해석하였다. ‘道生太極’에서의 道는 인간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선천적인 것이며 윤리화된 정신실체라고 해석하였다. 文載坤, 「許衡의 哲學思想」, 『元代 性理學』, p.142 ; 蒙培元은 태극을 氣로 파악하여 ‘道生太極’를 理가 氣를 生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蒙培元, 『理學的演變』(福建: 人民出版社, 1981), p.181. 陳正夫와 何植靖은 許衡의 ‘性이란 形而上者를 일러 道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理一이다’(“性者卽形而上者 謂之道 理一是也”『遺書』, 卷2, 「語錄下」, p.291)를 근거로 程朱의 이론과 같이 道 = 理라고 설명하였다. 陳正夫 · 何植靖, 『許衡 評傳 - 附 許謙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1995), p.75.

96) “有物混成, 先天地生, 寂兮寥兮, 獨立而不改, 周行而不殆.” 『道德經』, 第25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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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易』의“易의 도리에 太極이 있는데 이것이 兩儀를 낳았다”97)는 논리와 아주 흡사하다. 그리고 許衡의‘道生太極’에서 道와 太極의 관계는 老子에서의‘道’와‘一’의 관계와 같다. 셋째,‘咸三爲一’의 유래는 魏 나라 孟康의“太極元氣는 셋을 포함하여 하나가 된 것”98)이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周易』의 논리에 따르면, 본래‘太極生兩儀’로서 太極元氣는 陰陽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둘을 포함하여 하나가 된 것”(含二爲一)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許衡은 三은 天地人, 一은 태극이며 이 太極은 元氣로서 天地人으로 분화하는 즉‘三’으로 분화하는 ‘含三爲一’과 ‘一分爲三’의 관계로 상정한 것으로 보인다.99) 이것은 老子의“道生一, 一生二, 二生三”100)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許衡은 道의 개념을 설명함에 있어 『周易』, 『老子』 등의 영향을 받아 논리를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노자와 『周易』을 결합하여 道를 보편성과 초월성을 가진 宇宙生成의 최고 本體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許衡은 절대 本源으로서의 道를 상정하고, 여기에 근원하여 天地 萬物

97) “易有太極, 是生兩儀.”『周易』,「繫辭」上.

98) “太極元氣, 函三爲一”, [注]‘孟康曰 : 元氣始起於子, 未分之時, 天地人混合爲一, 故子數獨一也.’ ‘師古曰 : 函讀與含同, 後皆類此.’ 『漢書』(臺灣: 開明書店 影印本, 1974), 卷21, 「律歷志」上.

99)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孫叔平은 “三은 아마 天地人을 가리키며, 一은 아마 理혹은 一氣를 가리키는 것이다. 만약 一氣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아래의 ‘一氣가 이미 나누어진다 는 구절과 연결될 수 있다. 만약 一理를 가리킨다면 그것은 여전히 朱熹의 ‘理는 스스로 氣를 태어나게 할 수 있다’ 는 말을 빌린 하나의 과도적인 고리다.”孫叔平, 『中國哲學史稿』, p.177 라고 했다. 蒙培元은 “三을 하나로 포함하고 있다는 말은 陰과 陽의 두 氣와 兩者의 통일을 가리킨다. 一氣가 이미 나누어진다는 것은 太極의 氣가 陰陽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蒙培元, 앞의 책, p.181. 徐遠和는 “許衡이 『稽古千文』을 쓸 때는 아직 朱熹의 著作 전부를 얻지 못하였고, 그 때문에 그는 太極에 대하여 그가 읽었던 王弼 『周易注』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고 있었다. 王弼은 『周易注』에서 三極을 三才, 天地人으로 해석하였다. 또 ‘易에 太極이 있다’는 말을 ‘太極이란 호칭이 없는 호칭이며, 이름을 붙일 수도 없으며, 취함에 한계가 없으므로 太極이라고 한다. 『王弼集校釋』下, pp.538-553고 하였다. 太極은 天地人을 포괄하는 우주 최대 최고의 것이다. 이 때문에 ‘三을 一로 포함 한다’고 할 때의 三은 실제로 天地人을 가리키며, 一은 太極의 전체를 가리킨다.” 徐遠和, 『理學與元代社會』(北京: 人民出版社, 1992), p.42. 라고 하는 등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르다.

100)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老子』, 42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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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생성된다는 程朱學的 이론의 모형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許衡은 또 다른 곳에서는 太極 = 理의 절대성 · 통일성을 주장한 朱子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하여 “天下의 모든 것에는 對待함이 있지만, 오직 一理만은 對待함이 없으니 이것이 곧 太極이다”101)라 하여 太極 = 理의 절대성 · 보편성 · 본원성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태극의 本源性을 인정한 후에 太極의 앞에 더 근원적인 것을 상정하여 道를 太極보다 우위(道生太極)에 두는 것은 분명한 논리적인 모순이다. 거꾸로 말하면, 먼저 道를 최고의 普遍者로서 상정하고 있으면서 道에서 비롯된 하위개념인 太極을 또다시 道=太極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102) 여기서 우리는 許衡의 本體論 개념 및 인식상의 불명확성을 발견하게 된다.

‘道生太極’의 개념 외에 개념 및 인식상의 不明確性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例로 그가 주장한 ‘天은 바로 理이고 天理는 동시에 道이다’103) 라고 하는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天은 곧 理이다(天卽理也). 있으면 일시에 있는 것이어서 본래 선후가 없다”고 한 것은 理의 本源的 측면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흔히 전통적인 儒家에서 모든 것이 하늘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관념에서 보면 그러한 天과 理가 선후가 없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은 바로 理의 本源性, 絶對性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許衡의 논리에서 道 · 太極 · 理 · 天理 · 天 등은 모두 같은 層次의 개념으로 朱子의 理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道 = 天理의 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許衡은 天理는 바로 天倫이며, 천륜은 바로 五倫이라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하늘에서 인간에게

101) “天下皆有對, 唯一理無對, 便是太極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2.

102) 徐遠和는 이에 대해 “許衡 철학에서 우주론은 아직 완전하게 정립되지 않은 혼돈된상태로서 논하고 있음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稽古千文」에서 볼 때 아직 주자의 모든 저작을 전부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썼기 때문에 도와 태극의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라고 설명하였다. 徐遠和, 위의 책, p.42.

103) “天卽理也. 有則一時有, 本無先後. 有是理而後有是物.” 『魯齋遺書』, 卷1, 『語錄」上;“道者 天理之當然 卽是那中庸的道理”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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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하는 것은 天理로서 當爲規範을 이루고, 인간에게 부여된 이 天理가 바로 天倫 또는 五倫으로, 이것은 인간의 內的 本性을 이룬다. 즉 天理로서의 道가 인간의 본성에 具有되어 性이 되는데, 이 性의 실체는 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五倫인 것이다.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명은 모두가 각기 원칙(당연한 법칙)이 있는데, 이것은 부자간에는 친함이 있고, 군신 간에는 의가 있고, 부부간에는 구별이 있으며, 장유 간에는 순서가 있고, 붕우 간에는 믿음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天倫이라고 일컫는 것이다.104)

許衡이 天理를 인간이 具有한 五倫이라고 파악하는 이상 이 天理가 인간의 일상생활과 직접적으로 관련될 수밖에 없다. 즉 道는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하는 사회적 윤리 기준이자 이치(理)인 것이며,105) 父子 · 君臣 · 夫婦 · 長幼 · 朋友 간의 사람의 도리인 것이다.106) 許衡은 더 나아가 “率性의 道는 다만 君臣 · 父子 · 夫婦 · 長幼 · 朋友간에 존재하므로 일반 사람들이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므로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만일 道를 행하는 사람이 낮고 가깝다는 것을 싫어하여, 道로 삼기에 족하지 않고 벗어나 떨어질 수 있다고 여겨서 君臣 · 父子 · 夫婦 · 長幼 · 朋友를 떠나서 고원하고 행하기 어려운 일을 애써 하려고 든다면 이것은 곧 道가 아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道로 삼을 수 없다”107) 고 하였다.

104) “人之賦命於天, 莫不各有當然之則, 如父子之有親, 君臣之有義, 夫婦之有別, 長幼之有序, 朋友之有信, 乃所謂天倫也.” 『魯齋遺書』, 卷3, 「小學大義」, p.308.

105) “道是日用事物當然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 無物不有 無時不然, 如何須臾離得他.”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106) “蓋爲敎而不本於道, 則非敎也, 爲學而不本於道, 則非學也. 道者何, 父子也君臣也夫婦也長幼也朋友也, 此天之性也, 人之道也.” 『魯齋遺書』, 卷3, 「小學大義」, p.308.

107) “率性之道, 只在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之間, 衆人所能知能行者, 故常不遠於人. 若爲道的人, 厭其卑近 以爲不足爲離了. 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 務爲高遠難行之事, 則便不是道了. 所以說不可以爲道.”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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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子도 일찍이 당시의 학자들이 道를 無形無像에서 구하고자 하는 것을 반대하고, 일상생활에서 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108) 이것은 인간 세계 질서의 타당성을 하늘의 이치에 두고 인간의 일상적인 삶에서 질서를 구현하고자 하는 儒者의 전통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이와 같은 朱子의 견해를 수용하여 만물을 생성 소멸시키는 宇宙의 本源인 天道가 인간의 내재적 도덕규범으로 자리한다고 하였다. 이 天理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한편, 許衡에 있어 天道 · 天理 · 太極 · 道 · 理 등이 우주의 근원적인 本體로서의 개념이라면, 氣는 本體의 원리에 입각해 만물을 形化하고 생성하는 材質이라고 할 수 있다. 天道는 우주의 生成變化의 본원이며, 二氣를 포괄하고 있다. 이 天道가 流行하여 천지만물이 생성 · 발육한다. 二氣는 만물의 材質이고, 만물 생성의 근본 요소이다. 보편성과 초월성을 가진 道(또는 理 · 太極)는 천지 만물 생성변화의 내적 원리가 되고, 二氣는 이 원리에 따라 천지만물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게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許衡은 天道와 陰陽二氣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天道는 二氣인데, 하나의 氣가 消縮하면, 다른 하나의 氣는 곧 발달하고, 하나의 氣가 오면 또 하나의 氣는 반드시 가게 되니 다 함께 소멸하거나 발달하는 이치란 없는 것이다. 陰氣가 자라기 시작하면 陽氣는 곧 潛伏한다. 또 서리가 심하게 내려 수조하면 반드시 陽氣로 하여금 잠복하게 한다.109)

또 “봄 · 여름 · 가을 · 겨울에서 추위와 더위가 代謝하는 것이 하늘의 도이

108) “乃是欲求道於無形無象之中, 近世學者大抵皆然, 聖人語言其實, 此卽吾身日用常行之間可見.” 『朱子語類』, 卷113, 「朱子十訓門人」.

109) “天道二氣 一氣消縮 彼一氣便發達 此一氣來 彼一氣必往 無俱往竝發之理. 陰氣方長陽便伏, 又嚴霜以肅之, 使陽氣必伏.”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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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110)라고 강조한 바와 같이 陰陽의 消長變化는 바로 天道에 근원한다고 하였다. 변화하는 것 자체는 陰陽의 二氣이지만, 그 變化와 變化過程을 가능케 하는 것은 天道인 것이다. 봄 · 여름 · 가을 · 겨울의 변화과정이나 만물의 生長消滅도 바로 天道 유행의 결과이다.

특히 許衡은 현실세계의 변화발전에 대해서 天道二氣에 근거한 ‘變通’과 ‘度數’의 개념을 도출하여 설명하였다. 變通이 사물의 변화 · 발전을 의미한다면 度數는 변화 · 발전의 마땅한 법칙을 의미한다. 變通은 『易傳』의 “ 궁하면 통하고 통하면 장구하다”111) 는 내용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만사만물은 반드시 변화가 있음을 강조하는 의미이다. 이러한 변화의 기저에는 사시사철의 변화처럼 반드시 마땅한 법칙이 존재하는데 이것이 바로 度數이다.

變通은 感應 · 爲主 · 勝負의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다. 許衡은 天道二氣에 운동법칙에 따라 陰陽과 剛柔의 움직임에 의해 사물이 변화하므로 天下에는 모두 對待가 있고,112) 모든 사물은 상대적으로 서로 의존하고 감응한다고 하였다.113) 그러므로 서로 感應하는 陰陽은 일시에 剛하거나 柔할 수 없고,114) 서로 교차하며 待對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許衡은 음양의 변화에는 반드시 主가 되는 것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두 개의 물건이 서로 의지하고 있지만 반드시 그 중 하나를 主로 삼는다. 動과 靜에 성인은 中正仁義로서 이를 定하되 靜을 주로 삼는다. 內外 · 上下 · 本末 모두가 그러하다.115)

110) “春夏秋冬, 寒暑代謝, 天之道也.” 『魯齋遺書』, 「語錄」上.

111) “易窮則變, 變則通, 通則久.” 『易傳』, 「繫辭傳」 下.

112) “天下皆有對.”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2.

113) “世間只有一箇感應, 大事小事, 雖秋毫未嘗無對. 人爲不善, 便有凶禍相對.”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5.

114) “兩剛則不能相下, 兩柔則不能相濟, 物理是如此, 陰陽亦如此.”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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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변화의 과정에서는 그 변화를 주도하는 중심축이 있으므로 四時五行의 변화에도 하나가 主가 되면 나머지는 이를 도와 운행된다.116) 그러나 이 爲主의 관계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許衡은 변화의 지속되면서 主로 삼는 것도 이에 상응하여 달라지는 것이라 하였다.117) 그러므로 萬事萬物은 狀況에 따라 적절하게 변화한다. 許衡은 “天地의 두 氣는 서로 미루면서 변천하는 까닭에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때를 좇아 변화하면서 道에 따른다”118)고 하여 이를 강조하였다.

음양이 서로 感應하고, 상황에 따라 爲主로 하는 것이 바뀌는 과정에는 반드시 勝負가 수반된다. 許衡은 天下의 일은 항상 두 가지가 서로 勝負를 하여 서로 주고받음이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119) 許衡은 또 勝負의 원리를 인간의 역사에 적용하여 다음과 같이 治亂의 반복으로 비유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천하고금에는 一治一亂한다고 했습니다. 治平에는 항상적인 치평이 없고 혼란도 항상적인 혼란은 없으며, 혼란 가운데에 치평이 있고 치평 속에 혼란이 있습니다. 혼란이 극도에 달하면 치평으로 옮겨가고 치평이 극한에 이르면 혼란으로 빠집니다. 혼란의 끝에 치평의 시작이고, 치평의 끝이 혼란의 시작입니다. 평치와 혼란은 서로 찾아들고 자연과 인간은 번갈아 이기는 것입니다. 자연의 승리는 바탕(질)이 꾸밈(문)을 덮음이고 인간의 승리는 꾸밈이 바탕을 이김입니다.120)

115) “兩物相依附, 必立一箇做爲主. 動也靜也,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以靜爲主, 內外也, 上下也, 本末也, 皆然.”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4.

116) “天地間事, 如四時五行, 各有一件爲主, 其他皆相補以行, 每事須觀在何時, 便當以一件爲主.”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5.

117) “天道二氣, 此一氣消縮, 彼一氣便發達, 此一氣來, 彼一氣必往, 無俱往竝發之理, 陰氣方長, 陽便伏又嚴霜以肅之, 使陽必伏.”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2.

118) “天地二氣, 相推變遷, 故恒久到今日, 隨時變易以從道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p.301.

119) “天下事常是兩件相勝負, 從古至今如此, 大抵只是陰陽剛柔相勝, 前人謂如兩人角力相抵, 彼勝則此負, 此勝則彼負. 但勝者不能止於其分, 必過其分然後止, 負者必極甚然後復. 各不得分, 所以相報復到今不已.”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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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과 혼란은 모두가 極한 상황에 이르면 반드시 새로운 국면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화평과 혼란의 勝負 작용으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허형은 이러한 勝負 작용을 인식함으써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자연스럽게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度數는 우주 자연에서 인간 사회에 이르기까지 변화 · 발전의 마땅한 법칙으로 인간 의지 밖의 필연적인 자연원리이다. 許衡은 이에 대해 “ 日月의 운행에는 度數가 있고, 人身의 血氣가 두루 흐르는 것에도 度數가 있다. 天地六氣의 運轉도 이와 같다”121)라고 설명하였다. 우주 안의 모든 사사물물은 이 度數의 원리 아래 변화 ·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사물 안에 일정불변하는 규칙이 있는데 이 규칙이 바로 度數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度數의 범위를 넘어서는 경계점이 있는데, 許衡은 이를 分限이라 하였다. 이 분한을 넘어서면 무리가 따르고 천지의 조화를 깨트리게 된다. 許衡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天地間에 인간이 되고 사물이 되는 것에는 모두 分限이 있다. 分限을 넘어서 지나치게 구할 수 없고 또한 過用해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물건을 함부로 쓰고도 아까운 줄 모르면 곧 하늘에 罰를 짓는 것이다.122)

120) “嘗謂天下古今一治一亂. 治無常治, 亂無常亂 亂之中有治焉. 治之中有亂焉. 亂極而入於治, 治極而入於亂, 亂之終治之始也. 治之終亂之始也. 治亂相尋, 天人交勝, 天之勝質掩文也. 人之勝文勝質也.” 『魯齋遺書』, 卷9, 「與竇先生」, p.410.

121) “日月行有度數, 人身血氣周流亦有度數, 天地六氣運轉亦如是.”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4.

122) “天地間爲人爲物, 皆有分限, 分限之外, 不可過求, 亦不得過用, 暴殄天物, 得罪於天.”『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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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度數의 分限을 넘어서는 것은 하늘에 죄를 짓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항시 度數에 순응하고, 分限을 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許衡 인간사회의 역사적 흐름도 이 變通과 度數의 개념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五帝의 禪讓과 三代의 계승은 모두 數가 그러한 것이다. 그 사이에 堯舜의 불초한 자식이 있었던 것은 變이다. 요순이 그것을 통하여 양보하고 사양할 수는 있었지만 자신이 丹朱와 商均을 두지 않을 수는 없었다. 湯武가 無道의 군왕을 만났으니 變이다. 탕무는 이것에 능통했기에 정벌할 수 있었으나 夏商으로 하여금 桀紂가 태어나지 않게 할 수는 없었다. 성인이 변화를 만나서 그것을 통하게 하는데 또한 오직 자연의 數에 이르고자 함이지 조금의 개인적인 사사로움도 간여시키는 것은 아니다.123)

여기서 ‘遇變而通之’는 사물의 변화를 만나 그것을 적응해 가는 것이고, ‘達於自然之數’는 사물이 변화 · 발전함에 자연의 度數 즉 사물 자체의 규율이 있는데, 이것을 통달해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행위가 度數에 부합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聖人일지라도 역사이를 하며, 사사로운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理一分殊’의 本性과 實踐工夫

許衡에 있어 理는 우주의 本源的 존재이고, 氣는 만물의 실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가 “하늘이 人과 物을 낳고 氣와 주어서 形體를 이루게 하고,

123) “五帝之禪, 三代之繼, 皆數然也. 其間有如堯舜有子之不肖, 變也. 堯舜能通之以損遜,而不能使己之無丹朱商均, 湯武遇君之無道, 變也. 湯武能通之以征伐, 而不能使夏商之無桀紂, 聖人遇變而通之, 亦惟達於自然之數, 一毫之己私無與也.”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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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理를 부여하여 性을 삼는다”124)라고 말하였듯이 氣를 재료로 사물이 존재하면 理는 반드시 그 안에 있어 性이 된다. 理는 하나이지만 이 理는 우주의 모든 事物에 내재되어 性이 되는 것이다. 우주의 本源的인 존재인 理에 근원하는 天地萬物의 性은 초월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理一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稟受 받은 氣는 사물에 따라 각기 다르므로 이것은 分殊이다. 이에 대해 許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크도다 乾元이여! 만물이 이에 힘입어 시작된다”는 말은 (만물이)그 덕성을 받아 허령불매하며, 이것은 사람들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와서 취하려 하면 얻을 수 있고, 구하면 (그에게)준다. 그런데 그 얻은 것이 깊거나 얕고 두텁거나 엷게 다른 分數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人爲)에 달려 있다. 이것은 理가 하나(一)라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구름이 떠다니며 비를 내리는 것’은 恩澤을 베푸는 것이 다르다는 것인데 이것은 氣에 달려 있다. 이 氣에 있는 것이 命이다. 받는 자에게 있지 않으므로, 와서 그것을 구하여도 주거나 혹은 주지 않음은 하늘에 있다. 하늘은 君命이다. 이것은 分殊를 설명한 것이다.125)

萬物이 乾元 즉 陽에서 시작된다. 理一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乾元의 虛靈不昧한 德性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本然의 性으로서 마음의 純善한 本性을 말한다. 반면에 하늘의 作用이 氣에 따라 각각 달라지는 것을 分殊라고 한다. 이 本然의 性은 理一이며 누구에게나 부여된 것이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누구나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스로의 노력이 필요하다. 氣稟의 命인 分殊는 하늘이 氣의 작용에 따라서 각각 稟受하는 정도에 있어서 차별이 존재한다.

124) “天生人物, 旣與之氣以成形, 必賦之理以爲性.”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125) “大哉乾元, 萬物資始, 是彼受其德性, 虛靈不昧, 人皆有之. 是衆來取皆得, 求之卽與之,所得深淺厚薄分數, 在乎人爲也. 此說是理一也. 雲行雨施, 是施恩澤也. 在乎氣. 在乎氣者, 是命也. 不在彼來求取與不與 在乎天, 天者 君命也 此說分殊也.” 『魯齋心法』, p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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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하늘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므로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하늘이 命하는 바는 곧 君命으로 절대적인 것이다.

天地萬物에는 理에 근원하는 모두 같은 性이 내재하고 있어 동일상이지만 각각의 개별 사물은 稟受 받은 氣가 각기 다르므로 차별상이 존재한다. 許衡은 “性은 (형이상학적인)道와 비록 한 가지로 같다고 할 수 있지만, 氣稟은 혹 다르다”126) 라고 말하였다. 하늘에서 품수한 고유한 理, 한가지로 같은 性은 本然의 性이고, 사물에 차이가 생기게 하는 것은 氣稟의 性이다. 이들은 각기 理一과 分殊이다. 이 理一과 分殊는 形而上者와 形而下者로 구분된다. 許衡은 이 理一과 分殊에 대해 “性이란 形而上者를 일러 道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理一이다. 氣란 形而下者를 일러 器라고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分殊이다”127) 라고 설명하였다. 이에 따르면 形而上者로서의 理一은 性과 道를 의미하고, 形而下者로서의 分殊는 氣와 器를 의미한다. 性은 천지만물이 理를 具有한 것이므로 理一이고, 氣는 각각 구체적인 사물마다 품수 받은 바에 따라서 차별이 생기기 때문에 分殊이다. 理一은 形而上者로서의 道이고 分殊는 形而下者로서 器이다.

이러한 許衡의 견해는 일견 朱子의 논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엄연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주지하다시피 朱子는 理一은 우주본체인 太極으로 分殊는 萬物에 내재된 性으로 설명하였다. 즉 朱子에게서는 우주 본체인 太極 = 理는 理一, 만물에 내재된 理로서의 性은 分殊에 해당한다. 여기서는 理一과 分殊가 모두 形而上者이다. 그러나 위에서 논한 바와 같이 許衡은 本然의 性과 氣質의 性으로서 理一分殊를 설명함으로서

126) “性道雖是一般, 而氣稟或異.”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127) “性者卽形而上者, 謂之道 理一是也. 氣者卽形而下者, 謂之氣, 分殊是也.” 『魯齋遺書』,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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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연의 性인 理一은 形而上者, 기질의 性인 分殊는 形而下者로 설명하였다.

이러한 許衡의 理一分殊의 논리는 인간의 문제에 적용하면서 문제점이 발생한다. 許衡은 인간이 本有하고 있는 本性과 하늘로부터 稟受한 氣質을 구분하여 각각 理一과 分殊로서 설명하고 있다. 理一은 인간에 내재된 本然의 善性으로서의 明德이다. 이 明德은 바로 五常의 性인 仁義禮智信이며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품수 받아 선천적으로 本有하고 있다. 그러나 分殊는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하늘의 命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分殊는 인간의 외적인 모든 조건은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늘이 명한 바대로 稟賦 받는 것, 하늘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며 이를 氣稟의 命이라고 한다. 인간은 하늘이 稟賦하는 氣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뿐, 스스로 그것을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許衡은 理一은 五常이며 明德이라고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仁義禮智信은 明德이고 사람들 모두 이것을 가지고 있으니 本然의 性이다. (本然의 性을)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 이것이 바로 理一이다. 貧富 · 貴賤 · 死生 · 脩(壽)短 · 禍福은 氣로써 품부되는 命이니 氣稟의 命이며, 한 번 정해져 바뀔 수 없는 것이니 分殊가 이것이다.128)

이에 따르면 五常 즉 明德은 인간이 누구나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本然의 性이다. 이미 마음속에 내재해 있으니 이것을 구하느냐 구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는 문제로서 자신이 찾고자 하면 찾을 수 있는 것이고, 찾지 않으면 묻혀 있을 뿐 발휘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本然의 性을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나 氣稟의 命은 이

128) “仁義禮智信是明德, 人皆有之. 是本然之性, 求之在我者也, 理一是也. 貧富貴賤死生脩短禍福稟於氣, 是氣稟之命, 一定而不可易者也, 分殊是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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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다르다. 인간의 生死 · 貧富 · 貧賤 등은 하늘이 命한 기품지명 즉 分數에 의해 결정되며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나 노력은 개입할 여지가 없이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즉 하늘이 사람에 따라 제각기 그 부여한 바가 다르며, 인간의 인위적인 노력이나 의지와는 무관하다.

許衡은 또한 “마음에 보존하고 있는 것은 理一이고, 몸이 행하는 것은 分殊이다.”129) 라고 함으로써 인간의 心과 身의 관계를 理一分殊로써 설명하였다. 理一은 마음속의 본연의 性이고 分殊는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 몸으로 직접 행위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許衡은 우주 만물의 性과 氣와의 관계, 인간의 本性之性과 기품지명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의 心과 身의 관계를 각각 理一과 分殊로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本然의 性은 인간이 先天的으로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으로 明德, 理一이고 인간 개개인의 노력으로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分殊는 하늘에 의해 차이가 이미 정해진 바로서 인간의 意志와 상관없다. 그러나 이미 받고 태어난 선천적 기품도 후천적인 수양을 통해서 개선시킬 수 있다. 朱子는 氣質之性의 변화를 통해 本然之性을 회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許衡은 기품지명은 하늘이 주는 것으로 인간의 의지로 간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미 받은 것을 수양하여 개선시킬 수는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기질을 변화시키는 공부이다.

3) ‘命 · 義’의 所以然과 所當然 구분

理의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所以然과 所當然이다. 許衡은 所以然과 所當然을 각각 命과 義로서 규정하였다. 所以然은 모든 사물

129) “心之所存者理一, 身之所行者分殊.”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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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존재 근거이고 所當然은 개별 사물의 생성 변화하는 규칙 · 규범 · 법칙이다. 許衡에 있어 命과 義를 달리 말하면, 자연의 필연적 법칙으로서의 所以然은 命이고, 인간의 도덕적 당위 규범으로서의 所當然은 義이다. 所以然의 命은 자기의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닌데 반해 所當然의 義는 직접 자신의 내재적 의지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許衡은 所以然은 命으로서 本源이고, 所當然은 義로서 末流라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혹자가 묻기를 “窮理하여 천하의 사물에 이르면 반드시 所以然之故와 所當然之則이 있으니 이것을 理라고 이릅니까?” 하니, 답하기를 “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은 窮자를 해설한 것이고, 그 所以然과 所當然은 理자를 말한 것이다. 所以然은 本源이고, 所當然은 末流이다. 所以然은 命이고, 所當然은 義이다. 모든 일과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는 반드시 所以然과 所當然이 있다130)

所以然과 所當然은 같이 理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러나 許衡은 所當然보다 所以然을 더 本源的인 것으로 보았다. 所以然은 만물의 생성, 존재의 필연적인 근거이고 所當然은 개별 사물의 규율, 법칙인 것이다. 따라서 許衡은 所以然을 本源으로 보았고, 所當然은 所以然에 근거하여 성립되는 變化法則이기 때문에 所當然을 末流라고 이해하였던 것이다. 동시에 許衡은 所以然과 所當然은 하나의 보편 이치로서 合一되어 있으면서 本末을 이루고 모든 사물 하나하나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許衡은 所以然과 所當然을 각각 命과 義로 규정하고 이를 하늘이 命한 바로서의 自然의 法則과 인간이 지켜야 하는 道德的 規範으로 구분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하늘에는 命이 있고 인간에게는 義가 있다. 비록

130) “或問 ; 窮理至於天下之物, 必有所以然之故, 與所當然之則, 所謂理也. 曰 ; 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 此解說箇窮字, 其所以然與其所當然, 此說箇理字, 所以然者是本原也, 所當然者是末流也. 所以然者是命也, 所當然者是義也. 每一事每一物須有所以然與所當然.”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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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천과 부귀에 처하더라도 각각 마땅한 일을 행하는 것이 義이다. 인간에게는 단지 하나의 義字만이 있을 뿐이다”131)라고 강조하였다. 이어서 許衡은 하늘로부터 명한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므로 命이고, 자기 스스로 지키고 행해야 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므로 義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132) 그에 의하면 命은 하늘이 명한 바이므로 인간이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절대적 명령이므로 인간의 존재 원칙은 이 命에 근거한다. 인간의 富貴, 貧賤도 命으로 이미 규정되어 있다. 이와 같이 命은 인간의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命에 의해 자신이 처한 위치가 정하여진 상태에서 이에 따라 마땅히 도리를 다하는 것이 바로 義이다.

나아가 許衡은 인간이 진심으로 義를 실천함으로서 本然의 性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 命을 아는 것, 곧 知命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올바름을 잃지 않는 것을 ‘正命’이라고 하였다. 許衡은 이 知命을 陰陽術數家들이 말하는 것과 구분하고, 하늘이 稟賦한 生死 · 貧富 · 夭壽 등의 命을 수긍하고 진력하여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133) 그는 또 命을 正命과 非正命으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正命도 있고 非正命도 있다. 그 道를 다하면서 (위험한)담장 아래에 서지 않고 修身하여 응대한다. 또한 吉凶 · 禍福 · 生死 ·壽短에서 마땅히 따라서 받아들이니, 이르게 하지 않아도 이르는 것은 모두 正命이며, 이는 하늘이 하는 것이다 . 非正命은 위태로운 요행을 행하고 예의에 맞지 않는 일을 행하여 화해에 이르게 되고 질곡을 당하여 죽는 자에게도 命 역시 수반하니 그 사람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다.134)

131) “天有命, 人有義. 雖處貧賤富貴, 各行乎當爲之事, 卽義也. 只有一個義字.”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0.

132) “凡事理之際有兩件, 有由自己的, 有不由自己的. 由自己的有義在, 不由自己的有命在,歸於義命而已.”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8.

133) “說知命, 不是術數家言命, 亦非二氏福孽之命. 是天之所賦. 盡力行去, 至於死生禍福貧富壽夭, 委之於天而已. 當其可爲而爲, 於其不可爲而止.”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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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殀 · 死生 · 窮通 · 得失 등은 하늘이 命하는 것이므로 인간이 억지로 추구해서 이룰 수 일이 아니며, 하늘의 뜻에 따라 그것을 행하려고 하지 않아도 행해지고, 그것에 이르려 하지 않아도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이 命을 긍정하고 오로지 道理를 다하여 바름을 얻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허형은 春 · 夏 · 秋 · 冬이 변화하는 것을 하늘의 命으로, 인간이 春 · 夏 · 秋 · 冬의 변화에 따라 옷울 바꾸어 입는 것을 사람의 義로 비유하여 貧賤 · 富貴에 상관없이 도리를 다할 것을 강조하였다.135) 그러므로 인간의 義는 命에 순응하는 것이며, 마땅히 행해야 하는 당위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許衡은 天道流行의 命을 알아야 함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하늘이 오랜 옛날부터 造化함에 어찌 잘못한 것이 있겠는가. 다만 인간이 잘못한 것이다. 하늘이 富貴 · 福澤을 주면서 사람에게 善을 행하게 가르치고, 또한 貧賤을 주어서 사람에게 善을 행하게 시키니 바로 하늘이 커다란 任務를 내렸다는 것이다. 만일 父母가 좋아하면 즐거워하고 잊지 않거나 혹은 父母가 그것을 싫어하면 부지런히 원망하지 않으면서 性을 따라서 오로지 善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늘을 즐기는 것이다. 하늘을 즐기는 것은 性 속의 善함을 즐기는 것이다. 命을 안다는 것은 天道流行의 命이니, 命을 알지 못하면 君子가 될 수 없다. 天命을 감히 어길 수 없음을 알기에 비록 貧賤患亂을 당할지라도 근심하지 않으니 순수하다고 말할 수 있다. 樂天은 곧 知命이요, 知命은 곧 樂天이니 이것은 君子의 일을 말한 것이다. 孔子가 쉰 살이 되어 天命을 안다고 하였고, 이치를 窮究하고 性을 다하여 命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聖人의 일이다.136)

134) “其中有正命有非正命者, 盡其道而不立乎巖牆之下, 修身以待之, 然此亦有吉凶禍福生死脩短, 來當以順受, 所謂莫之致而至者, 皆正命也. 乃係乎天之所爲也. 非正命者, 行險徼幸, 行非禮義之事, 致於禍害, 桎梏死者, 命亦隨焉, 人之自召也.”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5.

135) “人處貧富貴賤 如天之春夏秋冬. 天行春夏 ,令人有春夏衣服, 天行秋冬 令人準備秋冬衣服, 冬裘夏葛卽其義也. 天有命, 人有義. 雖處貧賤富貴, 各行乎當爲之事, 卽義也. 只有一箇義字, 都應對了, 隨遇而安, 便是樂天知命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0; “旁行而不流, 樂天知命, 故不憂.”『周易』, 「繫辭傳」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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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許衡은 命을 절대적으로 긍정한 상태에서 자신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明德을 추구하여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知命이라고 하였다. 命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고 義는 인간이 命을 추구해 가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를 완성하는 것이 바로 正命이고, 인위로 조작하여 억지로 꾸미는 것을 非正命이라고 규정하여 경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第2節 心性論 : 明德五常과 虛靈不昧

本體論이 宇宙 生成의 본체와 宇宙 안의 모든 만물의 존재와 조화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心性論은 이러한 本體論의 이론적 기반위에서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본래 程朱學은 관심의 초점을 사실상 인간의 문제에 대해 집중시킨 학문체계이다. 특히 許衡도 그의 학문적 관심이 本體論 차원의 理氣論보다는 인간론, 특히 인간이 무엇을 실천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36) “天自古老, 天造化豈有錯了處, 只有人錯了. 天與富貴福澤, 敎人行善天與貧賤, 亦敎人行善, 是天降大任之說, 若父母愛之, 喜而不忘, 父母惡之, 勞而不怨, 順性一於爲善, 此是樂天者也. 樂天者, 樂性中之善也. 知命者, 是天道流行之命, 不知命無以爲君子也. 知有天命不敢違, 雖得貧賤患難, 亦不爲憂可謂以順受也. 樂天便是知命, 知命便是樂天, 此說君子之事也. 孔子五十而知天命, 窮理盡性以至於命, 聖人之事也.”『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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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明德五常’의 天命本有之性

許衡은 性과 心에 대한 설명에서 程朱學, 특히 朱子學의 性卽理說을 취하였다. 그는 하늘이 명한 것에 의해 理가 사람의 마음에 내재되어 性이 된다는 理論을 전개하였다. 許衡은 인간의 본성과 天命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늘이 人과 物을 낳고 氣를 주어 형체를 형성하는데 반드시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理로서 性을 삼는다”137)고 하였고, 또 “무릇 性을 말하려면 곧 命이 있고, 命을 말하려면 곧 性이 있다”138) 라고 하여 하늘의 命 또는 우주의 根源인 理와 사람의 본성인 性과의 상관성 · 일체성을 강조하였다.

하늘이 인간을 낳음에 氣가 聚合하여 형체가 이루어지면 반드시 ‘理’를 부여한다. 이것은 理氣論에서 만물의 형성과정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때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보편적인 이치, 인간이 하늘로부터 稟賦받은 본원적인 理는 곧바로 개별성을 띠는 性이 된다. 그러므로 이 性과 命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許衡은 한마디로 하늘의 虛靈不昧한 德性을 인간이 품수하여 내면에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하였다.139)

또한 許衡은 性을 本然之性과 氣稟之性으로 구분하였다. 본연의 性은 天命을 받아서 인간이 누구나 똑같이 본래부터 내면에 가지고 있는 性 즉 明德이고, 氣稟의 性은 하늘로부터 각기 다르게 부여받은 氣稟이며 인간의 외적인 환경과 조건을 결정하고 氣質上의 차이를 부여한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137) “天生人物, 旣與之氣以成形, 必賦之理以爲性.”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138) “凡言性者便有命, 凡言命者便有性.”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5.

139) “大哉乾元, 萬物資始, 是彼受其德性, 虛靈不昧, 人皆有之, 是衆來取皆得, 求之卽與之,所得深淺厚薄分數, 在乎人爲也.” 『魯齋心法』, pp.4-5. 이 구절에서 앞의 인용문 ‘大哉乾元 萬物資始’는 『周易』, 「繫辭傳 上」에 나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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虛와 氣를 합하여 性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虛는 본연의 성이고 氣는 기품의 성이다. 또한 仁義禮智信은 明德이고 사람들 모두는 이것을 가지고 있으니 本然의 性이다. 이 本然의 性을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니 바로 理一이다. 貧富 · 貴賤 · 死生 · 脩(壽)短 · 禍福은 氣로부터 품부되는 것이니 기품의 命이다. 한 번 정해지면 바뀔 수 없는 것이니 이것이 分殊이다. 性이란 形而上者를 일러 道라고 말하는 것이며 바로 理一이다. 氣란 形而下者를 일러 器라고 말하는 것이며 바로 分殊이다.140)

즉 許衡은 먼저 인간의 本性을 本然의 性의 虛와 氣稟의 性의 氣로 구분하였다. 本然의 性의 虛는 明德 · 道 · 理一이고, 氣稟의 性으로서의 氣는 天命 · 器 · 分殊인 것이다. 虛와 氣를 합쳐 性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虛와 氣를 합하여 性이라는 이름이 있다”(合虛與氣有性之名)는 말은 본래 張載의 말인데, 許衡은 張載와 같은 관점에서 本性의 의미를 해석하였다. 다만 張載는 虛와 氣를 통일적인 하나의 性으로 보았는데 파악한데 비해 許衡은 虛와 氣를 두개의 다른 요소로 구분하여 性이라고 해석하였다. 張載가 말하는 天地之性을 許衡은 있어서는 本然之性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虛이다. 또 張載의 氣質之性은 許衡에게는 氣稟之性이며 氣이다. 張載와는 달리 許衡은 本然之性으로서의 虛는 氣가 아니라 理라고 해석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許衡이 말하는 性은 장재의 氣의 本性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許衡에게 있어 하늘로부터 인간이 稟賦받은 明德은 本然의 性이다. 반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氣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氣稟의 命이다. 許衡은 氣稟의 命은 인간이 稟賦받는 내용에 대한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生死 · 壽殀와 貧富 · 貴賤 등은 기품의 명에 의해 좌우되며 고정불변이다.141)

140) “合虛與氣有性之名, 虛是本然之性, 氣是氣稟之性. 又曰仁義禮智信是明德, 人皆有之,是本然之性, 求之在我者也. 理一是也. 貧富貴賤死生脩短禍福稟於氣, 是氣稟之命, 一定而不可易者也. 分殊是也. 又曰性者卽形而上者, 謂之道, 理一是也. 氣者卽形而下者, 謂之器, 分殊是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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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本然의 性으로서의 明德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許衡은 明德은 인간의 마음에 本有하는 五常, 즉 仁義禮智信의 德性이 바로 明德이라고 하였다. 許衡은 우선 “明德은 사람 마음이 본래부터 갖고 있는 光明의 德이다”142)라고 하고, 또 “하늘이 德性을 부여하고 부모가 사람으로서의 체를 낳아서 온전히 갖추게 되며 만물의 이치도 모두 갖추어진다”143) 고 함으로서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明德을 본래부터 갖추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明德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이자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道德기준이다. 許衡은 이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五常은 性이다. 天命의 性은 性 가운데 고유한 것이며 君臣 · 父子 · 夫婦 · 長幼 · 朋友 간에 행하는 도리이다. 그리고 性을 따르는 도리는 각자 맡은 직분에서 마땅히 해야 할 바이다.144)

즉 性은 明德이고 明德은 五常이다. 五常은 君臣 · 父子 · 夫婦 · 長幼 · 朋友 간에 실천해야 하는 도리이다. 허형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性은 인간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도리이므로 각자 자신의 위치와 직분에 따라 이러한 도리를 직접 실천해야 한다고 하였다. 인륜을 실천여부는 인간과 禽獸를 구별 짓는 기준145)이므로 五常의 도리를 바르게 실천함으로서 本然의 德性을 밝힐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41) “貧富貴賤死生脩短禍福稟於氣, 是氣稟之命, 一定而不可易者也, 分殊是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142) “明德是人心本來元有的光明之德.”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17.

143) “天賦與之德性, 父母生之體髮, 百骸完具, 物理皆備.” 『魯齋遺書』, 卷2, 「語錄」下,p.306.

144) “五常 性也. 天命之性, 性分中之所固有, 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所行之道也. 率性之道職分之所當爲.”『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6.

145) “父子之親, 君臣之義, 與夫婦長幼朋友, 亦莫不各有當然之則, 此天倫也. 苟無學以明之,則違遠人道與禽獸殆無少異,”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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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또 五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仁義禮智信에서 仁은 온화하고 자애로워 天地가 萬物을 낳도록 하는 도리이다. 義는 사물을 결단함에 지나치거나 쫒지 못하지 않게 하여 時宜에 맞게 하는 도리이다. 禮는 용모를 경중하게 하여 長者가 되게 하는 도리이다. 智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도리이다. 信은 착실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는 도리이다. 이 다섯 가지의 도리가 비록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德性이며 개개인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일지라도 사람마다 부여받은 것이 다르다.146)

仁 · 義 · 禮 · 智 · 信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덕성이다. 그러므로 許衡은 인간이 품부한 천명의 性인 明德을 통해 堯舜의 神明함과 하나가 될 수 있고,147) 나아가 천지와 더불어 하나가 될 수 있다148)고 강조하였다.

2) ‘氣稟之命’과 善不善 해석

許衡은 本然의 性이 누구에게나 先天的으로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임에 비해 氣稟의 命은 하늘로부터 각기 품수한 氣에 따라서 각각 빈부 · 귀천 · 생사 등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는 “性과 道는 한가지로 같지만 기품은 혹 다르다.”149)라고 설명함으로서 本然의 性과 氣稟의 命을 구별하였다. 許衡은 本然의 性과 달리 氣稟의 命은 하늘이 부여한 바에 따라서 定해지

146) “天與人的仁義禮智信, 仁是溫和慈愛得天地生萬物的道理. 義是決斷事物不敎過去不敎趕不上都是 合宜的道理. 禮是把體面敬重爲長的道理. 智是分辨是非的道理. 信是老實不說謊的道理. 這五件雖是天與人的德性, 一個個人都有, 人人各有稟受不同.” 『魯齋遺書』, 卷3, 「大學要略」, p.310.

147) “人稟天命之性爲明德, 本體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 與堯舜神明爲一.” 『魯齋遺書』,卷2, 「語錄」下, p.291.

148) “明德也, 虛靈明覺, 神妙不測 ,與天地一般. 故聖人說天地人爲三才.” 『魯齋遺書』, 卷3,「論明明德」, p.315.

149) “性道雖是一般, 而氣稟或異.”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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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기 때문에 바뀔 수 없고 이로부터 차별이 생기며, 인간의 意志로 좌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인식하였다.150) 그러므로 氣稟之命은 하늘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됨을 뜻한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구름이 떠다니고 비가 내리는 것’은 恩澤을 베풂이니 이것은 氣에 달려있다. 그리고 이 氣에 달려있는 것이 命이다. 인간에게 달려있지 않으니 와서 그것을 구함에 구할 수 있고 혹은 구할 수 없음은 하늘에 있다. 하늘은 君命이다.151)

許衡은 “악을 하는 것은 氣이고, 선을 하는 것은 性이다”152)라고 하여 本然의 性이 인간에 내재한 純善임에 반하여 氣稟의 性은 善惡이 竝存한다고 생각하였다. 즉 氣稟의 性은 혹은 善할 수도 있고, 혹은 惡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氣稟의 性에는 惡을 발생시키는 요소가 항상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인간에게 선 혹은 악이 발생하게 되는 근본 원인으로 크게 稟受한 氣와 物慾 두 가지로 나누어 파악하였다. 그는 사람은 天命의 性을 稟受받아 明德으로 삼으므로 本性이 虛靈不昧하고 모든 사물의 이치를 갖추고 萬事에 응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단지 사람들 대부분이 氣稟에 구속되고 物慾이 本性을 가리워서 항상 간직되지 못하게 한다. 혹 하나의 착한 생각이 나더라도 이 氣稟과 物慾의 사사로움에 의해서 어둡게 가리워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함에 곧 잘 안배하고 꼭 잡아쥐지만, 일을 처리하기 이전과 타인들이 없이 홀로 처해 있을 때에는 오히려 방사하여 악을 저지른다.153)

150) “貧富貴賤死生脩短禍福稟於氣, 是氣稟之命, 一定而不可易者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151) “雲行雨施 是施恩澤也, 在乎氣. 在乎氣者 是命也. 不在彼 來求取與不與 在乎天. 天者君命也” 『魯齋心法』, p.5.

152) “爲惡者氣 ,爲善者是性.”『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8.

153) “人稟天命之性爲明德, 本性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 與堯舜神爲一, 但衆人多爲氣稟所拘, 物欲蔽本性不得常存, 或發出一件善念, 便有被氣稟物欲之私, 昏蔽了, 故臨事對人旋安排把捉, 未臨事之前與無人獨處, 却偏放肆爲惡.”『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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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사람마다 품수한 氣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 不善함이 유래한다고 하였다. 本性이 氣稟에 拘束됨으로써 不善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 인간이 외부의 사물과 접하면서 물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하였다. 明德이 물욕에 가리워져서 惡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本然의 性으로서의 明德은 누구나 具有한 것으로 여기에는 聖人과 凡人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氣稟의 性에 의한 구속과 物慾에 의한 사사로움으로 악이 발생하게 되고, 이로써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나아가 범인 중에서도 지혜로운 자 · 어리석은 자 · 현명한 자 · 불초한 자 등으로 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許衡은 이러한 차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맑은 것을 얻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그 흐린 것을 얻은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며, 그 아름다운 것을 얻은 사람은 현인이 되고 그 나쁜 것을 얻은 사람은 불초자가 된다. 만약 완전히 맑고 완전히 좋은 것을 얻으면 大智大賢이니 그 명덕이 전혀 어둡지 않다. 몸이 비록 보통 사람과 같기는 하나 그 마음 가운데의 명덕은 천지와 한 몸이고 그 행위하는 바는 천지와 서로 들어맞는다. 이런 사람이 성인이다. 만약 완전히 흐리고 완전히 나쁜 것을 얻으면 大愚大不肖가 되는데 그 명덕이 완전히 어두워 비록 사람의 형체는 가지고 있으나 그 마음 속은 어둡게 막혀 금수와 똑같다. 그가 하는바는 앞 뒤가 어그러지고 서로 뒤섞여 옳은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것이 대악인이다.154) 맑되 아름답지 못하면 사람됨이 지혜로우나 불초하고, 아름다우나 맑지 못하면 선을 좋아하나 분명하지 못하다. 맑고 아름다우면 거울이 밝고 고른 것과 같고, 흐리고 나쁘면 거울이 밝지 못하고 또 고르지 못한 것과 같다. 맑되 아름답지 못하면 밝으나 고르지 못하고 아름다우나 맑지 못하면 고루나 밝지 못하다. 맑고 아름다운 기를 얻은 分數는 명덕이 있는 분수로 대적할 것이 없고, 흐리고 나쁜 기를 얻은 분수는 명덕이 어둡게 막힌 것이다. 명덕이 2,3할 남아 있으면 하등인이고 7,8할 남아 있으면 상등인이며 반이 남아 있으면 중등인이다. 명덕이 5할 이하이면 악을 지지르기는 항상 쉽고 선을 행하기는 항상 어렵다. 5할 이상이면 선을 행하기가 항상 쉽고 악을 저지르기가 항상 어렵다. 5할인 경우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저지르고자 하는 마음이 항상 서로 다투며 결정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밖에서 正人의 正言이 돕게 되면 명덕이 길러져 선을 행하게 되고, 악인의 악언이 영향을 주게 되면 명덕이 사그러들고 악을 저지르게 된다. 맑은 분수, 흐린 분수, 아름다운 분수, 나쁜 분수 등이 서로 뒤섞여 고루지 않기 때문에 수만 가지 유형이 있게 된다.155)

154) “得其淸者則爲智, 得其濁者則爲愚, 得其美者則爲賢, 得其惡者則爲不肖, 若得全淸全美則爲大智大賢, 其明德全不昧也, 身雖與常人一般, 其心中明德與天地同體, 其所爲更與天地相合, 此大聖人也. 若全濁全惡則爲大愚大不肖, 其明德全昧, 雖有人之形貌, 其心中暗塞與禽獸一般. 其所爲轉倒錯亂, 無一是處, 此大惡人也.”『魯齊遺書』,「論明明德」, p.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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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여기서 지혜로운 사람, 어리석은 사람, 현인, 불초자 등이 되는 원인을 품수하는 기의 차이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明德의 보존 여부에 따라 하등인, 중등인, 상등인 등으로 구체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 ‘心統性情’과 ‘虛靈不昧’의 ‘仁知’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天命으로서 부여된 宇宙 本源의 理가 性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心과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가. 朱子는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누어 보편성을 긍정하는 동시에 특수성 · 차별성을 인정하고, 氣質之性을 변화시켜 本然之性으로 회복하는 과정을 설정하였다. 朱子는 宇宙의 本源인 理는 本然之性으로서 인간에게 잠재되어 있으나 心과

155) “若淸而不美則爲人有智而不肖, 若美而不淸則爲人好善而不明, 其淸而美者. 類鏡之明而平, 其濁而惡者, 類鏡之不明而又不平也, 其淸而不美者, 類鏡之明而不平, 冀美而不淸者, 類鏡之平而不明也, 淸美之氣所得的分數, 便是明德存的分數, 不敵. 濁惡所得的分數便是明德暗塞了的分數. 明德止存二三分則爲下等人, 存得七八分則爲上等人, 存得半則爲中等人. 明德在五分以下則爲惡常順爲善常難, 明德在五分以上則爲善上順爲惡常難, 明德正在五分則爲善爲惡, 常交戰於胸中, 淸的分數, 濁的分數, 美的分數, 惡的分數, 參錯不齊, 所以便有千萬般等第.”『魯齊遺書』,「論明明德」, pp.315-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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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다르다는 心統性情의 論理를 주장하였다. 許衡 또한 朱子를 계승하여 인간의 性을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구분하였다. 본 절에서는 여기서 그가 정의한 바 있는 마음을 仁과 天 그리고 理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許衡은, 마음은 인식의 주체이므로 이 마음에는 思慮하는 능력이 있고 사물을 반영하는 속성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마음이 사람의 神明156)임을 전제하고 思慮에 대해 강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虛靈하기에 말라죽은 나무나 식은 재처럼 생각하지 않는 이치란 없으니 요컨대 사려하는 것을 정밀하게 해야 한다. 157)

여기에서 말하는 思慮는 無形이며158) 義理를 인식할 수 있는 근거이다. 마음의 인식 대상은 사물의 이치이며, 마음의 思慮를 통해서 이치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許衡은 마음이 지극히 靈妙하며 그 마음속에는 자연의 이치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능히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許衡은 마음이 외부의 사물을 반영할 수 있는 근거로 “ 인간의 한 마음은 능히 모든 이치를 갖출 수 있으니 全體이고, 모든 사물에 응할 수 있으니 大用이다”159) 또는 “성인의 마음은 마치 맑은 거울에 물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사물이 와도 어지럽지 않고 사물이 가도 남김이 없다”160)고 지적하였다. 즉 마음은 능히 외부 사물에 應하고, 그것은 마치

156) “心是人之神明, 人之一心雖不過方寸, 然其本體至虛至靈, 莫不有箇自然知識”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5.

157) “人心虛靈, 無枯木死灰不思之理, 要當精於可思慮處.”『魯齋遺書』, 卷2, 「語錄」下,p.275.

158) “思慮尤無形” 『魯齋遺書』, 「語錄」下, p.292.

159) “人之一心, 能具衆理的是全體, 應萬事的是大用” 『魯齋遺書』, 「語錄」下, p.326.

160) “聖人之心如明鏡止水 物來不亂 物去不留”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p.276-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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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사물이 비추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許衡은 이러한 마음의 思慮하는 능력과 인식 기능을 기반으로 하여 마음을 仁과 연결시켰다. 그는 마음 = 仁 또는 마음의 德 = 仁이라고 하여 仁을 마음에 內在하는 이치의 차원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마음에는 仁義 道德이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마음 = 仁과 마음의 德 = 仁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하는데, 許衡은 다음과 같이 이 두 가지 논법을 모두 사용하였다. 즉 “心은 仁이라고 말할 수 있다. . . . 어진 자는 천지만물을 한 몸으로 삼아서 모든 아픔을 아는 것이니 모름지기 이것이 仁이다”161) 라고 말한 적도 있었고, “仁은 마음의 德이니 이것의 이치는 마음에서 얻을 수 있다”162) 라고 하기도 했던 것이다.

첫 번째 내용은 마음과 仁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동일한 의미라는 것이다. 이는 만물을 生하는 덕으로서의 仁, 그리고 우주의 근원적인 道德規範으로서의 이치가 인간의 마음과 완전히 同一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의 내용은 朱子의 “사랑은 仁이 아니고, 사랑의 이치가 仁이다. 마음은 仁이 아니고, 마음의 德이 仁이다”163) 라는 내용과 일치한다. 마음과 仁이 완전히 동일한 것이 아니고, 마음 안에 있는 一部分으로서의 마음의 德이 곧 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과 仁의 완전한 동일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의 관건은 “천지의 마음은 仁일 따름이다”164) 라고 하는 천지의 마음(仁)이 인간의 마음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냐 하는 문제인데, 여기서 許衡이 마음과 仁이 같다고 하는 것은 이 양자가 德으로서의 속성이 같다는 의미일 뿐, 이 양자가 완전한 동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161) “心可謂仁也. . ..仁者以天地萬物爲一體, 都知得痛癢, 方是仁也.”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91.

162) “仁者, 心之德, 謂此理得之於心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304.

163) “愛非仁, 愛之理是仁, 心非仁, 心之德是仁,” 『朱子語類』, 卷20, 「甘節錄」.

164) “天地之心, 仁而已,”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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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무릇 지각은 곧 仁의 작용이며 仁이 겸하고 있는 것이다”165) 라고 하여 마음=仁이 아니고, 知覺은 仁의 양면으로 일부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人心의 知와 천하 사물의 理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대개 人心의 靈에는 知하지 아니함이 없고, 天下의 사물은 理가 있지 아니함이 없다. 마음이란 사람의 신명이니 인간의 한 마음이 方寸에 불과하지만 그 본체는 지극히 虛靈하여 자연히 知識 아님이 없다.166)

다시 말하면 천하 사물은 우주를 아우르는 공통적인 理를 공유하고 있고, 마음은 사람이 가진 神妙한 것으로 지극히 허령하여 이 理를 포섭하고 있으므로 모든 것을 知覺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마음 안에는 仁이 자리 잡고 있고, 이 仁은 마음의 덕이며 体이고, 이것이 움직이면 知覺하는 作用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許衡은 仁과 知를 體用의 관계로 설명하였다. 仁은 體이고 知는 用이다. 그는 이것을 마음의 ‘全體大用’이라고 하면서 成己의 도덕적 의의와 成物의 지식 활용의 차원에서 仁과 知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仁은 心德이며 體의 존재이고, 知는 지식이며 用의 發함이다. 子思가 말한 인간이 이 實理를 능히 다할 수 있으면 단지 자기의 인격을 성취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로 인해서 感發하고 興起하여, 모두 이 實理를 盡得하는 것이니 곧 成物하는 까닭이다. 成己로써 이것을 말하면 心德은 순수하고 온전해서 사사로운 욕심이 모두 淨化되니 이것이 곧 仁이다. 成物로써 말하면 知識은 高明하여 萬物에 두루 하니 이것이 곧 知이다. 仁과 知는 비록 서로 같지는 않지만 모두 하늘이 나에게 명하여 부여한 도리이니 어찌 안팎의 구분이 있었겠는가!167)

165) “夫知覺則仁之用, 而仁者之所兼也.,”『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6.

166) “蓋人心之靈莫不有知, 而天下之物莫不有理. 心是人之神明, 人之一心雖不過方寸, 然其本體至虛至靈, 莫不有箇自然知識”『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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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己는 자기 완성이고 成物은 남에게 작용하여 완성시키는 것이다. 仁은 心德이니 이것을 확충함은 成己이고, 이로써 다른 사람에게 두루 미쳐 感發하도록 하면 成物하는 것이다. 成己는 仁으로 하고 成物은 知로 한다 그러므로 仁과 知는 안팎의 구분이 없는 体와 用이라는 것이다.

許衡은 인간의 마음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本然의 性(明德)을 本有하여 性을 이루고 있으므로168) “마음과 천지는 같다(心與天地一般)”169) 고 하여 천명과 인심의 상관성을 설명하였다. 그는 또 “마음과 本性과 하늘은 一理이므로 이것을 一以貫之로서 말할 수 있다”170), “마음에는 萬物의 이치를 갖추고 있다”171) 고 하여 마음과 하늘이 내린 이치와의 합일성을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天卽是理’, ‘性卽是理’172) 라고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서 心과 理이 완전한 일체성을 이루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許衡은 마음(心)과 본성(性)의 관계를 心統性情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마음은 性과 情을 通攝하는 것인데 性은 마음의 本體이고, 情은 마

167) “仁是心德乃體之存, 知是知識乃用之發. 子思說人能盡得這個實理, 不但可以成就得自家, 別人因我而感發興起也, 都盡得這箇實理, 是卽所以成物, 以成己言之, 心德純全, 私欲淨盡, 這便是仁, 以成物言之, 知識高明, 周於萬物, 這便是知, 仁與知雖若不同, 皆是天命與我的道理, 何嘗有內外之分.”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68.

168) “蓋上帝降衷, 人得之以爲心. 心形雖小, 中間蘊藏天地萬物之理, 所謂性也, 所謂明德也,虛靈明覺 神妙不測, 與天地一般, 故聖人說 天地人爲三才.” 『魯齋遺書』, 卷3, 「論明明德」, p.315.

169) “人與天地同, 是甚底同. 人不過有六尺之軀, 其大處同處指心也. 謂心與天地一般.”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p.288-289.

170) “問; 一心可以宰萬物 ,一理可以統萬事. 先生曰; 是說一以貫之.”『魯齋遺書』, 卷2,「語錄」下, 292.

171) “理具於人心”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1.

172) “天卽是理”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59; “性卽是理”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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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의 作用이다”173) 라고 하여 마음을 體와 用으로 구분하여 性은 마음의 本體이고 情은 마음의 작용으로 설정하였다.

4) ‘人心道心’과 ‘氣性’ 관계

許衡은 마음에는 性과 情이 있고 각기 体와 用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자연히 人心과 道心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道心은 性이고 人心은 情이다. 道心으로서의 天理는 性이고, 人心으로서의 人慾은 氣이다. 그는 人心에서 악이 발생하는 원인은 稟受받은 氣質의 혼탁과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한 물욕의 발생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人心으로서의 人慾은 본래부터 악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許衡은 『書經』과 朱子 『中庸章句序』에 근거하여 人心과 道心에 대한 논리를 전개하였다. 『書經』 의 “人心은 위태롭고 道心은 微微한 것이니, 精一하게 하여 그 中을 잡는다”174) 와 『中庸章句序』의 “上古에 聖神이 하늘을 繼承하여 人極을 세우면서 道統이 傳承되어 왔다. 經에 그 中을 잡으라는 것은 堯임금이 舜임금에게 傳受해 준 까닭이요, 人心은 오직 危殆롭고 道心은 微微한 것이니 情一하게 하여 그 中을 잡는 것은 舜임금이 禹임금에게 傳受하여 준 까닭이다”175) 는 성인의 심법전수로 알려진 내용으로 주자학을 수용한 許衡이 이를 바탕으로 인심과 도심을 논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는 것, 천지만물을 化育시키는 것 등이

173) “心統性情者也, 性者心之體, 情者心之用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8.

174)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書經』, 「大禹謨」.

175) “自上古聖神繼天立極, 而道統之傳, 有自來矣. 其見於經, 則允執厥中者, 堯之所以授舜也.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者, 舜之所以授禹也.” 『朱子語類』, 卷76, 「中庸章句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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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聖人의 마음으로부터 나온다176)고 하였다. 성인은 하늘로부터 품수한 본연의 성 즉 明德을 온전히 함양하고 있으므로 능히 천하를 다스리고 천지만물의 化育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道心이 온전히 발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또 “仁義五常은 性으로부터 根源하니 道心이요 天理이다”177)라고 道心을 설명하였다. 즉 道心은 天理로부터 비롯된 明德, 五常인데 이것은 인간의 性으로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명덕을 회복하여 온전히 발휘하면 그것이 바로 사사로움이 없는 純善의 道心인 것이다. 道心은 모든 만물을 主宰하는 도덕규범의 규준이며 本然의 性이고 善性으로서의 天理이다.

반면에 人心은 인간의 사사로움에 기인한다. 許衡은 “聲色臭味는 氣로부터 發하니 人心이요 人慾이다.”178)라고 설명하였다. 人心은 인간의 五感에서 비롯되는 氣로부터 나오므로 人慾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대개 인간이 처음에는 본래 惡함이란 없지만 특히 利慾에 빠지게 되면서부터 바른 이치를 잃게 되는데 처음에는 아주 미미하지만 끝내는 救濟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179) 라고 하여 人心이란 본래는 악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였다. 人心은 인간의 기본적인 生理慾求이므로 정도에 지나치지 않으면 곧 도심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人心에 惡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人心의 본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人心이 惡으로 빠지게 되는 원인은 선천적인 氣稟의 가리움과 후천적인 물욕의 발생이다.180)

176) “故曰立天下之大本, 於天地之化育, 陰陽屈伸, 形色變化, 皆黙契於心, 渾融而無間. 故曰知天地之化育, 這經綸大經立大本知化育三件事, 都從聖人心上發出來.”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79.

177) “聲色臭味發於氣, 人心也. 便是人欲. 仁義五常根於性, 道心也. 便是天理.”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8.

178) 위와 같음.

179) “蓋人之初本自無惡, 特以利欲驅之, 故失正理其始甚微, 其終至於不可救.” 『魯齋遺書』,卷1, 「語錄」上,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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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인욕을 극복하고 도심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人慾이 싹트는 것을 억누르고,181) 本然의 性으로서의 天理를 보존하려는182)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또 人慾을 除去하기 위한 방법으로 “마음의 德性을 순수히 보전하게 하여 사욕을 맑고 깨끗하게 한다”183), “天理의 本然의 性을 보존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잠시라도 道와 떨어지지 않게 한다”184)등의 예를 들었다. 이를 통해 人慾을 극복하고 道心을 회복하여 聖人의 心法을 계승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第3節 修養論 : 明德獨知와 知行竝進

人性 즉 하늘로부터 타고난 本然之性이 곧 明德 = 五常 = 仁義禮智信이고 이러한 道德規範이 氣稟의 名과 물욕에 의해 가리워져 있으니 이를 극복하고 本然의 性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필연的으로 인간의 노력이 필요해진다. 이 노력이 바로 工夫, 實踐, 修養 등으로 발전되어 설명되는 것이다. 이 修養論은 한마디로 수양 또는 학문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크게 向內(心內) - 居敬과 向外(心外) - 窮理로 나누어진다. 지금부터 許衡의 修養論의 내용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180) “人稟天命之性爲明德, 本體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 但衆人多爲氣稟所拘, 物欲所蔽本性不得常存. 或發出一件善念, 便有被氣稟物欲之私昏蔽了. 故臨事對人旋安排把捉, 未臨事之前與無人獨處却便放肆爲惡.”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181) “所以遏人欲於將萌.”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3.

182) “所以存天理本然.”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43.

183) “心德純全, 私欲凈盡.”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68.

184) “存天理之本然, 而不使之須臾離道.”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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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主一持敬’의 收斂工夫와 ‘居敬’

許衡은 마음이 一身을 主宰하므로 修身의 근거를 正心에 두었다.185) 그는 학문 또는 수양의 기초로서 尊德性을 강조하였고, 구체적인 방법 또는 修身의 근본으로서 主一持敬을 제시하였다. 持敬이란 마음이 外物을 쫓지 않게 하며 敬에 마음의 근본을 두는 것을 말한다.186) 許衡은 學問의 시작은 持敬187)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聖人의 마음은 明鏡止水와 같아서 사물이 와도 어지럽지 않고 사물이 가도 남겨두지 않는다. 工夫에 힘쓰는 것은 主一이다. 主一은 持敬이다”188)라고 하여 持敬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持敬이란 곧 主一이고, 오로지 한 곳에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이 외부로 흐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마음이 어지럽지 않고 성인은 항시 明鏡止水와 같은 狀態를 維持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禮記』에서는 “天下古今의 善함은 모두 敬字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天下古今의 惡함은 모두 不敬함에서 생겨나는 것이다”189)라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主一持敬은 마음속의 악함을 물리치고 선을 회복하는 공부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持敬의 大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 持敬하면 즉 정신을 오로지 하나로 집중하면 몸과 마음이 收斂하게 되어 氣가 조잡하고 난폭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맑은 것은 더욱 맑아지고 탁한 것은 더 이상 자라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185) “修身在正心, 心是一身的主宰.” 『魯齋遺書』, 卷3, 「大學要略」, p.311.

186) “東萊嘗云南軒言心在焉, 則謂之敬, 且如方對客談論, 而他有所思, 雖思之善亦不敬也.纔有間斷便是不敬, 凡事一一省察, 不要逐物去了. 雖在千萬人中常知有己, 此持敬大略也.” 『魯齋遺書』, 卷1, 「語錄」 上, p.276.

187) “爲學之初, 先要持敬.” 『魯齋遺書』, 卷3, 「論明明德」, p.316.

188) “聖人之心如明鏡止水, 物來不亂 物去不留, 用工夫, 主一也, 主一是持敬也.” 『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6.

189) “天下古今之善, 皆從敬字上起, 天下古今之惡, 皆從不敬上生.” 『禮記』, 「曲禮」 上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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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한 것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둘째, 마음이 未發時의 고요한 상태에서는 恭敬하여 항상 天地鬼神이 臨하는 듯이 하여 감히 疏忽히 하지 않고, 셋째, 已發時의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공경하여 보고 듣고 얼굴빛과 몸가짐 말하고 일하는 등의 모든 행위를 성찰하며 사물에 이끌려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비록 수천만인 가운데 있어도 언제나 항상 자신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190)

2) 未發存養과 已發省察의 ‘明德獨知’

許衡은 本性을 기르는 工夫에서 『中庸』에 의거하여 마음을 靜할 때와 動할 때로 구분하고, 고요한 상태에서는 存養의 공부방법을,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성찰의 공부방법을 제시하였다. 存養은 純善한 良心과 道心을 보존하여 本然의 性을 기르는 方法이고, 省察은 선악이 혼재해 있는 人心에 인욕으로 기울지 않도록 지속적으로 살피고 반성하는 방법이다.

마음에 本有한 虛靈不昧한 明德은 道心이고, 氣稟에 제한되고 물욕에 사로잡혀 본연의 善性을 잃은 마음은 人心이다. 이에 대해 許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은 천명의 性을 稟受받아 明德으로 삼으니 本性은 虛靈不昧하고 모든 이치를 갖추고 萬事에 應한다. 堯舜의 神命과 더불어 똑같은 것이지만 단지 사람들 대부분이 氣稟에 拘束되고 物慾에 가리워져서 本性이 항상 마음속에 간직되지 못한다. 혹 하나의 착한 생각을 하여도 곧 氣稟과 물욕의 사사로움에 의해서 어둡게 가리워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대함에서는 곧 잘 안배하고 꼭 잡아쥐려 하거나 일을 처리하기 이전과 사람들이 없이 홀로 처해 있을 때에는 오히려 방사하여 惡을 일삼기 때문에 『中庸』에서는 사람들에게 存養省察할 것을 가르친다.191)

190) “爲學之初先要持敬, 敬則身心收斂, 氣不粗暴, 淸者愈淸而濁者不得長, 美者愈美而惡者不得行, 靜而敬常念天地鬼神臨之, 不敢少忽, 動而敬, 自視聽色貌言事疑忿得一日省察, 不要逐物去了. 雖在千萬人中常知有己, 此持敬大略也.” 『魯齋遺書』, 卷3, 「論明明德」, p.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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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르면 人慾을 극복하고 道心을 회복하기 위한 공부는 已發時로 나뉜다.

未發時의 공부에 대해 許衡은 “대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때에는 戒愼恐懼하여 그것을 保存하고 天理의 本然을 간직하여 잠시라도 道에서 벗어나지 않게 함이 致中이며 存養의 일이다”192)라고 하였다. 未發時의 修養工夫는 본연의 성을 지키는 것으로서 행동이 일어나기 이전에 요구되는 것이다. 未發時의 고요한 상태에서는 덕성이 渾全하므로 存養을 필요로 한다. 存養은 인간의 本性에 없는 것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갖추고 있는 본연의 善性을 보존하고 확충하는 일이다. 本性을 잘 보존하는 것은 純善한 道心을 간직하는 것이다. 이것을 致中이라 한다.

許衡은 已發時의 공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남들은 모르지만 자기만이 홀로 아는 것은 한 가지 생각이 지금 막 일어나려고 할 때이다. 이 한 가지 생각이 지금 막 일어나게 되면 善이 아니면 惡이다. 惡은 稟受한 氣가 人慾이므로 곧 막아서 자라지 못하게 하고, 善은 性 가운데의 本然의 이치니 그것을 잡아서 옮겨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와 같이 하게 되면 사물에 應함에 있어서 약간의 잘못도 없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致和이며 省察의 일이다.193)

省察은 움직임이 일어나는 상태에서의 공부이다. 어떤 행위를 시작할 때 와

191) “人稟天命之性爲明德, 本性虛靈不昧, 具衆理而應萬事, 與堯舜神爲一, 但衆人多爲氣稟所拘, 物欲蔽本性不得常存, 或發出一件善念, 便有被氣稟物欲之私, 昏蔽了, 故臨事對人旋安排把捉, 未臨事之前與無人獨處, 却偏放肆爲惡, 故中庸敎人存養省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192) “蓋不睹不聞之時, 戒愼恐懼以存之, 所以存天理之本然, 而不使之須臾離道, 此所謂致中也. 存養之事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193) “人所不知而己所獨知者一念方動之時也. 一念方動 非善卽惡. 惡是氣稟人欲, 卽遏之不使滋長, 善是性中本然之理, 卽執之不使變遷. 如此則應物無少差謬, 此所謂致和也, 省察之事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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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접하게 될 때는 스스로의 성찰을 통해 마음이 인욕으로 향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이것을 致和라고 한다.

특히 人慾이 일어나는 것을 비록 타인은 모르더라도 스스로 혼자 아는 것을 獨知라고 한다. 마음의 一念은 善으로서의 天理와 惡으로서의 인욕으로 구분된다. 이 一念으로부터 天理를 잘 보존하면 본연의 善性을 유지할 수 있고, 반대로 氣에 치우치면 인욕에 빠지게 된다. 마음의 明德을 밝히면 天理의 本然의 性을 보존할 수 있다. 그러므로 許衡은 本然의 性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致中和’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였다.

3) 聖人 ‘成己成物’과 學者 ‘反身氣順’의 ‘誠’

『中庸』에서는 “誠은 天의 道이며 힘쓰지 않아도 적중하며 생각하지 않아도 터득하여 道에 敵中하는 聖人의 境地”194)라고 하였고, 朱子는 “誠이란 眞實無妄한 天理의 本然”195) 이라고 설명하였다. 天道는 모든 사물이 존립하는 근거이자 이치이다. 人道는 인간이 天道의 이치를 좇아, 인간이 稟賦한 天理의 본연지성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眞實無妄한 誠은 인간 행위의 기본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誠을 인간이 마땅히 실천해야 할 덕목으로 보았다. 그는 誠에 의해 人倫의 도리를 밝힐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만일 사람의 마음에서 말하자면 자식이 성실히 父母에게 孝道하지 않는다면 곧 父子의 倫理가 없는 것이고, 아우가 誠實히 兄을 恭敬하지 않는다면 곧 兄弟의 倫理가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誠이 없으면 사물을 이룰 수 없다고 한 것이다. 君子가 貴하게 여기는 것은 오직 이 마음을 誠實하게 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君子는 誠을 貴하게 여긴다고 말하는 것이다.196)

194) “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 誠者 不勉而中, 不思而得, 從容中道, 聖人也. 誠之者 擇善而固執之者也.” 『中庸』, 20章.

195) “誠者 眞實無妄之謂, 天理之本然也. 誠之者 未能眞實無,妄 而欲其眞實無妄之謂, 人事之當然也.” 『中庸章句』, 20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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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이 없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므로 君子가 이를 貴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誠은 만물을 존재하게 할 수 있는 實理이므로 許衡은 이의 실천을 통해 ‘成己’와 ‘成物’을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實理를 얻게 되면 단지 자신의 인격을 완성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나로 인해서 感發하고 흥기하니 모두가 이 실리를 얻을 수 있으므로 이것이 成物하는 까닭이다”197)라고 하였다. 誠을 실천함으로서 자신의 인격을 完成하고, 다른 사람을 感發시키는 것이다.

許衡은 또한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자신의 몸을 돌이켜 진실하면 즐거움이 이 보다 큰 것이 없다. 모든 일마다 至極한 精誠을 다해서 해 나가면 그 마음이 평안해지고 氣가 펼쳐 나갈 수 있으니 우러르고 굽어보아도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으므로 그 즐거움을 가히 알 수 있다. 이것이 天下에서 廣居하는 것이다”198) 라고 하여 反身而誠의 誠을 강조하였다. 그는 反身而誠을 통해 참된 이치를 얻을 수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교에서 이른바 如意寶珠는 하고자 함에서 意志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며, 바로 德性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天理도 있고, 善道도 있다. 진정 이와 같이 精誠들여 오랫동안 힘써 쌓아서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함에 있어서 意志만한 것이 없다는 것은 돌이켜 몸을 誠實히 하면 즐거움이 커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참된 이치가 있어서 조금이라도 인간의 거짓되고 잡스러움이 없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199)

196) “若就人心說, 爲子不誠實孝親, 便無父子之倫, 爲弟不誠實敬兄, 便無兄弟之倫, 故曰不誠無物. 此君子之所貴者, 惟在誠實此心而已, 故曰君子誠之爲貴.”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68.

197) “人能得這箇實理, 不但可以成就得自家, 別人因我而感發興起, 也都盡得這箇實理, 是則所以成物,” 『魯齋遺書』, 卷5, 「中庸直解」, p.368.

198) “萬物皆備於我矣. 反身而誠, 樂莫大焉, 件件事至誠惻怛做將去, 其心安, 其氣舒, 俯仰無愧 其樂可知, 此天下廣居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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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을 돌이켜 반성하고 성실하면 實理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反身而誠은 理에 따라 氣가 순순히 작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反身而誠이란 氣가 理에 복종하여 모든 것이 理에 따라서 잘 행해지게 되는 것이고, 氣도 역시 善하게 되니 어찌 그 사이에 (氣가 性을)손상시킴이 있겠는가? 容恕를 힘써서 행하려 함은 氣가 理에 順從하지 않는 것이다.200)

즉 氣는 마땅히 理를 따라야 하고, 이를 통해 氣는 善하게 변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理와 氣가 서로 순리대로 조화되어야만 誠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格物致知의 ‘窮理’와 ‘先知性後盡心’

許衡은 “格字는 至字를 해석하고, 物은 사물이다. 자기 本心의 知識을 지극히 미루어 나가는 것은 天下 사물의 이치를 窮究하여 직접 저 至極한 곳에 이르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르지 못한 단계에서는 치지가 格物에 있다고 말한 까닭이다”201)라고 하여 사물의 이치를 窮究하는 방법으로서

199) “釋氏有所謂如意寶珠, 有所欲爲, 無不如志, 此正指德性而言, 天理在是, 善道亦在是,苟於此焉. 眞積力久, 其所欲爲無不如志者, 反身而誠, 樂莫大焉. 每事是實理, 無一點人間僞雜, 安得不樂.”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8.

200) “反身而誠是氣服於理, 一切順理而行, 氣亦是善, 豈有損於其間, 强恕而行, 是氣未服順理.” 『魯齋心法』, p.43.

201) “格字解做至字, 物是事物. 若要推極本心的知識, 又在窮究天下事物之理, 直到那極處,不可有一些不到, 所以說致知在格物也.”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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格物과 致知를 중시하였다. 그는 “致知란 格物에 있다”고 함으로써 모든 사물에 이르는 것을 格物로 보고 格物을 통해 마음의 全體大用이 밝게 되는 것을 致知라고 하였다.202) 그러므로 “사람은 천하사물의 이치로부터 窮究해서 지극한 곳에 이른 연후에 본심의 지식을 다 한다”203)라고 설파하였다.

許衡은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致知에 이르는 방법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이 사물의 이치를 窮究하지 않으면 자기의 지식이 다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大學』에서 처음 사람을 가르칠 때 반드시 학문의 목적으로 삼는 것은 천하 사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개개의 사건으로부터 본심에서 이미 알고 있는 도리로 말미암아서 더욱 工夫를 窮究하여 반드시 저 至極處에 이르게 하는 까닭이다.204)

먼저 사물이나 사건을 불문하고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이치를 窮理해야 한다. 본심에 내재하고 있는 이치를 미루어서 궁리해야 한다. 그리하여 窮理가 至極處에 이르게 됨으로써 致知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窮理가 미진하여 致知에 이르지 못하면 마음속에 지식이 있다고 하더라도 혼미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매일 지속적으로 사물의 이치를 窮究함으로서 점차 지식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사물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205) 마침내 豁然貫通하게 되면 만물의 도리가 빠짐없이 정미하게 드러나고 마음속

202) “衆物之表裏精粗無不到, 這便叫做格物. 吾心之全體大用無不明, 這叫做致知.”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6.

203) “人於天下事物之理, 旣能窮究到至極處, 然後本心的知識無一些不盡矣.” 『魯齋遺書』,卷4, 「大學直解」, p.319.

204) “人於事物之理有未窮, 則己之知識必有不能盡. 所以『大學』中始初敎人, 必使爲學的, 於凡天下的事物 無大無小件件上, 莫不因他本心已知識的道理, 益加工夫窮究 必要求到那至極的去處.”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6.

205) “學者窮究事物的道理 今日窮究一件 明日窮究一件 用功到那積累多時 有一日間忽然心裏有開悟通透” 『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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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갖추어져 있는 全體大用이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206)

한편 許衡은 ‘盡心知性’에 대한 해석에서도 格物致知를 적용하였다. 孟子는 盡心知性에 대해서 “그 마음을 다하면 性을 알고, 그 性을 알면 곧 하늘을 안다”207)고 말했다. 이는 孟子가 盡心을 마음으로부터의 도덕적 자각으로 간주하고 先盡心, 後知性을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許衡은 인간의 本性을 인식한 이후라야만 자신의 마음을 다할 수 있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 性을 아는 것이 物格이고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이 知至이다. 먼저 그 性을 안 연후라야 능히 마음을 다할 수 있는 것이지 마음을 다한 연후에 그 性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208)

본성을 아는 것(知性)이 마음을 다하는 것(盡心)보다 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는 朱子의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은 그 本性을 알게 됨에서 말미암는다. 먼저 본성의 이치를 覺知한 연후에 이 마음을 밝힐 수 있다. 그 본성을 아는 것은 格物과 같고, 그 마음을 다하는 것은 至知와 같다"209) 라고 하는 논리와 같다.

여기서 許衡이 본연의 善性인 明德을 인식함으로서 본성을 覺知하는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善性의 明德을 覺知한 후에야 도덕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格物致知에서 궁구하는 사물의 이치란 본심에 本有하고 있는 道德規範의 도리이다.

206) “人若到那豁然貫通處, 則於萬物的道理顯隱精粗無一些不曉到, 此心所具的全體代用無一些不明了.”『魯齋遺書』, 卷4, 「大學直解」, p.326.

207) “孟子曰,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 則知天矣.” 『孟子』, 「盡心上」.

208) “知其性是格物, 盡其心是知至也. 先知其性, 然後能盡心, 非盡其心而後知其性.” 『魯齋遺書』, 卷1, 「語錄」下, p.288.

209) “盡其心者, 由知其性也. 先知得性之理, 然後明得此心, 知性猶格物, 盡心猶知至.” 『朱子語類』, 卷60, 「廖明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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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知行竝進’의 工夫論

許衡은 知와 行을 공히 중시하여 “세간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知와 行이다. 깨우쳐서 알게 하고 힘써서 실천하게 한다”210)라고 강조하였다. 知는 모든 일과 사물의 이치를 바르게 아는 것이고, 行은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許衡은 『中庸』의 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 · 篤行에 대해 篤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을 知의 단계로, 篤行을 行의 단계로 설명했다. 그러므로 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을 窮理의 窮字로서 해석하였다.211) 이는 그가 참된 앎을 얻은 것과 독실하게 실천하는 것을 똑같이 중시했지만 앎을 우선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212)

許衡은 또 “『大學』에서 窮神은 知이고 知化는 行이다. 天地의 神妙한 이치를 窮盡하고 천지를 낳고 기르는 작용을 행한다”213), “『大學』에서 開物은 知이고 成務는 行이다. 자기를 개발할 뿐만 아니라 타인도 개발해야 한다”214) 고 하여 知와 行의 의미를 정립하였다. 여기서 그가 인용한 ‘窮神知化’215)와 ‘開物成務’216)는 『周易』「繫辭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窮神은 천지만물의 신묘불측한 변화의 이치를 궁구한다는 의미이고, 知化는 사물의 변화현상을 아는 것을 뜻한다. 開物은 사물의 변화 이치에 동참하는 것을 말하고, 成務는 그 사물을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217) 이로써 보면

210) “世間只兩事, 知與行而已. 誨之使知, 勞之使行.”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93.

211) “博學審問愼思明辯, 此解說箇窮字, 其所以然與其所當然, 此說箇理字, 所以然者是本原也. 所當然者是末流也.”『魯齋遺書』, 卷1, 「語錄」上, p.277.

212)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辯之, 只是要個知得眞, 然後道篤行之一句.” 『魯齋遺書』,卷1, 「語錄」上, p.277.

213) “在大學, 窮神是知也. 知化是行也. 窮盡天地神妙處. 行天地化育之功.” 『魯齋遺書』, 卷2, 「語錄」下, p.289.

214) “在大學, 開物是知也. 成務是行也. 非但開發自己, 要開發他人, 只要開發得是.” 『魯齋遺書』, 卷2, 「語錄」 下, p.289.

215) 『周易』, 「繫辭」 下.

216) 『周易』, 「繫辭」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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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知는 어떠한 이치를 통찰하여 아는 것에 초점을 두고, 行은 직접 작용하여 이루는 것을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許衡은 “무릇 실천에 힘쓰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아는 것이 참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능히 참되게 안다면 어찌 힘쓰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218) 라고 하여 실천에 앞서 참된 앎(眞知)을 중요시했다. 眞知가 선행되지 않으면 올바른 실천이 불가능하기 때문일 것이다. 知의 대상은 本然의 性인 明德이다. 이 明德을 覺知하는 것이 眞知이다. 그는 실천을 등한시하는 이유는 眞知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先眞知 後力行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선천적으로 本有하고 있는 天理인 明德을 올바로 覺知하여 眞知에 이르고, 眞知한 내용을 힘써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더 나아가 許衡은 “知와 行 이 둘은 마땅히 竝進한다”219)라고 함으로서 知와 行을 동시에 강조하는 知行竝進을 주장하여 知와 行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였다.220) 이는 眞知와 力行은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바 朱子의 “知와 行은 반드시 함께 할 때에 서로를 일으킬 수 있다”221)는 주장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許衡의 성리사상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許衡 사상의 특

217) “窮神 窮究事物之神妙, 知化 認識事物之變化.”.高亨, 『周易大傳今注』, p.571; “開物揭開事物之眞象, 成物 確定事務之辦法.” 高亨 著, 『周易大傳今注』, p.534.

218) “凡行之所以不力, 只爲知之不眞, 果能眞知, 行之安有不力者乎.” 『魯齋遺書』, 卷1, 「語錄」 上, p.277.

219) “知與行二者, 當竝進.” 『魯齋遺書』, 卷2, 「語錄」 下, p.297.

220) “南軒意於行字上責得重, 謂人雖能知, 不能行也. 程門取人, 先論知見, 次乃考其所爲,伊川自少說話便過人, 常言人專論有行, 不論知見, 世人喜說某人, 只是說得行不得, 正叔言 只說得好話亦大難, 好話亦豈易說, 呂原明謂二公遠過衆人者, 皆此類.” 『魯齋遺書』, 卷2, 「語錄」 下, p.300.

221) “知與行須是齊頭做, 方能互上發." 『朱子語類』, 卷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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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과 성격을 총괄해 보고자 한다. 인간의 마음과 본성에 대하여 특히 朱子와 陸象山의 이론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宋代의 新儒學 發興 이후의 新儒學 내에서의 學術的 論爭은 사실상 이 두 사람간의 논쟁이 주축을 이룬다. 元代 유학사상의 특징을 말할 때 朱陸和會 또는 心學化의 경향을 논하면서 許衡의 사상에서도 朱陸和會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주로 이 心性論과 工夫論에 있어 許衡이 朱子의 학설을 수용했으나 陸象山의 心學 이론을 받아들여 절충했다고 하는 주장이다.222)

許衡 사상의 朱陸和會的 성격을 논할 때 주로 인용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람(人)과 하늘(天) · 땅(地)이 같다고 하면 어떻게 같은가? 사람은 불과 六尺의 몸이 있을 뿐으로, 그 (하늘과 같이) 크고 (하늘과)같다는 것은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니 마음과 天地는 一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223)

또한

대개 하늘은 참마음을 내리고 사람은 그것을 얻어 마음(心)으로 삼는다. 마음의 形은 비록 작으나 그 가운데에 天地萬物의 이치를 가지고 있어 이를 性, 또는 明德이라 한다. 虛靈明覺은 神妙不測하여 천지와 같다. 그러므로 聖人이 天地人을 三才라고 일컫는 것이다.224)

222) 蒙培元과 侯外盧는 許衡의 心學化 경향이 陽明 心學의 선하를 열었다고 주장하였다.蒙培元,『理學的演變』 (福建: 人民出版社, 1981), p.183; 侯外盧 外, 박완식 譯, 『宋明理學史』1 · 2, (이론과 실천, 1995); 그리고 金承炫은 許衡이 吳澄과 더불어 주륙화회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하였다. 金承炫, 앞의 논문,「元代〈北許南吳>理學思想硏究-附論它對高麗理學的影響」輔仁大學哲學硏究所博士論文, 民國77년.

223) “人與天地同, 是甚底同? 人不過有六尺之軀, 其大處同處指心也, 謂心與天地一般.”『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1b-2a.

224) “盖上帝降衷, 人得之以爲心, 心形雖小, 中間蘊藏天地萬物之理, 所謂性也, 所謂明德也,虛靈明覺 神妙不測, 與天地一般. 故聖人說, 天地人爲三才.” 『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1b-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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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묻기를, 一心은 가히 만물을 주재하고 一理는 가히 만사를 總括합니까? 선생이 답하기를, 이것이 바로 一以貫之이다.225)

그러나 여기서 心과 天을 동일시하는 心卽天, 心卽理의 결론을 도출해 내기는 쉽지 않다. ‘心與天地一般’이라는 말은 心의 神妙不測한 작용의 특성을 강조하여 말한 것이지 전적으로 心卽天, 心卽理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늘은 참마음을 내리고 사람은 그것을 얻어 마음(心)으로 삼는다는 주장이나, 심장이 비록 작으나 그 가운데에 천지만물의 이치를 가지고 있어 이를 性 또는 明德이라고 한다는 말은 주자의 性卽理說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또 許衡의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자연적인 良知가 있고 매우 不肖한 사람일지라도 자연적인 良能이 있어 공부하지 않아도 能한 것이다”226) 나 “聖人은 人心에 고유한 良知, 良能으로 세워 나가고 다른 사람들 마음도 본래 이러한 것이 있어서 애친경형하며 사단을 목마르게 하는데 감응하는 데도 나타낸다. 聖人은 단지 이를 發達, 擴大시켜 본래 가지고 있는 本領에서 길러 나가며 人心에 원래 없는 것을 안배하고 재단하는 것이 아니다”227) 등의 말을 그 예로 들기도 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許衡의 말은 그의 사상이 陸象山의 心學으로 기울어진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225) “問; 一心可以宰萬物, 一理可以統萬事. 先生曰; 是說一以貫之.”『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7a.

226) “雖至愚的夫婦, 他也有個自然之良知, 雖是不肖的夫婦, 他也有個自然之良能, 不待學而能者.”『魯齋遺書』, 卷1,「語錄」上. 頁12b.

227) “聖人是因人心固有良知良能上扶接將去. 他人心本有如此意思, 愛親敬兄渴然四端, 隨感而見, 聖人只是與發達推廣, 就他原有的本領上進將去, 不是將人心上元無的强去安排裁接.”『魯齋遺書』, 卷1,「語錄」上. 頁9b-10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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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 靜의 兩物이 서로 의지하지만 반드시 그 중 하나를 위주로 하는데, 聖人은 그것을 定하고 仁義를 바르게 하여 靜을 위주로 한다. 靜을 위주로 함은 內外, 上下 本末이 다 그러하다. 서로 依附하지 않는 物은 없다. 바야흐로 正位를 판별하여 國을 體로 하고 野를 경영하는 것이 外를 바르게 하고 內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이제 바르지 않은 자리에는 앉지 않고 士大夫의 어짊을 섬겨 士의 仁을 벗하여 外를 점검하여 단속하고 바르지 않은 것에 이르지 않게 하니 이것이 外로부터 內에 이르는 것이다. 오히려 中으로부터 外를 다스리는 것이 있으니 心을 바르게 한 후 修身하고 修身한 후 齊家하는 것이다. 이것이 內外를 서로 기르는 것으로 역시 반드시 서로 보완하여 德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心을 위주로 한다.”228). . .만약 德을 닦고 道를 이루려면 반드시 天에서 받은 바른 이치를 에서 恭敬奉待하여 一毫의 放失도 있어서는 안 된다. 또 古今의 사물의 이치에서 詢問과 講學하는데 조금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尊德性은 存心하여 道體의 커다람에 極하는 것이며 道問學은 致知하여 道體의 세밀함에 다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德을 닦고 道를 이루는 大綱領이다.229)

여기서 보면 許衡은 여기서 外에서 內로 이르는 工夫와 內에서 外에 이르는 工夫를 둘 다 긍정하고 있다. 朱子도 道問學과 尊德性을 강조한 것을 상기해 보면 許衡의 思想은 朱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許衡은 趙復의 聖人의 마음(心)을 구한다는 簡易한 사상230)에 영향을 받아 朱子學을 수용, 전개함에 있어 朱子學을 절대적 실천이념으로 인

228) “兩物相依附, 必立一個做爲主, 動也靜也.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以靜爲主, 內外也, 上下也, 本末也, 皆然無物不相依附者, 辨方正位, 體國經野, 是正外以正內也, 今夫席不正不坐, 事士大夫之賢, 友其士之仁, 外而檢束, 使不致不正, 這是從外以及內, 却有由中以正外, 如心正而后身修, 身修而后家齊, 此內外交相養也. 亦必相輔成德, 然必以心爲主.” 『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34a.

229) “若要修德凝道, 必須于那所受于天的正理, 恭敬奉待, 不可有一毫放失. 又須于那古今事物之理, 詢向講學, 不可有一些忽略. 尊德性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 道同學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 這兩件件是修德凝道的大綱領.”『魯齋遺書』, 卷4,「中庸直解」.

230) 侯外盧·邱漢生·張豈之 主編, 『宋明理學史』上(北京: 人民出版社, 1984), p.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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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하고 實踐躬行하였던 것이다. 明代의 학자 何塘은 許衡의 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魯齋는 어려서 독서하면서 성현의 道에 뜻을 두었고 후에 朱子의 小學, 四書를 얻고서는 故習(漢唐代의 經學)을 버리고 한결같이 이에 종사하였다. 그러므로 立身하고 행할 때와 朝廷에서 임금을 섬길 때, 그리고 물러나서 후진을 가르칠 때 모두 朱子를 모범으로 삼아 躬行을 중요하게 여김으로써 언어, 문자의 사이에 힘쓰지 않고, 道로써 致用함을 우선으로 하였고 性命의 오묘함을 탐구함에 힘쓰지 않았다.231)

이 내용은 許衡 사상의 특징을 적절히 표현해 준 것이라 하겠다. 즉 許衡은 朱子學을 적극 수용하여 자신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는데, 이치를 궁구하는 이론적 측면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으나 도덕적 가치의 현실적 실현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측면을 보다 중시하였던 것이다.

朱子는 우주만물의 궁극적인 근원인 太極을 천지만물의 理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 理는 천지만물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근원이지만 반드시 氣와 함께 개개 사물에 내재하여 만물의 性이 된다. 만물이 하나의 理를 근원으로 한다는 의미에서는 평등하지만 氣의 작용에 의해서 차별상이 생긴다. 太極=理는 인간에게 내재되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갖추는 本然의 性이지만 이것이 인간의 氣와 합쳐지면 氣質의 性이 된다. 이 氣質의 혼탁에 의해서 정욕이 생기고 聖賢暗愚의 구별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한 기질의 性을 물리치고 本然의 性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수양과 공부가 필요하다. 이 공부는 ‘存心’을 위주로 하는 주관적인 方法과 格物致知를 근간으로 하는 객관적인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許衡은 이러한 朱子의 사상적 특성을 그대로 답습하여 재현해 내었다.

231) "魯齋幼而讀書, 卽有志於聖賢之道, 後得考亭小學四書, 乃盡棄故習一從事於其間, 故立身行己. 入朝事君, 及乎退休敎授, 皆以朱子爲依, 歸學以躬行爲急, 以不從事乎言語文字之間, 道以致用爲先而不從極乎性命之奧.“『魯齋遺書』, 卷14,「表彰文正公碑記」, 頁1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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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같은 말에서 이러한 경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明德 중에 天地造化를 알고, 陰과 陽이 서로 運行 가운데에 金, 木, 水, 火 土의 五行이 있다. 陰陽은 春夏秋冬 四季인데 春은 木, 夏는 火, 秋는 金, 冬은 水, 土는 四季에 屬하는데, 土는 四季 각 18일간씩 기생한다. 木은 仁, 火는 禮, 土는 信, 金은 義, 水는 智이다. 夫婦는 陰陽이고 사람은 五行의 氣를 받아 사람이 된다. 天과 人의 仁義禮智에 있어서 仁은 溫和 慈愛하며, 天地가 萬物을 生하는 도리이고 義는 사물을 決斷하는 마땅한 도리이고, 禮는 體面 敬重을 으뜸으로 삼는 도리이며, 智는 分辨 是非의 도리이고 信은 老實하여 거짓을 말하지 않는 도리이다. 이 다섯 가지는 天과 人의 德性인데 개개인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각자가 稟受받은 바가 다른데 淸氣를 많이 받으면 精細하고 濁氣를 많이 받으면 精細하지 않다.232)

이상의 내용은 朱子學的 사유의 기본적인 논리가 반복, 재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宇宙萬物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理가 있지만 자연과 인간의 일체가 상하의 구분을 지니고 차별적으로 존재한다. 즉 五行을 바탕으로 자연의 서열이 정해지고 이것이 五倫, 五常으로써 이것이 인간 중에 내재한 것으로 받아들인 朱子學的 사유의 간결한 정식화를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233)

그러나 이민족인 蒙古族의 중국 지배라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許衡의 朱子學 수용의 성격에 있어 실천론의 강조라는 특징을 부여하였다. 蒙古族의 무력을 근간으로 한 중국 통치는 그로 하여금 무질서한 사회를 극복

232) “明德中便知天地造化, 陰與陽相爲運行中間, 便有五行金木水火土, 陰陽是春夏秋冬四季, 春屬木, 夏屬火, 秋屬金, 冬屬水, 四季屬土, 土寄旺四季, 木是仁, 火是禮, 土是信, 金是義, 水是智, 夫婦是陰陽, 人受五行之氣成人, 天與人的仁義禮智信, 仁是溫和慈愛得天地生萬物的道理, 義是決斷事物不敎過去不敎走不上, 都是合宜的道理, 禮是把體面敬重爲長的道理, 智是分辨是非的道理, 信是老實不說慌的道理, 這五件雖是天與人的德性箇箇人都有 人人格有稟愛不同, 稟得淸氣多的生得精細, 稟得濁氣, 多的生得不精細.”『許魯齋集』, 卷3,「直說大學要略」, 頁3b-4a.

233) 岩間一雄. 「元朝儒敎の問題-異民族元朝支配下の儒者-」『名古屋大學補正論集』33,(1965),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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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한 것이다. 중국질서에 무지한 蒙古族들에게는 朱子學의 복잡한 窮理的 論理보다는 실천위주의 간단명료한 논리가 이해, 수용하기에 용이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본래 趙復이 講學한 朱子學은 주로 주자학을 정통으로 하는 도통의식을 확립하고 강조하는 것이었으니, 그는 朱子學을 하나의 절대적 이념으로 신봉하고 이를 실천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234) 그러므로 그의 사상적 영향을 받은 許衡은 堯 · 舜 · 禹 · 湯 · 文 · 武 · 周公의 전통을 보전하고 朱子學의 修身之道를 최선을 다해 실천하며 四書의 교육으로서 修身, 養性으로 각 개인의 입신, 처세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활 규범을 再定立하는데 노력하여 중국의 문명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다.235)

許衡의 사상에 있어 다소 心에 대해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나 그것을 理論化하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 예를 들면 朱子와 陸象山의 경우처럼 無極 · 太極 논쟁이나 心性論에 있어서의 理論的 전개 없이 전체적인 사상의 틀에서 朱子의 이론적 토대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許衡을 朱陸和會論者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許衡은 일상생활에서 실천의 근본이 되는 것이 바로 『小學』과『大學』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小學』은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등 상봉을 가르치고,『大學』은 敬天修德, 節用愛民 등 下率의 法을 가르치는 것이다. 이로써 德行을 쌓는 것이 중시되었다. 德行이란 학문 중의 大節目으로 잠시도 떠날 수 없는 것이고 聖人이 말한 구절구절은 이 德性을 존중한다. 따라서 德性으로 일을 하면 治가 되고 才性으로 일을 하면 亂이 되는 것이다.

234) 鄭仁在, 「元代의 朱子學-元儒의 道統意識을 中心으로-」 『東洋文化』3(1983),p.103.

235) 羅光. 『中國哲學思想史(元明篇)』(臺灣: 學生書局, 1981),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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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許衡이 목표한 것은 蒙古族의 조정에서 一心으로 聖人의 전통을 보전하기 위해 진심으로 朱子學의 도리를 실천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게 되었고, 그 실천원리의 근거를 마음에서 찾아 실천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四書를 읽어 수신양성을 교육하는데 노력하고 개개인의 立身出世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활규범을 세우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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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章許衡의 對蒙古 漢化 努力

許衡은 철저한 朱子學의 신봉자였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현실문제에 있어서는 朱子와 다소 뜻을 달리 하였다. 즉 蒙古族에 의한 중국 지배와 宋 이후 전례 없이 확대된 국가영역, 다민족 융합 등의 現實에 직면하여 현실을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許衡은 전통적인 또는 朱子學的인 華夷論을 수정하여 이민족 왕조인 元朝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元朝의 정치에 참여하여 漢地支配에 익숙하지 못한 蒙古 지배자들에게 중국 전래의 漢法을 시행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러한 漢法 시행을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朱子學의 교육을 적극 추진하였다.

許衡이 元朝의 정책 입안과 그 시행에 참여한 사실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정통적 儒敎 입장의 학자나 史家들은 그가 夷狄에 봉사했다는 이유로 혹독한 비판을 가하였다.236) 반면에 許衡은 본래 金朝에서 태어났고 金과 蒙古族의 전투로 인한 혼란기에 성장하였으므로 宋朝와는 군신관계가 없어 큰 허물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237) 오히려 몽고족 통치자들에게 漢法에 의한 통치를 권함으로써 漢文化 보호에 공헌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238) 따라서 이 장에서는 許衡이 몽고족을 漢化하기 위해 노력한 구체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元代 朱子學 定立에 기

236) 주 5) 참조.

237) “魯齊許先生爲元一代大儒, 遺逢世祖致身通顯而其成已成物, 用夏變夷之功, 自有不可泯者, 或有訾其失身元廷, 殊非公論, 宋之失中原金也, 非元也, 元取中原於金, 非取之宋也.『魯齊遺書』, 卷14, 「淸江彭綱題」.

238) 許衡에 대한 긍정적 평가에 활용된 일화로 당시 隱遁的 朱子學者 劉因(1249-1293)과의 대화가 사용되어 왔다. 劉가 許에게 “公은 초빙하자마자 나아가니 너무 빠르지 않은가?”라고 묻자, “이렇게 하지 않으면 道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대답했던 것이다.『宋元學案』, 卷91,「靜修學案」. 또 “綱常은 하루라도 天下에서 상실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위에 있는 자가 이것을 맡지 않는다면 아래에 있는 자가 맡을 따름이다.”『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라고 한 許衡의 말은 적극적인 현실참여주의자인 그의 입장을 대변해 주는 좋은 예로 평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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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한 許衡의 위상을 평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許衡은 명분론에 입각한 중국 본위의 夷狄觀을 표방한 朱子와는 달리 어떻게 포용적인 夷狄觀을 정립하였는가, 이를 바탕으로 夷狄인 蒙古 統治者들이 漢法을 수용하여 전통적인 儒家의 정치원리에 따라 정치를 하도록 어떻게 유도하였는가, 그리고 당시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현실적으로 蒙古族에 의한 漢法의 수용과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항구적인 방법으로서 어떻게 朱子學을 전달 보급하였는가를 살펴보겠다.

第1節 包容的 華夷論과 ‘漢法’ 施行의 要求

1) ‘時中化夷’의 華夷論

이른바 華와 夷의 민족적인 관계에서 볼 때 漢人인 許衡이 元朝에 참여한 것은 어떤 사상적인 배경에서였을까? 그는 漢人의 신분으로 미개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던 蒙古의 정권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인가? 더욱이 朱子學을 자신의 사상적인 기반으로 삼았던 그가 배타적인 朱子의 이민족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문제를 고찰하기에 앞서 우선 고래로부터 中華民族이 가지고 있었던 주변의 이민족에 대한 관념을 간단히 살펴보자. 중화민족이 자기 민족을 이민족과 구별하는 민족의식을 中華思想 혹은 華夷論이라고 한다. 이 의식에는 중국이 천하에서 가장 문화가 발달한 중심국이라는 자긍심이 전제되어 있다. 중국민족은 예로부터 중국만이 유일한 세계이며 중국 외의 별개의 세계, 중국과 대립되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중국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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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의 세계관 곧 中華主義를 표방하고 있었다. 중화주의는 중국인의 민족적〮, 문화적 우월감에 바탕을 두고 중국인이 이민족에 비하여 민족성과 문화의식이 월등하여 이민족을 그들의 사상체계로 교화하고, 德化로써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한편으로는 중국이 유일한 세계이며, 중국에 대비하거나 대항할 수 있는 세계는 없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德化에 의해 이민족도 중국적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인정한 점 등 두 가지 의식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中華主義는 이민족에 대한 포용성과 배타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239)

중화주의는 특히 정착농업민족인 중국민족이 북방의 유목민족에 대한 대응양식으로서의 의미가 큰데, 주변 이민족과의 대항에서 국력의 우열에 따라 때로는 관용적인 방향으로 때로는 배타적인 방향으로 변천하였다.240) 중국은 역사상 포용성이 강한 시기에는 漢族을 중심으로 주변 제 민족을 흡수 · 융화시켜서 다민족을 형성하였고, 배타성이 강한 시기에는 한족의 단일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의 오랜 역사를 통하여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북방의 민족들이 중국을 침입하여 부분적으로 중국을 지배한 5胡16國 시기부터 南北朝時代에 걸치는 시기에는 그들에 대해 강력한 대항의식을 가졌다. 반대로 이민족을 물리치고 漢族이 부흥하여 중국을 재통일한 시기인 隋 · 唐 時代에는 이민족에 대한 대항의식보다는 포용적인 경향이 강하게 표출되었다.

그러나 宋代에 이르면 주변의 西夏 · 遼 · 金과의 대결에서 무력적 대항의 한계를 갖게 되자 극도의 배타적인 華夷觀으로 변해갔다. 宋은 무력적으로 주변 이민족보다 열세에 있었고 특히 중원을 북방의 金에게 점령당한 상황이라 華夷觀은 크게 경직되었던 것이다. 宋代의 이러한 현실을 北宋代의 理學者 邵雍은 “夷狄이 중국을 범하는 것”을 “노복이 주인을 능멸

239) 全每宗, 『韓國과 中國』(서울: 知識産業社, 1982), p.50.

240) 朴志焄, 「宋代 華夷論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p.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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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으로 비유하였고,241) 南宋代의 葉適은 “天下의 國勢가 약한 것이 여러 번 있었으나 역대 古人들이 세운 나라 중 本朝보다 심한 적은 없었다.242)고 평하였다. 西夏 · 遼 · 金의 계속된 침략과 일부 중국에 대한 지배는 한족으로 하여금 이민족을 불구대천의 원수이며 금수에 가까운 존재로 인식하게 하였다. 북방민족의 한족에 대한 군사적 우세에 직면하여 민족적 우월감은 편협하고 고루해져 북방민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이 극도로 강조되었던 것이다.243) 더욱이 중국의 지식인들은 漢唐 이래 유행한 佛 · 道 二敎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유교정신과 민족정신을 상실해가고 있었으므로 전통적인 華夷論을 다시 정립하고 이민족에 대한 정치적 · 정신적인 우월성과 긍지를 회복하여 확립할 필요가 있었다.244)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宋代에는 華夷論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해주는 春秋學245)이 발달하였다. 南宋 儒學의 집대성자인 朱熹는 『春秋』에 대하여 말하기를 “『春秋』의 大旨로 볼 수 있는 것은 亂臣을 誅滅하고, 賊子를 討伐하며, 中國을 內로 하고 夷狄을 外로 하며, 王을 貴히 여기고 伯을 賤히 여겼을 따름이다”246) 라고 하였고, 또 “『春秋』는 단지 당시의 事實을 그대로 기록하여 당시의 治亂과 興衰를 나타내려고 한 것이지 한 글자마

241) “僕奴凌主人, 夷狄犯中國, 自古知不平, 無由能絶得.” 邵雍, “思患吟” 『伊川擊壤集』,『四部叢刊』正編, 第43卷(台北: 台湾商務印書館, 影印本) 卷16, p.79. 朴志焄, 앞의 논문, p.1에서 재인용.

242) “天下之國勢弱, 歷數古人之爲國, 無甚於本朝.” 葉適 “紀綱三,”『水心先生文集』,『四部叢刊』正編, 第59卷 卷5, p.4. 朴志焄, 앞의 논문, p.1에서 재인용.

243) 全每宗, 앞의 책, pp.50-53.

244) 山本命,「宋時代儒學の倫理學的硏究」(東京: 理想社, 1973), p.15.

245) 春秋學이란 『春秋』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들을 평가, 비판하면서 그 안에서 올바른명분과 의리를 찾으려고 하는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의 사실을 명분과 의리를 기준으로 비판하여 장래의 정치 혹은 행위의 지침을 제시하려는 것인데, 이것은 공자가 正名思想을 근거로 전쟁을 부정하고 覇者를 제후의 맹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을 주 골자로 하고 있다. 공자는 여기서 문화의 정도에 따라 華(문명국)와 夷(야만국)를 구분하여 華로써 夷를 변화시킨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246) “春秋大旨, 其可見者, 誅亂臣討賊子, 內中國外夷狄, 貴王賤伯而巳.” 朱熹, 『朱子語類』, 四庫全書 700-702, 卷83,「春秋」, 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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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褒貶을 定한 것은 아니다”247) 라고 하여 『春秋』의 善惡褒貶을 구체적 사실을 통하여 성패와 득실, 치란과 흥망을 설명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朱熹는 春秋大義를 본받고 春秋筆法을 사용하여 『資治通鑑綱目』을 집필하였다.248) 陸九淵도 『春秋』講義에서 다음과 같이 禮義를 기준으로 하여 華와夷를 구분하였다.

聖人인 중국을 귀하게 여기고 夷狄을 천하게 여긴 것은 중국을 사사로이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은 천지의 中和된 氣를 얻어서 진실로 禮義의 所在이기 때문이고, 중국을 귀히 여긴 것은 중국을 귀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禮義를 貴하게 여긴 것이다.249)

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는 華·夷를 구별하는 근거로 문화적인 차이를 제시하였고, 중국이 夷狄에 비해 귀한 이유는 바로 예의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그는 또 聖人은 夷狄이 강성해져서 夏를 능멸하면 禮義를 베풀 곳이 없어짐을 우려하였다250)고 하면서 華夷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중국만이 고도의 문명국이므로 夷狄이 중국을 멸망시키면 예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렵다고 주장하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 바탕을 둔 화이론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이민족과 구별한 배타적인 우월의식인데, 朱子는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華와 夷의 차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주자학적 사유를 지탱하는 이론적 기저에는 南宋의 대토지 소유자인 지주와 함께 宋 통일 왕조의 관료로서의 朱

247) “春秋只是, 直載当時之事, 要見当時治亂興衰, 非是於一字上定褒貶.” 朱熹, 『朱子語類』, 四庫全書 700-702, 卷83,「春秋」, p.1.

248) 呂謙擧, 「宋代 史學의 義理論」,閔斗基 編, 『中國의 歷史認識』下卷 (서울: 創作과 批評社, 1985), pp.456-57.

249) "聖人貴中國賤夷狄, 非私中國也. 中國得天地中和之氣, 固礼義之所在, 貴中國者 非貴中國者, 貴礼義也." 陸九淵, 『象山集』(『四庫全書』, 第 1156卷) 卷23, p.3.

250) "夷狄强盛呑幷小國, 將乘其氣力, 以憑夷諸夏, 是礼義將無所措矣. 此聖人之大憂也. 楚人滅弦, 滅黃 滅江 滅六 滅庸 至是又滅舒蓼, 聖人悉書不置, 其所以望中國者切矣." 陸九淵, 『象山集』(『四庫全書』, 第 1156卷) 卷23,p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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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의 지배적, 권력적 관점이 전제되어, 宋을 위협하는 夷狄을 사람(人)이라기보다는 사람과 동물의 관계처럼 상하의 질적 차별로서 고정시키려 했다.251) 朱子는 漢人과 夷狄의 차이를 人과 禽獸의 중간이라고 하는 기질적 차별로써 받아 들였던 것을 다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氣質의 昏濁이 같지 않으면 天命의 性이 기울어진 것이 아닌가? 아니다. 日 月의 빛은 한길에서는 그것을 볼 수 있으나 실내에서는 가리워진다. . . . 원숭이는 형상이 사람과 비슷하여 타물보다 가장 영특하지만 단지 말을 못할 따름이다. 夷狄은 사람과 禽獸의 중간에 위치하므로 끝내 바꾸기 어렵다.252)

朱子는 夷狄은 人이 아니고 단지 금수 중에 영특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라는 북송 · 남송대의 시대적 위기 상황에서 이를 극복하고자 하는 민족적 자각인 동시에 구심력의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夷狄의 침입으로부터 중국을 방어하려는 실천적 방향을 의미하기도 한다. 夷狄으로부터 중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중국 전체의 對夷狄이라는 점에서의 연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朱子는 夷狄에 대처하기 위해 村落의 혈연적 편성을 통해 중국이라는 혈연적 유대감을 강화하려고 하였다.253) 그러므로 朱子는 金과의 대적관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천하국가를 위하는 자는 반드시 일정불변의 計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設計는 政事를 열심히 하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데 있다. . . . 대저 金나라 오랑캐가 우리들과 하늘을 같이 할 수 없는 원수라면 화해하지 않는 것이 의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다.254)

251) 岩間一雄,「元代 儒敎の問題-異民族元朝支配下の儒者-」, 『名古屋大學補正論集』33(1965), pp.79-81.

252) “問, 氣質有混濁不同, 卽天命之性有偏全否, 曰非有偏全, 謂如日月之光, 若在露地, 卽盡見之, 若在府室之下有所蔽寒. . . 至於彌猴形狀類人, 便最靈於他物, 只不會說話而已, 到得夷狄, 便在人與禽獸之間, 所以終難改.” 『朱子語類』, 卷4,「人物之性氣質之性」.

253) 岩間一雄, p.80; 守本順一郞 著, 김수길 역,『東洋政治思想史硏究』(서울: 동녘,1985), pp.14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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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朱子는 金과의 대립이라는 현실적, 외적 조건을 활용하였으며 북방 유목민족과 지속적인 무력 대응관계에 있던 北宋과 金에게 中原을 빼앗기고 물러난 南宋의 사대부들이 극단적이고도 배타적인 화이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인다.

그러면 당시 중원지역에 남아서 金의 통치를 받던 士大夫, 또는 金의 政權에 참여했던 사대부들은 어떠한 화이관념을 가지고 있었을까? 우리는 여기서 許衡과 거의 동일한 시대에 살면서 거의 동일한 입장에 처해 있던 金의 사대부 郝經(1223-1275)의 화이론을 살펴봄으로서 당시 金의 지배하에 있던 사대부의 화이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郝經은 北宋政權이 남쪽으로 이동한 후에도 그대로 金의 지배 하에 남아 二程의 학문을 가학으로 전수하던 가문에서 살았던 지식인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儒家의 華夷觀에서 볼 때 夷狄에 해당하는 金의 통치하에 살았으며, 또 다른 강력한 夷狄인 蒙古族이 金을 멸망시키고 南宋까지 侵犯하려는 시대에 살았다. 그 결과 中原의 선진적인 문화가 몽고에 의해 소멸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郝經은 다음과 같이 夷狄도 중국화할 수 있음을 인정했다.

하늘이 반드시 베풀어주는 것은 없으나 오직 선만은 베풀어주고, 百姓은 반드시 따르는 것은 없으나 오직 德을 따른다. 중국은 이미 망하였는데 어찌 반드시 中國人이어야만 잘 다스릴 수 있겠는가. 聖人이 한 말 가운데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오면 중국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진실로 선함이 있다면 그것을 베풀어주는 것이 옳으며 , 따르는 것도 옳다. 어찌 中國과 오랑캐의 다름이 있겠는가?255)

254) 『朱子文集』 卷11 「壬午應詔對事」, 守本順一郞, 위의 책, p.148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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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이미 華와 夷를 명확히 구분하고 華로서의 중국이 이에 대해 지배적 위치, 혹은 적대적인 위치를 설정한 전통적인 儒家의 華夷觀念이 사라졌다. 郝經은 기본적으로 유가의 전통적인 화이관을 초월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여러 민족이 장기적으로 융합되어 북방지역의 백성에게는 이미 華夷를 구분하는 관념이 희석된 결과인 듯하다. ‘오랑캐가 중국에 들어오면 중국이 된다’라는 말은 ‘漢族文化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변화시킨다(用夏變夷)’ 는 전통적인 儒家의 관념이다.

郝經에게 있어서 중국, 오랑캐라는 종족적인 華夷 구분의 의미는 퇴색하고 누가 제대로 통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주요 관심사였다. 중국이든 오랑캐이든 올바른 법도를 가지고 善治할 수 있으면 족한 것이었다. 다시 말해 중국민족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왔던 禮樂의 政治, 漢法의 政治를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孝文帝가 洛陽으로 遷都하여 한결같이 漢의 법률로 정사를 돌보아 典章과 文物을 燦然하게 한 것이 前代보다 더욱 융성하였다256) 고 하였다. 北魏의 孝文帝는 비록 北方의 이민족이었지만 그의 정치는 전대의 왕조보다 선정을 베풀었다. 그것은 바로 그가 漢의 법률로 통치의 기본을 삼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華夏’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변화시킨 현명한 군주257)이었다. 그러므로 中原의 통치자의 자격요건은 漢法을 얼마나 이해하고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적

255) “天無必與, 惟善是與. 民無必從, 惟德之從. 中國而旣亡矣, 岂必中國之人而後善治哉.聖人有云, 夷而進于中國, 則中國之, 苟有善者, 與之可也, 從之可也.”『陵川文集』(文淵閣四庫全書1192(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32, 「立政議」.

256) “孝文遷都洛陽, 一以漢法爲政, 典章文物灿然與前代比隆. . .”『陵川文集』, 卷32, 「立政議」.

257) “用夏變夷之賢主”『陵川文集』,卷32, 「班師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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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할지라도 중국의 道를 행할 수 있으면 중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258)

그러면 許衡이 몽고족의 중국 즉 漢에 대한 지배라는 현실적 여건 속에서 몽고족 왕조인 元朝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은 무엇일까? 朱子는 夷狄(金)을 認定하지 않았고 華와 夷는 양립할 수 없는 존재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朱子의 학문을 계승하여 神命처럼 받들었다고 하는 許衡이 어떻게 주자학적 논리구조에서는 부정될 수밖에 없는 夷狄인 蒙古族의 元 통일권력의 절대성을 옹호하게 된 것일까? 이 부분 즉 화이론에 있어서 주자학적 사유가 어떻게 수정되어 갔는가. 또 그 수정이 가능케 한 객관적인 조건은 무엇인가?

許衡은 朱子의 학풍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지만 漢族과 異民族과의 관계, 중국과 주변 국가간의 관계에 대한 생각, 즉 華夷觀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남송의 포로출신으로서 宋室의 부활을 희망한 趙復259)과는 달리 蒙古族의 중국지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朱子學에 대해 수정을 가하였다.260) 이것은 蒙古族이 중원에 들어와 통치하게 됨에 따라 종래의 민족적 우열관계가 크게 달라진 시대적 상황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蒙古族이 건립한 元朝는 이전의 왕조에 비해 강역이 넓고 활동영역이 확대되고 사상이 크게 개방된 것도 화이관 변화의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261)

許衡의 화이관의 특징은 민족적인 포용력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周易』에 있는 ‘同人于宗, 同人于野亨’의 내용을 “사람이 天下를 같이 하려하면 왜 반드시 같은 겨레여만 되는가!”262)라고 해석하였는데, 이것

258) “能行中國之道, 則中國之主也.”『陵川文集』, 卷32, 「與宋國兩淮制置使書」.

259) 侯外盧 · 邱漢生 · 張豈之 主編, 『宋明理學史』上(北京: 人民出版社, 1984), p. 688.

260) 岩間一雄, 앞의 논문, pp.78-79.

261) 徐遠和,『洛學源流』(山東: 魯齋書社, 1987),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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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北宋 二程의 ‘宗을 바르게 한다’라는 사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으로, 許衡은 이를 비판하기를 “伊洛 諸先生은 同人于宗의 弊가 있다. 같은 宗의 사람은 지극히 위해 주나 다른 宗의 사람은 모두 악인으로 대한다. . . .”263)고 하였다. 그리고 許衡은 이 관점을 민족관계, 즉 화이관계까지 확대시켜 漢族과 타민족에 대해 똑같이 仁과 평등으로 대할 것을 강조하였던 것이다.264) 이러한 관점은 북방 각 민족간의 장기적인 융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朱子의 화이관 중에 존재하는 혈연외적인 것을 혈연내적인 것으로서 포용하는 윤리를 夷狄 즉 蒙古에 대해 적용하여 쓴 것으로 생각된다.265) 이것은 華夷의 분별기준을 혈통중심에서 문화중심으로 이동시킨 華夷觀念의 변질로서, 혈통론적 정통관념이 소멸되고 문화론적 정통관념이 수용된 것을 의미한다.266) 이로써 朱子가 설정한 중국과 이적과의 상하적 차별을 타파하고 이적 즉 몽고를 中國 곧 漢的인 것으로 인정하여 漢法을 쓸 것을 진언했다. 이리하여 許衡은 朱子의 화이관 중에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혈연적 논리를 매개로 夷狄을 人과 금수의 중간으로 받아들이는 점을 夷狄도 역시 중국인과 같이 漢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수정하였다. 이 수정이 朱子學 夷狄觀 그 자체에 의해 매개된 것이므로 許衡에 있어서 주자학적 사유의 보존과 이민족 지배의 긍정을 함께 양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267)

그가 1265년 元朝에 上奏한「時務五事」는 중국에 대한 이민족 지배를

262) 『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6b.

263) 『魯齋遺書』, 卷2,「語錄」下. 頁6b.

264) 徐遠和, 앞의 책, p.369.

265) 岩間一雄, 앞의 논문, p.81.

266) 金陽燮, 「遼金元 三史 編纂에 대하여-下命時期와 早期 未成要因을 中心으로-」『中央史論』6(1989), pp.261-265.

267) 岩間一雄, 앞의 논문, pp.8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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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한 바탕 위에서 몽고족의 효과적인 중국지배 방식을 설파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라를 세움에 있어 漢族과 異民族의 구별보다는 천하의 마음을 얻는 것에 요체가 있고, 천하의 마음을 얻는 것은 漢法을 쓰는 데에 있다고 설명하였다.

고금의 立國의 규모는 비록 각각 다르나 그 大要는 천하의 마음을 얻는데 있습니다. 천하심을 얻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愛와 公일 뿐입니다. 愛하면 民心이 順하고 公하면 민심이 服합니다. . . . 前代를 살펴보면 북방민족이 中夏에 들어와 반드시 漢法을 써야 長久할 수 있었습니다. . . . 금일의 形勢는 漢法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268)

이것은 당시 蒙古 통치자들의 정복체제에서 漢法受容을 통한 통치지배체제로의 전환을 요구한 내용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蒙古의 중국지배 초기의 실정을 상기하면서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를 바로 愛와 公이라고 제시함으로써 蒙古族의 중국지배에 대한 긍정이 나타난다. 이것은 그의 화이관이 혈통주의에서 문화주의로 이동하고 포용성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蒙古가 중국을 지배하는 방식을 漢化함으로써 중국문화 또는 중국 정통 학문인 유학의 보존을 꾀하려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면에서 유가적 민본사상과도 연계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그의 화이론의 수정과 몽고족에 의한 중국지배에 대한 긍정은 다분히 전략적 선택이라고 하겠다.

許衡은 중국과 夷狄이 피차간에 서로 승부를 겨루고 보복을 일삼는 것을 반대하였다.269) 이것은 “천하에는 다 그 對가 있다”라고 하여 사물에는 서로 二元性이 있음을 지적한데서 출발한다.270) “중국과 夷狄이, 중국

268) “古今立國規模, 雖各不同, 然其大要, 在得天下心, 得天下心, 無他, 愛與公而已矣. 愛則民心順, 公則民心服. . .考之前代, 北方奄有中夏, 必行漢法, 可以長久. . . 今日形勢, 非用漢法不可也.” 『魯齋遺書』, 卷2,「立國規模」; 『元史』, 「許衡傳」.

269) 徐遠和, 앞의 책, p.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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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勝하여 四方에 軍士를 보내면 夷狄을 臣服시키고 夷狄이 승하면 반드시 中原을 潰滅하니 그 잔혹이 極에 達한다. 이러한 보복이 어찌 좋단 말인가.”271) 이는 “만물은 모두 陰 · 陽이 本이다”라는 周易原理의 통찰에서 나온 것으로, 華 · 夷가 각기 그 分을 지키기를 갈구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許衡은 蒙古族이 흥하여 中原을 침범한 현실 속에서 『中庸』의 “素夷狄 行乎夷狄”272)이라는 말에서 행동의 근거를 찾았다. 許衡은 이를 “군자가 夷狄의 사이에 처하면 당연히 夷狄이 하는 바를 따르는 것과 같이 그 몸이 처한 데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273)라고 풀이하였다.

許衡의 以夏化夷의 華夷論은 그의 ‘時中’思想에 의해 논리적으로 뒷받침된다. ‘天地의 二氣는 서로 추천하고, 때에 따라 變易하여 道에 따른다. 인간도 이와 같아서 德性으로 일을 하면 물욕이 생기지 않고 능히 때에 따라 변역하여 道에 합해진다’는 것으로, 이것은 한마디로 “時義에 合한다”274)는 말이다. 즉 행동은 항시 命, 時, 勢에 응하여 義에 合해야 하는 것이다.275) 許衡은 이와 같이 ‘道에 合한다.’, ‘理에 中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니, ‘時에 따라서 變易한다.’는 行爲는 항시 道 즉 理를 떠나서는 안 된다. 道 = 理라고 하는 근원적인 도덕법칙에서 떠나지 않으면 그 행동에는 상당한 자유재량이 있는 것이다.276) 그러므로 허형은 “때가 이미 같지 않으면 義 또한 달라진다. 이것이 六爻에서 中正을 貴히 여기는

270) 福田殖, 「許衡について」, 『九州大文學論集』 31号(1985), p.106.

271) 『魯齋遺書』, 卷1,「語錄」上.

272) 『中庸』, 第十四章.

273) 『魯齋遺書』, 卷5,「中庸直解」.

274) 이 “時義에 合한다.”는 것은 생각과 處身함에 있어 時代의 흐름, 즉 대세에 맞추어그 得失을 바탕으로 하여 움직여야 한다는 것으로, 許衡은 그의 文集 『魯齋遺書』, 卷6,「讀譯私言」, 頁 1a-7b에서 이러한 論理를 전개하고 있다.

275) “究而言之, 莫非命也, 命之所在時也, 時之所向勢也, 勢不可爲時不可犯順而處之, 則進退出處窮達得失, 莫非義也.” 『魯齋遺書』, 卷9,「與竇先生書」, 頁2b.

276) 福田殖, 앞의 논문,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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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닭이고, 中正의 中에는 때에 따라 올바름을 갖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277)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時義中正’이다. 따라서 그는 모든 것이 항시 옳은 것은 없으며, 時義에 잘 들어맞고 적합한 위치를 얻는 것을 중시하였던 것이다. 고 있다.

그가 담긴 다음의 詩에서 그의 화이사상을 단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앞을 바라보니 먼 것도 더욱 선명하도다. 긴 세월의 광경이 모두 나를 이루었고 千年의 華, 夷는 모두 人이다.”278) 여기서 ‘華夷千載亦皆人’이라는 표현은 일종의 민족평등적 관점의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북방 각 민족의 장기적인 융합의 産物이고 元初에는 許衡 사상중에 민족관계의 요구가 반영되어 진일보 조정된 것이다.279)

이와 같은 화이사상의 변화로 許衡은 行漢法의 政見을 元世祖에게 상주할 수 있었다. 이른바 行漢法이란 元朝가 중국 고대의 禮樂典章, 문물제도 등을 채택하는 것이다. 許衡은 1266년 올린 「時務五事」 中에서 行漢法의 필요성과 그 방법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북방민족’이 중원에 와서 漢法으로써 통치하면 장구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쉽게 망했다는 내용을 포함하여 行漢法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 ‘漢法’ 施行의 要求

蒙古族이 漢地 · 漢人을 지배하게 됨에 따라 야기된 漢化의 문제는 몽고족과 한족이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金의 정복과정에서 몽고군이 보여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 · 파괴는 漢人의 입장에서 볼

277) “是旣不同, 義亦隨異, 此六爻所以貴中正, 而中正之中, 有隨時之義也.” 『魯齋遺書』, 卷6, 「讀易私言」, p.385.

278) “直須眼孔大如輪, 照得前途遠更眞, 光景百年都是我, 華夷千載亦皆人.”『魯齋遺書』,卷11,「病中雜書與竇先生書」, 頁12b.

279) 徐遠和, 앞의 책, pp.369-3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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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漢人과 漢文化의 절체절명의 생존문제와 직결되었던 만큼 그들의 몽고족에 대한 한화의 의지는 매우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에 몽고족의 입장에서는 漢地의 지배를 통한 물자공급 내지는 재정확보가 목적이었던 만큼 漢人을 이용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 적극적 의지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몽고족의 성향은 中國을 지배했던 이전의 이민족 왕조인 遼 · 金이 적극적인 한문화 수용을 시도하여 결과적으로는 漢文化에 동화되어 자신들의 고유한 민족성마저 상실하였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다. 몽고족의 元朝는 한족의 문물과 제도를 수용하였으나 그것을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적 기반 내에서 적절히 활용하려고 노력함으로서 漢文化에 쉽게 동화되지 않았다.

몽고제국이 1234년 金朝를 멸망시킴으로써 漢地를 통치하게 된 이후 본격적인 漢化가 시작된 것은 세조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전에도 야율초재 등의 蒙古族 漢化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몽고족의 정치중심이 漠北에 있었으므로 그들의 漢文化 수용 태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세조대에 이르면 세조 자신이 제위계승전에서 물산이 풍부한 漢地의 지지를 얻어 北方 遊牧派를 제치고 승리하였으므로 상황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 세조는 본격적으로 중국의 漢地를 지배하기 위해 중국적 통치체제의 확립을 서두르게 되었고, 漢人官僚들의 설득과 참여로 한족의 문물제도를 수용하게 되었던 것이다.280)

그러나 중국적인 통치체제를 지향한 세조의 경우에도 漢文化 수용에 있어 어느 정도 유보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세조는 당시 ‘儒學大聖’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유학을 인정하고 漢文化를 이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漢文化의 이용가치면에서의 이해에 그친 것이지 결코 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다시 말

280) 韓儒林 主編, 陳得芝 · 邱村表 · 丁國苑 · 施一揆, 『元朝史』, 앞의 책, pp.254-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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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세조의 한문화 수용의 태도는 어디까지나 정치 지배력 강화의 일환일 뿐으로, 그가 한문화를 보호하고 인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한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발전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國子學의 설립에 있어서 몽고인 위주의 國子學을 우선하였고, 한인들을 위한 國子學 설립에 대해서는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또 그는 몽고인들에게 몽고의 본속법을 유지할 것을 수차례 지시하고 몽고민족문화 고양책을 시도했으며 몽고문자 사용을 장려하였다.281)이러한 정책으로 세조의 치세에 漢人의 관료채용이 증가하였다가 元朝 말기로 갈수록 그 비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보았을 때282) 蒙古族 지배자들은 漢地 지배를 위해 한문화를 정치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元朝의 민족 불평등 계급제도는 이러한 元朝 지배자들의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281) 『元史』, 卷7, 「本紀」, 第7, 世祖4, 至元9年 7月 壬午條; 『元典章』, 卷31, 「禮部」, 卷4, 學校1, 蒙古學 ‘用古字’條.

282) 주채혁 교수는 元朝 관인계층의 종족별 구성비율의 각 시기별 전개를 다음과 같이분석하였다. * 前期 ; 1206~1259년, 中期 ; 1260~1307년, 末期 ; 1308~1368년.출전: 주채혁, 『元朝官人層硏究-征服王朝期 中國社會身分構成의 한 分析』 (서울: 정음사, 1986), p.37.

각주 282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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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世祖는 당시 蒙古族 지배하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산이 풍부한 漢地의 지지를 얻어 칸위에 올랐던 만큼 한지, 한문화의 정치적인 이용가치를 충분히 알았고, 그의 한화정책은 한마디로 目的 있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리한 위치에 있던 한인들은 몽고족의 한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했고, 이것은 耶律楚材 이후 許衡 등 수많은 한인들의 몽고의 무력에 대응한 漢化策의 승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조는 漠南漢地大總督으로 있던 1251년부터 漢地統治를 경험했고, 이 때 그의 潛邸에 모여든 漢人들은 漢 · 唐 儒學을 고수하는 학자들, 새로이 朱子學을 수용한 학자들 등 다양한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세조의 통치체제 구축에 있어서의 역할도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상황으로 비추어볼 때 세조가 통치체제 구축 과정에서 漢 · 唐的인 詞章爲主의 儒學에 비하여 朱子學의 효용성을 인식하고 朱子學을 體制敎學으로 선택했다는 종래의 학설에는 다소간 의문이 간다. 許衡은 다른 漢人 儒學者들과 마찬가지로 몽고족의 한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인데, 그는 朱子學을 수용하기 이전부터 이미 명성 있는 유학자로서 여러 분야에 걸쳐 박학다식하였다고 한다. 許衡이 曆法에 밝아 王恂 · 郭守敬 등과 함께 受時曆의 제정에 참가하였다는 기록283)은 이를 뒷받침해 준다. 이처럼 許衡은 朱子學에 대한 견식이 별로 없는 세조에게 朱子學者로서 발탁된 것이 아니라 여러 학문에 박학다식하였기 때문에 이미지로서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 추천되기에 이른 것이다.

1238년의 戊戌選試를 계기로 강렬한 蒙古至上主義에 반대하는 두 가지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하나는 한인들 자신의 학문과 중국문화를 부흥

283) “國朝承用大明曆, 歲久寢疎, 上思厘正, 公旣以算術冠一時, 故以委之. 公奏, 必得明曆理者乃可. 上問其人, 公以左丞許衡對. 許公時歸覃懷, 詔. . .至, 命參與改曆事.” 『元朝名臣史略』, 卷9, 「太史王文肅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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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키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몽고인을 중국문화에 동화시키려는 계몽적인 움직임이었다.284) 전자는 耶律楚材를 중심으로 한 降蒙 漢人世家들이 학자를 보호하고 학교를 세움으로서 漢文化의 부흥을 꾀하였던 것이었다. 반면 후자는 1235년 이후 북방에 전해진 朱子學을 수용한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를 파급시켜 몽고인들을 朱子學的으로 교육시키고자 했던 것을 말한다.285) 이러한 움직임은 당시 몽고족이 점차 정복에서 통치로 전환해야 하는 시점에서 나타난 중요한 사회 · 정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太宗의 사후 定宗 · 憲宗으로 이어지는 시대는 몽고 지배층의 권력투쟁으로 혼란의 시대였다. 그것은 한마디로 몽고족의 유목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本地派와 한지를 기반으로 하는 漢地派의 주도권 쟁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定宗의 사후 本地派인 窩闊台(太宗)系와의 汗位繼承戰에서 승리한 漢地派인 拖雷係인 蒙哥(憲宗)가 汗位에 올라 정치 경제적 중심을 漠北에서 漢地로 옮기면서 漢法을 수용하자 儒者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286) 그러나 당시는 정복왕조체제를 향한 과도기였으므로 儒者들에 대한 蒙古 지배층의 인식은 아직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儒者들을 天文 · 占候 · 術數 등의 기능을 가진 사람들로 파악하고 임용하였던 것이다.287)

蒙古族의 한지 경영 노력과 漢人 儒者들의 漢地 · 漢人 · 漢文化 보호의 노력은 忽必烈(쿠빌라이, 후에 世祖)이 한지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忽必烈(1215-1294)은 한지에 대한 정복체제를 漢法에 의한 통치체제로 개편하고자 하였고, 아울러 유학자들은 忽必

284) 安部健夫, 「元代知識人と科擧」, 『元代史の硏究』(東京: 創文社,1972), p.6.

285) 安部健夫, 위의 논문, p.1.

286) 周采赫, 앞의 책, pp.12-22.

287) 唐長孺,「蒙古前期漢文人進用之途徑及其中樞組織」,『學源』2-7(1948), pp.75-94;周采赫, 앞의 논문,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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烈에 의해 정치권에 중용되어 통치이념을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忽必烈은 칭기즈칸의 손자인데, 憲宗 蒙哥汗은 즉위 후 1251년 長弟 忽必烈를 한지에 파견하여 대총독에 임명하였다. 이는 제국의 중앙집권화를 꾀한 憲宗의 정주지대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였다.288) 漠南漢地大總督으로 임명된 忽必烈은 이때부터 漢地 · 漢文化에 대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漢地 統治術 습득을 위해 소위 潛邸舊侶라는 漢人知識層들을 모집하는289) 등 儒者를 초빙하고 漢法을 수용하는 한화정책을 펼치면서 漢族 居住地에서의 정치력을 강화해 나갔다. 당시 忽必烈이 모집한 漢人知識層들은 그 구성원들의 학술, 언론, 進用途程에 의거하여 몇 개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蒙古族의 漢化와 중국적인 통치술의 습득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그룹으로서는 劉秉忠을 중심으로 張文謙, 李德輝, 王尙 등 舊金의 학풍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그룹과 朱子學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姚樞, 竇黙, 楊惟中, 許衡 등의 正統 儒家 집단이 있다.290) 前者가 忽必烈에게 중국 전통의 儒學으로 中原 농업지구를 통치할 것을 상주하면서 초기 幕府組織에 공헌하여 몽고족 통치자들이 漢人을 신임케 하는 政治的 基礎를 마련케 했다면, 後者는 王廷中에서 師의 위치를 점하면서 儒家의 철학, 소위 內聖外王之學과 程朱의 性理之學을 蒙古 汗廷에 전파하고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통치술을 이해하게 하여 중국문화를 보전케 하였다.291)

288) 八田眞弓, 앞의 논문, p.95.

289) 이 潛邸舊侶의 모집은 1251년 忽必烈이 憲宗으로부터 漢地 統治를 위임받은 후에시작된 것으로, 그는 受命 후 즉시 幕府를 설치하여 人才를 적극 모집함으로써 漢地 重建의 계획을 추진했던 것이다. 蕭啓慶, 「忽必烈 時代 ‘潛邸舊侶’考」,『大陸雜誌史學叢書』2-3, 1962, p.270.

290) 蕭啓慶은 그의 논문에서 潛邸舊侶 構成員들의 漢化의 態度와 貢獻을 분석하였다.

291) 蕭啓慶, pp.275-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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忽必烈의 최초의 漢地 경영은 邢州分地에서 시작되었는데, 당시에 忽必烈의 최측근은 劉秉忠이었으므로 인선에서 경영 방법에 이르기까지 劉秉忠의 大計가 많이 접수되었다.292) 그는 “馬上에서 천하를 취할지라도 馬上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는 논리로서 문치주의를 창도하였을 뿐 아니라, 고리대 금지, 부세 요역의 축소, 농산의 부흥, 인재양성, 언로창달 등을 요지로 하는 의견을 진술하여 난민초무와 사회의 질서회복을 企圖하였는데 그의 견해는 크게 주효했다.293) 世祖의 구체적인 정책면에서의 공헌한 인물은 張文謙인데294), 許衡도 그의 지지를 크게 얻음으로써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할 수 있었다.295) 다시 말해 忽必烈의 儒敎的 통치술 수용초기는 劉 · 張 두 사람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296)

漢地 지배자로서의 忽必烈의 지위를 높인 한인측의 의도는 姚樞의 河南, 京兆 경영에서 명확히 나타난다. 姚樞는 한지에 있어서 忽必烈의 세력을 보다 확대하기 위해 새로운 거점을 京兆로 삼았는데, 이로써 그의 주변에 모인 漢人 지식인들의 활동의 장이 크게 확대되었던 것이다.297) 姚樞는 「救時之弊」에서, 三省六部의 신설, 관직의 세습화 방지 및 世侯의 刑獄審理權 회수를 피력하고, 1252년(憲宗2년) 雲南大理國 征伐 시에는 止殺之令을 내리게 하는298) 등 적극적인 한화책을 건의하였다. 이 같은 세조와 한인 지식인들의 노력의 결과 忽必烈의 漢南漢地 大總督時代는 漢地統治를 위한 직무수행의 필요에 의해 한인 지식인이 대폭 증가되었고, 이 때는 한인들의 조언이 현실적으로 실효성을 보이는 시기였다.299)

292) 孫克寬, 『元代漢文化之活動』(臺灣: 中華書國, 1968), p.166.

293) 金鍾圓, 「元代 國子學과 太學에 對하여」,『東洋史學硏究』第3輯, 1969, p.34.

294) 八田眞弓, 앞의 논문, p.99.

295) 孫克寬, 앞의 논문, p.166.

296) 孫克寬, 위의 논문, p.167.

297) 八田眞弓, 앞의 논문, pp.99-100.

298) 金鍾圓, 앞의 논문,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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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들의 협력을 얻은 忽必烈이 한지의 우세한 경제력과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本地派의 지원을 받는 窩闊台係의 阿里不哥와의 제위계승전에서 승리하고 1260년 제위에 오름으로서 한지중심의 정치경제체계가 성립하여 지주경제를 기초로 하는 중앙집권적 전제관료체제가 갖추어졌다. 이것은 다민족적 중앙집권적 관료체제, 즉 정복왕조 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1261년 전국적으로 실시된 戶口調査, 勸農社 설립 등은 한지의 질서 회복을 모색하는 노력의 일환이었다.300)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적인 통치기구, 농경적 수취방식의 운영에 익숙한 儒者들은 중앙집권적인 전제권을 강화하는 통치이념의 제공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세조 즉위 후 蒙古族 통치 집단 내에서는 한화를 시행하느냐 아니면 한화를 부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싼 두 세력간의 격렬한 투쟁이 있었다. 西北 藩王 曾遣使는 入朝하여 묻기를 “이 왕조의 옛 풍속은 漢法과 다르다. 이제 漢地에 남아 도시와 성곽을 건설하고 제도를 만들어 漢化를 시행하니 어찌된 연고인가?”301)고 한화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내었다. 이와 반대로 세조와 가까운 한인 士大夫 劉秉忠 · 郝經 · 姚樞 · 許衡 · 竇黙 등은 元朝가 한화를 시행해야 안정되게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세조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한인을 대거 임용하여 한화를 추진하였다.302)

許衡은 이처럼 몽고족 통치자들이 중원을 통치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漢人 儒者들의 전통적 통치술을 습득, 활용하고자 노력하는 분위기에서 몽고족의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許衡이 최초로 王府에 職을 얻은 것은 1254(甲寅)년이었는데 이것은 劉秉忠 · 張文謙 · 姚樞 등 漢人 儒者들의

299) 八田眞弓, 앞의 논문, p.97.

300) 周采赫, 앞의 책, p.203.

301) “本朝舊俗與漢法異, 今留漢地, 建都市城郭, 儀文制度 遵用漢化 其故何如.” 『元史』, 卷125, 列傳 第12, 「高智耀傳」

302) 歐陽周, 앞의 책, 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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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과 세조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임무는 북중국에서 세조의 諸分地의 하나인 京兆分地의 儒學提擧였다.303) 세조는 자신을 추대하는 한인 지식인들의 인물과 역량을 인식하고 신뢰하여 京兆經營의 입안자 姚樞가 현지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허락하였는데, 姚樞는 뜻을 같이하는 許衡을 京兆提學으로 추천하여 학교건설과 인재양성, 그리고 인민교화를 담당케 했던 것이다.304)

元朝支配體制의 확립과정과 元朝의 유교적 통치술 습득에는 많은 한인 관료들의 설득이 크게 뒷받침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족의 문물, 제도의 섭취가 활발해졌다. 당시 한인 유자들 중에는 자신들의 의견을 직접 상주하여 儒治의 근본을 세우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다. 먼저 郝經의 것을 살펴보자. 郝經은 1260年(中統 元年) 8月 「立政議」라는 제목으로, 먼저 綱紀, 禮義를 세우고 文物典章을 창제하기를 청하였고, 역대 治世의 군주를 서술하여 ‘人倫이 있으면 大亂에 이르지 아니하고 綱紀, 禮義 典章文物은 무너지지 않음이 많은 군주의 힘이었다.’고 하여 모범으로 삼게 하려고 했다. 그 아래에는 몽고의 立國 이후 한법을 행하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폐단을 검토하고 역대 중원에 입주한 이민족이 한법을 사용하여 얻은 효과를 진술하였다. 마지막에는 지난 폐단을 제거하고 新政을 세워 법제를 창달하고 인재를 가릴 것을 구체적으로 건의하였다.305) 그러나 이때는 한인이 조금씩 대두되었을 뿐 儒治의 규모는 크게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許衡은 1265년 世祖에게「時務五事」를 상주하여 漢法의 시행을 요청하였는데 여기에는 그의 정치사상이 종합적으로 나타난다. 漢法의 시행(行漢法)이란 元朝가 정치를 행함에 중국 고대의 禮樂典

303) 安部健夫, 앞의 논문, p.33.

304) 八田眞弓, 앞의 논문, p.100.

305) 『元史』, 卷157, 列傳 第44,「郝經傳」, 頁4b-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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章, 文物制度 등을 채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주는 바로 故事를 빌려 현재의 제도를 건의하고 군주의 언행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經筵의 효과를 가지고 있었으니, 中統, 至元의 儒治의 진전에 있어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許衡의 상소문인 「時務五事」는 全文이 역시 漢法 施行을 위주로 하는 것으로 郝經의 논의와 서로 표리를 이루고 있다. 許衡은 1265(至元 2)年 재상이 된 安童을 보좌하라는 명을 받고 中書左丞이 되었을 때 이를 上疏하였다. 安童은 칭기즈칸 四傑의 하나인 穆華黎의 曾孫으로 후에 朱子學을 지지하는데 힘을 기울인 인물이다. 元代의 朱子學은 그의 지지로부터 비약적으로 진전될 수 있었고 一代의 典章이 이때에 설 수 있었던 것이다.306)

「時務五事」는 (1) 立國規模, (2) 立法用人, (3) 聖君之道<爲君難>, (4) 인재양성 및 학교설치, (5) 人心安定 등의 5개조로 된 長文의 상소문이다. 여기에는 許衡의 蒙古 지배자들에 대한 漢化의 의지가 담겨 있고, 또한 許衡의 정치사상을 엿볼 수 있다. 許衡이 제기한 漢法 시행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었다.

우리나라는 국토가 매우 넓고 여러 민족이 뒤섞여 풍속이 같지 않으며, 논란이 갑작스레 정해졌습니다. 전 왕조를 살펴보면 북방에서 중국을 모두 차지하여 반드시 한나라의 법을 시행하여 장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北魏 · 遼 · 金은 漢法을 쓸 수 있어 가장 오래 지속될 수 있었고, 다른 나라들은 漢나라 법을 실제 사용할 수없어 모두 어지러워지거나 망했음은, 역사책에 모두 기록되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 . 반드시 요즘의 형세와 같아서는 漢나라의 法을 쓰지 않으면 안되옵니다. 육지를 다니려면 수레를 써야 하고 물로 다니려면 배를 써야 합니다. 그 반대로 하면 반드시 다닐 수가 없습니다. 河北 以北에서는 옷과 음식이 시원해야 하고, 四川 以南에서는 옷과 음식이 뜨거워야 합니다. 그 반대로 하면 틀림없이 변하거나 상합니다. 이것으로 논하면, 국가에서 마땅히 한나라의 법을 시행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307)

306) 孫克寬, 앞의 논문,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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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어느 시대보다 정치사회적인 상황의 변화가 극심했던 시대였다. 몽고족의 정복은 아시아와 유럽에 걸치는 광대한 강역을 하나로 묶어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광대한 국가를 건설하였고, 이에 따라 풍속이나 언어, 생활습관이 다른 여러 민족이 뒤섞여 살게 되었던 것이다. 許衡은 이러한 역사적 상황 즉 풍속이 같지 않은 여러 민족이 뒤섞인 상황에 대한 아무런 조치도 없는 상태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漢法 시행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과거 중국을 통치했던 많은 왕조들 중에 北魏 · 遼 · 金처럼 漢法을 시행한 왕조는 흥성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민족은 멸망한 것을 역사의 경험에 비추어 설명하고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漢法을 사용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나라의 풍속과 여러 왕에 걸친 귀족들이, 어느 날 아침 신하들이 고치기로 모의한 데로 몰아, 나라가 망하는 습속으로 나아가는데, 그 세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진실로 총명하여 中原의 역대 聖王들이 정치를 행한 핵심을 아주 잘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반드시 탄식하게 되고 원통하고 분하며 소란스러워질 것이니, 결코 안되옵니다. . . . 추위가 더위로 변함에 있어서는, 처음에 조금 따뜻한 데에서 시작하여 따뜻하다가 뜨거워지고 뜨거워지다가 더위가 쌓여 182일이 되면 추운 기운이 비로소 다합니다. 더위가 추위로 변하는 세 또한 그렇사옵니다. 산에 있는 나무뿌리의 힘은 돌을 깰 수도 있는데, 이 또한 쌓이는 것의 한 증명입니다. 진실로 그것을 차츰 나아가고 고치면서 세월을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하고 일을 확실하게 하면서 바꾸면, 항상 변할 수 없는 것은 없었사옵니다.308)

307) “國朝土宇曠遠, 諸民相雜, 俗旣不同, 論難遽定. 考之前代, 北方奄有中夏, 必行漢法,可以長久. 故魏遼金能用漢法, 歷年最多, 其他不能實用漢法, 皆亂亡相繼, 史冊且載, 昭昭可見也. . . 必若今日形勢, 非用漠法不可也. 陸行資車, 水行資舟, 反之則必不能行. 幽燕以北, 服食宜凉, 蜀漢以南, 服食宜熱. 反之則必有變異. 以是論之, 國家當行漢法, 無疑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308) “然萬世國俗, 累朝勳貴, 一旦驅之下從臣僕之謀改, 就亡國之俗, 其勢有甚難者. 苟非聰悟特達, 曉知中原歷代聖王爲治之要, 則必咨嗟怨憤諠譁, 甚不可也. . . 寒之變暑也, 始於微溫, 溫而熱, 熱而署, 積百有八十二日, 而寒氣始盡. 暑之變寒, 其勢亦然. 山木之根, 力可破石, 是亦積之之一驗也. 苟能漸之摩之, 待以歲月, 心堅而確, 事易而常, 未有不可變者.”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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蒙古族이 중원을 정복한 이후 초기에는 약탈과 파괴로 일관하여 중원지역은 크게 황폐화되었고, 이로 인한 민심은 전례 없는 것이었다고 하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그러다가 太宗 이후에는 약탈에서 정복으로 정책을 바꾸어 중국을 직접적인 통치대상으로 설정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한인과 한문化를 인정하는 정책들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세조의 등극 이후 문화적인 면에서 몽고 지상주의를 주장하고 정주민의 문화를 통치의 기본으로 삼는 대신에 유목적 통치방식을 고집하는 세력이 존재했다.309) 이에 대해 許衡은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한지에서 몽고의 북방 유목적 통치방식을 적용하는 것은 전대의 유목국가들의 경험을 통해서 망국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許衡은 망국의 전례를 뒤따르지 않고 나라를 오랫동안 평온하게 유지하고 번영시키려면 중원의 역대 聖王들이 중요시한 정치의 핵심을 파악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중국을 효과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중국 역대 聖王들의 정치술을 습득하여 시행하는 것 다시 말해 한법의 시행이라면, 이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許衡은 이를 1년 360일의 寒暑의 교차에 비유하여 갑작스런 변화보다는 자연적인 순리를 따를 것을 강조하고, 나무뿌리가 돌을 균열시키는 것에 비유하여 점차 누적된 힘, 축적된 문화의 힘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북방의 풍속을 중국의 法으로 바꾸어 씀은 30년이 안되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옛날 金나라 초에 항상 이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힘쓰지 않았는데, 진실로 애석한 일이옵니다. 그리하여 편안히 지내면서 놀고 즐기기를 30년을 하면서, 신하의 세력이 커지는 형국을 만들어 조상이 앞에서 기회를 잃었습니다. 폐하께서는 후에 그 어려움을 이어, 밖으로는 정벌에 힘쓰고 안으로는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비록 왕조를 지킨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창업의 본보기를 정함과도 같아 앞선 때보다도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신하의 세력이 커지는 것은 성인과 귀신이 안배하여 이미 정해진 도이기 때문에 신이 구구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 외에는 오직 우리 백성들을 부유하고 내실 있으며 학문을 일으키고 병사를 훈련시키고, 때에 따라 손익을 계산하여 제도를 정하는 일은 신같은 자들이 모두 논할 수 있는 것인데, 이는 폐하께서 독실하고 믿음이 있으며 굳게 지키는 데에 달려 있사옵니다. 소인배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작은 이익을 도모하지 말며, 당장의 효과를 요구하지 않고 허황된 말에 넘어가지 않으시오면, 아마 천하의 마음을 얻고, 다스림의 효과를 거의 이룰 수 있을 것이옵니다.310)

309) p.12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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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漢法의 완전한 시행은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것이므로 여기에는 통치자의 굳은 심지와 확고부동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許衡은 국가를 건립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반드시 일정한 법과 규모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許衡은 漢法을 시행함에 신중을 기해야 하며 또한 이러한 漢法의 시행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장기간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가 북방의 풍속을 중국의 法으로 바꾸어 쓰는 데는 30년이 걸려야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은 단기간에 효과를 바라면서 漢法 시행의 효과에 대해 의심할 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漢法 시행에 성공하려면 君主가 이에 대한 독실한 믿음을 가져야만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상과 같이 許衡은 蒙古의 통치자들이 중국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漢法을 시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아울러 漢法을 시행하는 구체

310) “以北方之俗, 改用中國之法, 非三十年不可成功. 在昔金國初亡, 便常議此, 此而不務,誠爲可惜.顧乃宴安逸豫, 垂三十年, 養成尾大之勢, 祖宗失其機於前. 陛下繼其難於後, 外事征伐, 內撫瘡痍, 雖曰守成, 實如創業規募之定, 又難於嚮時矣. 然尾大之勢, 計聖謨神算, 已有處之之道, 非臣區區所能及也. 此外惟當齊一吾民, 使之富實興學練兵, 隨時損益裁爲定制, 如臣輩者, 皆能論. 此在陛下篤信而堅守之. 不雜小人, 不營小利, 不貴近效, 不惑浮言, 則天下之心, 庶幾可得, 而致治之功, 庶幾可成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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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천하 국가를 만드는 데에는 큰 본보기가 있사옵니다. 본보기가 정해지고 순서에 따라 그것을 실천하면 거기에 허물이 없을 것입니다. 이르지 못함이 없으면 다스림의 효과를 기약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음에 의심이 가고 눈이 어지러우며 변하고 바뀌며 말썽이 나고 뒤바뀝니다. . . . 옛날과 지금은 나라를 세우는 데에 본보기가 서로 같지 않지만, 그 대체적인 핵심은 천하의 마음을 얻는 데에 있습니다. 천하의 마음을 얻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사랑과 공평함일 뿐입니다. 사랑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따르고 공평하면 백성들의 마음이 복종하는데, 다스림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복종하는 것입니다. 어찌 그러하겠습니까? 나라를 세운 초기에는 주요 신하들이 공을 믿고 과시하므로 통제하기 어려워, 우리 공공의 疏疏한 백성이나 모두에게 해를 끼치지만 하나도 막아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를 사랑하는 데에는 계책이 필요하지만 그 또한 어려워, 뛰어난 君主나 현명한 신하라도 대처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상황이 비록 통제하기 어렵더라도 반드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고, 꼭 하나도 미리 생각할 수 있는 것을 찾지 못하더라도, 미리 생각하고 뒤돌아보며, 또 때에 맞춰 순리적으로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며 登用하기도 하고 물리치기도 하면서, 안으로 주관을 아주 굳게 가지고 날마다 두드리고 달마다 고치며 해마다 굽고 꺾인 것을 되돌리면 반드시 우리의 사랑과 우리의 公的인 일이 天下에 미칠 것입니다. 이후 그것이 이르면 紀綱과 法道가 시행될 여지가 있게 되고, 天下가 비록 크더라고 힘들이지 않고 다스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先後의 순서와 천천히 할 일과 급히 할 일이 치밀하게 정해지는 것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있지만 말로 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일러 본보기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311)

즉 건국 초기에 공신들이 자신들의 공로를 믿고 세력을 과시하여 백성

311) “ 爲天下國家, 有大規模. 規模旣定, 循其序而行之, 使無過焉. 無不及焉, 則治功可期,否則心疑目眩, 變易紛更. . . 古今立國規模, 雖名不同, 然其大要, 在得天下心. 得天下心無他, 愛與公而已矣. 愛則民心順, 公則民心服. 旣順且服, 於爲治也何有. 然開創之始, 重臣挾功而難制, 有以害吾公小民雜屬而未一, 有以梗吾愛於此, 爲計其亦難矣, 自非英之君, 腎良之佐, 未易處也. 勢雖難制, 必求其所以制, 衆雖未一, 必求其所以一, 前慮却顧, 因時順理, 予之奪之, 進之退之, 內主甚堅, 日戛月摩, 周還曲折, 必吾之愛, 吾之公, 達於天下. 而後已至是, 則紀綱法度施行有地, 天下雖大, 可不勞而理也. 然其先後之序, 緩急之宜, 密有定則, 可以意會, 而不加以言傳也. 是謂之規模.”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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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 모두에게 해를 끼치지만 통제하기 어렵다고 지적한 것은 몽고족의 한인 지배초기부터 문제가 되어온 몽고군의 포학 잔인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許衡은 그동안 몽고족이 보여준 약탈 파괴는 천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해야 할 요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오직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길은 그들을 사랑으로 보살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몽고족이 한지를 정복한 것은 30년이 넘었지만, 몽고에 있어 중국의 華北地域은 그들이 아시아 유럽에 걸쳐 정복한 지역이 실로 광대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중국은 그리 큰 비중이 아니었다. 또 그들은 계속하여 정복지역을 넓혀가고 있었고, 계속적인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수성으로서의 정복체제, 통치체제는 초보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許衡은 그들에게 나라를 세우는 본보기에 대해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본보기의 대체적인 핵심은 천하의 마음을 얻는 데에 두었다. 천하의 마음을 얻는 것은 다른 게 아니고 사랑과 공평함이었다. 나라를 세우는 핵심은 천하의 마음을 얻는 데에 있고, 천하의 마음을 얻는 것은 사랑과 공평함이라고 하는 許衡의 주장은 德治와 仁政을 중시하는 孔孟의 전통적인 정치사상과 일맥상통한다.

許衡은 또 中書省의 운영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中書省에서 천하의 업무를 관장함은 진실로 번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나 그 큰 핵심은 사람을 쓰고 法을 세우는 일입니다. . . . 먼저 담당자를 쓰지 않고 몸소 온갖 업무를 하고자 하신다면,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되어 날이 갈수록 겨를이 없을 것이옵니다. 옛사람이, 선비를 얻는 사람은 번창하고, 스스로를 쓰면 작아진다고 말한 것은, 뜻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일의 대체와 핵심을 아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수백 수천 가지 일이라도 그것을 널리 펴서, 온갖 직책을 다 갖추고, 우두머리는 그 핵심을 총괄하여 대처하면 번거롭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으니, 이것이 이른바 일을 줄인다는 것이옵니다. . . .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법이고, 법을 지키는 것은 사람입니다. 사람과 법은 서로 묶여 위는 편안하고 아래는 따르니, 우두머리는 조정에서 한가롭게 지내므로, 번잡하지도 수고롭지도 않습니다. 이것을 일러 일을 줄인다고 하는 것이옵니다. . . . 옛 사람이 법을 남긴 것은 어길 수 없는 것인데, 어찌 천하의 크나큼과 국가의 중차대함에서 오히려 옛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어길 수 있겠사옵니까?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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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中書省은 오늘날의 국가개념으로 볼 때 행정부라고 할 수 있어, 그 업무의 내용과 권한이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고 許衡은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업무와 권한이 아무리 다양하고 번잡하다고 할지라도 그 運用의 핵심은 用人과 立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법이고, 법을 지키는 것은 사람인 것이다. 업무의 분량이 아무리 많아도 그에 따른 직책을 갖추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임명하여 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漢代 이래로 중국에서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발전시켜 온 중국적인 관료제도를 의미한다. 중국의 관료제도는 그 자체로서 蒙古族의 단순한 제도와는 다른, 보다 체계적이고 效率的인 업무분담과 관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許衡은 監司制度의 운영, 吏部制度의 활성화, 蔭敍의 폐단에 대한 경계 등을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밖으로는 監司를 설치하여 잘못과 직분에 넘치는 일을 바로 살피고, 안으로는 吏部에 전담시켜 資質과 經歷을 살펴 바로잡으면 분에 맞지 않게 추구하는 일이 점차 사라질 것이옵니다. . . . 監司의 條例는 먼저 헤아려 정하고, 귀한 가문과 세습 품관과 높은 관직자인 아비의 힘으로 벼슬에 오른 자식에 있어서는, 편의에 따라 어진 사람은 채찍질하고 여럿 중에서 뽑는 일을 지속적으로 의논하는 것 또한 늦출 수 없사옵니다.

312) “中書管天下之務, 固不勝其煩也. 然其大要, 在用人立法而已. . .不先有司直, 欲躬役庶務, 將見日勤日苦, 而日愈不暇矣. 古人謂得士者昌, 自用則小, 意正如此. 夫賢者識事之體, 知事之要, 與庸人相懸, 蓋十百而千萬也, 布之周行, 百識具擧, 宰執總其要而臨之, 不煩不勞, 此所謂省也. . .夫治人者法也. 守法者人也. 人法相維, 上安下順, 而宰執優遊廊廟之上, 不煩不勞, 此所謂省也. . .皆古人遺法而不可違者, 豈天下之大, 國家之重, 而古人成法, 反可違耶.”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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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그 대체적인 핵심으로 반드시 옛사람이 사람을 쓰고 법을 세운 바의 뜻을 깊이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313)

이외에 許衡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군주의 역할이 막중함을 강조하여 ‘爲君難’을 설명하면서 군주가 지켜야 할 덕목으로 踐言 · 防欺 · 任賢 · 去邪 · 得民心 · 順天道등 여섯 가지를 들었다. 먼저 군주 역할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들은 욕구가 있어서 주권자가 없으면 어지러워지므로, 하늘이 반드시 명을 보아 임금과 스승을 만들어 총명하고 강단 있는 자질과 중후하고 포용력의 역량을 주어서 여럿 중에서 먼저 드러나고 만방에 올바름을 밝히도록 합니다. 이것은 하늘이 아주 어려운 일을 맡기는 것이므로,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옵니다. 堯임금과 舜임금 이래 성스런 황제와 총명한 임금들이 두려워하고 삼가며 위태롭게 여기고, 조심하고 무서워하며 신중하지 않은 적이 없사옵니다. . . . . 孔子가 다른 사람에게 “임금 역할 어렵고, 신하 역할 쉽지 않다.” 고 말한 적이 있으니, 그 말의 유래는 오래된 것이옵니다.314)

許衡은 君主가 존재하는 이유는 정복과 군림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북방 유목민족들의 지배자와는 달리 하늘이 백성들의 안녕과 질서를 위해 하늘에서 명으로서 자리를 정해주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그러므로 군주의 자리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적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백성 위에 군림하고 지배하여 편안하거나 즐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하늘로부터 책임을 부여받은 자리이므로 堯임금이나 舜임

313) “外設監司, 糾察汚濫. 內專吏部, 考訂資歷, 則非分之求, 漸可息矣...監司之條例, 先當擬定, 至於貴家世襲, 品官仕子, 驅良抄數之便宜, 續當議之, 亦不可緩也. 此其大凡要, 須深探古人所以用人立法之意.”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314) “生民有欲, 無主乃亂, 上天眷命, 作之君師, 必與之聰明剛斷之資, 重厚包容之量, 使首出庶物, 而表正萬邦. 此蓋天以至難仕之, 非子之可安之地而娛之也. 堯舜以來, 聖帝明王, 寞不競競業業小心畏愼, 日中無暇. . . 孔子謂人之言曰 ; 爲君難, 爲臣不易, 則其說所由來遠矣.”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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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이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삼가며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유가적 지배자 상을 천명하고 군림이나 권력의 강제를 통한 권리의 주장보다 자신이 하늘로부터 할당받은 자신의 통치범위 내의 인민과 그들의 문화와 재산을 지키는 의무와 책임 부분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적인 군주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許衡은 정치적 군주로서 하늘이 맡긴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첫째 지켜야 하는 덕목으로 踐言을 들고 있다. 踐言이란 정치적 支配者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지고 실천하는 자세라고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군주는 말하기의 어려움을 걱정할 것이 아니고, 말의 실천의 어려움을 걱정해야 하옵니다. 말의 실천의 어려움을 알면, 말을 함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 . . 하물며 천하는 크고 수많은 百姓이 있고 일은 변화무쌍하고 날마다의 수많은 업무가 있는데, 임금으로서 하나의 몸과 마음으로 대처하면서 말의 실수가 없고자 한다면, 어찌 쉽게 할 수 있겠사옵니까? 그러므로 옛날에 말한 것이지만 오늘날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있고, 오늘날 命 받았으나 후일 스스로 어기는 자가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과 같고 다름이 변하고 바뀌어, 紀綱이 펼쳐지지 못하고 法道가 설 수 없는 것입니다. . . . 진실로 옛날 大學의 道를 따라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 하나의 일처리와 한마디 말을 함에 있어 반드시 자연스러운 바와 마땅한 바를 추구하고, 사랑 때문에 끌어들이지 않고 미움 때문에 가리지 않고 즐거움 때문에 치우치지 않고 화 때문에 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뜻을 단정하게 하며 깊이 생각하여 살펴 대처하면 비록 맞지 않는 바가 있다 할지라도 매우 적을 것입니다.315)

許衡은 북방 유목민족의 정치적 지배자가 征服과 침탈에 치중하는 정복적

315) “人君不患出言之難, 而患踐言之難. 知踐言之難, 則其出言不容不愼矣. . . 況天下之大,兆民之衆, 事有萬變, 日有萬幾, 而人君以一身一心酬酢之, 欲言之無失, 豈易能哉. 故有昔之所言, 而今日不記者, 今日所命, 而後日自違之者, 可否異同, 紛更變易, 紀綱不得布, 法度不得立. . . 苟從古者大學之道, 以修身爲本, 凡一事之來, 一言之發, 必求其所以然, 與其所當然, 不牽於愛, 不蔽於憎, 不偏於喜, 不激於怒, 虛心端意, 熟思而審處之, 雖有不中者, 蓋鮮矣.”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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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성에 머무르는 것을 역사적 경험으로 이해하고, 만약 유목적 지배자의 특성에서 통치와 지배의 (의무와 책임이 수반되는) 한족의 정치적 지배자로서의 특성인 관료적 구조 속에서 수많은 업무를 관장하는 군주가 일관성 있는 말을 하지 않으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법도가 설 수 없어 국가조직에 혼란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君主는 말을 함에 신중하고 일단 말을 하게 되면 반드시 실천해야 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자신이 지배하는 체제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진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군주가 우선 수신해야 함을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두 번째로 다른 사람들의 속임을 잘 막아야 한다는 것을 防欺라는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다. 즉 지배자로서의 천명을 다하기 위해 실력과 공평한 판단력을 가짐으로서 사사로이 군주를 속이는 여러 가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함을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위에 있는 사람은 아랫사람을 알기에 어렵고, 아랫사람은 웃사람을 알기에 쉽사옵니다. 그 勢가 그러한 것이옵니다. 알기 어려운 위치에 처하여 알기 어려운 사람을 制御함에 있어서 속지 않는 것은 대체로 어렵사옵니다. . . . 군주는 억조창생의 위에 계시면서, 주고 빼앗거나 벼슬을 시키고 물러나게 하며 상을 주거나 벌을 주며 살리거나 죽이는 권리를 가지고 계시옵니다. 불행하게도 속아서 잘못을 옳다고 여기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여기면, 그 해로움을 다 헤아릴 수 있겠사옵니까? 君主는 기쁨과 노여움이 없어야 하옵니다. 기쁨이 있으면 그 기쁨을 좋아하여 은혜를 팔고, 노여움이 일어나 상황이 확대되옵니다. 군주는 사랑과 미움이 없어야 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랑을 빌려 私的인 것을 하고, 그 미움을 빙자하여 원한을 갚습니다. 나아가 기쁨이 없는 데에 근본을 두어야 합니다. . . . 그들은 온갖 방법의 속임수와 술수로 군주의 마음을 좀먹을 것이옵니다. 여기서 그 속임을 막고자 하면, 비록 堯임금과 舜임금이라 하더라도 할 수 없을 것이옵니다.316)

316) “在上之人, 難于知下, 在下之人, 易於知上, 其勢然也. 處難知之地, 御難知之人, 欲其不見欺也, 蓋難矣. . . 人君處億兆之上, 所操者予奪進退, 賞罰生殺之權, 不幸見欺, 以非爲是, 以是爲非, 其害可勝旣耶. 人君惟無喜怒也. 有喜則贊其喜以市恩, 皷其怒以張勢. 人君惟無愛憎也. 有愛則假其愛以濟私, 藉其憎以復怨. 甚至本無喜也. . . 彼挾詐用術, 千蹊萬徑以蠱君心, 於此欲防其欺, 雖堯舜亦不能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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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許衡은 漢法에 의한 지배자의 자질과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어진 사람의 등용(任賢)이 통치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특히 관료적 지배의 속성상 적재적소에 자격 있는 관리를 등용하는 것이 성공적인 통치의 관건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지배의 대상인 민심을 얻기 위해서는 사랑과 공평함이 수반되는 통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許衡은 군주가 통치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적절한 인물을 기용함에 있어서도 君主에게 요구되었던 공평함과 사랑을 수반한 정치를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어진 사람은 公的인 마음을 지니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며, 이로움 때문에 되돌리지 않고 세력에 굴복하지 않사옵니다. 그러한 것을 널리 행하면 모든 일에서 올바름을 얻고, 천하가 혜택을 입사옵니다. 어진 사람이 사람과 나라에 중요함은 진실로 이와 같사옵니다. 그러나 때로는 시기를 잘못 만나 스스로의 재주를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며, 세상에 한 번 드러나도 남들이 모르옵니다. . . . 군주의 자리는 높고 높아, 날마다 아첨을 듣습니다. 대체로 남의 잘못을 듣기는 좋아하지만, 자신이 허물을 듣기는 좋아하지 않사옵니다. 자신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에 힘쓰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에 힘쓰지는 않사옵니다. 어진 사람이 이를 바로 잡아 고치고 도와서 안정시키고자 함은, 군주로 하여금 堯임금 舜임금과 같은 올바름, 堯임금 舜임금과 같은 안정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 . . 禹임금과 같은 聖人이 좋은 일을 들으면 곧 절하고 더욱 경계하며 “어진 사람을 등용함은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과 달리 여기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고 한 말은, 禹임금과 같은 이도 오히려 경계하고 반성한 것이온데, 후세 임금이야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사옵니까? 이것이 어진 사람의 등용의 어려움이옵니다.317)

317) “賢者以公爲心, 以愛爲心, 不爲利回, 不爲勢屈. 寘之周行, 則庶事得其正, 天下被其澤.賢者之於人國, 其重固如此. 然或遭時之不偶, 務自韜晦, 有擧一世而人不知者. . .人君位處崇高, 日愛容悅, 大抵樂聞人之過, 而不樂聞已之過, 務快已之心, 而不務快人之心, 賢者欲匡而正之, 扶而安之, 使如堯舜之正, 堯舜之安而已. . .大禹聖人, 聞善卽拜, 益戒之曰; 任賢勿貳去邪勿疑, 貳之一言, 在大禹猶尙警省, 後世人主, 宜何如哉, 此任賢之難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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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許衡은 이민족 정복왕조의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로 바로 사악함의 경계와 배격을 들고 있다. 그는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去邪)이 성공적인 국가 통치의 관건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간사한 사람은 그 마음 씀이 험하고 그 술수가 교묘하며 험하므로 千態萬象이어서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것이옵니다. (예컨대 지키지 않을 말과 비속한 말로 사람을 유인하여 잘못하게 한 후에, 그것을 폭로하는 유형) 이들은 교묘하기 때문에 온갖 방법이 다 있으므로 사람들이 막기 어렵습니다. . . . 간사한 자는 한결같이 영합하여, 그 세력을 도둑질하여 자신의 위세를 세우고 자신의 욕구를 채워 임금의 총애를 엮습니다. 임금으로부터의 寵愛가 융성해지면 아래에는 위세를 휘둘러, 대신도 감히 따지지 못하고 근친도 감히 말하지 못하니, 그 해로움이 천하를 덮어도 임금은 그것을 알지 못하옵니다. 이른바 사직의 쥐인 것이옵니다.318)

이민족의 중국지배 과정에서 漢法에 의한 지배의 術이 정착되지 못한 가운데서 가장 빈번하게 발생할 수 있는 간사한 자와 권력에 영합하고자 하는 자들의 술수와 간계를 경계하는 내용으로서 이는 유가의 법도에서 말하는 끊임없이 자신을 경계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잃지 않는 자세를 강조하는 것으로 만약 이를 게을리 한다면 자신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권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혼란을 초래하는 무리들이 생성된다는 내용의 진언이다.

다섯째로 군주됨의 어려움이 민심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민심을 얻는 것은 어려운 만큼 상대적으로 일단

318) “姦邪之人, 其爲心險, 其用術巧, 惟險也. 故千態萬狀, 而人莫能知.(如以桑言卑辭, 誘人入于過失, 然後發之之類) 惟巧也, 故千蹊萬徑, 而人莫能禦...姦邪之人, 一於迎合, 竊其勢以立已之威, 濟其欲以結主之愛, 愛隆于上, 威擅于下, 大臣不敢議, 近親不敢言, 毒被天下而上莫之知, 此前人所謂城狐也, 所謂社鼠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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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심을 얻게 되면 지배자로서의 자격과 天命을 稟受하는 것이라는 내용의 이론(得民心)을 아래와 같이 강조하고 있다.

임금께서는 정성으로 아랫사람을 사랑하시고 아랫사람은 충성으로 임금께 보답하는데, 느낌이 있으면 반드시 응함이 있사옵니다. . . . 禹임금은 홍수를 억제하여 天下를 구하였으므로 그 功이 커서 어질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禹임금을 공경하여 계승하는 길을 열었고, 그 혜택이 깊사옵니다. . . . 漢나라 高祖는 보통 사람에서 일어났는데 천하의 선비들이 구름처럼 모여 따랐고, 榮陽에서 곤란을 당했는데 紀信이 목숨을 버리고 급한 곳으로 달려갔으니, 사람 마음의 돌아감을 알 수 있는 것이옵니다. . . . 백성들이 임금을 추대함은 天命에 근본을 두어, 처음에는 따르지 않는 마음이 없사옵니다. 다만 그들을 실망시키고 불편을 갖게 한 다음에는, 원망과 노여움이 생겨나는 것이옵니다. 禹임금이 아랫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옵니다. 백성들이 임금을 모심 또한 부모와 같사옵니다. 저 太康이 임금 자리에 앉아 하는 일 없이 즐기다가 멸망한 것은, 그 德이 부모된 바가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그러므로 秦나라와 楚나라의 잔혹하고 포악함에 실망하여, 천하가 반란을 일으킨 것옵니다. 漢나라는 정치가 관대하고 어질었기 때문에 천하가 복속했사옵니다. . . . 일반적으로 임금이 즉위한 처음에는 좋은 말씀을 여러 번 천하에 내리므로, 천하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실제로 그러길 기대했다가 지나고 나서 실제로는 그럴 수 없으면, 마침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 . . 大學의 道는 수신을 근본으로 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한 가지 모두 天下의 법이 될 수 있사옵니다. 상 하나 벌 하나가 모두 천하에 부합할 수 있으면, 만백성의 마음은 求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니, 또 어찌 실망하고 불평하는 허물이 있겠사옵니까? 319)

319) “上以誠愛下, 下以忠報上, 有感必應. . . 禹抑洪水, 以救天下, 其功大矣, 啓賢能敬承繼禹之道, 其澤深矣. 漢高帝起布衣, 天下之士, 雲合影從, 其因榮陽也, 紀信至損生以赴急, 人心之歸可見矣. . . 民之戴君, 本於天命, 初無不順之心也. 特由使之失望, 使之不平, 然後怨怒生焉. 禹啓愛下, 旣如亦子矣. 民之奉上, 亦如父母矣. 今太康尸位, 以逸豫滅厥德, 非所以爲父母也. 是以失望, 泰楚殘暴, 故天下叛之. 漢政寬仁, 故天下歸之. . . 大抵人君卽位之始, 多發美言, 詔告天下, 天下悅之, 冀其有實, 旣而實不能副, 遂怨心生焉. . . 大學之道, 以修身爲本. 凡一言也, 一動也, 擧可以爲天下法, 一賞也, 一罰也, 擧可以合天下公, 則億兆之心, 將不求而自得, 又豈有失望不平之累哉.”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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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군주의 지배를 부모의 자식 양육과 비교하면서 天命을 이해하고 이를 통치에 반영하는 군주는 마치 자식을 사랑과 교훈으로 양육하는 부모의 속성과 같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이를 거스르는 것은 天倫을 거스르는 것과 같아 필연적으로 반란과 같은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天命을 거스르는 통치자는 父母됨의 德이 결여되어 잔혹과 포악함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공평한 정치를 시행하지 않으며, 백성들의 마음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민심을 얻는다는 것은 漢法에 의한 통치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끝으로 許衡은 군주됨의 어려움이 天道를 따르는 어려움과 같다고 말하면서 성공적인 통치의 근거로 天道의 수용과 실천(順天道)을 통한 통치자의 인식변화를 주청하고 있다.

하늘이 임금을 세운 것은 본래 백성을 위함이었사옵니다. 그러므로 맹자는 “백성이 무겁고 임금은 가볍다”고 했으며, 書經에서도 “하늘의 보심이 우리 백성의 봄으로부터 하시며, 하늘의 들으심이 우리 백성의 들음으로부터 하시나니”라고 하였으니, 이것으로 논하면 하늘의 道는 항상 아래에 있고 항상 부족한 데에 있사옵니다. 임금은 아래에서 구하지 않고 위에서 구하며, 부족한 데에서 구하지 않고 남는 데에서 구하니, 이것이 하늘의 변화를 부르는 까닭이옵니다. 변화가 이미 생기고 天文이 이미 드러나고 어긋난 기운이 이미 싹트면, 막을 수가 없는데 오히려 구습에 따라 아래를 억누르고 부족한 데에 해를 끼치니, 이것을 일러 “하늘에 순응함은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라는 것이옵니다. 320)

여기서 許衡은 『孟子』와 『書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천하의 근본은 군주가

320) “天之樹君, 本爲下民, 故孟子謂民爲重, 君爲輕. 書亦曰; 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以是論之, 則天之道, 恒在於下, 恒在於不足也. 君人者, 不求之下, 而求之高, 不求之不足, 而求之有餘, 斯其所以召天變也. 變已生矣, 象已著矣, 乖戾之機已萌, 而不可遏矣. 猶且因仍故習, 抑其下而損其不足, 謂之順天不亦難乎.”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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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백성이라는 민본주의를 역설하고 있고, 민의에 따라 천문에 변화가 일

어난다고 함으로서 군주가 천도에 순응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許衡은 또 군주가 지켜야 할 여섯 가지 항목 중에서도 덕을 수양함, 어진이

를 등용함, 백성을 사랑함 등 세 가지를 더 근본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상의 여섯 가지는 어려운 항목이옵니다. 핵심을 들면, 德을 수양하고 어진이를 등용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세 가지 뿐이옵니다. 이것이 다스림의 根本이라는 것이옵니다. 근본이 서면 기강을 펼 수 있고 법도가 행해질 수 있으며 다스림의 효과가 확실하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미움이 서로 공격하고 선과 악이 서로 병통이 되어, 백성들이 물과 불의 재난을 피하지 못하옵니다. 이것으로 다스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사옵니다.321)

이상에서 許衡은 군주 즉, 지배자가 효과적이고 성공적인 통치를 관철시키기 위해 반드시 지켜야 하는 통치원칙을 ‘군주됨의 어려움’이라는 내용으로 정리하여 진언하고 있다. 이러한 통치자의 원칙에는 許衡이 이해하고 정리한 실천적 의지가 강한 朱子學의 내용을 종합하고 있는 것으로 군주에 대한 통치 시행의 원칙에서 그 내용을 전개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許衡의 주자학적 실천을 표출하고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교육과 농업이라는 실제적 분야에서의 적용을 「時務五事」의 내용을 통해 고찰해보기로 하자.

옛날의 聖人을 말하면 항상 堯임금과 舜임금이고, 옛날의 현명한 재상을 말하면 꼭 직과 설이옵니다. 堯임금과 舜임은 天道를 알 수 있어 그에 순종하고 계승했으며, 稷과 契 또한 堯임금과 舜임금의 마음을 알고 보필했사옵니다. 이것이 천하에 法이 되고 後世에 전해질 수 있었던 까닭이옵니다. 하늘의 道는 生을 좋아하지만 사사롭지는 않사옵니다. 堯임금과 舜임금 또한 生을 좋아했지만, 사사롭지 않았사옵니다. . . . 稷은 온갖 곡식을 전파하고 베풀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했으며, 契는 다섯 가지 가르침을 베풀어 민심을 선하도록 했사옵니다. 이것이 堯임금과 舜임금을 보좌하여 이끈 실제이옵니다. . . . 이 道를 행하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수 있고 군대를 강하게 할 수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인재는 많아지고, 이로 인해 나라의 세는 막중해지옵니다. . . . 지금 국가에서는 다만 재물을 거두는 功만 알지 재물이 생산되는 연유는 모르옵니다. 재물의 생산을 모르면서 재물의 거둠을 가혹하게 하면, 또한 재물의 생산에 해롭사옵니다. 단지 사람들의 속임을 막고자 하여 선함을 기르고자 하지 않으므로, 방어하는 사람이 속는 것이옵니다. 속이지 않으면 막는 일이 없게 되옵니다. 속지 않고자 하는데, 衣食으로 생을 두텁게 하지 않고, 예의로써 마음을 기르지 않으면 이는 또한 할 수가 없는 것이옵니다. . . . 진실로 지금부터 농민을 우대하고 중시하기 시작하여, 그들을 어지러이 해치고 모두 내몰고 놀기만 하여 게으르게 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따를 것이옵니다. 남쪽 밭에 농사를 짓도록 해마다 살펴 간절하게 설득하여 십년을 계속 독려한 다음에는, 창고에 쌓이게 되어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옵니다. 上都, 中都로부터 아래로 縣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교를 세워 皇帝의 子弟 이하 庶民의 子弟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문에 힘쓰도록 하면, 父子君臣의 큰 법도와, 청소하고 비질하고 응대하는 데서부터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에 이르기까지의 요체가 나날이 밝혀질 것이옵니다. 그것을 십년을 행하고 난 후에는 위로는 아래가 다스려지는 바를 알 것이고, 아래로는 위를 섬기는 바를 알게 되어, 상하가 화목함이 또한 지금과 비할 바가 아닐 것이옵니다. 이 두 가지를 할 수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행해질 것이고, 이 두 가지를 할 수 없으면 다른 것은 기약할 수 없사옵니다. 이 道는 堯임금과 舜임금이 生을 좋아하고 私的이지 않은 것이옵니다. 오직 이것을 행할 수 있어야만 곧 生을 좋아하고 사사롭지 않을 수 있사옵니다.322)

321) “右六者, 難之目也, 擧其要, 則修德用賢愛民三者而已. 此謂治本, 本立則紀綱可布, 法度可行, 治功可必. 否則愛惡相攻, 善惡交病, 生民不免於水火, 以是爲治, 萬不能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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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語古之聖君, 必曰堯舜, 語古之賢相, 必曰稷契. 蓋堯舜能知天道, 而順承之, 稷契又知堯舜之心, 而輔贊之. 此所以爲法於天下, 而可傳於後世也. 天之道好生而不私, 堯與舜也亦好生而不私. . . 稷播百穀以厚民生 契敷五敎, 以善民心, 此輔導堯舜之實也. . . 蓋此道之行, 民可使富, 兵可使强, 人才由之以多, 國勢由之以重. . . 今國家徒知歛財之功, 不知生財之由. 不知生財, 而歛財之酷, 又害於生財也. 徒欲防人之欺, 不欲養人之善, 所以防者爲欺也. 不欺則無事於防矣. 欲其不欺, 非衣食以厚其生, 禮義以養其心, 則亦不能也. . . 自今以始優重農民, 勿使擾害盡驅游惰之, 民歸之. 南畝歲課種樹懇論, 而督行之十年以後, 當倉庫之積, 非今日比矣. 自上都中都下及司縣, 皆設學校, 使皇子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從事於學, 日明父子君臣之大倫, 自灑掃應對, 至於平天下之要, 道十年之後, 上知所以御下, 下知所以事上, 上和下睦, 又非今日比矣. 能是二者, 則萬目皆擧, 不能此二者, 則他皆不可期也. 是道也堯舜之道, 好生而不私, 唯能行此, 乃可好生而不私也.” 『魯齋遺書』, 卷7, 「時務五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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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蒙古 통치자의 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漢法에 의한 漢族 고대의 성현들의 이치와 법도를 존숭하고 농업이라는 경제구조의 모습에 적응시키기 위한 이론적 전개를 시도하고 있다. 天道를 따르는 것은 天命을 수행하는 것이고 民心을 얻기 위해 民들이 평화롭고 안정되게 생산에 임할 수 있도록 고대 聖人의 예를 따를 것을 진언하고 있다. 許衡은 백성들의 안정된 생활이 기반이 되어야 군사가 강해지고 인재를 통해 국가가 부유하고 강건해 진다고 주장하고, 이를 위해 백성들이 게으르지 않고 사사로이 이를 취하거나, 건강한 생산 활동을 방해하는 국가의 수탈과 권력자들의 私慾을 경계해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백성들이 생산에 능동적이고 국가가 이를 보위해준다면, 백성은 부유하고 여유롭고, 가득한 창고를 통해서 통치자에게 순응할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통치자가 민심을 얻는 天道의 이치를 따름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漢族 통치에 익숙하지 못한 異民族 통치자에게 농업 장려와 이를 통한 백성들의 안정 확보를 보장하는 것이 天道를 따르는 것이며, 통치권의 보전에 필수적이라는 내용을 진언하고 있다.

이상의 許衡의 진언 내용을 요약하면, 몽고제국은 천하에 군림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일정한 규모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는데 蒙古에 있었을 때는 이것을 논할 필요가 없으나 中原에서 國祚를 열고 中原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漢法에 의거한 행정조직을 수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漢人들의 생활 풍습은 모두 古人의 遺法을 따르고 있는 사실을 중시하고 古人의 成法에 준한 법령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활질서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을 운영하는 인물이 적임자가 아니면 法制定이 무의미하므로 장차 인재선발에 유의해야 하며 군주는 德治를 근본으로 하여 민심을 얻도록 힘써야 하고, 儒治를 성공하기 위해서는 中部에서 司縣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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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기까지 모두 학교를 개설하고 皇子 이하 庶民의 子弟에 이르기까지 모두 학문에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건의는 당시 元朝가 중앙집권체제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타당성이 있어 세조에게 영향을 주었다.323) 이는 결과적으로 許衡이 元朝에 중임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써 한족의 통치체제를 답습한 통치기구가 정비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조는 1269년(至元 6年)에는 許衡, 劉秉忠에게 명하여 몽고의 관습법과 中國 역대의 율령을 참고로 한 元朝의 官制를 議定하였다.324) 이 관제에 따라 중앙에 行政 · 軍事 · 監察의 中樞機構인 中書省 · 樞密院 · 御史臺가 설치되었고 中書省 밑에는 다시 六部를 두고 지방의 路 · 府 · 州 · 縣을 統轄하게 하였다.325) 뿐만 아니라 1270년(至元7年)에는 정책입안이나 시행에 대한 監察機關인 御史臺를 설치하고 蒙古 · 色目 · 漢人들은 御史로 임명하여 감찰기능을 담당케 했다.326) 또한 許衡의 건의와 張文謙의 주청으로 農政이 실시되었다. 金의 멸망을 전후하여 農田이 황폐하여 世祖時代에 생산 질서를 회복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의 유지가 어려웠으므로 농정이 元代의 大典이 되었던 것이다.327)

이와 같이 許衡은 世祖가 중원 통치를 위해 漢人 儒者의 참여를 절실히 요구할 때 行漢法의 시행을 주장하면서 元朝의 정치, 교육에 참가하였다.

323) 김종원, 앞의 논문, p.35.

324) 『元史』,「許衡傳」·「劉秉忠傳」.

325) 김종원, 앞의 논문, p.35.

326) “昔我世祖皇帝卽位之十年, 始立御史臺, 以總國憲. . . 乃考帝王之道, 酌古今之宜, 建國紀元, 而著令典焉. . . 按御史臺, 至元五年置, 秩從二品, 二十一年陞正二品, 御使本三六, 後增至十六人, 皆漢人, 又增蒙古色目人, 如漢人之數, 今三十二人, 至元十四年, 卽取宋, 置南行臺, 二十七年江南之地, 號江南諸道行御史臺. . . 始建臺時, 大夫卽塔察兒也. . .” 虞集,『元文類』, 卷30,「御使臺記」.

327) 孫克寬, 앞의 책. pp.180-184; 虞集, 『道園學古錄』 「天水郡伯趙公神道碑」에는‘世祖建元中統, 始置十道勸農使, 使總災農, 爲之使者, 皆取於故國老人, 君子長者, 親行鄕里, 論以安輯, 敎以樹藝’라고 農政의 시행에 관한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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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일찍이 “綱常은 하루라도 天下에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위에 있는 자가 이것을 맡지 않는다면 아래에 있는 자가 이를 맡을 따름이다.”328)라고 말함으로써 천하가 어지러울 때에 綱常을 중시하고 보호하는 중임을 담당하려는 의지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元朝 통치자의 한문화 수용에 기여하고, 이를 통해 한문화 보호에 큰 공헌을 한 것이다.

第2節 許衡의 對民敎化策

1) 人倫 敎育과 社會紀綱 强調

許衡은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통치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학교 교육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許衡은 朱子學의 格物致知가 학문의 窮極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기초라는 측면에서,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교육을 통한 실천의지의 확산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사람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신의 분수에 맞게 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은 本然의 性과 같이 타고나는 氣稟에 의해 정형화되기 보다는 실천을 통한 자신의 窮理에 있다고 주장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경계하고 올바른 이치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교육을 통한 방법이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許衡은 朱子學을 神命과 같이 받들고 實踐 力行하는데 주력하였으므로 그의 교육사상은 기본적으로 朱子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주자학적 사유에서는, 인간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완전한 善인 本然之性을 가지고 있으나 이 本然之性이 인간의 性으로 化하는 순간 인간의 氣와 합쳐져 氣質

328) “綱常不可亡於天下, 苟在上者無以任之, 則在下以任也. 故亂難之中毅, 然以爲己任云.”『宋元學案』, 卷90, 「魯齋學案」, 頁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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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性이 된다고 보았다. 이 氣質의 性을 극복하고 本然의 性을 회복하는 것이 학문을 학습하는 목적이다. 本然의 性을 회복하는 것이 개인의 수양공부의 목적이라면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교육 대상자가 本然의 性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일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공부는 人性論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人性은 本然之性과 氣質之性으로 나뉘고 사람은 선천적으로 완전한 도덕성을 타고 나므로 기질을 변화시켜서 완전한 道德 稟質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학문을 하는 것은 氣質을 변화시켜 인간에 내재되어 있는 惡을 버리고 善을 일으켜 완전한 도덕품성을 표현해 내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朱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의 聖王은 학교를 설립하여 천하의 사람을 가르쳤으니 王世子 · 王子 · 公侯 · 卿大夫 · 元士의 嫡子로부터 庶人의 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여덟 살에 小學에 入學하고 열다섯 살에 大學에 입학하여 반드시 모두 그 氣質의 치우친 것과 物慾이 가린 것을 없애서 그 본성을 회복하고 그 人倫을 다한 후에 그치게 했다.329)

즉 朱子에 의하면 小學과 大學의 학교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학문하고 가르치는 주목적은 氣質의 편벽됨과 물욕의 폐단을 제거하고, 本然之性을 회복하는 것이다. 許衡도 朱熹의 사상을 계승하여 이와 마찬가지로 기질의 변화를 교육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생각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氣運의 陰陽을 論하건대 대개 變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맑은 것은 변해서 흐리게 될 수 있고 흐린 것은 변해서 맑게 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변해서 추하게 될 수 있고 추한 것은 변해서 아름답게 될 수 있다. 정욕을 함부로 하면 맑고 아름다운 것이 흐리고 추하게 변할 수 있고, 밝은 德을 밝히면 흐리고 추한 것이 맑고 아름다운 것으로 변할 수 있다. 하늘이 낳은 聖人은 밝은 德이 완전히 밝아서 工夫하지 않아도 천하만사를 모두 환히 알 수 있고 모두 끝낼 수 있다. 天下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같은 밝은 德을 갖고 있다고 보는데, 다만 타고난 氣稟에 의해 구속되고 또 태어난 이후에 귀, 눈, 입, 코와 몸의 애욕(愛欲)에 의해 가려지므로 밝은 德이 어둡게 막혀서 짐승들과 차이가 크지 않게 된 것을 聖人은 불쌍히 여겨서 학교를 설립하여서 그 氣質을 변하게 하고 현재의 밝은 것을 기르고 아직 열리지 않은 밝은 것을 열어서 사람마다 밝은 德이 모두 자기와 같게 했으니 이것이 聖人이 가르침을 세운 본래의 뜻이다.330)

329) “古之聖王, 設爲學校, 以敎天下之人, 使自王世子 · 王子 · 公侯 · 卿大夫 · 元士之適子,以至庶人之子, 皆以八歲而入小學, 十有五歲而入大學. 必皆有以去其氣質之偏, 物欲之蔽, 以復其性, 以盡其倫而后已焉.”『朱子大典』, 卷15,「經筵講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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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衡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받은 陰陽의 氣는 淸濁과 美惡으로 구분되는데, 이것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完全한 道德性 즉 明德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타고 나는 氣稟에 구애되어, 또 태어난 후에 이목구비 등 신체의 애욕에 가려 밝은 덕이 어둠에 가리워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聖人이 이를 가련히 여겨 학교를 설립하여 그 기질을 변화시켜 明德을 회복시키려고 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許衡은 朱子와 마찬가지로 太極 = 理의 內容은 天倫 = 人倫이고, 人倫은 바로 五常과 明德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本然의 性을 회복한다는 것은 바로 明德을 밝혀 실천하는 일이다. 許衡은 교육이란 인륜을 밝히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배우는 것은 夏 · 殷 · 周 三代가 같이했으니 모두 人倫을 밝히는 것이었다. 人倫이 위에서 밝으면 소인은 아래에서 친하니 순은 여러 물건에 밝고 인륜을 살펴 알았다. 후세에 君臣 父子 兄弟 夫婦 朋友의 다섯 가지에 재앙과 사고가 연달아 일어나는 것은 오직 인륜이 밝지 않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또한 예를 들어 舜임금은 완고한 아버지와 시끄러운 계모와 오만한 이복동생의 세 사람 사이에서 도리를 다했으니 오직 사람의 큰 인륜이 마땅히 그러해야 하므로 원망하고 탓하는 것이 없이 부모가 사랑하면 기뻐서 잊지 않고 부모가 미워하면 힘들어도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은 다만 여기에서 밝게 알게 된 후에 사람의 道를 다할 수 있다.331)

330) “倫生來所禀氣陰陽也. 盖能變之物, 其淸者可變而爲濁, 濁者可變而爲淸; 美者可變而爲惡, 惡者可變而爲美. 縮情欲, 則淸美變爲灟惡; 明明德, 則濁惡變爲淸美. 天生聖人, 明德全明, 不用分毫功夫, 於天下萬事, 皆能曉解, 皆能了干. 見天下之人, 皆有自己一般的明德, 只爲生來的氣禀拘之, 又爲生以后耳目口鼻身體的愛欲蔽之, 故明德暗塞, 與禽獸不遠, 聖人哀怜, 故設爲學校以變其氣, 養見在之明, 開未開之明, 使人人明德, 皆如自己一般, 此聖人立敎之本意.”『魯齋遺書』, 卷3,「小學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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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인륜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각자가 마땅히 준수해야 하는 행위준칙이다. 그 중에서도 君臣 · 父子 · 夫婦 · 長幼 · 朋友의 關係는 인간사회의 가장 근간을 이루는 사회관계이다. 夏 · 殷 · 周 三代에 있어서는 人倫을 밝히는 것을 교육의 근본으로 하였는데, 후대에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아 君臣 · 父子 · 兄弟 · 夫婦 · 朋友 사이에 문제가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은 許衡이 윤리도덕을 중요시하고 덕치 · 왕도사상을 주장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가르칠 敎’ 字를 ‘人倫을 밝히는 것’과 동일시하였고, 교육자는 인륜을 가르치는 것이 주된 임무임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가르칠 敎자는 人倫을 위해 생긴 것이니 本 · 末자가 나무를 위해 만들어지고 源 · 流자가 물을 위해 만들어져서 後世에 모두 그것을 통용하는 것과 같이 敎자도 이와 같다. 학자는 마땅히 가르침이 나오는 곳을 알아야 하니 가르침이 만들어진 까닭을 알지 못하면 어긋나는 것이 어찌 天里만큼만 멀겠는가?332) . . . .

331)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人倫明于上, 則小人親于下, 舜明于庶物, 察于人倫.後世君臣父子兄弟夫婦朋友此五者, 禍亂相尋, 只是人倫不明, 故致如此. 且如大舜處頑 · 囂 · 傲三者之間, 孜孜如此. 只是人之大倫合如此, 故无怨尤, 愛之. 則熹而不忘, 惡之則芳而弗怨, 人只于處明得, 然后盡得人道.”『魯齋遺書』, 卷1, 「語錄」上.

332) “敎之一字爲人倫生, 如本末字爲木設, 源流字爲水設, 而後世皆通用之, 敎之一字, 亦猶是也. 學者當知敎之所自, 不知敎之所以設, 則差之豈但千里之遙哉.”『魯齋遺書』, 卷2,「語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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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것은 夏 · 殷 · 周 三代가 같이했으니 모두 人倫을 밝히는 것이었다. 師道의 職責은 人倫으로써 가르칠 뿐이었다. 무릇 人倫에 근본하지 않은 것은 모두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다.333)

許衡은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하는 인륜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하늘로부터 稟受한 것이므로 사람의 마음 안에 이미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이 인륜을 밝혀내는 것이므로 인륜을 밝히지 않는 것은 교육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인륜을 밝히는 것은 개인의 德性을 발현시키는 것임과 동시에 개개인이 모여 생활하는 인간 사회의 기틀과 질서를 형성한다고 말하고 있다.

許衡이 말하는 인륜은 君臣 · 父子 · 夫婦의 관계가 기본을 이룬다. 그리고 인륜은 위에서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윗사람이 인륜에 밝으면 아랫사람은 자연히 이를 따라 인륜을 지키게 되어 삼강의 기틀이 이미 갖추어진 것이므로 다른 일들도 자연스럽게 질서가 확립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334) 이는 인륜을 밝히는 것만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국가 통치를 바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통 유가에서 宋代의 이학자들에 이르기까지의 공통적인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먼저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교육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먼저 바로 기틀을 잡고 이를 토대로 교육을 통하여 아래를 교화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許衡은 말하고 있다. 許衡이 활동하던 시대는 오랜 전란으로 인한 도덕질서의 쇠퇴로 이러한 교육이 더욱 필요한 시기였다. 더구나 許衡은 당시의 사회지배구조 고위관리가 될 수

333) “學則三代共之, 皆所以明人倫也. 司徒之職, 敎以人倫而已. 凡不本于人倫, 皆非所以爲數.” 『魯齋遺書』, 卷1,「語錄」上.

334) “明人倫的人倫明于上, 則小民親于下, 君臣, 父子, 夫婦三者的關係旣正, 則他事皆可爲之.”『魯齋遺書』, 卷1, 「語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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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國子學의 敎育을 장기간 담당하였으므로 이처럼 위로부터의 인륜을 밝혀야 한다는 주장은 더욱 필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許衡은 인륜을 밝히는 것이 사람과 금수를 구별하는 근본적인 기준이라고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明倫의 明은 밝힌다는 것이고 倫은 倫理이다. 사람이 하늘에서 命을 부여받았으니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지 않음이 없다. . . . 夏 · 殷 · 周 三代의 聖王이 庠 · 序 · 學 · 校를 설립하여 天下를 가르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를 밝혔을 뿐이다. 대개 사람이 사람의 倫理를 밝히지 못하면 높고 낮음과 위와 아래와 가볍고 무거움과 두텁고 얇은 것이 뒤섞이고 紊亂하여 모두 다스릴 수 없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고 아들이 아들답지 않고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고 夫婦와 長幼와 朋友가 각각 그 夫婦와 長幼와 朋友의 본분에 있지 않으니 어찌 뒤섞이고 문란하여 모두 다스릴 수 없는 데에서만 그치고 말겠는가? 장차 그 재앙과 난리가 서로 이어져서 금수로 전락한 후에 그칠 것이다. 그러므로 옛날의 가르치는 자는 반드시 윤리를 밝히는 것을 가르쳤고 배우는 자는 반드시 윤리를 밝히는 것을 배웠다.335).

사람으로서 人倫道德을 갖추지 못하면 그 무질서하기가 금수와 다를 바 없으므로 그 결과는 재앙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許衡은 천륜인 父子의 親함 · 君臣의 義와 夫婦 · 長幼 · 朋友에는 각각 당연한 법칙이 있는데, 이것을 배워서 밝히지 않으면 사람의 道에서 멀어지고 禽獸와 가까워진다336)고 생각하였다. 인륜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當然之則

335) “明倫. 明者明之也, 倫者倫理也. 人之賦命于天, 莫不各有當然之則. . . 三代聖王, 設爲庠序學校, 以敎天下者, 无他, 明此而已. 盖人而不能明人之倫理, 則尊卑上下, 輕重厚薄, 淆亂而不可理, 其甚者, 至于父不父, 子不子, 君不君, 臣不臣. 夫婦長幼朋友, 各不居其夫婦長幼朋友之分. 豈止緖亂而不可統理, 將其禍亂相侵, 淪于禽獸而后已. 此所以古之敎者必以明倫爲敎, 而學者必以明倫爲學.”『魯齋遺書』, 卷3,「小學大義」.

336) “父子之親, 君臣之義, 與夫婦, 長幼, 朋友亦莫不各有當然之則, 此天倫也. 苟于學以明之. 則違遠人道與禽獸无少異.”『魯齋遺書』,卷1,「語錄」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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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 이것은 하늘로부터 이미 稟受받아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는 것이므로 가르친다는 것은 단지 이것을 밝히는 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인륜을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수신을 하는 것은 治國平天下의 기본이므로 인륜을 밝히는 것은 결국 치국평천하를 위한 전제였다.

2) 學校敎育과 人材育成 强調

치국평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인재는 기질을 변화시키고 明德과 인륜을 밝혀 완전한 도덕성의 회복을 이룬 사람을 지칭하였다. 許衡은 선왕이 학교를 설립한 것은 인재를 양육하여 천하를 제도하는 데 쓰기 위함인데, 후대에 잘못된 科擧의 폐단으로 어진 사람과 군자의 덕성을 가진 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許衡에게 있어 교육이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에 근거하는 것이다.

許衡은 다음 예문에서 과거의 폐단과 문장위주의 학문, 그리고 德에 근거하지 않는 교육을 비판하였다.

예전의 聖王은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육하여서 천하에 쓰이는 것을 도왔는데, 그 폐단에 이르러서는 과거의 방법이 엄밀할수록 선비로서 그 과거에 나아가는 자가 더욱 교묘해져서 문구를 짜깁기하여 베끼기까지 하여 반드시 합격하기를 바라게 되고 윗사람은 人才로써 天下의 선비를 대하지 않으니 아랫사람으로서 이 科擧에 應하는 자도 어찌 어진 사람과 君子의 마음으로 하겠는가? 비록 그런 사람을 얻어도 써서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위와 아래가 서로 대하는 그 폐단이 이와 같으니 百姓들이 福을 입게 하려고 하나 그럴 수 있겠는가? 예전의 聖王도 학교를 설립했고 후세에도 학교를 설립했으나 예전의 聖王이 왜 설립했는지를 모른다. 윗사람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까닭과 사람들이 배우는 까닭은 모두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에 근거하니 다른 가르침이 없고 다른 學問이 없다.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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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許衡이 중시하는 교육의 내용은 무엇인가.

孔子 이후 교육에 있어 六經을 중시하였으나 宋代에 이르러 朱子는 유가의 교육사상을 계승하면서도 당시의 文章爲主의 교육을 부정하고 德性爲主의 교육을 제창하였다. 그는『大學』『中庸』『論語』『孟子』를 중심으로『四書集註』를 지어 格物 · 致知 · 誠意 · 正心과 修身 · 齊家 · 治國 · 平天下의 修己治人을 목적으로 하는 교육적 구상을 하였던 것이다. 許衡은 姚樞를 거쳐 朱子學을 수용하기 전에는 北方의 落第老儒의 句讀訓解를 공부하였고, 당시 그가 학생에게 가르친 것도 기본적으로 章句之習이었다. 그러나 朱子學을 수용한 이후에는 주자학에 입각하여 교육을 시행하였으므로 朱子의 주장에 따라 학교를 小學과 大學 두 단계로 나누는 것을 찬성하였다.

옛날에 백성이 여덟 살이 되면 위로 王公으로부터 아래로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小學에 입학하게 하여 淸掃하고 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과 禮 · 樂 · 射 · 御 · 書 · 數의 글을 가르쳤으며, 열다섯 살이 되면 天子의 元子, 仲子로부터 大夫, 元士의 嫡子와 일반백성의 뛰어난 자들이 모두 대학에 입학하게 하여 窮理 · 正心 · 修己 · 治人의 道를 가르쳤으니 이것이 小學과 大學이 나누어지게 된 까닭이다. 그 어릴 때에는 먼저 小學에서 그것들을 익히지 않으면 그 버린 마음을 거두어 그 德性을 기를 수 없으며, 그 나이가 들어서는 大學에 진학하지 않으면 그 義理를 살펴서 사업을 처리할 수 없으니, 小學을 먼저 하는 것은 大學의 기본을 세우기 위해서이고, 大學에 진학하게 하는 것은 小學의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였다.338) 小學에서는 아래에서 위를 섬기는 道를 가르쳤으니 아들이 아버지에게 孝道 하고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들과 같은 종류이고, 大學에서는 위에서 아래에 임하는 道를 가르쳤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德을 닦고 절제하여 쓰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종류였다.339)

337) “先王設學校, 養育人才, 以濟天下之用. 及其弊也, 科目之法愈嚴密, 而士之進此者愈巧,以至編摩字樣, 期于心中. 上之人下以人才待天下之士, 下之人應此者, 亦豈仁人君子之用心也哉. 雖得之, 下益于用, 上下相待, 其弊如此. 欲使生靈蒙福, 其可得乎. 先王設學校, 后世亦設學校, 但不知先王何爲而設也. 上所以敎人, 人所以爲學, 皆本于天理民彛, 无他敎也, 无異學也.”『魯齋遺書』, 卷1,「語錄」上.

338) “古者民生八歲, 上自王公, 下至庶人之子弟, 皆令入小學, 敎之以洒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 及其十有五歲, 自天子之元子 · 衆子, 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者, 皆入大學, 敎之以窮理正心修已治人之道. 此小學, 大學所以分也. 當其幼時, 若不先習之於小學, 則无以收其放心, 養其德性, 及其年長, 若不進之於大學, 則无以察夫義理, 措諸事業. 先之以小學者, 所以立大學之基本, 進之於大學者, 所以收小學只之成功也.”『魯齋遺書』, 卷3,「小學大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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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學에서는 청소하고 접대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禮節과 禮 · 樂 · 射 · 御 · 書 · 數를 배움으로써 德性을 기르고, 大學에서는 窮理 · 正心 · 修己 · 治人의 道를 연마하여 의리를 살펴서 사업을 처리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小學을 먼저 하는 것은 大學의 기본을 세우기 위해서이고, 大學에 진학하게 하는 것은 小學의 성공을 거두기 위한 것으로, 다시 말해 小學은 大學의 기본이고 大學은 小學의 완성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許衡은 교과목으로『小學』과 四書를 매우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340) 朱子와 같이 그가 교육과정에서 小學을 강조한 것은 학생에게 灑 · 掃 · 應 · 對 · 進退의 예절과 禮 · 樂 · 射 · 御 · 書 · 數를 가르쳐 어릴 때부터 아래에서 위를 섬기는 道를 具備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四書를 강조한 것은 修己 · 治人의 원리를 터득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즉 格物 · 致知 · 誠意 · 正心 · 修身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齊家 · 治國 · 平天下로 다스리는 이치를 교육하여 위에서 아래에 임하는 道를 터득하도록 한 것이다.

339) “小學敎人自下上之道 如子孝於父 臣忠於君等之類 大學敎人自上臨下之道 如敬天修德節用愛民之類.”『魯齋遺書』, 卷3,「小學大義」.

340) “先生自得小學書, 則主於此書, 以開導學者. 裳寄其子書曰: 小學四書吾敬信如神明, 然能明此, 他書雖不治可也.”『魯齋遺書』, 卷13,「國學事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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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許衡은 직접 몸으로 예절을 익히는 것과 算術 · 歷史에 대한 교육도 또한 다음과 같이 중요시했다.

학생들이 독서하는 여가에 선생은 몽고학생중의 나이 많은 자에게는 절하는 법을 익히게 하였으며, 또한 임금의 명령을 받아서 절하는 의식과 석전과 관례도 때마다 익히게 했다. 어린 학생에게는 피곤한 기분이 있으면 무릎 꿇고 절하는 것, 공수(拱手)하여 양보하는 것,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 應答하고 接對하는 것의 예절을 익히고, 또는 투호(投壺)를 하여 활쏘기를 익히고 진 사람은 벌로 책을 몇 번 읽게 했다. 선생은 蒙古學生이 산수(算數)를 익히게 하려고 드디어 당요(唐堯) 무진년부터 지원(至元) 임신년까지 3,605년간의 그 세대의 연대(흐름)를 한 책으로 편집하여 학생들이 그 햇수를 외우게 하여 더하고 빼게 했다.341)

이와 같은 許衡의 교육방식은 이론에만 치중하지 않고 실천을 중시하는 그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許衡은 경세에 관심이 많았으므로 실무적인 算術이나 歷史를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許衡은 교육방법에 있어 朱子의 「白鹿洞書院揭示」를 기본으로 하였다.「白鹿洞書院揭示」는 朱子가『中庸』에 근거하여 학문하는 순서를 ‘博學 · 審問 · 愼思 · 明辯 · 篤行’ 으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二程은 格物致知로써 배우고 朱子도 그러했으니 이것이 여러 學者들을 능가한 까닭이다. 大學은 孔子가 남긴 책이고 그 요점은 이에 있다. 무릇 行하는 것에 힘쓰지 않는 것은 오직 아는 것이 참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연 참으로 알 수 있다면 行하는 것에 어찌 힘쓰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널리 배우고 살펴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 것은 오직 참되게 아는 것을 구하는 것일 뿐이니, 그런 후에 독실하게 행한다는 한 구절을 말한 것이다. 聖人이 사람들에게 가르친 것은 두 글자일 뿐이니 배워서 때때로 익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바로 知와 行 두 글자를 말했을 뿐이다. 미혹되지 않고 하늘의 命을 알고 귀에 거스르는 것이 없는 것은 ‘知’자에 해당되는 것이고, 단지 세련되고 엉성하고 얕고 깊은 것이 다를 뿐이다. 귀에 거스르는 것이 없는 것은 마음에 거스르는 것이 결코 없는 것이니, 이에 이르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염려하겠는가? 생각하지 않아도 얻게 된다. 마음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으면 힘쓰지 않아도 맞게 된다. 어떤 이가 “窮理는 天下의 物에 이르면 반드시 그렇게 되는 까닭(所以然)과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법칙(所當然)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理인 것입니까?”하고 물으니, 선생이 말씀 하시기를 “널리 배우고 살펴 묻고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分別하는 것은 하나의 窮究할 窮字를 해설한 것이고 그렇게 되는 까닭과 그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이치 ‘理’字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본래의 근원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끝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하늘의 命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은 義이다. 모든 일마다 모든 물마다 그렇게 되는 까닭과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 모름지기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342)

341) “諸生讀書之暇, 先生令蒙古生年長者習拜, 及受宣拜詔儀, 釋奠冠禮, 時亦習之. 小學生有倦意, 令習跪拜楫讓進退應對之節, 或投壺習射, 負者罰讀書若干遍.”; “先生欲以蒙古生習學算術, 遂自唐堯戊辰距至元壬申, 凡三千六白五年, 編其世代歷年爲一書, 令諸生誦其年數而加減之.”『魯齋遺書』, 卷13,「國學事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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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내용을 통해, 우리는 許衡이 교육과정 중에서 특히 格物致知에 이르는 知와 行을 동시에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342) “二程以格物致知爲業, 朱子亦然, 此所以度超諸子. 大學孔氏之貴書也, 其要在此. 凡行之所以不力, 只爲知之不眞, 果能眞知, 行之安有不力者乎. 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只是要知得眞, 然后道篤行之一句. 聖人敎人只是兩字, 以學而始習爲始, 便只是說知與行兩字, 不惑, 知命, 耳順是個知字. 只是精粗深淺之別耳. 耳順是幷无逆於心者, 到此則何思何慮, 不思而得也. 從心不踰距則不勉而中. 或問窮理, 至於天下之物必有所以然之故, 與其所當然之則, 所謂理也. 曰: 博學, 審問, 愼思, 明辨, 此解說个窮字. 其所以然與其所當然, 此說個理字. 所以然者, 是本原也; 所當然者, 是末流也. 所以然者是命也, 所當然者是義也. 每一事每一物, 須有所以然與所當然.”『魯齋遺書』, 卷1,「語錄」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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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3節 國學을 통한 蒙古族 支配層에 對한 漢化 努力

1) 元朝의 漢化 敎育政策 施行과 學校 設置

元 世祖代 이후는 중국을 통치하고자 하는 몽고 지배자들의 현실적인 필요성과 한문화를 보호하려는 漢人儒者들의 노력이 맞물려 몽고족의 한화가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족의 유가문화를 주체로 하는 華夏 문화전통이 계승 발전되었다. 초기의 몽고 통치자들은 무력을 통해 천하를 정복했으므로 무력을 매우 중시하였고, 유교문화를 경시하여 과거에 높이 평가했던 讀書儒生을 ‘九儒十丐’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그리하여 중국 전래의 문화 · 제도를 무시하고 한인유자들을 일반인과 똑같이 살육하고 노예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초기의 정복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이었고, 太宗 이후 정복에서 통치로 전환해가는 과정에서 점차 한인유자들이 통치를 공고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인식하였다.

몽고족의 중원통치과정에서 학교설립 및 유학정책의 실시는 太宗代에 시작되었다. 태종은 金朝를 정복한 후 한지를 통치하고 유생들을 회유하기 위한 몇 가지 조치를 취하였다. 우선 공자의 51세손 孔元을 불러 衍聖公으로 봉하고 廟地를 하사하였고, 각 路 · 府 · 州 · 縣에 令을 내려 孔廟를 다시 고쳤다. 또한 中都 燕京의 樞密院을 先聖(孔子)廟로 바꾸어 학교를 설치하고, 馮光宇를 國子總敎로 삼아 고관자제 18인을 입학시켰다.343). 그리고, 耶律楚材의 건의로 戊戌選試를 실시하여 儒生 4,030여 人을 구제하고 부분적으로나마 賦稅과 差役을 면제하였다. 이러한 조치들은 太宗 이하 몽고 지배자들이 중국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볼 수 있다.

343) “以馮光宇爲國子總敎, 命侍臣子弟十八人入學, 是爲建置學校之始.”『新元史』,「選擧志」1, ‘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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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지배자들이 본격적으로 한화를 추진하고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여 중국을 통치하고자 했던 것은 세조의 즉위 이후였다. 세조는 元 一代의 문교정책의 기초를 확립한 군주로서, “조종(元朝)이 중원을 통치하기 시작한 이래 무력을 번갈아 사용하였으나 오십여년 동안 文으로 다스림이 거의 없었다”344) 라고 하여 文治가 행해지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당시 蒙古族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인식하여 文治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광대한 중국의 영토와 그 영역 내의 여러 민족 중에서 특히 우수한 문화전통을 가진 한족을 효율적으로 支配하기 위하여 文治를 시행하였다. 그것은 바로 尊孔重儒, 興學明敎, 重用儒士 등의 漢化政策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世祖는 즉위 이전 즉 1255년(憲宗5년)에 그의 분봉지인 京兆에서 널리 학교를 세우고 許衡을 京兆提學으로 임명하는 등 문교정책을 시행하였고, 즉위 후에는 학교 설치에 더 큰 관심을 기울였다. 1261년( 中統2년) 조서를 내렸다.

각 路의 학교가 오랫동안 닫혀 인재를 길러낼 수 없으니 이제 널리 배우고 견문이 많은 선비를 선발하여 가르쳐야 한다. 무릇 모든 학생 중 진전이 있는 자는 곧 高業으로 선발하여 유생으로 가르쳐서 엄하게 교육하여, 재목이 되도록 힘써서 후일 발탁하여 쓸 것에 대비해야 한다. 이에 각 로의 관사에게 의뢰하여 항상 명대로 가르치고 권하게 하라.345)

이와 같이 각지에 조서를 내려 宣聖廟 즉 孔廟에서의 소란을 금지하고, 孔子와 先哲의 위치배열과 제사의 예에 대해 명확한 규정을 만들었으

344) “祖宗肇造區宇, 武功迭興, 文治多缺, 五十餘年于此矣.” 『元史』, 卷2, 「世祖本紀」1.

345) “諸路學校久廢, 無以作成人材, 今似選博學洽聞之士以敎之, 凡諸生進修者, 仍選高業, 儒生敎授嚴加訓誨, 務使成材, 以備他日選擢之用, 仍仰各路官司, 常切主領敎勸.” 『新元史』, 「選擧志」1, ‘學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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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346) 祭官으로 하여금 매월 삭망일 釋尊祭를 거행하고 난 후 儒生에게 儒敎經典과 史書를 강의하게 하였다.

1269년(지원6년) 에는 학교를 설립하게 하여 풍속과 교화에 힘쓰도록 지시했다.347) 그리고 이 해에 國子學을 창립하고, 1271년(至元8년)에는 許衡을 國子祭酒로 임명하여 蒙古의 從人百官, 待衛官員의 子弟 중 준수한 자를 선발 입학시켜 교습시킬 것을 명하였다.348) 1275년경에는 몽고지상주의자인 權臣 阿合馬 등의 방해로 國子學이 폐기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國子學의 교육효과를 극력 강조하는 不忽木 등의 상주로 1287년(至元24년)에는 정식으로 유학관리기관인 國子監을 설치하고 許衡의 제자 耶律有尙을 祭酒로 하여 직접 國子學을 관할하게 했다. 이 시기에 과거 國子學의 講學 經驗을 토대로 國子學의 管理 · 課程 · 敎授 · 考試 등의 규정을 정하였다.

地方에는 1269년 각 路에 提擧學校와 敎授官을 설치하여 地方官學의 管理를 책임지도록 했다. 1272년 각지에 儒學이 이어서 건립되고, 路學은 敎授 · 學正 · 學錄 등 學官 각 1인을, 府學 이상 中州學은 敎授 一人, 下州學은 學正 1인, 縣學은 敎諭 1인을 설치하여 각급 유학의 교학과 관리를 하도록 했다. 지방 유학의 교학내용은 주로 유가경전과 朱熹의 註疎, 『詩』·『書』·『易』·『春秋』 이외에 『論語』·『孟子』·『大學』·『中庸』을 반드시 배우게 했으므로 四書와 五經은 각급 지방 유학의 필수교재가 되었다.349) 1286년(至元23年) 최 기층의 향촌에 설치된 社學은 농한기

346) "宣圣庙, 國家歲時致祭, 諸儒月朔释奠, 常令洒掃修洁. 今后禁約諸員使臣軍馬, 无得庙宇內安下,惑集理問詞訟, 及䙝讀飲宴, 工匠于其中营造, 违者嚴加治罪."『元章典』, 「禮部」, 卷四, 學校1, 儒學 ‘禁治騷擾文廟’.

347) “事由似緩而實急者, 學校是也. 蓋學校者, 風化之本, 出治之原也. 諸路虽設有學官, 所在官司例皆視同泛常, 不能用心勉勤, 以致學校之設, 有名無實. 由是, 吏民往往不知禮法, 輕犯宪章, 符不深朝廷肅淸風俗, 宣明敎化之意.” 『新元史』, 「選擧」一, ‘學校’.

348) 『元史』, 卷81,「選擧志」, 頁4b.

349) 歐陽周, 『中國元代敎育史』(北京: 人民出版社, 1994),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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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입학하여 독서하는 교육기관이다. 이것은 50家를 1社로 하고, 社長은 敎勸農桑을 의무로 하며, 학습내용은 『孝經』·『小學』·『大學』·『論語』·『孟子』등 儒家經典을 위주로 하였다. 이외에 元代에는 지방관학의 일종으로서 각 路에 醫學과 陰陽學을 설치했는데, 여기에서도 爲學之本이며 進德之門인 四書를 반드시 읽어야 했다.350)

이상과 같은 중앙 및 지방의 관학의 관리는 金朝의 관리방법을 계승하고, 동시에 唐 · 宋의 경험을 참조하여 당시 상황과 결합시켰다. 그리하여 集賢院을 설치하여 전국의 학교교육을 관리하였고, 集賢院 아래에 國子監 · 蒙古國子監 · 回回國子監을 따로 설립하여 구체적으로 國子學 · 蒙古國子學 · 回回國子學을 경영하였다.351)

世祖 이후 元代의 최고 통치자는 모두 교육에 대해 매우 관심을 가지고 중시했다. 교육을 통한 漢族에 대한 元代 통치자들의 효율적 통치는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元代 통치자는 유학을 國是로 정하고 科擧取士의 考試를 朱子의 ‘貢擧私議’를 기본으로 하였다. 고시내용은 朱子가 註解한 四書五經 위주

350) 歐陽周, 위의 책, pp. 45-46.

351) 원대 관학의 학제는 다음과 같다. 歐陽周, 위의 책, p. 34.

각주 351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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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하였다. 이로써 京師의 國子學, 路學, 府 · 州 · 縣의 儒學, 각 鄕村의 社學, 각지의 廟學은 일률적으로 朱子의 奏疏를 위주로 하였고, 朱子學의 논저가 아닌 것은 邪說로 취급하였다.

둘째, 元代 통치자는 朱子學을 교육하는 國子學, 地方의 各級 儒學과 기층 향촌사회를 일으키는 것을 중시 했을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孔子를 祭祀할 때 강의하는 廟學을 중시하고, 士人의 학습을 적극 독려하였으며 各地의 書院에 대해서도 지원함으로써 이를 官學化의 방향으로 진전시켰다. 더욱이 몽고족의 민족문화전통을 선양하는 蒙古子學 · 蒙古國子學과 번역 인재를 양성하는 回回國子學, 그리고 醫學과 陰陽學 등 전문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장려하였다. 종교교육에 대해서도 지지, 독려하는 태도를 가졌다. 이처럼 元 朝廷은 治術人才의 배양을 중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실용인재의 배양도 중시했던 것이다. 각종 형식의 교육을 통해 봉건윤리도덕의 교화를 진행하고 인민의 문화소질을 고양시켰다.352)

셋째, 元代 통치자는 地方官學에 대해서도 매우 중시하여 비교적 완전한 교육체계를 수립했다. 元代의 地方行政은 路 · 府 · 州 · 縣 4급으로 나뉘고, 각급 관아는 四書 五經의 유학을 교수하였고, 小學을 설치하였다. 당시 諸路學校의 수는 1286년 20,166소, 1288년 24,400여소, 1301년 21300여소353)에 이를 만큼 흥성했다. 이로 보면 당시 지방학교의 설치는 매우 보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鄕村에는 私學을 설치하고, 각지에 蒙古子學 · 醫學 · 陰陽學 등을 설치하였다.

仁宗은 정식으로 과거제도를 실행하여 元代 교육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352) 歐陽周, 앞의 책, p.31.

353) “大司農司上 諸路學校 凡二萬一百六十六所.”『元史』, 卷14,「世祖本紀」, 第11, ‘至元23年條; “立學校二萬四千四百餘所.”『元史』, 卷14,「世祖本紀」, 第11, ‘至元25年條’; “司農司上諸路學校二萬一千三百餘.”『元史』, 卷14,「世祖本紀」, 第131, ‘至元28年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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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元 朝廷에 出仕한 중신과 元代의 걸출한 정치가 · 사상가 · 교육가인 耶律楚材 · 劉秉忠 · 趙復 · 姚樞 · 許衡 · 吳澄 · 劉因 · 許謙 · 金履常 · 程端禮 · 鄭玉 등의 교육사상은 거의 유가 특히 주자학의 교육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심지어는 일맥상통하다고 말할 수 있다.354) 元代 통치자의 선양과 주자학의 광범한 전파에 힘입어 朱子學은 元代에 官方의 통치사상이 되어 官學이 되었다. 四書五經과 『小學』·〮『孝經』은 國子學과 각급의 儒學과 書院의 필독 교재가 되었다. 이것은 유학경전과 주자학에 흥미를 촉진시켰고 유가학설을 주체로 하는 華夏文化의 계승 발전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였다.

학교의 설치와 운영은 元朝가 한화를 시행하는 중요 내용의 하나이며 漢化를 시행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元朝는 한족의 문물, 제도의 섭취과정에서 한족 전래의 國子監 제도를 받아 들여 국자학을 설치하였다.355) 許衡은「時務五事」에서 학교설치와 儒學敎育의 중요성을 건의하였는데, 이 건의는 그대로 실행에 옮겨져 元代 학교제도의 성립에 기여하였다. 그리고 許衡은 朝廷에서 國學을 관장하는 國子祭酒가 되어 주자학을 몽고조정에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이것은 한법수용과 중국적 치술 습득이라는 당시 몽고 통치자들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國學을 관장하여 주자학을 강습함으로써 당시 元朝의 정치, 문화를 朱子學風으로 이끌어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354) 歐陽周, 앞의 책, p.2.

355) 國子學은 중앙에 蒙古 國子學, 回回 國子學, 漢人 國子學 등 세 곳이 있었다.[ 陳靑之, 『中國敎育史』(臺灣: 商務印書館, 1978), p.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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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許衡의 國學 管掌과 朱子學 重視

許衡은 元朝가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형태를 갖추어가는 초기부터 원조의 정권에 참여하였다. 즉 세조의 潛邸時에 중국적 통치방식의 중요성을 인식해가는 초기단계부터 세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어 官制를 議定하고 守時曆을 제정하는 등 초기 국가사업에 대부분 참여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許衡이 가장 큰 비중을 둔 것은 교육과 이를 통한 朱子學의 보급이었다.

許衡은 32세부터 1281년 73세로 죽기까지 거의 40여년을 교육에 종사하였다. 이 기간 중 朝議와 官制 제정에 참여한 1년, 敎領太史院事의 신분으로 曆法을 제정한 4년 이외에는 기본적으로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는 世祖의 즉위 전에는 京兆提學을 담임하였고, 세조 즉위 후에는 朝廷의 集賢大學士 兼 國子祭酒로서 敎事를 주관하며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리고 그 외에는 지방의 私學敎育에 종사하였다.356)

許衡의 교육생애 중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중앙에서 국학을 주도한 것이다. 許衡은 1261년(中統 2年)부터 國子祭酒로 임명되어 朝官子弟를 선발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357) 그 후 1267(至元 4年)에도 다시 國子祭酒로 임명되었다.358) 당시에는 아직 國子學이 정식으로 설립되지 않아 아직 學館이 세워지지 않은 형편이었으나 元朝의 교육 행정 및 교육 내용의 기틀을 잡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1269년(至元 6年)에 이르러 國子學이 설립되었다.359) 1270년에 中書左

356) 陳正夫 · 何植靖, 『許衡評傳』, -附『許謙評傳』(南京: 南京大學出版社, 1995), p.248.

357) 『元史』, 卷158, 列傳 第45,「許衡傳」, 頁3a.

358) “四年(按 : 至元) . . . 九月. . . 戊申, 以許衡爲國子祭酒.”『元史』, 卷六, 「世祖本紀」, 頁4a.

359) 『新元史』, 卷8,「世祖本紀」, 頁5a.에는 “六年. . . 七月. . . 立國子學.”라고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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丞에 임명되어 勳戚子弟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즉 世祖는 待官 子弟 11인을 입학시켜 연령이 많은 4인은 許衡으로 하여금 가르치게 하고 나머지 7인은 贊善 王恂에게 맡겼다.360) 다음해 許衡은 中書左丞을 사퇴하고 다시 國子祭酒에 임명되었는데361) 그는 이를 매우 흡족히 여겨 “이것이 바로 나의 일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362) 이때는 수학을 원하는 자가 사방에서 줄을 이었는데, 許衡은 교과목, 교수법 등을 상세히 설계하고, 그의 제자 12인을 入京시켜 伴讀과 齋長으로 임명하여363) 교육에 참여시켰다. 당시 12인의 제자들이 각기 역할을 분담하여 교육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 때부터 國子學의 체계가 잡혀가고 있었던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리하여 許衡이 元朝 성립 초기부터 國子祭酒로서 교육에 종사하게 되어 그가 元朝의 교육 전반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許衡의 교육방침은 오로지『小學』과 四書에 기초하였다. 그는 몽고 지배자들에게 중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漢法을 수용해야 함을 역설함으로써 몽고족의 漢化를 통해 중국 문화의 보전을 기도하였다. 또한 오랜 戰亂과 몽고 지배자들의 무단 통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 도덕성 파괴 등을 수습할 수 있는 대안으로 修己治人의 학문인 朱子學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다. 더구나 당시 그가 교육을 담당한 계층이 바로 고관으로 승격될 수 있는 고관 자제들이었으므로 그들에게 『小學』과 四書의 修己治人의 德治主義的인 정신을 고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긴요한 일이었으

360) “七年, 命待臣子弟十一人入學, 以長四人從許衡, 七人從王恂.”『新元史』, 卷64, 「選擧志」1, 頁1b.

361) “八年, 授集賢大學士國子祭酒. 先生方居相府, 丞相專旨, 令敎蒙古生四人, 後又奉敎七人. 至是, 有旨令四方及部下, 願受業者, 俱得預其列, 命卽南城之舊樞密院設學.”『元朝明臣事略』, 卷8,「左丞許文正公」, 頁16b.

362) “八年, 以爲集賢大學士, 兼國子祭酒. . . 衡聞命喜曰, 此吾事也.”『元史』, 卷158,「許衡傳」, 頁3b.

363) “乃請微其弟子王梓, 劉季偉, 韓思永, 耶律有尙, 呂端善, 姚遂, 高凝, 白棟, 蘇郁, 姚燉,孫安, 劉安中, 十二人爲伴讀, 詔驛召之來京, 分處各齋, 以爲齋長.” 『元史』, 卷158, 「許衡傳」, 頁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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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는『小學』을 먼저 전수하여 灑掃應對하는 자세를 확립하려 했다. “옛날에는 8세가 되면 . . . 모두 小學에 入學시켜 청소하고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禮節과 禮 · 樂 · 射 · 御 · 書 · 數를 가르쳤다. . . . 어렸을 때 『小學』을 먼저 공부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수습하여 德性을 기를 수 없다.”364)라는 내용과 같이, 만약 어릴 때부터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인사도리를 실천, 수양하는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사람이 본래 稟受하여 가지고 있는 마음(心)을 수습하여 德性을 기르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은『大學』의 窮理正心과 修己治人의 道를 교육하였다. 즉 “나이가 들어서『大學』을 습득하지 않으면 義理를 살펴 여러 가지 사업을 처리할 수 없다고 보았다.『小學』을 먼저 습득하는 것은『大學』의 기본을 확립하기 위함이고,『大學』을 습득함은『小學』의 가르침을 완성하기 위함이다.”365)라는 내용에서 설명되는 것처럼 나이가 들어서『大學』을 공부하지 않으면 義理를 살펴 일을 처리할 수 없으니『小學』을 공부한 후에는 마땅히『大學』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許衡은『小學』·『大學』을 교육의 기본교재로 채택함으로써 인륜도덕과 사회질서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이 같은 그의 의도는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小學』은 아랫사람이 웃사람을 섬기는 道를 가르치고,『大學』은 윗사람이 아래에 임하는 道를 가르친다. 윗사람이 아랫사람에 임하는 所以를 알면 위는 안정된다. 위는 안정되고 아래는 溫順해지는 옛날의 治平의 부흥은 반드시 小學, 大學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366)

364) “古者民生八歲. . . 皆令入小學, 敎之以酒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 . . 當其幼時, 若不先習之以小學, 則無以收其心, 養其德性.”『許魯齋集』, 卷3,「小學大義」, 頁1a.

365) “及年長 若不進之於大學 卽無以察夫義理 措諸事業 先之以小學者 所以立大學之基本進之於大學者 所以收小學之成功也.”『許魯齋集』, 卷3,「小學大義」, 頁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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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은 許衡의 교육은 근원적으로 實踐躬行을 으뜸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풍기가 문란하고 인재가 희박함을 보고 충효를 교육의 大綱으로 세워 禮法을 發하게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처럼 許衡이『小學』과 四書를 중심으로 실천위주의 교육을 시행함으로써 朱子學이 중앙의 국자학으로부터 사방에 확산되었고, 결과적으로 朱子學의 보급에 큰 공헌을 남겼다. 許衡의 元代 儒學 교육에 대한 영향은 이후의 유학교육기관의 풍토와 교육과정, 그리고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元代 유학교육을 실시한 학교 중 대표적인 것은 廟學과 書院이었다. 廟學(路 · 府 · 州 · 縣學)은 官立이었고, 書院 중에서도 官立이었던 것이 많았다.367) 元代의 士人層은 시험선발에 의해 儒人으로 인정되면 儒戶籍에 기재되어 면역특권을 얻었는데, 그 대신 儒士로써 儒學의 敎養을 익힐 의무가 주어졌다. 儒戶는 學校籍에 등록되었고 儒人은 학교교육을 수료한 후에도 50세에 달하기까지는 일정 기간 登學의 의무가 있었다. 또 그 자제는 8세부터 就學을 의무로 하고 이후 大學 과정을 마치는 20대에 벼슬에 오르는 사람은 별도로 취급하였지만 대부분 30세에 달할 때까지 在學을 의무화 하였다.368)

元朝는 士人層의 대부분을 儒戶籍에 등록하여 廟學書院이라는 관립교육기관을 통해 勉學의 의무와 免役의 특권을 줌으로서 관리예비군으로 확보

366) “小學敎人, 自下事上之道. 大學敎人, 自上臨下之道. 上知所以臨下, 則下順. 下知所以事上, 則上安. 上安下順, 此古昔治平之興, 必本于小大學之敎也.”『許魯齋集』,卷3,「對小大學問」, 頁9a.

367) 牧野修二.「元代の儒學敎育-敎育課程を中心について」,『東洋史硏究』37-4(1979),p.54.

368) 牧野修二, 위의 논문, pp.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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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다. 몽고 지배하의 士人層은 ‘遇腐之儒’라고 조소를 당했지만, 국가사회의 지도층인 까닭에 그들의 자율성이 존중된 반면 그 지식 · 교양은 元朝 통치를 위한 잠재력과 정보장악력으로서 일정한 평가를 받았다. 儒業을 통한 관리등용과 讀書人의 확대재생산을 공통 목적으로 하여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각종 유학 교육기관의 교육과정과 교과서 등이 有形化되었다.369) 朱子學이 전국에 보급된 것은 교과서 및 그 학습순서가 국가에 의해 통일적으로 규정화되었던 것에 힘입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地方儒學의 교학은 주로 儒家經典과 朱子의 奏疏를 채택했다. 이후 四書와 五經은 각급 地方儒學의 필수교재가 되었다.370)

科擧制 復活 이전에 入仕할 수 있는 주요한 경로는 출신과는 상관없이 使員을 經由하는 길이었다. 廟學 書院의 大學 生員도 使員 出途를 주목표로 했기 때문에 학문수준은 저절로 저하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朱子學의 보급과 병행하여 科擧의 재개를 기대하던 儒人層들은 자기 家業, 즉 儒業의 수준을 유지 내지 발전시키는 노력을 계속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371) 元朝에 병합된 후 江南에 있어서는 出仕를 피하는 碩儒도 많았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많은 수가 家鄕에서 門館과 家塾을 열고 고도의 학문 수준을 유지하였지만 그 수는 해마다 감소하였다. 그에 반해 廟學書院은 점차 증가하여 元代의 대표적인 儒學敎育機關이 되었다.

南宋末 몽고지배하의 漢地에 보급되기 시작한 주자학은 世祖의 한인고문이고 國子學의 창시자인 許衡의 지지를 받아서 서서히 定着되었다. 朱子學 보급의 기초 자료인『小學』이 儒學 入門書로서 중국전역에 확산되었다.372) 그리하여『小學』이 許衡에 의하여 經書로서 그 위치가 확고하

369) 牧野修二, 위의 논문, pp.56.

370) 歐陽周, 위의 책, p.41.

371) 牧野修二, 위의 논문, pp.56-57.

372) 牧野修二, 위의 논문, p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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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어 주요한 교육의 과목으로 중요시되었고, 元 · 明代에는『孝敬』과 함께 四書五經에 선행하는 입문서로써 읽혀지게 되었다.373)

이처럼 許衡은 元朝 초기 國子學에서『小學』과 四書를 중심으로 한 朱子學 위주의 교육을 시행함으로서 朱子學의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이러한 경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朱子는『小學』를 편집하여『大學』의 기본으로 삼았다. 四書를 註釋하여 聖賢의 淵源을 發하였으므로 二聖의 統을 繼承한 이는 朱子이다. 許魯齋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小學』과 四書로써 修己와 敎人의 法으로 삼았다.374)

주자가『小學』과 四書를 집성하여 聖人의 道統을 밝히고 修己治人의 법을 이론화하였다면, 許衡은 철저하게 朱子學을 근본으로 한 修己의 원리를 구체적인 교육 방법으로 활용한 것이다. 그러므로 許衡은 사람을 敎育함에 있어『小學』과 四書를 入德의 기본교재로 삼고,『小學』과 四書에 정통한 이후에야『詩』·『書』·『易』·『春秋』에 나아가도록 하였다.375) 이것은 文辭보다는 朱子의 말을 스승으로 삼고376)『小學』과 四書를 神明처럼 여기는377) 그의 기본사상에 근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許衡의 國子學에서의 영향력은 그의 은퇴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贊善

373) 佐野公治, 위의 논문, p.26; 『元史』,「選擧志」, 學校 國子學條에는 “凡讀書 必先孝經小學論語孟子大學中庸 次及 詩書禮記周禮春秋易”라고 유학의 교과서를 열거하였는데 그 순서는 학습과정의 순서라고 인식된다. 이를 살펴보면 四書가 六經에 우선함을 알 수 있다. 牧野修二, 앞의 논문, pp.67-69.

374) “朱子集小學之書, 以爲大學之基本. 註釋四書, 發聖賢之淵微. 是則繼二聖之統者, 朱子也. 至許魯齋, 專以小學四書, 爲修己敎人之法.”『許魯齋集』, 卷6,「古今儒先議論」.

375) “其敎人也 入德之門 始惟由小學而四書 講貫之精 而後進於易詩書春秋.”『許魯齋集』,卷6,「古今儒先議論」.

376) “公生平嗜朱子學, 不帝飢渴, 凡指示學者. 一以朱子爲主.”『元朝名臣事略』,卷8,「左丞許文正公」, 頁11b.

377) “小學史書, 吾敬信如神明. 自汝孩提, 便令講習, 望於此有得, 他書雖不治, 無慽也.”『許魯齋集』, 卷4,「與子師可」, 頁3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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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恂이 후임 國子祭酒가 되었을 때 劉秉忠 등의 주청으로 許衡의 제자인 耶律有尙 외 2명을 助敎로 임명하여 許衡의 교육원칙을 준수하게 했다.378) 또 許衡의 제자 중에는 官途에 진출한 卿賢大夫가 많이 배출되어 許衡의 영향이 더욱 고양되었다.379) 1287년 교육감독기관인 國子監이 설립되었을 때에도 許衡의 제자인 耶律有尙이 國子祭酒로 임명되어 국자학을 관할하게 됨으로써 元朝 교육정책이 주자학을 위주로 하여 그 골격을 갖추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許衡과 다른 학설을 가진 자는 축출되었다. 吳澄은 江西 撫州人 곧 南人으로 元代에 가장 박학한 대학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한때 國子監司業과 翰林學士를 지내기도 했으나 許衡의 학문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許衡系의 세력에 의해 소외되었다.380) 이 밖에도 南方理學 중심지의 하나인 徽州의 대표적인 學者로 朱陸의 학문을 조화시키는 경향을 가진 鄭玉과 南方理學의 중심지인 撫州 江西省 金華의 대표적인 학자인 許謙 등도 官學圈에서는 거의 모두 소외되고 말았던 것이다.381)

元代 理學家는 그 정치관과 治學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 당시의 理學家들은 크게 세 파로 나눌 수 있는데 許衡 · 許謙 등 朱子學을 위주로 하는 派와 陳宛 · 趙偕 등 陸九淵을 위주로 하는 派, 그리고 吳澄 · 劉仁 · 鄭玉 등 朱陸兩派를 조화하는 派가 그것이다. 이들 삼파 중 元代에는 朱子學派가 우세한 지위에 있었다. 許衡 · 郝經 · 竇黙 · 姚遂 등은 단지 承流宣化하며 玄奧를 중시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經世를 주장하며 현실에서

378) 安部健夫, 「元代知識人と科擧」, 『元代史の硏究』(東京: 創文社,1972). p.41.

379) “及夫元貞大德, 高第弟子, 彬彬輩出, 致位卿相爲代名臣.”『圭齋集』, 卷9,「許先生神道碑」, 頁7b.

380) 愚集, 『道圓學古錄』 권44 「吳公行狀」에는 ‘不合于許氏之學 不得爲國子師’라고당시 학술계의 문제가 서술되어 있다. 周采赫, 앞의 책, p.216

381) 周采赫,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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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道의 실행과 漢化의 실행을 밀접하게 결합시킨 사람들이다. 許謙 · 吳澄 · 鄭玉 등은 고답적이어서 出仕하지 않고, 著書나 立說에 주력하며 학교를 일으키고 門徒를 가르치는 일에 앞장섰다. 元朝는 후자 理學家들에 대해서도 매우 중시하고 玄學志士로 존숭하였다. 전국을 통일하고 정권을 공고히 하는 과정에서 元朝의 통치자들은 理學家들이 조정에 있든 재야에 있든 주자학을 宣揚하기만 하면 조정에 매우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382) 그러나 元朝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國子學을 통해 朱子學을 보급하고자 했던 許衡을 필두로 하는 江漢學派였다고 할 수 있다.

許衡의 儒學史上의 위치는 다음의 평가에서 잘 나타난다.

濂溪, 二程으로부터 수 천년 동안의 絶學이 일어난 후에 門人이 그것을 암송하였으나 江左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伊川 歿 후 이십년 朱子가 태어나 程氏의 學을 이어 집대성하였으나 中洲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朱子 歿 후 백십년에 魯齋先生이 나서 道學을 흥성케 하여, 지금은 學術이 바르게 되고 人心은 하나가 되어 邪論, 曲學이 일지 못한 것은 先生의 功이다.383)魏國公에게 追封하여 諡號를 忠宣이라 하였다. 장공의 諱는 文謙이요 字는 仲謙이며 대대로 順德 沙河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 . . 孔子 孟子가 죽은 후부터. . . 宋儒들은 비로소 멀리 그 端緖를 이어 받았는데 朱子는 능히 그 책을 集 大成할 수 있었다. . . . 허문정공 형은 전란 중에 살면서 文 獻이 散逸된 뒤에 공부를 하면서 하루아침에 그 책들을 얻어 이를 존경하고 믿었다. . . . 아! 朱子를 하찮게 보았다면 聖賢의 말씀은 後世에 밝혀지지 않을 것이고 許公을 하찮게 보았다면 朱子의 책은 天下에 드러나지 못 했을 것이다.384)江漢 趙復은 程朱書를 능히 倍誦할 수 있었는데 北으로 渡江하여 사사로히 붓으로써 學者들에게 가르쳤다. 許文正公 衡은 그 책을 신 같이 밝혀 나아가서 얻은 바 世祖와 서로 禮樂文을 일으키고 太平後 四十年에 貢擧法을 시행하니 有司에서는 程朱學이 아니면 試驗치지 아니하였다. 이에 天下의 학술은 凜然하여 한 가지로 바른 길로 나아갔고 이 때에 서로 濂洛以下의 九儒와 許 衡을 합하여 十人은 孔子廟庭에서 제사지냈는데, 天子도 이를 좇았다.385)

382) 歐陽周, 앞의 책, pp.28-29.

383) “自關洛大儒, 倡絶學於數千載之後, 門人傳誦之, 未能遍江左也, 伊川歿二十餘年而文公生焉, 繼程氏之學, 集厥大成, 未能遍中洲也, 文公歿後百十年, 魯齋先生生焉, 聖朝道學一脈, 乃者先生發之, 至今學術正, 人心一, 不爲邪論曲學所勝, 先生之力也, 所以, 繼往聖, 開來學, 不在文公下.”『元朝文類』, 卷80,「魯齋先生畵像贊」.

384) “追封魏國公諡忠宣, 張公諱文謙 字仲謙 世爲順德沙河人 . . . 自孔子孟子沒. . . 宋儒始有以遠接其端緖 而朱子爲能集其書之大成 . . . 許文正公衡 生乎戎馬槍攘之間 學於文獻散逸之後 一旦得其書而尊信之. . . 嗚呼 微朱子 聖賢之言不明於後世 微許公 朱子書不著於天下. . .” 『元朝文類』, 卷30,「張氏新瑩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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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내용을 보면, 朱子도 聖人之學을 천하에 두루 미치게 하지 못했는데, 許衡이 그것을 이어받아 학술을 바르게 하고 人心을 하나로 하여 邪論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異端에 대해 절조를 잃었던 풍토에서 許衡은 오로지 朱子學을 신봉하였고 漢人과 南人은 물론 蒙古人의 자제들을 열심히 훈육하여 元代에 있어 朱子學 중흥의 기반을 닦았다고 할 수 있다.386) 그리고 許衡은 사람들로 하여금 朱子의 책이 있음을 알게 하였고, 그것이 세상에 유행하게 한 공로가 매우 크다는 평가387)는 설득력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므로 許衡은 朱子 이후에 道統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되었다.388) 다음의 기록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道統이라는 것은 治統이 있는 곳이다. 堯는 이를 舜에게 전하였고, 舜은 이를 禹 · 湯 · 文 · 武 · 周公 · 孔子에게 전하였으며, 공자가 죽은 후에 百餘年 동안 거의 전할 수가 없었다가 孟子에게 전하여졌다. 孟子가 죽은 후에 또한 거의 千餘年 동안 전하여 질 수 없다가, 濂 · 洛 · 周 · 程의 諸子에게 전하여졌다. 中間에 이르러 楊氏를 세웠으나 우리의 道는 南쪽으로 내려 왔다. 이미 宋王朝 또한 南渡하니 楊氏의 傳은 豫章羅氏, 延平李氏에 갔다가 新安朱子에게 이르렀다. 朱子가 죽은 뒤에 그 傳은 우리 王朝의 許文正公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歷代 道統의 源委이다.389)

385) “江漢趙復能倍誦程朱書, 北渡江私筆以授學者, 許文正公衡衡神明其書進以所得, 相世祖興禮樂文 太平後四十年 行貢擧法 非程朱學 不試 於有司 於是 天下學術 凜然一趨於正 時相尋定濂洛以下九儒及衡十人 祀孔子廟庭 天子從之歐陽玄.”『圭齋文集』, 文淵閣四庫全書 1210(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5, 「趙忠簡公祠堂記」.

386) 石田和夫, 「吳草廬と鄭師山-元代 陸學の展開」,『Tetougaku Nenpo』39, pp.185-186.

387) “國學之置肇自許文正公 以篤實之者 得朱子數書 於南北未通之 日讀而領會 起敬起畏及被遇世祖皇帝 純乎儒者之道 諸公所不及也. . .故文正自中書 能政爲之師. . . 嗚呼 使國人知有聖賢之學 而朱子之書 得行於斯世者 文正之功甚大也.. . .” 虞集, 『道園學古錄』,文淵閣四庫全書 1207(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5, 「送李擴序」.

388) 沈善洪, 王風賢,『中國倫理學史』(浙江: 人民出版社,1988),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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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옛날에 儒의 先君子들은 道統이 전하여진 것을 논의하였다. 伏羲에서부터 시작하여 . . . 後學에게 전하여졌다. 顔子가 죽고 . . . 그 뒤 천오백년을지나서 宋에 이르러서 汝南周氏 . . . 朱元晦氏로 확정짓기로 논의 하였다. 여러 君子의 말을 다 모아 이루었는데 대개 天運이다. . . . 우리 聖朝에 이르러 區 夏를 다 어우르고 있는데 延祐 년간에 이르러 文治가 더욱 성하게 되고 . . . 우리 왕조의 許文正公과 더불어 十儒는 모두 從祀의 例에 있게 되었다.390)

상기 인용문의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元朝에서 儒學의 쇠퇴 시에 道統을 계승하고 儒學이 단절되지 않게 함으로써391) 元代 朱子學의 보급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는 國子學을 주관하여 오직 朱子의 言을 스승으로 삼고『小學』과 四書로써 敎授하였기 때문에 朱子學은 문교정책의 기둥이 되었고 중앙으로부터 그 보급이 진전되었던 것이다.392)

389) “道統者, 治統之所在也. 堯以是傳之舜, 舜以是傳之禹湯文武周公孔子, 孔子沒幾不得其傳百有餘年, 而孟子傳焉. 孟子沒後, 又幾不得其傳千有餘年, 而濂洛周程諸子傳焉. 及乎中立楊氏, 而吾道南矣. 旣而宋亦南渡矣, 楊氏之傳, 爲豫章羅氏, 延平李氏, 及於新安朱子 朱子沒, 而其傳及於我朝許文正公. 此歷代道統之源委也.” 陶宗儀, 『輟耕錄』(臺北: 藝文印書館, 1965),「正統辯」.

390) “昔者儒先君子 論道統之傳 自伏羲. . . 後學傳焉 顔子沒. . . 後千五百年 以至於宋 汝南周氏朱元晦晦論定 諸君子之言 而集其成 蓋天運也, . . .及我聖朝 奄有區夏 至於延祐之歲 文治益盛. . . 與我朝 許文正公 十儒者 皆在從祀之例.” 虞集, 『道園學古錄』(文淵閣四庫全書1207, 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7,「鶴山書院記」.

391) 羅光,『中國哲學思想史(元明篇)』(臺灣: 學生書局,1981), pp.86-87.

392) 佐野公治, 「宋元代の四書學をめくゐ 政治的, 思想的狀況」,『愛知県立大学説林』 33,p.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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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學校敎育과 科擧 選用의 結合

1315년 科擧가 재개되었을 때 唐 · 宋 · 金의 科擧와는 달리 朱子의 『四書集註』가 기본 교재로 채택되게 된 원인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南宋 말기 이후 江南 지역에서 書院을 통해 주자학이 광범위하게 전파된 것을 들 수 있다. 또 元代의 실용적인 풍토와 오랜 동안 과거를 통한 인재 등용의 단절로 인해 기존의 漢 · 唐 經學이 쇠퇴하게 된 것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元朝의 지배자들의 중국지배를 위한 통치원리로서의 주자학의 선택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이 國學을 장악하고 이를 통해 朱子學을 보급하였기 때문에 科擧가 재개되었을 때 朱子學이 科擧에서 중시되었다. 우선 許衡의 영향 하에 國子學에서 교육을 받은 고관 자제들이 바로 고관으로 임명되어 정부 내에서 朱子學이 보편적으로 공인되었다. 이로 인해 國子學의 교육 방식이나 내용은 地方 官學이나 書院에도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 결과 朱子學은 元朝 성립 이후 중국 전역으로 확산됨으로써 朱子學이 국가의 학문으로 공인되어 官學化될 수 있는 기본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초기에는 儒學이나 科擧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많았다. 金이 멸망했을 때 ‘유학 때문에 금이 망했다’는 亡國之學論이 있었고, 朱子가 일찍이 漢唐 經學, 詩賦에 의한 科擧를 비판하였던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더구나 南宋이 멸망하자 科擧에 대해 懷疑하는 人士들이 속출하였다. 이들은 현실문제를 등한시하는 章句 · 訓詁 · 奏疏學 등 암송 위주의 학문방법을 비판하였고,393) 科擧의 격식에 빠진 선비들이 학술로 세상을 잘못되게 하였다고 지적하였다.394) 이르 보면 당시 南宋 출신 사대부들 스스로 蒙古族의

393) “以學術誤天下者, 皆料擧程文之士, 儒亦無辭以自解矣.” 謝枋得,『壘山集』(文淵閣四庫全書1356, 臺灣: 商務印書館, 1983),「程漢翁詩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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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력에 속수무책이었던 것에 대한 반성으로 南宋의 文弱함을 비판하고 科擧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비판의 정도를 넘어 조소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의 두 가지 예를 들어 그 조소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다.

천하가 통일되고 과거가 없어졌다. 이것은 조물주가 현명한 사람들을 위하여 과거제도의 구각에서 벗어나게 하여 티끌 밖의 세상을 자유롭게 노닐게 한 것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395) 부화하게 사장이나 만들고 깨끗하고 고상한 척 허황된 의론이나 하고 부패하고 구차한 정사를 했으면서도 156년간이나 지탱했으니 이 어찌 다행한 것이 아니냐? 396)

당시 사대부 모두가 前代의 學術이나 科擧에 대해 이처럼 심한 비판의식을 가진 것은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공감대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인 사대부의 관계 진출을 견제하고자 하는 몽고 지배자들의 의도와 일부 한인 사대부들의 科擧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元 初期에는 科擧가 시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世祖도 과거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어 한인 사대부들의 과거 재개의 주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國子學이 건립되고 몽고족에 대한 한문화의 교육이 진전되면서

394) “記誦章句. 訓詁. 注疏之學也, 聖經一言, 而訓釋百言. 千萬言, 愈博而愈不知其要, 勞苦終身而心無所得, 何攻之有.” 胡祗遹,『紫山集』, 文淵閣四庫全書 1196(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26,「語錄」.

395) “四海一, 科擧畢. 焉知非造物者爲諸賢脫其蜣螂之穀而使之浮游于塵埃之外乎?”,趙文,『靑山集』, 文淵閣四庫全書 1195(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3,「學脫記」.

396) “浮誕補綴之詞章. 淸高虛曠之議論, 垢玩苟且之政事, 一百五十六年後亡, 豈非幸耶!” 陸文圭, 『牆東類稿』, 文淵閣四庫全書 1195(臺灣: 商務印書館, 1983), 卷6,「送曹士宏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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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차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許衡이 國子祭酒가 되어 朱熹의 四書集註를 기본교재로 채택하고, 그 후임인 王洵도 이를 고수하여 國子學에서 朱子學이 서서히 정설로 굳혀져 갔다. 元朝 초기의 國子學이 전격적인 한문화 수용을 추구하였다기보다는 몽고민족문화를 보호하는 테두리 안에서 중국적 통치술을 익힘으로써 몽고족에 의한 중국의 직접지배를 추구하였다 할지라도 점차 주자학이 전파 보급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인 사대부들이 과거제 실시를 건의하였다. 丞相 史天澤과 學士 王鶚이 여러 번 科擧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程式을 議定할 것을 世祖에게 청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했다.397) 1271년(至元8年)에는 詞章을 중시하는 文章派인 徒單公履가 詩賦 위주의 과거부활을 건의하였다. 이에 대응해 도덕적 수양을 지향하는 董文忠 · 姚樞 · 許衡 등의 德行派는 朱子의「學校貢擧私議」를 기준으로 經術爲主의 科擧 실시를 주장하였다. 특히 許衡은 世祖에게 현실정치와 괴리된 詩賦를 폐지하고, 修己治人의 經術로서 科擧制를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398) 여기에서 당시 사상계가 文章派와 德行派로 나뉘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文章派는 당송 이래제도에 의거해 詩와 賦를 우선시하는 科擧를 주장하였고, 德行派는 舊來의 科擧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修己治人을 강조하는 주자학을 중심으로 한 科擧程式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과거 실시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당시 세조가 蒙古官僚層을 육성하고자 하였으며 주자학을 아직 통치이념으로 소화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269년(至元 6年)에 설립된 國子學은 입학생 수가 많지 않았고 이에 입학을 권장하는 詔勅이 여러 번 내려졌다. 그러나 일부 蒙古大臣의 자제

397) 金鐘圓, 앞의 논문, pp.15-16.

398) 이에 대해 Wn. Theodore de Bary著, 仁山明抄 譯,「元代における道學の興隆」『東洋史硏究』, pp.38-39(原名: 'The Rise of Neo-Confucion Orthodoxy in China', pp. 77-81)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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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만이 이에 응할 뿐이었다.399) 이 때의 國子學은 세조가 몽고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그들에게 유교적 정치관을 습득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므로 입학에 제한이 있고 몽고대신의 자손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국자학이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姚樞 · 許衡 · 不忽木 등은 1276년 한인관료의 육성을 위한 國子學을 건립할 것을 上奏하였으나400)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279년 南宋을 병합하여 전 중국을 통일한 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世祖는 1282년(至元 19年)에 雲南諸路에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鄭鉅夫는 南宋 유민을 회유하기 위한 國子學 건립의 필요성을 제기하였고,401) 尙書左丞 葉李도 國子學 건립을 적극 上奏하여402) 世祖는 1287년(至元 24年)에 國子監과 國子學을 건립하였다. 元朝 財政의 江南 의존도가 높아짐에 따라 勸農에 주력하게 되어 1313년에는 江北 江南의 農法을 통합시킨 왕정의 農書가 출간되었으며, 뒤이어 魯明善의 『農桑輯要』도 나왔는데,403)1287년의 國子學 건립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분위기와 관계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북방의 漢人은 물론 새로 편입된 南宋의 유민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으며, 특히 북방에 비해 경제적 밀집지역인 江南의 地主 佃戶간의 갈등관계를 해소할 방편으로 朱子學의 적극적인 보급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地主 佃戶간의 협력관계를 토대로 하는 수취질서를 이념적으로 규정한 名敎的 성격을 갖는 朱子學404)은 더욱 안정

399) 주채혁, 앞의 책, pp.209-214.

400) 『元史』, 卷130, 列傳 第17,「不忽木傳」.

401) 『元史』, 卷172, 列傳 第59,「鄭鉅夫傳」.

402) 『元史』, 卷173, 列傳 第60,「葉李傳」.

403) 周采赫, 앞의 책, pp.12-22.

404) “佃戶旣賴田主給田, 生借以養活家口, 田主亦籍佃客耕田, 納租組以供膽家計, 二者相須方能存立, 今仰人戶, 遽相告戒, 佃戶不可侵犯田主, 田主不可虐佃戶.”『朱子文集』, 卷99,「勸農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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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 기반위에서 발전해 가게 되었다.

1287년 國子監405)의 國子祭酒로 임명되어 국자학을 관할하게 된 耶律有尙의 영향으로『小學』과 四書를 기본으로 하는 주자학적 교육체계가 성립되었다. 漢 · 唐에서 宋代에 이르기까지의 科擧는 詞賦에 중점을 두었으므로 현실과 거리가 먼 空論에 치우치는 폐단이 있었다. 元朝에서는 許衡의 영향으로 실천적인 經學을 중시하는 학풍이 유행하여 당시 학생들의 학습과목의 선정에 영향을 주었다. 독서의 순서는 먼저『孝經』·『小學』·『論語』·『孟子』·『大學』·『中庸』을 익힌 다음에『詩』·『書』·『禮記』·『周禮』·『春秋』· 『易』을 習讀하였다.406) 이러한 학습의 순서와 내용은 직접적으로 과거의 과목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仁宗(1312-1320)은 즉위 전부터 朱子學에 심취하였으므로 즉위 후에 주자학을 중심으로 하는 科擧를 실시하였다. 陳顥는 科擧 시행의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李孟(1255-1321)은 德行을 지향하는 經術이 取士와 用人의 으뜸임을 강조하였다.407) 또 1313년(皇慶 2年) 10월 中書省에서 德行 明經科를 세워 取士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仁宗은 경술위주로 科擧를 實施할 것을 하명하였고, 1314년(延祐 元年)에는 韓性(1266-1341)이 科擧의 과목으로 朱子學을 채용할 것을 주장하자 延祐 2년에 실시된 처음으로 실시된 科擧에서 朱熹의 四書集註를 정식과목으로 채택하였다.

405) 國子監의 상급기관으로 集賢院 있었는데, 集賢院은 儒 · 佛 · 道의 종교양식, 陰陽 ·祭祀 · 占卜과 儒臣의 薦擧를 맡아보고 國子監을 관장하고 있었다. 國子監 太學과 諸路의 儒學(校)를 통할하는 교육행정관청이었다. 金鍾圓, 앞의 논문, p.54.

406) .“立國子學, 而定其制. 設博士, 通掌學事, 分敎三斋生員 : 講授經旨, 是正音訓, 上嚴敎导之术. 下考肄習之業. 複設助敎, 同掌學事, 而專守一斋 ; 正, 錄, 甲明規矩, 督習課業. 凡讀書必先『孝經』,『小學』,『論語』,『孟子』,『大學』,『中庸』,次及『詩』,『書』,『禮記』,『周禮』,『春秋』,『易』,博士, 助敎親授句讀, 音訓, 正, 錄, 伴讀以次傳習之. 講說則依所讀之序, 正, 錄, 伴讀亦而次而傳習之. 次日, 抽簽, 今諸生複說其攻課, 對属, 詩章, 經解, 史評, 則博士出題, 生員具稿, 先呈助敎, 俟博士旣定, 始錄附課簿, 以凭考校. 其生員之數, 定二百人, 先今一百人及伴讀二十人入學. 其百人之內, 蒙古半之, 色目, 漢人半之. 許衡又著諸生入學杂儀, 及日用節目.”『元史』,「選擧志」1, ‘學校’.

407) 『元史』,卷177, 列傳 第64,「陳顥傳」·『元史』, 卷175, 列傳 第62,「李孟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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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許衡의 국자학 관장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전파된 朱子學은 마침내 1315년에 실시된 科擧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朱子學의 중요교재인 四書五經에 대한 章句集註는 당시 관료를 지향하던 儒生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科擧가 부활되어 四書五經이 채용되었다.408) 이것은 元朝의 儒學에 있어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409) 朱陸 이후 南宋의 사상계에는 사상적 대립으로 四書의 經書的 성격에 대해서도 異說이 있었다. 이러한 南宋에서 元에 이르는 四書를 둘러싼 사상계의 복잡한 상황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 바로 元代의 延祐年間에 제정된 科擧 程式이었던 것이다.410)

이 때의 程式을 살펴보면, 蒙古 色目人은 第1場, 經問五條에는『大學』·『論語』·『孟子』·『中庸』에서 說問하고 朱子의 章句集註를 바탕으로 義理 精明 文辭典雅한 자를 中選하였다. 第2場, 明經經疑 二問은『大學』·『論語』·『孟子』·『中庸』에서 출제하는데, 朱子의 章句集註를 기본교재로 하여 應試者의 뜻을 그것과 결부시켰다. 또 經義一道 각각 一經을 治하고 『詩』는 朱氏를 주로 하고『尙書』는 蔡氏,『周易』은 程氏, 朱氏를 주로 하였다. 이상의 三經은 겸해서 古註疏를 쓰고,『春秋』는 三傳 및 胡氏傳『禮記』는 古註疏를 썼다. 第3場은 經史時務 내에서 출제하여 浮燥를 矜하지 않고 오직 直述을 의무로 하였다.411)

이 程式의 특징은 蒙古, 色目人의 征服民族과 漢人, 南人의 被征服民間의 차이를 둔 것 외에 宋 金代에 중시한 詩賦를 第2場의 일부로 하고 經義를 第1場에 둔 것, 四書를 처음으로 科目에 채용한 것이다. 또한 周禮를 제거하고『詩』·『書』·『易』·『春秋』·『禮記』의 五經으로 한 것, 四

408) 佐野公治, 앞의 논문, pp.31.

409) 麓保孝, 「宋元て於サる儒者の推移」, 『宋元明淸近世儒學變遷史論』(東京: 國書刊行會,1976), p.18.

410) 佐野公治, 앞의 논문, pp.28.

411) 『元史』, 卷81,「選擧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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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에 朱子의 章句集註를 쓴 것, 그리고『詩』·『書』·『易』에 程朱學의 註釋으로 古註疏를 겸용한 것 등을 들 수 있다.412) 이러한 延祐年間의 科擧는 以前 王朝의 科擧는 물론 1238년 太宗대의 戊戌選試와도 크게 달랐다. 戊戌選試의 합격자는 1252년(憲宗, 壬子年)에 실시한 호적 등기를 기회로 儒戶가 되었다. 이 때의 科擧 실시 방법은 완전히 金代 科擧의 방법을 답습하였다. 합격하여 요역면제의 특권을 받은 자 중에 詞賦 혹은 詩賦科 출신이 과반수였음과 같이 詞賦, 詩賦의 인기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413)

이러한 元代 朱子學의 득세는 초기에 國子學에서 朱子學을 전수한 許衡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許衡은 사후에 道統을 계승하는 聖人으로 받들어졌는데, 이는 그가 國學을 장악하고 뒷날 元朝를 좌우하는 大官들을 門生으로 길러낸 세력기반에서 비롯된 것이다.414) 朱子學은 姚 樞와 趙復 등에 의하여 북방학술계에 소개되었고 許衡에 의하여 보급되었으며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415)

이상과 같이 許衡은 元代 최초의 國子祭酒가 되어 元初의 國子學을 관장하게 되었을 때 朱子學의 기본서인 『小學』과 四書를 근간으로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것은 朱子學을 실천적인 絶對理念으로 파악한 그의 사상적 특성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로써 朱子學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기초가 마련되었고, 이후 國子學 · 廟學 · 書院 등 모든 儒學敎育機關에서 실천위주의 朱子學을 敎育함으로서 朱子學은 漢唐의 詞章的인 儒學을 대신하여 점차 元代 學術의 主流가 될 수 있었으며 마침내는 延佑年間에 부활된 科擧에서 朱子學이 주요 시험과목으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412) 佐野公治, 앞의 논문, pp.32.

413) 安部健夫, 앞의 논문, pp.10-14.

414) 周采赫, pp.216.

415) 韓儒林 主編, 『元朝史』(北京: 人民出版社, 1986), pp.32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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結 論

朱子는 北宋 이래 시작된 새로운 학풍을 종합하여 朱子學이라는 학문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朱子學은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정치적인 변동에 따라 극심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慶元의 禁’으로 인하여 그 자신은 관직을 박탈당하였으며 그의 제자 蔡元定은 유배지에서 목숨을 잃을 정도로 극심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朱子學은 書院을 통해 대중에게 전파되었고, 급기야 1241년 남송 황제 理宗은 주자학을 공인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南宋에서의 朱子學은 서원의 보급과 교육, 그리고 통치자의 승인 등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는데, 그것은 朱子의 直傳 · 再傳 弟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즉 南宋 말기 그의 제자들은 朱子의 全體大用의 정신을 이어 朱子學의 經世思想을 크게 강화하고 실천하는 데 주력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정치 현안에 적용시켜 민생구제 등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발전하였다. 朱子學을 실천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이러한 실천 중심적 朱子學은 1235년 趙復을 통해 북방으로 전해져 몽고족 왕조인 元朝에서 사상계의 주류가 되었다. 元朝의 정치 교육 등의 제반 골격이 世祖代에 수립되었는데, 元이 南宋을 정복한 1279년에는 이미 北方으로 朱子學이 전해진 지 약 반세기 가까이 지난 후였다. 북방으로 전해진 朱子學은 당시 華北地域에서 사상계를 주도하던 漢唐的인 詞章 中心의 儒學과 대결하면서 서서히 독점적 지위를 확보해 가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바로 許衡이었다.

許衡은 蒙古族의 中原 정복으로 사회 · 정치적으로 극심한 혼란기에 성장했기 때문에 經世的인 學問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문의 도리를 몸소 실천하려고 노력하던 중 趙復의 朱子學을 수용하여 그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朱子學을 접한 이후로 오로지 朱子學을 實踐躬行하는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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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임했는데 실제로 그의 사상을 살펴보면 朱子의 理學的 관점을 거의 그대로 답습하였음을 알 수 있다.

許衡의 思想에서 道 · 太極 · 理 · 天 등은 사실상 동일한 범주에 속한다. 理는 宇宙의 근원이고, 그 내용은 明德 · 五倫이다. 五倫은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道德原則이다. 氣는 本體인 理에 입각해 만물을 形化하고 生成 · 變化케 하는 재질이다. 한편 理는 우주의 개개 사물이나 사람에게 性으로서 내재하는데 이것이 理一이다. 理一은 누구에게나 같은 것으로서 보편성을 띤다. 반면에 氣는 하늘이 命하는 것으로 각각의 사물이나 사람에 따라 차이가 나게 하는 것이 分殊이다. 이 氣의 차이에 따라 賢聖暗愚의 구별과 情慾, 慾心이 생긴다. 이를 극복하고 明德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居敬과 窮理의 修養이 필요하다. 修養을 통해 氣質의 性을 극복하여 本然의 性 즉 明德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의 과제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許衡의 사상은 朱子學的 思惟의 기본적인 論理가 반복, 재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천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이는 異民族인 蒙古族의 中國 지배라는 특수 상황에서 中國秩序에 무지한 蒙古族들에게는 朱子學의 複雜한 窮理的 論理보다는 實踐爲主의 簡單明瞭한 論理가 이해, 수용되기가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종래 許衡의 사상에 대한 평가에서 그가 朱陸和易論者이며 朱子學을 心學化하였다는 주장이 많았다. 이같은 주장은 明代의 陽明學의 興起와 연결시켜 보려는 선입견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許衡의 사상에 있어 心을 다소 강조하고 있는 것은 확인할 수 있으나 그것을 理論化하려는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朱子와 陸象山의 경우에서처럼 無極 · 太極 論爭이나 心性論에 있어서의 이론적 전개 없이, 전체적인 사상의 틀에 있어 朱子의 이론적 토대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許衡을 朱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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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會論者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생각된다.

許衡은 그의 저작 중 여러 곳에서 朱子의 이론적 완결성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논리상의 허점을 보이기도 하고, 사용한 용어의 개념상 혼돈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朱子學의 대체적인 論理的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朱子學을 절대적으로 긍정한 상태에서 修養論을 통해 朱子學의 實踐意志를 강조한 점을 볼 때 오히려 그는 완전한 朱子學의 實踐論者라 할 수 있다.

특히 許衡은 漢文化의 보호를 위해 朱子學을 매개로 하여 元朝의 정치, 교육에 참여함으로써 元朝의 효율적인 중국지배를 위한 정책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元代에 朱子學이 정치, 교육의 주된 이념으로 정착될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許衡은 理論家 또는 思想家이기보다는 儒師의 역할을 수행한 經世家였다. 왜냐하면 그는 理論的 創見보다는 朱子學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기존의 朱子學의 이념과 논리에 입각하여 君主됨의 도리, 民을 위한 국정의 운영, 경제의 부흥을 통한 국가의 부강 도모 등 당시의 몽고 지배하의 현실 속에서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漢法의 보존을 꾀하였다. 또한 항구적인 漢法 보존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거의 일생을 교육에 기여한 인물이다.

許衡은 華夷觀에 있어서도 蒙古族의 중국지배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한도 내에서 朱子의 華夷論을 수정하였다. 朱子가 설정한 중국과 夷狄과의 上下的 차별을 타파하고 夷狄 즉 蒙古를 中國, 漢的인 것으로 인정하였다. 朱子의 華夷觀 중에서는 夷狄을 人과 禽獸의 중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반해 許衡은 夷狄도 中國人과 같이 漢法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로 수정하였던 것이다. 즉 許衡은 朱子의 血統中心的 華夷論을 文化中心的 華夷論으로 변화시켜 夷狄인 蒙古族도 中華文化를 수용하여 中國化되면 中國의 主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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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華夷思想의 변화로 許衡은 漢法 시행의 政見을 당시 중앙집권적 전제관료체제를 모색하는 元 世祖에게 상주할 수 있었고, 元朝의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蒙古族이 中國 고대의 禮樂典章, 文物制度 등을 채택하도록 유도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元代에 이르러 朱子學이 得勢할 수 있도록 端初를 연 것은 國子學에서 朱子學을 전수한 許衡의 영향에 의한 것이었다. 許衡은 사후에 道統을 계승하는 聖人으로 받들어졌는데, 이는 그가 國學을 장악하고 뒷날 元朝를 좌우하는 大官들을 門生으로 길러낸 세력기반에서 비롯된 것이다. 許衡은 사상적으로 새로운 創見은 없었지만 朱子學의 보급과 정립에는 매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즉 許衡의 躬行實踐의 강조는 漢法 시행을 주장하고 朱子學을 국가의 治人之學의 理念으로 敎化하는 데 주력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國子學 등 學校敎育制度와 科擧制의 시험과목을 통해 지배층에게 儒敎敎化를 시행하고, 또 한편으로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正統 儒敎文化를 계몽함으로써 中國文化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許衡은 華夷思想의 變容을 통하여 異民族 朝廷에서 國學을 管掌하는 國子祭酒가 되어 朱子學을 蒙古朝廷에 전파하는데 노력하였다. 1261(中統2년)년과 1267년(至元4년) 國子祭酒로 임명되어 朝官子弟를 선발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1271년에는 中書左丞이 되어 勳戚子弟들에게 학문을 가르쳤고, 다음 해에는 中書左丞職을 사퇴하고 다시 國子祭酒가 되었는데 이때는 그의 弟子 12인을 入京시켜 伴讀으로 삼아 齊長으로 임명하여 교육에 참여시켰다.

그의 敎育原則은 오로지『小學』과 四書를 중심으로 하여 철저하게 朱子學的 도리를 躬行實踐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漢人은 물론이고 蒙古人과 色目人의 子弟들은『小學』과 四書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許衡의 제자 중에는 官途에 진출한 卿賢大夫가 많이 배출되어 朱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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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은 文敎政策의 근간이 되었고 정책적으로 그 보급이 진전되었다. 그 결과 朱子學이 중앙의 國子學으로부터 전국에 확산, 보급되어 元代 朱子學 復興의 기반이 확립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元代 儒學敎育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인 廟學과 書院에서 朱子學이 敎習되었고, 기본 교재로서『小學』과 四書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朱子學은 科擧의 科目과 內容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전의 科擧가 詞賦, 詩賦科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던 것에 반해 1315년 延祐年間에 실시된 과거는『小學』과 四書 등의 朱子學書가 중요시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南宋에서조차 학문적 위치가 불완전했던 朱子學이 元代에 와서는 중국 전역으로 확대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元代 朱子學이 官學化 되고부터 詞章的인 漢 · 唐 儒學을 대신하여 實踐躬行을 위주로 하는 朱子學이 元代는 물론 明 · 淸代의 정치 · 문화 · 학술의 주류가 될 수 있었다. 이렇게 朱子學이 중국 전역으로 보급, 확산될 수 있었고 후대에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기초를 확립한 元代 朱子學의 官學化에서 許衡의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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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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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編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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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振績 · 王民信 撰, 『耶律楚材 · 許衡 · 方孝孺』, 中華文化復興運動推行委員會

主編, 『中國歷代思想家』, 臺北, 商務印書館, 1978.

포은사상연구원 편, 『元代 性理學』, 포은사상연구원,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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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論文

(1) 國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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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 『歷史學報』14,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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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Abstract

Kim, Hong-chulIn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School of Li Hsueh (理學:

"Learning of the Principle") in China, the Yüan Dynasty(1271-1368)

has a special place. The School of Li Hsueh originated from the

Sung Dynasty(960-1277), kept on progressing through the Yüan

Dynasty, and then the Ming Dynasty(1368-1644), and, as everyone

knows, the Yüan Dynasty was founded by the Mongolians, not like

the Sung or Ming. The Yüan Dynasty played a key role in survival and prosperity of the

School of Li Hsueh, which has been widely accepted as the

distinctive school of philosophy of the Han race. During the Yüan

Dynasty, The Zhu-Xi Hsueh (朱子學) was the national philosophy of

the official choice, and promoted aggressively as such. They had a

political reason of their own in adopting it as such. They desperately needed a central philosophy of significance to

rule the whole wide country consisted of mainly the Hans, and it

was also a right tool to persuade the noble class that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Hans as a whole. As a result, Zhu-Xi Hsueh was

widely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and that, in return, laid the

ground for it to prosper during the Ming Dynasty.It was Xu-Heng(1209-1281),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spreading the Zhu-Xi philosophy and in making it a national

philosophy. Xu-Heng led the way and laid the ground for Zhu-Xi

Hsueh to be placed as a main philosophy, replacing the

Confucianism with Chinese Poetry and Prose (漢唐詞章)as its

central theme, which used to be at the forefront of the

170

philosophical world in the Chinese territory at that time. He first

became interested in the Zhu-Xi Hsueh , because of the political

and philosophical turmoil caused by the conquest of the Mongolia

over the midlands. He believed that overcoming of this crisis is the

most important task of the times, and he felt a strong need for a

philosophy that can provide a base for governing the Country.

Zhu-Xi Hsueh , which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practicing and

acting on the beliefs, suited him admirably for that purpose.Xu-Heng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political and educational

activities during Yüan Dynasty while promoting the Zhu-Xi Hsueh,

and made a significant contribution in establishing the policies to

efficiently rule the China. He joined the court during the Shi-Zu(世

祖: 1215-1294) regime, when the Mongolians were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a strong Dynasty as a ruler over the China, and laid

a foundation for establishing and execution of the Laws the Hans.

Its underlying intention was to preserve the distinctive culture of

the Hans, even though they were governed by the Mongolians

politically.It would have been impossible to implement these policies

without changing the Chinese perception on Hua-yi lun(華夷論).

Because Xu-Heng was practical and accepted the reality of ruling

over China by foreign race, he needed to revise the theories of

Zhu-Xi(1130-1200). He parted from the Zhu-Xi‘s view of the Hans

being superior to other races, and adopted a new one, placing the

Mongolia as not different from China or the Han race. He thought

barbarian is not different from Chinese, if it could adopt the laws

of the Hans. He extended the Zhu-Xi’s view of Chinese and other

races in perspective of blood lines into that of cultural differences.

His political advocacies were founded on these beliefs. He reported

his political view of Hang-han fa(行漢法) to Shi-Zu(世祖), who w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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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ing for centralized autocratic governing system, and induced

Him to adopt the civilized system of the ancient China.Guo-zi Xue(國子學: Government Academy) was the essential base

for the distribution of the Zhu-Xi philosophy. Xu-Heng led it to

cultivate young scholars, and he vigorously promoted the

philosophy of Practice of Beliefs(實踐躬行) by pushing for Hang-han

fa(行漢法) and advocating Neo- Confucianism(朱子學) as the

supreme philosophy for governing people, etc. The essential

principle of education for Guo-zi Xue(國子學) was just to make

people practice and act on the ethics of Zhu-Xi philosophy, based

on the The Literature for Child(小學: Xiao-xue) and The Four

Books(四書: Si-shu). These intentions were successfully reflected

on the educational and national examination systems. Through all

these, a mass of officials educated in Zhu-Xi philosophy were able

to take positions throughout the government, and these were the

ones who controlled the Guo-Xue(國學: Study of the national

lit-erature) and made it continue to next generations. The children

of the Mongolians and Shai-Mu ren(色目人: eye-colored man) in

addition to the Hans started to get education on Xiao-xue and

Si-shu, and this trend started from the central section, but

eventually spread out all over the Country.It can be said that Xu-Heng made it possible for Zhu-Xi

philosophy to spread out throughout the China. It was Xu-Heng

who made Zhu-Xi philosophy, which didn't have a strong hold even

in the South Sung, spread and prosper throughout the China,

continuing from the Yüan Dynasty of other race. The scholarship of

the Zhu-Xi philosophy during these times, instead of Chinese

Confucianism of Poetry and Prose, had a strong influence even in

the Ming and Ching Dynasties. That is why he used to be regarded

as a saint in Tao tradition. It can be said that Xu-Heng alm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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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le-handedly made the Chinese culture survive completely

during the Yüan Dynasty.Xu-Heng strictly and absolutely maintained the theoretical

foundation of the Zhu-Xi philosophy, and he strived to practice all

its beliefs and theories, and he specially placed an emphasis on the

ethics of the rulers, governing for the people, and promotion of

national strength through economic development, etc. In this

respect, Xu-Heng was rather an administrator who emphasized the

role of Confucian teachers, rather than a theorist or a philosopher.

Xu-Heng‘s accomplishment was quite special in that he searched

and found the ways appropriate for the current times, and

implemented the Laws of the Hans, and that he made Zhu-Xi Hsueh

widely 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which was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for his accomplish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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