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장에서는 자사가 공자의 도통을 전수하였다는 뜻을 서술하고 있다. 제1절에서는 道의 본원을 밝혔고, 그 아래는 도를 체득하는[體道] 공부와 그 공효를 구분지어 자세히 말하고 있다. 제1절에서는 性, 道, 敎를 통하여 道가 道다울 수 있는 그 이유를, 제2절에서는 存養 省察의 방법을 제시하여 體道의 공부를, 제3~4절에서는 도를 체득해야 한다는 필연적 이유를 규명하고, 나아가 이에 대한 공효를 논급하고 있다. 이 장 전체의 핵심적인 뜻은 道 자에 있다. 그러나 도를 말할 때에 반드시 性을 말함으로써 도의 본원이 갖춰지게 되었고, 도를 말할 때 반드시 敎를 말함으로써 도의 법이 설정되어진 것이다. 이것이 곧 性, 道, 敎를 함께 제시하게 된 이유이다.
이 세 구절은 性, 道, 敎의 의의를 해석한 것으로, 이는 모두 하늘에 근본하고 사람에게 간절한 것임을 알리려는 데 그 뜻이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가운데에서도 道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性은 도가 유출되어 나오는 본원이요, 敎는 도에 의해서 이루어진 법칙이다. 이 때문에 아래 장에서는 道 자만을 논하였다. 命이란 誥勅과 같다. 이는 반드시 그처럼 해야 한다는 책임과 성취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본성[性]이란 형체의 기운[氣]에서 떠날 수 없지만, 또한 본성과 기운이 뒤섞일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자의 주해에서는 본성을 이치[理]로 말한 것이다. 본성에는 하나의 渾渾穆穆한 이치가 있는데, 이를 따라 행하면 條理와 脈絡이 분명한 길이 있기에 『장구집주』에서 "그 본성의 자연을 따르는 것이 道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참으로 훌륭한 주석이다. 본성 그대로를 따르는 것이 道라는 말은 이치[理]의 동일성을 말해주는 것이며, 도를 품절하여 닦음이 가르침[敎]이라는 말은 기운[氣]의 차이점을 말한 것이다. 주자의 주석에서 말한 성인이란 임금의 지위와 스승의 자격을 모두 겸해서 말한 것이며, 禮樂이란 백성을 선도하는 가르침이며, 刑政이란 백성의 잘못을 막아주는 제도적 장치를 말한다. 이 세 구절은 사람과 만물을 모두 포괄하여 말했으나 사람을 위주로 논술한 것이다.
天命之謂性이오 率性之謂道오 修道之謂敎니라
하늘이 명하여 내려주신 것을 본성[性]이라 하고, 본성의 자연대로 따르는 것을 道라 하고, 도를 品節하여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자사는 道學의 전수를 잃을까 우려한 나머지 예로부터 전수되어온 도통의 의의를 찾아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그 누구든지 그 자신에게 본성이 있고, 모든 일에는 도가 있으며,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쯤은 모두 익히 알고 있는 터이다. 하지만 본성과 도와 가르침에 대한 그 名題의 유래를 과연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늘이 음양오행의 이치를 나에게 부여해줌으로써 사람은 이를 얻어 健順 五常의 덕을 지니게 되었다. 이를 본성이라고 한다. 사람에게는 각기 타고난 본성에 따라 일상생활상에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 있는데 이를 도라고 하며, 성인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에 따라서 지나친 것은 절제하여 뒤로 물러나게 하고 미치지 못한 것은 부추겨 앞으로 나아가도록 품절하는 것을 가르침이라 말한다. 하늘이 명하여 부여해준 것을 본성이라 한다면 바깥에서 얻어지는 것은 본성이 아니며, 본성의 자연 그대로 따르는 것을 도라 한다면 억지로 행하는 것은 도가 아니며, 도에 따라 품절하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도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것은 가르침이 아니라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命은 猶令也라 性은 卽理也라 天以陰陽五行으로 化生萬物에 氣以成形而理亦賦焉하니 猶命令也라 於是에 人物之生이 因各得其所賦之理하야 以爲健順五常之德하니 所謂性也라 率은 循也오 道는 猶路也라 人物이 各循其性之自然이면 則其日用事物之間에 莫不各有當行之路하니 是則所謂道也라 修는 品節之也라 性道雖同이나 而氣稟或異일새 故不能無過·不及之差어늘 聖人이 因人物之所當行者而品節之하야 以爲法於天下하니 則謂之敎니 若禮樂刑政之屬이 是也라 蓋人이 知己之有性이나 而不知其出於天하고 知事之有道나 而不知其由於性하며 知聖人之有敎나 而不知其因吾之所固有者 裁之也라 故로 子思於此에 首發明之하시니 而董子所謂道之大原이 出於天이 亦此意也라
命은 명령과 같다. 性이란 이치이다.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써 만물을 化生함에 있어 기운[氣]으로써 형체를 이루어주고 이치 또한 부여해주니, 이것이 바로 명령과 같다. 이에 사람과 만물이 태어나면서 각기 부여받은 이치에 따라 健順·五常의 덕을 갖추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본성이다. 率은 따르는 것이요, 道는 길(도로)과 같다. 사람과 만물이 각각 그 본성의 자연을 따르면 일상의 생활하는 사이에 각기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다. 이것이 이른바 道이다. 修란 品節하는 것이다. 본성과 도는 모두 한가지이지만 氣稟이 간혹 다르기 때문에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偏差가 없지 않다. 이 때문에 성인이 사람과 만물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로 인하여이를 품절(等級과 절제)하여 천하의 법을 마련하니, 이것이 이른바 가르침이니, 禮樂과 刑政 따위가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본성이 있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 본성이 하늘에서 나온 것임을 알지 못하고 모든 일에 도가 있다는 것쯤은 알지만 그것이 본성으로 말미암은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성인의 가르침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나의 고유한 본성으로 인하여 만들어졌음을 모르고 있다. 이 때문에 자사는 이 책에서 맨 먼저 이 점을 밝히시니, 董仲舒의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라는 말 또한 이러한 뜻이다.
"本章은 『중용』 全篇의 강령인데, 性, 道, 敎 세 구절은 또한 본장의 강령이며, 더 나아가 道 자는 3구절의 강령이다. 이 때문에 아래의 문장에서 道('道也者, 不可須臾離……') 자만을 들어 「중용」 전 편의 관건을 삼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본서의 저작 의도가 도를 밝히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현의 가르침은 반드시 먼저 道의 유래를 깨달은 이후에 힘을 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48) 먼저 命, 性의 字意적 해석을 살펴보기로 하자. 伊川은 簡明直切하게 "하늘이 부여한 것은 命, 物이 받은 것은 性이라 말하지만 이치는 하나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이를 부연해 말하면 命은 분부, 또는 명령이라는 뜻으로, 여기에는 元亨利貞의 이치와 氣稟淸濁의 氣數로 말한 차이가 있어서 하늘
48) 『秋淵文集』 「讀書隨錄」 제4책 19장 뒤쪽.
의 이치로 말한 부분이 있는가 하면 사람마다 달리 받은 바로써 말하기도한다. 性은 곧 이치[性卽理]로서 하늘이 명하여 부여해준 善이다. 그러나 氣稟의 性 또한 없지 않다.49) 이 때문에 "하늘에 있는 것은 命[在天爲命] 또는 이치[在天爲理]이며, 사람에게 있는 것은 본성[在人爲性]이라 한다. 이로 보면 性이라는 이름은 形氣(肉體)가 존재한 이후에 있는 것이니 만큼, 장횡거의 '이치와 기운이 합하여 性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다[合虛與氣, 有性之名]'라는 말은 인성의 본질과 名義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이 곧 하늘의 이치이므로 둘이 아니기에 정자의 '본성이 곧 이치[性卽理]'라는 말 또한 인성의 본원을 밝혀준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횡거와 정자의 말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본서의 '天命之性'은 인성의 본원을 말한 것이기에 주자의 章句에서는 정자의 말[性卽理]을 인용하였고, 이어서 뒷글에서 별도로 '氣以成形' 을 말한 것은 장횡거의 말을 취택한 것이다."50) 그렇다면 본성의 본질은 어떠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본성에는 진취적인 强性, 즉 陽과 수동적인 弱性, 즉 陰이 있다. 강성과 약성은 곧 인성의 健順을 말한다. "仁義禮智信은 五常일 뿐인데, 健順 두 글자를 첨가한 것은 五行은 五常, 陰陽은 健順과 配對가 되기 때문이다."51) 다시 말하면 "陽의 성질은 强健하니 木·火가 이에 속하는데 사람에게 있어선 仁·禮가 되고, 陰의 성질은 柔順하니 金·水가 이에 속하는데 사람에게 있어선 義·智가 된다. 土는 음양 二氣의 沖和요, 信 또한 健順을 모두 겸하고 있다. 음양이 오행에서 벗어날 수 없듯이 乾順 또한 五常의 밖에 있을 수 없다."52) 위에서 말한 강성과
49) 拙譯, 『性理字義』(여강출판사, 2005)의 命·性條에 따라 정리했음을 밝혀둔다. 50) 『秋淵文集·中庸門目』. 51) 『大全』 朱子.
약성을 구체적으로 예시하자면, "끝없이 일어나는 애틋한 사랑의 마음 [仁]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찬연히 빛나는 성대한 範節[禮]은 어지럽지 않기에 이는 健에 속하며, 義는 可否의 타당성을 어기지 않고, 智는 시비의 분별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는 順에 속한다. 信은 두 가지의 양상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 이치를 체득하여 변하지 않음은 健이요, 이치에 따라서 어김이 없음은 順이다."53) 道란 "모든 사물에 갖추어져 있는, 사람이 통행하는 길로서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다."54) 다시 말하면 "'도는 곧 이치[道卽理]'인데, 모든 사람이 다함께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道이며, 각각 조리가 있는 것으로 말하면 理이다. 그에 따른 조목은 군신·부자·부부·형제·벗의 사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그 실상은 둘이 아니다."55) 率은 억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자연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예컨대 "物性을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소가 밭갈이를 하고 말이 먼 길을 치달리고 닭이 새벽녘에 때맞춰 울고 개가 밤을 새워 지키는 것은 그들 나름대로의 자연섭리를 따른 것일 뿐이다. 또 다른 일례로 누에와 麻로 옷을 만들어 입고, 오곡으로 밥 지어 먹고, 봄엔 경작하고 여름엔 김매고 가을엔 추수하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것들은 모두 자연의 섭리를 따르고 있다."56) 이 때문에 "사람의 본성을 따르는 것은 사람의 道요, 소와 말의 성품을 따르는 것은 소와 말의 道이다. 만일 그들의 본성을 어기고서 소에게 말처럼 달리기를, 말에게 소처럼 밭갈이를 시킨다면 그것은 소와 말의
52) 같은 책, 西山眞氏. 53) 같은 책, 東窓李氏. 54) 『性理字義』 道條. 55) 『大全』 朱子. 56) 같은 책, 陳氏.
도리를 잃은 것이다."57) '修란 品節하는 것'이라는 品節은 裁制, 또는 矯正을 말한다. 즉 지나친 것과 부족한 것을 제재, 교정하여 중도에 맞게 하는 것이다. 일례를 들면 자식으로서 부모를 받드는 것은 자식으로서의 도리인 효도이다. 그러나 그의 기질의 偏差에 의해서 공경하는 마음이 지나쳐 오히려 부모에 대해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한 경우가 있기도 하고, 또는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쳐 부모에 대해 공경하는 마음이 결여되는 수가 있다. 가르침이란 곧 지나친 것을 절제하고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裁制, 또는 矯正을 통하여 자식으로서 해야 할 효도를 중도에 맞도록 해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인의 가르침이 또한 피교육자 고유한 본성에 의한 것임을 볼 때, 다시 한번 성인과 범인이 둘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先知先覺者를 통해서 後知後覺者의 자성을 회복하면 성인과 범인의 본성이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의 經傳이 곧 나의 註脚이라 말한 것이다. 이는 일찍이 주자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사가 말한 性, 道, 敎 세 구절은 천지 만물의 大本, 大根이기에 모든 조화는 여기에서 모두 유출된다. 이 때문에 이를 체득해보고 살펴보아야만 성현의 말씀이 곧 나의 가슴에서 모두 유출된 것이어서 자신 이외의 그 어떤 데에서도 추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58) 그리고 "본서는 모두 道의 體用으로 모두 어우러져 있다. 첫 구절의 天은 체, 性은 용, 둘째 구절의 性은 체, 道는 용, 셋째 구절의 道는 체, 敎는 용이다."59) 이처럼 서로가 체용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性, 道, 敎 가운데에서도 道에 조금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도는 위로
57) 같은 책, 朱子. 58) 위와 같음. 59) 같은 책, 王氏.
性을, 아래로 敎를 포괄하지만 그 본원을 추구해보면 반드시 천명으로 귀결된다."60)
"道也者……非道也" 3구절은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점을 밝힌 것으로, 이는 아래 단락의 뜻까지 모두 포괄하여 말한 것이며, "戒愼……不聞" 2구절은 군자의 存養 공부를 극진히 다하여 사물을 접촉하지 않은 고요한 가운데에서도 도를 떠나지 않으려는 것을 밝혔다. 다시 말하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不睹不聞]"라는 데에는 사물과의 접촉 이전, 즉 靜 자의 뜻이 담겨 있다. 이는 자신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반드시 경계하고 두려워[戒懼]하는 것이다. 주자 장구의 天理의 본연을 보존한다는 구절을 깊이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사물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곧 보고 듣는 즈음에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조차 없으며, 설령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잠깐의 사이에서도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어느 때이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存養공부로써 임하지 않은 바 없음을 뜻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내면에서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에 조심하고 삼간다[戒愼]라고 말하고, 귀로 듣는 것은 외부에서 나에게 전해져 오는 것이기에 마음으로 두려워한다[恐懼] 고 말하였다.
道也者는 不可須臾離也니 可離면 非道也라 是故로 君子는 戒愼乎其所不睹하며 恐懼乎其所不聞이니라
도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으니, 떠난다면 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
60) 같은 책, 新安陳氏.
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조심하고 삼가며,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도라는 것은 하늘에 근본하여 본성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일상생활의 어떤 사물에서나 찾아볼 수 있고 또 마음에 갖춰져 있어서 어떤 물건이든지 어느 때이든지 존재하지 않은 경우가 없기에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 만일 이러한 도가 나의 마음에서 떠났다면 이는 내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이므로 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을 따라서 도에 들어가고자 하는 군자는, 도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항상 조심하고 삼가는 마음가짐을 가진다면 남들이 보는 곳에서 어떻게 할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들리지 않는 때에도 항상 겁내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간직한다면 남들이 듣는 곳에서는 어떠하리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평상시 마음을 함양하는 '存養 공부'이다.
道者는 日用事物當行之理니 皆性之德而具於心하야 無物不有하며 無時不然하니 所以不可須臾離也라 若其可離면 則豈率性之謂哉리오 是以로 君子之心이 常存敬畏하야 雖不見聞이라도 亦不敢忽은 所以存天理之本然하야 而不使離於須臾之頃也라
도는 일상생활상의 사물에 마땅히 행해야 할 이치[理 : 道의 用]이니, 이는 모두 본성의 덕으로서 마음에 갖춰져 있어(道의 體) 어떤 사물이든지 있지 않음이 없고(道의 至大함. 空間的 橫說), 어느 때이든지 그와 같지 않은 바 없다(道의 長久함. 時間的 竪說). 이 때문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도에서 떠난다면 어떻게 이를 본성대로 따르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군자의 마음에 항상 敬畏(敬, 戒愼. 畏, 恐懼)하는 바 있어 비록 보고 듣지 못하는 곳에서도 감히 경홀히 하지 않음은, 天理의 본연을 보존하여 잠깐의 사이일지라도 도에서 떠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道란 空間的 橫說로써 말하면 그 至大함은 천지로서도 이루 다 실을 수 없을 만큼 끝이 없으며, 時間的 竪說로써 그 長久함을 말하면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도, 그리고 천지가 소멸된 이후까지도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에 있어서의 道에 국한하여 그에 따른 영역과 이를 보존하는 공부로 한정지어 논하기로 한다. "道는 일용사물 상에 마땅히 행해야 할 길, 즉 본성대로 따르는 것을 말한 것으로 하늘이 명해준 데에서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모두 나의 마음에 갖춰져 있어 크게는 부자, 군신, 부부, 장유, 붕우의 사이에, 작게는 일상생활의 起居와 음식에까지 어떤 사물에든지 존재하고, 예로부터 오늘날까지 천지에 유행하여 어느 때든지 존재한다. 戒愼, 恐懼는 敬을 주로 한다. 항상 몸을 추슬러 경각함으로써 마음이 항상 혼미하지 않고 밝으면[惺惺] 천명의 본체가 언제나 이에 존재하지만, 戒愼, 恐懼의 存養 공부가 있지 않으면 쉽사리 도에서 멀어지게 될 것이다."61) "『대학』 「正心」章의 恐懼는 바른 마음을 가지는 데 해로운 것이기에 마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本節에서 恐懼를 요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대학』의 恐懼와 『중용』의 恐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중용』의 恐懼는 사물과 접촉하기 이전에 항상 조심하여 혼미하지 않도록 하려는것이다. 그러나 『대학』의 恐懼는 속어에서 흔히 말하는, 겁에 질려 있는
61) 같은 책, 北溪陳氏.
恐怖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62)
이는 省察의 공부를 극진히 다하여 動하는 가운데서도 도를 떠나지 않고자 함을 말한다. 이 또한 '도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다'라는 데에서 전래한 말로서, 주된 요지는 靜時의 存養 공부에서 動處의 省察 공부로 나아가는 것에 있으므로 앞뒤 두 구절의 문장을 연결지어보아야 한다. 隱, 微는 動 자의 뜻에 결부시켜 본 글자이다. 처음 한 생각이 일어날 때에는 남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지만, 나만이 홀로 아는 것이기에 이를 獨이라 한다. 하지만 是非 善惡은 신령한 마음속에 보이지 않게 감춰둘 수만은 없기에 이보다 더 나타나는 것이 없고 이보다 더 또렷한 것이 없다[莫見莫顯]. 이로 보면 어찌 혼자만이 아는 마음이라 하여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자 장구의 "인욕이 싹트는 것을 막는다"라는 구절을 깊이 음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천리는 확충하고 인욕은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가장 긴요한 공부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위의 「道也」節과 같이 본성의 자연 그대로를 따르는 것이 道임을 논급한 것으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도에 들어가고자 힘쓰는 자는 처음부터 마땅히 이처럼 닦아나가야 한다는점을 말해주고 있다.
莫見乎隱이며 莫顯乎微니 故로 君子는 愼其獨也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이 없고, 미세하게 일어나는 생각보다 더 또렷이 나타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만이 아는 마음 (獨)을 삼가는 것이다.
62) 같은 책, 西山陳氏.
사물을 접촉하기 이전의 고요한 상태에서 이미 存養 공부를 정밀하게하였을지라도 보이지 않는 마음의 미세한 조짐(幾微)을 省察하는 공부는 좀 더 중요하다. 하나의 생각이 싹트는 마음속 깊은 곳은 지극히 은미하여 보이지 않지만, 지극히 은미한 가운데에서도 내 자신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느낀 바 있으니, 이는 세상에서 가장 잘 보이는 것 가운데 이처럼 은미한 마음속보다도 더 잘 보이는 것은 일찍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지극히 미세한 일이지만 지극히 미세한 가운데에서도 내 자신의 마음속에는 스스로 나타나게 되니, 이는 세상에서 가장 또렷한 것 가운데 이처럼 미세한 것보다도 더 또렷한 것은 일찍이 없다. 은밀한 곳 미세한 생각은 자신만이 알 수 있기에 이를 獨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고요할 때나 움직일 때나 항상 조심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정작 일에 임하여 혼자만이 알 수 있는 마음과 생각을 더욱 더 삼가, 이로써 인욕의 방패막이로 삼는 것이다. 이는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자아를 살펴보는 '省察의 공부'이다.
隱은 暗處也며 微는 細事也며 獨者는 人所不知而己所獨知之地也라 言幽暗之中, 細微之事는 跡雖未形이나 而幾則已動이라 人雖不知而己獨知之니 則是天下之事 無有著見明顯而過於此者라 是以로 君子 旣常戒懼오 而於此에 尤加謹焉은 所以遏人欲於將萌 而不使其潛滋暗長於隱微之中하야 以至離道之遠也라
隱이란 보이지 않는 곳[心曲 : 마음의 깊은 곳]이며, 微란 미세한 일[念起: 한 생각이 일어나는 찰라]이며, 獨이란 남들은 알지 못하고 자신만이 홀로 알 수 있는 곳이다. 그윽하고 어두운 가운데 미세한 일은 자취가 비록 나타나지 않지만 그 기미는 벌써 움직인 것이기에 비록 남들은 알지 못하나 자신만은 홀로 알고 있으니, 이는 천하의 그 어느 일도 이보다 더 잘 나타나고 또렷한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가 앞서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더욱 더 이를 삼가는 것은, 장차 싹트려는 인욕을 미리 막아내어 보이지 않는 마음 가운데에서 그것(인욕)이 속으로 불어나거나 보이지 않게 자라나 도에서 멀리 떠나게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이유에서이다.
여기에서는 『대학』의 愼獨과 『중용』의 愼獨에 대한 차이점을 서술코자한다. "『대학』의 愼獨과 『중용』의 愼獨은 같은 것일까? 『대학』의 誠意는 格物致知를 계기로 스스로의 마음을 속이지[自欺] 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학』의 신독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들이 진실한지 아닌지 그 조짐을 살피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동한 곳에서의 省察 공부이기에 未發時, 즉 사물을 접촉하기 이전 고요한 때의 공부에 대해서는 논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용』의 신독은 '도에서 떠날 수 없다'라는 구절을 뒤이어서 말하였으므로 靜時의 戒愼, 恐懼의 공부에 뒤이어서 人欲의 기미를 성찰하고자한 것이다. 이로 볼 때 『대학』에 비하여 『중용』 신독의 의미는 비교적 정밀하다 할 것이다."63)
위에서는 군자의 主敬 공부를 말하여 사람의 마음이란 도를 떠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밝혔으나, 이 절에서는 마음의 性情의 덕을 말하여 도란 본디 떠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惻隱, 羞惡 등의 情을
63) 『秋淵文集 中庸門目』.
말하지 않고, 喜怒哀樂을 말한 것은 中和 두 자를 透視하여 아래 절의 天地位 萬物育 구절을 일으키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中和, 大本, 達道는 性情의 덕을 말한 것으로, 그 본연의 도리가 이와 같기에 致 자를 쓸 수 있는 것이다. 謂之와 之謂는 각기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첫 절의 세 개의 之謂(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는 이 같은 명제를 붙이게 된 데 대한 실증이며, 이 절에서의 두 개의 謂之(喜怒'謂之'中, 發而'謂之'和)는 그 지위에 근거하여 이를 지목한 말이다. 無爲의 眞諦는 일체 작용 有爲의 본원이므로 이를 大本이라 하며, 한 사람의 情은 모든 사람과 공통으로 느끼는 정이기에 이를 達道라 한다. '天下之大本'의 天下는 이치[理]를 가리키니 모든 천하 이치의 근본임을 말하며, '天下之達道'의 天下는 사람을 가리키니 천하 모든 인류가 다함께 하는 도리를 말한다.
喜怒哀樂之未發을 謂之中이오 發而皆中節을 謂之和니 中也者는 天下之大本也오 和也者는 天下之達道也니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의 情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中이라 하고, 情이 나타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和라 하니, 中이란 천하의 큰 근본이요, 和란 천하에 다 함께하는 도이다.
도에서 떠날 수 없다는 것은 도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힘쓰는 군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소유한 性情 또한 모두 도에서 떠날 수 없는 실상을 가지고 있다.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란 인간의 정이다. 정이 나타나기 이전에는 渾然하여 어느 한 곳에 치우친 바 없다. 그것이 바로 中이다. 情이 이미 발산함에 있어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이 가장 절도에 잘 맞아야한다. 순수하고 지극히 올바르기에 서로 어긋남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和이다. 中이란 하늘이 명한 본성이니, 뭇 이치가 다 갖춰져 있어 온갖 변화가 모두 여기에서 나오니, 이는 천하의 큰 근본으로 도의 본체[體]이다. 和란 본성대로 따르는 것으로 어떤 곳에도 어긋남이 없기에 천하의 모든 일이 이로 말미암으니, 이는 천하 사람에게 모두 통용되는 도로서 도의 작용 [用]이다. 도의 體用이 이와 같이 마음의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볼 때 도란 잠깐이라도 떠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喜怒哀樂은 情也오 其未發은 則性也니 無所偏倚라 故謂之中이오 發皆中節은 情之正也니 無所乖戾라 故謂之和라 大本者는 天命之性이라 天下之理皆由此出이니 道之體也며 達道者는 循性之謂라 天下古今之所共由니 道之用也라 此는 言性情之德하야 以明道不可離之意라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란 情이며, 그것이 나오기 이전은 性이다. 치우치거나 의지한 바 없으므로 이를 中이라 하고,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은 올바른 情이니, 어그러지는 바 없으므로 이를 和라 한다. 大本이란 하늘이 명한 본성이다.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로 말미암아 나오니 도의 본체이다. 達道는 본성대로 따르는 것을 말한다. 천하와 고금에 모두 함께 말미암는 바이니 도의 작용이다. 이는 性情의 덕을 말하여 도에서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는 中和에 대한 보완, 그리고 道와 마음이 하나임을 밝히고자한다.
"희로애락의 정이 사물에 감촉되지 않아 渾然히 마음속에 있을 때는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또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도 없다. 그래서 특별히 이를 中이라 이름하고 또한 천하의 大本이라 하여, 본성의 덕과 도의 본체를 표현하였다. 희로애락의 정이 사물에 감촉되어 밖으로 발산될 때 각각 당연히 행할 바를 행하여 괴리와 거슬림이 없는 것을 和라 하는데, 이는 천하의 達道로서 바른 정[情之正]과 도의 작용을 나타냈다."64) "희로애락의 未發은 性, 已發은 情으로서 마음의 체용을 말하고, 中和는 性情의 덕인데 장구 주에서 '도의 체용'으로 말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위의 '道不可離' 구절에 대해 장구 주에서는 '道者, 日用事物當行之理, 皆性之德而具於心'으로 道 자를 해석하여 마음과 도는 하나로서 서로가 떠날 수 없음을 말하였고, 大本, 達道가 되는 中和에 대하여 子思는 또다시 '天下……' 두 글자를 더하여, 性情의 덕을 천하에 미루어 나가면 이 또한'도에서 떠날 수 없다'라는 의의를 확대해 나간 것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장구집주』에서 도의 체용으로 중화를 해석한 것이다."65)
이는 도를 체득한 자[體道者]의 지극한 공효[極功]를 말하여, 위 네 절의 뜻을 모두 끝맺고 있다. 致中은 戒懼(存養)의 마음을 더욱 순수하게 지님으로써 天命의 본성을 온전히 한 것이며, 致和는 愼獨(省察)을 더욱 지극히 함으로써 率性의 도를 다한 것이다. 천지가 제자리를 얻음[天地位]은 致中의 공효이며, 만물이 양육됨[萬物育]은 致和의 공효이다. 中和는 하나의 이치이며 位와 育은 하나의 일이지만, 공효의 유래가 다르기에 이처럼
64) 『大全』, 朱子. 65) 『秋淵文集 中庸門目』.
분류하지 않을 수 없다. 位와 育은 실제의 일[實事]로서 말한 것이지만, 실제의 이치[實理]가 그 가운데에 있다. 예컨대 요순이 제왕의 지위에서 천하를 평정한 것은 곧 位育의 實事이며, 孔孟이 아래에 있으면서 도를 밝히고 가르침을 베푼 것은 곧 位育의 實理이다.
致中和면 天地 位焉하며 萬物이 育焉이니라
中과 和를 극진히 다하면 천지가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양육된다.
고요할 때 存養할 바를 모르면 천리가 어두워져 큰 근본을 세울 수 없고, 움직일 때 인욕을 절제할 줄 모르면 인욕이 방자하여 다 함께 하는 도를 행할 수 없다. 오로지 군자로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존양 공부를 集約하여, 보이고 들리는 곳에서부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곳까지 한 터럭 끝만큼도 치우친 바 없이 이를 잃지 않고서 지키노라면 中을 지극히 하여 큰 근본을 세움이 날로 견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움직일 때 이를 삼가는 성찰 공부를 정밀하게 하여 은미한 마음으로부터 사물을 대하는 데까지 한 터럭 끝만큼도 어그러짐이 없게 하여모든 곳에서 그처럼 행하면 和를 극진히 하여 모든 사람이 다함께 하는 도를 행하는 바 날로 드넓어질 것이다. 내 마음 속의 중화는 곧 천지만물이 모두 함께 가지고 있는 중화이다. 때문에 중화를 극진히 하여 나의 마음이 바르면 천지의 마음 또한 바르게 되어 천지가 제자리를 얻게 되고,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 또한 순하게 되어 만물이 양육될 것이다. 이는 곧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말이다. 본성이란 내 자신이 극진히 다해야 하는 것이며, 도란 내 자신이 온전히 해야 하는 것이며, 가르침 또한 내 자신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이다.
도를 체득하는 공부는 여기에서 더할 수 없을 것이다.
致는 推而極之也며 位者는 安其所也오 育者는 遂其生也라 自戒懼而約之하야 以至於至靜之中에 無所偏倚而其守不失이면 則極其中而天地位矣오 自謹獨而精之하야 以至於應物之處에 無少差謬而無適不然이면 則極其和而萬物育矣라 蓋天地萬物은 本吾一體라 吾之心이 正則天地之心이 亦正矣오 吾之氣 順則天地之氣 亦順矣라 故其效驗이 至於如此라 此는 學問之極功이오 聖人之能事로되 初非有待於外오 而修道之敎 亦在其中矣라 是其一體一用에 雖有動靜之殊나 然必體立而後에 用有以行이니 則其實은 亦非有兩事也라 故於此에 合而言之하야 以結上文之意라
致는 미루어 극진히 함이며, 位는 제자리에 편안함이요, 育은 삶을 이루는 것이다. 경계하고 두려워함[存養]으로부터 요약하여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조금이라도 치우친 바 없이 그 지키는 바를 잃지 않는 데에 이르면 그 중을 지극히 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얻게 되고, 홀로 아는 마음을 삼감 [省察]으로부터 이를 정밀하게 하여 사물을 응하는 곳에 조금이라도 잘못됨이 없이 어느 곳에서든지 그처럼 하는 데 이르면 그 和를 지극히 하여만물이 양육되게 된다. 천지 만물이란 본래 나와 하나이다. 나의 마음이 올바르면 천지의 마음이 올바르고, 나의 기운이 순하면 천지의 기운 또한 순하다. 그러므로 그 효험이 이와 같은 데 이르게 된다. 이는 학문의 지극한 공효이며 성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원래 나의 몸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요, 도를 닦는 가르침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 하나의 體와 하나의 用에 비록 움직임과 고요함이라는 차이가 있으나 먼저 본체가 바로 선 다음에 작용이 행해질 수 있으니, 그 실상은 또한 두 가지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를 합하여 말하면서 위 글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天地位, 萬物育과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 喜怒哀樂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희로애락의 감정과 관계되지 않은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66) 물론 "喜怒哀樂의 감정이 지대한 位育의 공효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말할 때 위정자를 예로 들어 말할 경우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지위가 없는 匹夫 또한 그 자신의 몸과 가정에는 작은 규모나마 그에 따른 천지와 만물이 있기 마련이다."67) 때문에 "位育의 공효는 지위의 고하와 역량의 차이에 따라서 그 나름대로의 성과를 이룩할 수 있다. 예컨대 한 국가의 군주일 경우 기쁜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상을 내리면 수많은 백성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데 힘쓰게 되고, 노여운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 벌을 내리면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악을 징계하게 된다."68) 뿐만 아니라, "한낱 필부를 예로 들어 그 자신의 몸으로 말하면, 그의 마음이 바르고 기운이 화순할 때 얼굴이 화사하고 온몸이 성대해져 행하는 일마다 모두 예절에 맞는 것이 그 한 몸의 位育이며, 한 가정으로 말하면 효성에 감화되어 부모가 편안하고 사랑에 감화되어 자손이 유순하고 공경과 우애로써 형제가 화목하게 된다. 이것이 한 집안의 位育이다. 하지만 지위가 있는 자처럼 감화력이 클 수는 없다."69)
右는 第一章이라 子思 述所傳之意以立言하야 首明道之本原이 出於天而
66) 『大全』 朱子. 67) 같은 책, 東陽許氏. 68) 같은 책, 朱子. 69) 같은 책, 東陽許氏.
不可易과 其實體 備於己而不可離오 次言存養省察之要오 終言聖神功化之極이라 蓋欲學者 於此에 反求諸身而自得之하야 以去夫外誘之私而充其本然之善이니 楊氏所謂一篇之體要 是也라 其下十章은 蓋子思가 引夫子之言하야 以終此章之義라
위는 제1장이다. 자사가 전수되어온 뜻을 기술하여 이 책을 지으면서, 맨 첫머리에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온 것이기에 바뀔 수 없다는 점과 그 실체가 자신에 갖추어져 있어 떠날 수 없다는 점을 밝혔고, 그 다음에는 存養, 省察의 요지를 말하였고, 맨 끝에서는 성인과 신인(神人)의 공효와 감화의 극치를 말하였다. 이는 배우는 자들이 이를 자신에게 돌이켜 구하여 스스로 얻어서 외물이 유혹하는 사사로움을 버리고 본연의 선을 채워 나가도록 하기위한 것이다. 楊氏(楊時, 伊川門人)의 "『중용』 1편의 뜻을 모두 총괄한 要體" 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이 아래의 10장(제11장까지)은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이 장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이 장은 자사의 깊은 가슴 속에서 우러나온 道統의 요지로서, 옛 성인이 밝히지 못한 부분 또는 미진한 의미를 보완해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를 중점적으로 전재하고자 한다. "『중용』은 성인의 심오한 도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를 밝혀준 책이다. 첫 장은 옛 경전과 前聖의 말 따위를 전혀 인용하지 않고서 자사 스스로가 저술한 격언으로서70) "성인이 도를 전수하고 가르침을 세운 데 대한 본원과 군자가 性情을 함양하는 要諦를 논하고 있다. 이는 『중용』의 강령이요 第一大節이다."71)
70) 같은 책, 新安陳氏. 71) 같은 책, 雙峰饒氏.
"첫머리 세 구절(天命……謂敎)은 멀리 「湯誥」의 '上帝降衷于下民, 若有恒
性'이라는 뜻을 계승하고 있지만, 性, 道, 敎 세 글자를 밝혀내어 맥락이 일관되고 명제가 분명한 것으로 살펴보면 오히려 「탕고」에 비해 훨씬 앞선 것으로, 옛 성인이 밝히지 못한 부분을 밝혀주고 있다. 또 일례를 들면, 曾子는 『대학』에서 일찍이 愼獨을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動處에서 말한 것으로 그 이전의 靜時 공부에 대해선 언급한 바 없다. 자사는 먼저 戒愼恐懼 구절에서 靜時의 涵養 공부를 말한 뒤, 이어 愼獨에서 動時의 省察 공부를 말하여, 動靜을 모두 포괄하고 內外에 모두 힘을 다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로 보면 증자의 말에 비하여 더욱 더 정밀하며, 이 또한 이미 밝혀준 것에 근본하여 밝히지 못한 부분을 남김없이 밝혀준 것이다. 그리고 예로부터 수많은 책에서 無過·不及의 中을 누누이 언급해 왔지만 그것은 中의 작용에 관한 외면적 일부분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사는 먼저 未發의 中을 말하여 '중의 본체'를 말하고, 뒤이어서 時中의 中을 말하여 '중의 작용'을 말하였다. 未發의 중은 그 본체의 이치가 심오하기에 『중용』을 제외한 그 어느 책에서도 이를 언급한 부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또한 옛 성현이 밝히지 못한 바를 밝힌 것이 아니겠는가. 고요할 땐 中을, 움직일 땐 和를 극진히 다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양육되는 데에 이르러 천지의 化育에 함께하는 성인의 極功에 이르렀지만 이의 본원은 "存天理, 遏人欲"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같이 一章의 大旨에는 근본적인 본원, 수행상의 공부, 결과적 공효를 두루 갖추고 있기에 성현들의 숱한 서적을 하나하나 훑어보아도 이에 견줄 만한 책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공자에게 이처럼 어진 손자가 있음으로써 聖門의 道統 전수에 대해서 지대한 공로가 있었으니 그 도는 만세에 길이 영원할 것이다."72)
이 장에서는 『중용』으로 命名하게 된 이유를 推原하여 仲尼에게 귀결짓고 있다. 위 절에서는 도를 얻은 자[體道人]와 잃은 자[離道人], 즉 군자와 소인을, 아래 절에서는 體道와 離道의 실상을 말하고 있다.
첫머리 '仲尼曰' 세 글자는 道統의 眞傳을 정중히 나타내고, '君子中庸' 구절은 『중용』 전체의 뜻을 포괄하고 있다. 『장구』에서 말한 不偏不倚는 內在心理로, 無過·不及은 外在事物로, 그리고 '體之(……[唯君子, 爲能體之])'는 현재 완성된 인격체로, 아래의 時中은 공부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이로 보면 중용을 체득함[體之]이란 그 본연을 따르는 것에 반하여, '小人反中庸'의 反 자는 본연을 따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仲尼曰 君子는 中庸이오 小人은 反中庸이니라
仲尼(공자의 字)가 말하였다. "군자는 중용으로 하고 소인은 중용에 반대된다."
이는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첫 장의 뜻을 거듭 해석한 것이다. 공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중용의 도란 하늘에서 부여해준 천명을 받들어 본성대로 따르는 것이기에, 본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얻어 온 것이다. 그러나 군자만이 중용을 체득하여,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덕, 그리고 마음
72) 같은 책, 新安陳氏.
에서 일어나는 情을 모두 한결같이 중용의 이치를 따르지만, 소인은 중용에 반대가 되므로 마음에 간직한 바와 발산하는 바 모두 본연의 이치와 괴리되는 것이다.
中庸者는 不偏不倚 無過·不及而平常之理, 乃天命所當然 精微之極致也니 唯君子아 爲能體之오 小人은 反是니라
중용은 편벽되거나 치우치지 않고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평범하고 떳떳한 이치, 곧 천명의 당연한 바 精微의 극치이니, 오직 군자만이 이를 체득할 수 있고, 소인은 이에 반대가 된다.
여기서는 거듭 '군자의 中庸'과 '소인의 反中庸'이 형성되는 이유를 밝히면서, 時中과 無忌憚에 중점을 두어 논술하고 있다. 『朱子語類』를 살펴보면, 군자란 단지 좋은 사람[好人]이라고 말하였는데, 『장구』에서 특별히 德 자를 첨가한 것은 이미 덕을 이루어 時中의 本領을 갖춘 인격체로서 말하기 때문이다. 군자의 戒懼, 愼獨 공부는 已發, 未發을 모두 貫流하여 "而(君子'而'時中)" 字 앞의 '君子'는 내면의 德, 즉 未發之中의 본질을, 뒤의 '時中'은 외재의 작용, 즉 사물에 대한 隨時處中을 말한 것으로, 內外의 中을 모두 겸하고 있다. 時中은 두 가지의 뜻을 포괄하고 있다. 첫째는 모든 일마다 그에 따른 하나의 中이 있으니 어느 한 쪽에 치우칠[偏向] 수 없다는 점과, 둘째는 같은 일일지라도 오늘에는 이처럼 하는 것이 中이 되지만 이튿날은 바뀌어 저처럼 하는 것이 中이 되므로 하나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無忌憚은 時中과 반대되는 말이다.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反]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의 중용이란 군자의 덕을 지니고서 때에 따라 중도에 맞게 함이요, 소인이 중용에 반대됨은 소인의 마음을 갖고서 기탄하는 바 없기 때문이다.
중용이란 군자만이 할 수 있고 소인이 이에 상반됨은 무엇 때문일까? 군자가 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사물과의 접촉이 없는 고요한 때 함양하는 '存養' 공부와 사물과의 접촉으로 한 생각이 일어날 때 정밀하게 살피는'省察' 공부를 통하여 군자로서의 선한 덕을 지니고, 이어서 사물을 접촉하면서도 시의적절한 중도로 조처하는 데 있다. 이것이 중용을 능히 할 수 있는 저변의 이유이다. 그러나 소인이 중용과 상반될 수밖에 없는 것은 고요할 땐 존양 공부에 힘쓰지 않고, 움직일 땐 성찰 공부를 도외시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소인으로서 악을 범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이어 사물과 접촉할 때에도 그에 적절한 천리를 돌아보지 않고서 거리낌 없이 방자한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용에 반대되는 이유이다. 군자와 소인의 차이는 오직 조심 [敬]하느냐 방종[肆]하느냐에 달려 있다.
王肅本에 作小人之反中庸也어늘 程子 亦以爲然이라 하니 今從之라 君子之所以爲中庸者는 以其有君子之德이요 而又能隨時以處中也며 小人之所以反中庸은 以其有小人之心이오 而又無所忌憚也라 蓋中無定體오 隨時而在이니 是乃平常之理也라 君子는 知其在我라 故 能戒謹不睹, 恐懼不聞하야 而無時不中이요 小人은 不知有此라 則肆欲妄行而無所忌憚矣니라
王肅의 本73)에는 '小人之反中庸也'로 씌어 있는데, 程子 또한 이를 옳다고 하니, 여기서는 그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군자가 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군자의 덕을 지닌 데다 또한 때에 따라서 중도로 조처하기 때문이며, 소인이 중용에 반대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을 가진 데다 또한 거리끼는 바 없기 때문이다. 中이란 일정한 자체[定體]가 없고 때에 따라서 있으니, 이것이 바로 평범하고 떳떳한 이치이다. 군자는 그것이 나에게 있음을 알기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경계하고 조심하며 들리지 않는 데에서도 두려워하여 중도로 행하지 않는 때가 없지만, 소인은 이것이 있는 줄조차 모르기에 방자한 욕심과 허튼 행동으로 거리낀 바 없다.
여기에서는 『중용』의 서술체제에 대해 槪述하고 두 곳의 '而'(君子而時中……小人而無忌憚) 자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중용』의 서술체제는 크게 두 가지 양상으로 구분지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子思의 핵심 주장을 먼저 피력한 뒤에 이와 유관한 부분을 인증, 보완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1장에서 순수한 자사의 격언을 전제한 뒤에 제2장에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자신의 의견을 밝히고 있으며, 제11장의 費隱 또한 이와 같은 예이다. 또 다른 한 양상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이어서 곧바로 해설을 가하는 것이다. 이는 제2장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위 절 2구절[仲尼曰……反中庸]은 공자의 말이며, 본 절의 4구절[君子之……忌憚也]은 자사가 공자의 말씀을 해석한 것이다."74) "군자란 단지 좋은 사람[好人]을, 時中은 시의적절하게 잘한 일을 뜻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군자의 덕이요, 악을 행하는 것은 소인의 마음이다. 군자의 덕을 가지고서도 중용에 처하지 못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소인의
73) 王肅(魏人)의 『禮記』 註解本에 실린 『중용』을 말함. 74) 같은 책, 蔡氏.
마음을 가지고서도 거리끼는 바 없는 방자함에 이르지 않는 자 또한 있기도 하다." 때문에 '君子而時中'과 '小人而無忌憚'의 '而' 자를 자세히 규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여기서 而 자는 接續助詞로서 위아래의 두 뜻을 동시에 연결지어 주고 있다. 곧 '旣……, 又……'의 의미이다. 이는 "이미 군자라 할지라도 또다시 時中을 요하며[旣是君子, 又要時中], 이미 소인이면서 또한 꺼리는 바 없음[旣是小人, 又無忌憚]"을 말한다. "물론 두 곳의 '又' 자를 쓰지 않아도 되지만 배우는 자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할까 염려한 나머지 각별히 이 글자를 첨가, 분명하게 간파하기를 요한 것이다."75)
右는 第二章이라 此下十章은 皆論中庸하야 以釋首章之義라 文雖不屬이나 而意實相承也라 變和言庸者는 遊氏曰 以性情言之면 曰中和오 以德行言之면 則曰中庸이라 하니 是也라 然中庸之中은 實兼中和之義라
위는 제2장이다. 이 아래로 10장은 모두 중용을 논하여 제1장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문장이 비록 연결되어 있지 않으나 그 뜻은 실제로는 서로 연이어져 있다. 和(中'和')를 庸(中'庸') 자로 바꿔 말한 것은 游氏(游酢, 伊川門人)가 말하기를"性情으로 말하면 中和라 하고 덕행으로 말하면 중용이라 한다"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중용의 中에는 실제로는 中和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75) 같은 책, 朱子.
游氏의 말을 대략 보완하면 다음과 같다. 中은 體와 用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바꿔 말하면 '內在心理의 中'과 '外在事物의 中'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中은 본디 隨時處中의 의미로서 中庸의 中에 중점을 두고 있으나 內在的 中이 없이는 外在的 中이 형성될 수는 없다. 이 점에 관해 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용의 中 자는 본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中을 말하니, 큰 요지는 時中을 말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 근본을 미뤄보면 喜怒哀樂未發의 中으로부터 時中의 中에 이르는 것이다. 이 때문에 未發의 中은 體이며 時中의 中은 用을 의미한다. 이로 보면 中이란 中和를 겸해서 말한 것이다."76)
이 장에서는 중용의 도를 찬양함과 동시에 능히 이를 행한 이가 적음에 대해서 개탄하고 있다. 중용이란 조금이라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盡善盡美한 것이다. '民鮮能'의 民은 修道立敎의 성인과 반대되는 凡夫를 말하며, '이를 능히 행한 자 적은 것[鮮能]'에 대한 이유는 아래 제4장에서 해석하고 있으므로, 본 장은 虛說에 지나지 않는다. 『논어』 '中庸之爲德也'의 爲德 두 자는 이미 중용을 실천한 一身으로 말한 것이기에 能 자를 생략하였지만, 여기에서는 중용의 도리, 그 자체를 찬양한 말이기에 能 자를 첨가하여 뒷글의 여러
76) 위와 같음.
부분에 쓰인 能(제4장의 鮮'能'知味, 제7장의 不'能'期月守, 제9장의 中庸不可'能', 제11장의 吾不'能'已와 唯聖者'能'之) 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子曰 中庸은 其至矣乎인저 民鮮能이 久矣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중용은 그 지극한 것이다. 이를 능히 행한 사람이 적은 지 오래이다."
여기서는 위의 제2장을 이어서, 소인은 중용의 도에 반대될 뿐 아니라, 백성 또한 이를 능히 행한 자 적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의 이치 가운데 더할 수 있거나 뺄 수 있는 것은 모두 지극한 것이 아니다. 오직 중용의 도리만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어 여기에 다시 더할 것이 없는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치는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얻은 것이다. 하지만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한 나머지 분발하여 이를 행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 때문에 중용의 도를 잘 알고서 행한 사람이 적은 지가 오래이다. 이 또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過則失中이오 不及則未至라 故惟中庸之德이 爲至라 然이나 亦人所同得이라 初無難事로되 但世敎衰하야 民不興行이라 故鮮能之 今已久矣라 論語에 無能字라
지나치면 中을 잃고 미치지 못하면 다다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중용의 덕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사람이 모두 다 함께 얻은 바이기에 애당초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세상의 가르침이 쇠퇴하여 백성들 사이에 이를 행하는 기풍이 진작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를 능히 행한 자가 적은 지 이미 오래이다. 『논어』에는 能77) 자가 씌어 있지 않다.
右는 第三章이라 위는 제3장이다.
이 장에서는 중용의 도를 행하지 못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위 절에서는 중용의 도를 행하지 못하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를 규명하였고, 아래 절에서는 사람들이 도를 살피지 못한 데 대해서 개탄하였다.
여기서는 知行이 서로 연계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다. 반드시 명백하게 안 뒤에 이를 지극히 행할 수 있고 지극히 행한 이후에 앎이 밝아질 수 있다. 어진 이와 지혜로운 자[賢, 知]의 지나침에 대한 말에는 그들을 애석하게 여기는 뜻이 담겨 있으며,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 자[愚, 不肖]의 미치지 못한 데 대한 말에는 그들을 가엾게 여기는 뜻이 담겨 있다.
77) 「雍也」. 子曰 中庸之爲德也, 民鮮 久矣.
子曰 道之不行也를 我知之矣로라 知(智)者는 過之하고 愚者는 不及也니라 道之不明也를 我知之矣로라 賢者는 過之하고 不肖者는 不及也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아노라. 지혜로운 자는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이유를 내 아노라. 어진 자는 지나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위의 제3장에 이어서, 중용을 행한 사람이 적은 것은 氣稟의 편벽에 의해서 이를 살피지 못하기 때문임을 말하였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중용의 도를 행하지 못하는 그 이유를 나는 아노라. 실행한다는 것은 밝은 지혜로 말미암은 것인데, 오늘날 지혜로운 자는 심오하고 미세한 것을 지나치게 탐구하여 중용에 대해 지나친 인식을 가짐으로써 도를 행할 수 없다는 잘못된 의식을 가지기에 이르고, 어리석은 사람은 혼미하고 비루하여 그의 지혜가 중용에 미치지 못하고 또한 행할 바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중용의 도가 밝혀지지 못한 까닭을 나는 아노라. 밝은 지혜는 실행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인데, 오늘날 어진 이들은 기이한 것을 자랑으로 여긴 나머지 이를 나타내고자 하여 중용에 지나친 행동을 함으로써 오히려 도를 알 수 없다는 잘못된 인식을 지니게 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비루하고 미천하여 그의 행실이 중용에 미치지 못하고 또한 알아 나가는 것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이것은 곧 도가 밝혀지지 못한 이유이다.
道者는 天理之當然, 中而已矣라 知愚賢不肖之過·不及은 則生稟之異而失其中也라 知者는 知之過일새 旣以道爲不足行이라 하고 愚者는 不及知오 又不知所以行이니 此道之所以常不行也라 賢者는 行之過일새 旣以道爲不足知라 하고 不肖者는 不及行이오 又不求所以知니 此道之所以常不明也라
道는 천리의 당연한 바, 중도일 따름이다.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못한 자에게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있는 것은 나면서부터 각기 다르게 받아온 氣稟으로 인해 그 중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자는 지나친 앎으로써 <오히려> 도를 행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게 되고, 어리석은 자는 <애당초 중용 자체에 대해> 알지 못하고 또 <이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다. 이는 항상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어진 자는 <중도에> 지나친 행실로써 이미 도를 알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어질지 못한 자는 행하는 데 미치지 못하고 또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이는 항상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도를 밝히지 못하고 행하지 못하는 그 첫째 이유는 타고난 기질의 차이점[生稟之異]에 있다. 智愚 賢不肖의 氣質偏差는 곧 本然的 내재심리의 中을 상실한 것이며, 따라서 후천적 외재사물에 있어서도 그에 따른 偏差가 발생되기에 중용의 도를 밝힐 수 없고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일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흔히 식견이 고매하고 탁월한 이의 지론은 항상 그지없이 고상하여 세속의 일들을 마치 자신에게 累를 끼치는 것처럼 생각하여 기꺼이 행하지 않는다. 예컨대 老佛의 무리는 본디 지혜로운 자들이다. 그렇지만 이치를 통달하고자 도리어 인륜을 멸살하였으니 지혜의 지나침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식견이 얕고 천박한 사람들은 一偏에 가려 있어 天理를 모르니 이 또한 지혜가 미치지 못한 자이다. 이 두 가지가 도를 행할 수 없는 이유이다. 흔히 각고의 노력으로 뭔가를 이룩하려는 사람들의 操行은 항상 고상하여 세속의 일들을 마치 자신에게 累를 끼치는 것처럼 생각하여 평범한 것을 원하지 않는다. 예컨대 隱者인 晨門, 荷蓧 등은 본디 어진 자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결백을 너무 지나치게 내세움으로써 도리어 인륜을 어지럽혔으니 지나친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용렬하고 천박한 사람들은 안일에 빠져 물욕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이 또한 행동이 미치지 못한 자이다. 이 두 가지가 도를 밝힐 수 없는 이유이다."78)
이 절에서는 도를 살피보지 못한 데 대해 경계하면서 학문에 더욱 힘써야 함을 계도해주고 있다. 어질고 지혜로운 자는 일상생활의 사이에 도가 있음을 살피지 못하고, 어리석고 불초한 자는 도에 당연한 준칙이 있음을 살피지 못하니 이것이 곧 過·不及의 偏差가 생기는 이유이다. 이 절에서 음식은 비유사로 쓴 것도 아니요, 또한 사실 그대로를 쓴 것도 아니다. 수많은 도 가운데에서 가장 쉽게 알 수 있는 일례를 들어서 경계한 것이다. 두 곳의 也(飮食'也'……知味'也') 자는 이러한 점을 간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人莫不飮食也언마는 鮮能知味也니라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건마는 음식 맛을 아는 이가 적다."
78) 같은 책, 三山陳氏.
그러나 중용의 도는 바뀔 수 없는 당연한 이치로서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를 익히 행하면서도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잃게 되는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참으로 음식 맛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흔치 않다. 음식의 바른 맛을 알면 언제나 싫증을 내지 않고 즐겨 먹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용의 도를 안다면 그는 반드시 도를 지켜 잃지 않을 것이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과·불급의 편차가 심한, 지혜롭고 어리석고, 어질고 어질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도를 행할 수 있겠는가.
道不可離로되 人自不察일새 是以 有過·不及之弊라
도란 떠날 수 없는 것임에도 사람 스스로가 살피지 않음으로써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폐단이 생기는 것이다.
위의 경문은 『논어』(「雍也」)의 "그 누가 문으로 출입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어찌해서 道를 따르지 않는 것일까(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맹자』 (「盡心 上」)의 "종신토록 도를 따르면서도 도를 모르는 자가 많다(終身由之而不知道者 衆矣)"·『주역』(「繫辭 上」)의 "백성은 날마다 쓰면서도 모르기 때문에 군자의 도가 적은 것이다(百姓日用而不知, 故君子之道 鮮矣)"라는 의미와 같다.
右는 第四章이라 위는 제4장이다.
이 장은 위 제4장의 知愚를 이어서 아래 제6장의 순임금에 관한 일을 일으켜주고 있다. 이는 본디 도가 행해지지 못한 데 대한 탄식의 말인데, 도리어 도가 행해지지 못하게 된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道其不行矣夫'의 其자에는 무한한 뜻이 담겨 있다. "도가 밝혀지지 못한다[道之不明]"라는 뜻을 분명히 알면 "도가 행해지지 못한[道之不行]" 책임이 도를 밝게 알지 못한 데 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을 것이다.
子曰 道其不行矣夫인저
공자가 말하였다. "도가 그 때문에 행해지지 못하겠구나!"
도가 행해지지 못한 이유는 지혜로운 사람은 지나치고 어리석은 자는 미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공자가 말하였다. 도란 사람이라면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사람으로서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단 도를 체득하려는 자들이 너무 지나친 데에 잘못을 범하지 않으면 또한 도에 미쳐가지 못함으로써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공자가 말한 도가 행해지지 못한 이유는 도를 밝게 알지 못한 데에서 연유함이 아니겠는가.
由不明이라 故 不行이니라 밝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하지 못한 것이다.
右는 第五章이라 此章은 承上章而擧其不行之端하야 以起下章之意라위는 제5장이다. 이 장은 위 장을 이어서 도가 행해지지 못하게 된 실마리를 들어 아래 장의 뜻을 일으키고 있다.
이 장은 도를 밝게 아는, 大知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첫 구절은 특별한 의미 없이 전체의 뜻을 포괄하면서 순임금이 大知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 상상해 본 것이다. '묻기를 좋아하고' '살피기를 좋아하고' '잘못은 숨겨주고' '잘한 점을 들추어 宣揚한 것'[問, 察, 隱, 揚]이란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도량이며, '두 끝을 잡음'[執兩]은 중도를 쓰지 않으면 멈추지 않는 것으로 큰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요인이다. 이에 맨 끝 구절에서 위의 문장을 모두 끝맺으면서 大知로 인하여 더욱 순임금의 인품을 상상해보고 있다. 묻기를 좋아하는 것은 드넓은 아량이다. 邇言이란 淺近한 사람의 말이 아니다. 『서경』의 「大禹謨」와 「皐陶謨」를 살펴보면 심원한 뜻을 가진 말이 있는가 하면 또한 비근한 뜻을 가진 말도 있는데, 지극한 이치는 비근한 말에 실려 있다. 도를 밝게 깨쳐 精粗의 구별이 없이 통달한 자가 아니면 이를 살필 수 없다. 성인의 마음은 선할 뿐 악이 없으므로, 악한 말을 들을지라도 스스로 변화되고 선한 말을 들으면 곧바로 그와 契合되는 것이지, 고의적으로 악한 말은 숨겨주고 선한 말을 칭찬해주고자 하는 마음이있는 것은 아니다. 두 끝[兩端]이 모두 선한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가운데에서 다시 선택하는 것이다. 예컨대 후하게 대하는 것이 옳으면 후한 것으로 중도를 삼고, 박하게 대하는 것이 옳으면 박하게 대하는 것이 중도이지, 두 가지의 끝을 들고서 한 중간을 취한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단순히 두 가지 끝을 들고서 중간을 잡는다면 이는 마치 子莫의 執中과 같다.79) "중도를 백성에게 쓴다[用其中於民]"라는 것은 그가 얻은 중도를 백성에게 베푸는 것이다. "其斯……" 구절에서 "이 때문에 순임금이 大知가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한낱 濬哲文明의 순임금, 밝은 눈과 총명한 귀를 가진 순임금만으로 인식할 경우,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않고 남들에게 물어서 취한 것이 바로 순임금이 순임금다울 수 있는 바임을 모르게 될 것이다. 問, 察, 隱, 揚은 "지혜로운 자의 지나침"[知者過之]이 아니요, 執兩, 用中은 "어리석은 자의 미치지 못함"[愚者不及]이 아니다.
子曰 舜은 其大知也與신저 舜이 好問而好察邇言하사대 隱惡而揚善하시며 執其兩端하사 用其中於民하시니 其斯以爲舜乎인저
공자가 말하였다. "순임금은 큰 지혜를 지닌 분이다. 순임금은 묻기를 좋아하고 비근한 말일지라도 살피는 것을 좋아하지만 잘못된 말은 숨겨주고 좋은 말은 선양하며 두 끝을 잡아 그 중도를 백성에게 쓰시니, 이것이 순임금다운 바이다."
이는 위 제5장을 이어서, 도가 이미 행해지지 못한 것으로 보아 반드시 순임금과 같은 지혜를 갖춘 뒤에야 도가 행해질 수 있다는 데 대해서
79) 『孟子』 「盡心 下」.
말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밝은 지혜가 아니면 도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나 지혜에는 큰 지혜와 작은 지혜가 있다. 옛 순임금은 큰 지혜를 지닌 성자임을 알 수 있다. 무엇으로 그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을까? 천하의 이치란 무궁무진함에 반하여 개인의 앎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지혜만을 쓰는 자는 큰 지혜랄 수 없다. 순임금은 모든 일에 있어 남에게 부지런히 물었고, 지극히 비근한 말이라 할지라도 반드시 그 속에 담겨 있는 이치를 꼼꼼하게 살펴보았으며, 만일 그의 말이 이치에 맞지 않아 훌륭하지 못하면 이를 숨겨주고, 이치에 맞는 훌륭한 말이면 이를 들춰내어 남들에게 널리 알렸다. 하지만 사람들의 말이 모두 훌륭하다 할지라도 때로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갖가지 양상이 있으므로 거기에는 서로 다른 양극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두 끝을 잡아서 너그러운 아량으로 모든 선을 겸하여 하나도 빠뜨림이 없도록 포용한 뒤에 일치된 귀결점에서 확고부동한 중도를 얻으면, 이를 다시 백성에게 쓰되 정밀하고 자세히 살펴 지극히 타당케 하여 조금이라도 편벽됨이 없도록 시행하였다. 이는 이른바 천하의 수많은 지혜를 하나로 취합한 것이기에 순임금이 순임금다울 수 있었던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은 참으로 미쳐갈 수 없는 일이라 하겠다. 아! 이 세상에 순임금님처럼 큰 지혜를 지닌다면 도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舜之所以爲大知者는 以其不自用而取諸人也라 邇言者는 淺近之言이로되 猶必察焉하니 其無遺善을 可知라 然於其言之未善者는 則隱而不宣하고 其善者는 則播而不匿하야 其廣大光明이 又如此하니 則人孰不樂告以善哉아 兩端은 謂衆論不同之極致니 蓋凡物皆有兩端이니 如小大厚薄之類라 於善之中에 又執其兩端而量度以取中然後에 用之하니 則其擇之審而行之至矣라 然非在我之權度(도) 精切不差면 何以與此리오 此는 知之所以無過·不及而道之所以行也니라
순임금이 크게 지혜로울 수 있었던 것은 그 스스로의 지혜를 쓰지 않고 사람들에게 취하였기 때문이다. 邇言은 천근한 말인데도 오히려 이러한 말까지도 반드시 살피니, 그는 조금도 선을 빠뜨리는 일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좋지 않은 말은 숨겨서 들추어 내지 않고 좋은 말은 전파하여 숨기지 않아서 그의 드넓은 도량과 밝은 지혜 또한 이와 같으니 어느 누가 기꺼이 선을 말해주지 않겠는가. 兩端이란 갖가지 다른 의논의 극치를 말한다. 모든 사물에는 두 끝이 있게 마련이니, 작고 크고 두텁고 얇은 유와 같다. 선한 가운데에서도 두 끝을 잡아 이를 헤아려 중도를 취한 뒤에 쓰니, 선택한 바 자세하고 행한 바 지극하다. 그러나 나에게'한 치의 오차마저도 없는' 지극히 정밀한 마음의 저울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어떻게 이처럼 할 수 있겠는가. 이는 過·不及이 없는 지혜로서 도를 행할 수 있는 바이다.
여기에서는 순임금의 지혜에 대한 찬사와 아울러 兩端用中에 대해서 논하고자 한다. 『韓非子』(「說林 上」)에 의하면, 管仲이 제환공을 도와 정벌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을 때 늙은 말의 지혜를 빌어서 길을 찾았고, 隰朋은 산중에서 물을 찾을 때 개미의 지혜를 빌어서 우물을 얻은 바 있다. 이처럼 관중의 슬기로움과 습붕의 지혜로써도 그들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주저 없이 늙은 말과 개미의 지혜를 스승으로 삼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은 줄도 모르고 성인의 지혜를 본받을 줄 모른다고 개탄하고 있다. 舜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舜은 본디 지혜로운 자임에도 천하 사람의 지혜를 수렴하여 한 사람의 지혜로 삼고 자신의 지혜를 쓰지 않았으니, 이 점이 그의 지혜가 더욱 위대하게 된 까닭이다. 만일 자신이 소유한 지혜에만 국한되었다면 그의 지혜는 무궁하지 못했을 것이다."80) 이렇듯 성인은 자신의 슬기로움을 잊고서 他人의 지혜를 수용함으로써 더욱 성인다울 수 있었던 데 반해서, 어리석은 이는 제 스스로 잘난 척하느라 타인의 지혜를 시기하고 질투함으로써 어리석음이 더욱 어리석음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로 보면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은 선천적 기질이라기보다 후천적 생활 습관에 관계되는 바가 지대함을 알 수 있다. 兩端을 취하여 중도를 쓴다는 것은 모든 것을 포괄해서 그 극치를 선택하여 사용한다는 것이지, 그 중간을 억지로 꺾어서 絶長補短을 하자는 것이 아니다. 중도는 곧 지극한 善, 즉 최고의 준칙을 말한다. 이를 자세히 논해보도록 하자. 인간의 행위에 중용을 요구한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그리고 그 누구에 의해서도 추구되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중용을 덕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중용이란 극단적인 데에 쏠리지 않는 '알맞음' 에 있으며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본문에서"그 兩端을 잡아서 그 中을 백성에게 쓴다"라고 말하였지만, 중용은 過·不及의 그 중간을 잡을 정도로만 하면 되는, 그처럼 단순하고 용이한 것이 결코 아니다. 만일 그 중간만을 취하는 것이라면 이는 자주성을 잃어버린 折衷主義 및 追從的 機會主義로서 맹자가 말한 '子莫執中'과 '鄕愿'에 상당하는 자이다. 이 때문에 본서에서는 "중용은 그 지극한 것이다"(제3장) 하였고 또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제9장) 말하기도 하였다. 본 『중용』은 至善의 中庸을 목표로 하여, 그 근본 문제에서 도를 추구하고 인간의 본질
80) 『大全』 朱子.
을 참구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자의 설을 덧붙여 설명을 돕고자 한다. "兩端이란 '……起 ……止(……에서 ……까지)' 두 글자를 말할 뿐이다. 이는 여기에서 저기까지를 말한다. 후한 데에서 박한 데까지, 큰 데에서 작은 데까지, 무거운 데에서 가벼운 데까지이다. 이와 같이 후박, 대소, 경중 가운데 가장 타당하고 적합한 말을 선택, 사용해야만 中이 되는 것이다. 만일 지극히 후하고 지극히 박한 것을 兩端이라 하여 그 중간을 꺾어서 이를 중용이라 한다면, 이는 맹자가 말하는 '子莫의 執中'인 셈이다. 그 중간이 어떻게 中이라 볼 수 있겠는가. 지극히 후히 해야 한다는 말이옳으면 이를 따라야 할 것이며, 박하게 하자는 말이 옳으면 이를 따라야할 것이다. 경중, 대소 또한 모두 이와 같다. 이처럼 오로지 지극히 타당한 것만을 따르는 것이다. 또 일례를 들면 어떤 공로가 있는 자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경우 어떤 이는 萬金의 상을, 다른 이는 千金을, 또 다른 이는 百金을, 또는 十金을 주어야 한다면서 衆論이 분분하다고 하자. 만금이란 매우 후한 것이고 십금은 아주 박한 것이다. 그 두 끝을 잡아 지극히 후한 데에서 지극히 박한 데에 이르기까지 마음속으로 厚薄의 중도를 저울질하여 마땅히 만금의 상을 내려야 한다면 만금의 상을 내려야 하고, 십금을내려야 한다면 다만 십금을 내려야 한다. 천금이나 백금의 경우도 모두 그와 같다. 만일 두 끝을 버리고 그 중간만을 취한다면 이 쪽은 지나치게 많고 저 쪽은 지나치게 적을 것이니, 이는 이른바 중용이 아니다." 『논어』에서 말한 兩端과 『중용』의 兩端에 대해서, 어떤 이가 朱子에게 물었다. "공자가 말한 兩端도 이와 같습니까?" "공자가 말한 '그 양끝을 다한다(竭其兩端)'라는 것은 정밀한 데에서 거친 곳에, 큰 것에서 작은 데에, 위에서 아래까지 조금도 미진한 바 없이 모두 말해준다는 뜻이지만, 『중용』의 '양 끝을 잡는다'라는 것은 타인에게서 선을 취함이다. 정밀한 데에서 거친 곳까지, 큰 것에서 적은 것까지를 총괄하여 하나의 선이라도 빠뜨림 없이 다하려는 것이다."81)
右는 第六章이라 위는 제6장이다.
이 장에서는 위 제4장의 賢, 不肖에 이어서 아래 제8장의 顔回에 관한 실마리를 일으킨 것이다. "나는 잘 안다[予知]"라고 두 차례 말한 것은 자부하는 말로서,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지 않은 순임금과 반대되는 일이다. 이 장의 문장 구성은 위 구절로써 아래 구절의 뜻을 일으키는 것으로, 『시경』의 興體(聯想法)에 해당된다. 위의 予知는 일처리[處事]로, 아래의 予知는 사리의 관조[燭理] 로 말한 것이다. 이익이 있는 곳은 곧 禍根이 잠복되어 있는 곳이기에, 그것이 곧 그물이요, 덫이요, 함정이다. 여기에서 말한 '擇乎中庸'의 擇자는 참으로 알고 선택한 것이 아닌 외형상[形迹]의 견해, 또는 偶合性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期月守也'의 守 자는 행하는 바를 지키지 못하여 과·불급의 偏差를 범한 것이다.
81) 같은 책, 朱子.
子曰 人皆曰予知로되 驅而納諸罟擭(화)陷阱之中而莫之知辟(避)也하며 人皆曰予知로되 擇乎中庸而不能期月守也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사람들은 모두들 내 알고 있노라고 말들 하지만 자신을 그물과 덫과 함정 속으로 몰아넣으면서도 피할 줄을 모르며, 사람들은 모두들 내 알고 있노라고 말들 하지만 중용을 가려서 한 달도 지키지 못한다."
도란 지혜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가 밝혀지지 못한 것 또한 어진 자는 지나치고 불초한 자는 미치지 못한 데에서 연유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들 "내 잘 알고 있노라"라고 말들 한다. 이는 화근이 잠복된 기미를 스스로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막상 앞을 다투어 그물과 덫과 함정 속으로 자신을 몰아넣으면서도 피할 줄 모른 채 험난한 길로 치달아 실패만을 겪고 있다. 이는 그들의 마음에 가린 바 있기 때문이다. 이를 어떻게 지혜로운 자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한 요즈음 사람들은 모두들 "내 잘 알고 있노라"라고 말들 한다. 이는 그들 스스로가 중용의 도리를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중용을 가려 만 1개월도 지키지 못한다. 이는 중용을 선택하여 참으로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의 앎이 지혜롭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를 어떻게 지혜롭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도가 밝혀지지 못하는 이유이다.
罟는 網也오 擭은 機檻也오 陷阱은 坑坎也니 皆所以掩取禽獸者也라 擇乎中庸은 辨別衆理하야 以求所謂中庸이니 卽上章好問用中之事也라 期月은 匝一月也라 言知禍而不知避로 以況能擇而不能守니 皆不得爲知也라
고는 그물이요, 확은 덫이요, 함정은 구덩이이니, 이는 모두 짐승을 속여서 동물을 잡는 기구들이다. 擇乎中庸은 이치를 분별하여 이른바 중용을 추구함이니, 이는 위 장의 "묻기를 좋아하고 중도를 쓴다"라는 일이다. 期月은 만 1개월이다. 이는 화를 알면서도 피할 줄 모른다는 것으로서, 능히 중용을 가려서 지키지 못한 것을 비유한 말이니, 이는 모두 지혜롭지 못한 일이다.
혹자는 "'人皆曰予知'의 予는 공자 자신을 말한다. 鄭玄 이후 모두가 '人皆……'의 人과 同格으로서 世人 자신을 말한 것으로 해석하였지만 잘못된 것이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논어』(「子罕」)의 "達巷黨人이 말하기를'위대하다! 공자시여. 박학은 하였지만 하나의 명성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達巷黨人曰 大哉孔子, 博學而無所成名)", "大宰가 자공에게 묻기를 '공자는 성자이신가?! 어쩌면 그렇게 능한 것이 많은지……'(大宰問於子貢曰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라는 두 구절을 인용하여 당시 세인들의 공자에 대한 정평은 博學多能임을 밝히고, 그를 근거로 이 장의 내용을 '<그러한 정평 때문에> 世人들은 <나(공자)를 아는 사람[予知]>이라고 말하지만 나(공자)는 실로 함정, 즉 부정과 불의에 빠지면서도 피할 줄 모른다'라는 뜻의 謙辭와 아울러 自省自戒의 변으로 해석하였다. 이어서 공자의 自謙에 의한 노력을 밝히고자 『논어』(「子罕」)의 "공자가 말하기를 '나에게 아는 게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아는 게 없다. 鄙夫가 나에게 묻되 그가 아무런 것이 없이 텅텅 비어 있는 자일지라도 나는 양 끝을 두드려 빠뜨림 없이 다 말해주었다'(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 竭焉而已矣)"라는 단락을 인용하면서, 博學과 多能에 대한 世評을 부정하고자 '人皆曰予知' 구절을 중복해서 말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아래 구절 또한 위와 같이 自謙과 自省의 말로 동일시하였다. 이는 다소 천착된 감이 없지 않으나 일설로서 참고를 위해서 수록한 것임을 밝혀둔다.
右는 第七章이라 承上章大知而言이요 又擧不明之端하야 以起下章也라위는 제7장이다. 위 제6장의 큰 지혜를 이어 말하였고, 또한 도가 밝혀지지 못한 이유를 들어서 아래 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 장에서는 도를 행하는 것[行道]을 주로 하여, "가슴에 간직한 채 잃지 않았다[服膺弗失]"라는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爲人에는 명철함과 굳건함[明健]의 뜻이 포함되어 있으며, 아래 구절은 곧 '그 사람 됨됨이[爲人]'의 실상을 말하고 있다. '중용을 선택함'은 지극히 밝은 자가 아니면 그 기미를 살필 수 없고, "하나의 선을 얻으면 이를 가슴에 간직한 채 잃지 않았다"라는 것은 지극히 굳건한 자가 아니면 그 결단을 명백히 할 수 없다. '중용을 선택함'을 뒤이어서 선을 얻음이 있고, 선을 얻음을 뒤이어서 굳건히 이를 지켜야 하므로, 이의 主旨는 '得一善則拳拳服膺'의 則 자에 있다. 하나의 선을 얻으면 이를 고이 가슴에 간직한다는 것은 이를 지체 없이 받아들인다는 말임과 동시에 위 장의 '1개월도 지키지 못한다'라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중용을 선택함은 어진 자의 지나침[賢者過之]이 아니며, 잘 지킨다는 것은 불초자의 미치지 못함 [不肖者不及]이 아니다.
子曰 回之爲人也 擇乎中庸하야 得一善則拳拳服膺而弗失之矣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안회의 사람 됨됨이는 중용을 가려서 하나의 선을 얻으면 이를 고이 받들어 가슴에 간직한 채 잃지 않았다."
이는 위 제7장을 이어서 도가 밝혀지지 못하므로 반드시 안회와 같이 仁을 행해야 도를 밝힐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당연한 바의 도리는 마음에 갖추어져 있다. 안회는 어떤 일을 대하든지 반드시 천리에 합당하느냐 않느냐를 정밀하게 분별하여 중용을 추구하고, 선택한 바에 따라서 하나의 중용의 선을 얻으면 이를 몸소 실천하여 가슴 속 깊이 간직하기 때문에 이를 다시는 잃지 않았다. 안회는 이처럼 선택할 줄도, 지킬 줄도 알았다. 아! 세상에 안회처럼 실행하는 자가 있다면 도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回는 孔子弟子 顔淵名이라 拳拳은 奉持之貌라 服은 猶著也요 膺은 胸也니 奉持而著之心胸之間이니 言能守也라 顔子 蓋眞知之라 故能擇能守 如此하니 此는 行之所以無過·不及而道之所以明也니라
회는 공자의 제자 안연의 이름이다. 拳拳은 받들어 높이는 모양이다. 服은 붙인다는 뜻과 같으며, 膺은 가슴이니, 이를 받들어 마음에 새김이니, 잘 지킴을 말한다. 안자는 참으로 알았기에 이와 같이 잘 가리고 지킬 수 있었다. 이는 행하는 데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으로 도가 밝혀지게 된 이유이다.
顔子의 字는 子淵이다. 노나라 사람이며 공자보다 30세가 적지만 安貧樂道로서 학문을 즐겨 공자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아왔었는데, 불행스럽게도 단명하여 공자 이전에 죽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喪하였다"82)라고 한탄하기도 했다. 증자는 안연에 대해서 "능하면서도 능치 못한 이에게 묻고, 많으면서도 적은 이에게 묻고, 있어도 없는 듯이 하였고, 꽉 차 있어도 비어 있는 듯이 하였다……"83)라고 평하였다. 후세에 亞聖으로 불리고 있다.
右는 第八章이라 위는 제8장이다.
이 장에서는 중용을 능하기 어려우므로 용맹으로써 지혜[知]와 仁을 보완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위 세 구절[天下……可蹈也]은 지극히 어려운 일을 가볍게 언급하였지만, 세 가지 모두가 꼭 어려운 일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용은 그에 비해서 훨씬 더 어렵기 때문이다. '천하를 고루 다스림'이 지혜와
82) 『논어』 「子罕」. 83) 같은 책, 「泰伯」.
가깝다는 것은 도리에 합당한지 않은지를[當理 不當理] 아랑곳하지 않은 채 무조건으로 해결해 나가는 것이며, '벼슬과 녹을 사양함'이 仁에 가깝다는 것은 사양해야 할지 않을지를[當辭 不當辭] 묻지 않은 채 전혀 취하지 않는 것을 결백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흰 칼날을 밟음'이 용맹에 가깝다는 것은 목숨을 바쳐야 할지 않을지[當死 不當死]를 생각지 않은 채 오로지 삶을 가벼이 여기는 것을 용맹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중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은 불가능한 도리임을 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를 능히 하지 못한 점을 탄식한 것이다. 『장구』의 '義精……' 이하 세 구절은 아래 장 勇 자의 뜻을 포괄하고 있다.
子曰 天下國家도 可均也며 爵祿도 可辭也며 白刃도 可蹈也로되 中庸은 不可能也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천하와 국가도 고루 다스릴 수 있으며, 벼슬과 녹도 사양할 수 있으며, 흰 칼날도 밟을 수 있으나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
이는 위 제9장을 이어서, 지혜는 반드시 순임금과 같아야 도를 행할 수 있고, 仁은 안회와 같아야 도를 밝힐 수 있기에, 중용이란 이처럼 능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말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였다. 매우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천하와 국가지만 지혜에 가까운 자질을 가진 자가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데 힘쓰면 고루 다스릴 수 있으며, 매우 사양하기 어려운 것이 벼슬이지만 仁에 가까운 자질을 가진 자는 이를 사양할 수 있으며, 매우 밟아 나가기 어려운 것이 흰 칼날을 밟는 일이지만 용맹에 가까운 자질을 가진 자라면 이를 밟아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중용의 이치란 지나쳐서도 미치지 못해서도 안 된다.
조금이라도 사사로운 생각이 있으면 중용의 도를 가리게 되어 이를 지키려고 생각하는 찰나에 벌써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잘못을 범하게 되고, 또한 스스로 이런 잘못을 범한 줄조차 모르게 된다. 이는 애써 행하려고 한다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용을 능하고자 한 자는 自强의노력이 없어서는 안 된다.
均은 平治也라 三者는 亦知仁勇之事이니 天下之至難也라 然皆倚於一偏이라 故資之近而力能勉者는 皆足以能之어니와 至於中庸하야는 雖若易能이나 然非義精仁熟而無一毫人欲之私者면 不能及也라 三者는 難而易로되 中庸은 易而難이라 此民之所以鮮能也라
均은 균평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세 가지 또한 지혜와 어짊과 용맹의 일이니, 천하에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모두 한 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그에 근사한 바탕을 지니고서 힘껏 노력하는 자라면 모두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중용에 이르러서는 쉽사리 능히 할 것 같으면서도 의리가 정밀하고 仁이 익숙하여 한 터럭 끝만큼도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는 자가 아니면 미칠 수 없다. 이 때문에 세 가지는 어려우면서도 쉽지만 중용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이것이 중용을 능히 행하는 사람이 적은 이유이다.
右는 第九章이라 亦承上章하야 以起下章이라 위는 제9장이다. 이 또한 위 장에 이어서 아래 장을 일으킨 것이다.
이 장에서는 勇의 일을 논하여 중용의 능히 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학자의 입장에서 스스로 강해야 할 일이다. 남쪽과 북쪽지방에서는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을 강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모두 그 지역에 따른 風氣의 偏向에서 연유한 것이다. 군자는 자신을 극복하는 것으로 강함을 삼는데, 이는 순수한 의리의 정도를 주로 하는 것이기에, 본 장은 「和而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강함에 대해서 물은 것은 자로에게 지나치게 굳세고 굳센 기상[行行氣象]이 남아 있는 것이지만, 道를 담당하고자 하는 사명의식이 또한 투철한 것이다.
子路 問强한대자로가 강함에 대해서 물으니.
이는 위 제9장에 이어서 말한 것으로, 중용이란 능히 할 수 없는 것이기에 반드시 공자가 자로에게 말한 용맹을 갖춘 뒤에야 이를 능히 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 것이다. 옛적에 자로는 용맹을 좋아하여 공자에게 강함에 대하여 물은 바 있다. 그러나 그는 혈기의 强이 있는 줄만 알았을 뿐, 德義의 용맹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하였다.
子路는 孔子弟子 仲由也라 子路好勇이라 故問强이라
자로는 공자의 제자, 仲由이다. 자로는 용맹을 좋아했던 까닭에 강함을 물은 것이다.
자로는 공자보다 9세가 적은 제자로서 과단성이 있는 성격과 행정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공자는 그에 대해서 "짤막한 말로써 獄辭를 결정지을 수 있는 자는 자로뿐이다"84)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의 결점은 용맹이 지나치다는 점인데, 결국은 그 때문에 衛國의 내란에 휩쓸려 전사하고 말았다. 공자는 그의 죽음을 듣고서 "아아 하늘이 나의 운명을 예시해주는구나!"85)라고 통탄해 하였다. 자로는 공자의 말에 복종하여 "말을 듣고서 행하지 못하여서 또 다른 말을 들을까 두려워했고,"86) 또한 "자로는 남들이 잘못을 말해주면 기뻐하여"87) 학문에 힘썼다. 안연은 독실하고 겸허한 求道者임에 반해서 자로는 열렬한 실천자이다. 이 두 사람은 공자의 양면을 대표하는 제자들이다.
이는 먼저 각기 다른 세 가지 강함의 명제를 내세워 세 개의 與(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자를 통하여 자로 스스로에게 그 어떤 것을 물었는가를 살피게 하는 뜻이지, 詰問은 아니다. 抑('抑'而强與) 자는 위 글을 반전시키는 말이며, 너의 강함[而强]에 중점을 두고 있다. '而强' 구절
84) 같은 책, 「顔淵」. 85) 『公羊傳』 哀公 14年傳. 86) 『論語』 「公冶長」. 87) 『孟子』 「公孫丑 上」.
또한 자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강함을 말한 것으로, 문장의 오묘함을 느낄 수 있다.
子曰 南方之强與아 北方之强與아 抑而强與아
공자가 그에게 답하였다. "남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북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아니면 너의 강함을 묻는 것인가?"
이에 공자는 자로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강함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먼저 이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네가 생각하는 강함이란 風氣에 얽매인 남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북방의 강함을 말하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또한 남방과 북방의 풍기에 얽매이지 않는 네가 소유한 강함을 말하는가?
抑은 語辭오 而는 汝也라 抑은 어조사(反語詞)요, 而는 너(제2인칭)이다.
이는 거듭 남방의 강함에 대하여 논한 구절이다. '寬柔, 不報'는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사람을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남들이 대들어도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誨人不倦 犯而不校]"88)라는 공자, 안연의 말과는 다르다. 여기에서는 군자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가벼운 뜻으로 쓰고 있다.
88) 『論語』 「泰伯」
寬柔以敎오 不報無道는 南方之强也니 君子 居之니라
너그럽고 부드러움으로 가르치고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음은 남방의 강함이니, 군자들이 사는 곳이다.
남방의 강함으로 말하면, 사람에게 미치지 못한 점이 있어도 지나치게 꾸짖지 않고 너그러움과 부드러움으로 그의 미치지 못한 잘못을 가르치고 이보다 더 심한 경우 곧 설령 나에게 횡포를 부린 자라 할지라도 그를 포용하여 그의 무도한 처사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는다. 이는 남방의 풍기가 유약하여 참고 견디는 힘이 남보다 뛰어난 것을 강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忠厚한 도에 가까우므로 군자, 즉 점잖은 이들이 사는 곳이다. 하지만 남방의 강함은 중도에 미치지 못한 것이기에 네가 강해야 할바가 아니다.
寬柔以敎는 謂含容巽順하야 以誨人之不及也오 不報無道는 謂橫逆之來에 直受之而不報也라 南方은 風氣柔弱이라 故로 以含忍之力勝人爲强하니 君子之道也라
너그럽고 부드러움으로 가르친다는 것은 포용하여 유순하게 타인의 미치지 못한 점을 가르쳐주는 것이며, 무도한 자에게 보복하지 않는다는 것은 횡포를 부릴지라도 이를 받아들이고 보복하지 않는 것이다. 남방은 풍기가 부드럽고 나약하므로 포용과 인내가 남보다 뛰어남을 강함으로 여기니, 이는 군자의 도이다.
이는 거듭 북방의 강함에 대해서 논한 구절이다.
남방이라 하여 어찌 과감한 사람이 없겠으며 북방이라 하여 어찌 포용하고 참는 자가 없겠는가. 이 또한 지방 풍기의 大槪를 들어 말했을 뿐이다.
衽金革하야 死而不厭은 北方之强也니 而强者 居之니라
무기와 갑옷을 깔고 누워 죽을지라도 싫어하지 않는 것은 북방의 강함이니, 강한 자들이 사는 곳이다.
북방의 강함으로 말하면, 창칼이며 투구 따위의 흉기를 스스럼없이 생각하여 창칼을 들고 투구 따위를 입고서 설령 전쟁터에서 이 무기에 의하여 죽을지라도 싫어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이는 북방의 풍기가 강경하여 과감한 힘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강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혈기의 용맹에 관계되므로 오로지 강한 자만이 살 수 있는 곳이다. 이는 중도를 지나친 강함이므로 네가 강해야 할 바가 아니다.
衽은 席也오 金은 戈兵之屬이오 革은 甲冑之屬이라 北方은 風氣剛勁이라 故로 以果敢之力勝人爲强하니 强者之事也라
衽은 자리를 하다(깔다, 눕다. 형용동사로 쓰임)는 뜻이요, 金은 창, 병기의 속이며, 革은 갑옷, 투구 따위이다. 북방의 풍기는 강경하므로 과감한 힘이 남들보다 뛰어난 것을 강함으로 여기니, 강한 자의 일이다.
남방 또는 북방의 强함이란 『春秋繁露』(「循天之道」)에 "북방에서는 陰을 쓰는 것이 타당하니, 物이 처음으로 아래에서 동하기 때문이다. 남방에서는 陽을 쓰는 것이 타당하니, 양육된 것이 처음으로 위에서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여 『중용』에 비해 발전된 관념으로써 남방, 북방의 方位觀을 정립하였고, 그 후 『논어』(「子路」)의 '南人'에 대한 唐 孔穎達의 『正義』 주석에서는 남방의 토지, 북방의 토지의 氣風(氣候)으로 이를 해석하였다. 그리고 淸 宋翔鳳은 『四書纂言』(「中庸」)에서 『老子』의 "천하에 지극히 유약한 것[至柔]으로써 천하에 지극히 강한 것[至强]을 다스린다"(제43장) 라는 구절과 "원수를 덕으로써 갚는다[報怨以德]"(제63장)라는 구절을 인용, "寬柔以敎 不報無道"에 해당시켜 남방은 노자의 가르침 때문이며, 墨家는 義俠을 중시하므로 북방은 묵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서경』 「皐陶謨」에서는 "너그럽되 씩씩하고 부드럽되 자립해야한다" 하였고, 『荀子』(「不苟」)에서는 "너그러우면 게으르게 되고" "부드러우면 휩쓸리게 된다"라고 한 말로써 살펴보면 寬柔란 儒家에서 귀중히 여겨온 말이 아니다. 단지 사람을 다스리는 데 대한 덕으로 발전되어 온 것이지, 노자가 말한 柔弱의 의미는 아니며, 不報無道를 報怨以德으로 해석한 것 또한 儒家의 말이 아니다. 『맹자』를 살펴보면 "여기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나에게 횡포를 부리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반성하여 나에게 예의가 미진함이 있는가를 살펴보지만……, 그래도 여전하면 군자는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정신이 없는 妄人이다. 그 같은 사람은 금수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금수에게 어떻게 논란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다. 이 때문에 군자는…… 하루아침의 횡포를 근심하지 않는다"89) 하며, 『순자』에서는 "모든 싸움에 있어서 사람들은 자기가 옳고 남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 자신이 옳고 타인이 잘못되었다면 자신은 군자요 타인은 소인이다. 군자가 소인과 서로 다투어 해를 당하면 자신을 망각하게 될까 두렵다. 안으론 부모를 잊고 바깥으론 군주를 망각함이니, 어찌 너무 심하게 다툴 것이 있겠는가"90)라는 구절로 보면, 不報無道란 道家的 報怨以德의
89) 「離婁 下」. 90) 「榮辱篇」.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거듭 强에 대해 해석한 것인데, 네 단락으로 나누어서 오늘날 반드시 네가 행해야 할 일을 말해주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군자로서 힘써야할 일이 바로 자로가 강하게 행해야 할 道義의 용기를 가르쳐준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과의 대인관계[和而不流], 자신의 확고부동한 입지['中立而不倚'], 벼슬에 임하여 부귀를 탐닉하지 않는 지조['不變塞焉'], 곤궁하여도 끝까지 변치 않는 절개['至死不變'] 등 네 가지를 대등한 관계로 보았다. '强' 자의 의미는 모두 네 곳의 "不[和而'不'流, ……中立而'不'倚, …… '不'變塞焉, ……至死'不'變]" 자에 있으며, 矯는 矯然 勍直함을 표현한 형용사로서 강함에 대한 찬사이다. 和는 남다른 것을 내세워서 고상하게 돋보이려고 하거나 또 너무나드높은 기개 때문에 타인과의 교유가 원만하지 못함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는 분명한 한계와 굳건한 의지의 결속력이 있어야만이 그들과 함께하면서도 더불어 휩쓸리지 않는다. 때문에 和란 柔德이요 中立이란 剛德이다. 그러나 和는 쉽사리 남들에게 휩쓸려 갈 수 있는 소지가 없지 않지만, 中立은 곧 그 자체가 치우치지 않는 것[不倚]인데 어째서 다시 不倚를 말한 것일까? 그것은 나약한 중립이란 굳건한 결속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오랜 시간이 흐르면 반드시 한쪽으로 치우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而(和'而'……, 中立'而'……) 자는 逆接의 의미로 쓰인 轉語이다. 和와 中立 그 자체를 강한 것이라 말할 순 없다. 때문에 반드시 '不流' '不倚'가 있어야만 이를 강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不變塞은 부귀를 누리면서도 음탕하지 않음을 말하며, 至死不變은 빈천하여도 절개를 변하지 않음을 말한다. 不變塞焉은 이미 벼슬에 나간 뒤이므로, 주자의 『장구』에서 '未達……'이라 말하였고, 至死不變은 벼슬에 나가지 않은 것이기에 『장구』에서 '平生……'이라 말했을 뿐이다. 이 모두가 成德 이후의 경지로서, 勇은 사사로운 욕심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 근본을 두고 해석한 글이다.
故로 君子는 和而不流하나니 强哉矯여 中立而不倚하나니 强哉矯여 國有道에 不變塞焉하나니 强哉矯여 國無道에 至死不變하나니 强哉矯여
그러므로 군자는 많은 사람들과 잘 어울리면서도 함께 휩쓸리지 않으니, 강하고 꿋꿋함이여! 중립으로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니, 강하고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있을 때는 벼슬하지 않아 어려웠을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고 꿋꿋함이여! 나라에 도가 없을 때는 죽음에 이르도록 절개를 변하지 않으니, 강하고 꿋꿋함이여!"
그러므로 군자에게는 그 나름대로의 義理의 强함이 있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는 까다롭지 않은, 평이한 성품으로 융화하여 잘 어울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함께 어울리다 보면 쉽게 휩쓸리기 마련이다. 군자는 사람과 접촉할 때에 까다롭게 굴지 않고 융화하여 함께 잘 어울리면서도 스스로 바른 도리를 지키기에 도리를 저버리면서까지 무분별하게 휩쓸리지는 않는다. 이는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도리에 따라서 자신을 극복하고 자아를 지키는 일이니, 이 또한 강함이 아니겠는가. 아 강하고 꿋꿋함이여! 자기의 처신에 있어서는 중립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립은 쉽사리 치우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중립에 처하되 변함없는 떳떳함을 지키며 세속과 함께하면서도 치우치지 않는다. 이는 자신이 처할 도리에 따라서 자신을 극복하고 자아를 지키는 일이니, 이 또한 강함이 아니겠는가. 아 강하고 꿋꿋함이여! 벼슬하여 뜻을 얻으면 으레 지난날 지켜오던 지조를 잃기 십상이다. 그러나 도가 있는 나라에 벼슬하여 도를 베풀어 한 시대를 구제했을지라도 교만하거나 자만해 하지 않고 벼슬하기 전에 지켜오던 지조를 변하지 않는다면, 벼슬에 임해서도 도리에 따라서 자신을 극복하고 자아를 지키는 일이니 이 또한 강함이 아니겠는가. 아 강하고 꿋꿋함이여! 곤궁하여 어려울 때에는 으레 끝까지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변절하기 일쑤이다. 군자가 무도한 나라에 살면서 의리를 지키고 천명에 편안해하며 설령 죽음에 이르는 고난을 겪을지라도 일평생 지켜온 절개를 변치 않는다면, 이는 곤궁한 시대에 살면서도 도리에 따라서 자신을 극복하고 자아를 지키는 일이니, 이 또한 강함이 아니겠는가. 아 강하고 꿋꿋함이여!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군자로서의 강한 일이니, 네가 마땅히 힘써야할 일이다. 공자가 자로에게 일러준 말이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학자 또한 이 뜻을 따라서 스스로 강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한다면 중용 또한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此四者는 汝之所當强也라 矯는 强貌니 詩에 曰矯矯虎臣이 是也라 倚는 偏著也오 塞은 未達也라 國有道에 不變未達之所守하고 國無道에 不變平生之所守也니 此則所謂中庸之不可能者라 非有以自勝其人欲之私이면 不能擇而守也라 君子之强이 孰大於是리오 夫子 以是告子路者는 所以抑其血氣之剛而進之以德義之勇也니라
이 네 가지는 네가 마땅히 강하게 힘써야 할 바이다. 矯는 강한 모양이니, 『시경』의 "범처럼 강하고 강한 신하"91)라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倚는 한편으로 치우침이요, 塞은 뜻을 이루지 못함(벼슬하지 못함)이다. 나라에 도가 있어 벼슬할 때에는 벼슬하지 않았을 때 지켜온 지조를 변치 않고, 나라에 도가 없어 은거할 때에는 일생 동안 지켜온 절개를 변치 않으니, 이는 이른바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인욕의 사사로움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면 중용을 선택하여 지키지 못할 것이다. 군자의 강함 그 어느 것이 이보다 더 클 수 있겠는가. 공자가 이 말로써 자로에게 일러 준 뜻은 그에 혈기의 강함을 억누르고 덕과 의리의 용맹으로 나아가도록하려는 것이다.
공자는 일찍이 "仁者는 반드시 용맹스럽지만 勇者는 반드시 仁이랄 수 없다"92) 하여 勇을 제일의 덕목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공자는 항상 자로의 용기를 자부하는 경향을 억제하고 도의의 덕을 강조하여 왔다. "자로가 공자에게 묻기를 '군자는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의리를 으뜸으로 삼는다. 군자가 용맹스럽되 의리가 없으면 亂을 일으키고, 소인이 용맹스럽되 의리가 없으면 도적질을 하게 된다'라고 하였다."93) 그러나 공자는 또한 "智者는 의혹이 없고 仁者는 근심이 없고 勇者는 두려움이 없다"94)라고 하여 『중용』의 三達德(知仁勇)을 중시하였는 바, 자로의 과단성 있는 용기에 기대하는 마음 또한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91) 「魯頌·泮水」. 92) 『論語』 「憲問」. 93) 같은 책, 「陽貨」. 94) 같은 책, 「子罕」.
右는 第十章이라 위는 제10장이다.
『논어』에 "공자가 안연에 대해서 '그를 등용하면 도를 행하고 세상이 그를 버리면 도를 감추는 것은 오직 나(공자)와 너(안연)뿐이다'라고 말하자, 자로는 <그 말을 듣고서 자신의 용기를 자부하여> '선생님께서 三軍을 거느리고 나간다면 누구와 함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맨몸으로 河水를 건너며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 자와는 나는 함께하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모의하기를 좋아하는 자와 함께할 것이다'" 하였는데,95) 본문 또한 이와 같은 기풍을 지니고 있다. 본서 제8장에서 안연의 중용에 대한 칭찬의 말을 들은 자로가 자신의 장점인 용기를 내세워 强함을 물은 것은, 『논어』에서 자로가 안연의 行藏에 대한 찬사의 말을 듣고서 三軍을 물은 것과 매우 일치되고 있다. 그러나 안연과 자로는 공자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한 양대 제자로서 마치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자로가 안연의 중용을 칭찬하는 말을 듣고 무익한 경쟁심을 내어 强에 대해 묻자, 공자는 제자 사이의 切磋琢磨 기풍을 진작시켜 자신의 결점을 반성, 보완하도록 유도해주고 있다.
95) 「述而」.
이 장에서는 위 제10장을 이어서 知仁勇을 종합하여 끝맺고 있다. 첫 절에서는 知行이 지나침을, 다음 절에서는 知行이 미치지 못함을, 끝 절에서는 중용의 成德을 말하고 있으니, 이 장의 주된 뜻은 끝 절에 있다. 이는 제2장의 '君子中庸'에 상응하며, 두 곳의 吾('吾'不爲……, '吾'不能……) 자는 자신을 빌려 이 뜻을 밝힌 것일 뿐, 자신의 경지를 서술한 말은 아니다.
본 절에서는 도란 지나치게 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後世有述의 述 자에는 隱僻한 이치를 탐구하고 괴이한 행동을 추구하여 명예를 좋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後世라고 말한 것은 먼 훗날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에도 이처럼 새롭고 기이한 데 현혹되기 쉽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章句大全』에 "당시의 사람들까지 포괄하여 말한 것"이라는 饒氏의 설을 따를 필요가 없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吾不爲]"라는 말은 은연중 중용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子曰 素(索)隱行怪를 後世에 有述焉하나니(이로되) 吾弗爲之矣로라
공자는 말하였다. "은벽한 이치를 탐색하고 괴이한 행동을 행하는 자를 후세에 일컫는 자가 있겠지만 나는 이런 일은 하지 않으리라.
자사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 여러 장의 뜻을 끝맺었다.
천하의 도리란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인데, 오늘날 或者는 앎을 추구함에 있어서 굳이 보이지 않는 은벽한 이치를 강구하여 남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려고 한다거나, 행함에 있어서 굳이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을 하여 남들이 행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려 하는데, 이것은 술수로써 세인의 이목을 속여 명예를 도적질하려는 마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사람들에겐 평범한 것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기에 후세에 그를 일컫는 자도 있지만, 이는 중용에서 지나친 잘못으로 마땅히 행해서는 안 될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다. 나는 차라리 후세에 이름을 남기지 않을지언정 은벽한 이치를 추구하거나 괴이한 행동을 하는 일만은 하지 않을 것이다.
素는 按漢書에 當作索이니 蓋字之誤也라 索隱行怪는 言深求隱僻之理而過爲詭異之行也라 然以其足以欺世而盜名이라 故後世에 或有稱述之者라 此는 知之過而不擇乎善이오 行之過而不用其中이니 不當强而强者也라 聖人이 豈爲之哉리오
素는 『漢書』를 살펴보건대 마땅히 索 자로 써야 하니, 이는 오자이다. 索隱行怪는 은벽한 이치를 깊이 탐구하고 지나치게 괴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세인을 속이고 명예를 도적질할 수 있기에 후세에 간혹 이를 일컫는 자가 있다. 이는 앎이 지나쳐 선을 가리지 못하고 행함이 지나쳐 중도를 쓰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해서는 안 될 곳에서 강하게 한자이다. 성인이 어찌 이런 일을 하겠는가.
본 절에서는 도란 본디 미치지 못한 바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遵道 구절은 행함은 앎에서 비롯됨을 말하며, 半途 구절은 앎 또한 행함으로 인하여 끝까지 다다른 자가 적음을 말하며, "나는 그처럼 그만두지 않겠다[吾不能已]"라는 것은 스스로 멈출 수 없음을 표명한 말이다.
君子 遵道而行하다가 半途而廢하나니 吾弗能已矣로라
군자는 도를 따라 행하다가 중도에서 쓰러지나니, 나는 그처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중용의 도는 끝없이 장구하여 그침이 없다. 만일 힘써 노력하는 군자가 중용의 도를 선택하여 이를 따라 행하다가 힘이 부족하여 중도에서 그만둔다면, 이 또한 중용에 미치지 못하는 잘못으로서 마땅히 그쳐서는 안 될 곳에서 멈춘 자이다. 나는 행하면 반드시 끝까지 이를 것이며 중도에서 그치지 않으리라.
遵道而行은 則能擇乎善矣오 半途而廢는 則力之不足也니 此는 其知雖足以及之니 而行有不逮니 當强而不强者也라 已는 止也라 聖人은 於此에 非勉焉而不敢廢라 蓋至誠無息하야 自有所不能止也니라
도를 따라 행함은 선을 잘 선택함이며, 중도에서 쓰러짐은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앎은 비록 미쳐갔지만 행하는 바 미치지 못함이니, 마땅히 강하게 할 바에 강하지 못한 자이다. 已는 그침이다. 성인은 이러한 일에 있어서 굳이 힘을 써서 감히 중도에서 멈추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아니다. 지극한 진실로서 쉼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그침이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남은 힘이 있음에도 그만둔다는 自劃과 가다가다 힘이 다하여 도중에 쓰러져 죽어간다는 半途而廢에 대해서 개술하고자 한다. 흔히 半途(中途)而廢의 廢 자를 그만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만둔다는 것은 餘力이 있으나 스스로 포기한다는 의미로서, 『장구』의 "半途而廢, 則力之不足也"라는 말과 위배된다. 노력해서 더 나아갈 수 없을 때까지 힘을 다했지만 더 나아가지 못하고 중도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것을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이지, 餘力이 있음에도 스스로 포기해서 그만두는 것은 힘의 부족함이 아니라, 의지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스스로의 한계를 설정지어 버리는 自劃이다. 이와 같이 廢 자는 斃의 假借로 쓰인 글자이다. 『예기』(「表記」)에는 "군자는 도를 향하여 행하다가 중도에서 쓰러지는 것이다. 자신의 늙음도 망각하고 나이의 부족함도 잊은 채 오직 힘쓰며 날로 부지런히 하여 죽은 뒤에 그만두는 것이다(君子 嚮道而行, 中道而廢. 忘身之老, 不知年數之不足也, 勉焉日惟孜孜, 斃而后已)"라고 하였고, 『논어』(「雍也」)에서는 "염구가 말하기를 '夫子의 도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제 힘이 부족합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힘이 부족한 자는 中道에서 廢하는 것인데, 오늘날 너는 스스로가 劃한 것이다' 하였다"라고 했는데, 張南軒의 『論語解』에서는 "中道에서 廢한다는 것은 『중용』의 半途而廢와 같다. 선비는 성인을 배우는 것이다. 불행스럽게 죽음을 맞을 때 그만두는 것이니, 이것을 힘의 부족함이라 말한다. 그러나 스스로가 그치는 것은 모두 스스로의 劃이다. 劃이란 이에 그쳐 스스로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음을 말한다"라고 해석하여, 餘力이 있음은 半途而廢가 아니라는 점을 밝혀 自劃과 廢의 克明한 차이점을 말해주었다.
의지하다[依]는 말은 따르다[遵]는 말과는 다르다. 遵은 힘써 노력하는 作爲가 있으나, 依는 자연스러운 경지를 말한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依'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그의 몸에서 잠시도 도가 떠나지 않을 것이며, 戒懼 愼獨의 공부를 모두 가지게 된다. 본 절의 '후회하지 않는다[不悔]'라는 것과 『논어』(「學而」)의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부화내지 않는다[不慍]'라는 것은 차이가 있다. '부화내는 마음'은 나의 일은 옳고 남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기에 '부화내지 않음[不慍]'이란 스스로를 반성한 것임에 반해서, 후회[悔]한다는 것은 타인의 말과 의견을 따라서 자신의 고집을 잊은 것이기에 '후회하지 않음 [不悔]'이란 스스로의 절대적 확신을 말한다. 唯聖 구절은 찬사이다. 唯 자는 남들이 미칠 수 없는 唯一性을 가지고 있다. 能 자는 자연스러운 경지를 뜻한다. 『장구』에서 "굳이 용맹을 의뢰하지 않고서도 넉넉한 일이다" 하니, 이는 앎이 극진하고 仁이 지극한 가운데 용맹이 있다는 뜻이다.
君子는 依乎中庸하야 遯世不見知而不悔하나니 唯聖者아 能之니라
군자는 중용에 귀의하여 은둔한 생활로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는 오직 성인만이 능히 할 수 있다."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있는 것은 중용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도를 체득하여 쉼이 없는 군자는 은벽한 이치를 탐구하거나 괴이한 일을 행하지 않고 오로지 중용의 이치에 따라 앎을 추구하고 실행하고, 또한 중도에서 쓰러지지도 않으며, 설령 세상에서 은둔하여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변함없이 중용에 귀의하여 애당초 후회하는 마음이 없다. 이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함이 없는 것으로 천리와 인사에 극진히 다한 자이다. 그를 군자라 말해야 할까? 이는 극치의 경지에 이른 성인만이 능히 할 수 있다. 나(공자) 또한 지나친 지혜에 관한 일, 또는 중도에서 쓰러지는 일을 하지 않고 성인만의 경지에 가까워지려고 힘쓸 것이라는, 공자의 말을 살펴보면 앞에서 논급한 "중용의 도리를 능히 행한 자가 적은 지 오래이다." 또는 "중용은 능히 할 수 없다"라는 등은 모두 사람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중용의 지극한 준칙이다.
不爲索隱行怪면 則依乎中庸而已오 不能半途而廢라 是以로 遯世不見知而不悔也니라 此는 中庸之成德이니 知之盡이오 仁之至라 不賴勇而裕如者니 正吾夫子之事로되 而猶不自居也라 故曰 唯聖者能之而已라 하니라
은벽한 이치를 찾지 않고 괴이한 일을 행하지 않으면 곧 중용에 귀의함이요 중도에서 쓰러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은둔하여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중용의 成德이니, 앎이 극진하고 仁이 지극하므로 용맹을 의뢰하지 않고서도 여유가 있는 자이니, 이는 공자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임에도 오히려 자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오로지 성인만이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右는 第十一章이라 子思所引夫子之言하야 以明首章之義者 止此라 蓋此篇大旨는 以知仁勇三達德으로 爲入道之門이라 故로 於篇首에 卽以大舜顔淵子路之事로 明之니라 舜은 知也오 顔淵은 仁也오 子路는 勇也니 三者에 廢其一이면 則無以造道而成德矣리라 餘見第二十章이라
위는 제11장이다.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첫 장의 뜻을 밝힌 부분은 여기에 그치고 있다.
자사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첫 장의 뜻을 밝힌 부분은 여기에 그치고 있다. 이 책의 大旨는 知, 仁, 勇 三達德으로 도에 들어가는 문을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책의 첫머리에서 순임금·안연·자로의 일로 이를 밝힌 것이다. 순임금은 지혜요 안연은 인이요, 자로는 용맹이니,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라도 없으면 도에 나아가 덕을 이룰 수 없다. 나머지는 제20장에 나타나 있다.
이 장에서는 도란 어느 곳이든지 있음을 말하여 도는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뜻을 거듭 밝혀, 아래 여덟 장(제12~19장)의 강령을 삼으면서 費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費만을 말해도 隱의 뜻은 그 가운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첫 절에서는 전체의 뜻을 대변하였고, 제2절에서는 費의 충만함을 형용하였고, 제3절에서는 費의 유행을 가리킨 것이며, 끝 절에서는 이를 모두 종합하여 끝맺었는데, 도를 체득하였다는 뜻은 이 말의 밖에 담겨 있다.
군자에게 도를 귀결지어 말한 것은 나의 몸이 도에서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본장에서는 처음으로 군자가 도를 체득하여 費와 隱이 서로 떠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費而隱의 '而' 자에는 費가 '곧' 隱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君子之道는 費而隱이니라 군자의 도는 널리 쓰이고 있지만 그 본체는 보이지 않는다.
자사가 스스로 말하였다. 도란 하늘에 근본하고 있지만 모두 군자의 몸에 의해서 시행되는 것이기에, 이러한 이유에서 '군자의 도'라고 말한 것이다. 도는 일상생활에 있어서 마땅히 따라야 할 작용[用]인 바, 어느 곳이든 두루 충만하여 끝이 없다. 그러나 이처럼 널리 쓰이고 있지만 天命에 근원한 그 본체는 찾아보려고 해도 은미하여 보이지 않는다.
費는 用之廣也오 隱은 體之微也라
費는 작용의 광범함이요, 隱은 본체의 미세함이다.
道는 體用과 費隱을 모두 겸하고 있다. 費는 도의 用(有形有爲의 所當然)이며, 隱은 도의 體(無形無爲의 所以然)이기에 볼 수 없다. "어떤 이가 '形而下는 費, 形而上은 隱이다'라고 말한다. 形而下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며, 形而上은 실제로 그 사이에 유행하는 것으로 어느 물건이든지 갖추어져 있지 않음이 없으며, 어느 곳이든지 있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費란 그 가운데 나아가 말하며, 形而上은 시각, 청각으로 느낄 수 없으므로 隱이라 한다."96)
費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기에 아래로는 愚·不肖를, 위로는 성인과
96) 『大全』 朱子.
천지를 열거하였으며, 끝부분 네 구절[故君子~破焉]은 윗글에 이어서 말한 찬사이다.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알고 능히 한다는 것은 도의 전체에 있어서 만분의 일을 소유한 것임에 반하여, 성인으로서도 알지 못하고 능히 하지 못한다는 것은 전체 가운데에서 만분의 일이 부족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 알지 못하고 능히 하지 못한 것이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大本 大原에 원래 부족하거나 결여된 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성인과 愚·不肖를 대칭으로 말한 것이지, 부부를 대칭으로 말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성인 또한 부부이기 때문이다. '天地之大'란 만물이 이를 힘입어 비롯하고 발생되는[資始 資生], 일체 모든 것을 포괄하여 말하며, '有憾'은 만족할 수 없다는 뜻이므로 반드시 有 자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천지를 좋지 않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모든 '실을 수 있는[載]' 것은 반드시 밖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道란 밖이 없기에 '실을 수 없다[莫載]'라고 말한 것이다. 대체로 깨뜨릴 수 있는 물체는 반드시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도는 안이 없으므로 '깨뜨릴 수 없다[莫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부분은 『或問』의 '군자의 도'에 관한 부분을 참고하기를 바란다.
夫婦之愚로도 可以與知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知焉하며 夫婦之不肖로도 可以能行焉이로되 及其至也하야는 雖聖人이라도 亦有所不能焉하며 天地之大也에도 人猶有所憾이니 故로 君子 語大인댄 天下莫能載焉이오 語小인댄 天下 莫能破焉이니라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알 수 있지만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알지 못하는 바 있으며, 어질지 못한 부부로서도 행할 수 있으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비록 성인이라도 능히 할 수 없는 바 있으며, 크나큰 천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오히려 유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군자의'도'는 큰 것으로 말하면 천하로서도 이를 실을 수 없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천하로서도 이를 깨뜨릴 수 없다.
무엇으로써 費의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까? 어리석은 부부는 전혀 도를 모를 것처럼 보이지만 타고난 良知는 어리석은 사람이라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부부 간의 삶의 일부분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모두 아는 바 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성인은 모르는 게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도의 지극한 부분, 전체에 대해선 때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에 의한 耳目의 한계가 있기에 그로서도 또한 다 알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어질지 못한 부부는 도에 있어서 행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타고난 良能이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없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가운데 거실이라는 일부분의 일로써 살펴보면 그들에게도 모두 행함이 있다. 그러나 편안히 행하는[安而行之] 성인은 행하지 못할 바가 없을 것처럼 보이지만 도의 지극한 부분, 전체에 있어선 때로는 운수와 시세에 막혀 마음과 힘이 미치지 못한 바 있기에 성인으로서도 또한 지극히 다하지 못한 바 있다. 이는 성인만이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지없이 드넓은 천지로서도 때로는 만물을 덮어주고 실어줌에 있어서 그 은혜를 다하지 못하기도 하고 운행조화가 일정하지 못하여 오히려 사람들에게 유감을 사는 수가 있다. 도라는 그 자체는 조금도 유감되는 바 없지만 천지에 유감되는 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지 또한 도를 지극히 다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큰 것으로 말하면 성인과 천지로서도 능히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도란 모든 것을 포괄하기에 천하 그 어느 것으로도 도는 실을 수 없다. 그리고 작은 것으로 말하면 어리석고 어질지 못한 부부일지라도 모두 알고 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도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천하 그 어느 것도 능히 그 속으로 들어가 이를 깨뜨릴 수 없다. 도의 크고 작음이 이와 같다. 이를 費라 말하는데, 隱은 곧 그 가운데에 있다.
君子之道는 近自夫婦居室之間으로 遠而至於聖人天地之所不能盡하니 其大無外오 其小無內하니 可謂費矣라 然其理之所以然은 則隱而莫之見也라 蓋可知可能者는 道中之一事라 及其至而聖人不知不能은 則擧全體而言이니 聖人이라도 固有所不能盡也라 侯氏曰 聖人所不知는 如孔子問禮·問官之類오 所不能은 如孔子不得位와 堯舜病博施之類라 愚는 謂人所憾於天地는 如覆載生成之偏과 及寒暑災祥之不得其正者라
군자의 도는 가깝게는 부부의 거실 사이로부터 멀리는 성인이나 천지로서도 능히 다할 수 없는 곳까지 이르니, 그 큼은 밖이 없고 그 작음은 안이 없으니, 이를 費라 말한다. 그러나 그 이치의 '그렇게 된 까닭[所以然]'은 지극히 은미하여 보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알 수 있고 능히 할 수 있는 것은 도의 전체 가운데 한 부분의 일이다. 그러나 그 지극함에 미쳐서 성인으로서도 알지 못하고 능히 할 수 없는 것은 도의 전체를 들어 말함이니, 이는 성인으로서도 다할 수 없다. 侯氏(侯仲良)가 말하였다. "성인이 알지 못하는 바란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묻고 郯子에게 官制를 물었던 유이며, 능히 하지 못한 것이란 공자가 벼슬자리를 얻지 못한 것과 요순이 널리 베풀지 못한 것을 근심한 유이다." 나(주자)의 생각으로는, '사람들이 천지에 대해서 유감으로 느끼는 것' 이란 덮어주고 실어주고 낳아주고 성장하는 데에 치우침이 있는 것, 그리고 추위와 더위, 또 재앙이나 상서를 바르게 베풀지 않는 것들을 말한다.
道는 至大함과 極微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에, "천지로서도 실을 수 없다"라는 것은 絶對普遍性의 至大한 공간(無外)을 말하며, "깨뜨릴 수 없다"라는 것은 시간적·공간적 한계가 없는 極微한 경계(無內)를 말한다. 이 때문에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능히 알고 행하는 일은 도의 만분의 하나를 알고 있는 것이며, 성인도 알지 못하고 능히 하지 못한 것은 만분의 하나가 부족된 것이다."97) 問禮問官 類는 "공자가 南宮敬叔에게 '내 들으니, 老聃은 고금의 일을 해박하게 안다고 하니, 그는 나의 스승이다. 머지않은 날 그를 찾아가리라' 말하고, 이에 경숙이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서 老聃에게 禮에 관하여 질문하였다"98)라는 것과 『左傳』 昭公 17년 條를 살펴보면, "郯子가 魯나라 조회에 참석하여 魯 昭公과 함께 잔치를 벌였는데, 소공이 담자에게 물었다. '少昊氏는 새 이름으로 官名을 쓴 것은 무슨 까닭인가?' 郯子가 대답하기를 '나의 선조이기에 나는 이에 대하여 알고 있다. 옛날 黃帝氏는 구름으로 기강을 세워 그를 雲師라 하고 구름으로 官名을, 炎帝氏는 불로써 기강을 세워 火師라 하고 불로 官名을, 共工氏는 물로써 기강을 세워 水師라 하고 물로 官名을, 太皞氏는 龍으로 기강을 세워 龍師라 하고 龍으로 官名을 붙였는데, 우리 高祖 少昊摯가 황제에 등극하자 때마침 봉황이 날아왔기에 새로써 기강을 세워 鳥師라 하고 새의 이름으로 벼슬 이름을 붙인 것이다. 顓頊 이후론 인간에 동떨어진 것으로 기록하지 않고 인간에게 가까운 것으로 기록하여 民師가 되었고 인간의 일로써 명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자는 이 말을 듣고 郯子를 찾아가 이를 배운 뒤에, 사람들에게 말하기를'내 들으니, 천자가 벼슬을 잃으면 변방의 夷狄에게 학문이 남아 있다고
97) 위와 같음. 98) 『家語』 「觀周篇」.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 아니다' 하였다"라는 경우를 말한다.
위 절에서는 費에 대하여 천지에 도가 충만하다는 뜻을 지극히 말하였으므로, 여기에서는 『시경』을 인용하여 도의 流行이 활발하게 약동하는 [活潑潑] 기틀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이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기운[氣]이요 날 수 있고 뛸 수 있는 所以는 이치[理]이다. 이 때문에 氣에는 수많은 이치가 탑재되어 있다. 察이란 道體 그 자체가 뚜렷이 밝게 나타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지, 사람이 밝게 살펴본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도의 큰 부분과 작은 부분을 모두 겸해서 말한 것이다. 이에 솔개와 물고기를 예로 들어 도의 작은 부분까지를, 그리고 이를 유추하여 도의 큰 부분까지도 알 수 있다.
詩云 鳶飛戾天이어늘 魚躍于淵이라 하니 言其上下察也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하니, 그것(道)이 위아래에 밝게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도는 어느 곳이든 없는 데가 없는데, 도의 유행과 활발하게 약동하는 그 기틀은 무엇일까? 『시경』 「大雅·旱麓」편에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하였지만, 이는 솔개와 물고기를 대상으로 하여 읊은 시구가 아니다. 천지 사이에 도가 아닌 사물이 어디에 있겠는가. 솔개는 그렇게 날 수 있는 본성에 따라서 하늘에 솟구치니, 이는 도의 유행이 위에 나타난 것으로 하늘을 가까이 하는 모든 만물까지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물고기는 그렇게 뛸 수 있는 본성에 따라서 연못에서 뛰니, 이는 도의 유행이 아래에 나타난 것으로 땅을 가까이 하는 모든 만물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도는 지극히 크기에 이를 실을 수도 없고 지극히 작기에 이를 깨뜨릴 수도 없다. 이 또한 현상계의 費이면서도 眞空의 隱이 아니겠는가.
詩는 大雅旱麓之篇이라 鳶은 鴟類오 戾는 至也오 察은 著也라 子思는 引此詩하야 以明化育流行하야 上下昭著 莫非此理之用이니 所謂費也라 然 其所以然者는 則非見聞所及이니 所謂隱也라 故로 程子曰 此一節은 子思喫緊爲人處 活潑潑地다 하니 讀者는 其致思焉하라
시는 「大雅·旱麓」편이다. 鳶은 솔개요 戾는 이르름이요 察은 나타남이다. 자사가 이 시를 인용하여, 이로써 천지의 化育이 유행하여 위아래에 밝게 나타나는 것은 이치의 작용 아님이 없으니 이른바 費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으니, 이른바 隱임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程子가 말하기를 "이 절은 자사가 요긴하게 사람을 위한 곳, 활기차게 생동하는 <道體를 파헤쳐 준> 곳이다" 하니, 이 글을 읽는 자가 깊이 생각을 다해야 한다.
아래에 朱子說을 발췌, 게재하여 費隱의 문제를 밝히고자 한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반드시 氣에 의하여 그처럼 되는 것인가?" "날고 뛸 수 있는 원인(所以)은 理이다. 氣는 理를 탑재하고 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데에서 찾아보지 않는다면 어느 곳에서 理를 찾아볼 수 있겠는가." "정자의 말에 의하면, '솔개의 위에는 하늘이 있고 물고기의 아래에는 땅이 있다'라고 하니,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선생(朱子)은 말없이 한참 동안 있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하늘에는 사계절이 있으니 춘하추동이다. 바람이 불고, 비와 서리 그리고 이슬이 내림은 곧 가르침 [敎]이다. 땅은 神氣를 싣고 있는데 神氣는 바람과 우레이다. 바람과 우레가 유행하여 만물이 발생하는 것이 곧 가르침이다. 이는 모두 사람을 驚異하게 하는 일들이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 또한 볼 수 있으나 날 수 있고 뛸 수 있는 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것은 費인데, 여기에는 반드시 그 어떤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하여금 그렇게 만들어주니 이것이 隱이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뛰는 데에 道體가 있다. 이는 움직이는 모든 거동에 지극한 도리가 있고, 들고 나고 말하고 침묵하는 모든 곳에 오묘한 도가 실려 있다는 말과 같다. '위아래 나타남을 말한다'라는 구절은 위의 면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察이란 나타남이니 천지에 빛나게 나타나되 두루 충만함을 말하는 것이니, 이는 察察이라는 살필 찰(察) 자의 뜻이 아니다. 『시경』의 뜻은 본디 이 같은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지만, 『중용』에서는 이 두 구절을 斷章取義하여 道體를 표현했을 뿐이다."
도는 본래 비롯함이 없지만 특별히 부부에 나아가 이를 말하였고, 도는 본래 끝이 없지만 특별히 천지의 지극함으로 이를 말하고 있다. 그 사이의 모든 사물의 이치는 이에 포괄되지 않은 것이 없다. 造와 察('造'端乎夫婦, ……'察'乎天地) 자를 열거한 것은 모종의 중요한 의미가 있어 힘을 주어 쓴 글자가 아니며, 전체 문장을 종합하여 끝맺은 總結辭에 지나지 않는다. 위의 「鳶魚」節 또한 내면의 이치를 귀중시한 것이므로 도를 체득하는 공부는 뒤이어 보완해야 할 것이다.
君子之道는 造端乎夫婦니 及其至也하야는 察乎天地니라
군자의 도는 부부로부터 비롯되지만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 천지에 밝게 나타나는 것이다.
위의 말을 종합하면 '군자의 도'의 일부분을 말할 경우, 부부 거실의 사이에서 비롯되므로 어리석고 불초한 자일지라도 모두가 알고 능히 할 수 있지만, 도의 전체라는 지극한 부분에 있어서는 드넓은 천지에 밝게 나타나니, 천지와 성인마저도 다할 수 없다. 이는 널리 나타나는 도의 현상[費]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眞空[隱]이 이와 같기에,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군자는 잠시도 끊임없이 存養 省察의 공부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結上文이라 위 글을 끝맺음이다.
"도란 군신·부자 등 인륜과 일상생활에 두루 갖춰져 있지만 특별히 부부를 들어 말한 것은 더욱 절실한 곳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부부란 인륜 가운데 가장 가깝고 밀접한 관계이다. 예컨대 부형들에게 이야기하지 않는 일까지도 그의 아내에겐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두 말하기도 한다. 이는 지극히 가까운 사람이지만 그 사이에 도가 유행하고 있다. 미세한 기미를 알며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갈 줄 아는 군자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를 체득할 수 있겠는가."99)
99) 『大全』 「朱子」.
右는 第十二章이니 子思之言이라 蓋以申明首章道不可離之意也라 其下八章은 雜引孔子之言하야 以明之라
위는 제12장이니, 자사의 말이다. 이는 거듭 첫 장의 "도란 잠시도 떠날 수 없다"라는 뜻을 밝힌 것이다. 이 아래의 여덟 장(제12~19장)은 공자의 말을 뒤섞어 인용하여 이를 밝힌 것이다.
이 장은 사람의 일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도를 행하고자 하는 자를 위해서 경계한 말이다. 위 장의 논지는 사람의 일과 거리가 없지 않았던 까닭에 여기에서는 곧바로 사람의 몸으로 말하고 있다. 첫 절의 주된 요지는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道不遠人]"라는 구절에 있으며, 제2절의 "그 사람의 도리로써 그 사람을 다스린다[以人治人]"라는 것 또한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는 뜻을 거듭 밝힌 것이며, 제3절은 나의 몸에 하는 것처럼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 도를 행함에 있어서 사람에게 동떨어진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끝 절은 공자가 스스로 자신을 꾸짖은 말로써, 도를 행함에 있어 사람에게 동떨어진 일을 행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말하였다.
여기에서는 도란 사람에게 간절한 것이므로, 도를 배우는 사람 또한 인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도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본 장의 강령은 이 절에 있으며, 아래 문장은 사람을 다스리고[治人], 사람을 사랑하고[愛人], 자신을 꾸짖는[責己] 일을 낱낱이 열거한 데 지나지 않는다.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할 때의 '사람'이란 아래 문장의 아들, 신하, 아우, 벗[子, 臣, 弟, 友]을 말하며, '도'는 아들로서, 신하로서, 아우로서, 벗으로서의 도리를 말한다.
子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도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하되 사람에게서 멀리 하면 도라고 말할 수 없다.
자사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 가운데 작은 부분을 밝혀주었다. 공자가 말하였다. 도는 인륜의 일상생활 가운데 나타나므로 애당초 알기 어렵거나 행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로 보면 어떻게 사람에게서 멀리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도를 행하는 자가 비근한 일을 싫어하고 고차원의 일을 좋아하는 것은 앎과 행실이 모두 지나친 데에서 잘못을 범한 일인데, 어찌 이를 도라 말할 수 있겠는가.
道者는 率性而已니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라 故로 常不遠於人이라 若爲道者 厭其卑近하야 以爲不足爲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면 則非所以爲道矣라
도는 본성대로 따를 뿐이니, 뭇사람이 알고 행할 수 있으므로 항상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 만일 도를 행하는 자가 비근한 것을 싫어하여 하잘것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도리어 행하기 어려운 고차원의 일에 힘을 쓴다면 이는 도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는[以人治人]" 도를 말하여, 도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음을 밝히고 있다. 睨而視之의 睨 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흘겨보는 것이니, 제 손에 들고 있는 도끼자루를 이리저리 매만져 보는 것이며, 視는 곧바로 보는 것이니, 베어야 할 도끼자루를 살펴보는 것이다. 改而止의 而와 止 자를 깊이 음미해 보면 사람을 다스림이란 교육을 주로 하여 말한 것으로, 통치자로서의 임금과 교육자로서의 스승을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군자는 타인의 도리를 가져다가 그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요, 또한 나의 도리를 그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 자신에게 있는 도리로써 그 사람을 다스리다가 그가 잘못을 고치면 그만두는 것이다[以人治人, 改而止]"라고 말하니, 이는 그를 안일하게 姑息的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至善이란 여기에 더하거나 줄일 수가 없다. 만일 그들을 다시 더 붙잡아주고 경각시켜야[提撕警覺] 할 여지가 남아 있다면 이는 그들에게 가르침을 그만둘 수 없는 때이다. 이 세상에는 도의 밖에 인간이 존재할 수 없기에 그가 잘못을 범하면 그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고, 인간을 벗어나 도가 존재할 수 없기에 그가 이미 고쳤으면 그만두는 것이다.
詩云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라 하니 執柯以伐柯호대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임이여, 도끼자루를 베임이여. 그 법이 멀리 있지 않다'라고 하니, 옛 도끼자루를 들고서 새 도끼자루를 베면서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오히려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사람'의 도'로써 그 사람을 다스리다가 그가 고치면 그만두는 것이다.
도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 사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豳風 伐柯」편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베는 사람이여, 도끼자루를 베는 사람이여. 길고 짧은 도끼자루의 준칙이 바로 눈앞에 놓여 있으니 멀리 있지 않다"라고 한다. 그러나 『시경』의 시구를 곰곰이 음미해보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도끼자루를 들고서 새로운 도끼자루를 자를 때, 도끼자루를 베려는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흘낏거리면서 저것과 이것을 대조하여 훑어보는 차별상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도는 그 자신에게 있기에 그 자신에게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운 것이다. 이는 도끼자루를 자를 때 옛 도끼자루의 준칙이 아무리 새 도끼자루와 비슷하지만 근본적으로 차별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군자가 가르침을 세워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그의 良知 良能의 도로써 그의 몸을 다스리되 그가 알 수 있고 그가 능히 할 수 있는 것으로써 그에게 이를 다하도록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그가 나의 가르침에 따라서 생각하고 또한 잘못을 고쳐 나가면 군자는 여기에서 그칠 뿐 더 이상 그를 다스리지 않으니, 알기 어렵거나 능하기 어려운 것으로 그를 꾸짖는 것이 아니다.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므로 사람과 거리가 먼 데에서 도를 행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詩는 豳風伐柯之篇이라 柯는 斧柄이오 則은 法也오 睨는 邪視也라 言人執柯伐木하야 以爲伐柯者 彼柯長短之法이 在此柯耳라 然 猶有彼此之別일새 故로 伐者視之에 猶以爲遠也라 若以人治人이면 則所以爲人之道는 各在當人之身하야 初無彼此之別이라 故로 君子之治人也에 卽以其人之道로 還治其人之身이라가 其人이 能改면 卽止不治니라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이오 非欲其遠人以爲道也니라 張子所謂 以衆人望人이면 則易從이 是也라
시는 「豳風 伐柯」편이다. 柯는 도끼자루요, 則은 법이요, 睨는 흘겨봄이다. 사람이 옛 도끼자루를 잡고서 나무를 베어 새 도끼자루를 만들 때, 저(새로 만들) 도끼자루의 크기가 이(손에 쥔) 옛 도끼자루에 있지만 오히려 피차(옛것과 새것)의 차별이 있기에 도끼자루를 자르려는 자는 가까이 있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으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사람의 도리란 각각 그 자신에 존재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군자는 사람을 다스릴 때 그 사람의 도리로써 도리어 그의 몸을 다스리되 그가 잘못을 고치면 곧바로 그만두고 다시는 다스리지 않는다. 이는 그가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으로 꾸짖은 것이지, 그 사람에게 동떨어진 도를 행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張子(橫渠 : 張載) 가 말한 "많은 사람이 바라는 것으로써 그 사람에게 바라면 그가 쉽게 따르게 된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본 절의 중요한 점은 '道不遠人'이라는 한 구절에 있다. 어느 사람이나 본래 스스로 많은 도리를 넉넉히 지니고 있다. 다만 이러한 도리로 행하지 않고 옳지 못한 도리에 따라 행할 뿐이다. 효도를 예로 들면, 그에게도 본래 효도가 있지만 그가 이 효도를 행하지 않고 정신없이 불효를 따라 행하기 때문에, 군자가 그를 다스릴 때 다른 사람의 효로써 그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에게 '이와 같이 불효를 행하는 것은 당신이 본래 지닌 효도가 아닌데 어찌하여 정신없이 이처럼 불효를 행하는가?' 하고 말할 뿐이다. 그가 불효를 고치면 그것이 바로 효도이다. 이는 남의 도리로써 그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것에 따라 그를 다스리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내 자신을 다스리는 것 또한 남의 도로써 내 자신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존재하는 도리로써 자신을 스스로 다스릴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執柯伐柯, 其則不遠'이라 말한 것이다. 도끼자루를 쥐고 새 도끼자루를 만들 때 또 다른 법으로 이를 맞출 것 없이 다만 그의 손아귀에 있는 그 도끼자루가 바로 법이 되는데도 옛 도끼자루를 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눈을 흘겨보며 이것이 아니라 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리는 어느 사람이나 모두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행하려고 하면 애당초 피차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용에서 맨 처음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를 말하였는데, 이는 모든 사람이 각각 그 도리를 갖추고 있어 부족함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체가 이 뜻으로 쓰여 있다.
이는 자기의 몸으로써 남에게 대하는 도리를 터득함이니, 이는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음을 다시 나타낸 것이다. 忠恕 구절 또한 虛說일 뿐, 아래에서는 충서에 관한 일을 말하는 데에 그치고 있다. 충서는 배우는 자가 노력해야 할 곳이기에 사사로움을 버려야 함을 주로 하고 있다. '施諸……於人' 두 구절은 恕를 말한 것인데, 『장구』 에서 충서를 함께 들어 말한 것은 忠이 없이는 恕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忠恕 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忠恕는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나의 몸에 베풀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
남에게 베푸는 것[恕]으로 말하면, 도는 본디 마음에 근본하고 있다. 사사로운 마음이 있기에 오로지 자신만을 알고 남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남에게 베풀어야 할 일을 행하지 못하므로 나날이 도에서 멀어지게 된다. 만일 忠에 근본하여 恕로 나아간다면, 비록 자연스럽지 못한 작위[勉强] 의 노력에 의해서 도와 그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이를 계기로 더욱 힘써 나아가면 마음이 공정하여 도리를 얻게 되므로 그는 반드시 도에 가까이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충서란 무엇일까? 이는 나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가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횡포를 부리는 것은 진정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이처럼 나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기에 그 같은 일을 남에게 베풀지 않아야 한다. 여기에서 말한 충서 또한 내 자신이 잘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이다.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
盡己之心이 爲忠이오 推己及人이 爲恕라 違는 去也니 如春秋傳에 齊師違穀七里之違라 言自此至彼에 相去不遠이오 非背而去之之謂也라 道는 卽其不遠人者 是也라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은 忠恕之事也라 以己之心으로 度人之心이면 未嘗不同이니 則道之不遠於人者를 可見이라 故로 己之所不欲을 則勿以施於人이 亦不遠人以爲道之事라 張子所謂 以愛己之心으로 愛人則盡仁이 是也라
나의 마음을 극진히 다하는 것이 忠이요, 자신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가는 것이 恕이다. 違는 거리를 말하니, 『춘추전』에 "제나라 군사가 穀 땅과의 7리 거리에 있다[違穀七里]"라는 違 자의 쓰임새와 같다. 이는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다는 말이지, 등지고 떠나간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道는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라는 도를 말한다. 나의 몸에 베풀어 원하지 않는 일을 또한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은 충서의 일이다. 나의 마음으로 남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일찍이 똑같지 않은 바 없는, 즉 도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자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 또한 사람에게서 멀리하지 않고 도를 행하는 것이다. 張子가 말한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면 仁을 다한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논어와 중용에서 말하는 忠恕는 다른 것일까?" 이에 대하여 주자가 답하였다. "盡己…… 推己……"란 중용에서 말하는 "도와의 거리가 멀지 않다"라는 것이니, 이는 학자로서의 일이며 충서의 공부는 결국 이와 같은 것이다. 증자는 이를 취하여 성인 一以貫之의 도리를 밝혔다. 성인의 충서는 다만 誠 자와 仁 자 그 자체의 경지로 말한 것이지, 盡 자와 推 자의 수행 노력의 뜻으로 쓸 수는 없다. 그러나 학자는 반드시 자신을 미루어 나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정자는 "몸으로써 타인에게 미치는 것[以己及物]"을 성인의 "仁"이라 하고 "몸을 미루어 타인에게 미치는 것[推己及物]"을 학자의 "恕"라 하니, 중용의 '違道不遠'이란 이를 말한 것이다. 이는 두 끝으로 말함이니 바로 下學과 上達을 말하는 것이다. 자사는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이를 인용하여 말했다.
이는 자신의 몸을 통해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도를 얻음이니, 여기에서도는 사람에게서 더욱 멀리할 수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未能이란 능히 할 수 없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가탁의 말이 아니라, 성인이 도의 무궁함을 보고서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고 능히 하지 못한 것을 애써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나타낸 것이다. 庸德 이하의 문장은 군자의 측면에서 말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慥慥 구절에서 특별히 反語法을 썼다. 이는 自修의 뜻이 말 밖에 담겨 있다.
도를 말로써 다할 수 있겠으나 실제로 행하지 않고서 말만을 지껄인다는 것은, 말을 조심하지 않은 자이기에 행할 수 없는 일을 말하지 말도록 경계한 것이다. 참으로 실행에 옮긴 뒤에야 행실이 부족한 줄을 알게 되고, 실제 말을 삼간 이후에 말이란 언제나 남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有所不足의 不足이란 만분의 일이라도 미진한 바 있으면 이 또한 부족함이다. 두 곳의 敢(不'敢'不勉……, 不'敢'盡……) 자는 戒謹恐懼의 뜻이다. "감히 다하지 않는다[不敢盡]"라는 것은 말해야 할 일 또한 말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한 주석을 살펴보면 보다 깊이 이에 대하여 논술하고 있다. 言顧行…… 이하 두 구절은 공부에 관한 말로서, 위 구절의 뜻을 이어서 미루어 나아간 것으로 慥慥에 관한 구체적인 뜻이다. 慥慥는 오로지 독실하고 절실한 것이니, 마음이 조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치달리는 바와 헛되고 들뜬 생각이 없어야 한다. 이는 찬미하는 말 가운데 바람의 의지를 나타내주는 것으로 단순히 군자를 과장하는 말에 그치지 않는다.
君子之道 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야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어든 不敢盡하야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 胡不慥慥爾리오
군자의 도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나(공자)는 한 가지도 잘하지 못하였다. 아들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아버지 섬기기를 잘하지 못하였고, 신하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임금 섬기기를 잘하지 못하였고,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님 섬기기를 잘하지 못하였고, 벗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먼저 베푸는 것을 잘하지 못하였다. 떳떳한 덕을 행하고 떳떳한 말을 삼가서, 행함에 부족한 것이 있으면 힘쓰지 않음이 없고, 말은 남는 것이 있을지라도 다하지 아니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은 말을 돌아보아야 하니, 군자가 어찌 독실하지 않겠는가."
또한 자신을 자책하는 일로 말하면, 내(공자) 일찍이 군자의 도를 배운 자이다. 인륜을 극진히 실행하는 군자의 도에는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내 일찍이 그 중 하나도 잘한 것이 없다. 군자의 네 가지 도란 무엇인가? 내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효도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섬겼던 내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자식으로서의 효도를 다하지 못하였다. 내가 임금의 입장에서 신하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충성이다. 그러나 임금을 섬겼던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다. 내가 아우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공손이다. 그러나 형을 섬겼던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공손을 다하지 못하였다. 내가 벗의 입장에서 벗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다. 그러나 벗에게 먼저 베풀어야 할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믿음을 다하지 못하였다. 나는 이처럼 군자의 도에 대해서 잘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잘하지 못했던 일들은 군자가 이미 능히 했던 일들이다. 군자는 자식, 신하, 아우, 벗의 도리를 자신에 얻은 바 있으니, 이것이 떳떳한 덕이다. 이를 행하여 그 실상을 밟아 나가야 한다. 그리고 자식, 신하, 아우, 벗의 도리를 말한 것은 떳떳한 말이다. 이를 조심하여 그 옳은 말만을 가려서 행해야 한다. 행실이란 언제나 부족하기 쉬우니, 감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기에 스스로 힘써야 하고, 말이란 다하여도 오히려 끝이 없는 것이니 감히 말을 다하지 않도록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 이와 같이 힘쓰면 말한 바는 반드시 모두 행해질 수 있으므로 말은 행실을 돌아보게 되고, 행한 바는 반드시 그 말한 바에 미치게 되어 말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군자의 행실은 모두 실천에 옮기고 말은 모두 독실한 의논으로서 행동거지가 독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이를 본받아 스스로 노력하고자 한다. 이와 같이 아들, 신하, 아우, 벗으로서의 도리는 내 자신과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아는 것이요 능히 할 수 있는 것이다. 도는 사람 멀리 있지 않음이 더욱 명백하지 않는가.
求는 猶責也라 道不遠人이라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修焉이라 庸은 平常也라 行者는 踐其實이며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則行益力이오 言有餘而訒則謹益至라 謹之至則言顧行矣오 行之力則行顧言矣라 慥慥는 篤實貌라 言君子之言行이 如此니 豈不慥慥乎는 讚美之也라 凡此皆不遠人以爲道之事라 張子所謂 以責人之心으로 責己則盡道가 是也라
求는 바람[責望]과 같다. 도는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기에, 내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도의 당연한 바이다. 그러므로 이를 자신에게로 돌이켜 스스로를 꾸짖고 스스로 닦아야 한다. 庸은 평범하고 떳떳함이다. 行은 그 실상을 밟아 나아감이며, 謹은 그 중에 옳은 것을 선택함이다. 덕이 부족하다 생각하여 힘쓰면 행하는 데 더욱 힘쓰게 되고, 말이란 끝없이 남아 있으나 이를 어렵사리 말하고 참으면 삼감이 더욱 지극할 것이다. 삼감이 지극하면 말은 행실을 돌아보고, 행실에 힘쓰면 행실은 말을 돌아보게 된다. 慥慥는 독실한 모양이다. "군자의 말과 행실은 이와 같으니 어찌 독실하지 않겠는가"라는 것은 찬미의 말이다. 이는 모두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도를 행하는 것이다. 張子가 말한 "남을 꾸짖는 마음으로 나를 꾸짖으면 도를 극진히 다할 수 있다"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右는 第十三章이라 道不遠人者는 夫婦所能이며 丘未能一者는 聖人所不能이니 皆費也로되 而其所以然者則至隱이 存焉이니 下章도 放此라
위는 제13장이다. "도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다"라는 것은 어리석은 부부로서도 능할 수 있는 바이며, "나는 한 가지도 잘한 것이 없다"라는 것은 성인으로서도 능히 하지 못한 바이니, 모두가 費이다. 그러나 그처럼 되는 까닭은 곧 지극히 은미한 것이 있으니, 아래 장도 이와 같다.
이 장은 현재의 위치[素位]에서 힘써야 할 학문을 말하고 있는데, 자신을 돌이켜본다[反身]는 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첫 절은 강령이며, 제2~3절은 이를 둘로 나누어 말하고 있으며, 제4절은 이를 하나로 묶고, 맨 끝 절에서는 이를 모두 끝맺고 있다. 제13장에서는 사람이 행해야 할 신상문제를 말하였지만, 사람이란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도 모두 다 극진히 다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말한 바 더욱 간절하다.
位 자는 有定과 無定, 두 가지 뜻이 있다. 素位而行은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서 그에 알맞은 도를 행하는 것이다. '그 밖[其外]'이란 과거와 미래를 가리킨 것이며, '不願'은 연연해한다든지, 미리 떨쳐버린다든지, 미리 기대하지 않음을 말한 것으로, 현재에 처한 자신의 위치에서 도를 전일하게 행하는 것이다.
君子는 素其位而行이오 不願乎其外니라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서 행할 뿐이요,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사가 스스로 費의 작은 점에 대해서 말하였다. 자신이 처한 위치가 다름에 따라서 제각기 그에 알맞게 다해야 할 바가있다. 군자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위치에서 행할 뿐, 제 위치의 밖에 존재하는 그 다른 것을 원하거나 사모하지 않는다. 본분에 있어서 주어지는 일이란 다하지 않을 수 없지만, 본분을 벗어난 일은 모두 행할 바 아니다.
素는 猶見(現)在也라 言君子는 但因見在所居之位 而爲其所當爲오 無慕乎其外之心也라
素는 현재와 같다. 군자는 다만 현재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행하고, 그 밖의 것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음을 말한다.
이 네 가지는 단지 大槪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行乎……'의 行 자에는 자신이 처한 현재의 위치에 따라서 극진히 도리를 다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無入……' 구절은 위 글을 이어서 말하고 있다. 自得은 우려와 근면으로 도리를 다함이니, 도리를 다하였을 때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素富貴하얀 行乎富貴하며 素貧賤하얀 行乎貧賤하며 素夷狄하얀 行乎夷狄하며 素患難하얀 行乎患難이니 君子는 無入而不自得焉이니라
현재 부귀에 처해서는 부귀대로 행하고, 현재 빈천에 처해서는 빈천한 대로 행하고, 현재 오랑캐에 처해서는 오랑캐대로 행하고, 현재 어려움에 처해서는 어려움대로 행하니, 군자는 어느 곳을 가든지 스스로 마음에 만족하지 않는 바 없다.
현재의 위치에 근본하여 행한다는 것을 무엇을 말하는가? 예를 들면 현재 부귀의 위치에 있으면 부귀를 누리는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고, 현재 빈천한 위치에 있으면 빈천한 사람으로서의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고, 현재 오랑캐의 나라에 있으면 오랑캐의 나라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고, 현재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으면 어려움 속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를 행하는 것이다. 도는 자신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있어서 마음도 또한 자신이 처한 곳에 따라서 즐거움을 얻으니, 군자는 어느 곳에서든 스스로 만족해하지 않은 바 없을 것이다. 이른바 "현재의 위치에 근본하여 행한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此는 言素其位而行也라
이는 그 현재 위치에 처해서 행함을 말한다.
陵은 남들이 나에게 순종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며, 援은 남들이 나를 비호해주기를 요구하는 것으로 이는 내 위치의 바깥 것을 추구하는 일이다. "몸을 바르게 한다"라는 것 또한 남에게 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신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다. 끝의 두 구절은 한층 더 깊이 있게 말한 것일 뿐, 찬사의 의미는 아니다.
在上位하야 不陵下하며 在下位하야 不援上이오 正己而不求於人이면 則無怨이니 上不怨天하며 下不尤人이니라
윗자리에 있어서는 아랫사람을 업신여기지 않으며, 아랫자리에 있어서는 윗사람을 끌어당기지 않으며, 몸을 바르게 할 뿐 남에게 구하는 바 없으면 원망이 없을 것이니,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래로는 사람을 허물하지 않는다.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음은 무엇을 말하는가? 현재 윗자리에 있으면 아랫자리는 그 밖의 것이므로 위엄을 부려 아랫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현재 아랫자리에 있으면 윗자리는 그 밖의 것이므로 세력 있는 자에게 아부하여 위로 올라서고자 끌어당겨서는 안 된다.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면서까지 횡포를 부리고서도 나의 세력을 펴지 못할 때는 반드시 아랫사람을 원망하게 되고, 윗사람을 끌어당기면서까지 영전을 추구하다가 나의 욕구를 이루지 못하면 반드시 윗사람을 원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윗자리에 있거나 아래에 있거나 현재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르게 할 뿐, 애당초 남에게 추구하는 바 없으면 저절로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지므로 마음이 편안하게 될 것이다. 이에 위로 하늘에 원망하는 마음이 없으면 하늘에게 얻지 못한 바 있을지라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 추구하여 취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남들과 부합되지 않는 일이 있을지라도 사람을 허물하지 않을 것이다. 이른바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은 바로 이와 같다.
此는 言不願乎其外也라
이는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위 두 절의 문장을 종합하여 끝맺고 있다. "천명을 기다린다"라는 것은 평이하게 사는 것이지, 분수 밖의 일에 있는 것이 아니다. 천리를 따름은 평이한 길이요, 천리를 거스름은 곧 험난한 길이다. "小人……" 구절은 가벼운 뜻으로 씌어 있다.
故로 君子는 居易(이)以俟命하고 小人은 行險以徼幸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평이하게 살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험난한 일을 행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오직 현재의 위치에 근본하여 그 바깥 것을 원하지 않으므로, 군자의 마음은 평이하여 까다롭지 않고 거처하는 바에 따라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면서 시비와 득실을 초월하여 오로지 천명에 따르지만, 소인이란 오히려 사사로운 지혜로써 험난한 길로 치달리면서 구차스럽게 요행을 바라는 것이다.
易는 平地也라 居易는 素位而行也오 俟命은 不願乎外也라 徼는 求也오 幸은 謂所不當得而得者라
易는 평탄한 곳이다. 居易는 현재의 위치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요, 俟命은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徼는 구함이요, 幸은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될 것을 얻음을 말한다.
이는 군자의 자아 반성을 주로 하여 말한 것이지, 군자가 활쏘기와 같다는 말은 아니다. 失이란 우연찮게 범하는 잘못을 말한 것이기에, 고의적으로 범하는 惡자의 의미와는 다르다. "군자가 활쏘기와 같다"라는 것은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는 자아 반성에 주안점이 있는 바, 자신을 반성함은 곧 군자의 도임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자아의 반성이 곧 자신을 바르게 가지는 일임을 또한 알 수 있다. 만일 자신을 돌이켜 살피지 못한다면 모든 일에 휩쓸려 흘러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는 현재의 위치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요, 운명에 맡겨둔 채 행하는 일이기에, '천명을 기다림'이라 말할 수 없다.
子曰 射有似乎君子하니 失諸正鵠이오 反求諸其身이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활쏘기는 군자<의 도>와 유사하다.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자신에게로 돌이켜 <그 원인>을 찾기 때문이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활쏘기를 하는 것은 군자의 도와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화살을 쏘아 과녁을 맞히지 못하면 자신에게 돌이켜 "안으로는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밖으로는 몸이 바르지 못하였다" 생각하여, 애당초 남을 허물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살펴보면, "군자는 현재의 위치에 근본하여 행하며 그 밖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畫布曰正이오 棲皮曰鵠이니 皆侯之中, 射之的也라 子思 引此孔子之言하야 以結上文之意라
무명으로 만든 과녁판 위에 그린 과녁은 正이요 가죽으로 만든 과녁판 위에 붙인 과녁은 鵠이니, 이는 모두 과녁판의 중앙부위로서 활을 쏘는 표적물이다. 자사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위 글의 뜻을 끝맺은 것이다.
右는 第十四章이니 子思之言也라 凡章首에 無子曰字者는 放此라위는 제14장이니, 이는 자사의 말이다. 무릇 장의 첫머리에 '子曰' 글자가 없는 것은 이와 같이 <자사의 말>이다.
이 장은 도에 나아가는 데 순서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첫 절의 두 곳의 譬如는 가탁의 말로서 일례를 들어 순서가 있음을 밝힌 것이다. 위 제14장에서는 자신이 처해 있는 현재의 위치로써 말한 것인데, 현재의 위치에는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은 것[遠邇高卑]들이 있는데, 이는 현재의 위치에서 해야 할 일들이다. 이 장은 이를 행하여 나가는 순서를 말한 것으로 그 뜻이 더욱 간절하다.
높고 멀고 낮고 가까움이란 먼저 할 것과 뒤에 할 것, 두 가지를 말하며, 이 둘의 관계는 '반드시 ……으로부터 한다'라는 自 자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뜻을 가지고 있다.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경지는 먼 곳이요, 쉽게 미칠 수 없는 것은 높은 곳이다.
君子之道는 辟(譬)如行遠必自邇하며 辟如登高必自卑니라
군자의 도는 비유하건대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으로부터 비롯하고 높은 데 오르려면 반드시 낮은 데로부터 비롯하는 것과 같다.
자사는 費의 작은 점에 대해 말하였다. 군자의 도는 어느 곳에서든지 찾아볼 수 있지만, 행하여 나아가는 데에는 차례가 있는 법이다. "인성을 극진히 하여 천명을 아는[盡性知命]" 고차원의 세계는 반드시 평범한 인륜의 일상생활에 근본하며, "의리를 정밀히 알아서 神에 들어가는[精義入神]" 신비스런 造詣는 반드시 "물 뿌리고 쓸고 대답하는[灑掃應對]" 따위의 하찮은 예절에 기초를 두고 있다. 비유하면 먼 길을 가려는 자는 먼 곳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비롯하고, 높은 데를 오르려는 자는 높은 데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낮은 데에서 비롯한다. 이렇듯 도를 구하려는 자는 어디에서부터 비롯해야 할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辟은 譬同이라 辟은 譬 자와 같다.
이는 『시경』을 인용하여 처자와 형제를 대등하게 나열하였지만, 『시경』 의 본지에 관계없이 전용해 쓰고 있다. 鼓는 연주한다는 뜻이며, 耽이란 오랜 즐거움을 말한다. 室은 부부가 사는 곳, 家는 한 집안을 말한 것이기에, 室家에는 형제의 의의를 붙여서 볼 수 없지만 이 경우는 위 글에 이어서 원만하게 보는 것이 좋다.
詩曰 妻子好合이 如鼓瑟琴하며 兄弟旣翕하야 和樂且耽이라 宜爾室家하며
樂爾妻帑라 하야늘 『시경』에 이르기를 "처자와 잘 어우러지는 것이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듯하며, 형제가 이미 우애하여 화락하고 또 즐겁다. 너희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너희 처자를 즐겁다"고 하였는데,
또한 일상생활의 인륜 가운데 일례를 들어 말해보자. 『시경』 「소아· 상체」편에 의하면, 처자와의 정이 잘 어우러져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것처럼 화기애애하고, 형제가 우애하고 화락하며 즐거워함은 지극한 즐거움이다. 이와 같이 하면 너희 집안이 잘 다스려지고 서로 모두가 편안할 것이며, 너희 처자가 길이 편안함을 누릴 것이라고 한다. 『시경』에서 말한 바는 이와 같다.
詩는 小雅常棣之篇이라 鼓瑟琴은 和也오 翕은 亦合也오 耽은 亦樂也라 帑는 子孫也라
詩는 「소아 상체」편이다. 비파와 거문고를 타는 것과 같음은 화기로움이며, 翕 또한 화합이며, 耽 또한 즐거움을 말한다. 帑는 자손이다.
여기에서는 처자와 형제는 낮고 가까운 곳에, 부모는 높고 먼 곳에 비유하고 있다. 『집주』에서는 "其順……"의 順 자에 대하여 安樂이라고 주석을 붙였으나, 이 같은 마음과 그 이치는 사람의 마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其 자로 나타냈으며, 乎 자에는 詠嘆調의 음률을 들려주는 것과 같다.
子曰 父母는 其順矣乎신저
공자가 '이 시를 읊고서' 말하였다. "<이렇게 되면> 부모의 그 마음이 편안하실 것이다."
공자는 이 시를 읊고 개연히 탄식하였다. 아내와 금슬이 좋지 못하거나 형제간에 화목하지 못한 것은 모두 부모에게 걱정을 끼치는 일들이다. 아내와 화기롭고 형제 사이에 이처럼 화목한다면 부모의 마음이 편안하여 즐겁지 않을 리 없다. 『시경』과 성인의 말을 살펴보면 반드시 아내와 화기롭고 형제와 화목하여야 부모의 마음이 편안할 것이다. 이 또한 먼 곳을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 비롯하고, 높은 데를 오르려면 낮은 데에서 비롯하는 것과 같다.
이로 보면 학자가 도를 행함에 있어 낮고 가까운 일을 가벼이 하고 높고먼 곳에 마음을 치달리면 결코 도에 다다를 수 없을 것이다.
夫子는 誦此詩而贊之曰 人能和於妻子하고 宜於兄弟 如此면 則父母는 其安樂之矣리라 子思는 引詩及此語하야 以明行遠自邇登高自卑之意라
공자는 이 시를 읊은 뒤 감탄하였다. 사람이 처자와 화기롭고 형제와의 사이가 이처럼 좋으면 부모는 그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우실 것이다. 자사는 시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먼 곳을 가려면 가까운 곳에서 비롯하고, 높은 데를 오르려면 낮은 데에서 비롯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右는 第十五章이라 위는 제15장이다.
이 장에서는 귀신을 들어, 도는 잠깐도 떠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첫 절에서는 귀신의 덕이 성대함을 찬탄하였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다가, 제2절에서 그 성대함을 나타냈고, 제3절에서는 그 성대함의 실제를 징험해 보였고, 제4절은 그 성대함을 증명하였고, 끝 절에서는 그처럼 성대하게 된 이유를 추구하고 있다.
귀신이란 陰陽 두 기운[二氣]으로 나뉘지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기운[一氣]이다. 二氣는 음양의 상대적인 면으로, 一氣는 음양의 유행으로 말한 것이다. 『집주』에서 말한 '性情'은 二氣의 良能, '功效'는 천지의 功用이다. '性' 자는 아래의 '體物不遺' 上에 있으며, 그처럼 성대하게 된 이유는 바로 誠이다.
子曰 鬼神之爲德이 其盛矣乎인저
공자가 말하였다. "귀신의 덕, 그것은 성대한 것이다.
자사는 귀신에 대해 언급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隱과 大小를 모두 들어서 도를 밝혀주었는데, 공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천지의 사이에 屈伸 往來하는 것은 모두 음양의 기운이며, 음양 기운의 靈을 곧 귀신이라 한다. 그것의 덕 됨됨은 천지 사이에 유행하되, 지극한 無로써 지극한 有를, 지극한 虛로써 지극한 實을 포괄하니, 그 성대함이 이에 더할 수 없다.
程子曰 鬼神은 天地之功用而造化之迹也라 張子曰 鬼神者는 二氣之良能也라 愚는 謂以二氣言이면 則鬼者는 陰之靈也오 神者는 陽之靈也며 以一氣言이면 則至而伸者는 爲神이오 反而歸者는 爲鬼니 其實은 一物而已라 爲德은 猶言性情功效라
정자는 "귀신은 천지의 功用으로서 조화의 발자취이다" 말하였고, 장자는 "귀신이란 두 기운(음양)의 良能이다" 말하였는데, 나의 생각으로는 "두 기운으로 말하면 鬼는 陰의 신령, 神은 陽의 신령이며, 한 기운으로 말하면 이르러오면서 신장되어 나가는 것은 神이요, 돌아서 가는 것은 鬼이니, 실제는 하나일 뿐이다." 爲德이란 性情과 功效라는 말과 같다.
功用이란 나타난 것으로 논함이니, 추위가 오고 더위가 가며 해가 지고 달이 뜨며 봄에 만물이 나고 여름에 성장하는 모든 것이 이런 것들이다. 바람·비·서리·이슬·해·달·낮밤이란 귀신의 자취이다. 그러므로 조화의 오묘함은 볼 수 없지만 氣의 往來나 屈伸은 볼 수 있다. 귀신이 없다면 조화의 발자취가 없을 것이다. 무엇을 발자취라 말하는가? 귀신이란 천지 사이의 조화를 말하며 단 陰陽 二氣의 굴신·왕래일 뿐이다. 神은 陽, 鬼는 陰, 가는 것은 屈, 오는 것은 伸이니, 발자취란 이와 같다. 良能이란 왕래·굴신을 말하니, 이는 이치의 자연스러움으로서 按配하거나 措處함이 아니다. 二氣는 음양이며 良能은 신비스러운 곳이다. 만물이 처음 발생할 때 기운이 날마다 이르러 불어나다가 가득 차면 기운은 다시 나날이 되돌아 흩어지기 마련이다. 이르러 오는 것을 神이라 함은 펴오기(伸) 때문이며, 돌아서 가는 것을 鬼라 함은 되돌아가기(歸) 때문이다. 천지에 끝이 없는 것은 추위와 더위이며, 많은 생물에 끝이 없는 것은 屈伸이다. 귀신의 실상은 이 두 가지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음양 두 기운으로 나누어지지만 실제로는 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다. 二氣로 말한다면 음의 신령은 鬼, 양의 신령은 神이며, 一氣로 말한다면 바야흐로 펴 나가는(伸) 그 가운데에도 또한 굴신이 있는데 그 때에 펴나가는 것은 神의 神이며, 이미 펴나감이 끝난 것은 神의 鬼이다. 이미 굽혀감이 끝난 것은 鬼의 鬼이며, 이르러 오는 것은 鬼의 神이다.
이 세 구절은 같은 뜻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중점은 體物 구절에 있다.
귀신은 형체가 없으나 세상의 모든 형체를 이루어주고, 소리가 없으나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먼저 그 어떤 물체가 존재한 뒤에 그것의 본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귀신은 만물 가운데 존재하여 그것의 骨子가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귀신은 主요, 만물은 客이다.
視之而弗見하며 聽之而弗聞이로되 體物而不可遺니라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으며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지만, 만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림이 없다.
무엇으로써 귀신의 성대한 덕을 볼 수 있을까? 만물이란 형체가 있기에 바라보면 볼 수 있지만 귀신이란 형체가 없으므로 보고자 해도 볼 수없다. 만물은 소리가 있기에 들으려 하면 들을 수 있지만 귀신이란 소리가 없으므로 듣고자 해도 들을 수 없다. 분명 이처럼 귀신이란 형체와 소리가 없다. 하지만 형체와 소리가 있는 그 만물 가운데 두루 존재하므로, 음양이 합해지면 만물은 이에서 비롯되고, 음양이 흩어지면 만물은 이로 말미암아 종말이 되는 것이다. 만물이란 이처럼 빠뜨림 없이 귀신을 가지고 있다. 이로 보면 그것의 성대한 덕을 어떻다고 말할 수 있을까?
鬼神은 無形與聲이라 然物之終始는 莫非陰陽合散之所爲이니 是其爲物之體而物之所不能遺也라 其言體物은 猶易所謂幹事라
귀신은 형체와 소리가 없다. 그러나 만물의 처음과 끝은 음양의 취합과 분산의 작위에 의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것이 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이 빠뜨림 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體物이라 말한 것은 『주역』(「乾卦 ·文言」)에서 말한 '모든 일의 근간'이라는 것과 같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은 귀신의 性情이며, 만물의 본체가 되어 빠뜨림이 없다는 것은 귀신의 공효이다. "만물의 체가 되어 빠뜨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자가 이에 대해 답하였다. "다만 하나의 기운이 터럭 끝과 실오라기 속까지 들어가 있으니 이 또한 음양이며, 천지를 빠짐없이 모두 감싸고 있으니 이 또한 음양이다. 이 이치가 있으면 곧 이 기운이 있고, 이 기운이 있으면 곧 이 이치가 있으니, 진실한 이치 아닌 것이 없다."
이는 위의 귀신설 가운데 보다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들어 예시한 것이다. '使天下之人'의 使 자는 가장 적절하게 쓴 글자로서, 여기에서 귀신의 신령스러운 면을 찾아볼 수 있다. "如在……" 두 구절은 어느 곳이든지 두루 귀신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使天下之人으로 齊明盛服하야 以承祭祀하고 洋洋乎如在其上하며 如在其左右니라
천하의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가다듬고 조촐히 가지며, 의복을 성대하게 갖추어 제사를 받들게 하고, 넘실넘실 그 위에 있는 듯하며, 그 좌우에 있는 듯하다.
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이 빠뜨림 없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밝힐 수 있을까? 이 또한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으로 말하면, 귀신의 신령함이란 천하 사람들이 제각기 마땅히 제사를 받들어야 할 신에 따라서, 안으로는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어 조촐히 마음을 밝히고, 밖으로는 성대한 의복으로 몸을 깨끗하게 한 뒤에 제사를 받들게 하며, 이처럼 재계를 하면 신이 강림하여 넘실넘실 위에 있는 듯하여 위에 있는 그것이 귀신임을 스스로가 알 수 있으며, 마치 신이 좌우에 있는 듯하여 좌우 여러 곳에 귀신이 있음을 스스로가 볼 수 있다. 나타나고 뚜렷함이 이와 같으니, 이른바"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이 빠뜨리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라는 것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다.
齊之爲言은 齊也니 所以齊不齊而致其齊也라 明은 猶潔也라 洋洋은 流動充滿之意라 能使人畏敬奉承하고 而發見昭著 如此하니 乃其體物而不可遺之驗也라 孔子曰 其氣 發揚于上하야 爲昭明焄蒿悽愴하니 此는 百物之精也며 神之著也라 하니 正謂此爾라
재계라는 말은 가다듬는다는 것이니, "가다듬어지지 않은,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어 그 가다듬기를 다하는 것이다"(『예기』 「祭統」). 明은 조촐함과 같다. 洋洋은 넘실넘실 충만하다는 뜻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공경히 받들도록 만들며 이처럼 또렷이 나타나 보이니, 이것이 곧 "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이 빠뜨리지 않고 모두 가지고 있다"라는 징험이다. 공자의 "그 기운이 위로 피어올라 빛나고 밝으며 훈훈하면서 아늑한 느낌이 있고 싸늘한 데가 있으니, 이는 만물의 精氣이며 귀신의 顯著함이다"100) 라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한다.
齊明이란 안으로 엄숙함이며 盛服이란 바깥으로 엄숙함이니 안팎을 모
100) 『예기』 「祭義」, 이는 귀신에 대한 宰我의 물음에 공자가 답한 말이다.
두 지극히 하는 공부이다. 鬼神이 빛나게 나타나는 그것은 昭明이며, 그 훈훈한 기운이 사람에게 느껴지는 그것은 焄蒿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싸늘한 정신이 감돌게 하는그것은 『漢書』에서 말하는 "神君이 이르매 그 바람이 스산하다"라는 것으로 悽愴의 뜻이다.
위 「使天」절에서 이미 體物不遺의 뜻을 징험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제사를 받들 때에만 귀신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까 두려워한 나머지 다시 屋漏를 예로 들어, 귀신이란 어느 곳이든지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詩曰 神之格思를 不可度(탁)思온 矧可射(역)思아
『시경』에 이르렀다. '신의 강림을 헤아릴 수 없는데 하물며 싫어할 수 있으랴'
「대아·억」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명의 강림이 이 곳에 있는지 저 곳에 있는지 헤아릴 수 없다. 이 때문에 아무리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다하였을지라도 오히려 잘못이 없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을 항상 가져야 한다. 더욱이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이라 하여 신을 싫어한다거나 불경스럽게 대할 수 있겠는가. 또한 신의 강림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넘실넘실 어디에서나 충만하여 일정한 발자취가 없음이며, 신을 싫어할 수 없다는 것은 반드시 마음을 가다듬고 성대한 의복으로 제사를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귀신이 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에게 모두 귀신이 있다는 징험을 어찌 거짓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格은 來也오 矧은 況也라 射는 厭也니 言厭怠而不敬也라 思는 語辭라
시는 「대아 억」편이다. 格은 이르러 옴이요, 矧은 하물며이다. 射은 싫어함이니, 싫어하고 나태하여 공경하지 않음을 말한다. 思는 어조사이다.
위 문장은 모두 은미한 것이 현저하게 나타나 감출 수 없다는 점을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오로지 誠 자를 들어 이를 詠嘆하고 있다. '夫微之顯'의 夫와 '如此夫'의 夫 자를 깊이 음미해보면 "은미한 것이 나타난다[微之顯]"라는 뜻을 찾아볼 수 있다. 요컨대 '微之顯'의 之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린다[不見之見, 不聞之聞]"라는 之 자의 쓰임새와 같다. 이는 "은미한 것이 곧 현저함이다[微卽顯]"라는 뜻으로 微의 측면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귀신은 음양의 취합과 분산이 형성되는 '氣'요, 誠은 음양의 취합과 분산의 所以然, 곧 理로서, 이는 진실하기 때문에 감출 수 없다. 이것이 곧 덕의 성대한 바이며, 만물의 본체가 되어 만물에 빠뜨림 없이 모두 존재하는 所以(이유)이다. 『중용』에 나타난 誠 자는 여기에서 처음 쓰이고 있다.
夫微之顯이니 誠之不可掩이 如此夫인저
은미함이 또렷이 나타나니, 진실함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귀신이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바로 그것이 보이지 않는 微(隱)이다.
그러나 만물의 본체가 되어, 모든 만물에 빠뜨림 없이 귀신이 있다는 것은 이처럼 뚜렷한 顯(費)으로, 가릴 수 없다. 이는 무엇 때문일까? 귀신이란 氣의 屈伸으로서, 그 덕 됨은 천명이라는 진실한 이치, 이른바 誠이라 한다. 一이란 誠의 시작이자 끝이므로 만물의 사이에 현저하게 나타나고 유행하여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다. 귀신의 덕이 과연 어떠한 것일까? 이를 안다면, 도란 널리 쓰이면서도[費] 보이지 않는 그것[隱]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로 보면 사람이란 잠깐이라도 도에서 떠날 수 없다.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라 陰陽合散은 無非實者라 故 其發見之不可掩이 如此라
誠은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음을 말한다. 음양의 취합과 분산은 진실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그 나타남을 가릴 수 없음이 이와 같은 것이다.
右는 第十六章이라 不見不聞은 隱也오 體物·如在는 則亦費矣라 此前三章은 以其費之小者而言이오 此後三章은 以其費之大者而言이어늘 此一章은 兼費隱·包大小而言이라
위는 제16장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은 隱이오, "만물의 본체가 된다"라는 것과"위에 있는 듯 좌우에 있는 듯하다"라는 것은 또한 費이다. 앞의 3장(제1 3~15장)은 費의 작은 점을, 아래의 3장(제17~19장)은 費의 큰 점을 말하였는데, 이 장에서는 費隱을 겸하고 大小를 모두 포괄하여 말하였다.
道란 형이상이며 귀신이란 형이하이다. 이 장은 귀신의 費隱으로 도의 費隱을 말한 것이다. 귀신의 본체는 지극히 은미(隱)하면서도 그 용도는 지극히 넓게 쓰임이(費) 이와 같으니, 도의 用이 지극히 널리 쓰임은 至隱으로 본체를 삼았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舜임금이 덕으로써 복을 얻고 하늘을 감격시켰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본장 내에서 쓰인 네 곳의 故('故'大德 ……'故'天之生物 ……'故'栽者培之 ……'故'大德者) 자와 여섯 곳의 必('必'得其位, '必'得其祿, '必'得其名, '必'得其壽 ……'必'因其材而篤焉 ……'必'受命) 자에는 天人相應이 극명하여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순임금을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떳떳한 행실[庸行]'을 지극히 닦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大孝 구절은 강령이며, 아래 다섯 구절은 덕과 복을 대등한 위치에서 나열하고 있다. 이는 순임금이 본디 大孝의 덕을 지닌 데에서 성인의 德, 천자의 尊貴, 사해의 富裕, 종묘의 祭饗, 자손의 保存을 누릴 수 있다는 뜻으로 본 장의 主旨이며, 성인, 존귀, 부유, 제향, 보존으로 인해서 더욱 큰 효도를 이룩할 수 있었다 함은 본 절의 뜻이다.
子曰 舜은 其大孝也與인저 德爲聖人이시고 尊爲天子시고 富有四海之內하
사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순임금은 큰 효자이시다. 덕으로는 성인이 되시고, 높기로는 천자가 되시고,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시고, 종묘에서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보존하셨다.
자사는 순임금에 대해 일컬은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의 큰 점을 밝히고 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 아들이란 모두 효도를 행해야 한다. 그러나 옛날 순임금은 참으로 큰 효자였다. 자식으로서의 덕이 없고서는 어버이의 이름을 나타낼 수 없다. 순임금의 "태어나면서부터 알고 편히 행할 수 있었던[生知安行]" 그 덕은 성인의 바탕이다. 존귀한 벼슬이 아니고서는 어버이에게 영화를 안겨드릴 수 없다. 순임금은 요임금이 전수한 황제의 지위를 이어받아 존귀한 천자가 되었다. 부유한 생활이 아니고서는 어버이를 넉넉히 받들 수 없다. 순임금은 천하의 부를 소유하였으며, 또한 위로는 종묘에서 제사를 받들어 어버이를 위하여 전대의 영광을 얻게 되었고, 아래로는 자손이 그 창업을 보존하여 어버이를 위하여 후대에 넉넉함을 전하여 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그의 효도가 여느 사람들이 염원하는 것에 비해 뛰어난 것이다. 이로 보면 그의 효도는 참으로 위대하다고 하겠다.
子孫은 謂虞思·陳胡公之屬이라
자손이란 虞思와 陳胡公 등을 말한다.
이는 위에서 논급한 덕과 복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순임금의 덕은 生知安行이기에 인륜을 독실하게 행하고 가르침을 세워 효도의 실상을 극진히 하였다. 이것이 大孝의 本領이다. 여기에서는 효를 말하지 않고 덕만을 말하였지만 효에 관한 뜻은 그 가운데에 담겨 있다. 네 곳의 '必得……'의 必 자는 "그 재질에 따라서 두텁게 북돋아준다"라는 의의와 덕이 있으면 "하늘로부터 거듭 복록이 내린다"라는 뜻을 극명하게 말하였다.
故로 大德은 必得其位하며 必得其祿하며 必得其名하며 必得其壽니라
그러므로 큰 덕은 반드시 그 지위를 얻으며, 반드시 그 녹을 얻으며, 반드시 그 이름을 얻으며, 반드시 그 장수를 누리는 것이다.
순임금의 덕과 복이 모두 융성한 그것을 큰 효도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덕은 복의 근본이요, 복은 덕의 효험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큰 덕을 지녀, 그 덕이 지극할 때 반드시 존귀함으로는 천자가 되어 지위를 얻고, 부유함으로는 천하를 소유하여 녹을 얻으며, 또한 반드시 사람마다 칭송하여 이름을 얻게 되며, 반드시 오랜 생을 얻어 장수를 누리게 된다. 이는 본분의 당연한 바로서, 추구하고자 하지 않아도 스스로 이르러 오는 것이다.
舜은 年百有十歲라
순임금은 향년 110세였다.
"큰 덕을 지닌 자가 지위와 벼슬과 명성과 장수를 얻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데 공자는 덕이 있으면서도 지위, 벼슬, 장수를 누리지 못하고 오로지 성인이라는 명예만을 얻었던 것이다. 이는 氣數의 變 때문일까?" 이것이 바로 성인으로서도 능히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이 무궁하게 전해져 만세에 누리고 있고 자손이 보존되어 왔으니 이 또한 큰 덕이 있으면 반드시 그런 것을 얻게 된다는 징험이다.
이는 하늘이 만물을 내는 뜻을 빌어, 하늘이 성인을 돌아보심을 비유한 것으로 因(必'因'其材而篤焉)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모종의 그 무엇이 있었기에 이를 얻게 된 것이오, 하늘의 입장에서 말하면 사람의 모종의 그것에 '따라서[因]' 그에 상응하는 복록을 내려주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위의 세 구절(天之~培之)은 하나의 뜻으로 연결지어보아야 하며, 끝 구절[傾者覆之]은 윗글에 이어서 별 의미 없이 써놓은 帶來說이다.
故로 天之生物이 必因其材而篤焉하나니 故로 栽者를 培之하고 傾者를 覆之니라
그러므로 하늘이 만물을 내실 때 반드시 그 재질에 따라 두텁게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심어져 있는 것은 북돋아주고, 기울어져 있는 것은 거꾸러뜨리는 것이다.
덕이 지극하면 복이란 스스로 이르러 오기 마련이다. 이는 모두 하늘의 뜻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늘이 만물을 낼 때 반드시 그 본연의 재질에 따라서 두텁게 더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물에 비유하면 나무의 뿌리가 바르게 심어져 있어 순수하고 견고하면 하늘은 그를 따라 기운을 배양해주고 기울어진 식물은 뿌리가 흔들리므로 또한 그를 따라 枯死케 하는것이다. 하늘은 그러한 가운데 사사로운 마음이 없으며 만물 스스로 취하는 바에 따를 뿐이다.
材는 質也오 篤은 厚也오 栽는 植也라 氣至而滋息을 爲培오 氣反而游散則覆이라
材는 재질이요, 篤은 두터움이요, 栽는 심음이다. 기운이 바야흐로 이르러 불어나는 것은 培요, 기운이 쇠진하여 흩어지는 것은 覆이라 한다.
이는 『시경』을 인용하여, 周나라의 하늘과 虞나라의 하늘은 다름이 없이 떳떳함을 밝혀준 것이다. 위의 세 구절[嘉樂~宜人]은 예컨대 '바르게 심어진' 내면의 덕을, 아래 세 구절[受祿~申之]은 '하늘이 북돋아줌,' 그 효응을 밝힌 것이기에, '受祿'의 受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그의 덕이 이와 같은 복록을 받기에 넉넉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保佑命之'는 천명을 받아 나라가 커 나가는 공간적 측면에서, '自天申之'는 장구하게 누릴 수 있는 시간적 차원에서 말한 것인데, 바로 이것이 '복록을 받은' 데 대한 실증이다.
詩曰 嘉樂君子의 憲憲(顯顯)令德이 宜民宜人이라 受祿于天이어늘 保佑命
之하시고 自天申之라 하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아름답고 화락한 군자여! 밝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덕으로 백성을 잘 다스리고 사람(벼슬한 자)을 잘 다스리니, 하늘로부터 복록을 받아 그를 보존하여 도와주고 그를 명하되 하늘로부터 거듭한다"
하니,
『시경』을 살펴보지 못했는가? 아름답고 화락한 군자에게 그처럼 밝게 나타나는 아름다운 덕이 있어 아래로는 백성을 잘 다스리고 또한 벼슬에 있는 자를 잘 다스렸으므로, 이 때문에 하늘의 복록을 받아 몸을 보존하고 하늘이 그가 행하는 일을 도와서 그를 명하여 천자가 되게 하고, 또한하늘로부터 이런 상서가 거듭되어 도와주고 보살펴주는 천명이 끊이지 않아서, 그가 끝없는 복록을 누리게 된 것이다.
詩는 大雅嘉樂之篇이라 假는 當依此作嘉오 憲은 當依詩作顯이라 申은 重也라
詩는 「대아·가락」편이다. 『시경』에 쓰인 假 자는 『중용』을 따라서 嘉자로 써야 하고, 『중용』에 쓰인 憲 자는 『시경』에 준하여 顯 자로 써야한다. 申은 거듭함이다.
이는 위의 시구 가운데 '受命' 두 글자를 이어서 큰 덕을 소유한 자는 반드시 그와 같이 된다는 점으로 결론짓고 있다. 그러나 큰 덕의 이면에는 孝의 뜻을 포괄하고 있기에 이로써 본 장 전체의 뜻을 끝맺고 있다. 천명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때, 그 권능은 하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덕에 달려 있음을 엿볼 수 있다.
故로 大德者는 必受命이니라 그러므로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천명을 받는다."
하늘의 뜻으로 살펴보면, 큰 덕을 지닌 사람은 반드시 하늘의 거듭되는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는 것이다. 이는 하늘이 독실한 뜻을 보여줌이며, 벼슬, 복록, 명예, 장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것은 필연의 이치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때문에 순임금은 성인의 덕이 있어 천자의 높은 지위, 사해의 부유, 종묘의 제향, 자손의 보존을 모두 누려 큰 효자가 된 것이다. 이는 고금에 따라갈 수 없는 일이다.
受命者는 受天命爲天子也라
受命은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됨을 말한다.
右는 第十七章이라 此는 由庸行之常하야 推之하야 以極其至하니 見道之用이 廣也라 而其所以然者는 則爲體 微矣라 後二章도 亦此意니라
위는 제17장이다. 이는 庸行의 떳떳함으로 말미암아 그 지극함의 극치에까지 미뤄 나아가 도의 用이 광범위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도의 體로서 은미한 것이다. 뒤의 두 장(제18~19장) 또한 이러한 뜻이다.
이 장은 문왕, 무왕, 주공이 중용의 도를 극진히 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朱子의 『章句』에서는 이를 세 단락으로 나누어 대등한 관계로 논술하였다. 첫 절은 문왕에 대하여, 아래 두 절은 무왕과 주공이 자식으로서 잘 계승한 점을 자세히 논술하였다.
이 절의 첫머리에서 갑자기 "문왕은 걱정이 없는 사람이다" 말한 것은, 문왕 자신에게 있어서 끊임없는 밝음과 敬, 그리고 지극한 선에 그침이 있었기[止於至善] 때문이다. 이로 보면 "도를 극진히 다하였다"라는 것은 예전에 이미 이루어놓은 것이며, 때문에 여기에서는 그의 父子(王季, 武王) 를 찬미하고 있을 뿐이다. 두 곳의 '以'(以王季爲父, 以武王爲子) 자는 도를 극진히 다한 문왕을 상징한 것으로, 그와 같은 문왕에다가 왕계로써 아버지를, 무왕으로 아들을 삼았다는 것이다. 作에 대해서 왕계만을 말한 것은 멀리 있는 선조보다 가까이 부친을 들어 예시한 것이고, 述에 대해서 무왕만을 말한 것은 그 중에 가장 존귀한 자를 예로 든 것이다. 作·述은 창업과 계승을 말하는데, 그들 또한 도를 극진히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子曰 無憂者는 其惟文王乎신저 以王季爲父하시고 以武王爲子하시니 父作
之어시늘 子述之하시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근심이 없는 분은 오로지 문왕일 뿐이다. 왕계로써 아버지를 삼고 무왕으로써 아들을 삼으니, 아버지가 처음 왕업을 일으켰는데, 아들이 뒤이어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자사는 문왕, 무왕, 주공에 대해 찬미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의 큰 점을 밝혔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가족관계를 유지하여 아무런 근심이 없었던 사람은 오로지 문왕뿐이다. 문왕은 어진 왕계를 아버지로 하였고, 슬기로운 무왕을 자식으로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처음 왕업을 일으키는 데 부지런히 하여 앞서 나라를 창업하였고, 그의 아들은 큰 뜻을 계승하여 뒤이어 끊임없이 전승하였다. 이는 선대와 후손이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다. 창업과 계승에 있어 모두 그들을 힘입은 바 있으니, 그에게 무슨 걱정이 있었겠는가.
此는 言文王之事라 書에 言王季其勤王家라 하니 盖其所作이 亦積功累仁之事也라
이는 문왕의 일을 말한다. 『서경』(「武成」)에 "왕계는 왕가를 이룩하려는데 부지런하였다" 하니, 그가 왕업을 일으킨 바 또한 공적을 쌓고 仁政을 쌓은 일이었다.
이는 무왕이 자식으로서의 계승을 잘한 데 대해 말한 것이다. 첫 구절에서는 三王(大王, 王季, 文王)을 함께 열거했지만, 자식으로서의 계승이 본 절의 주된 뜻인 바, 무왕 또한 걱정이 없었던 것은 부친(문왕)의 창업에 근본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첫 절(「無憂」)에서 王季를 들어 말하고, 이를 뒤이어 전환하여 太王을 돌출시켜 말함으로써 유구한 계승의 실마리[纘緖]를 밝혀주었는데, 이는 積功累仁의 왕업 계승을 말한 것이다. '戎衣' 구절은 선조의 실마리를 계승해 오다가 무왕 때 이르러 정벌을 일으키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다. "빛나는 명성[顯名]을 잃지 않았다[不失]" 말한 것은 짐작[斟酌 : 商量]이 있는 것으로, 순임금의 必得과는 다른 차원이다. "尊爲天子……子孫保之" 네 구절은 순임금의 입장에서 논할 때 모든 복이 스스로 이르러 옴을 말하였지만, 무왕에게는 자연스럽지 못한 强作이 있다는 뜻으로, 이는 각기 행하는 바가 달랐기 때문이다.
武王이 纘大(太)王·王季·文王之緖하사 壹戎衣而有天下하사대 身不失天下之顯名하사 尊爲天子시고 富有四海之內하사 宗廟饗之하시며 子孫保之하시니라
무왕이 태왕, 왕계, 문왕의 실마리를 계승하여, 한 번 갑옷을 입고서 천하를 소유하였으나 천하에 빛나는 이름을 잃지 않고서 존귀함으로는 천자가 되었고, 부유함으로는 사해를 소유하여 종묘에서 제사를 받들고 자손을 보존하였다.
무왕이 자식으로서의 계승을 잘한 것을 예로 들어 말하면, 태왕은 왕업의 터전을 처음 이룩하였고, 왕계는 왕업에 부지런히 하였고, 문왕은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여 주나라의 왕업을 이루고, 뒤이어서 무왕이 그 실마리를 계승하였다. 그 실마리는 본디 천하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사로운욕심이 아니었지만 후일 紂가 포악한 정치를 자행하자, 무왕이 어쩔 수 없이 한 차례 戎衣(무력 사용을 뜻함)를 입고서 紂를 정벌하여 천하를 소유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신하로서 임금을 정벌한 일이니만큼 으레 그의 명성을 잃을 법도한데, 천하 사람들은 그것이 천명에 따르고 민심에 부응했던 義擧였음을 알고서 모두 그를 칭송한 까닭에 무왕은 충성과 효도라는 찬란한 명성을 잃지 않았다. 이에 제후의 지위에서 왕으로 탈바꿈되어 천자로 높여지게 되었고, 제후의 一國에서 천하의 소유로 탈바꿈되어 四海의 부를 누리게 되었고, 종묘에 제사 받들되 높다랗게 일곱 채의 사당이 모셔졌고, 자손을 보존하여 길이 영화를 누렸었다. 이는 모두가 무왕이 선대의 실마리를 계승하고 문왕의 왕업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보면 문왕에게 무슨 근심이 있었겠는가.
此는 言武王之事라 纘은 繼也오 大王은 王季之父也라 書云 大王이 肇基王迹이라 하고 詩云 至于大王하야 實始翦商이라 하니라 緖는 業也오 戎衣는 甲冑之屬이라 壹戎衣는 武成文이니 言壹著戎衣以伐紂也라
이는 무왕의 일을 말한 것이다. 纘은 계승이요, 太王은 왕계의 부친이다. 『서경』(「武成」)에서는 "태왕이 처음으로 왕업의 터전을 닦았다" 하고, 『시경』(「魯頌·閟宮」)에서는 "태왕에 이르러 실제로 처음 상나라를 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緖는 業이요, 戎衣는 갑옷과 투구 따위이다. 壹戎衣는 「무성」편의 글이니, 한 차례 융의를 입고서 紂를 정벌함을 말한다.
"몸에 천하의 顯名을 잃지 않았다"라는 말과 "반드시 그 명성을 얻게 되었다"라는 말은 차이가 있는가? 이를 살펴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하다. 요순과 탕무의 분수에는 참으로 등급이 있는 것이다. 이는 공자의 말에서도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다. "순임금 풍악 韶에 대하여 지극히 아름답지만 지극히 선하지는 못하다"라고 한 말에서 볼 수 있다.
이는 주공이 무왕을 대신하여, 자식으로서의 계승을 잘한 데 대해서 서술한 것이다. '末受命'은 뒷글을 일으키려는 의도에서 쓴 것이지만, 末 자에는 또한 무왕이 노년에 이르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정벌을 감행했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成文武之德은 綱領이며, 이에 문왕, 무왕을 겸하여 말한 것은 무왕 또한 문왕과 같음을 뜻한다. "追王大王王季, 上祀先公以天子之禮" 이하 두 구절은 효성으로 先人의 제사를 받드는, 즉 자식으로서의 덕을 이룩한 그의 효를 말하였고, "斯禮也……無貴賤一也"는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덕을 말한다. '德(周公, 成文武之德)'은 주도면밀한 制禮, 作樂을 말하며, "追王……" 구절에서 문왕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왕의 생전에 이미 왕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이며, "上祀……" 구절에서 太王, 王季를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왕으로 추존하였기에 굳이 上祀에서 말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태왕 왕계에게는 王號는 있지만 諡號가 없는 것은 문왕에 비하여 그 禮가 강등된 것인데, 그 이유는 王績의 유래와 大統의 내력이 다른 데에서 기인하며, 선조의 제사를 천자와 같이 받들면서도 시호가 없는 것은 그 제도가 태왕 왕계에 비하여 더 한층 생략된 것으로, 세대의 遠近과 공덕의 淺深 척도가 다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父爲大夫' 이하 '祭以大夫'까지의 두 단락은 上祀의 예를 모방한 것으로, 다만 제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부와 선비를 예로 들었으나 제후와 서민에까지 미침을 유추해볼 수 있다. '期之喪' 이하 끝 구절까지는 또한 祭禮에 이어서 미루어 간 것이다. 『장구』의 '推己及人' 구절은 斯禮也 이하의 문장을 총괄적으로 끝맺고 있다.
武王이 末受命이어시늘 周公이 成文武之德하사 追王大王·王季하시고 上祀先公以天子之禮하시니 斯禮也 達乎諸侯大夫及士庶人하니 父爲大夫오 子爲士어든 葬以大夫오 祭以士하며 父爲士오 子爲大夫어든 葬以士오 祭以大夫하며 期之喪은 達乎大夫하고 三年之喪은 達乎天子하니 父母之喪은 無貴賤 一也니라
무왕이 만년에 이르러서야 천명을 받자, 주공이 문왕과 무왕의 덕을 이루어 태왕과 왕계를 왕으로 추존하고, 위로 선조의 제사를 천자의 예로써 받들어 거행하니, 이러한 예는 제후와 대부 및 선비와 서민에게까지도 통하는 것이다. 아버지가 대부요 아들이 선비면 장례는 대부의 예로 하고 제사는 선비의 예로 하며, 아버지가 선비요 아들이 대부면 장례는 선비의 예로 하고 제사는 대부의 예로 하며, 期年(1년)喪은 대부까지 이르고, 3년상은 천자에까지 이르니, 부모의 상은 귀천에 관계없이 한 가지이다."
무왕이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되었을 때, 그는 이미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왕이 문왕을 계승했던 일들을 당시에 미처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주공이 문무의 덕을 이루어서 그들이 펼치려고 했었던 효도를 펴고 넓히지 못했던 은혜를 널리 베풀었다. 이의 일환으로 가깝게는 古公亶父를 太王으로, 公季를 王季로 추존하였다. 그들은 천자의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호칭만은 왕으로 높였으며, 멀리는 組紺 이상의 선조로부터 후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조들에게 천자의 제례에 따라서 제사를 받들었다. 물론 그들은 한낱 제후로서 천자의 지위에까지는 오르진 못했지만 그들의 제사를 천자의 예의로 받든 것이다. 이 같은 예절은 자식으로서의 지극한 인정인데, 어찌 천자 자신만을 위하는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아래로 제후와 대부 및 선비와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들의 분수에 따라서 그들의 효심을 극진히 다하도록 하였다. 가령 아버지는 대부요 자식이 선비면 장례는 대부의 예로 거행하되 제사는 선비의 예로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의 지위를 깎아내리는 뜻이 아니다. 이와는 반대로 아버지는 선비요 자식이 대부면 장례는 선비의 예로 거행하되 제사는 대부의 예로 행하였는데, 이는 분수에 넘치는 참람 한 일이 아니다. 葬禮는 죽은 자의 지위를 따라서 거행하고, 祭禮는 살아 있는 자의 녹봉에 따라서 거행하는 것은 천하에 공통되는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에 또다시 상복의 제도를 마련하여 기년복(1년상)의 초상은 서민으로부터 대부까지 함께하니, 이는 친척이라는 친분으로써 존귀한 벼슬을 대적할 수 없기에 喪期를 낮추는 壓尊 때문이며, 3년복의 초상은 서민으로부터 위로 천자에까지 모두 함께하니, 자식은 부모의 초상에 있어서 귀천의 구별에 관계없이 매일반이기 때문이다. 이는 존귀한 벼슬로서도 아버지라는 친분에 감히 맞설 수 없는, '正服'을 따랐기 때문이다. 제사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줄어들고 위로 올라갈수록 융숭함을 다하며, 상례는 아래로 내려올수록 자상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생략되는 것이다. 이 모두가 주공이 이룬 덕으로, 무왕이 못다 계승한 바를 계승한 것이다. 문왕은 또한 무슨 근심이 있었겠는가. 이를 살펴보면 도의 費隱을 찾아볼 수 있다.
此는 言周公之事라 末은 猶老也라 追王은 盖推文武之意하야 以及乎王迹之所起也라 先公은 組紺以上 至后稷也라 上祀先公以天子之禮는 又推大王王季之意하야 以及於無窮也라 制爲禮法하야 以及天下호대 使葬用死者之爵하고 祭用生者之祿하며 喪服은 自期以下로 諸侯絶하고 大夫降이로되 而父母之喪에 上下同之는 推己以及人也일새니라
이는 주공의 일에 대해 말한 것이다. 末은 늙음과 같다. 追王은 문왕 무왕의 뜻을 미루어 처음 왕업을 일으킨 사람에까지 미쳐가는 것이다. 先公은 組紺 이상으로부터 후직까지이다. 위로 선조의 제사를 천자의 예로 행함은 또한 태왕 왕계의 뜻을 미루어 무궁한 선대에까지 미친 것이다. 예법을 제정하여 천하에 미치되, 장례는 죽은 자의 벼슬로 시행하고, 제사는 살아 있는 자의 녹을 따르며, 상복은 1년 이하의 상에 대해서 제후는 전혀 입지 않고 대부는 기간을 줄이지만, 부모의 상에 상하가 모두 같이 입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쳐가기 때문이다.
『史記』 「周本紀」를 고찰해보면, 后稷의 또 다른 성은 姬氏이다. 后稷이 죽은 뒤, 아들 不窋로부터 鞠陶, 公劉, 慶節, 皇僕, 差弗, 毁隃, 公非, 高圉, 亞圉, 公叔祖類, 古公亶父로 왕위가 계승되어 왔다. 組紺은 公叔祖類이자 古公의 부친이다.
右는 第十八章이라 위는 제18장이다.
이 장은 무왕, 주공의 達孝를 찬탄한 말로서, 위 제18장을 이어 말한 것이다. 첫 절의 達孝는 본 장의 강령이요, 제2절의 善繼·善述은 조목이요, 제3절은 제사를 주로 말한 것으로 繼述의 善處이며, 끝 절은 上帝와 선조의 제사를 함께 말한 것으로 또한 繼述 중의 한 일이다. 이를 종합해보면 인륜을 극진히 하고 제도를 다한 것, 이 모두가 효도이며, 곧 도 아닌 것이 없다.
순임금의 효도는 하늘처럼 크기에 이름할 수 없어 大孝라 하고, 무왕, 주공의 효도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효자로 일컬어, 다시는 그에 대한 시비의 말들이 없었던 까닭에 達孝라 말한다. 또 達 자에는 인륜을 극진히 하고제도를 다했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子曰 武王周公은 其達孝矣乎인저
공자가 말하였다. "무왕과 주공은 모두가 칭찬하는 효자이다."
자사는 무왕, 주공에 대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의 큰 점을 밝혀 주었다.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금으로서 옛 선조를 빛내고 후손에게 전한 바 있는 것을 효도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함께 일컫는 효도를 達孝라 한다. 오직 무왕, 주공은 천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는 達孝이다.
達은 通也라 承上章而言 武王周公之孝는 乃天下之人이 通謂之孝이니 猶孟子之言達尊也라
達은 두루 통하는 것이다. 위 장을 이어서 무왕과 주공의 효도는 천하 사람이 모두 일컫는 효자임을 말하니, 『맹자』(「公孫丑 下」)에서 말한 '達尊' 의 達 자와 같다.
이는 무왕, 주공에 밀착시켜 말하였지만 하나의 孝를 제시하여 推論한 것으로, 효를 이룰 수 있는 곳을 나타내 보이는 만큼 두 곳의 '善(善繼……, 善述……)' 자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이는 수시로 변동하는 것이기에, 도리상 마땅히 행해야 할 것과 분수에 알맞게 해야 할 일들을 말하니, 예에 밝고 제도가 구비되어 仁義가 지극한 것이다. 이는 곧 선인들이 원했던 뜻이요, 꼭 이루려고 했던 일들이다. 이는 모두가 자신의 처지에서 본 것이다.
夫孝者는 善繼人之志하며 善述人之事者也니라
효라는 것은 先人(선친)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의 일을 잘 따르는 것이다.
이른바 효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선인이 뜻을 두었지만 미처 이루지 못한 일을 성취시키는 것을 계승[繼]이라 하는데, 이는 굳이 선인이 살아 생전에 가졌던 뜻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내가 가진 마음이 천리에 부합되면 이는 시대를 초월해서 서로 느끼는, 隔世相感의 계승이다. 그리고 본받아야 할 선인의 훌륭한 일을 따라서 행하는 것을 이어받은 것[述]이라 하는데, 이는 굳이 선인 생전의 일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나의 행실이 바르면 더러는 처지가 바뀌었을지라도 모두 같은 일[易地皆然]이니, 이것이 바로 선인의 일을 잘 따르는 것이다. 무왕, 주공의 효도를 모두가 칭찬한다는 것은 바로 이를 말한다.
上章은 言武王이 纘大王·王季·文王之緖하야 以有天下하고 而周公이 成文武之德하야 以追崇其先祖하니 此는 繼志述事之大者也라 下文에 又以其所制祭祀之禮 通于上下者로 言之니라
위 장에서는 무왕이 태왕, 왕계, 문왕의 실마리를 이어서 천하를 소유하고, 주공이 문왕, 무왕의 덕을 이루어 선조를 追崇한 일들을 말하니, 이는 선인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데 있어 큰 것이다. 뒷글 또한 주공이 제정한 제사의 예가 상하에 통용되는 바로써 말하였다.
이는 祖宗에 중점을 두고서 "그(선조)가 존경했던 사람을 경외한다[敬其所尊]"라는 점에 비추어 말한 것이다. '春秋' 두 글자는 이 절의 뜻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그 ……을 수리하고, 그 ……을 진설하다[修其……, 陳其……]"라는 것은 모두 '제철의 음식[時食]'을 올리고자 종묘를 수리하고 寶器를 진설한 것이다. 祖廟는 천자의 사당을, 修는 정결히 함을, 宗器는 天府에 소장하여 대대로 보배로 전해 오는 그릇을 말하며, 裳衣는 선조가 남긴 의복으로서 이를 尸童에게 전해 주어 신이 강림케 하는 것이며, 時食은 살아 있는 자의 음식을 신에게 올리는 것으로 신을 섬기되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받드는 것이다. 이는 아래 절과 아울러 한 때의 일이니, 時祭에다가 祫祭를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春秋에 修其祖廟하며 陳其宗器하며 設其裳衣하며 薦其時食이니라
봄가을에는 선조의 사당을 수리하고, 종묘의 器物을 진열하고, 의복을 진설하고, 제철의 음식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선인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하고 따른다는 것이, 어찌 선인의 업을 계승하고 선인의 덕을 따르는 데 그치겠는가. 위에서 통용되는 제사의 예법으로 말하면, 봄과 가을에는 처음으로 제사를 받들게 된다. 이에 제사를 받들고자 선조의 사당을 수리하는 것은 엄숙하고 정결함을 다하고자함이며, 선대로부터 소장해온 종묘의 기물들을 진열하는 것은 오래오래 지켜 내려오고 있음을 보임이며, 선조가 남긴 의복이 있으면 그 의복을 진설하여 시동에게 전해주는 것은 신이 의지할 곳을 마련해줄 뿐 아니라, 또한 선조가 계시는 듯이 생각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계절의 음식물에는 각기 알맞은 음식들이 있다. 계절에 알맞은 음식을 올리고 경건히 고하는 것은 신명이 흠향할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또한 계절의 변화를 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왕, 주공이 계절에 따라서 예의를 다하는 것이 곧 선왕의 뜻과 일을 계승하고 따르는 것이다.
祖廟는 天子 七, 諸侯 五, 大夫 三, 適士 二, 官師 一이라 宗器는 先世所藏之重器니 若周之赤刀·大訓·天球·河圖之屬也라 裳衣는 先祖之遺衣服이니 祭則設之以授尸也라 時食은 四時之食에 各有其物이니 如春行羔豚膳膏香之類 是也라
선조의 사당은 천자는 7廟, 제후는 5묘, 대부는 3묘, 適士는 2묘, 官師는 1묘이다. 宗器는 선대로부터 소장되어온 귀중한 그릇이니, 주나라의 赤刀, 大訓, 天球, 河圖와 같은 유이며, 裳衣는 선조가 남긴 의복이니, 제사를 지낼 때 이를 진설하여 시동에게 전해주는 옷이다. 時食은 사계절에 따라서 각각 알맞은 음식물이 있으니, "봄에는 염소, 돼지고기를 쓰되 쇠기름의 향으로 요리하는 것"(『周禮』 「天官」)과 같은 유이다.
時食은 사계절의 음식물을 말한다. 『장구』에서 인용한 『周禮』 이외에도 『禮記』 「月令」에서는 "늦봄에는 전어를, 초여름에는 보리를, 5월에는 기장과 복숭아를, 초가을에는 새 곡식을, 8월에는 麻를, 늦가을에는 벼를, 섣달에는 물고기를 올린다" 하며, 「王制」에서는 "서민은 봄에는 아욱나물을, 여름에는 보리를, 가을에는 기장을, 겨울에는 벼를 올린다" 한다.
이는 아랫사람까지 빠뜨림 없이 대접하는 것으로, 선인이 가까이 했던 사람 모두를 사랑한다는 뜻에 비추어 말한 것이다. 宗廟와 祖廟는 같은 것으로서, 두 글자는 앞에서와 같이 이 절의 전체 뜻을 관통하고 있다. '宗廟之禮'의 禮는 자손들이 서는 班列의 예이며, 子孫들 중에 제사를 도와 일을 집행하는 사람은 각기 맡은 바의 일에 따라 차례대로 행하고 맡은 일이 없는 자들은 동편 계단[阼階]의 아래에 서게 된다. 昭穆으로 차례를 정하여 세대별 代數가 명백하도록 하는데, 이는 반열의 앞뒤 차례를 정한 것이지, 祖考처럼 좌우로 나누어 서는 것은 아니다. 벼슬에는 귀천이 있으나 이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관리이므로 관리 가운데에서도 벼슬이 낮은 이를 구별하여 尊卑를 구별하는데, 이 반열은 서쪽 계단[西階]의 아래에 있다. 序事는 현인을 구별하는 것으로 어질지 못한 자에게는 미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제사에 참여한 선비가 모두 어진 인물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재능을 분별하여 사람을 쓸 때 그들의 능력에 맞도록 등용하고자 함이다. 旅酬의 禮는 西階, 阼階의 아래에서 행해진다. 빈객의 제자와 형제의 아들이 각기 술잔을 들어 여러 어른들에게 올리면서 그들 스스로 먼저 마시는 것은 어른들에게 마시도록 권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권하는 下爲上이다. 賤이란 항렬이 낮거나 어린 사람을 말한 것이지, 어린아이[童子]를 말한 것은 아니다. 자손이 차례대로 설 때 昭穆이 같으면 벼슬로써 서열을 정하고, 벼슬이 같으면 나이로 정하는데, 이는 나이의 비중이 벼슬에 비해서 가볍기 때문이다. 그러나 燕毛에서는 昭穆으로 구분하여 연령으로 논할 뿐, 벼슬에 관계하지 않는다.
宗廟之禮는 所以序昭穆也오 序爵은 所以辨貴賤也오 序事는 所以辨賢也오 旅酬에 下爲上은 所以逮賤也오 燕毛는 所以序齒也니라
종묘 班列의 예는 昭穆의 차례를 정하고자 함이며, 벼슬에 따라 차례를 정하는 것은 귀천을 분별하고자 함이며, 일을 차례로 맡기는 것은 어진 이를 분별하고자 함이며, 많은 사람이 모여서 飮福의 술잔을 주고받을 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위하여 술잔을 권하는 것은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고자 함이며, 잔치할 때에 머리카락의 색깔로써 차례를 정하는 것은 나이의 서열을 분별하고자 함이다.
또한 아래에까지 통용되는 제사를 예로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같은 성씨의 자손들이 모두 모이면 함께 서는 줄과 차례를 정하는 예는 누가 昭이고 누가 穆인가를 분별하여 친척을 가까이 하되 차례가 어지럽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를 돕고자 찾아오는 다른 성씨 가운데 바깥 신하로는 公, 侯, 伯, 子, 男, 내부 신하로는 卿, 大夫, 士의 벼슬에 따라서 서열을 정하니, 벼슬의 귀천을 분별하여 귀한 이를 귀히 여기되 참람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성씨와 다른 성씨에 따라서 각기 맡아야 할 일이 있는데, 맡아야 할 일의 차례를 정하는 것은 덕행, 위의, 일처리의 능력을 분별함이니, 이는 어진 이를 어질게 여겨 어진이의 재덕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가 끝날 즈음에 음복주를 마시게 되는데, 같은 성씨의 형제가 다른 성씨에게 잔을 올리면 손님은 그 형제에게 잔을 되돌려주고, 또다시 많은 사람들과 잔을 오가며 서로 주고받는 것을 旅酬라고 한다. 이 때 손님과 형제들의 자제들은 제각기 위에 있는 부형을 위하여 술잔을 올리니 이는 천한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바로써 어린이를 사랑하여 그들에게도 종묘에서 공경하는 마음을 펴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를 끝마치고 다른 성씨의 손님이 물러갔을 때 私室에서 같은 성씨의 친척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은 선조의 은혜를 함께 널리 하는 일이다. 이 때에는 벼슬의 높낮이에 관계치 않고, 다만 머리카락의 색깔로써 앉는 자리를 정하니, 이는 소목의 순서와 나이순에 따라 정하는 것으로, 노인을 받드는 공경을 표하는 것이다. 무왕, 주공이 예의로 인하여 제도를 다하는 것 또한 선왕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르는 일이 아니겠는가.
宗廟之次는 左爲昭오 右爲穆而子孫이 亦以爲序하야 有事於太廟면 則子姓兄弟의 群昭群穆이 咸在而不失其倫焉이라 爵은 公侯卿大夫也오 事는 宗祝有司之職事也라 旅는 衆也오 酬는 導飮也라 旅酬之禮에 賓弟子兄弟之子가 各擧觶於其長而衆相酬하니 蓋宗廟之中에 以有事爲榮이라 故逮及賤者히 使亦得以申其敬也라 燕毛는 祭畢而燕이면 則以毛髮之色으로 別長幼하야 爲坐次也라 齒는 年數也라
종묘의 차례는 왼편은 昭, 오른편은 穆이 되는데, 자손 또한 이로 차례를 삼아, 태묘에 일이 있을 때에는 자손과 형제의 여러 昭와 穆이 다함께 태묘에 참석하되 그 차례를 잃지 않는 것이다. 爵은 公, 侯, 卿, 大夫이며, 事는 宗祝, 有司 등이 맡은 일이다. 旅는 많은 사람이요, 酬는 술을 마시도록 권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서로 술잔을 주고받을 때 손님의 자제와 형제의 아들들이 각기 그 어른에게 술잔을 올려 많은 사람이 잔을 서로 주고받는 것이니, 종묘에서는 일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천한 자에게까지 이를 미쳐 그들 또한 공경하는 마음을 펴도록 하는 것이다. 燕毛는 제사를 끝마친 뒤 잔치를 베풀 때에는 머리카락의 색깔로써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하여 앉는 차례를 정하는 것이다. 齒는 연령이다.
昭穆의 기원은 왕조 성립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가족 상호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고대 사상가들은 이를 고대 풍속에 의해서 성립된 인륜질서의 새로운 발전으로 보았다. 사당의 제도는 선조를 위하여 경영된 것으로 시대의 변천에 따라 발전되면서 신분에 따른 엄격한 제도가 완성되었는데, 『예기』 「王制」에 의하면 "천자는 七廟, 제후는 五廟, 대부는 三廟, 士는 一廟를 건립하여 제사 올리고, 서민은 寢(主室)에서 제사 올린다" 한다. 이에 제후의 廟制를 예로 들어 도표를 작성하면 그 나라 태조의 사당은 남향으로 경영하여 중앙에 위치하고, 제2대조의 昭는 태조 사당의 남쪽 왼쪽에, 제3대조의 穆은 오른쪽에, 그리고 제4대조의 昭는 제2대조의 남쪽에, 제5대조의 穆은 제3대조의 남쪽에 경영한다. 만일 제6대조에 이르면 신주를 설치할 사당이 없지만 해당 신주는 昭에 해당된다. 이에 제5대조의 穆의 맞은편에 제사를 드려야 하므로, 昭系列의 제4대조의 昭와 제2대조의 昭를 차례대로 위로 옮겨 제2대조 昭의 신주를 태조 묘에서 제사드리고, 제4대조 昭廟를 개축하여 새로이 제6대조의 昭廟를 삼으며, 그의 아들이 죽으면 穆系列도 이와 같이 옮겨지는 것이다. 周王室에서는 문왕의 사당(穆)과 무왕의 사당(昭)의 不祧廟를 더하고, 后稷을 태조로 삼았다. 대부는 제후에 비해 먼 선조의 昭穆 二廟를 줄이고, 여러 선조를 한 곳에 모아 제사를 지내는 士의 一廟와 서민의 寢(主室)은 室의 중앙에 태조의 위패를 설치하고 북측의 남향으로 昭系列을, 남측의 북향으로 穆系列을 설치하여 제사지낸다. 通說에 의하면 昭穆의 명칭은 남쪽의 밝음과 북쪽의 어둠의 의의를 취한 것이라 하며, 昭穆의 廟制는 세대질서를 상징한 것이다. 당시의 대가족제도에 의하면 제사 때에 一族이 다 모여 세대별로 모이게 됨에 따라서 왼편은 昭, 오른편은 穆이 되는 것은 死者의 소목임과 동시에 群昭·群穆은 生者의 소목이기도 하다. 이처럼 종묘의 예는 죽은 자의 소목을 차례로 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生者의 소목을 차례로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목의 관계는 친족관계, 長幼관계의 질서를 바로잡고 강화해주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해주는 예문도 찾아볼 수 있다. 『예기』(「祭統」)에 의하면 "제사는 昭穆이다. 소목은 父子, 遠近, 長幼, 親疎의 차례를 분별하여 혼란을 막으려는 것이다" 하였다.
여기서는 위 두 절을 끝맺으면서 그들의 지극한 효를 칭찬하여 '敬·愛 (敬其所尊, 愛其所親)' 두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敬·愛는 예악에 의하여 받들어지며, 예악 또한 그 자리에 따라서 그 자리에 알맞은 예악을 쓰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천자가 이를 잘 계승하여 따르는 부분으로 말한 것이다. 선조가 높였던 사람을 공경한다는 것은 본 장 제3절에, 사랑했던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제4절에 상응하며, '其(踐其……, 行其……, 奏其……, 敬其……, 愛其……)'는 문왕을 가리킨다. 다시 말하면 태왕과 왕계는 문왕이 존경했던 사람들이다. 事死 이하 두 구절은 윗글에 이어서 단정지은 말이다. 천하 사람이 칭찬하는 것으로 말하면 達孝, 자신의 극진한 효성으로 말하면 至孝라 한다.
踐其位하야 行其禮하며 奏其樂하며 敬其所尊하며 愛其所親하며 事死如事生하며 事亡如事存이 孝之至也니라
그(선왕) 자리를 밟으면서 선왕의 예를 행하고, 선왕의 풍악을 연주하고, 선왕이 존경하던 이를 공경하고, 선왕이 친애하던 이를 사랑하고, 죽은 자를 산 사람처럼 섬기고, 오래 전에 죽은 이를 살아 계시는 사람처럼 섬기는 것이 지극한 효도이다.
이를 살펴보면, 어떠한 것이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일을 잘 이어받은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선왕이 선조를 대할 때에는 반드시 神位가 있기 마련인데, 무왕과 주공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제후와 천자의 신위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밟아 나갈 곳을 밟아 나가는 것은 곧 선왕의 신위를 밟아 나가는 것이다. 선왕이 선조에게 降神과 獻酌을 할 때에는 반드시 예절이 있게 마련인데, 무왕, 주공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제후와 천자의 예절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는 것은 바로 선왕의 예절로 행한 셈이다. 선왕이 선조에게 성대한 음식을 올릴 때면 반드시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무왕, 주공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제후와 천자의 음악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땅히 연주해야 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은 곧 선왕의 음악을 연주한 셈이다. 선왕이 존경하던 사람은 선조들이다. 무왕, 주공은 봄가을로 모두에게 빠뜨림 없이 예의를 갖추고 정성을 다하여 선왕이 존경했던 이를 공경하였다. 선왕이 친애하였던 사람은 자손과 신하와 백성들이다. 무왕, 주공은 종묘의 큰 제향에 많은 음식을 차려놓고 일찍이 선왕이 친애하였던 사람들을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였다. 이는 선왕이 죽었지만 무왕, 주공은 살아 계시는 것처럼 섬긴 것이며, 이미 돌아가시어 있지 않는데도 무왕, 주공은 그들을 생존해 계시는 듯이 섬겨 온 것이다. 참으로 선인의 뜻과 일을 잘 계승하고 이어받은 지극한 효도이니, 천하 사람이 모두 칭찬하는 효도[達孝]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踐은 猶履也며 其는 指先王也라 所尊·所親은 先王之祖考와 子孫臣庶也라 始死를 謂之死오 旣葬則曰反而亡焉하니 皆指先王也라 此는 結上文兩節이니 皆繼志述事之意也라
踐은 밟는다는 뜻과 같으며, 其는 선왕을 가리킨다. 존경하고 사랑한 이들은 선왕의 선조와 자손, 그리고 신하와 백성들이다. 처음 죽었을 때(장례 이전)를 死라 하고, 이미 장례를 치른 뒤에는 돌아가야 할 곳으로 돌아가 이 세상에 없는[亡] 것이니, 이는 모두 선왕을 가리킨 것이다. 이는 위의 두 절을 끝맺음이니, 모두 선인의 뜻을 계승하고 일을 따른다는 뜻이다.
이는 위의 지극한 효에 이어서 말했을 뿐, 또 다른 뜻은 가지고 있지 않다. 선왕은 일개 제후이기에 社祭는 있으나 천자의 제례인 郊祭는 없었고, 제후의 제례인 가을제사[嘗祭]는 있으나 천자의 큰 제사인 禘祭는 없었다. 무왕, 주공은 그 시대에 따른 제도를 갖춤으로써 上帝에게 올리는 제향과 부모를 받드는 제향을 함께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繼志述事에 관한 하나의 일이다. '明乎……'에서 '……掌乎'까지의 세 구절은 상제에게 제사지내는 의의를 밝힌 것으로, 이는 반드시 백성을 仁으로 기르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밝게 아는 자만이 효로써 천하를 다스릴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무왕, 주공이 훌륭한 예악을 제정한 데 대한 칭찬의 말이지, 그 의의를 잘 밝힌 사람이라는 데에 중점을 둔 것은 아니다. 郊社와 禘祭에 대해서 살펴보면 동짓날 南郊의 圓丘에서 天祭를, 하짓날에는 北郊의 方澤에서 地祭를 지낸다고 한다. 天祭와 地祭는 대등한 것인데, 오직 천자만이 거행할 수 있는 祭典이며, 禘祭는 국가의 창업주인 태조를 낳아준 그 선조를 태조와 함께 배향하여 제사를 올리는 데 그칠 뿐, 기타 사당의 신주는 이에 참예하지 못한다.
郊社之禮는 所以事上帝也오 宗廟之禮는 所以祀乎其先也니 明乎郊社之禮와 禘嘗之義면 治國은 其如示諸掌乎인저
郊社의 제례는 상제를 섬기는 바이며, 종묘의 제례는 선조에게 제사를 올리는 바이니, 郊社의 禮와 禘嘗의 義를 밝게 알면 나라를 다스림은 마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무왕 주공이 제정했던 제례는 여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를 종합하여 말하면 하늘과 땅을 섬기는 郊社의 제례가 있는데, 동짓날 圓丘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짓날 方澤에서 땅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는 上帝와 后土를 섬기는 것으로, 만물을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다. 또 종묘의 제례가 있는데, 5년마다 먼 선조에게 禘祭를 높이 받들고 3개월마다 음식을 나누어 올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선조에게 제사를 받들어 선조의 크신 공덕을 보답하고자 함이다. 이러한 예절과 의리는 오로지 성인만이 제정할 수 있으며, 또한 성인만이 밝힐 수 있다. 만일 郊社에서 상제를 섬기는 예절과 禘嘗으로 선조를 받드는 의의를 밝게 알면 천하 이치가 밝혀지지 않을 수 없으며, 진실한 마음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이로써 나라를 다스림이란 손바닥을 보는 듯이 쉬운 일이다.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이[幽·明]가 하나의 이치라 하지만 보이지 않는 신의 이치는 더욱 알기 어려우며, 신과 사람[神·人]은 하나의 도라 하지만 신을 감격시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이에 보이지 않는 그윽한 이치를 통달하여 신명을 감격시킨 것으로써 밝은 데까지 미루어 사람을 다스린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이렇게 무왕, 주공이 주도면밀하게 예악을 제정한 점이 바로 더욱 잘 계승하고 이어받아 천하에서 모두 칭찬하는 효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곧 費가 아닐까?
郊는 祭天이오 社는 祭地이니 不言后土者는 省文也라 禘는 天子宗廟之大祭이니 追祭太祖之所自出於太廟而以太祖配之也라 嘗은 秋祭也니 四時皆祭로되 擧其一耳라 禮必有義니 對擧之는 互文也라 示는 與視同이니 視諸掌은 言易見也오 此與論語文意로 大同小異는 記有詳略耳라
郊는 하늘에 올리는 제사요, 社는 땅에 올리는 제사인데, 여기에서 后土를 말하지 않은 것은 생략된 문장이다. 禘는 천자의 종묘에서 거행하는 큰 제사이니, 태조를 낳아주신 선조를 태묘에 추존하여 제사를 받들되 태조와 함께 배향하여 올리는 제사이다. 嘗은 가을 제사이니, 사계절에 제사를 모두 지내는데, 그 중에 하나를 들어 말한 것이다. 禮에는 반드시 義가 있으니, 이를 상대적으로 들어 말한 것은 互文法이다. 示는 視 자와 같으니, 손바닥을 보듯 한다는 것은 쉽게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논어』 의 글 뜻과 크게는 같지만 조금 다른데, 그것은 기록상의 자상함과 간략함 때문이다.
示諸掌과 指其掌101)의 차이는 무엇인가? "示, 與視同. 視諸掌, 言易見也"라
하니 示諸掌은 쉽게 알 수 있다는 뜻으로 知에, 指其掌은 쉽게 실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行에 관련지어 말한 것이다. 이로써 知行의 大同小異點을 찾아볼 수 있다.
右는 第十九章이라
101) 『論語』 「八佾」.
위는 제19장이다.
이 장은 "그 사람이 있으면 어진 정사가 거행된다[人存政擧]"라는 점을 주로 말한 것이다. 제2~3절은 人存政擧의 용이함을 말하였는데, 제4~10절까지는 修身의 일로서 人存에, 제11절 知斯는 政擧의 뜻을 일으키고 있다. 제12~15절까지는 知人에 관한 일로서 政擧에, 그리고 끝부분은 다시 身上으로 귀결짓고 있으며, 제16절 '凡事' 이하의 문장 또한 윗글 두 곳의 '一(제8, 15절, 所以行之者, 一也)' 자로 인하여 誠을 추구하는 자세한 공부를 말해주고 있는데, 이는 곧 "그 같은 인재가 있으면 그 같은 정사가 거행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체의 장은 修身上에 중점을 두고 있다. 仁, 義, 禮, 智, 勇을 종합하여 몸을 닦아 이를 체득하면 五達道가 되고, 이를 널리 펴면 九經이 되며, 자신에 나타난 것으로는 言, 事, 行, 道이다. 그러나 그 요체는 오직 하나의 誠에 있고 그 공부는 擇善固執에 있다. 하지만 이는 반드시 問政 구절을 돌이켜보아야 한다. 본 장은 위정자의 실제 정치를 묻는 것이기에 학문의 토론 강설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애공이 정사를 물은 것 또한 밝음과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哀公이 問政한대 애공이 정사를 묻자,
자사는 애공의 물음에 대답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費隱과 大小를 모두 포괄하여 말하였다. 옛날 노나라 애공이 공자에게 정사에 관하여 물었다.
哀公은 魯君이니 名은 蔣이라
哀公은 노나라 임금이니, 이름은 蔣이다.
본 절에서 공자가 문왕, 무왕의 일을 예로 들어 말한 것은 三代의 정사가 周나라에 이르러 갖추어져 있으므로, 애공에게 선조를 본받도록 한 것이다. 나무판과 대쪽에 기술되어 있다는 것은, 예컨대 『서경』의 「周官」 「立政」 과 『周禮』 『儀禮』 등 여러 서적에서 고증할 수 있음을 말한다. "그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같은 정사가 거행되어진다[人存政擧]"라는 구절은 본 장의 주요 핵심 부분으로, 「關雎」 「麟趾」의 정밀한 뜻을 가지고 있을 때 『주례』 『의례』의 법을 시행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인 것이다. '그 같은 사람' 이라는 그 사람은 군신을 겸하여 말하면서도 임금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人亡政息' 구절은 가벼운 뜻을 가지고 反言으로써 이를 결론짓고 있다.
子曰 文武之政이 布在方策하니 其人이 存則其政이 擧하고 其人이 亡則其政이 息이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문왕과 무왕의 정사가 나무판과 대쪽에 기록되어 있으니, 그 같은 사람이 있으면 그 같은 정사가 거행되고, 그 같은 사람이 없으면 그 같은 정사는 행해지지 않는다.
공자는 애공에게 답하였다. 역대의 정사를 살펴보면 문왕, 무왕의 정사보다도 더 잘 갖추어진 적은 일찍이 없었다. 문왕, 무왕의 정사는 서책에 기술되어 오늘날까지도 명백히 고증할 수 있다. 그러나 정사란 그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행해지는 법이다. 만일 오늘날 문왕, 무왕처럼 어진 군신이 있으면 그처럼 어질었던 정사는 그들에 의하여 거행될 것이다. 그러나 문왕, 무왕과 같은 군신이 없어 이를 감당할 인물이 없으면 그 정사 또한 행해질 수 없다. 어진 정사를 일으키느냐 못하느냐는 그처럼 어진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임금께서 어진 정사에 뜻이 있다면 마땅히 문왕과 무왕을 본받아야 한다.
方은 版也오 策은 簡也라 息은 猶滅也라 有是君有是臣이면 則有是政矣라
方은 나무판이요, 策은 대쪽이다. 息이란 滅함과 같다. 이와 같은 임금과 신하가 있으면 그 정사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는 人存政擧의 용이함을 말하면서 '敏' 자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두 곳의 政(敏政……, ……夫政也者) 자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위의 政 자는 人道에, 아래는 在政에 중점을 두고 있다. '夫政也者' 구절은 특별히 일으켜 세운 말이며, 나무의 빠른 성장 가운데에서도 갈대를 예로 들어 더욱 성장의 민감함을 나타내고 있는데, 위의 두 구절에 비교해보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간 것이라 말할 수 있다.
人道는 敏政하고 地道는 敏樹하니 夫政也者는 蒲盧也니라
사람의 도는 정사에 빠르게 나타나고, 땅의 도는 나무를 기르는 데 빠르게 나타나니, 정사의 빠른 효험은 쉽게 잘 자라는 갈대와도 같다.
정사를 예로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도는 모든 일에 作爲를 주로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하게 나타나는 것은 정사이다. 임금과 신하의 덕이 한결같아서 변함없으면 모든 법도가 갖춰지게 된다. 예를 들면 땅의 도는 만물의 生育을 주로 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빨리 성장하는 것은 나무이다. 이는 토양의 생식력에 의해 온갖 식물들이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이 같은 땅의 생식력 또한 예삿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것은 한낱 나무의 생식에 불과할 뿐이다. 문왕의 정사는 人心에 부합되고 풍속에 잘 어우러짐으로써 한번 그 사람을 얻으면 잠깐 사이에 태평성대를 이룩할 수 있다. 그의 어진 정사에 의해서 민감하게 나타나는 효험은 마치 쉽게 잘 자라는 갈대와도 같은 것이다. 이처럼 민감한 정사를 과연 뭐라 말해야 할지…….
敏은 速也오 蒲盧는 沈括이 以爲蒲葦 是也라 以人立政은 猶以地種樹에 其成速矣어늘 而蒲葦는 又易生之物이라 其成 尤速也니 言人存政擧 其易如此라
敏은 빠름이요, 蒲盧는 沈括이 말한 '蒲葦(갈대)'가 바로 이것이다. <그 훌륭한> 사람(군신)으로써 정사를 세움은 마치 땅에 나무를 심으매 그 성장이 빠른데, 갈대는 또 나무보다 더욱 잘 자라는 식물이므로 그 성장이 더욱 빠름과 같다. 사람이 있으면 정사의 거행됨이 이처럼 쉬운 것임을 말한다.
이는 윗글에 이어서 修身 두 자를 제출하여, 그 같은 인물이 있을 수 있는 근본을 말해주고 있다. 임금 그 자신은 어진 신하의 進退(去就)가 결정지어지는 척도이며, 道는 몸을 다스리는 범위이며, 仁은 도를 관철하는 것이다. 이처럼 본 절의 문맥은 모두 일맥상통하고 있으나 이의 중점은 '修道以仁' 구절에 있다. 仁은 곧 達德이다. 다시 말하면 지혜[智]는 仁의 시초를 열어주는 것이요, 용맹[勇]은 仁을 끝맺어주는 것이요, 仁은 지혜와 용맹을 모두 겸하고 아울러 誠 자까지 포괄하고 있다.
故로 爲政이 在人하니 取人以身이오 修身以道오 修道以仁이니라
그러므로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어진 신하)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취함은 자신으로써 하고, 몸을 닦음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음은 仁으로 하는 것이다.
사람의 도에는 정사가 가장 빠르다. 임금의 정사는 어진 신하를 얻는 데 있다. 어진 신하를 보필자로 얻은 뒤에야 그와 함께 기강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어진 신하는 결코 스스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임금의 몸에 달려 있다. 때문에 표준이 세워진 뒤에야 어진 사람들이 기꺼이 찾아오게 된다.
그러나 그 자신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스스로의 몸을 닦으려면 도로써 닦아야 한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떳떳한 인륜 가운데 몸을 들여 놓은 이후에야 각각 그 준칙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 그러나 도는 아무런 것도 힘입지 않고 스스로 닦여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도를 닦으려면 仁으로 행해야 한다. 일상생활의 떳떳한 인륜 사이에 반드시 가엾게 여기는 사랑의 마음이 두루 유행하여 彼我의 사이가 없을 때, 도를 이룰 수 있다. 그러므로 仁으로써 도를 닦는다는 것은 곧 한 몸을 닦고 인재를 취하는 것이요, 정사를 세우는 근본이 된다.
此는 承上文人道敏政而言也라 爲政在人은 家語에 作爲政在於得人이라 하니 語意尤備라 人은 謂賢臣이오 身은 指君身이오 道者는 天下之達道라 仁者는 天地生物之心而人得以生者니 所謂元者善之長也라 言人君爲政은 在於得人이오 而取人之則은 又在脩身이니 能仁其身이면 則有君有臣而政無不擧矣리라
이는 위 글의 "사람의 도는 정사에 빠르게 나타난다"라는 구절에 이어서 말한 것이다. "정사를 하는 것이 그 사람에 있다"라는 구절은 『가어』에서 "정사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얻는 데에 있다[爲政, 在於得人]" 하니, 그 말뜻이 더욱 잘 갖추어져 있다. 人은 어진 신하를 말하며, 身은 임금의 몸을 가리키며, 道는 천하의 達道이다. 仁은 하늘이 만물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사람은 이를 얻어 태어나게 되니, 이른바 『주역』(「乾卦·文言」)의 "元이란 선의 으뜸이다"라는 것이다. 임금이 정사를 하는 것은 어진 신하를 얻는 데 있고, 어진 신하를 얻는 법 또한 몸을 닦음에 있으니, 능히 그 몸을 어질게 하면 훌륭한 임금과 신하가 있어 어진 정사가 행해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이는 거듭 修道以仁의 뜻을 밝힌 것이다. 仁은 만물을 낳아주는 이치이기에 사람에게 仁을 붙여본 것이다. 親親은 부모를 가리킴이니, 아래 事親의 뜻과 같으면서도 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으나 이 또한 五達道에 대해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仁에서 義를 척출하여 尊賢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바, 尊賢爲大는 親親의 이치를 講明한 데 지나지 않는다. 親親之殺 구절은 一本九族등의 降等을 말하는데, 이는 예가 발생되는 곳이라는, 所生 두 자를 나타내어 경각심을 북돋아주고 있는 것으로, 아래 절 '天(不可以不知天)' 자의 立案인 셈이다. 節文은 天理의 자연에 속한 것으로 人事上에 관계되지 않는다. 하지만, 等·殺(殺 : 독음 '쇄'. 尊賢之等, 親親之殺)에서 자연의 節文을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는 인간으로서 그만둘 수 없는 일이기에, 이미 天 자의 큰 뜻을 포괄하고 있으며, 所生 두 자 또한 懸空說이 아니다. 節은 等級, 文은 回互貌이니, 내면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것으로 升降揖遜과 같은 예이다.
仁者는 人也니 親親이 爲大하고 義者는 宜也니 尊賢이 爲大하니 親親之殺 (쇄)와 尊賢之等이 禮所生也니라
仁은 사람의 몸이니, 어버이(친척)를 친히 함이 크고, 義는 마땅함이니 어진 이를 높임이 크다. 친척을 친히 대함에 있어서의 降等과 어진 이를 높이는 差等에서 예가 생겨나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仁은 별난 게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태어날 수 있었던 도리이자, 살아가면서 만물을 가엾게 여길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사람, 바로 그런 것이다. 仁이란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버이를 친히 하는 것이 가장 크다. 어버이는 날 낳아주어 가없는 은혜를 입혀준 분이기에 부모에게 향하는 마음은 가장 진실하고 간절하기 때문이다. 모든 일가에게 적절히 대하는 도는 모두 이로부터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仁을 지닌 자는 반드시 의롭기 마련이다. 義는 별난 게 아니다. 그것은 사리를 분별하여 그에 따른 적절한 일처리를 말한다. 義는 모든 일에 時宜適切케 하는 것이지만, 어진 이를 높인다는 것은 義 가운데에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이다. 어진 이는 親親의 도리를 밝혀주는 자이기에 어버이를 향하여 나타나는 어진 마음을 얻음은 어진이의 도움을 힘입은 바이므로 모든 곳에 베푸는 도가 이로 말미암아서 막힘이 없게 된다. 다시 말하면 부모로 인하여 여러 伯, 叔父 등에게 미쳐가므로 "친척을 친히 하는[親親]" 데에는 이처럼 높낮이[降殺]가 있으며, 스승처럼 높이 섬겨야 할 자로부터 벗의 관계로 대해야 할 대상이 다름에 따라서 "어진 이를 높이는[尊賢]" 데에는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품절[節]과 문장[文]이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이 또한 그 사이에서 발생되는 자연스런 예이지, 사사로운 마음으로 이처럼 행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仁에는 반드시 義가 있고, 또한 禮가 있다. 이는 모두 몸을 닦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힘써야 한다.
人은 指人身而言이니 具此生理하야 自然便有惻怛慈愛之意니 深體味之면 可見이라 宜者는 分別事理하야 各有所宜也오 禮는 則節文斯二者而已라
人은 사람의 몸을 가리키니, 삶의 이치를 갖추고 있어 자연히 가엾이 여기고 자애로운 뜻이 있으니, 이를 깊이 체득하여 음미하면 이를 찾아볼 수 있다. 宜는 사리를 분별하여 각각 시의적절한 바 있음이며, 禮는 이 두 가지를 품절하고 문식하는 것일 뿐이다.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아래의 지위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鄭氏曰 此句는 在下어늘 誤重在此라
鄭氏(鄭玄)가 말하였다. "이 구절은 아래에 있는데, 착오로 거듭 여기에 쓰인 것이다."
이는 군자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말로서, 제4~5절의 뜻을 모두 끝맺고 있다. 위 절에서는 仁이라는 그 자체의 본질인 도리의 측면에서 말하였고, 여기에서는 닦는다[修]는 수양면에서 공부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다[不可以不知人]"라는 것은, 부모를 섬기려면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부모를 섬기고자 하면 또한 사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며,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不可以不知天]"라는 것은 事親과 知人을 겸하여 말하면서도 知人에 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朱子는 이에 대해서 "이 절은 거꾸로 거슬러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그 근본은 修身에 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몸을 닦을 수 있는 바는 곧 하늘을 아는 데 있고, 하늘을 아는 것은 八條目의 物格知至에 상당하는 것이다. 하늘의 자연스런 이치를 알면 사람을 알고 어버이를 섬길 수 있고 몸을 닦을 수 있는 도리가 모두 여기에 있다.
故로 君子 不可以不修身이니 思修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思事親인댄 不可以不知人이오 思知人인댄 不可以不知天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으니, 몸을 닦고자 하면 어버이를섬기지 않을 수 없고, 어버이를 섬기고자 하면 사람을 알지 않을 수 없고, 사람을 알고자 하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정사를 하는 것은 어진 임금에게 달려 있고, 어진 신하를 얻는 것은 자신의 몸에 달려 있으므로, 자신의 몸은 어진 신하를 얻을 수 있는 법칙이자, 정사를 세우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정사에 임하는 임금은 몸을 닦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몸은 도로써 닦고, 도를 닦음은 仁으로 하는 것인바, 仁의 실상이 어버이를 섬기는 도리, 그것이기에 몸을 닦으려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어버이를 친히 하여 仁을 다하려면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義에서 비롯하므로, 어버이를 섬기려면 어진 이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으며, 親親의 높낮이와 尊賢의 등급은 모두 하늘의 질서이자 본연의 예절이기에, 어진 이를 알아 어버이를 섬기려면 하늘을 알지 않을 수 없다. 하늘을 아는 데에서 비롯하여 어진 이를 알게 되고 어버이를 섬길 수 있다. 그러나 仁은 어버이로부터 비롯하고 도는 仁으로 행해야만이 비로소 완벽하게 몸을 닦을 수 있다.
爲政在人이오 取人以身이라 故不可以不修身이오 修身以道오 修道以仁이라 故思修身인댄 不可以不事親이오 欲盡親親之仁인댄 必由尊賢之義라 故又當知人이오 親親之殺와 尊賢之等은 皆天理也라 故又當知天이니라
정사를 하는 것은 사람을 얻는 데 있고 사람을 얻는 것은 자신의 몸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닦지 않을 수 없으며, 몸을 닦음은 도로써 하고 도를 닦음을 仁으로 하기 때문에 몸을 닦으려 생각하면 어버이를 섬기지 않을 수 없으며, 어버이를 친히 하여 仁을 다하려면 반드시 어진 이를 높이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또한 사람을 알아야 하며, 친한 이를 친히 하는 데 있어서의 강등과 어진 이를 높이는 데 있어서의 차등은 모두 천리이다. 그러므로 또한 하늘의 이치를 알아야 한다.
이 또한 위 글의 미진한 부분을 뒤이어 보완해주고 있다. 위에서는 도에 대해 말했지만 정작 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仁에 대해 말했지만 知와 勇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본 절에서는 그에 대한 명제를 들어 하나하나 지적해주고 있다. 達道는 모든 사람이 이것으로 말미암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을, 達德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버릴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줌이며, 誠으로 귀결지은 것 또한 修身의 본원을 말하며, 달도에서 사람을 말할 뿐, 도를 말하지 않은 것은 사람을 떠나서 따로 도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요체는 身 자에, 知仁勇은 性分內에, 두 곳의 '之(所以行之者三…… 所以行之者 一也)' 자는 모두 달도를 가리키며, '所以行之者一也'의 一 자는 위 三達道의 三 자와 대조를 이룬 것으로, 모두 숫자를 사용하여 은연중 誠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天下之達道 五에 所以行之者는 三이니 曰君臣也·父子也·夫婦也·昆弟也·朋友之交也 五者는 天下之達道也오 知(智)·仁·勇 三者는 天下之達德也니 所以行之者는 一也니라
천하에 공통되는 도가 다섯인데, 그것을 행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군신, 부자, 부부, 형제, 벗의 사귐 다섯 가지는 천하에 공통되는 도이며, 지혜, 어짊, 용기 세 가지는 천하에 공통되는 덕이니, 이를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시험삼아 修身과 修道를 예로 들어 자세히 말해보고자 한다. 몸을 닦음은 도로써 하는 데 있으나, 도는 하나의 일이 아니다. 천하에 공통으로 말미암는 다섯 가지의 달도가 있다. 도를 닦음은 仁으로 행하는 데 있으나 이는 하늘의 심오한 이치를 아는 데까지 미쳐가는 것으로, 그 또한 하나의 일이 아니다. 달도를 행하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란 무엇일까? 조정에서의 군신, 가정에서의 부자, 부부, 형제, 바깥에서의 벗과의 사귐이니, 이 다섯 가지는 변함없는 인간윤리의 큰 강령이자 천하의 달도로서, 몸을 닦아 나아가는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세 가지는 무엇일까? 마음의 밝음은 지혜, 마음의 공정함은 어짊, 마음의 굳셈은 용기이다. 이 세 가지는 본성과 함께 얻어온 것이자 천하의 달도를 행할 수 있는 달덕으로서, 몸을 닦아 가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三達德으로 五達道를 행하는 바는 하나[一]이다. 이치란 오직 하나이니, 진실하면 사욕이 본심을 이간질한다거나 양심의 발로를 끊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에 있어서는 참다운 앎을 얻어서 이로부터 도를 알아나가게 되고, 어짊에 있어서는 참다운 어짊을 얻어서 이로부터 도를 체득할 수 있고, 용맹에 있어서는 참다운 용맹을 얻어서 이로부터도를 강행할 수 있을 것이기에, 결코 '3달덕' 또는 '5달도' 따위의 단순한 수효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達道者는 天下古今所共由之路이니 卽書所謂五典과 孟子所謂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是也라 知는 所以知此也오 仁은 所以體此也오 勇은 所以强此也라 謂之達德者는 天下古今所同得之理也라 一은 則誠而已矣라 達道는 雖人所共由나 然無是三德이면 則無以行之오 達德은 雖人所同得이나 然一有不誠이면 則人欲間之하야 而德非其德矣리라 程子曰 所謂誠者는 止是誠實此三者오 三者之外에 更別無誠이니라
達道는 천하와 고금에 모두 함께 따라야 할 길이니, 『서경』(「虞書·大禹謨」)에서 말한 '五典'과 『맹자』(「滕文公 上」)에서 말한 "부자에게는 친함이, 군신에게는 의리가, 부부에게는 분별이, 장유에게는 차서가, 벗에게는 믿음이 있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지혜는 이를 아는 것이며, 어짊은 이를 체득한 것이며, 용맹은 이를 힘쓰는 것이다. 達德은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로부터 오늘까지 다함께 얻은 바의 이치이다. 一은 곧 誠일 뿐이다. 達道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행하는 바이지만 세 가지의 달덕이 없으면 이를 행할 수 없으며, 달덕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얻은 것이지만 만에 하나라도 진실하지 못한 바 있으면 사사로운 욕심이 이를 이간시킴으로써 그 덕을 덕이라 말할 수 없게 된다. 程子가 말하였다. "이른바 誠이란 이 세 가지를 진실하게 하는 데 있을뿐이다. 세 가지밖에 또 다른 誠이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부터 "不明乎善 不誠乎身" 구절까지는 실천의 도, 인륜의 五達道, 행정의 九經은 실천의 덕인 삼달덕으로 총괄되며, 이의 근본은 결국 一의 誠으로 귀결됨을 밝히고 있다.
이는 달덕으로써 달도를 행하는 데 대해서 자세히 논술하고 있다. 그러나 공공연하게 어리석다고 생각하거나 나약하다는 의식 때문에 스스로의 자포자기를 달게 여기지 않을까 우려한 나머지, 이에 애당초 타고난 자질은 다르지만 노력하여 성공에 이르면 마침내 한 가지라는 점으로 그들의 노력을 격려해주고 있다. 三知 三行은 모두 자신이 알고 행할 수 있는 현재의 위치에서 말한 것이며, 或生……, 或學……, 或困……, 或安……, 或利……, 或勉强…… 등 여섯 곳의 '或' 자는 지극히 원만한 말이며, 두 곳의 '一也(……知之 一也, ……成功 一也)' 구절은 특별히 위 글에 이어서 논단한 것이며, 及其(及其知之, 及其成功) 두 글자는 學而 利而를 포괄하여 말한 것이지만, 困知 勉强의 측면에 더욱 중점을 두고 있으며, 行이라 말하지 않고 成功(及其成功)으로 말한 것은 실행에 옮겼을 때 비로소 앎은 지극하고 이로써 성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或生而知之하며 或學而知之하며 或困而知之하나니 及其知之하야는 一也니라 或安而行之하며 或利而行之하며 或勉强而行之하나니 及其成功하야는 一也니라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達道)를 알고, 어떤 이는 배워서 알고, 어떤 이는 어렵게 애써서 알아 나가지만, 그 아는 데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다. 어떤 이는 이(達道)를 편안히 행하고, 어떤 이는 이롭게 여겨 행하고, 어떤 이는 억지로 힘써 행하지만 그 성공에 이르러서는 한 가지이다."
그러나 달덕으로써 達道를 행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일까? 지혜로 말하면 어떤 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달도를 아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배워서 달도를 아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애를 쓴 뒤에야 달도를 아는 자가 있다. 이렇듯 그들이 도를 깨치는 데 있어서는 선후의 차이가 없지 않으나 그들의 앎이 지극하여 달도를 밝게 아는 데 이르러서는 매한가지이다. 행함으로 말하면 어떤 이는 편안히 達道를 행하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이롭게 여겨 達道를 행하는 자가 있고, 어떤 이는 애써 억지로 힘쓴 뒤에 達道를 행하는 자도 있다. 이처럼 도를 행하는 데 難易의 차가 없지 않으나 그들의 행함이 지극하여 達道를 체득함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이다. 三達德으로써 五達道를 행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다.
知之者之所知와 行之者之所行은 謂達道也라 以其分而言이면 則所以知者는 知也오 所以行者는 仁也오 所以至於知之·成功而一者는 勇也며 以其等而言이면 則生知安行者는 知也오 學知利行者는 仁也오 困知勉行者는 勇也라 蓋人性이 雖無不善이나 而氣稟有不同者라 故聞道有蚤莫(早暮)오 行道有難易라 然能自强不息이면 則其至 一也니라 呂氏曰 所入之塗 雖異나 而所至之域則同하니 此所以爲中庸이어늘 若乃企生知安行之資하야 爲不可幾及하고 輕困知勉行하야 謂不能有成이면 此는 道之所以不明不行也라
아는 자가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자가 행한 것은 達道를 말한다. 그 분수로 말하면 아는 것은 지혜요, 행하는 것은 어짊이요, 그것을 알고 성공함에 이르러선 한 가지이다 함은 용기이다. 그 등급으로 말하면 태어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지혜요, 배워 알고 이롭게 여겨 행하는 것은 어짊이요, 어렵게 애써 알고 억지로 힘써 행하는 것은 용기이다. 사람의 본성이야 선하지 않는 자가 없으나 품부받은 기질이 똑같지 않음으로써 도를 깨치는 데에 빠르고 늦음이 있고, 도를 행하는 데에 어렵고 쉬움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으면 그 다다름에 있어서는 한 가지이다. 呂氏(呂大臨)가 말하였다. "들어가는 길은 다르지만 이르는 경지는 매한가지이다. 이 때문에 중용을 행할 수 있는 것인데, 만일 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 자질을 부러워하여 이에 미칠 수 없다 여기고, 어렵게 애써 알고 억지로 힘써 행하는 것을 가볍게 여겨 성공에 이를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 도가 밝혀지지 못하고 행해지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이는 덕으로 들어가는 공부로서, 學·利와 困·勉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三達德을 하나[一 : 誠]로 하지 못하였을 때는 그에 근사한 것을 찾아서 닦아야 한다. 지혜는 내면의 고유한 총명이 밖으로 나온 것임에 반하여, "배움을 좋아하는 것[好學]"은 외부로부터 보고 들음을 통하여 내면으로 축적해 감을 말하며, 어짊이란 본성에 따라 도를 체득한 것이지만, "힘써 행하는 것[力行]"은 도를 닦아 본성을 회복하고자 함이며, 용맹은 마음의 굳건한 의지로써 몸을 다스리는 것임에 반하여,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知恥]"은 한 몸의 氣로써 굳건히 의지를 다져 고무시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본 절은 好, 力 및 恥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子曰) 好學은 近乎知하고 力行은 近乎仁하고 知恥는 近乎勇이니라
(공자가 다시 말하였다.) "배우기를 좋아함은 지혜에 가깝고, 힘써 행함은 어짊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앎은 용맹에 가깝다.
달도를 행하는 것은 한 가지이다. 그러나 기질의 구애를 받게 되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달덕에 미칠 수 있는 공부일까? 배움이란 이치를 밝히려함이니, 배움을 좋아하여 게으름이 없으면 이치를 밝게 알아 어리석음을 타파하기에 넉넉하므로, 이를 으뜸가는 지혜라 말할 수는 없지만 또한 지혜에 가까운 것이다. 힘써 행함은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자 함이니, 힘써 행하여 멈추지 않으면 사심을 없애어 사욕을 잊을 수 있기에, 이를 지극한 어짊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짊에 가까운 것이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뜻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니, 나의 지혜와 행실이 남들만 같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할 줄 알면 뜻을 세워 나약한 의지를 일으켜 세울 수 있기에, 이를 큰 용맹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용맹에 가까운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곧 덕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子曰二字는 衍文이라 此는 言未及乎達德而求以入德之事니 通上文三知爲知·三行爲仁이면 則此三近者는 勇之次也라 呂氏曰 愚者는 自是而不求오 自私者는 循人欲而忘返이오 懦者는 甘爲人下而不辭라 故好學非知나 然足以破愚오 力行非仁이나 然足以忘私오 知恥非勇이나 然足以起懦니라
'子曰' 두 글자는 빼야 할 글자이다. 이는, 달덕에는 미칠 수 없지만 덕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을 추구하여 말함이니, 위 글의 三知(生, 學, 困知)를 知라 하고, 三行(安, 利, 勉行)을 仁이라 함을 통해 보면, 이 三近은 勇에 버금가는 것이다. 呂氏가 말하였다. "어리석은 자는 스스로 옳다고 여겨 남에 구하지 않고, 스스로 사사로이 하는 자는 인욕을 따라서 되돌아올 줄을 모르고, 나약한 자는 남의 아래에 있는 것을 마음 달게 여겨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배움을 좋아하는 것이 지혜는 아니지만 어리석음을 깨뜨리기에 넉넉하며, 힘써 행하는 것이 어짊은 아니지만 사욕을 잊기에 넉넉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용맹은 아니지만 나약한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에 넉넉하다."
이는 위 글을 끝맺으면서 뒷글을 일으켜주는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것이라 하겠다. '知斯三者'의 知는 공허한 앎[空知]에 그치지 않고, 참답게 好學, 力行, 知恥에 따라 노력하여 知, 仁, 勇으로 나아가는 실행을 말한다. 몸을 닦는다는 것은 "인재를 얻고 정사를 세울 수 있는[取人立政]" 근본이 이미 정립되었음을 뜻하며, 아래의 治人, 治天下國家 구절과 연계지어 말하고 있다.
知斯三者면 則知所以脩身이오 知所以脩身이면 則知所以治人이오 知所以治人이면 則知所以治天下國家矣리라
이 세 가지를 알면 몸을 닦을 줄 알게 되고, 몸을 닦을 줄 알면 사람을 다스릴 줄 알게 되고, 사람을 다스릴 줄 알면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세 가지 가까운 것[三近]을 알면 달덕으로써 달도를 행하여 몸을 닦을 줄 알 수 있다. 몸을 닦을 줄 알면 타인은 나의 몸으로 미루어 나가는 것이기에 스스로 사람을 다스릴 줄 앎으로써 남들까지도 도의 품안으로 들여놓을 수 있으며, 사람을 다스릴 줄 알면 천하 국가 또한 많은 사람이 모인 곳이기에 스스로 천하 국가를 다스릴 줄 앎으로써 이 세상을 도로 다스릴 수 있다. 이는 三近을 아는 데에서 비롯하여 천하국가를 다스림으로 끝맺고 있다. 이 때문에 정사를 하려면 먼저 몸을 닦고, 몸을 닦으려면 먼저 덕으로 들어가야 함을 알 수 있다.
斯三者는 指三近而言이라 人者는 對己之稱이오 天下·國家는 則盡乎人矣라 言此하야 以結上文脩身之意오 起下文九經之端也라
이 세 가지는 三近을 가리켜 말함이다. 人은 나와 대칭이 되는 타인을 말하며, 천하와 국가는 모든 사람을 포괄하여 말한다. 이를 말하여 위 글의 修身의 뜻을 끝맺고 아래 九經의 실마리를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는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그 조목을 자세히 열거해주고 있다. 이의 차례는 그 조목 가운데에 있으며, 이른바 九經이란 문왕, 무왕의 정사가 나무판과 대쪽에 기술되어 있다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아홉 곳의 也 자를 살펴보면 변하지 않는 법[經]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나 실제로는 세 가지이며, 이를 다시 합하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敬大臣體群臣 두 구절은 尊賢에서, 子庶民 來百工 柔遠人 懷諸侯 네 구절은 親親에서, 親親과 尊賢은 또한 修身에서 유래한 것이다. 大臣은 가까이 있기에 경의를 표하지 않기 십상이기에 敬을 말하였고, 여러 신하는 지위가 낮아 쉽게 멀어지기에 體를 말한 것이다. 만일 어진 사람을 높이되 조정 내의 대신과 여러 신하가 아닌 그 밖의 인물이라면 그를 스승과 벗으로 높여야하는 것이지, 신하로 삼을 수 없다. 來百工의 來는 도의로 불러들이고 모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凡爲天下國家 有九經하니 曰修身也와 尊賢也와 親親也와 敬大臣也와 體群臣也와 子庶民也와 來百工也와 柔遠人也와 懷諸侯也니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데에는 아홉 가지의 큰 법이 있으니, 몸을 닦고, 어진 사람을 높이고, 친척을 친히 하고, 대신을 공경하고, 여러 신하의 처지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알고, 서민을 아들처럼 돌보고, 많은 匠人을 찾아오게 하고, 먼 지방의 나그네를 감싸주고, 제후를 품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천하와 국가를 다스린다는 함은 결코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임금이 천하 국가를 다스리는 정사에는 변하지 않는 아홉 가지의 큰 법도가 있다. 그렇다면 그 아홉 가지란 무엇일까? 몸은 천하 국가의 근본이 되므로 그 몸을 닦음이며, 그 다음은 어진 사람을 높여 덕망 있는 인물을 스승으로 삼음이며, 그 다음은 한 집의 九族을 사랑함이며, 그 다음은 조정의 대신을 높여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여러 신하의 어려움을 제 몸처럼 보살펴 그들의 마음을 아는 일이며, 그 다음은 나라의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많은 장인을 불러들이는 것이며, 끝으로는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잘 맞이하고, 5등(公, 侯, 伯, 子, 男)의 제후를 감싸주는 것이다. 이는 9경의 조목이요, 그 차례가 이와 같다.
經은 常也라 體는 謂設以身處其地而察其心也며 子는 如父母之愛其子也며 柔遠人은 所謂無忘賓旅者也라 此는 列九經之目也라 呂氏曰 天下國家之本은 在身이라 故脩身이 爲九經之本이니라 然必親師取友然後에 修身之道에 進이라 故尊賢이 次之라 道之所進은 莫先其家라 故親親이 次之며 由家以及朝廷이라 故敬大臣體群臣이 次之이며 由朝廷以及其國이라 故子庶民來百工이 次之며 由其國以及天下이라 故柔遠人懷諸侯 次之이니 此는 九經之序也라 視群臣은 猶吾四體오 視百姓을 猶吾子는 此는 視臣視民之別也라
經은 떳떳함이다. 體는 가설로써 자신이 그들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살피는 것이며, 子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백성을 돌보는 것이며, 柔遠人은 이른바 손님과 나그네를 잊지 않음이다(『맹자』 「告子章句 上」). 이는 九經의 조목을 열거한 것이다. 呂氏가 말하였다. "천하와 국가의 근본은 자신에 있으므로 몸을 닦음이 九經의 근본이 된다. 그러나 반드시 스승을 가까이하고 벗을 얻은 다음에 몸을 닦는 도에 나아갈 수 있으므로 어진 사람을 높임이 그 다음이며, 도를 베풀어 나아가는 바는 자기의 집안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곳이 없다. 그러므로 친척을 친히 함이 그 다음이며, 가정에서 조정으로 미쳐가므로 대신을 공경함과 여러 신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그 다음이며, 조정에서 나라로 미쳐가므로 서민을 아들처럼 보살핌과 많은 장인을 찾아오게 함이그 다음이며, 나라에서 천하에 미쳐가므로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나그네를 감싸주고 제후를 품어주는 것이 그 다음이니, 이것이 구경의 차례이다. 여러 신하는 나의 몸처럼 보살피고, 서민을 나의 자식처럼 돌보는 것은 신하와 백성을 대하는 차이점이다."
九經에서 먼저 尊賢을 말하고 親親을 뒤이어 말함은 무엇 때문인가? 程子가 말하였다. "도란 親親보다 더 앞선 것은 없다. 그러나 어진 이를 높이지 못하면 親親의 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九經의 실제 일에 관하여 논하지 않고 먼저 그 공효를 말한 것은 哀公을 감동시키고자 하는 의도 때문이다. 아홉 곳의 則 자는 上半部에 깊은 의미가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 則 자를 쓰기까지에는 보다 깊은 정신이 깃들어 있다. 道立은 임금이 몸소 표준치를 세우면 백성의 눈에 비춰지게 되는 것이며, 不惑은 스승을 높이고 벗을 존중함으로써 임금의 마음이 점차 밝아지고, 강학을 통하여 의혹이 풀림으로써 의리가 밝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예로부터 천하 국가에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은 으레 친척의 비난으로부터 비롯되기에 친척에게 원망을 사는 바 없다는 것은 일가 구족이 이미 화목함을 말한다. 不眩은 임금을 주 대상으로 말한다. 가리키는 바 많으면 시각이 어지럽고 말들이 많으면 청각이 어지럽기 마련인데, 소인배들의 이런저런 시빗거리는 한두 가지가 아니므로, 원로대신이 주장하는 일을 바르게 보기란 쉽지 않다. 士는 조정의 上士, 中士, 下士 등이며, 報禮重은 선비(관리)들이 예의를 갖춰 임금에게 보답하는 것으로, 이는 단 맡은 일을 다 하는 데에서 나타나며, 百姓勸은 예컨대 힘이 있는 자는 부역에 나아가고 재물을 소유한 자는 기꺼운 마음으로 바치는 것이다. 財用足은 상하 君民 모두를 겸하여 말한 것인데 『장구』에서는 다만 백성에게 붙여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아래 절의 日省이라 하는 단락에서는 在官者를 말하였고, 四方歸之는 賓客, 聘問, 遊士, 商旅를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인데, 『장구』에서는 그 중 하나를 인용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天下畏之는 참으로 잘 다듬어 쓴 문장이다. 그것은 통일된 正朔과 制度를 따름으로써 나라마다 정사가 다르지 않고 집안마다 풍속이 다르지 않은 바로 그런 예를 말한다.
修身則道立하고 尊賢則不惑하고 親親則諸父昆弟 不怨하고 敬大臣則不眩하고 體群臣則士之報禮 重하고 子庶民則百姓이 勸하고 來百工則財用이 足하고 柔遠人則四方이 歸之하고 懷諸侯則天下 畏之니라
몸을 닦으면 도가 확립되고, 어진 이를 높이면 의혹에 빠지지 않고, 친척을 친히 하면 여러 아버지(백부, 숙부 등)와 형제들이 원망하지 않고, 대신을 공경하면 현혹되지 않고, 여러 신하의 마음을 알아주면 선비의 보답하는 예가 중하게 되고, 백성을 자식처럼 돌보면 백성이 서로 권하고, 많은 장인을 오게 하면 재물과 器用이 넉넉하고, 먼 지방에서 찾아오는 나그네를 감싸주면 사방에서 돌아오고, 제후를 품어주면 천하가 두려워한다.
구경의 차례에는 그 조목이 있으니, 이를 행하면 어찌 효험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몸을 닦으면 나의 몸에 道가 확립되어 백성의 표준이 되고, 어진 이를 높이면 그의 충고에 힘입은 바 있어 나날이 밝음이 넓혀지므로 의혹될 리가 없고, 친척을 친히 하면 위로는 여러 아버지와 아래로는 형제들에게 모두 환심을 얻게 되어 원망이 없고, 대신을 공경하면 일에 임하고 공을 세움에 있어 다른 의견에 휩쓸리지 않아 현혹되는 일이 없고, 여러 신하의 처지에 서서 그들의 마음을 알아주면 선비들은 그 은혜에 감격되어 충성을 다하여 보답하고자 예절을 중히 갖추고, 서민을 자식처럼 돌보면 은혜를 입은 백성은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백성 스스로가 서로 선으로 권하고, 많은 장인들이 찾아오면 器具가 만들어져 재물과 器用이 모두 넉넉하고, 먼 지방의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사방에서 찾아오는 길손들이 모두 그 길로 다니기를 바라고, 제후를 품어주면 천하가 한 집이 되어 온누리의 모든 사람이 굴복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구경의 효험은 이와 같다.
此는 言九經之效也라 道立은 謂道成於己而可爲民表이니 所謂皇建其有極이 是也라 不惑은 謂不疑於理오 不眩은 謂不迷於事라 敬大臣則信任專而小臣不得以間之라 故臨事而不眩也니라 來百工則通功易事로 農末相資라 故財用足하고 柔遠人則天下之旅 皆悅而願出於其途故로 四方이 歸하고 懷諸侯則德之所施者 博而威之所制者 廣矣라 故曰天下畏之라 하니라
이는 구경의 공효에 대해 말한 것이다. 道立은 자신의 몸에 도가 이루어져 뭇 백성의 표본이 됨이니, 이른바 "황제가 그 법[極]을 세운다"(『서경』 「洪範」)라는 것이 이것이다. 不惑은 이치에 의혹이 없는 것이요, 不眩은 일에 혼미함이 없음이다. 대신을 마음으로 공경하면 신임이 專一하여 지위 낮은 신하들이 이간질하지 못하므로 일에 임하여 현혹되지 않을 것이다. 많은 장인이 찾아오면 서로의 기능을 通用하고 서로의 일을 교역함으로써 농민과 상인이 서로 힘입게 되어 재물과 器用이 넉넉하게 되고, 먼 지방의 나그네를 감싸주면 천하의 나그네가 모두 좋아하여 그 길로 지나가기를 원하여 사방에서 찾아오게 되고, 제후를 품어주면 덕을 베푸는 바 드넓고 위엄으로 제압하는 바 넓기에 "천하가 모두 두려워하게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九經의 공부이다. 이 때문에 아홉 곳의 所以는 모두 의미 깊게 쓰인 글자로서, 도리상 마땅히 이처럼 해야 한다는 뜻이다. 知, 仁, 勇으로 수신의 공부를 말하고, 여기에서 다시 敬을 주로 말한 것은 이 문장과 저 문장의 뜻을 서로 보완하여 나타내기 위함이니, 한 생각으로부터 모든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두 敬을 주로 하는 것이다. 현인[賢]은 덕을 소유한 자이며, 참소, 여색, 재물은 모두 덕과 반대되는 것이기에 반드시 이를 물리치고 멀리하고 천히 여겨야 덕 있는 자를 높여 그와 함께 할 수 있다. 이에서 말한 貴는 스승으로서의 모범과 법이 된다는 뜻까지 포괄하고 있다. 尊其位는 단 爵位를 높여준다는 것이지, 일과 권력을 위임한다는 말은 아니다. 尊其位, 重其祿, 同其好惡 세 구절 가운데 同其好惡 구절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으며, 勸親親은 나의 친척을 가까이 하도록 권유함을 말한다. 대신은 오로지 예의를 갖춰 높여주어야만 專任을 보여줄 수 있으며, 官盛任使의 官은 대신에게 예속되어 있는 하급 관리를 말하니, 中書 따위의 관속과 같다. 여러 신하는 신분이 낮기 때문에 하는 일이 서로 동떨어져 상하의 정이 통하지 못하고, 하급 관리는 녹이 적으므로 청렴을 지킬 수 없기에 반드시 忠信重祿으로 대하는 것이다. 時使는 龍星이 나타났을 때 물을 다스리고, 火星이 보일 때 집을 짓는 유로써, 일을 부리는 데에는 일정한 시기가 있으니, 이는 公事를 가볍게 일으키지 않는다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며, 薄斂은 예컨대 上田, 中田의 차등을 두는 따위, 또는 흉년이 들면 많은 세금을 거두지 않는다는 유이다. 日省月試는 日月 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旣稟(餼廩) 구절은 日省月試 구절을 이어서 말한 것으로, 그의 녹봉은 그가 일한 노력과 상응해야 하므로, 공로가 있을 때 저버려서도 안 되고 아무런 공로가 없는데 분수에 넘는 지급이 있어서도 안 된다. 『장구』에서 말한 稍食은 祿廩을 말한다. 稍는 물건을 내어줄 때 차례차례 조금씩 한다는 뜻이며, 稾人은 활, 쇠뇌, 화살[弓弩箭矢]을 주로 만드는 자이니, 이에 稾人을 예로 들어 百工을 유추하여 알 수 있다. 화살대를 稾라 한다. 送迎은 조정에 찾아오는 신하, 그리고 사신의 유를 말하며, 상인과 나그네 商旅도 겸하여 말한다. 『장구』에서 말한 授節의 節은 道路의 符節 旌節이다. 委積(積, 독음 자)는 양식, 섶, 꼴 따위를 말하니, 많은 것은 委, 작은 단위는 積(자)라 한다. 嘉矜은 먼 지방에서 찾아온 遊士만을 가리키며, 繼絶, 擧廢는 그들의 선조가 남긴 덕을 잊지 못함이며, 治亂, 持危는 그들의 후손이 전승되지 못함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朝聘以時 厚往薄來두 구절은 그들의 재력이 부족할까를 염려하여 성심껏 두루 보살펴줌이며, 朝聘을 때에 맞추어 한다는 것은 그 시기를 늦추지도, 자주 하지도 않다는 두 가지 뜻을 겸해서 말하였지만 자주하지 않는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齊明盛服하야 非禮不動은 所以修身也오 去讒遠色하며 賤貨而貴德은 所以勸賢也오 尊其位하며 重其祿하며 同其好惡는 所以勸親親也오 官盛任使는 所以勸大臣也오 忠信重祿은 所以勸士也오 時使薄斂은 所以勸百姓也오 日省月試하야 旣稟(餼廩)稱事는 所以勸百工也오 送往迎來하며 嘉善而矜不能은 所以柔遠人也오 繼絶世하며 擧廢國하며 治亂持危하며 朝聘以時하며 厚往而薄來는 所以懷諸侯也니라
흐트러진 생각을 가다듬고 혼매한 마음을 밝히며 의복을 성대하게 하여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을 닦는 바이며, 참소를 물리치고 여색을 멀리하며 재물을 천히 여기고 덕을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어진 이를 권하는 바이며, 그 지위를 높여주고 녹을 많이 주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바를 함께 하는 것은 친척을 친히 하는 바를 권하는 것이며, 관속을 많이 두어 마음대로 일을 부리게 하는 것은 대신을 권하는 것이며, 충심과 믿음으로써 대하고 녹을 후히 주는 것은 선비를 권하는 바이며, 때에 맞추어 부역시키며 조세를 적게 거둬들이는 것은 백성을 권하는 바이며, 날로 살피고 달로 시험하여 그들의 일에 알맞은 급여[旣稟]를 주는 것은 많은 장인을 권하는 바이며, 떠나가는 이를 환송하고 찾아오는 이를 환영하며 선한 이를 아름답게 여기고 무능한 이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먼 지방의 나그네를 감싸주는 바이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고 황폐한 나라를 일으켜 세워주며 혼란한 나라를 다스려주고 위태로운 나라를 붙들어주며 조회와 聘問을 때에 맞춰 하고 떠나갈 때의 燕享은 후하게 하고 가져오는 공물을 박하게 함은 제후를 품어주는 바이다.
九經에는 지대한 효험이 있다. 그렇다면 九經은 과연 어떻게 행하는 것일까? 사물을 대하지 않은 고요할 때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밝게 가져 내면에 흐트러진 생각이 없게 하고 깨끗한 의복으로 성대하게 갖춰 외면을 엄숙히 하고, 마음이 동하여 사물을 대할 때는 節文의 예를 따라야하므로 예가 아닌 일에 헛되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이는 움직일 때나 고요할 때나 모두 심신을 함양하는 공부로서 나의 몸을 닦아 나가는 것이니, 도를 확립할 수 있는 효험이 바로 여기에 기조를 두고 있다. 참소한 자와 간악한 자를 물리치고 아름다운 여인을 멀리하고 재물을 가볍게 여겨 오로지 덕 있는 자를 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어진 이를 신임하면 어진이 또한 나에게 임용된 것을 마음 기쁘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은 현인을 권하는 것이니, 의혹이 없는 효험이 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벼슬을 높여주어 정중히 대하고 녹을 후히 주어 부를 누리게 하고 좋은일이나 나쁜 일에 그들과 함께하여 공정하게 나누어 가지면 은혜가 두루 가득하여 情誼가 두터워질 것이다. 이는 나의 친척을 친히 함을 권하는 것이니, 원망이 없게 되는 효험이 이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관속을 설치하여 마음대로 일을 맡기게 해주면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체모를 잃지 않고서 자연스럽게 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대신을 권하는 것이니, 일에 현혹됨이 없는 효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충심과 믿음의 마음으로 선비를 대하고 많은 녹을 주어 후히 대하면 그들이 위아래의 가족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음으로써 더욱 혼신의 힘을 다하게 될 것이다. 이는 선비를 권하는 것이니 예로 후히 보답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 부역을 시키되 그들의 힘을 착취하지 않고 조세를 경감하여 그들의 재물이 탕진되지 않도록 하면 평안과 부의 염원을 이루어 임금을 사랑하고 높이는 마음이 스스로 간절하게 될 것이다. 날로 살펴보고 달로 시험하여 그들의 능력을 책정함으로써 그들에게 알맞은 급여를 내리면 많은 장인을 격려, 고무시켜 부지런한 자와 게으른 자가 모두 분발하게 될 것이니, 이는 많은 장인을 권하는 도로서, 재물과 기용이 넉넉해짐은 이 때문이다. 떠나가는 이에게 부절을 주어 환송하고 찾아오는 자에게 필요한 물건을 넉넉히 주어 맞이하고, 나라에 정착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의 능력에 따라 일을 맡기되 잘한 자는 칭찬하고 잘못하는 이에게는 구차스럽게 시키지 않고서 무능한 이를 가엾게 여겨주면 오가는 나그네가 제각기 편안한 곳을 얻게 되어,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염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게 될 것이니, 이는 먼 나라의 나그네를 감싸주는 바로서 사방의 나그네들이 찾아오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후의 후손이 끊기면 그의 次子(支子)를 맞아 그 뒤를 이어주고, 제후의 나라가 멸망하면 국토를 봉해주고, 정사가 닦여지지 않으면 혼란을 수습하여 본국의 상하 군신이 모두 편안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고, 강대국이 幷呑하면 위태로움을 붙잡아 작고 큰 이웃나라들이 서로 돌보도록 해주며, 매 5년에 조회, 매년에 小聘, 3년에 한 차례씩 大聘을 갖되 각각 시의적절하게 하여 그들의 힘에 부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들에게 베푸는 잔치와 선물을 후히 주어 가는 길을 환송하고 저들의 공물 양을 줄여서 오는 길에 재물을 축내지 않도록 주선하여 제후 국가의 편안함을 누리고 큰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이 제후를 품어주는 일이다. 천하가 모두 굴복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구경의 일은 바로 이와 같다.
此는 言九經之事也라 官盛任使는 謂官屬衆盛하야 足任使令也니 蓋大臣은 不當親細事라 故所以優之者 如此니라 忠信重祿은 謂待之誠而養之厚이니 蓋以身體之而知其所賴乎上者 如此也라 旣는 讀曰餼니 餼稟은 稍食也라 稱事는 如周禮 稾人職에 曰考其弓弩하야 以上下其食이 是也라 往則爲之授節以送之하고 來則豊其委積以迎之라 朝는 謂諸侯見於天子오 聘은 謂諸侯使大夫來獻이니 王制에 比年에 一小聘이오 三年에 一大聘이며 五年에 一朝라 厚往薄來는 謂燕賜厚而納貢薄이라
이는 구경의 일에 대해 말한 것이다. 官盛任使는 관속을 많이 두어 충분히 일을 맡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말하니, 대신은 몸소 작은 일까지 감당할 수 없기에 그에 대한 예우가 이와 같다. 忠信重祿은 진심으로 대하고 후히 받들어줌을 말하니, 몸소 그들의 마음을 체득하여 그들이 윗사람에게 의뢰하는 바 이와 같음을 아는 것이다. 旣는 餼(희)로 읽으니, 餼稟은 稍食(관원의 녹)이다. 稱事는 예컨대 『周禮』 「稾人職」에 그들이 만든 활과 쇠뇌를 살펴보고서 그들의 녹[食]을 조정[上下]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떠나가면 그를 위하여 부절을 주어 환송하고, 찾아오면 委積(該條 節旨참조)를 넉넉히 주어 맞이하는 것이다. 朝는 제후가 몸소 천자를 알현하는 것이요, 聘은 제후가 대부로 하여금 공물을 올리는 것이니, 「王制」에 의하면, 해마다 한 차례의 작은 빙문[小聘]이 있고, 3년에 한 번 큰 빙문[大聘] 이 있으며, 5년마다 한 차례 조회가 있다고 하였다. 厚往薄來는 잔치를 베풀고 선물을 주는 것은 후히 하고 공물은 박하게 바침을 말한다.
이에 거듭 凡爲 구절을 말한 것은 실제 그 일을 가리키기 위함이다. 一이란 九經의 진실한 마음이다. 一은 九와 대칭되는 수효로서, 둘이 아니요 섞임이 없다는 뜻이다. 之 자는 가장 절묘하게 쓴 글자로서, 三德을 행할 수 있는 그것을 一이라 함은 天德을 진실하게 하고자 함이며, 九經을행하는 그것을 一이라 함은 王道를 진실하게 하고자 함이다.
凡爲天下國家 有九經하니 所以行之者는 一也니라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는 아홉 가지의 큰 법이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이다.
그러나 이 아홉 가지의 큰 법 또한 그것을 행할 수 있는 所以가 없을 수 없다. 무릇 천하와 국가를 다스림에는 아홉 가지의 큰 법이 있지만 이를 행할 수 있는 것은 하나[一 : 誠]이다. 이 하나에 근본하면 행하는 모든 일이 진실하게 되고, 이에 의해 얻어지는 공효 또한 모두가 진실하므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
一者는 誠也니 一有不誠이면 則是九經은 皆爲虛文矣라 此는 九經之實也라
一은 진실[誠]이니, 만에 하나라도 진실하지 못하면 이 九經은 모두 공허한 겉치레일 뿐이다. 이는 九經의 실상이다.
이는 위 두 곳의 一也(본장 제8절 天下之達德也, 其所以行之者 一也와
제15절 有九經, 其所以行之者 一也)에 이어서 말한 것으로, 一이란 곧 진실을 말한다. 達道, 達德, 九經은 반드시 먼저 이 誠이 있을 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에 아래의 擇善固執은 誠을 미리 갖추는 공부이다. 그러나 여기에 쓰인 誠 자는 원만하게 보아야 한다. 예컨대 몸을 닦는 데 힘쓰기에 앞서 그 本體를 높이 받들고, 정치와 교육을 확대하기에 앞서 그 眞機를 돈독히 하여야 한다는 말이 바로 이런 뜻이다. 언어, 행사, 행실, 도리[言, 事, 行, 道]는 모두 달도, 달덕, 구경을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언어, 행사, 행실 세 가지로 나누어보면 도는 언어, 행사, 행실을 모두 포괄한다. 네 곳의 前定은 거듭 豫 자의 뜻을 밝힌 것으로, 단락마다 誠 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不跲, 不困, 不疚, 不窮은 이른바 立이다. 『장구』에서 말한 아래 문장 [下文 : 제17절]은 言, 事, 行, 道를 가리키는 것이다.
凡事 豫則立하고 不豫則廢하나니 言前定則不跲하고 事前定則不困하고 行前定則不疚하고 道前定則不窮이니라
모든 일을 미리 하면 성립되고 미리 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말할 것을 미리 정하면 차질이 없고, 일할 것을 미리 정하면 어려움이 없고, 행할 것을 미리 정하면 결함이 없고, 도를 미리 정하면 곤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一이란 하루아침에 갑자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達道, 達德, 九經 따위의 행해야 할 일들을 반드시 미리 노력하여 수시로 임하여야만 비로소 이것이 성립될 수 있다. 만일 평소에 미리 노력하지 않으면 무너지게 된다. 예를 들면 말하기에 앞서 말해야 할 바를 미리 정해 놓으면 말을 할 때 조리 정연하여 차질이 없을 것이며, 일하기에 앞서 일해야할 것을 미리 정해 놓으면 일을 할 때 실상이 있어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며, 행하기에 앞서 행해야 할 것을 미리 정해 놓으면 행할 때 떳떳함이 있어 마음에 여유가 있으므로 잘못이 없을 것이며, 도를 행하기에 앞서 해야 할 바의 도리를 미리 정해 놓으면 도에 근본이 있어 두루두루 응하여도 곤궁함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모든 일을 미리하면 이처럼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凡事는 指達道達德九經之屬이라 豫는 素定也오 跲은 躓也오 疚는 病也라 此는 承上文하야 言凡事를 皆欲先立乎誠이니 如下文所推니 是也라
凡事는 達道, 達德, 九經 등을 가리킨다. 豫는 평소에 미리 정해 놓은 것이요, 跲은 넘어지는 것이요, 疚는 잘못됨[病]이다. 이는 윗글을 이어서 말한 것으로, 모든 일을 먼저 진실의 위에서 세우고자 함이니, 이는 아래 글에서 類推하여 말한 바와 같다.
이는 아래 지위에 있는 신하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몸을 진실케 하는 것[誠身], 또한 선을 밝게 아는 데[明善]에서 비롯됨을 말한 것은 곧 미리 한다는 豫의 본의이다. 주자는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다는 것은 아첨으로써 容身을 구하는 것이 아니요, 벗에게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편벽과 구차함으로써 결합을 요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 誠 자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였는 바, 誠身이란 단순히 어버이에게 순응하는 도에서 그치지 않으며, 윗사람에게 신임을, 벗에게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도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선을 밝게 앎[明善]에 대해서도 또한 誠 자의 이면[人心, 天命의 本然]으로 말한 것은 미리 誠을 세워야 한다는 점을 말한다. 덕을 쌓아 나아가는[入德] 근본으로써 말하면 修身이란 반드시 먼저 어버이를 섬겨야 하고, 덕이 이미 이루어진[成德] 공효로써 말하면 나의 몸이 진실한 뒤에 어버이의 마음이 기쁘게 된다. 誠身의 誠 자는 오로지 행실을 주로 말한 것이기에, 이는 知行의 의의를 모두 겸해서 말한 아래 절(제18절) 誠者 誠之者의 誠 자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위 글(제7절)에서는 "하늘을 알아야 한다[知天 : 不可以不知天]"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에서 明善을 말한 것은 善이란 곧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性]이니, 天命은 선하지 않은 바 없기 때문이다.
在下位하야 不獲乎上이면 民不可得而治矣리라 獲乎上이 有道하니 不信乎朋友면 不獲乎上矣리라 信乎朋友 有道하니 不順乎親이면 不信乎朋友矣리라 順乎親이 有道하니 反諸身不誠이면 不順乎親矣리라 誠身이 有道하니 不明乎善이면 不誠乎身矣리라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벗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을 수 없다. 벗에게 믿음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면 벗에게 믿음을 얻을 수 없다.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 진실하지 못하면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수 없다.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몸을 진실하게 할 수 없다.
또한 아랫자리에 있는 자로 미루어 보면 미리 정함이 있어야 한다는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신하로서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백성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먼저 위의 임금에게 신임을 얻어야 한다. 임금의 신임을 얻지 못하면 그 자리가 편안치 못하여 모든 일을 행할 수 없기에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임금의 신임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먼저 벗에게 믿음을 얻는 데에 있다. 벗의 믿음을 얻지 못하면 마음과 행실이 믿음직하지 못하여 명예가 나타나지 않으므로 임금의 신임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벗의 믿음을 얻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먼저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 있다.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면 두터이 해야 할 곳을 薄하게 함이니, 어느 곳인들 박하지 않은 데가 없기에 벗의 믿음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먼저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데 있다. 자신이 진실하지 못하면 설령 밖으로 어버이를 섬기는 겉치레의 예절을 다했을지라도 마음에는 어버이를 사랑하는 실상이 없기에,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을 진실하게 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으니, 먼저 선을 밝게 아는 데 있다. 선을 밝게 알지 못하면 선악이 뒤섞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양심의 감정을 스스로 속이게 되어 수많은 잘못을 범하게 되므로 자신을 진실하게 할 수 없다. 여기에서 선을 밝게 앎으로 말미암아 몸을 진실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알 수 있으니, 진실이란 바로 미리 먼저 해야 할 바이다.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림으로써 벗에게 믿음을 얻고, 윗사람에게 신임을 얻음으로써 백성을 다스릴 수 있다. 모든 일은 이렇게 성립되어 가는 것이다. 아랫자리에 있는 자 또한 이와 같은데, 더구나 윗자리에 앉아서 達德으로써 達道를 행하고, 九經을 베풀어 문왕, 무왕의 어진 정사를 행해야 할 임금이라면어찌 앞서 미리 진실[誠]을 세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此는 又以在下位者로 推言素定之意라 反諸身不誠은 謂反求諸身而所存所發이 未能眞實而無妄也며 不明乎善은 謂不能察於人心天命之本然하야 而眞知至善之所在也라
이는 또한 아랫자리에 있는 자로서 평소 미리 정해야 한다는 뜻을 미루어 말한 것이다. 反諸身不誠이란 자신을 돌이켜볼 때 내면에 간직된 마음 [所存]과 밖으로 나타나는 정[所發]이 "거짓 없는 진실[眞實無妄]"에 이르지 못함을 말하며, 不明乎善이란 人心과 천명의 본연을 살펴 지극한 선이 있는 곳을 참으로 알지 못함을 말한다.
이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진실해야 하는 그 이유를 推原하면서, 아울러 誠을 세워야 한다는 데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앞에 쓰인 誠者(誠者 天之道也)는 천도의 이치[天理]로서, 뒤의 誠者(誠者 不勉而中)는 그 이치를 온전히 다한 성인으로서, 그리고 앞에 쓰인 誠之者(誠之者 人之道也)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공부를 말한 데 반하여, 뒤의 誠之者(誠之者 擇善而固執) 는 이 공부를 이미 극진히 다한 사람으로서 말한 것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진실[誠]이란 하늘의 도이다. 이는 나의 몸이 있기에 앞서 먼저 진실된 이치가 있었기에 자기의 몸이 있으면 반드시 진실한 이치가 있기 마련이니, 이른바 하늘이 명한 본성[天命之性]이 바로 이것이다. 그 本性(誠)은 성인과 범인이 모두 이를 소유하고 있으며, 誠之者의 之 자는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해준, 본성의 實理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이다. 이는 반드시 진실하게 하였을 때만이 이 진실[誠 : 본성의 實理]이 나에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배우는 자의 일(공부)이므로 사람의 도[人道]라고 말한다. 이치[理]의 실체는 본디 진실한 것이므로, 사람은 마땅히 진실하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두 구절은 서로 연이어 말한 것이지 대칭의 의미로 쓴 것이 아니다. 힘쓰지 않아도 도에 부합되는[不勉而中] 것은 仁이요, 생각지 않아도 아는[不思而得] 것은 知이다. 仁을 먼저, 知를 뒤에 말한 것은 成德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勇 자는 從容中道 네 글자 속에 그 뜻이 담겨 있다. 다시 말하면 뭇사람이 모두 애써 노력해야 할 일을 그(誠者)만은 유독 힘쓰지 않고서도 자연스럽게 도에 부합되는 그것이 큰 용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 절에서는 세 곳의 道 자가 씌어 있는데, 從容中道의 道는 우주, 윤리, 사물의 總稱이므로, 위에 쓰인 두 곳의 道(……天之道, ……人之道) 자의 뜻과는 차이점이 있다. 聖人也는 위 句讀에 이어서 아래의 者也(誠之者擇善而固執之者也)라는 글자와 대칭으로 쓰였으며, 擇善固執은 아래의 學利 困勉을 포괄하여 말한 것으로, 선을 선택할 줄 모르면 인욕을 천리로 잘못 인식하게 되고 잡은 바 견고하지 못하면 천리는 혹 인욕에 의해 빼앗기게 된다.
誠者는 天之道也오 誠之者는 人之道也니 誠者는 不勉而中하며 不思而得하야 從容中道하나니 聖人也오 誠之者는 擇善而固執之者也니라
진실(自然의 實理)은 하늘의 도요, 진실하게 하려는 것(人爲의 努力)은 사람으로서의 도리이니, 진실한 자(生知安行의 聖人)는 힘쓰지 않아도 도에 부합되고 생각하지 않아도 도를 얻어 자연스럽게 도에 부합되는 자이니, 이는 성인이요, 진실하게 하려는 자(學利困勉者)는 선을 선택하여 굳게 잡은 자이다.
그러나 자신을 진실하게 해야 하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또한 하늘에서 명하여 준 본성으로, 진실한 그 이치가 바로 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것을 이른바 진실[誠 : 實理]이라 한다. 이는 비록 그 이치가 사람에게 있으나 하늘을 떠날 수 없다. 그것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해 준 것으로서, 그 도가 애당초 그와 같다. 이와 같이 天理의 本然이란 본디 진실한 것이다. 그러나 人心이란 때로는 진실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을 추구하고자하니, 이를 일러 진실하려고 추구하는 것[誠之者 : 努力]이라 한다. 이는 나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여 나의 일을 마치는 것이니, 사람의 도란 마땅히 이와 같이 노력해야 한다. 오로지 진실한 자[誠者 : 聖人]만이 그 행동을 편안히 행하므로[安行] 힘쓰지 않고서도 스스로 도에 부합되고, 그 지혜는 나면서 알기에[生知] 생각하지 않고서도 스스로 도를 얻으니, 이는 곧 하는 일마다 자연스럽게 도에 부합되는 성인이요, 또한 하늘의 도[天道]이다. 그러나 진실하고자 노력하는 자[誠之者]는 생각하지 않고서도 도를 얻을 수 있는 生知者가 아니기에 반드시 많은 이치를 선택하여 선을 밝혀야 하고, 힘쓰지 않고서도 도에 부합되는 安行者가 아니기에 반드시 선에 나아가 굳게 움켜잡아야 자신을 진실하게 할 수 있으니, 이는 이른바 사람의 도[人道]이다. 이 세상에는 모두 진실한 성자만이 사는 것이 아니기에,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천리에 부합하고자 한다면 진실하게 하려는 공부로써 스스로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此는 承上文誠身而言이라 誠者는 眞實無妄之謂니 天理之本然也오 誠之者는 未能眞實無妄而欲其眞實無妄之謂니 人事之當然也라 聖人之德은 渾然天理라 眞實無妄하야 不待思勉而從容中道하니 則亦天之道也라 未至於聖則不能無人欲之私하야 而其爲德이 不能皆實이라 故未能不思而得則必擇善然後에 可以明善이오 未能不勉而中則必固執而後에 可以誠身이니 此則所謂人之道也라 不思而得은 生知也오 不勉而中은 安行也라 擇善은 學知以下之事오 固執은 利行以下之事也라
이는 위 글 誠身에 이어서 말한 것이다. 誠者는 진실하여 거짓이 없음을 말하니 천리의 본연이요, 誠之者는 거짓 없는 진실을 이루지 못했으나 거짓 없는 진실을 얻고자 함이니 이는 사람으로서의 당연한 도리이다. 성인의 덕은 모두 천리와 하나여서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기에, 생각하거나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에 부합되니, 그 또한 하늘의 도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는 인욕의 私心이 없지 않아서, 그의 덕이 모두 진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인처럼 생각지 않고서도 도를 얻을 수 없기에 반드시 선을 선택해야만 선을 밝힐 수 있고, 성인처럼 힘쓰지 않고서도 자연히 도에 부합될 수 없기에 반드시 굳게 움켜잡아야만 몸을 진실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이른바 사람의 도리이다. 생각하지 않고서도 도를 얻을 수 있음은 태어나면서 아는 것이요, 힘쓰지 않아도 도에 부합되는 것은 편안히 행함이다. 선을 선택하는 것은 배워서 아는 자, 그 이하 경지에 있는 자의 일이요, 굳게 움켜잡음은 이롭게 생각하여 행하는 자, 그 이하 경지에 있는 자의 일이다.
이 아래로 본 장의 끝까지는 誠이란 하늘의 도요, 인성의 본질임을 밝혀 至誠이 곧 配天임을 논술하고 있다. 誠에는 본연적 자연의 진실과 인위적 노력의 진실이 있다. "'誠者, 天之道'의 誠은 진실한 이치의 자연으로서 성인의 경지이며, '誠之者, 人之道'의 誠은 진실한 이치를 진실하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힘써 행하려는 것이다. 맹자의 말에 의하면,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춰 있다'라는 것은 誠을 말하며, '몸을 돌이켜 진실하려는 것'은 誠을 하려는 것이다. '몸을 돌이킴'이란 자기에게로 돌이켜 구함을 말하며, 誠이란 만물이 자기에게 다 갖추어 있어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102) "하늘에 참으로 진실한 이치가 있으니, 사람으로서는 당연히 진실한 공부가 있어야 한다. 성인은 생각지 않아도, 힘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에 맞는 實理의 유행이 있다. 따라서 성인은 하늘과 하나이며 그가 곧 하늘의 도이다. 그러나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자는 반드시 선을 가려야 선을 밝힐 수 있고, 반드시 固執하여야 진실한 선을 행할 수 있다. 이는 人事의 당연한 것이요, 곧 사람으로서의 도리이다."103)
이는 學利者의 진실 추구[求誠]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擇善의 공부는 固執의 공부에 비해 보다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이미 알면 행하는 일이란 쉽기 때문이다. 살펴서 자세히 물음[審問]은 마음에 의심이
102) 『大全』 朱子. 103) 위와 같음.
있어 이럴까 저럴까 하는 去取의 大段으로, 밝게 분별함[明辨]은 마음에 얻은 바 있어 터럭 끝처럼 미세한 것일지라도 명백하게 분석하는 것으로 말한다. 행하되 독실하지 않으면 이는 오히려 행하지 않은 것과 같다. 가슴 속 깊이 새기고 잊지 않음은 효험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요, 또한 진보 없는 停滯를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곧 독실하기 때문이다. 朱子는 본디 배움이 있는 뒤에야 의심해야 할 문제점을 알아 이를 물어나갈 수 있으며, 살펴 자세히 물은 뒤에 그 실마리를 가지고 더욱 깊이 삼가 생각해 나갈 수 있으며, 삼가 신중히 생각하기 때문에 얻은 바를 분별하여 베풀 수 있으며, 밝게 분별하기 때문에 의심한 바 없이 행함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 하여, 이를 모두 연계지어 차례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장구』에서 勇에 대하여 말하지 않은 것은 아래의 弗措의 勇에 비하여 보았을 때 다소 가벼운 의미로 쓰였기 때문이다.
博學之하며 審問之하며 愼思之하며 明辨之하며 篤行之니라
이를 널리 배우며, 살펴 자세히 물으며, 삼가 신중히 생각하며, 밝게 분별하며, 독실하게 행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하게 하고자 하는 공부에는 다섯 가지의 조목이 있고, 진실하게 하려는 자에게는 두 등급이 있다. 學知利行者로 말하면 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生知安行] 성인을 따라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천하의 선은 모든 현상 속에 있으니, 반드시 옛것을 살펴보고 현재의 일을 고증하면서 널리 배워 그 이치를 궁구해야 한다. 그러나 배웠을지라도 묻지 않으면 배웠던 바를 살펴볼 수 없다. 그러므로 또다시 살펴서 자세히 물어 의심되는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이미 배우고 또 물었을 지라도 마음으로 참답게 이치를 통달하지 못하면 다시 깊이 思考해야 할 점이 없지 않다. 이 때문에 반드시 삼가 신중히 생각해야 하므로, 그저 지나쳐서도 안 되고 또한 너무 천착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미 묻고 또 생각했을지라도 마음에 결정짓지 못한 점이 있으면 이를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반드시 명백히 분별하여 진리에 현혹당해서도 안 되고, 또한 유사한 점에 혼잡을 일으켜서도 안 된다. 이와 같이 하면 선을 선택하여 이를 행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또다시 독실하게 실행하여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여 얻은 바를 모두 실천해 나가야 한다. 이는 學知利行者의 진실 추구[求誠]의 공부이다.
此는 誠之之目也라 學問思辨은 所以擇善而爲知이니 學而知也오 篤行은 所以固執而爲仁이니 利而行也라 程子曰 五者에 廢其一이면 非學也라
이는 진실하게 하려는 공부의 조목이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은 선을 선택하는 것으로서 知(智)이니 배워서 아는 것이요, 독실하게 행하는 것은 굳게 잡는 것으로서 仁이니 이롭게 생각하여 행하는 것이다. 程子가 말하였다.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뜨리는 바 있으면 학문이 아니다."
"이 다섯 가지는 선후는 없으나 緩急의 차는 있다. 그러나 학문을 넓게 할 때는 살펴서 물을 겨를이, 살펴 물을 때는 삼가 생각할 겨를이, 삼가 생각할 때는 밝게 분별할 겨를이, 밝게 분별할 때는 독실하게 행할 수 있는 겨를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 다섯 가지는 첫머리부터 실천해 나가는 데에는 애당초 선후의 순서가 없다."104)
여기에서는 困勉者의 진실 추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위의 열 구절(有弗學 學之……, 有弗問 問之……, 有弗思 思之……, 有弗辨 辨之……, 有弗行行之……)은 스스로 그와 같이 하기를 다짐하는 내면의 마음을 말하며, 뒷글(弗能 弗措也, 弗知 弗措也, 弗得 弗措也, 弗明 弗措也, 弗篤 弗措也)은 그 공부를 반드시 곱절 더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有弗學 세 자는 反說로써 환기시켜주는 말인데, 다섯 단락이 모두 그와 같다. 다섯 곳의 弗措는 선을 선택[擇善]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선을 밝게 알고 난 뒤에야 그만두고자 함이며, 굳게 잡음[固執]은 반드시 몸을 진실하게[誠身] 한 뒤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人一能之, 人十能之의 두 개 人 자는 學利者를 가리키며, 두 개 能 자는 知行을 겸하여 말한다. 一·十과 百·千은 다만 수효를 빌어 강조의 뜻을 나타낸 데 지나지 않는다. 이는 모두 용맹으로써 知와 仁을 보완하는 부분이다. 남들이 단 한 번에 이뤘을 때 나는 백 번을 하는 것이 백 곱절이요, 남들이 열 번에 능했을 때 나는 천 번을 하는 것 또한 백 곱절이다. 이를 두 차례 거듭 말한 것은 도에는 얕고 깊음의 차이, 어렵고 쉬움의 구분이 있기 때문이다.
有弗學이언정 學之인댄 弗能을 弗措也하며 有弗問이언정 問之인댄 弗知를 弗措也하며 有弗思언정 思之인댄 弗得을 弗措也하며 有弗辨이언정 辨之인댄 弗明을 弗措也하며 有弗行이언정 行之인댄 弗篤을 弗措也하야 人一能之어든 己百之하며 人十能之어든 己千之니라
배우지 않을지언정 배울진댄 능히 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며, 묻지 않을지언정 물을진댄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을
104) 위와 같음.
지언정 생각할진댄 얻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며, 분별하지 않을지언정 분별할진댄 밝게 알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않으며, 행하지 않을지언정 행할진댄 독실하지 않고서는 그만두지 아니하여, 남이 단 한 번에 능하면 나는 백 번을 하며, 남이 열 번에 능하면 나는 천 번을 해야 한다.
애써 알고 힘써 행한 자[困知勉行者]로 말하면 배워서 알고 이롭게 생각하여 행한 자[學知利行者]를 미쳐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배우지 않으려면 그만두려니와 배울 바에는 기필코 능함을 추구해야 하므로, 만일 능히 하지 못했을 때에는 배움의 공부를 그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묻지 않으려면 그만두려니와 물을 바에는 기필코 알기를 추구해야 한다. 만일 알지 못할 경우에는 묻는 것을 그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하지 않으려면 그만두려니와 생각할 바에는 기필코 얻음을 추구해야 하므로, 만일 얻지 못할 경우에는 생각하는 공부를 그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분별하지 않으려면 그만두려니와 분별할 바에는 기필코 밝음을 추구해야 하므로, 만일 밝음에 이르지 못할 경우에는 분별하는 공부를 그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행하지 않으려면 그만두려니와 행할 바에는 기필코 독실함을 추구해야 하므로, 만일 독실하지 못할 경우에는 행하는 공부를 그만둬서는 안 될 것이다. 學知利行者가 그 공부를 단 한 번에 이뤘다면 나는 그 공부를 백 곱절 더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백 곱절 더해야 그의 한 번에 상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學知利行者가 그 공부를 열 번에 이뤘다면 나는 그 공부를 백 곱절로 더하여 천 번을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반드시 천 번을 해야 그의 열 번에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는 선을 선택하되 정밀함에 힘써서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데 남김없이 힘을 다한 것이며, 굳게 잡아 독실하게 행하여 조금이라도 빠뜨린 공부가 없고자 함이니, 이것이 困知勉行者의 求誠 공부이다.
君子之學은 不爲則已어니와 爲則必要其成이라 故常百倍其功이니라 此는 困而知, 勉而行者也니 勇之事也라
군자의 학문은 하지 않으면 그만두려니와 할진댄 반드시 그 성공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그 공부를 백 곱절 더하는 것이다. 이는 애써서 알고 힘써서 행하는 자이니, 용맹한 자의 일이다.
이는 다만 困勉者의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果能此道矣의 果能 자와 矣자는 現成語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는 백 곱절의 공부를 극진히 다하여 굳셈과 총명으로 나아감을 추구하는 것이기에 必明 必强이라는 두 개의 必 자에 果能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達德은 모든 사람이 다함께 얻은 것으로 본디 굳세고 밝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어리석은 사람이 더럽혀진 때를 닦아 밝음을 얻고자함이요, 나약한 사람이 무기력함을 떨쳐버리고 굳셈을 얻고자 함이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는 그 노력을 백 곱절 더하는 데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이른바 본 장 제9절의 "그것을 아는 데 미쳐서는 하나이며, 그 성공에 미쳐서는 하나이다"라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바로 이 같은 사람이 존재하고 이 같은 정사가 거행될 수 있다[人存政擧]. 『장구』에서 말한 擇善之功의 功 또한 공효를 뜻하는 效 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果能此道矣면 雖愚나 必明하며 雖柔나 必强이니라
참으로 이 도를 능하면,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총명해질 것이며, 비록 나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굳세게 될 것이다.
이는 사람들이 공부를 백 곱절 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마음에서 하게 된 말이다. 참으로 이 다섯 가지를 가지고 남보다 백 곱절의 공부를 더하면 학문의 힘이 이미 지극하여 스스로 기질이 변화되기에 비록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지혜가 밝아져 총명으로 나아갈 것이며, 비록 나약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힘써 행하여 굳세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모든 일에 앞서 진실하게 하려는, 사람으로서의 도리[人道]를 다하여 達道, 達德, 九經의 일들이 모조리 나의 몸에 모이게 되고, 천하와 국가의 일을 모두 나의 몸으로부터 미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한다면 또한 어찌 그 인재가 없다 할 것이며, 어찌 문왕, 무왕의 어진 정사가 거행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明者는 擇善之功이오 强者는 固執之效라 呂氏曰 君子所以學者는 爲能變化氣質而已라 德勝氣質이면 則愚者는 可進於明이오 柔者는 可進於强이나 不能勝之면 則雖有志於學이라도 亦愚不能明하고 柔不能立而已矣라 蓋均善而無惡者는 性也니 人所同也며 昏明强弱之稟이 不齊者는 才也니 人所異也라 誠之者는 所以反其同而變其異也라 夫以不美之質로 求變而美인댄 非百倍其功이면 不足以致之니 今以鹵莽滅裂之學으로 或作或輟하야 以變其不美之質이라가 及不能變하얀 則曰天質이 不美하야 非學所能變이라 하나니 是는 果於自棄니 其爲不仁이 甚也라
밝음이란 선을 선택한[擇善] 공효요, 强함은 굳게 잡음[固執]의 효험이다. 呂氏가 말하였다. "군자가 공부를 하는 것은 그 기질을 변화시키려는 데 있을 뿐이다. 덕이 기질을 이기면 어리석은 자는 총명한 데에 나아가고, 나약한 자는 굳센 데 나아갈 수 있으나, 기질을 이기지 못하면 비록 학문에 뜻을 두어도 어리석은 사람은 총명하지 못하고 나약한 사람은 서지 못할 것이다. 다같이 선하여 악함이 없는 것은 본성이니, 모든 사람이 다 같은 바이며, 혼매하고 총명하고 굳세고 나약한 기품이 똑같지 않는 것은 재주이니 사람마다 다른 것이다. 진실하게 하려는 것은 다 같은 본성으로 회복하고 각기 다른 기품을 변화시키고자 함이다. 아름답지 못한 기질을 변화시켜 아름다워지기를 추구하려면 백 곱절의 공부를 더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는데, 오늘날 마음을 쓰지 않고[鹵莽 : 不用心] 支離滅裂하여, 하다 말다 하는 공부로써 아름답지 못한 기질을 바꿔보려다가 바꿔지지 않으면 타고난 기질이 아름답지 못하여, 학문으로써는 기질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는 바로 스스로 과감하게 포기하는 것이니, 이는 매우 어질지 못한 일이다.
鹵莽滅裂은 『莊子』 「則陽」편을 살펴보면, "정사를 하는 데 마음 쓰지 않는다거나 백성을 다스리는 데 경박하지 말라. 지난 날 농사를 지을 때 마음 쓰지 않고 키웠더니 열매 또한 나에게 마음 쓰지 않고 보답하였으며, 김매는 일을 가볍게 하였더니 열매 또한 나에게 가볍게 보답하였다" 하였는데, 鹵莽란 마음을 쓰지 않음이며, 滅裂이란 輕薄함이라고 하였다.
右는 第二十章이라 此는 引孔子之言하야 以繼大舜文武周公之緖하야 明其所傳之一致니 擧而措之면 亦猶是爾라 蓋包費隱, 兼小大하야 以終十二章之意라 章內에 語誠始詳而所謂誠者는 實此篇之樞紐也라 又按孔子家語에도 亦載此章而其文尤詳이라 成功一也之下에 有公曰子之言이 美矣至矣나 寡人은 實固不足以成之也라 故其下에 復以子曰로 起答辭어늘 今無此問辭而猶有子曰二字는 蓋子思가 刪其繁文하야 以附于篇而所刪有不盡者니 今當爲衍文也라 博學之以下는 家語에 無之니 意彼有闕文이어나 抑此或子思所補也歟아
위는 제20장이다. 이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순임금, 문왕, 무왕, 주공의 전통을 이어서 전수한 바 일치되므로, 공자 또한 이 말을 들어 세상을 다스리는 데 조처하였더라면 그들과 같은 정사를 시행하였을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費隱을 포괄하고 大小를 겸하여 제12장의 뜻을 끝맺고 있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誠에 대해 자세히 말하였다. 이른바 誠이란 실제로 『중용』 전 편의 中樞라 할 수 있다. 또 살펴보건대 『孔子家語』에서도 이 장의 내용을 싣고 있는데, 그 문장은 이보다 더욱 자세하다. 成功一也(제9절) 구절 아래에 "애공이 말하였다. 선생의 말이 아름답고 지극하지만 나(애공)는 실로 고루하여 이를 이룰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었기에 그 아래(제10절)로 연이어서 또다시 子曰두 자로써 공자의 대답을 일으켜 세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용』에서는 이처럼 애공이 묻는 말이 없는데도 여전히 子曰 두 자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마 자사가 번거로운 문장을 삭제하여 『중용』에 첨부하는 과정에 삭제한 바 미진했던 것으로 생각되니, 여기서는 의당 衍文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博學之 이하 문장은 『공자가어』엔 없다.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저 『가어』에 이 문장이 빠졌든지, 아니면 이는 혹시 子思가 『중용』에 보완한 것인지?
『중용』의 다른 부분에선 공자의 말을 인용했을 뿐인데, 무엇 때문에 여기에서는 공자와 애공의 장편 문답을 게재한 것일까? 본 장이 어느 때 성립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荀子』에 「哀公」편이 있고, 大小 『戴記』에 「哀公問」편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공자와 애공의 문답이 세상에 전해 옴을 보여주는 것이며, 『중용』은 이를 채록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哀公問」편은 『중용』의 주장과 일치된 부분이 있으나 「哀公問」편이 『중용』에 앞서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증명하기 어렵다. 공자와 애공의 정사에 관한 문답은 마치 『서경』의 「皐陶謨」 「益稷」편의 舜과 皐陶, 益稷과의 문답과 유사하다. 이는 애공의 스승이요 성인으로서의 공자를 제시하여 만일 공자에게 정사를 위임했었더라면 요순과 선정을 이룩했을 것이며, 또한 聖者로서의 내면의 덕을 갖추고 있음을 나타내준 것이다. 본 장의 첫 부분에서는 정사를 논급하고, 뒷부분에 이르러 至聖으로서의 덕을 나타낸 의도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이 장에서는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天人合一의 뜻을 밝혀주고 있다. 위 두 구절(自誠, ……之敎)은 들어가는 경로의 차이점을 推原하여 말한 것이며, 아래 두 구절(誠則, ……誠矣)은 결국 그 歸趣가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에게 人道로써 天道를 바라보도록 권유, 격려한 뜻이다. 自誠明은 진실과 밝음이 동시에 이르러오는 것이니, 이는 生知 安行의 일로써 仁을 먼저 하고 知를 뒤로 한 것이며, 自明誠은 밝음이 있는 다음에 진실에 이를 수 있으니, 이는 學利 困勉의 일로서 知를 먼저 하고 仁을 뒤로 한 것이다. 性이란 곧 하늘에서 명해준 본성이다. 하늘이 명한 본성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는 본성 그대로 자연스럽게 행하는 자[性之者]로서 말한 것이다. 본성 그대로 자연스럽게 행하는 자란 성인만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다. 敎란 곧 도를 닦는 가르침을 말하니, 가르침을 베푸는 것은 성인의 일이지만,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서 진실한 데로 들어가는 것은 학자의 일이다. 誠則明은 밝음이 진실 가운데 존재하여 진실과 밝음이 하나이므로, 이에 쓰인 則 자는 긴밀한 감이 있으나, 明則誠은 진실이 밝음의 뒤에 존재하므로 이는 진실과 밝음이라는 두 층으로 나누어서 말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쓰인 則 자는 다소 느슨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두 곳의 則자가 모두 決定辭로 쓰인 것은 매한가지이다.
自誠明을 謂之性이오 自明誠을 謂之敎니 誠則明矣오 明則誠矣니라
진실로 말미암아 밝아짐을 본성[性] 그 자체라 하고,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해짐을 가르침[敎]이라 한다. 진실하면 밝아지고, 밝으면 진실해진다.
자사는 위 제20장에 이어서 天道, 人道의 의의를 밝혀 가르침을 따라 본성을 회복하도록 격려의 말을 해주고 있다. 나(자사)는 공자의 말씀, 곧 '진실한 자'와 '진실하게 하려는 자'의 구분으로 인하여, 본성[性]과 가르침[敎]의 의의를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진실[誠]로부터 밝음[明]을 얻은 자는 덕이 진실하여 사물을 관조하는 밝음이 있으니, 이는 성인의 덕으로서 힘쓰지 않아도 도에 부합되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도를 얻음이니, 이른바 본성이요 天道이다. 또한 밝음으로부터 진실한 자는 먼저 선을 밝힌 뒤에 그 선을 진실하게 한 자이니, 이는 현인의 학문으로서 선을 정밀하게 선택하여 이를 굳게 잡음이니 이른바 가르침이요 人道이다.
본성과 가르침에는 천도와 인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 귀취는 결국 하나이다. 진실로부터 밝아진다는 것은 진실한 뒤에 밝아지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이치가 이미 온전하여 神明으로 사물을 밝게 관조하여 하나도 빠뜨림이 없음이니, 진실하면 밝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밝음으로부터 진실한 자는 밝음이 아니고서는 진실할 수 없다. 眞僞가 나눠지는 미세한 부분을 분별하고 진실하게 하여 망령됨이 없게 하고, 이를 계기로 점차 밝음을 회복하여 나가면 진실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인도를 지극히 다하여 천도에 부합되는 공부이니, 이를 힘쓰지 않을 수 없다.
自는 由也라 德無不實而明無不照者는 聖人之德으로 所性而有者也니 天道也라 先明乎善而後能實其善者는 賢人之學으로 由敎而入者也니 人道也라 誠則無不明矣오 明則可以至於誠矣라
自는 말미암음이다. 덕이 진실하지 않음이 없어 밝음이 사물을 관조하지 않음이 없는 자는 성인의 덕으로서 본성 그대로 소유한 자이니, 하늘의 도[天道]이다. 선을 밝힌 다음에 그 선을 진실하게 한 자는 현인의 학문으로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진실에 들어가는 자이니, 사람의 도[人道]이다. 진실하면 밝지 않음이 없고, 밝으면 진실함에 이르게 된다.
'自誠明 謂之性'과 '天命之謂性'의 性 자는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天命之謂性'의 性 자는 본성의 유래인 본원적 측면에서 말하고, '自誠明 謂之性'의 性 자는 본성의 實有인 實理的 측면에서 말한다.
右는 第二十一章이라 子思 承上章夫子天道人道之意而立言也라 自此以下十二章은 皆子思之言으로 以反覆推明此章之意라
위는 제21장이다. 자사가 공자의 천도, 인도의 뜻을 이어 말한 것이다. 이로부터 아래 열두 장(제32장까지)은 모두 자사의 말로서 이 장의 뜻을 반복하여 미루어 밝힌 것이다.
이 장에서는 至誠, 盡性의 전반적인 功用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첫머리 한 구절에서 이미 전체의 뜻을 모두 포괄하고 있으며, 아래는 모두 盡性에서 미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至誠의 위에 天下 두 자를 더한 것은, 성인은 만물의 으뜸으로서[首出庶物] 천지와 함께할 수 있는 바를 말한다. 본성은 仁義禮智이며, 이를 극진히 다한다는 말은 어떤 것이든지 극진히 하지 않은 바 없음을 말한다. 반드시 스스로 그 본성을 극진히 다했을 적에 사람과 만물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여 천지와 더불어 三才로서 함께할 수 있고, 또한 오직 사람과 만물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여 천지와 더불어 三才로써 함께해야만 능히 그 본성을 극진히 다할 수 있다. 그것은 본성이란 원래 천지 만물과 하나로서 서로 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성 가운데 사람과 만물을 포괄하여 말하는 것은 그 이치가 하나이기[理一] 때문이며, 본성의 가운데 사람과 만물을 뒤섞지 않은 것은 분수가 다르기[分殊] 때문이다. 그러므로 人性, 物性에는 제각기 지극히 다해야 할 일이 있고 인성과 물성을 지극히 다하는 것이 바로 천지의 화육을 돕는 것이다. 可以贊天地, 可以與天地參이라는 두 곳의 可以 자는 有以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천지 化育의 化는 有에서 無를 낳고, 育은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이다. 參과 贊은 功用으로 말하면 贊이요, 定位로 말하면 參이다. 參이란 서로를 필요로 하여 그 어떤 것도 없어서도 안 된다는 뜻이니, 이는 다만 化育에 중점을 두고 말한 것으로, 바로 하늘과 땅 또한 인간을 경시할 수 없는 위대한 점이다.
唯天下至誠이야 爲能盡其性이니 能盡其性則能盡人之性이오 能盡人之性則能盡物之性이오 能盡物之性則可以贊天地之化育이오 可以贊天地之化育則可以與天地參矣니라
오직 천하에 지극히 진실한 자만이 능히 그 본성을 다할 수 있으니, 능히 그 본성을 다하면 능히 사람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능히 사람의 본성을 다하면 능히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능히 만물의 본성을 다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의 化育을 도우면 천지와 함께 셋[三才]이 될 것이다.
자사는 지극한 진실로써 밝음을 얻은 자의 천도에 대해서 밝혀주었다. 진실이 지극하지 못하면 본성을 다하지 못하기 마련이며, 천지와 사람과 만물이 서로 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하에 지극한 진실을 이룬 자만이 순수하고 온전한 천리로서 사욕이 뒤섞여 있지 않아서 부여받은 본성의 이치를 정밀하게 살피고, 이로 말미암아 지극히 행함으로써 본성을 극진하게 다할 수 있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 또한 나의 본성과 같기에 나의 본성을 다하면 그들을 기르고 가르쳐 그들의 본성을 다할 수 있고, 사람의 본성을 다하면 절제와 사랑으로써 만물의 본성을 다할 수 있다. 사람과 만물은 모두 하늘과 땅이 낳아주었지만 각기 부여받은 그 본성을 다하지 못하면 천지의 화육에 이루지 못한 점이 있을 것이다. 오로지 지극한 진실로서 사람의 본성을 다하고 만물의 본성을 다하면 천지의 조화를 裁成輔相하여 사람과 만물을 生成함으로써 천지의 화육이 이뤄질 것이다. 사람과 만물을 생성하는 천지의 화육을 도우면 하늘은 위에서, 땅은 아래에서, 그리고 지극히 진실한 자는 하늘과 땅의 가운데에서 제자리를 얻음으로써 천지와 함께 서서 셋이 될 것이다. 至誠, 盡性의 功用은 이처럼 큰 것이다. 이는 지극한 진실로써 밝음을 얻는 자의 일이니, 천도이다.
天下之至誠은 謂聖人之德之實하야 天下에 莫能加也라 盡其性者는 德無不實이라 故無人欲之私而天命之在我者를 察之由之하야 巨細精粗(정추)에 無毫髮之不盡也라 人物之性이 亦我之性이나 但以所賦形氣不同而有異耳라 能盡之者는 謂知之無不明而處之無不當也라 贊은 猶助也라 與天地參은 謂與天地幷立而爲三也라 此는 自誠而明者之事也라
천하에 지극한 진실이라 함은 성인의 덕이 진실하여 천하에 그 어느 것으로서도 이에 더할 수 없음을 말한다. 그 본성을 다한다 함은 덕이 진실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인욕의 사사로움이 없어서, 나에게 부여된 천명을 분명히 살피고 이로 말미암아 행하여 크고 작고 정밀하고 거친, 그 모든 것에 털끝만큼이라도 다하지 않음이 없다. 사람과 만물의 본성 또한 나의 본성이지만 받아온 形氣가 같지 않음으로써 차이가 있다. 능히 그 본성을 극진히 다함은 앎이 밝지 않음이 없고 처리함에 타당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贊은 도움[助]과 같다. 천지와 더불어 셋이 된다는 것은 천지와 더불어 나란히 서서 셋이 됨을 말한다. 이는 진실로 말미암아 밝은 자의 일이다.
"盡性은 맹자의 盡心과 같은 것일까? 盡心이란 知的인 면에서 말한 것이다. 진실한 본연의 전체를 다한 것을 盡性이라 하고, 虛靈知覺의 妙用을 다한 것은 盡心이다. 盡性·盡心의 盡 자는 행하여 나갈 수 있는 노력의 공부를 말한 것이 아니라, 이는 이미 上面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다했다[盡]고 말할 수 있다."105)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는 것은 인간이란 천지와 함께하는 이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늘과 사람의 행하는 바는 각기 다르므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늘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하늘은 만물의 생명을 낳아주고 인간은 밭갈이를 하여 기르는 것이며, 흐르는 물이란 만물을 윤택하게 해주지만 물길을 끌어주는 것은 사람의 일이며, 뜨거운 불은 만물을 따뜻하게 해주지만 불을 지피는 것은 사람이다."106)
右는 第二十二章이니 言天道也라
위는 제22장이니, 天道를 말한다.
이 장에서는 한 부분으로부터 미루어 다한[致曲] 자는 인간의 도리를 다하여 하늘의 이치에 부합된다는 뜻을 나타내주고 있다. 이는 致曲에 중점을 두고 있는 바, 그것은 곧 擇善固執이다. 有誠 이하의 구절은 모두 그 효험을 말한다. 其次의 次 자는 위의 至誠人과 상대되는 사람을, 致曲은 盡性과 상대되는 경지를 말한다. 致 자에 대한 『장구』의 "悉推致之, 以各造
105) 위와 같음. 106) 위와 같음.
其極"의 悉 자, 各 자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悉이란 낱낱이 미루어 다한다는 뜻이며, 各이란 각각 그 극치에 나아감을 요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四端을 확충하여 나아감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두 번째 쓰인 曲能의 曲 자는 이미 미루어 다한 曲이며, 有誠의 誠 자는 전체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誠이라 말할 뿐 至誠이라 말하지 않은 것은, 나타남[形]으로부터 또렷함[著]과 빛남[明]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타나는 효험이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은 이면의 진실[誠]이 한 걸음 한 걸음 개척되어 나가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하나의 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誠으로써 모든 것이 끝난다는 것도 아니다. 形은 온몸[四體]에 베풀어지는 것을, 著는 남들이 우러러봄직한 거동을, 明은 빛나고 성대한 威儀를, 動은 나에 의하여 저 사람이 감동받는 것을, 變은 저 사람이 나를 따르는 것을, 化는 그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음을 말한다. 能化의 경지에 다다르면 진실의 본체가 이미 넉넉하여 그 쓰임 또한 온전하다. 이는 극진히 다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절의 뜻은 끝 구절 至誠能化에 중점이 있지 않고, 그 버금가는 사람[其次]에게 중점을 두고 있으니, 能化라는 뜻은 바로 至誠과 하나임을 나타낸 말이다.
其次는 致曲이니 曲能有誠이니 誠則形하고 形則著하고 著則明하고 明則動하고 動則變하고 變則化니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그 버금가는 사람은 한 부분으로부터 미루어 다하여 나가는 것이다. 한 부분을 다하면 진실이 있게 되니, 진실하면 나타나게 되고 나타나면 또렷이 드러나고, 또렷하면 빛나게 되고, 빛나면 감동을 받게 되고, 감동 받으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저절로 바뀌는 것이니, 오직 천하에 지극히 진실한 자만이 능히 저절로 바뀌게 할 수 있다.
자사는 밝음으로부터 진실한 자의 일을 말하여 人道를 밝혀주었다. 지극히 진실한 자는 참으로 스스로의 본성을 다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얻게 되고 화육을 도울 수 있지만, 그 버금가는 사람으로서 진실함이 지극하지 못한 자는 반드시 선의 실마리가 나타나는 한 부분을 따라 미루어 다하여 그 극치에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致曲이다. 한 부분을 미루어 다하게 되면 덕이 진실하여 본성의 전체가 진실하게 된다. 진실이 마음 속 깊이 쌓여 있으면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밖으로 나타나면 날로 새롭고 달로 융성하여 더욱 밖으로 또렷하게 되고, 더욱 또렷하면 빛나는 광채가 넘쳐 밝음이 있다. 이는 자신의 성대한 진실이 이와 같은 것이다. 진실이 쌓여 빛나게 되면 사람마다 선을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감동을 받게 되고, 그들이 감동을 받으면 그들은 반드시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로운 변신을 하게 될 것이다. 변한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노라면 사람들은 선이라는 것마저 의식하지 못하고 저절로 탈바꿈 [化]하게 될 것이다. 이는 자신의 성대한 진실이 남에게 미쳐감이 이와 같은 것이다. 스스로의 탈바꿈으로 바뀌게 되는 일을 어찌 쉽사리 능히 할 수 있겠는가. 오직 천하에 지극한 진실로서 자신의 덕이 存神의 경지를 다하고 이로써 남에게 미쳐가는 효험이 能化에 이른 자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는 그 버금가는 사람 또한 이미 지극한 진실에 이르렀음이니, 어찌 천도, 인도의 구별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진실로 말미암아 나타나고, 또렷하고, 빛남을 얻는 것은 그 본성을 극진히 다함[盡性]이요, 감동되고 변하고 탈바꿈되는 것은 바로 사람과 만물의 본성을 다함이다. 그러나 천지의 화육을 돕고 천지와 더불어 三才로써 함께하는 일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는 밝음으로부터 진실한 자의 일이니, 人道이다.
其次는 通大賢以下 凡誠有未至者而言也라 致는 推致也오 曲은 一偏也라 形者는 積中而發外오 著則又加顯矣오 明則又有光輝發越之盛也라 動者는 誠能動物이오 變者는 物從而變이오 化는 則有不知其所以然者라 蓋人之性은 無不同而氣則有異라 故惟聖人이야 能擧其性之全體而盡之며 其次則必自其善端發見之偏而悉推致之하야 以各造其極也라 曲無不致則德無不實而形著動變之功이 自不能已오 積而至於能化면 則其至誠之妙 亦不異於聖人矣라
그 다음이란 大賢 이하의 인물로서 至誠에 이르지 못한 모든 자를 말한다. 致는 미루어 지극히 함이요, 曲은 한 부분이다. 形은 중심에 쌓여 밖으로 나타남이요, 著는 또한 形에 비해 더욱 또렷함이요, 明은 또한 著에 비해 성대하게 빛나고 넘침이다. 動은 나의 진실이 능히 저 사람을 감동시킴이요, 變은 저 사람이 나를 따라서 변하는 것이요, 化는 그렇게 되는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같지 않음이 없으나 기질이 다르기 때문에 오직 성인만이 능히 그 본성의 전체를 들어 다할 수 있으며, 성인에 버금가는 사람은 반드시 그 선한 실마리가 나타나는 한 부분으로부터 모두 미루어 지극히 다하여 각각 그 지극한 데에 나아가는 것이다. 한 부분을 지극히 다하면 덕이 진실하게 되어, 나타나고, 뚜렷하고, 감동받고, 변하는 공효가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이것이 축적되어 저절로 바뀌는 데에 이르면, 지극한 진실의 오묘한 조화가 또한 성인과 다를 바 없다.
"動이란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며, 變이란 그들의 잘못된 옛 습관을 고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흔적을 찾아볼 수 있지만, 化란 모든 자취가 사라져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107)
右는 第二十三章이니 言人道也라
위는 제23장이니, 人道를 말한다.
이 장에서는 진실하면 밝다[誠則明]는 뜻을 거듭 말한 것이다. 그러나 제21장에서는 전체적인 면으로 말한 데 반하여, 본 장에서는 재앙과 복에 관련된 사례만을 들어 말한 것이다. 첫 두 구절(至誠 前知)은 지극한 진실을 가진 자만이 앞서 미리 알 수 있는 이치가 있음을 말하고, 그 뒷글의 국가의 흥망, 일신의 동정은 앞서 미리 알 수 있는 원리가 나타난 곳을 가리킨 것으로, 이 두 가지를 통해서 반드시 앞서 알 수 있다. 지극히 진실한 사람의 몸에는 그처럼 밝은 슬기가 있기 때문에 귀신과 같다는 말로써 그를 찬양하고 있다. 前知 구절의 위에 道(至誠之道) 자를 쓴 것은 讖緯術數와 다른 점을 나타냄이며, 國家 이하 여섯 구절은 한 뜻으로 일관된 말이며, 재앙과 복이라는 구절은 전체의 뜻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상서의 징조 [禎祥]는 봉황이 찾아와 울고 기린이 나오는 유이며, 요사스러운 조짐[妖孽]은 하천이 메마르고 산이 무너지는 유이다. 蓍龜는 季子文成이 일찍이 忠貞한 인물로 대를 이어갈 것이라는 점괘를 얻었던 것과 晉侯 韓獲이 인재를 얻어 나라가 강성해지리라는 것을 미리 점치는 유와 같고, 四體란 子貢이 옥을 높이 잡는 邾子를 보고서 그가 반란
107) 위와 같음.
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언했던 말이 적중한 것과 劉子는 成子가 제사고기를 받을 때 너무 몸을 숙이는 것을 보고서 머지않아 病死할 것이라는 말이 적중된 예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의 중점은 이와 같은 징조와 조짐이란 행동거지의 일신상에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이다. 재앙과 복은 이미 닥친 일이요, 善·不善은 바야흐로 싹터 나오는 조짐이다. 이 때문에 재앙과 복이라 말하지 않고 善·不善이라 말한 것은 조짐의 움직임을 뜻하는 氣機上에서 말한 것이며, 그렇게 되는 원인은 인간이 어떻게 행하느냐에 근본하고 있다. 善·不善을 모두 반드시 먼저 안다는 것은 곧 前知를 말한다. 『주역』에서는 그 조짐을 아는 것이 신[知幾其神] (「繫辭 下」)이라고 말하니, 오직 귀신만이 능히 이 같은 조짐을 마련할 수 있고, 지극히 진실한 자만이 이 같은 기미를 밝게 알 수 있기에 귀신과 같다[如神]고 말한 것이다.
至誠之道는 可以前知니 國家將興에 必有禎祥하며 國家將亡에 必有妖孽하야 見(現)乎蓍龜하며 動乎四體라 禍福將至에 善을 必先知之하며 不善을 必先知之니 故로 至誠은 如神이니라
지극히 진실한 도는 일이 이르기에 앞서 미리 알 수 있다. 국가가 장차 흥성하려면 반드시 상서로운 조짐이 있으며,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반드시 요사스런 재앙이 있어 시초와 거북의 점에 나타나고, 그의 몸에 보이게 되므로 재앙과 복이 장차 이름에 좋은 일을 반드시 먼저 알며, 좋지 못한 일을 반드시 먼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극한 진실은 신과 같은 것이다.
자사는 진실로 말미암아 밝은 자의 일을 논하여 천도를 밝혀주었다. 사람이란 진실함이 지극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치를 밝게 알지 못하여 귀신과 더불어 통할 수 없는 것이다. 至誠無妄의 도는 精明하기에 애당초 智謀와 術數를 빌리지 않고서도 일이 이르기 이전에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음의 本體가 虛明하여 스스로 미래의 일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가 장차 흥성하려면 和氣致祥으로 반드시 상서의 조짐이 나타나고, 국가가 장차 망하려면 乖氣의 재앙과 이변이 이르러 반드시 요사스런 싹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에 그치지 않고 멀리 사물을 살펴보면 이 같은 변화들이 시초와 거북의 점을 통해서 길흉이 나타나고, 가까이 자기의 몸을 살펴보면 나의 행동과 언어 등을 통해서 잘잘못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유들은 재앙과 복이 장차 이르러 옴에 앞서 그 이치가 먼저 나타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한 점 티 없는 지극한 진실이 자신에게 있으면 복이 장차 이르기에 앞서 좋은 징조가 미리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잘잘못이 이미 결정된 다음에 아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귀신은 만물의 본체로서 어느 곳에나 있으므로 재앙과 복의 조짐을 나타내기에 나의 지극한 진실로써 재앙과 복의 이치를 알 수 있다. 은미한 것을 뚜렷이 비춰주는 것은 귀신이요, 뚜렷이 나타날 일을 은미한 데에서 미리 아는 것은 至誠이다. 이는 幽界와 明界를 하나로 통한 도이며,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이치이다. 그러므로 지극한 진실은 신명과 같다. 이는 진실로 말미암아 밝은 자의 일이니, 천도이다.
禎祥者는 福之兆오 妖孽者는 禍之萌이라 蓍는 所以筮오 龜는 所以卜이라 四體는 謂動作威儀之間이니 如執玉高卑와 其容俯仰之類라 凡此는 皆理之先見者也라 然唯誠之至極而無一毫私僞 留於心目之間者라야 乃能有以察其幾焉이라 神은 謂鬼神이라
禎祥은 복의 조짐이요, 妖孽은 재앙의 싹이다. 蓍는 <시초라는 풀로써 『주역』의> 점을 치는 것이요, 龜는 <거북의 등을 불로 지져> 점을 치는 것이다. 四體는 동작과 威儀의 사이에 나타나는 모습을 말하니, 예를 들면 옥을 들 때 너무 높게 잡거나 낮게 잡는 것, 그리고 그 몸가짐을 지나치게 구부린다거나 높이 우러러보는 따위이다. 대체로 이러한 것은 <모든 일이 이르기에 앞서> 이치가 먼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지극한 진실로서 마음과 눈 사이에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사사로움과 거짓이 없는 자만이 보이지 않는 그 기미를 살필 수 있다. 神은 귀신이다.
右는 第二十四章이니 言天道也니라
위는 제24장이니, 천도를 말한다.
이 장에서는 다만 스스로 이루어진다[自成]는 데에 중점을 두었으며, 成物은 곧 自成의 내에 존재한다. 첫 절에서는 진실은 사람에게 간절한 것임을 말하였고, 다음 절에서는 마땅히 진실해야 하는 이유를 거듭 말하였고, 끝 절에서는 진실이 이루어진 뒤에 얻어지는 오묘한 공효를 미루어 말하고 있다.
이 두 구절은 대등한 관계로서 그 뜻이 일관되어 있다. 진실은 천지, 사람, 만물 모두가 갖추고 있지만 오로지 인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완성은 모두 진실에 달려 있다. 而道自道의 두 곳의 道 자는 독음과 뜻이 같지 않다. 而道의 道는 인간에게 존재한 진실된 이치[實理], 그 실체를 말하고, 自道의 道는 인간의 진실된 마음으로써 스스로 이를 행하여 나가는 수행상의 도를 말한다. 본 장의 세 절은 모두 誠을 제기하여, 진실로 인하여 도에 미쳐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직 첫 절에 그 뜻이 모두 나타나 있고, 아래 두 절은 모두 스스로 이룬다[自成]는 뜻으로 말하였지만 스스로 가야 할 길이라는 自道의 뜻이 그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誠者는 自成也오 而道는 自道也니라
진실은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요, 도는 스스로 가야 할 길이다.
자사는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하게 하는 공부를 논하여 인도를 밝혀 주었다. 진실은 하늘이 명하여 내려준 본성이니, 만물이 이에 의하여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지 남에게 의뢰한 것이 아니요, 도는 본성대로 따르는 이치이니,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기에 남에게 빌려줄 수 없다.
言誠者는 物之所以自成이오 而道者는 人之所當自行也라 誠은 以心言이니 本也오 道는 以理言이니 用也라
誠은 만물이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요, 道는 사람이 마땅히 스스로 행해야 할 바를 말한다. 誠은 마음으로써 말하니 근본이요, 道는 이치로써 말하니 用이다.
『장구』를 살펴보면, 誠은 두 측면에서 말하고 있는 바, 廣義로는 人·物에 공존하는 절대 보편의 이치와 狹義로는 개인 心性內의 實理를 말하고 있다.
따라서 道 또한 광의로서는 만물 가운데 하나로서의 인간의 보편적 所當行, 즉 인간으로서의 절대행위와 협의로서는 개인적 心性의 본체에 존재하는 하나하나의 조리, 즉 행위상에 나타나는 사물의 조리 정연한 이치를 말한다. 그러나 이를 종합해서 말하면, 인간의 절대보편의 진리는 곧 心性內의 實理로서 인간의 强作과 按排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의 섭리이기에 '誠者自成'이라 하고, 인간의 보편적 所當行은 곧 개인의 행위상에 존재하는 이치로서 그 스스로가 행하였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기에 '而道 自道' 라고 말한 것이다.
만물의 끝이요 시작이라는 구절은 體物而不可遺라는 뜻과 같은 것으로, 終始를 들어서 모든 것을 그 가운데에 포함시키고 있다. 無物은 예컨대 진실한 마음이 없으면 설령 효도를 행하였을지라도 효도라 말할 수 없고, 공경을 다했을지라도 공경이라 말할 수 없고, 보아도 참으로 본 것이 아니요, 들어도 참으로 들음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같이 스스로 이루어야 하는 自成의 공부를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군자는 나에게 고유한 하나의 진실을 생각하여 진실로써 시종일관하며, 나의 모든 행위가 바로 物이다. 이 모두가 진실 여부로써 物의 유무를 삼음이니, 이는 위 글에 이어서 보아야 할 것이다. 君子誠之爲貴의 誠之는 진실한 마음으로써 진실한 이치를 행한다는 뜻으로, 之 자에 의미를 두고서 쓴 글자이다.
誠者는 物之終始니 不誠이면 無物이니 是故로 君子는 誠之爲貴니라
진실은 만물의 끝이요 시작이니, 진실하지 않으면 만물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진실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힘써야 할 바는 무엇일까? 진실은 천리의 본연이다. 모든 사물에는 처음과 끝이 있는데, 끝이란 스스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實理의 歸結이며, 처음은 스스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實理의 發端이다. 이렇듯 진실은 만물의 처음과 끝이 되므로 만물은 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로 보면 사람이 일을 행함에 있어서 마음이 진실하지 못하면 설령 그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그 일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군자는 반드시 선을 가려서 굳게 잡아 진실하지 못한 마음을 없애 진실의 전체를 온전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이란 참으로 고귀한 것이다.
天下之物은 皆實理之所爲라 故必得是理然後에 有是物이오 所得之理旣盡이면 則是物亦盡而無有矣라 故人之心에 一有不實이면 則雖有所爲라도 亦如無有며 而君子必以誠爲貴也라 蓋人之心에 能無不實이라야 乃爲有以自成이오 而道之在我者도 亦無不行矣니라
천하의 만물은 모두 진실한 이치[實理]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 이치를 얻은 뒤에야 이 사물이 있게 되고, 얻은 바의 이치가 이미 다하여 없어지면 이 사물 또한 다하여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에 만에 하나라도 진실하지 못함이 있으면 비록 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없는 것과 같기에 군자는 반드시 진실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진실하지 못한 것이 없어야만 스스로 이룰 수 있고, 나에게 있는 道 또한 행해지지 않음이 없다.
이치는 만물의 주재이기에 "이 이치가 있으면 사물이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實理에 의함이니, 이치가 없고서는 物이 있을 수 없다. 본문의 대의는 진실한 이치란 만물의 始終이니, 이치가 없으면 物이 없기 때문에 군자는 반드시 이 이치를 진실하게 가져야 한다."108)
이는 自成의 뜻을 자신의 일만으로 생각할까를 우려한 나머지 이 뜻을 미루어서 말한 것으로, 첫 두 구절(誠者 成物也)을 깊이 음미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뒷글이 하나의 뜻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모두가 이 두 구절에 근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故時措의 故 자는 위의 뜻을 거꾸로 뒤집어서 해석한 문체[倒釋法]이다. 스스로를 이루면 자연히 남에게 미쳐가기 마련이지만, 남에게 미쳐가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완성에 미진함이 있기 때문이다. 克己復禮는 仁이요, 사물을 두루 아는 것은 지혜[知]라 한다. 이와 같이 仁과 지혜는 모두 본성의 덕에 귀결되는 것이다. 나의 몸과 만물, 이는 안팎[內外 : 主客], 또는 彼我의 분별이 있지만 仁과 지혜는 애당초 안팎의 차이가 없으며, 內外之道의 道는 理 자의 뜻으로 보아야 한다. 『장구』에서 이를 이미 자신에 얻은 것으로 말한 것은 誠 자를 따라 말한 것이며, 時措之宜의 時 자는 君子而時中(제2장 제1절)·而時出之(제31장 제2절)의 時를 말한 것으로, 모두 成物에 중점을 두고 있다.
誠者는 非自成己而已也라 所以成物也니 成己는 仁也오 成物은 知也니 性之德也라 合內外之道也니 故로 時措之宜也니라
진실은 스스로 자기만을 이룰 뿐 아니라, 남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자신을 이룸은 仁이요, 남을 이루어줌은 지혜이니, 본성의 덕이다. 안으로는 자신, 밖으로는 타인을 합한 도이니, 그러므로 시의적절 조처하는 것이다.
108) 위와 같음.
군자는 진실을 귀중히 여기지만, 진실은 스스로 자기만을 이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나에게 있는 그것이 진실하여 거짓이 없으면 그 이치는 자연히 남에게 미쳐가기 마련이니, 이는 남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이룸이 곧 남을 이루어주는 바이다. 그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스스로 자기를 이룸은 조금도 사사로운 마음이 뒤섞여 있지 아니하여 전체가 渾然하므로 이른바 仁이다. 남을 이룸은 남에 따라서 재단하되 각기 그에 맞는 적절함을 얻음이니, 이른바 지혜이다. 그러므로 仁은 成己에, 지혜는 成物에 속한다. 이는 안팎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본성의 고유한 덕에 體用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조금도 차별이 없다. 이는 안팎이 합해진 하나의 도이다. 군자는 각별히 자신의 마음에 진실하지 못함이 있을까를 염려하므로, 자신의 마음이 이미 진실하면 仁과 지혜를 모두 얻을 수 있다. 이 때문에 자신의 완성은 곧 타인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이는 때에 맞추어 적절하게 대처하여 제각기 그에 따른 마땅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仁과 지혜는 하나의 도이기에 얻으면 함께 다 얻고, 남과 나는 다 같은 본성의 이치를 가지고 있기에 자신을 완성하면 타인 또한 완성하게 된다. 이렇듯 진실은 스스로 자기를 이루는 데에 그치지 않고 남들까지 이룸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자의 일이니, 人道이다.
誠은 雖所以成己나 然旣有以自成이면 則自然及物而道亦行於彼矣라 仁者는 體之存이오 知者는 用之發이니 是皆吾性之固有而無內外之殊라 旣得於己則見(現)於事者 以時措之而皆得其宜也라
진실은 비록 자기를 이루는 것이지만, 이미 스스로를 이루면 자연히 남에게 미치게 되어, 또한 저들에게까지 도가 행해지게 될 것이다. 仁은 본체가 존재함이요, 지혜는 쓰임[用]이 나오는 것이니, 이는 모두 나의 본성에 고유한 것으로서, 안과 밖의 차이가 없다. 이미 나의 몸에 얻은 바 있으면 일에 나타나는 바, 때에 따라 조처함에 모두 그 적절한 바를 얻을 수 있다.
"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는 제22장의 "오직 천하의 至誠이야
能히 자기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고, ……能히 사람의 본성을 극진히 다한다[唯天下至誠, 爲能盡己之性, ……能盡人之性]"라는 뜻을 귀결짓고 있다. "成己, 仁也. 成物, 知也"는 三達德에 관련지어 "合內外之道"를 導出해 낸 것이다. 仁은 자신의 忠恕로써 타인에 미쳐가는 成己이며, 知는 사물에 대처하는 데 착오가 없는 成物에 해당된다.
右는 第二十五章이니 言人道也니라
위는 제25장이니, 인도를 말한다.
이 장은 至誠無息 1구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앞의 여섯 절에서는 至誠無息의 공효와 그 기능이 천지와 같을 수 있음은 자연에서 나왔기 때문임을 논급하였고, 가운데 세 절(제7~9절)에서는 위와는 반대로 천지의 至誠無息의 공효와 그 기능으로써 성인의 至誠無息의 공효와 그 기능을 밝혀주었으며, 끝 절에서는 『시경』을 인용하여 천지와 성인이 똑같은 至誠無息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런 점에서 至誠은 본 장의 주제라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맨 첫머리 故 자는 위 네 장(제21~24장)에서 말한 仁과 지혜를 연이어서 모두 이를 종합하여 天道의 大用을 말한 것이고, 無息은 마음에 운용하는 진실을 말한 것이다.
故로 至誠은 無息이니 그러므로 지극한 진실은 쉼이 없으니,
자사는 진실로 말미암아 밝은 자의 일을 논하여 천도를 밝혀주었다. 진실이 지극하지 못하면 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지극히 진실한 성대한 덕은 그 마음에 진실한 이치가 순전하여 사욕이 있지 않기에 그침이 없는 것이다.
旣無虛假에 自無間斷이라
이미 허위와 가식이 없기에 자연히 間斷이 없다.
본 장에서는 至誠이란 천지의 도와 완전히 일치됨을 말하여 誠의 極點과 理想을 밝혀주고 있다. 앞 장(제25장)에서는 誠의 人道를 말하였는데, 본 장에서는 '至誠……'을 들어 지극함을 나타내줌으로써 誠이 極點으로 발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故 至誠無息"의 '故' 자는 앞 장의 誠이란 物의 終始가 된다는 것과 內外의 道를 합한 것이라는 구절을 주로 말하였다.
久는 不息의 축적이다. 장구히 오래함[久] 위의 문장은 天德에 속하고, 징험이 나타난다는 이하의 문장은 王道에 속한다.
不息則久하고 久則徵하고 쉼이 없으면 오래하고, 오래되면 징험이 나타나고,
쉼이 없으면 마음의 천리가 순전하여 시종 한결같으므로, 영구히 변하지 않는다. 참으로 이와 같이 오래오래 쌓아 가면 마음에 진실한 이치가 충만하여 바깥의 사업으로 자연 나타나 보이는 징험이 있게 된다.
久는 常於中也오 徵은 驗於外也라
久는 중심에 변함없이 떳떳함이요, 徵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徵 자는 뒷글과 관련지어 일으켜주고 있다. 悠遠, 博厚, 高明은 단 功業의 기상으로써 구분 없이 전체를 말한 것일 뿐, 아래의 物 자까지 관련지어 보아서는 안 된다. 세 곳의 則 자는 거듭거듭 한 단계씩 번갈아가면서 말하였지만, 이는 모두 동시에 이르러 오는 것이며, 모든 구절에 誠 자로 일관되어 있다. 博厚는 축적의 의미로 쓰였기에 『장구』에서는 積 자를, 그리고 高明은 宣暢의 의미가 있기에 發이라는 주석을 붙인 것이다.
徵則悠遠하고 悠遠則博厚하고 博厚則高明이니라
징험이 나타나면 아득히 멀리 가고, 아득히 멀리 가면 드넓고 두터워지며, 드넓고 두터우면 높고 밝게 된다.
지극한 진실의 징험을 어찌 하나의 일로써 모두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축적된 진실이 장구함으로 말미암아 바깥일까지도 오래되면 반드시 아득하게 펼쳐지고 끊임없이 멀리 뻗어나가게 된다. 아득하게 저 멀리 펼쳐지고 뻗어나가면 우주에 가득히 쌓여 드넓고 사람의 마음을 축축하게 적셔주어 두텁게 될 것이다. 드넓고 두터우면 거기에서 발산되는 바 그지없이 드높아서 그 어느 것으로도 함께할 수 없을 만큼 高大하고 찬란하여 가려진 바 없는 광명이 있을 것이다. 이는 바깥에서 징험할 수 있는 사업이 바로 이와 같다.
此는 皆以其驗於外者로 言之이니 鄭氏所謂至誠之德이 著於四方者 是也라 存諸中者 旣久則驗於外者 益悠遠而無窮矣라 悠遠이라 故其積也 廣博而深厚오 博厚라 故其發也 高大而光明이니라
이는 모두 밖에서 징험할 수 있는 것으로 말함이니, 鄭氏(鄭玄)의 "지극히 진실한 덕이 사방으로 나타난다"라는 말은 이를 말한다. 중심에 있는 바 이미 오래되면 밖으로 나타나는 징험이 더욱 아득히 멀어 끝이 없을 것이다. 아득히 멀어 끝이 없음으로써 쌓인 바 넓고 두터우며, 넓고 두터움으로써 나타나는 바 高大하고 光明하게 된다.
이는 지극히 진실이 만물에 미쳐가는 用을 말함이니, 제22장 "贊天地之化育"의 뜻과 같다. 위 제3절에서는 功業을 말하였지만 원래 만물이란 그 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특별히 만물을 덮어줌과 실어줌을 지적하여, 거듭 이를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天地 두 자는 뒷글에 있어서 그저 원만하고 모나지 않게 보아야 한다. 유구의 悠는 外를, 久는 內를 주로 하여 말하기에 『장구』에서 兼內外라 말한 것이다.
博厚는 所以載物也오 高明은 所以覆物也오 悠久는 所以成物也니라
드넓고 두터움은 만물을 실어주는 바이며, 높고 밝음은 만물을 덮어주는 바이며, 유구함은 만물을 이뤄주는 바이다.
지극한 진실의 功業이란 축적한 바 이미 넓고 두터우면 천하의 만물을 모두 받아들임으로써 모든 것이 그 혜택을 입게 되니, 이것이 바로 만물을 실어줌이다. 발산되는 바 높고 밝으면 천하의 만물을 빠뜨림 없이 덮어주고 미뤄주지 않는 바 없음으로써 모두가 그 빛을 우러러보게 되니, 이것이 바로 만물을 덮어줌이다. 넓고 두터움, 높고 밝음이 다시금 모두 장구하여 오래되면 천하의 만물을 항상 덮어주고 실어줌으로써 제각기 삶을 이루고 제각기 본성을 회복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만물을 이뤄줌이다. 이는 바로 천지의 작용이 아니겠는가.
悠久는 卽悠遠이니 兼內外而言之也라 本以悠遠으로 致高厚而高厚 又悠久也니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用이라
悠久는 곧 아득히 멂[悠遠]인데, 이는 안과 밖을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본디 아득히 먼 것으로써 高明과 博厚를 이루었지만, 고명과 박후가 또다시 유구함이니,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쓰임[用]이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이는 至誠及物의 본체[體]를 말함이니, 제22장 "可以與天地參"의 뜻과 같다. 配 자는 둘이 하나로 합하여 도움이 됨을 말한다. 끝 구절에서 配자를 말하지 않고 無疆으로 말한 것은 省文法이다. 用이란 사물에 미치는 것으로 말하며, 본체란 그 베풂이 나로부터 한다는 점을 말하니, 이 모두가 行事의 功業上으로 말한 것이다.
博厚는 配地하고 高明은 配天하고 悠久는 無疆이니라
넓고 두터움은 땅을 짝하고, 높고 밝음은 하늘을 짝하고, 길이 오램은 끝이 없는 것이다.
땅이 모든 만물을 실어줄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넓고 두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진실한 사람 또한 만물을 실어주니, 지극히 진실한 자의 넓고 두터움은 땅의 두터움을 짝하며, 하늘이 모든 만물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높고 밝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진실한 사람 또한 만물을 덮어주니, 지극히 진실한 자의 높고 밝음은 하늘의 높고 밝음을 짝하며, 천지가 만물을 이뤄줄 수 있었던 것은 끝없는 세월 때문이다. 지극히 진실한 사람 또한 만물은 이뤄주니, 지극히 진실한 자의 길이 오램은 천지의 끝없음과 같다. 이것이 천지의 본체가 아니겠는가.
此는 言聖人이 與天地同體라
이는 성인이 천지와 더불어 동일한 본체가 같음을 말한다.
이는 하늘과 땅에 짝이 되는 것은 자연에 의한 것임을 찬탄하고 있다. 그러므로 다만 不見, 不動, 無爲의 측면에 중점을 둔 것이다. 章, 變, 成이란 위 장의 載物, 覆物, 成物을 말하니, 땅이란 자취가 있기에 章 자를 쓰고, 하늘이란 형체가 없기에 變 자를 쓴 것이다. 不見, 不動은 無爲를 말하며, 아래의 구절은 모두 위의 두 구절을 이어서 말한 것이다.
如此者는 不見(現)而章하며 不動而變하며 無爲而成이니라
이와 같은 자는 내보이지 않아도 나타나고, 움직이지 않아도 변하며, 작위가 없어도 이뤄지는 것이다.
지극한 진실[至誠]의 體用이 이처럼 천지의 無疆함과 짝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强作에 의함이겠는가. 내, 드넓고 두터운 일이 천하에 나타나는 바 매우 성대하게 빛남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빛남은 精明한 진실이 스스로 밝은 것이지, 내보인 이후에 빛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높고 밝은 일이 천하를 새롭게 한 것은 참으로 큰 변화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지극한 진실에 의해 감응된 것이지, 움직인 뒤에 변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길이 오래됨의 일은 천하에 이로움을 이루어준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이루어짐이란 지극한 진실에 의한 것으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이는 作爲가 있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참으로 지극한 진실이란 천지와 같은 것이다.
見은 猶示也라 不見而章은 以配地而言也며 不動而變은 以配天而言也며 無爲而成은 以無疆而言也라
見(현)은 보이는 것과 같다. 내보이지 않아도 나타난다는 것은 땅을 짝함 [配地]으로써 말한 것이며, 움직이지 않아도 변한다는 것은 하늘을 짝함 [配天]으로써 말한 것이며, 함이 없이 이뤄진다는 것은 끝이 없는 것[無疆] 으로 말한 것이다.
본 절의 세 곳의 而(不見'而'章, 不動'而'變, 無爲'而'成) 자는 接續助詞로서
상하 문장의 의미가 상반되는 조건을 나타내주는 逆接助詞로 쓰여 있다. 예를 들면 "道는 항상 作爲가 없되 작위하지 않음도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109)라는 而 자와 같은 용례로서 道家에서 흔히 사용되어 오는 역설적 표현이다. 본 절은 作爲를 초월한 자연의 상태 및 행위의 理想型을 말해주고 있다.
이와 아래의 세 절(제7~9절)은 하늘과 땅을 들어 지극한 진실을 밝히고 있다. 이는 본 장 제1절 至誠無息 구절과 상대를 이루고 있으며, 爲物不貳의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一을 말하니, 이른바 人性의 본체요 도의 본원이다. 만물을 생성함에 헤아릴 수 없다는 것도 一에서 벗어날 수 없다. 『通書』의 誠의 通復이란 사람들이 이 곳을 가벼이 보아 넘기기 때문에 周濂溪가 이를 자세히 말한 것이다.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也니 其爲物이 不貳라 則其生物이 不測이니라
하늘과 땅의 도는 한마디의 말로써 다할 수 있다. 그것 됨됨은 둘이 아니다. 그것이 만물을 생성하매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109) 『老子』 제37장.
지극한 진실의 일이란 이처럼 천지와 같다. 그렇다면 천지가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천지는 비록 크다 하지만 그 도는 한마디 말로써 모두 표현할 수 있다. 그 한마디는 무엇일까? 바로 진실[誠]이다. 하늘의 도를 세우니 陰陽이요, 땅의 도를 세우니 剛柔이다. 그러나 진실한 이치[實理]의 유행상에는 한 터럭 끝만큼의 작은 사욕의 間斷마저도 없다. 그러므로 그것은 둘이 아닌 그 진실[誠]이다. 진실하기에 쉼이 없는 것이다. 이에 수많은 만물 생성의 所以然을 알 수 없는데, 이를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를 살펴보면 성인의 至誠無息이란 길이 오래되매 반드시 징험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此以下는 復以天地로 明至誠無息之功用이라 天地之道는 可一言而盡이라 不過曰誠而已라 不貳는 所以誠也라 誠이라 故不息而生物之多 有莫知其所以然者니라
이 아래의 문장은 다시 천지로써 지극한 진실이란 쉼이 없다는 功用을 밝힌 것이다. 천지의 도는 한 마디 말로 다할 수 있다. 그것은 진실이라는 말에 불과할 뿐이다. 不貳는 진실할 수 있는 원인이다. 진실하므로 그침이 없고 많은 생물에 그처럼 되는 까닭을 알 수 없다.
"其爲物不貳"은 위 문장의 "한마디의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있다"의 주된 내용이다. '爲物'은 그 성질과 특색을 밝혀주는 데 사용되는 표현법이며, '不貳'는 存在, 作用, 展開上에 唯一性을 밝히는 否定形의 표현이다. 이는 천지의 도란 絶對唯一의 근원으로 이 이외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영원히 一定不變의 운동이 전개되는 것을 말한다. 唯一의 본질은 "誠이란 하늘의 도이다[誠者天之道]"라는 말과 상통하는 誠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는 인간의 誠에 의한 작용과 전개를 말한다. 『老子』 (제39장)에서는 "하늘은 一을 얻어 淸하고, 땅은 一을 얻어 寧하고, 神은 一을 얻어 靈하고, 골짜기는 一을 얻어 盈하고, 만물은 一을 얻어 生하며, 侯王은 一을 얻어 천하가 貞한다" 하고, 『呂氏春秋』(「論人篇」)에서는 "모든 萬形(만물)은 一을 얻은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知를 一로 알면 物에 응하여 변화함에 드넓고 깊어서 헤아릴 수 없기에 덕행이 빛나 일월에 견줄 수 있다"라고 한다. 『중용』 또한 이와 같이 唯一의 근원인 誠을 작용 전개의 문제로 대두시켜 말하고 있다.
이는 제3 徵則悠遠節과 상대를 이루고 있다. 제7절의 "만물을 생성함이 둘이 아니다"라는 데 대한 예증이니, 이른바 性의 發用이요 도의 성립이다. 천지의 화육을 돕는다는 것은 바로 지극한 진실로써 돕는 것이며, 또한 하늘과 땅은 지극한 진실에서 더할 수 없음을 나타낸 말이기도 하다. 6구절(博也……久也)은 아래 문장의 첫머리를 열어주는 말이며, 也 자는 바야흐로 환기시켜주려는 뜻을 담고 있다.
天地之道는 博也, 厚也, 高也, 明也, 悠也, 久也니라
하늘과 땅의 도는 넓고, 두텁고, 높고, 밝고, 멀고, 장구하다.
하늘과 땅의 도는 진실하고 하나[誠一]로서 둘이 아니므로 각기 그 성대함을 다할 수 있다. 땅의 도는 오직 진실하므로 그 넓음을 다하고 또한 그 두터움을 다하며, 하늘의 도는 오직 진실하므로 그 높음을 다하고 또한 그 밝음을 다하는 것이다. 하늘의 높고 밝음과 땅의 넓고 두터움을 합하여 말하면 또한 길이길이 그리고 오래됨을 다하여 끝이 없다. 이를 살펴보면 성인의 길이 오래됨과 넓고 두터움, 높고 밝음이 모두 진실에 근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言天地之道는 誠一不貳이라 故能各極其盛하야 而有下文生物之功이라
천지의 도는 진실하고 하나로서 둘이 아니므로 각각 그 성대함을 다하여, 아래에서 말한 바와 같이 만물을 발생하는 공효가 있다.
이는 제4 博厚載物節과 상대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의 4단락은 천지의 만물 생성은 헤아릴 수 없다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말한 것이다. 산과 물이란 천지에 의해 발생된 것이지만 그 또한 만물의 생성이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천지의 만물 생성이란 더욱 헤아릴 수 없다는 점을 나타내 주고 있다. 구절마다 誠이란 둘이 아니며 거짓이 없음으로써 그 功用이 성대하게 극치를 다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하늘의 무궁함과 땅의 廣厚함을 말하기에 앞서 昭昭 撮土를 쓴 것은 바로 문장을 구사함에 있어서 抑揚과 起伏의 문맥을 따른 것이다. 산과 물 또한 그러하다. 하늘은 氣가 축적된 것이므로 日月星辰 등 氣의 물체를 연결지어 말하고, 땅이란 형체가 쌓인 것이기에 華嶽, 河海 등 형태가 있는 물체로 연결지어 말한 것이다. '日月……' 한 구절은 위의 無窮을 보완하여 말한 것이며, '華嶽……' 이하 2구절은 위의 廣厚를 보완하여 말한 것이며, 만물을 덮어 주고 실어준다는 구절에 이르러서야 바야흐로 만물의 생성을 말하고 있다. 생명력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은 풀이요, 생명력이 긴 것은 나무요, 나는 동물은 禽이요, 달리는 짐승은 獸이다. 寶藏이란 산에 저장되어 있는 만물을 말하며, 興이란 산에서 이를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물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물이란 드넓고 끝이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지, 生物不測을 말함은 아니다. 큰 자라와 악어는 介蟲이며, 이무기와 용은 鱗蟲이며, 물고기 또한 鱗族에 속하며, 작은 자라 또한 介屬이다. 貨財는 물에서 생산된 물건으로서, 사람들의 용도에 도움을 주는 것들은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
今夫天이 斯昭昭之多니 及其無窮也하야는 日月星辰이 繫焉하며 萬物이 覆焉이니라 今夫地 一撮土之多니 及其廣厚하야는 載華嶽而不重하며 振河海而不洩하며 萬物이 載焉이니라 今夫山이 一卷石之多니 及其廣大하야는 草木이 生之하며 禽獸 居之하며 寶藏이 興焉이니라 今夫水 一勺之多니 及其不測하야는 黿鼉蛟龍魚鼈이 生焉하며 貨財 殖焉이니라
오늘날 저 하늘은 반짝반짝하는 것들이 많이 모인 것이니 그 무궁함에 이르러서는 해와 달과 별들이 달려 있고 만물이 뒤덮고 있다. 오늘날 저 땅은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이니, 그 넓고 두터움에 이르러서는 높은 화악(華嶽)을 싣고서도 무거워하지 않고, 바다를 거두어들이고서도 <물 한 방울 새지 않고> 만물이 실려 있다. 오늘날 저 산은 한 주먹 크기의 돌들이 많이 모인 것이니, 그 넓고 큰 데에 미쳐서는 초목이 生長하고 금수가 살고 보화가 나온다. 오늘날 저 물이란 한 잔의 물이 많이 모인 것이지만 헤아리지 못함에 이르러서는 큰 자라와 악어와 이무기와 용과 물고기와 작은 자라가 살며 재물이 번식하게 된다.
시험 삼아 만물을 생성해주는 하늘과 땅의 도로써 말하여보자.
오늘날 저 하늘의 한 부분을 가리켜 말하면 그처럼 반짝반짝하는 것이 많이 모인 것일 뿐이니, 만물을 덮어주기도 하고 덮어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궁함에 미쳐서는 太陽의 정기인 해, 太陰의 정기인 달, 五行星 (금·목·수·화·토성 : 經星)과 28宿(緯星), 해와 달이 한 달에 한 차례 모이는 12次舍인 辰이 모두 그 위에서 선회한다. 하늘의 무궁함이 이와 같기에 갖가지 만물들이 그 아래에 덮이게 된다. 이로 볼 때 하늘의 만물 생성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오늘날 저 땅의 그 한 부분을 가리켜 말하면 한 줌의 흙이 많이 모인 것일 뿐이니, 만물을 실어주기도 하고 실어주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나그 넓고 두터움에 미쳐서는 서쪽 華山 줄기에서 가장 큰 華嶽을 싣고서도 무겁다 하지 아니하고, 드넓은 강물과 바다를 거두어들이고서도 물 한 방울 새어나가지 않으니, 땅의 넓고 두터움이란 이와 같기에 갖가지 만물들이 모두 그 안에 실려 있다. 이로 볼 때 땅의 만물생성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늘과 땅의 사이에서 산과 물보다도 더 큰 것은 없다. 오늘날 저 산의 한 부분을 가리켜 말하면 하나의 자그마한 돌들이 많은 것이지만, 광대함에 미쳐서는 식물인 초목이 생장하고 동물인 금수가 살며, 세간의 보배로서 服飾과 器用에 사용되는 것들이 모두 여기에서 나오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산의 헤아릴 수 없는 만물 생성이다. 이를 살펴보면 그 모든 것들이 헤아릴 수 없는 천지의 만물 생성이다. 오늘날 저 물의 한 부분을 가리켜 말하면 한 잔의 물이 많이 모인 것이다. 그러나 헤아릴 수 없는 데 미쳐서는 큰 자라, 악어, 이무기, 용, 물고기, 작은 자라 등이 모두 그 속에 모여 살고 있으며, 유용한 물건으로서 재화가 될 만한 것들이 모두 번식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물의 헤아릴 수 없는 만물 생성이다. 이를 살펴보면 그 모든 것이 헤아릴 수 없는 천지의 만물 생성이 아니겠는가. 이로써 성인의 일이 천지와 같음을 알 수 있다.
昭昭는 猶耿耿이니 小明也라 此는 指其一處而言之며 及其無窮은 猶十二章及其至也之意이니 蓋擧全體而言也라 振은 收也오 卷은 區也니 此四條는 皆以發明由其不貳不息하야 以致盛大而能生物之意라 然天地山川은 實非由積累而後大이니 讀者는 不以辭害意 可也라
昭昭는 耿耿과 같으니, 반짝반짝한 것이다. 이는 그 중의 한 곳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그 "무궁함에 미쳐서는……"이라는 말은 제12장의 "그 지극함에 미쳐서는……"이라는 뜻과 같으니,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振은 거두어들임이요, 卷은 구역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둘로 하지 않고 쉼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성대함에 이르러 능히 만물을 발생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하천이란 실제로는 하나하나 쌓여서 점차 커진 것은 아니다. 이를 읽는 자는 문장으로써 저자의 본의를 해쳐서는 안 된다.
위의 四條는 주로 비유를 들어 例證한 것으로서 다분히 修辭의 기교를 엿볼 수 있으나 이론의 부정확성 또한 없지 않기에 "讀者 不以辭害意"의 지적이 있기도 하다. 물론 "대통 구멍으로 보이는 하늘 또한 하늘이요, 그처럼 크게 보이는 하늘 또한 하늘이다. 하늘에 있어 반짝반짝한다는 것은 한 부분을 가리켜 말한 것이며 '그 무궁함에 미쳐서는 ……'이라는 것은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이다. 천지와 산천이 모두 작은 것이 축적된 이후에 이루어졌겠는가. 전체를 들어 말하면 그 공효와 기상이 스스로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110)
위에서는 천지와 성인의 功用을 말하였는데, 여기에서는 두 차례 『시경』 을 인용하여 또다시 본원으로 귀결짓고 있다. 그것은 성인과 천지의 공용은 모두 하나의 誠에 근원하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살펴보건대 이 시는 문왕에게 제사를 올릴 때 쓰이던 시구다. 문왕은 主요, 하늘은 客이다. 命과 德이란 모두 본체로 말한 것이며, 깊은 뜻은 所以爲天과 所以爲文이라는 '所以' 두 글자에 있다. 여기에서는 다만 天이라고 말하였지만 땅을 포괄한 것이며, 하나의 문왕을 빌어 여러 성인들을 증명하고 있다. 純亦不已라는 끝 구절을 살펴보면 이는 모두 성인에 중점을 두고서 至誠無息에 귀결짓고 있다. 豈不顯 구절은 덕으로 들어가는 순수함을 말하니, 이는 문왕의 덕이 사방에 빛이 되어 西土에 나타나게 되었다는 『시경』의 본 뜻과는 다르다. 文이라 함은 문왕의 마음상의 經緯로 말한 것이며, 純亦不已란 둘로 하지 않고 섞임이 없는 것이니, 이는 바로 無始無終의 의의이다. 亦 자는 天 자를 이어서 쓰고 있으나, 不已는 실제로 순수한 그 가운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는 純 자에 중점을 두고 말하고 있지만 不已의 뜻이 스스로 나타나 보이니, 이는 두 계층이 아니다.
詩云維天之命이 於(오)穆不已라 하니 蓋曰天之所以爲天也오 於乎不顯가 文王之德之純이여 하니 蓋曰文王之所以爲文也니 純亦不已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명이란 아! 그윽하고 심오하여 그침이 없다" 하니 이는 하늘이 하늘다운 바이며, "아! 나타나지 않으랴. 문왕의 덕의 순수함이여!" 하니, 이는 문왕이 문왕다운 바를 말하니 순수하고 또한 그침이 없다.
110) 『大全』 朱子.
이로써 지극한 진실이란 천지와 부합됨을 알 수 있다. 『시경』에 이르기를, "하늘의 一元의 命, 氣化를 주재하는 그것은 그윽이 深遠하여 만고에 쉼이 없다"라고 한다. 『시경』에서 말한 "그침이 없다"라는 이것 때문에 하늘이 하늘다운 것이다. 또한 "아! 어찌 나타나지 않으랴. 섞임이 없는 문왕의 순일(純一)한 덕이여" 하니, 『시경』에서 말한 순일한 덕이 바로 문왕이 문왕다운 것이다. 요컨대 천명이란 참으로 그침이 없으며 문왕의 순일한 덕 또한 쉼이 없다. 순일[純]함이란 지극한 진실[至誠]이며, 그침이 없음[不已]은 곧 쉼이 없는[無息] 것이다. 천지의 至誠은 성인의 至誠無息과 동일함이 이와 같으므로 그와 똑같은 성대한 功用이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진실로 말미암아 밝은 자의 일이니, 天道이다.
詩는 周頌維天之命篇이라 於는 歎辭오 穆은 深遠也오 不顯은 猶言豈不顯也라 純은 純一不雜也라 引此하야 以明至誠無息之意라 程子 曰天道는 不已며 文王이 純於天道하야 亦不已니 純則無二無雜이며 不已則無間斷先後라
詩는 「周頌 維天之命」편이다. 於는 감탄사이며, 穆은 깊고 멀다는 것이며, 不顯은 "어찌 나타나지 않으랴"라는 말과 같다. 純은 純一하여 뒤섞임이 없는 것이다. 이를 인용하여 지극한 진실은 쉼이 없다는 뜻을 밝혔다. 程子가 말하였다. "하늘의 도는 그치지 않으며, 문왕이 하늘의 도에 순일하여 또한 그치지 않으니, 순일하면 둘이 되지 않고 섞이지도 않으며, 그치지 않으면 間斷과 선후가 없다."
右는 第二十六章이니 言天道也니라
위는 제26장이니, 천도를 말한다.
이 장에서는 군자가 人道의 용맹으로써 費隱의 도를 쌓아 이루어 나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제6절 尊德性 구절은 主가 되며, 앞의 세 절(제1~3)은 위대한 성인의 도를 찬양함이니, 이는 하나의 표준을 세운 것이며, 其人이하 두 절(4~5)의 하나는 正言이요 하나는 反證으로써 상하 문장을 이어 주는 맥락이며, 제6절은 실제로 도를 닦고 덕을 쌓는 공부를 말한다. 이는 바로 군자란 성인의 도를 체득해야 한다는 책임을 말한 것이며, 끝 절에서는 修道, 凝德의 공효를 말하고 있다.
대재(大哉) 두 글자에는 오묘한 도의 뜻을 무한하게 함축하고 있다. 이는 성인에 속한 일이지만 '군자의 도'와 같다.
大哉라 聖人之道여 위대하다. 성인의 도여.
자사는 밝음으로 말미암아 진실하게 되는[自明誠] 일을 논하여 인도를 밝혀주었다. 도란 하늘에 근원하고 본성대로 따르는 것으로서, 성인에 의하여 온전하게 되니,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一本 統體의 본원이란 구할수록 더욱 광범하고, 萬殊 妙用의 散在란 구할수록 더욱 많다. 그것이 성인의 도이다.
包下文兩節而言이라
이는 아래의 두 절(제2~3절) 문장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다.
發育 두 구절은 대등한 관계로 쓰인 것이 아니며, 峻極이란 발육상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발육이란 橫說이며 峻極이란 直說이다. 이는 제12장 제2절의 "도의 큰 것으로 말하면 천하로서도 실을 수 없다[語大天下莫能載焉]"라는 뜻이다.
洋洋乎發育萬物하야 峻極于天이로다
넘실넘실 만물을 발육시켜 높고 큼이 하늘에까지 다하였다.
성인의 도가 위대함을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 도의 본체[道體]의 위대함이란 천지의 사이에 모두 갖춰져 있어 어느 곳이든 없는 데가 없다. 넘실넘실 흘러넘쳐 그 공용이 충만하므로 이로써 만물이 발육된다. 다시 말하면 봄에는 만물을 낳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거두고 겨울에 갈무리하는 이 모든 것들이 도의 유행이 아닌 것이 없다. 그 體段은 높이 하늘에까지 다하여 끝이 없이 드넓고 일정한 곳이 없이 두루 펼쳐져 있으니, 그것이 바로 도의 충만함이다. 도의 큰 부분으로 말하면 이와 같이 위대함을 볼 수 있다.
峻은 高大也라 此는 言道之極於至大而無外也라
峻은 높고 큼이다. 이는 도의 극치가 至大하여 밖이 없음을 말한다.
禮儀 두 구절 또한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曲禮는 곧 경례 가운데 있다. 禮儀 또는 威儀라 하는 두 곳의 儀 자의 뜻은 각기 다르게 쓰이고 있다. 禮儀는 禮制라는 말과 같으며, 威儀는 예를 실행하여 남들이 두려워하는 위엄[威]과 남들이 본받을 수 있는 거동[儀]이 있음을 뜻한다. 禮儀, 威儀는 곧 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三百, 三千은 제12장 제2절의 "도의 작은 것으로 말하면 천하로써도 깨트릴 수 없다[語小, 天下莫能破焉]"라는 뜻이다.
優優大哉라 禮儀三百과 威儀三千이로다
넉넉하고 크도다! 예의가 3백이며 위의가 3천이다.
지엽적인 事爲에까지 분산되어 있는 道體는 어느 곳이든 없는 데가 없다. 참으로 넉넉하고 큰 것이다. 이처럼 넉넉하고 여유가 있다. 禮儀라 하는 것을 들어보면 3백 가지의 강령이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이 도의 節文이 되는 것이며, 威儀라 하는 것을 살펴보면 3천 가지의 절목이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도의 品節이 되는 것이다. 도의 작은 부분으로써 본체의 큰 부분을 볼 수 있음이 이와 같다.
優優는 充足有餘之意요 禮儀는 經禮也요 威儀는 曲禮也라 此는 言道之入於至小而無間也니라
優優는 충족하여 여유가 있는 뜻이며, 禮儀는 經禮(대단원, 예의 강령)이며, 威儀는 曲禮(세부 조칙, 예의 절목)이다. 이는 도가 지극히 작은 데까지 들어가 조금도 사이가 없음을 말한다.
위 문장을 끝맺으면서 또한 아래의 문장을 일으키고 있다. 그 사람[其人]이란 위의 성인을 이어서 또한 아래의 군자를 비춰주고 있다.
待其人而後에 行이니라 그런 사람이 있기를 기다린 뒤에 <도가> 행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도는 어떻게 쉽사리 행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그와 같은 사람이 있는 이후에 이와 같은 도를 행할 수 있다.
總結上兩節이라
위 두 절(제2~3절)의 뜻을 모두 총괄하여 끝맺고 있다.
크고 작은 도를 지극히 다하였을 때 이를 至道라 말하며, 크고 작은 덕을 각각 지극히 다했을 때 이를 至德이라 말한다. 凝은 행하기 이전에 있는 것인데, 凝 자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취합[聚]과 이룸[成]이다. 취합하여 흐트러지지 않음은 본체가 구비됨을 말하며, 이루어져 헐어지지 않음은 견고함을 말한다.
故로 曰苟不至德이면 至道不凝焉이라 하니라
그러므로 진실로 지극한 덕<을 지닌 이가> 아니면, 지극한 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도란 오로지 그런 사람이 있기를 기다렸다가 행해지는 것이기에, 참으로 지극한 덕을 지니지 못하고 천박하고 비루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도의 전체를 이해할 수 없으며, 거칠거나 엉성한 견해로는 또한 도의 미세한 부분을 다할 수 없다. 때문에 지극한 도란 그러한 자의 몸과 마음에서는 이뤄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지극한 도를 이루려고 한다면 반드시 먼저 덕을 닦는 공부를 다 한 이후에 능히 할 수 있다.
至德은 謂其人이며 至道는 指上兩節而言이라 凝은 聚也오 成也라
至德은 그러한 사람을 말하며, 至道는 위의 두 절(제2~3절)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凝은 聚合, 또는 成就의 뜻이다.
"發育…… 峻極…… 三千…… 三百…… 따위 모두가 지극한 도이기에 지극한 덕을 지닌 자가 아니면 이 도를 행하여 이룰 수 없다."111)
이 절은 모두 덕을 닦는 공부에 대해 말한 것이지만 도를 성취[凝道]하는 뜻 또한 그 가운데에 있다. 첫 구절(尊德……問學)은 강령이요, 아래 네 구절의 상반부는 尊德性을 거듭 말하여 제2 洋洋節에 상응하며, 아래의
111) 위와 같음.
반절은 道問學을 거듭 말하여 제3 優優節과 상응하고 있다. 그러나 德性이란 학문의 源頭處이며, 학문이란 곧 덕성의 散殊處이므로, 而 자를 사용하여 아래의 문장과 밀접한 관련을 지어 그 뜻을 일관시키고 있다. 본 주에서는 存心을 덕성에 영속시켜 말하였으니 이는 이 이치를 보존할 수 있는 統體이며, 致知는 학문에 영속시켜 말하였으니 知行을 겸하여 말한 것이기에 『대학』에서 말한 致知가 아니다. 盡精微와 知新은 지식[知]에, 道中庸과 崇禮는 행실[行]에 속한다. 私意는 私欲에 비해 가볍기에 蔽 자를, 私欲은 私意에 비해 비중이 크기에 累 자를 쓴 것이다. 溫故의 故와 敦厚의 厚는 선천적 기질의 바탕에서 얻어진 것과 후천적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있으므로 오로지 선천적인 良知 良能만을 가리켜 말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장구』에서 已知 已能이라 말한 것이다. 溫故知新은 분명 두 가지 일이므로 논어에서 말한 뜻과 조금은 다른 점이 있다. 여기에서는 溫故는 尊德性에, 知新은 道問學에 영속시켜 분명하게 둘로 나누어 보았지만, 논어에서는 일직선상에 의한 연속적인 공부로 보았기 때문이다. 忠信의 뜻을 가진 敦厚는 예를 배울 수 있는 근본이다. 그러나 다만 이는 반복된 互文法으로 보아야 한다. '敦厚以……'의 以 자와 위 구절의 而 자는 한 가지의 뜻이다.
故로 君子는 尊德性而道問學이니 致廣大而盡精微하며 極高明而道中庸하며 溫故而知新하며 敦厚以崇禮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덕성을 공경히 드높이되 학문으로 말미암으니, 넓고 큰 것을 다하되 정밀하고 은미한 것을 다하며, 높고 밝음을 지극히 하되 중용으로 말미암으며,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알며, 두터운 바를 돈독히 하되 예를 높이는 것이다.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하는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 도의 본체는 그 크기로는 밖이 없고 작기로는 사이마저 없으며 어느 곳에서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처럼 큰 도는 마음을 보존하지[存心] 않고서는 그처럼 큼을 이룩할 수 없다는 점을 알기에 덕성을 높이는 것이며, 도의 작은 부분의 미세한 것은 앎이 지극하지[致知] 않고서는 그 작은 부분의 미세함을 이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학문으로 말미암는다. 이것이 바로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하는 큰 실마리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일을 어떻게 한 가지로 다할 수 있겠는가. 덕성이란 本初로부터 광대한 것이지만 사심에 가리면 협소해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조금이라도 사심이 마음을 가리지 않도록 하여, 그 덕성 本初의 광대함을 미루어 다하는 것이다. 그러나 精微한 이치는 광대한 속에 갖춰져 있다. 이에 학문으로써 이를 다하여 이치를 분석하되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오차가 없도록 하며, 덕성이란 본초로부터 고명한 것이지만 사욕에 얽매이면 비루하고 혼미해지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반드시 一毫의 사욕에 얽매이지 않고 덕성 본초의 고명함을 극진히 다하여야 한다. 過·不及이 없는 중용의 일이란 바로 높고 밝은 덕성이 구현되어 나타난 부분이다. 이에 학문으로 말미암아 일을 처리함에 있어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한 오류가 없도록 하는 것이며, 덕성에 예로부터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옛것[故]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이에 반드시 예로부터 알고 있는 그 옛것을 다시 익혀서 새로운 것을 알아나가는 것이다. 이로써 그 옛것에 따라 얻어지는 것은 반드시 학문으로 말미암아 알지 못했던 바를 날로 새롭게 알아 나가는 것이며, 덕성에 원초로부터 능한 바 있는 것을 두터움 [厚]이라 말하지 않겠는가. 반드시 오랫동안 이를 가지고서 잃지 않고 원래부터 능히 했던 두터운 바를 돈독히 하여 예를 높여야 한다. 그 때문에두터움에 따라 새로이 나오는 것 또한 학문으로 말미암아 삼가지 못했던 예가 날로 높아져 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보존[存心]하고 이와 같이 앎을 미루어 다하면[致知] 덕이 닦여지지 않을 리 없다. 어찌 도가 이룩되지 않겠는가.
尊者는 恭敬奉持之意며 德性者는 吾所受於天之正理며 道는 由也며 溫은 猶燖溫之溫이니 謂故學之矣오 復時習之也며 敦은 加厚也라 尊德性은 所以存心而極乎道體之大也며 道問學은 所以致知而盡乎道體之細也니 二者는 修德凝道之大端也라 不以一毫私意自蔽오 不以一毫私欲自累오 涵泳乎其所已知오 敦篤乎其所已能은 此皆存心之屬也며 析理則不使有毫釐之差오 處事則不使有過·不及之謬오 理義則日知其所未知하며 節文則日謹其所未謹은 此皆致知之屬也라 蓋非存心이면 無以致知로되 而存心者 又不可以不致知라 故此五句는 大小相資하고 首尾相應하야 聖賢所示入德之方이 莫詳於此이니 學者는 宜盡心焉이니라
尊은 공경히 받들어 올리는 뜻이며, 德性은 하늘로부터 받은 나의 바른 이치이며, 道는 말미암음이며, 溫은 차가워진 음식물을 다시 따뜻하게 덥힌다[燖溫]는 溫 자의 뜻과 같으니 예전에 배웠던 것을 다시 수시로 익힌다는 것이며, 敦은 더욱 두터이 함이다. 尊德性은 마음을 보존하는[存心] 것으로 道體의 큰 부분을 지극히 다함이며, 道問學은 앎을 미루어 다한[致知] 것으로 도체의 작은 부분을 다함이니, 이 두 가지는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하는 큰 실마리이다. 스스로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마음에 가리지 않고[致廣大], 스스로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極高明], 이미 아는 바를 다시 익히고[溫故], 이미 능한 바를 두텁게 하는 것[敦厚] 은 모두 存心에 속하며, 이치를 분석할 때는 터럭 끝만큼이라도 어긋남이 없도록 하고[盡精微], 일을 처리할 때는 지나치거나 미치지 못하는 오류가 없게 하고[道中庸], 이치와 의리는 날로 그 알지 못한 바를 알아가며[知新], 품절과 문장은 날마다 그 삼가지 못한 바를 삼가는 것[崇禮]은 모두 致知에 속한다. 마음을 보존하지[存心] 않고서는 앎을 미루어 다할[致知] 수 없지만, 마음을 보존하였을지라도 또한 앎을 미루어 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다섯 구절은 크고 작은 것들이 서로 돕고 첫 머리와 끝이 서로 응하여, 성현이 덕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보여준 것은 이보다 더 자세한 것이 없다. 배우는 자는 이에 마땅히 마음을 다해야 할 것이다.
"尊德性而道問學 한 구는 總綱領이며, 아래 다섯 구절의 위 부분은 모두 大綱 공부이고 아래 부분은 모두 細則 공부이다. 바꿔 말하면 致廣大, 極高明, 溫故, 敦厚는 尊德性이며, 盡精微, 道中庸, 知新, 崇禮는 道問學이다. …… 도의 본체는 크기로는 밖이 없고 작기로는 안이 없으니 어느 곳이든지 모두 있기에 군자의 학문은 尊德性으로 그 큰 것을 온전히 다한 후에 道問學으로 작은 것까지를 지극히 다하는 것이다."112) 廣大는 狹小의 대칭이며, 高明은 卑陋의 대칭이다. 廣大와 狹小, 그리고 高明과 卑陋는 德性의 道義와 육체의 人欲, 그 어떤 것을 따르느냐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때문에 "致廣大는 마음이 드넓어서 彼此(彼我)의 경계가 없는 것인데, 사사로운 뜻이 있으면 협소하게 되고, 極高明은 인욕의 사사로움이 누가 되는 바 없는 것인데, 인욕에 빠지면 비루하게 된다."113)
112) 위와 같음. 113) 위와 같음.
이는 위의 도를 닦아 덕을 이룩한 데에 긴밀하게 이어 말한 것이다. 교만하지 않음[不驕]은 位, 育, 經, 曲(天地位, 萬物育, 經禮三百, 曲禮三千)의 도를 베푸는 것이며, 법도를 어기지 않음[不倍]은 位育經曲의 도를 憲章하는 것이며, 말을 하여 몸이 일어나 벼슬에 나간다[足興]는 것은 位, 育, 經, 曲의 도를 세상에 천명함이며, 말없이 한 몸을 용납한다[足容]는 것은 位, 育, 經, 曲의 도를 마음에 수용하는 것이다. 이 네 조목은 不驕 不倍로 강령을 삼은 것이며, 足興 足容이란 또한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데에서 뽑아 말한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뒤이어 『시경』을 인용하여 전반적으로 윗글을 증명하고 있다. 明은 哲의 본체요, 哲은 明의 用이다. 이는 도리를 따라 행하면 스스로 몸이 보존된다는 것이지, 이익을 따르고 해를 피하는 것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明哲 구절은 제6 故曰節에 상응하고, 保身 구절은 본 절에 상응한다.
是故로 居上不驕하며 爲下不倍(패)라 國有道에 其言이 足以興이오 國無道에 其黙이 足以容이니 詩曰 旣明且哲하야 以保其身이라 하니 其此之謂與인저
그러므로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으며 아랫사람이 되어서는 법을 어기지 않으니, 나라에 도가 있으면 그의 말로 몸이 일어나 벼슬에 나아갈 수 있으며, 나라에 도가 없으면 그의 침묵으로 몸을 용납하기에 넉넉할 것이다. 『시경』에 이르기를, "이미 밝고 또 지혜로워서 그의 몸을 보존한다" 하니, 그것은 이를 말한다.
군자가 덕을 닦아 도를 이룩하면 한 몸에 도가 갖추어져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시의적절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 때문에 윗자리에 있으면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한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도를 다하므로 세력을 믿고서 교만하지 않으며, 아래에 거하면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한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 제 분수에 편안하므로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그 당시 나라에 도가 있으면 도를 펴서 도덕의 말을 빛내어 그의 몸이 세상에 등용될 것이며, 도가 없으면 도를 거두어들인 채 도덕을 변치 않고 깊이 침묵하여 재앙을 받지 않고 한 몸을 용납할 수 있을 것이다. 仲山甫를 찬미한 『시경』의 시를 살펴보면 이미 이치에 밝고 또한 사물에 지혜로우니, 그 몸을 보전하여 재해가 없다 하였으니, 그 말은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한 군자는 윗자리에 있어서나 아랫자리에 있어서나, 또는 태평성대이든 혼란한 시대이든, 어느 곳 어느 때이든 모두 적절하게 대처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군자가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하는 공부를 극진히 하여이와 같은 효험을 얻으면 성인에게 존재하는 위대한 도가 군자에게 있다. 이는 밝음으로부터 진실한 자의 일이니, 인도이다.
興은 謂興起在位也라 詩는 大雅烝民之篇이라
興은 몸이 일어나 벼슬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詩는 「大雅 烝民」편이다.
"'居上不驕' 구절에서 '黙足以容' 구절까지는 작고 크고 정밀하고 거친 것을 모두 이해하고 관통한 후에야 盛德의 공효가 저절로 이와 같이 된다." "不倍는 윗사람에게 충성하여 배반하지 않음이며, 興이란 '興賢興能'이라는 興 자와 같다."114)
114) 위와 같음.
右는 第二十七章이니 言人道也니라
이는 제27장이니, 인도를 말한다.
이 장은 아랫사람이 되어서는 법도에 어긋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다만 비천한 사람으로서는 감히 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제1 愚而節의 "非天子……" 구절을 주로 하여, 제2~3절에서는 禮, 度, 文을, 제4절에서는 禮樂을, 제5절에서는 禮만을 말하였지만 이는 모두 하나이다.
自用, 自專, 反古는 모두 제작이라는 측면에서 말한 것이다. 살펴보건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제 맘대로 하기를 좋아한다는 데 대해서 들은 바 없다.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란 제 맘대로 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에 태어나 옛것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마음대로[自專] 하고자 하는 일이다.
子曰 愚而好自用하며 賤而好自專이오 生乎今之世하야 反古之道면 如此者는 災及其身者也니라
공자가 말하였다. "어리석으면서도 제 맘대로 하기를 좋아하며, 비천하면서도 제멋대로 하기를 좋아하여 오늘날의 세상에 태어나 옛날의 도를 돌이키려 하면, 이 같은 자는 그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될 것이다."
자사는 거듭 아랫사람이 되어서는 법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공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의 뭇 제도를 제정하는 것은 윗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한이다. 그의 덕이 성인에 이르지 못하면 모두가 어리석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명한 척하여 제 맘대로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참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천자의 지위에 있지 않으면 모두가 미천한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람하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마음대로 하고자 한다. 스스로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자들은 대개가 옛 일을 옳다 여기고 요즘의 일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도리어 옛 도를 구한다는 것이 또한 어찌 옳은 일이라 하겠는가. 이와 같은 자는 도리를 거스르고 본분에 지나친 자이니, 반드시 그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될 것이다."
以上은 孔子之言이니 子思 引之라 反은 復也라
위는 공자의 말인데, 자사가 인용하여 언급한 것이다. 反이란 회복이다.
"어리석은 자는 덕이 없는 자이며, 미천한 자는 지위가 없는 자이다. 그들이 당시의 인군이 하는 바에 태어나 옛 도를 회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몸에 재앙이 미치게 된다. 이는 그 당시 할 수 없는 일을 自用하고 自專함이니, 이 모두가 밝음으로 몸을 보존하는 도가 아님을 탄식하는 것이다. 이는 위 글 끝부분의 뜻을 이어서 이를 인용한 것이다."115)
115) 『大全』 陳氏.
"'生乎今之世' 이하는 위의 두 구절을 종합하여 말한 것이다. 어리석고 천한 자는 예악을 제작할 수 없는 자이다. 요즈음의 세상에 살면서 당시의 법을 따라야 하는데, 만일 옛 도로 되돌아가려고 한다면 이는 고치려는 일이다. 이는 반드시 윗사람에게 죄를 얻기 때문에 재앙이 그 몸에 미치게 된다."116)
'非天子……' 세 자를 쓴 것은 아랫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직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예를 親疎의 차로 말하면 예컨대 合族 會食의 유이며, 귀천의 구분으로 말하면 朝覲 聘禮의 유이며, 度는 品制라는 주석을 붙일 수 있는데, 品은 등급이며, 制는 物采이다. 文은 문자의 제정[制字]이니, 마땅히 字 자로 써야 할 글자이다. 아무튼 文은 書名이라는 주석을 붙일 수 있는데, 書는 點劃이며, 名은 字音과 聲調를 말한다.
非天子면 不議禮하며 不制度하며 不考文이니라
천자가 아니면 예절을 의론하지 못하며, 법도를 제정하지 못하며, 문자를 바로잡지 못한다.
공자의 말을 살펴보면 천하의 일을 제정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그 덕과 그 지위, 그리고 시기에 맞아야 가능한 일이다. 만일 덕과 지위와 시기에 알맞게 하는 그러한 천자가 아니고서는 가깝고 소원한[親疎], 고귀하고 비천한 사이에 서로 대하는 예절을 감히 의론할 수 없으며, 궁실,
116) 『大全』 東陽 許氏.
수레, 깃발, 복식의 법도를 감히 마련할 수 없으며, 한 점 한 획, 그리고 자음과 성조 따위의 문자를 裁正할 수 없다. 예절을 의론함, 법도를 제정(制定)함, 문자를 재정(裁正)함이란 특별한 권한이다.
此以下는 子思之言이라 禮는 親疎貴賤이 相接之體也라 度는 品制이며 文은 書名이라
이 아래의 문장은 자사의 말이다. 예란 멀고 가까운, 그리고 귀천 사이에서 서로 접하는 體貌이며, 度는 品級과 제작이며, 文은 글자의 이름[書名: 字名]이다.
"지위는 있지만 덕이 없는 자로서 예악을 제정하는 일은 '어리석으면서 스스로 쓰기를 좋아함'이며, 덕은 있으나 지위가 없는 자로서 예악을 제정하는 일은 '미천하면서 마음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자'이다. 주나라 시대에 살면서 夏·殷 시대의 예를 행하려고 하는 것은 이제 세상에 살면서 옛날의 도로 되돌아가려는 것이다. 道란 議禮·制度·考文의 일이다. 議禮란 행실을 제재하는 것이므로 행함에 인륜이 같고, 제도는 법이 되는 것이므로 수레의 바퀴가 같고, 考文이란 세속에 부합되어야 하니 문장과 같다."117)
이는 「王制」의 문장과 크게는 같은 뜻으로 쓰여 있는데, 제2 非天節을 증명하고 있다. 今天下 세 글자는 사람들을 각성, 환기시키고자 하는 뜻을가지고 있다. 「王制」와 크게 같은 것은 바로 문왕, 무왕은 덕과 지혜가 모두 성대하여 前代에 이를 모두 창제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車同軌 구절
117) 『大全』 朱子.
은 制度와 상응하는 구절이다. 周나라 사람들은 수레를 숭상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유달리 수레를 들어 말한 것이며, 書同文이란 考文에 상응하는 구절이다. 書는 글자이며 文이란 문체 형식이니, 이는 한 점 한 획과 자음과 성조까지를 모두 겸하여 말한 것이다. 行同倫은 議禮와 상응하는 구절이니, 나무쪽과 대쪽[方策]에 기재되어 있는 것은 禮요, 천하에 이를 조처하는 것은 행실[行]이다.
今天下 車同軌하며 書同文하며 行同倫이니라
오늘날의 천하에는 수레바퀴의 궤폭(軌幅)이 같으며, 문자는 글자가 같으며, 행실은 차서가 같다.
예절의 의론, 법도의 제정, 문자의 제정 이 모두가 천자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오늘날의 천하는 주나라 천자의 천하이며, 오늘날의 도는 주나라 천자의 도이다. 수레로 말하면 수레를 만드는 장인은 한 사람이 아니지만 수레바퀴 너비의 폭이 똑같으며, 문자로 말하면 글씨를 쓰는 이가 한 명이 아니지만 한 점, 한 획, 자음, 성조 따위의 문장에는 각기 일정한 법이 있어 사방이 모두 하나같으며, 행실로 말하면 행하는 자는 한 사람이 아니지만 상하 간에 서로 접하는 윤리와, 가깝고 멀고, 그리고 귀천의 차서가 한 가지이다. 이는 주나라 천자가 제정한 바로서 통일의 성대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이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
今은 子思 自謂當時也오 軌는 轍迹之度오 倫은 次序之體니 三者皆同은 言天下一統也라
今은 자사 그 당시를 말하며, 軌는 수레바퀴의 제도이며, 倫은 차서의체제이니, 이 세 가지가 똑같음은 천하통일을 말한다.
두 곳의 "감히 할 수 없다[不敢作]"라는 것은 自用 自專의 대칭으로 쓰인 것이다. 自用 自專한 것은 이런 일들을 감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亦不敢作이라는 하나의 亦 자를 음미해 보면 "덕이야 있지만 지위가 없다" 라는 데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이는 아래 제5 吾說節의 "나(孔子)는 주나라를 따르리라"라는 구절로 이어주는 글자이다.
雖有其位나 苟無其德이면 不敢作禮樂焉이며 雖有其德이나 苟無其位면 亦不敢作禮樂焉이니라
비록 그 지위가 있을지라도 진실로 그 덕이 없으면 감히 예절과 음악을 제정할 수 없으며, 비록 그 덕이 있을지라도 진실로 그 지위가 없으면 또한 감히 예절과 음악을 제정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비록 천자의 지위가 있을지라도 진실로 성인의 덕이 없으면 그는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제작할 수 있는 근본이 나에게 있지 않는 것이기에 감히 예와 악을 제정할 수 없으며, 비록 성인의 덕이 있을지라도 만일 천자의 지위가 없으면 그는 이른바 비천한 자가 아니겠는가. 비천하다면 제작의 권한이 나에게 있지 않다. 그 또한 제 맘대로 예와 악을 제정할 수 없다.
鄭氏曰 言作禮樂者는 必聖人으로 在天子之位라
鄭氏가 말하였다. "예절과 음악을 제정할 수 있는 자는 반드시 성인의 덕을 갖추고 천자의 지위에 있어야 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덕이 있으나 지위가 없다는 점을 긴밀하게 연결지어 말함에 있어, 공자를 인용하여 하나의 전형으로 삼고 있다. 하나라의 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說]' 하고, 殷禮 周禮에 대해서는 '배웠다[學]'고 말한 것은 세대의 遠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라의 예는 벌써 기나라에서 증명할 길이 없으며, 은나라의 예는 비록 송나라에 남아 있지만 오늘날에는 감히 따를 수 없다. 때문에 今用之 구절에 중점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바로 당시 왕의 제도임을 나타낸 것이다. "주나라를 따른다"라는 것은 공자가 아랫사람으로서 법을 어기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옛 헌장[舊章] 을 토론하고 시행되는 국법을 경건히 지키는 것이 바로 군자의 時中이라는 것이지, 보통사람들처럼 事勢와 분수에 얽매여 따르는 것과는 다르다.
子曰 吾說夏禮나 杞不足徵也오 吾學殷禮호니 有宋이 存焉어니와 吾學周禮호니 今用之라 吾從周호리라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나라의 예를 말할 수 있으나 기나라에서 <그것을> 증명하기에는 부족하며, 나는 은나라의 예를 배웠는데 송나라에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지금껏 남아> 있지만 나는 주나라의 예를 배웠는데 오늘날 쓰이고 있는 터라, 나는 주나라를 따를 것이다."
덕으로 말하면 그 누가 공자와 같은 분을 따를 수 있을까? 하지만 공자 또한 일찍이 이렇게 말하였다.
夏나라의 예는 옛 도이다. 나는 일찍이 하나라 예를 말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하나라의 후예는 杞나라인데 기나라는 이미 東夷國으로 들어감에 따라 이제는 그 문명이 비루하여 그 문헌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殷나라 사람이요, 또한 일찍이 은나라의 예를 배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또한 옛날의 도다. 은나라의 후예를 찾는다면 宋나라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송나라 역시 襄公 이후로 國勢가 부진하여 천백 개 중 열 개나 하나쯤 보존되어 전래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일찍이 주나라의 예를 배운 바 있는데 오늘날 천하 모든 사람들이 이 예를 따르고 있다. 나는 주나라의 백성으로서 또한 성대히 잘 갖추어진 주나라의 예를 따를 뿐, 감히 오늘날의 세상에 태어나 옛것을 돌이키려는 허물을 밟아나갈 수야 있겠는가. 공자의 말이 이와 같은 것으로 보아 아랫사람이 되어 법을 어기지 않으려는 뜻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이는 人道의 당연한 바이다.
此는 又引孔子之言이라 杞는 夏之後오 徵은 證也오 宋은 殷之後라 三代之禮를 孔子 皆嘗學之而能言其意나 但夏禮는 旣不可考證이오 殷禮는 雖存이나 又非當世之法이라 惟周禮 乃時王之制며 今日所用이라 孔子는 旣不得位則從周而已라
이는 또다시 공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杞는 하나라의 후예이며, 徵은 증거이며, 宋은 은나라의 후예이다. 공자는 三代(夏殷周)의 예를 일찍이 배운 바 있어 그 뜻을 말할 수 있지만, 하나라의 예는 이미 고증할 수 없고, 은나라의 예는 비록 남아 있으나 또한 당시의 법이 아니다. 오직 주나라의 예만이 당시의 왕이 제정한 바이며, 오늘날에 쓰이고 있다. 공자는 이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니, 주나라의 예를 따를 뿐이다.
이 문장과 같은 부분은 『논어』와 『예기』에 나타나 있다. 『논어』(「八佾」)에서는 "공자가 말하였다. '夏나라의 예를 나는 말할 수 있지만 杞나라에서 징험할 수 없고, 은나라의 예를 나는 말할 수 있지만 송나라에서 징험할 수 없는 것은 文獻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문헌이 족하면 나는 능히 징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고, 『예기』(「禮運」)에서는 "공자가 말하였다. '나는 하나라의 도를 보고 싶었다. 이 때문에 기나라를 찾아갔지만 충분한 징험을 얻지 못하고 다만 夏時를 얻었을 뿐이며, 나는 은나라의 도를 보고 싶었다. 이 때문에 송나라에 갔었지만 충분한 징험을 얻지 못하고, 다만 坤乾을 얻었을 뿐이다'" 하였다.
右는 第二十八章이라 承上章爲下不倍而言이니 亦人道也라
위는 제28장이다. 위 장(제27장)의 "아랫사람이 되어 법을 어기지 않는다"라는 뜻을 이어 말한 것이니, 이 또한 인도이다.
이 장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는다[居上不驕]"라는 뜻을 밝힌 것으로, 위의 제28장에서는 지위가 있어야 함을 중히 여겼지만 여기에서는 덕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는 修道凝德을 이어서 말한 때문이다. 교만하지 않는다는 不驕 두 글자가 바로 본 장의 가장 주요한 골자이다. 제1절은 강령이요, 제2절은 이를 가볍게 바꾸어 말한 것이다. 本身 이하 두 절 (3~4절)은 군자의 예악 문물의 제정이 지극히 훌륭한 것을 말하니, 이는 三重에 상응하는 구절이며, 제5 動而節은 군자의 제작이 백성에게 큰 신임을 얻었다는 점을 말하니, 寡過 한 구절에 상응하는 구절이며, 끝 절은 『시경』 을 인용하여 본 장 전체의 뜻을 끝맺고 있다.
三重은 천자만이 행할 수 있다. 그래서 이를 중요한 법전[重典]이라 말한다. 그러나 有三重의 有 자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그것은 천자가 조심하고 두려워하며 백성의 마음을 굽어보고 체득할 수 있음은 덕성과 학문에 의한 때문이다. 有 자의 뜻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寡過구절은 위정자를 꾸짖는 말이며, 其 자와 矣乎 자는 모두 교만하지 않는 데에서 얻어진 神妙한 공효를 나타내주는 글자들이다.
王天下 有三重焉이니 其寡過矣乎인저
천하에 왕이 되어서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이를 갖추면 허물이 적을 것이다.
자사는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라는 데에 대해 거듭 말하였다. 천하를 통솔하는 왕에게는 議禮, 制度, 考文 세 가지 중요한 일이 있다. 이로써 천하 사람들의 눈과 귀를 새롭게 하고 천하 사람의 마음을 통일시킨다면 제후는 법을 받들고 백성은 이 교화를 따르게 되어 천하 모든 사람이 도를 따라 행하고 법을 따라 지키게 되어 허물을 범하는 일이 적을 것이다.
呂氏 曰三重은 謂議禮制度考文이라 惟天子 得以行之니 則國不異政이오 家不殊俗而人得寡過矣라
呂氏가 말하였다. "세 가지 중요함이란 예를 의론함, 법도를 제정함, 문자를 제정함을 말한다. 오직 천자만이 이를 시행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나라마다 정사가 다르지 않고 집집마다 풍속이 다르지 않음으로써 사람마다 허물이 적을 것이다."
이 절은 당시의 지위가 중하다는 점을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아래 지위에 있는 자는 오로지 덕을 중히 여겨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할 뿐이다. 때문에 두 단락을 대등한 관계로 보아야 한다. 不信은 단지 자신의 처지와 입장에서 말한 것이지, 굳이 저 사람에게 믿음을 얻으려고한 것은 아니다.
上焉者는 雖善이나 無徵이니 無徵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下焉者는 雖善이나 不尊이니 不尊이라 不信이오 不信이라 民弗從이니라
상고의 것은 비록 좋으나 증거가 없으니, 증거가 없기에 이를 믿지 않고, 믿지 않으니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아래 지위에 있는 자는 비록 좋으나 지위가 높지 않으니, 지위가 높지 않기에 믿지 않고, 믿지 않으니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이른바 천하의 왕이란 때와 지위를 얻은 자이다. 상고시대의 왕이 천자의 지위에서 제작한 예악 문물이 좋기는 하지만 그 시대가 아니므로 증거가 없다. 증거가 없으면 백성들이 믿지 않는다. 백성이 믿지 않으면 곧 이를 이상하게 여겨 따르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허물을 적게 하려고 노력해도 될 수 없는 일이다. 아랫사람은 성인의 덕을 소유하여 비록 제작을 잘할 수 있을지라도 지위가 없어 위상이 높지 않다. 지위가 높지 않으면 백성에게 믿음을 얻을 수 없다. 백성에게 믿음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곧 가소롭게 생각하여 따르지 않을 것이니, 아무리 허물을 적게 하려고 해도될 수 있겠는가.
上焉者는 謂時王以前이니 如夏商之禮는 雖善而皆不可考이며 下焉者는 謂聖人在下니 如孔子는 雖善於禮而不在尊位也라
上焉者는 당시의 왕 이전의 사람을 말하니, 하나라와 상나라의 예는 비록 좋다 하지만 모두 상고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下焉者는 성인이 아래 지위에 있음을 말하니, 공자는 비록 예를 제정할 수 있지만 높은 지위를 얻지 못한 것과 같다.
이는 君子之道로서 아래 문장을 모두 총괄하고 있다. 本諸身 이하 여섯 구절은 대등한 관계로 나열한 가운데 질서정연한 순서가 있다. 그 '몸'이라 함은 이미 덕을 닦아 도를 이룩한 뒤에 형성된 인격체로 말한다. 때문에 인륜을 극진히 다한 몸으로써 예의를 의론하고, 사람들에게 법이 될 수 있는 몸으로써 제도를 마련하고, 문명을 갖춘 몸으로써 문자를 제정하여 하나하나 모든 것을 자기의 몸에서 체득하고 감정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군자의 예악 문물의 제정이란 감히 제 맘대로 베풀어 백성을 속이는 것이 아니며, 실제의 이치 위에서, 또는 도리 위에서 헤아리며, 그 숭상해야할 바를 살펴 그 向背를 아는 것이다. 徵 자 또한 교만하지 않는다[不驕]는 뜻을 나타낸 것이며, 考諸 구절은 因革 損益을 주로 하여 말하며, 不悖는 천지와 일체가 됨이며, 無疑는 귀신과 더불어 쓰임이 같으며, 不惑은 先聖後聖이 하나라는 뜻이다. 이 여섯 구절은 한 걸음 더 나아 갈수록 더욱 심화되고, 한 걸음 더 나아갈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여기에는 모두"교만하지 않는다"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지, 스스로 이루어짐을 말한 것은 아니다.
故로 君子之道는 本諸身하야 徵諸庶民하며 考諸三王而不謬하며 建諸天地而不悖하며 質諸鬼神而無疑하며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이니라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자신에 근본하여 여러 백성에게서 징험하며, 삼대의 왕에게 상고하여 보아도 그릇됨이 없으며, 천지에 내세워 보아도 어긋나지 아니하며,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으며, 백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다.
그러므로 천하를 통치하는 왕의 군자 三重의 도란 반드시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한 자신에 근본하고 있으나, 또한 이 도를 백성들이 따르는가를 징험해보아야 하며, 이를 삼대의 왕에게 상고하여 나의 因革 損益의 법이 모두 삼대 왕의 옛 법과 같아서 그릇됨을 찾아볼 수 없어야 하며, 이를천지에 내세워 보아 나의 裁成 輔相의 도가 모두 천지의 자연스러운 이치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며, 귀신이란 지극히 그윽하여 보이지 않으므로 헤아리기 어렵지만 이를 귀신에게 물어 나의 屈伸 往來의 거취가 이치에 위배되지 않아서 스스로 의심이 없어야 하며, 百歲 이후의 성인이란 지극히 먼 후대의 인물이므로 헤아리기 어렵지만 이로써 백 세의 성인을 기다려도 나의 베풂과 경영하는 일이 이치에 동떨어지지 아니하여 의혹이 없어야 한다. 군자는 三重의 권한을 가지고 이와 같이 여섯 가지의 일을 성대히 갖추어야 한다.
此君子는 指王天下者而言이며 其道는 卽議禮, 制度, 考文之事也라 本諸身은 有其德也며 徵諸庶民은 驗其所信從也라 建은 立也니 立於此而參於彼也라 天地者는 道也며 鬼神者는 造化之迹也라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所謂聖人復起라도 不易吾言者也라
여기에서 말한 군자는 천하의 왕을 가리켜 말함이며, 其道는 곧 예를 의론하고 법도를 제정하고 문자를 재정하는 일이다. 몸에 근본함이란 덕을 지님이며, 여러 백성에게서 징험함이란 그들이 믿고 따르는가를 징험하는 것이다. 建이란 세움이니, 여기에다가 세워 저것을 참고해보는 것이다. 천지는 도이며, 귀신은 조화의 자취이다. 백 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됨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나의 말을 바꾸지 못한다"(『맹자』 「滕文公 下」)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천지란 도를 말할 뿐이다. 이는 내가 여기에다가 도를 세움에 천지의 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이다."118)
이는 어떻게 해서 예악 문물을 잘 제작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원인을 추구하여 말한 것이다. 귀신 또한 천명을 받아서 수많은 群動을 부리는 것이며, 後聖 또한 사람의 본성을 극진히 다하여 만물을 宰制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하늘을 알고 사람을 알아 곧 의심이 없고 의혹이 없을 수 있다.
118) 위와 같음.
그 때문에 知天, 知人이라는 두 곳의 知 자는 깊이 있게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尊德性 道問學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質諸鬼神而無疑는 知天也오 百世以俟聖人而不惑은 知人也니라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다는 것은 하늘을 앎이며, 백 세 이후의 성인을 기다려도 의혹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군자가 예악 문물을 제정하는 최고의 선 또한 하늘과 사람의 이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귀신은 지극히 그윽하지만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는 것은 하늘의 이치를 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늘의 이치를 귀신이 극진히 다한 이유에서이다. 군자는 귀신의 이치를 궁구하고 천지의 조화를 앎으로써 천도의 所以然을 지극히 알기에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이 없다. 따라서 귀신을 말하면 바로 천지임을 알 수 있다. 후세의 성인이란 지극히 먼 훗날을 말한다. 그러나 그가 후세에 태어나 의혹이 없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를 앎이다. 그것은 인간의 도리란 성인이 극진히 다하였기 때문이다. 군자는 사물을 밝게 알고 인륜을 살펴 사람의 다 같은 마음의 이치를 모두 알고 다하였기에 후세의 성인이 태어난다 할지라도 의혹이 없다. 여기에서 말한 후세의 성인이란 곧 삼대의 왕을 말한다. 이는 군자의 도가 지극히 선할 수 있는 이유이다.
知天知人은 知其理也라
하늘과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는 바로 사람들에게 허물이 적게 되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다. 위의 세 구절은 군자의 문물 제정이 지극히 훌륭하다는 데에 근본하여 말한 것이며, 이의 세 곳의 而(動而……, 行而……, 言而……) 자는 動, 行, 言을 밀접하게 붙여 읽어야 한다. 世는 本朝의 世道, 世法, 世則을 가리킨 것으로, 오늘날의 문물이 창제될 초기에 결정되는 것이지 어느 한 시대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래 두 구절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백성이란 그 제정을 따라야 하는 측면에서 말하고 있다. 멀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란 온 천하를 말한 것이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是故로 君子는 動而世爲天下道니 行而世爲天下法하며 言而世爲天下則이라 遠之則有望이오 近之則不厭이니라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의 도가 되니, 행하면 대대로 천하의 법이 되며, 말하면 대대로 천하의 준칙이 되는 것이다. 멀리서는 그를 우러러 바라보며, 가까이에서는 싫어하지 않는다.
군자는 하늘과 사람의 이치를 알아 문물을 최선으로 제정하였으니, 어찌 백성들에게 허물이 적어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군자가 三重의 도로써 한 몸을 움직이면 대대로 천하 모든 사람이 다함께 이로 말미암게 되는 것이다. 삼중의 도를 정사에 조처하는 것이 바로 몸을 움직여 행하는 일인데 이렇게 하면 대대로 천하가 본받게 되며, 삼중의 도로 호령을 하는 것이 바로 몸을 움직여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대로 천하가 이를 취하여 준칙을 삼는다. 천하 많은 사람들 중에 멀리 있는 자는 우러러 바라보고, 천하 많은 사람들 중에 가까이 있는 자는 그의 언행을 익히 알고 그를 법으로 삼아 그에게 편안함을 얻어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길이 후세에 전하여도 폐단이 없고, 당시에 미루어 나아가되 모두 법이 되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보면 그들에게 허물이 적음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動은 兼言行而言이며 道는 兼法則而言이라 法은 法度也오 則은 準則也라
動은 말과 행실을 겸하여 말하며, 道는 법과 준칙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法은 법도요, 則은 준칙이다.
여기서는 백성의 허물이 적게 된 것이 반드시 몸에 근본한 여섯 가지 일을 잘한 데에서 유래했음으로 끝맺고 있다. 『시경』에서 인용한 庶幾夙夜구절은 그 근본을 추구하여 이 구절에서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을 미루어 상상해볼 수 있다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終譽는 그 뿌리가 오래되었음을 말하며, 庶幾 구절은 蚤譽를 말한다. 때문에 그 처음에는 이와 같이 말할 수 없었을 것이며, 이 장의 末尾에서 結辭를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反殺法으로써 위정자를 투시하였는 바, 어찌 교만할 수 있겠는가.
詩曰 在彼無惡하며 在此無射(역)이라 庶幾夙夜하야 以永終譽라 하니 君子未有不如此而蚤有譽於天下者也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저 곳에 있어서도 미워함이 없고, 이 곳에 있어서도 싫어함이 없다. 거의 밤과 낮으로 길이 영예를 이루리라" 하니, 이와 같이 하지 않고서 일찍이 천하에 영예를 누린 자는 없다.
천하와 후세를 합하여 보면 모두 이를 힘입어 허물이 적은 것이다. 군자의 영예는 천하와 후세에 길이 있다. 그러나 어찌 요행으로 얻어지는 일이겠는가. 『시경』에서 夏·商나라의 후예를 찬미하여 읊은 시구가 있다. "그들의 본국에 있을 때는 많은 신하와 백성에게 죄를 짓지 아니하여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지 않았고, 우리 주나라를 찾아와 제사를 도울 때는 사당을 오르내리고 제사를 주선하는 일에 있어 예의를 잃지 않아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워하거나 싫어함이 없다는 것이 곧 영예로운 일이다. 그것은 반드시 아침저녁으로 이처럼 생활한 데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이후로는 아침저녁으로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더하여 그 아름다운 명예를 길이 이룩하리라." 『시경』을 살펴보면, 군자 三重의 제정이 정작 자기 자신의 도덕에 근본하지 않고, 백성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고, 삼대의 왕과 후세의 성인에 부합되지 못하고, 천지 또는 귀신과 상통하지 못한 채, 대대로 법이 되거나 대대로 준칙이 되거나 멀리서 우러러보거나 가까이서 환심을 얻은 이는 없다. 따라서 천하의 아름다운 명예를 얻은 자는 일찍이 없었다. 三重의 지극한 선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은 도이며, 천하에 허물이 적은 것은 윗자리에서 교만하지 않는 데에서 얻어진 교화이다. 덕을 닦고 도를 이룩한 군자의 효험이 이와 같으니, 이는 인도의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詩는 周頌振鷺之篇이라 射(역)은 厭也라 所謂此者는 指本諸身以下六事而言이라
詩는 「周頌 振鷺」편이다. 射은 싫어함이다. 이른바 이것[未有不如'此'
而……]이란 '本諸身' 이하 여섯 가지 일을 가리킨다.
右는 第二十九章이라 承上章居上不驕而言이니 亦人道也라
위는 제29장이다. 윗자리에 있으면서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을 이어 말함이니, 이 또한 인도를 말한다.
이 장은 중용의 도란 공자에 의하여 극진하게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첫 절에서는 공자의 완벽한 학문을, 제2절에서는 공자의 위대한 덕을 말함에 있어 천지를 빌어 비유하였고, 끝 절에서는 천지의 위대함만을 말하였지만 공자의 위대함이 그 가운데 나타나 있다.
위의 두 구절(祖述……文武)은 고금의 성인을 일관한 학문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 아래의 두 구절(上律……水土)은 천지를 모두 포괄한 학문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안과 밖, 그리고 근본과 지엽을 모두 소유한 것으로, 小德, 大德의 뿌리가 잠복되어 있는 문장이다. 祖述이란 祖孫이 하나로서 그 일을 진작시키는 것과 같으며, 憲章이란 한 마음으로 이를 창조하고 지켜 그 업적을 빛나고 두텁게 지키는 것이다. 요순에게는 도를 말하고 문무에게는 법을 말한 것은 각각 그 지극을 들어 말한 것이다. 上律은 벼슬해야 할 때 벼슬하고, 그쳐야 할 때 그치고, 오래 머물러야 할 때 오래 머물고, 속히 떠나야 할 때 속히 떠남으로써 모든 일에 적절하게 하는 것과 같다. 襲은 등용하면 도를 행하고 버려두면 도를 감춤으로써 만나는 처지에 따라 안주하는 것과 같다. 이의 한 측면은 圓滑自在한 流動性이며, 또 다른 한 측면은 확고부동의 不變性을 가지고 있다. 요순 문무는 모두 하늘이 운행하는 자연을 본받고 땅의 일정한 이치를 본받았는데, 공자의 祖述 憲章은 곧 上律과 下襲을 말한다. 陸稼書는 "공자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보면 학문이라 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공자를 보면 그것은 덕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아래 문장에서 마침내 성인의 덕을 말하게 된 것이다.
仲尼는 祖述堯舜하시고 憲章文武하시며 上律天時하시고 下襲水土하시니라
仲尼는 멀리 요순의 도를 宗祖로 이어받고 가까이 문왕, 무왕의 법을 지켜왔으며, 위로는 자연의 운행[天時]을 본받고, 아래로는 일정한 이치 [水土]를 따랐다.
자사는 일찍이 앞(제2장)에서 仲尼曰 세 자를 나타내어 宗旨를 밝힌 바 있었는데, 여기에서 또다시 중니를 높이 제창한 것은, 군자 중용의 道統은 공자가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이에 상당할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도를 집대성한 분을 찾는다면 오로지 공자가 있을 뿐이다. 요순은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지극히 다한 분인데, 공자는 멀리 그를 宗祖로 받들어 계승하니, 이는 멀리 근본이 있음이며, 문왕과 무왕은 완벽하게 법제를 갖춘 분인데, 공자는 가까이 그를 받들고 본받아 이를 나타내니, 이는 가까이에서 지킨 바 있다.
춘하추동 사계절은 자연의 운행인데, 공자는 위로 이를 본받아 天時를 순응하고, 동서남북 사방은 일정한 자리가 있는데 공자는 아래로 이를 따라서 水土의 편의에 안녕을 누렸다. 여러 성인이 이룩한 도와 천지에 유행하는 도가 모두 갖춰져 있다.
祖述者는 遠宗其道며 憲章者는 近守其法이며 律天時者는 法其自然之運이며 襲水土者는 因其一定之理니 皆兼內外, 該本末而言也라
祖述은 멀리 그 도를 근본함이며, 憲章은 가까이 그 법을 지킴이며, 律天時는 자연의 운행을 본받음이며, 襲水土는 일정한 이치를 따르는 것이니, 이는 안과 밖을 모두 겸하고 근본과 지엽을 모두 갖추어 말한 것이다.
이는 제1 祖述節의 네 항목을 모두 종합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공자에게 중점을 두고 보아야만이 譬如의 뜻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구절(辟如天地……覆幬)은 '無不……' 두 글자에 중점을 두어, 광대한 본체를 두루 갖추었음을 말하며, 아래의 두 구절(辟如四時……代明)은 錯行 代明의 錯, 代 두 글자에 중점을 두어, 變通의 작용[用]에 그침이 없음을 말한다.
辟(譬)如天地之無不持載하며 無不覆幬하며 辟如四時之錯行하며 如日月之代明이니라
비유하면 하늘과 땅이 받들어주고 실어주지 않음이 없고, 덮어주고 감싸주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사계절이 번갈아 돌아가는 것과 같고, 해와 달이 서로 바꾸어가며 밝혀주는 것과 같다.
내 무엇으로 그의 덕을 근사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금 聖王과 상하 천지의 이치를 한 마음에 모두 갖추고 모두 체득하여 빠뜨림이 없는 덕을 비유하면 만물을 모두 받들어주고 실어주며 만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하늘과 땅 같으며, 고금 성왕과 상하 천지의 이치를 한 마음 속에 운용하여 길이 쉼이 없는 면으로 말하면 이는 하늘과 땅에 사계절이 번갈아 돌아가고, 하늘과 땅에 날과 달이 서로 번갈아가며 밝혀주는 것과 같다. 공자의 위대함은 하늘과 땅에 비유하지 않고서는 다시 그 어디에도 견주어 말할 수 없다.
錯은 猶迭也라 此는 言聖人之德이라
錯은 번갈음[迭]과 같다. 이는 성인의 덕을 말한다.
이는 천지를 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만물이란 천지의 사이에서 발생하고 양육되면서도 각기 하나의 물체에는 그 나름대로의 性命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물체는 하나의 물체로서의 太和를 가지고 있으므로 어지럽거나 뒤섞여 서로 해치는 일이 없으며, 사계절과 일월은 모두 천지의 사이에서 운행하지만 각각 서로가 머무는 위치가 따로 있고 각각 출입하는 躔度가 있으므로 문란하거나 거슬려 서로 어그러짐이 없다. 大德, 小德의 德은 내재적인 것 모두를 통틀어 말하며, 소덕이란 바깥으로 나타나는 分散處이며, 대덕이란 主宰를 가지는 統體, 즉 總會處를 말한다. 川流의 流는 그 敦化를 유행시키는 것이며, 敦化의 敦이란 유행할 수 있는 근본적인 조화를 두텁게 하는 것이다. '此天地之所以爲大也' 구절은 특별히 윗글을 끝맺는 것으로, 주된 정신과 뜻은 此 자와 也 자에 있음을 찬미한 것이다. 이 때문에 천지를 잘 이해하면 공자를 알 수 있다.
萬物이 幷育而不相害하며 道 幷行而不相悖라 小德은 川流오 大德은 敦化니 此 天地之所以爲大也니라
만물이 함께 자라되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나란히 행하되 서로 어그러지지 않으며, 작은 덕은 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맥락이 분명하게 쉼이 없이 흘러가고, 큰 덕은 그 조화가 두터워 무궁하게 나오는 근본이니, 이는 하늘과 땅이 크게 된 까닭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어떻게 해서 그처럼 크게 될 수 있었을까? 덮어주고 실어주는 그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만물이다. 그러나 만물은 모두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함께 발생하여 성장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제각기 다른 성품을 가지고 서로서로 해치지 않고 다함께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사계절과 일월이란 모두가 하늘의 도이다. 이 도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함께 어우러져 운행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제각기 그들의 길을 따라 서로 어긋남이 없음을 볼 수 있었다. 서로가 해치지 아니하고 서로가 어긋남이 없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는 하나의 본체['一本']가 만 가지로 다르게 흩어져[萬殊] 있는 작은 덕['小德']이, 마치 끊임없이 흐르는 냇물과 같이 맥락이 분명하며 쉼이 없기 때문이다. 만물이 함께 성장하고 일월과 사계절이 함께 운행하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이는 萬殊가 一本에 근원한 큰 덕[大德]이, 마치 끝없이 분출되어 나오는 조화의 근원이 성대하고 渾厚함과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늘과 땅의 지극히 큰 도를 미쳐 갈 수 없는 바이다.
이로 보면 공자가 고금 제왕과 상하 천지의 도를 한 마음에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은 곧 천지의 大德이며, 제왕과 상하의 도를 모두 겸하고서 때에 따라 發出해 내는 것은 곧 천지의 小德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하나의 하늘과 땅이다. 이것이 바로 천도가 되는 바이다.
悖는 猶背也라 天覆地載하야 萬物은 幷育於其間而不相害하며 四時日月이 錯行代明而不相悖라 所以不害, 不悖者는 小德之川流이며 所以幷育, 幷行者는 大德之敦化라 小德者는 全體之分이오 大德者는 萬殊之本이라 川流者는 如川之流이니 脈絡分明而往不息也며 敦化者는 敦厚其化하야 根本盛大而出無窮也라 此는 言天地之道하야 以見上文取譬之意也라
悖는 背와 같으니, 어긋남이다. 하늘이 덮어주고 땅이 실어주어 만물은 그 사이에 함께 자라면서 서로 해치지 않으며, 사계절과 일월이 번갈아 운행하고 바꾸어 가며 밝혀주면서도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서로 해치지 않고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 것은 냇물처럼 흐르는 작은 덕이며, 함께 자라고 함께 운행하는 것은 그 조화가 두터운 큰 덕이다. 작은 덕이란 전체의 일부분이요, 큰 덕이란 萬殊의 한 근본[一本]이다. 川流는 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맥락이 분명하게 쉼 없이 흘러나오는 것이며, 敦化는 그 조화가 두터워 근본이 성대하므로 끝없이 나오는 것이다. 이는 천지의 도를 말하여, 위 절에서 비유를 취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大德은 조화의 본원처를 말하고, 小德은 본원에서 유출되어 나오는 것으로, 이는 忠恕에 비유될 수 있다. 忠이란 恕를 행할 수 있는 근본이며, 恕는 忠에서 유출되어 나오는 것과 같으며, 또한 中和와도 같다. 中이란 大德의 조화의 본원이요, 和는 小德의 川流와 같다."119)
右는 第三十章이니 言天道也니라
위는 제30장이니, 이는 천도를 말한다.
이 장은 덕이 산재되어 있는 부분으로써 말한 것이다. 至聖은 곧 공자를 말한다. 이는 첫 절을 주로 하여, 아래의 문장에서는 성인의 내면의 덕으로부터 바깥에 나타나는 데에 이르고, 다시 바깥에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에게 미치는 데까지 이르러, 配天으로 끝맺으면서 하나의 뜻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는 지극한 성인의 덕을 하나하나 열거하였지만 실행하는 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足以……'의 足 자를 쓴 것이며, 이는 그러한 덕이 내면에 갖춰져 있음을 말한다. 첫 단락에서는 나면서 아는[生知] 성인의 바탕을 포괄하여 말한 것이며, 아래의 네 단락은 모두 천하의 군왕으로서 군림한다는 有臨 구절에 해당되는 일들이다. 귀 밝음이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참답게 들음이며, 눈 밝음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참답게 봄이며, 슬기로움이란 생각[思考]에 속하니 은미한 부분의 뜻까지 통달함이며, 이에 쓰인 知 자는 禮智의 智 자에
119) 위와 같음.
비해서 더욱 민첩하고 자상한 것이다. 禮智의 智는 성인과 뭇사람이 모두 함께 갖추고 있는 본성이지만, 睿智의 智는 生而知之의 성인만이 알 수 있다. 臨, 容, 執, 敬, 別은 모두 外在的이며, 다섯 곳의 足 자는 내면의 잠재성으로 말한다.
唯天下之至聖이야 爲能聰明睿知 足以有臨也니 寬裕溫柔 足以有容也며 發强剛毅 足以有執也며 齊莊中正이 足以有敬也며 文理密察이 足以有別也니라
오직 천하의 지극한 성인이어야 귀 밝고 눈 밝고 슬기롭고 지혜로움으로 천하에 군림할 수 있다. 너그럽고 여유 있고 온화하고 부드러움은 모든 것을 포용하기에 넉넉하며, 분발하고 힘차고 굳세고 꿋꿋함은 집행하기에 넉넉하며, 가지런하고 씩씩하고 중도로 하고 바름은 백성에게 임하여 공경하기에 넉넉하며, 문장과 조리와 자세함과 살핌은 사물을 논변하여 분별하기에 넉넉하다.
자사는 小德川流 구절을 이어 말하였다. 덕이 갖춰지지 못한 자는 모두 슬기로움[聖]이 지극하지 못한 때문이다. 오로지 천하에 지극한 성인만이 生而知之의 바탕을 하늘에서 내려주어 귀 밝음은 듣지 못한 바 없으며, 눈 밝음은 보지 못한 바 없으며, 슬기로움은 통달하지 못한 바 없으며, 지혜로움은 알지 못한 바 없으므로 천하의 군왕으로서 뭇 백성에게 군림할 수 있다. 그러나 천하 백성에게 임하는 데에는 널리 포용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나면서 아는 성인의 바탕이 있으면 마음이 좁지 않고 너그러우며 절박하지 않고 여유가 있으며 온화하면서도 후하며 유순하여 순종하니 이는 仁의 덕이다. 仁으로 하면 도량이 넓어서 만물을 양육하고 용납하기에 넉넉하다. 천하 백성에게 임하는 데에는 굳은 의지를 요한다. 生而知之성인의 바탕이 있으면 분발하여 일어서고 용맹스러운 힘이 있으며, 굽히지 않는 굳셈이 있으며 꿋꿋하게 지킴이 있으니, 이는 義의 덕이다. 義로 하면 지조가 견고하여 일을 하는 데 고집이 있게 된다. 천하 백성에게 임하는 데에는 공경을 숭상한다. 生而知之 성인의 바탕이 있으면 가지런하며, 순수 전일하며, 씩씩하고 단정 엄숙하며, 중도로서 치우친 바 없으며, 정도로서 왜곡됨이 없으니, 이는 禮의 덕이다. 禮로 하면 공경하고 공순하고 조심하고 두터운 마음으로 백성에게 임하여 질서가 정연하게 된다. 천하 백성에게 임하는 데에는 분별력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生而知之성인의 바탕이 있으면 문장이 빛나며, 조리가 정연하며, 촘촘하여 엉성함이 없으며, 잘 살펴 현혹됨 없으니, 이는 知의 덕이다. 知로 하면 식견이 정밀하고 밝아서 사물의 유에 따라 분별할 수 있다. 이미 聰明睿知의 바탕을 받고, 또다시 인의예지의 덕을 겸한 그것이 참으로 천하에 지극한 성인이 될 수 있는 원리이다.
聰明睿知는 生知之質이며 臨은 謂居上而臨下也며 其下四者는 乃仁義禮智之德이라 文은 文章也오 理는 條理也오 密은 詳細也오 察은 明辨也라
聰明睿知는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의 바탕이며, 臨은 윗자리에 있으면서 아래에 군림함이며, 그 아래의 네 가지는 인·의·예·지의 덕이다. 文은 문장이요, 理는 조리요, 密은 자세함이요, 察은 밝게 분별함이다.
溥博淵泉 네 글자는 大德의 뜻을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위 글에서 말하는 다섯 곳의 足以에서 또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간 것이 아니다. 溥는 두루함[周徧]이니, 이는 이면의 상세한 부분으로 말함이며, 博은 드넓음 [廣闊]이니, 이는 전체적인 면으로 말하며, 淵은 고요하고 깊음이니, 모든 감각[萬感]이 고요하여 조짐을 헤아려 볼 수 없음을 말하며, 泉은 근본이 있음이니, 하나의 근원이 활기차게 끝없이 솟아오름을 말한다. 時出은 지난날 저변에 쌓아놓은 내면의 것이 오늘날 모든 일에 나타남을 말한다. 태어나면서 아는 성인의 바탕과 인의예지를 합하여 말하였기에 여기에서는 德이라는 말로써 이를 종합한 것이다. 이 때문에 『장구』에서 '五者之德' 이라 말하였다.
溥(보)博淵泉하야 而時出之니라
두루 넓고, 깊은 근원이 있어 무시로 나오는 것이다.
지극한 성인은 다섯 가지의 덕이 두루 넉넉하게 갖추어져 있지만 마음 속에 쌓여 있는 바 두루 넓어 만물의 이치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 어느 것이 그처럼 두루 넓을 수 있을까? 고요히 깊이 간직하여 모든 조화의 근원이 모두 넉넉하니, 그 아는 것이 그처럼 깊은 연원이 있을 수 있을까? 이로 말미암아 무시로 아래에 임하면 총명예지의 덕이 나오며, 무시로 포용하고 고집하고 공경하고 분별함에 이르면 인의예지의 덕이 유출되어 나오니, 이는 본체와 작용이 한 근원[體用一原]이며, 現象과 眞空이 사이가 없는[顯微無間] 오묘한 도이다.
溥博은 周徧而廣闊也며 淵泉은 靜深而有本也라 出은 發見(현)也라 言五者之德이 充積於中而以時發見於外也라
溥博은 두루 넓음이며, 淵泉은 고요하고 깊어 근본이 있는 것이다. 出이란 밖으로 나타남이다. 이 다섯 가지 덕이 중심에 가득히 쌓여 수시로 바깥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이는 다만 제2 溥博節을 거듭 설명한 것이다. 如天如淵은 지극한 성인의 마음의 본체 위에 나타난 백성의 공경, 믿음, 기쁨[敬, 信, 說]을 쓴 것이지 백성에게 중점을 둔 것은 아니다. 이는 바깥으로 말과 행실이 수시로 발산해 나오는[言行時出] 오묘한 점을 형용한 말이다. 세 곳의 而(見而……, 言而……, 行而……) 자는 문장의 뜻을 축약하여 강조하는 의미로 쓴 助辭이다.
溥博은 如天하고 淵泉은 如淵이라 見(現)而民莫不敬하며 言而民莫不信하며 行而民莫不說(열)이니라
두루 넓음은 하늘과 같고 깊은 근원은 연못과 같다. 나타나면 백성들이 공경하지 않음이 없으며, 말하면 백성들이 믿지 않음이 없으며, 행하면 백성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없다.
두루 넓고 깊은 근원이 있어 수시로 나오는 것은 평범한 것으로 비유할 순 없다. 두루 넓음은 하늘과 같다. 하늘은 밖이 없는데, 두루 넓음 또한 그와 같이 밖이 없다. 깊은 근원은 연못과 같다. 연못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는데, 깊은 근원 또한 그처럼 헤아릴 수 없다. 이는 지극히 성대하게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덕스러운 거동으로 나타나면 엄숙하여 공경하지 않은 백성이 없으며, 덕스러운 말을 하면 이 말을 듣고 따르고 신임하지 않은 백성이 없으며, 덕스러운 행실로 발산되면 이에 고무되어 기뻐하지 않는 백성이 없다. 바깥으로 발산되어 나타남이 또한 이와 같다.
言其充積이 極其盛而發見이 當其可也라
이는 내면에 쌓인 바 지극히 성대하여 바깥으로 나타나는 바 적절함을 말한다.
이 또한 위의 백성의 공경, 믿음, 기쁨을 이어서 지극히 형용한 말이지만 중점은 配天에 귀결되고 있다. 聲名은 본장 제1 至聖節의 五德에 의해 얻어진 명성을 말하였는데, 본 주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논술하고 있다. 그것은 천하의 끝까지를 지극히 말한 것인데, 아래의 여섯 곳의 所(……所至, ……所通, ……所覆, ……所載, ……所照, ……所隊) 자를 거듭하여 보아야할 것이며, 여기에는 인류가 포함되어 있다. 이 문장상의 句法은 차례로 연결되어 있다. 그를 높이고 친히 함[尊親]이란 바로 위의 공경, 믿음, 기쁨[敬, 信, 說]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莫不尊親의 莫不은 위의 莫不(莫不敬, 莫不信, 莫不說) 자와 상응하고 있다. 如天은 본체[體]로, 配天은 작용 [用]으로 말하며, 故曰 두 자는 제26 無息章의 高明配天에서 유래한 것인데 본 장에서는 찬사로 끝을 맺고 있다.
是以로 聲名이 洋溢乎中國하야 施及蠻貊하야 舟車所至와 人力所通과 天之所覆와 地之所載와 日月所照와 霜露所隊(추)에 凡有血氣者 莫不尊親하니
故로 曰配天이니라 이 때문에 명성이 중국에 넘쳐 오랑캐의 나라에까지 미쳐 배와 수레가 갈 수 있는 곳, 사람의 힘이 통하는 곳, 하늘이 덮어주는 곳, 땅이 실어주는 곳, 해와 달이 비춰주는 곳, 서리와 이슬이 내리는 곳에 무릇 혈기를 지닌 것이라면 모두가 그를 높이고 친히 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하늘에 짝하였다고 말한다.
나는 그들이 공경하고 믿고 기뻐하는 곳에 곧 명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성인의 덕과 명성은 안으로는 중국에 넘치고 멀리는 오랑캐의 나라에까지 뻗어나가, 배와 수레가 갈 수 있는 곳, 사람의 힘으로 통행할 수 있는 곳, 위로는 하늘이 덮어주는 곳, 아래로는 땅이 실어주는 곳, 태양과 달이 비춰주는 곳, 서리와 이슬이 떨어지는 곳에 혈기가 통하는 인류가 사는 모든 곳에서 그를 임금으로 높이고 부모와 같이 사랑하여 그를 공경하고 친근히 하여 천하 사람이 모두 그러하니, 이 어찌 하늘처럼 드넓은 덕이 미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그를 하늘에 짝한다고 말한다. 지극한 성인의 덕이 몸에 갖추어져 그 공효와 작용이 하늘에 짝하니, 이것이 바로 천도이며, 이로써 小德川流의 의의를 알 수 있다.
舟車所至以下는 蓋極言之라 配天은 言其德之所及이 廣大如天也라
"배와 수레가 갈 수 있는 곳" 이하의 문장은 지극히 미루어 말한 것이다. 하늘에 짝한다는 것은 그의 덕이 미친 바 하늘처럼 넓고 큼을 말한다.
右는 第三十一章이라 承上章而言小德之川流니 亦天道也라
위는 제31장이다. 위 장(제30장)을 이어서 "작은 덕은 냇물같이 흐름"을 말함이니, 이 또한 천도이다.
이 장은 덕의 전체적인 면을 말한 것이며, 지극히 진실한[至誠] 사람이란 또한 공자를 가리킨다. 첫 절에서 그 功用이 자연에서 나왔음을 밝힌 것은 큰 덕의 敦化處를 설명함이며, 그 다음 절에서는 그 성대한 덕을 나타내어 큰 덕의 근원을 추구함이며, 끝 절에서는 지극한 성인[至聖]이 아니고서는 능히 그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여, 오묘함에 대한 깊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이는 至誠 두 글자로 主腦를 삼고 있다. 이 때문에 『장구』에서는 단락마다 각각 그에 대한 설명을 제기하고 있다. 經綸은 성인의 일신으로 말하니, 이른바 인륜을 지극히 함이다. 예컨대 임금이 되어서는 어짊에,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에 그치는 것이 바로 經이며, 임금은 그 신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스리고 백성은 그 임금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곧 綸이다. 立은 본성의 전체에 터럭 끝만큼이라도 이지러지거나 부족됨이 없는 곳이다. 따라서 바로 그 곳이 설 땅[立處]이다. 天地化育은 단지 하나의 진실[一誠]이며, 성인이 움직이는 곳은 화육의 陽이니, 이 또한 진실이 있어야 이를 알 수 있다. 贊化育은 행사면의 일로써 말함이니 천지의 化育을 돕는 것이며, 知化育은 내재된 마음으로 말함이니 천지의 이치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의지함이 없다[無倚]는 것은 바로 자신이 모두 진실한 이치이기에 조금이라도 이지러진다거나 부족함이 없기에 굳이 다른 것에 의지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唯天下至誠이야 爲能經綸天下之大經하며 立天下之大本하며 知天地之化育이니 夫焉有所倚리오
오직 천하에 지극히 진실한 사람이어야 능히 천하의 큰 법을 다스리며, 천하의 큰 근본을 세우며, 천지의 화육을 알 수 있다. 이 어찌 의지하는 바 있겠는가!
자사는 이어서 大德敦化를 말하였다. 도란 인륜상에 널리 흩어져 있지만, 性命에 근원하고 있다. 때문에 진실이 지극하지 못한 사람은 인륜과 본성과 天命을 지극히 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로지 천하에 지극한 진실한 사람만이 지극히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어서 천하의 큰 법이 되는 五品, 인륜의 실마리를 다스려 그 구분을 분별하기도 하고 그 유를 규합할 수 있으며, 이에 천하의 큰 근본이 되는 본성의 전체를 세워 하나의 사사로움도 섞이지 않고 모든 이치가 모두 갖추어지며, 천지의 변화와 생육이 되는 1元 12會의 운행을 알게 되어 도와 契合됨으로써 天人合一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大德敦化는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이 모두가 생각지 않아도 얻고 힘쓰지 않아도 중도에 맞는 자연스러운 일인데, 어찌 바깥 사물에 의지한 후에 능히 할 수 있겠는가.
經綸은 皆治絲之事니 經者는 理其緖而分之이며 綸者는 比其類而合之也라 經은 常也니 大經者는 五品之人倫이오 大本者는 所性之全體也라 惟聖人之德이 極誠無妄이라 故於人倫에 各盡其當然之實하야 而皆可以爲天下後世法이니 所謂經綸之也라 其於所性之全體에 無一毫人欲之僞以雜之하야 而天下之道 千變萬化 皆由此出이니 所謂立之也라 其於天地之化育에 則亦其極誠無妄者 有默契焉이니 非但聞見之知而已라 此皆至誠無妄自然之功用이니 夫豈有所倚著於物而後能哉리오
經綸은 모두 실마리를 다스리는 일인데, 經이란 그 실마리를 다스려 나누는 것이며, 綸이란 그 유를 나란히 합하는 것이다. 經은 떳떳함이니, 大經은 五品의 인륜이요, 大本은 본성의 전체를 말한다. 성인의 덕은 지극히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기에 인륜에 있어서 당연의 실상을 다하여 천하와 후세의 법이 되니, 이것이 이른바 경륜이다. 부여받은 본성의 전체에 한 털끝만큼이라도 거짓된 인욕이 뒤섞이지 않아야 천하의 온갖 변화의 도가 모두 이를 통하여 나오게 되니, 이것이 이른바 근본을 세움이다. 그 천지의 화육에 있어서도 지극히 진실하고 거짓이 없는 자가 말없이 그와 하나가 되니, 이는 감각으로 듣고 보고서 아는 얄팍한 지식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모두 지극한 진실하고 망령됨이 없는 데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功用이니 어찌 外物에 의지한 뒤에 능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經綸은 用, 立本은 體, 大本은 中, 大經은 庸이다. 큰 법을 경륜하고 큰 근본을 세우는 것은 중용의 도를 다하는 것이다."120) "제22장과 본 장에서 두 차례 '天下之至誠'을 말하였는데, 結語에 있어서 제22장에서는 '贊化育'이라 하였고, 본 장에서는 '知化育'이라 하니, '贊'과'知'는 어떤 구별이 있을까? 제22장에서 "그 性을 다한다"라는 것은 내면에서 외부로 말해 나가는 것이기에 자신의 性을 지극히 다하면 人·物의 性까지도 지극히 다하여 천지의 化育을 도울 수 있고, 본 장의 "큰 법을 경륜한다"라는 것은 아래에서 위로 말하여 올라가는 것이니 '修道之謂敎'의 유이다. 큰 근본을 세움이란 靜으로서 한 순간도 中이 아닌 것이 없으며, 천지의 화육을 알면 천리의 유행을 알게 된다."121)
120) 위와 같음. 121) 위와 같음.
이는 거듭 위 절을 논하여 성인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다. 경륜하는 곳이 곧 어짊[仁]이니, 肫肫은 간절하여 헛되거나 들뜨지 않고 渾厚하여 間斷이 없는 것이며, 근본을 세운 곳이 곧 연못[淵]이니, 淵淵은 고요하고 비어 있어[靜虛] 물욕이 뒤섞여 있지 않고, 깊고 원대하여 끝을 헤아릴 수 없으며, 화육을 아는 곳이 곧 하늘[天]이니, 浩浩는 진실한 이치의 본체를 모두 갖추어 진실한 이치를 사물에 두루 운용하는 바를 말한다.
肫(준)肫其仁이며 淵淵其淵이며 浩浩其天이니라
간절하고 지극한 그 어짊이며, 고요하고 깊은 그 연못이며, 넓고 큰 그 하늘이니라.
나는 至誠 敦化의 효능을 계기로 큰 덕을 가진 자의 마음의 본체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經綸에는 사람이 흠뻑 무젖어 있고 은혜가 두루 유행하여 매우 간절하고 지극하니 이로써 성인 마음의 어짊을 볼 수 있으며, 그가 근본을 세워 사욕이 들어올 틈이 없고 많은 이치가 갖추어져 있어 매우 고요하고 깊으니, 이로써 성인 마음의 깊음을 볼 수 있으며, 그가 조화를 알아 마음으로 통달하여 넓고도 크니, 이로써 성인 마음이 바로 하늘임을 볼 수 있다.
肫肫은 懇至貌이니 以經綸而言也며 淵淵은 靜深貌이니 以立本而言也며 浩浩는 廣大貌이니 以知化而言也라 其淵其天則非特如之而已라
肫肫은 간절하고 지극한 모양이니 경륜으로 말하며, 淵淵이란 고요하고 깊은 모양이니 근본을 세우는 것으로 말하며, 浩浩는 넓고 큰 모양이니 화육을 아는 것으로 말한다. '그 연못'이며 '그 하늘'이라는 것은 '연못과 같고' '하늘과 같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肫肫은 지극히 인자하고 순후한 인정을 말한다. 이 때문에 朱子는 "肫肫其仁이란 인륜에 있어서도 인자하고 순후한 인정이 없으면 부자 형제는 아무런 관계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위 절에서 성대한 덕을 표현한 바 미진한 감이 없지 않다. 때문에 이에서 그것을 알기 어렵다는 말을 뒤이어 쓰게 된 것이다. "苟不……德者"까지를 하나의 구두(句讀)로 보아야 하며, 固 자의 뜻은 아래의 문장까지 일관하고 있다. 그 때문에 聰明聖知達天德이란 반드시 이 모든 것을 실제로 소유해야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지극한 진실을 알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는 사람들이 아는 데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지극한 진실의 본체에 중점을 두고 있다. 때문에 지극한 진실이란 알기 어렵다는 말로써 찬탄한 것이다.
苟不固聰明聖知達天德者면 其孰能知之리오
만일 참으로 귀 밝고 눈 밝으며 슬기롭고 지혜로워 하늘의 덕을 통달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그를 알겠는가!
그러나 이 도는 참으로 지극한 진실을 지닌 자만이 이를 온전히 행할 수 있으며, 또한 지극한 성인만이 이를 알 수 있다. 귀 밝고 눈 밝으며 슬기롭고 지혜로운 덕을 지닌 자가 아니면 그의 마음은 지극히 진실한 마음이 아니며, 그의 밝음은 지극히 진실한 밝음이 아니다. 그가 어떻게 천지의 화육을 알고 큰 법을 경륜하고 큰 근본을 세움이 이처럼 성대한 줄을 알 수 있겠는가. 참으로 지극한 진실이란 쉽사리 알 수 없다. 여기에서 천도의 극치를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큰 덕은 敦化"라는 의의 또한 이로써 알 수 있다.
固는 猶實也라 鄭氏曰 唯聖人이라야 能知聖人也라
固는 實과 같다. 鄭氏가 말하였다. "오직 성인이어야 능히 성인을 알 수 있다."
右는 第三十二章이라 承上章而言大德之敦化이니 亦天道也라 前章은 言至聖之德이오 此章은 言至誠之道라 然至誠之道는 非至聖이면 不能知며 至聖之德은 非至誠이면 不能爲니 則亦非二物矣라 此篇은 言聖人天道之極致로 至此而無以加矣라
위는 제32장이다. 이는 윗글을 이어서 큰 덕의 敦化를 말함이니, 또한 천도이다. 앞 장에서는 至聖의 덕을 말하였고, 이 장에서는 至誠의 도를 말하였다. 그러나 지극한 진실의 도는 지극한 성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고, 지극한 성인의 덕은 지극한 진실이 아니고서는 능할 수 없으니, 이 또한 둘이 아니다. 이 책에서 성인과 천도의 극치를 말함이 여기에 이르러서 이에 더할 수 없다.
본 장에서는 덕으로 들어가는 데에서부터 덕을 이룩하는, 入德 成德의 과정을 논술하면서 하나의 德 자에 중점을 두고 있다. 첫 절에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것[爲己]을 주로 삼았고, 제2~3절에서는 謹獨 存養이 바로 爲己의 공부임을 말하였으며, 제4~5절의 民勸, 民威, 天下平은 爲己에 의한 효험이며, 끝 절은 不顯 두 글자에 대한 贊嘆이다. 덕이란 반드시 하늘과 같은 뒤에야 지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용』은 天자로 시작해서 天 자로 끝맺고 있다. 제1 天命章에서 말한 道 자는 凡稱으로서 사람과 만물을 모두 포괄하여 광활한 면으로 말한 것이지만, 이 장에서 말한 入德의 德 자는 우리 인간만을 가리켜 말해 주는 친절한 면이 있다. 이의 저자는 여덟 차례 『시경』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의사에 따라 시구를 해석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이 절에서는 爲己로써 마음가짐을 세워야 한다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 비롯되는 조짐을 아는[知幾] 것은 爲己 공부에 있어 가장 먼저 착수해야 할 부분이며, 그 문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다[惡其文之著] 는 것이 바로 시를 인용하여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 취지이다. 闇然은 내면으로 닦음이며, 的然은 밖으로 나타남이다. 여기에서 闇이라 하지 않고 闇然이라 한 것과 章이라 하지 않고 日章이라 말한 것은 본인이 아닌 객관자, 곧 旁人의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이는 상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모두가 중요한 부분이기에 이를 환기시키고자 而 자를 쓴 것이다. 淡而不厭 이하 세 구절은 闇然日章의 실상을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지만, 子思는 이 하나의 실상을 깊이 의미한 바 있어 두 번씩 자세히 말하니, 이 모두가 일용생활상의 언행과 사물의 응접으로써 말한 것이다. 知遠之近은 修身을, 知風之自는 正心을, 知微之顯은 誠意를 주로 하여 말한다. 위의 구절은 표면을 통해서 내면을 알 수 있고, 아래의 知微之顯구절은 내면을 통해서 외면으로 나타남을 말한다. 그리고 知遠, 知風, 知微세 개의 知 자는 『대학』 經1章 제3 物有節의 '知所先後'의 知 자와 같은 뜻이며, 入德 구절은 爲己와 知幾를 겸하여 보는 것이 옳다. 바꿔 말하면 知行을 겸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본 주에서 "삼갈 바를 안다[知所謹]"라는 것은 오히려 이를 아는 데 그쳤을 뿐, 삼가 이를 행하지 못한 것이다. 뒷글의 謹獨과 存養이란 가까이 나의 몸[近], 모든 것이 비롯하는 나의 마음[自], 보이지 않는 내면의 마음[微]에 나아가 삼가는 것이며, 不賞, 不怒, 天下平은 자신의 용모의 풍채[風], 멀리 있는 천하국가[遠], 뚜렷이 나타나는 외형[顯]에 이르는 것이다.
詩曰 衣錦尙絅이라 하니 惡其文之著也라 故로 君子之道는 闇然而日章하고 小人之道는 的然而日亡하나니 君子之道는 淡而不厭하며 簡而文하며 溫而理니 知遠之近하며 知風之自하며 知微之顯이면 可與入德矣리라
『시경』에 이르기를, "비단 옷을 입고 홑옷을 걸친다" 하니, 그것은 비단옷의 문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은은하나 날로 빛나며, 소인의 도는 뚜렷하다가 날로 사라진다. 군자의 도는 담박하면서도 싫지 않으며, 간결하면서도 문체가 나며, 온화하면서도 조리가 있다. 멀리 <천하와 국가의 治亂은> 가까운 <나의 몸으로부터> 비롯됨을 알며, <외모의> 풍채가 마음으로부터 비롯하였음을 알며, 은미한 마음이 몸으로 나타남을 알면, 그와 더불어 덕으로 들어갈 수 있다.
자사가 말한 至聖과 至誠의 덕은 지극히 성대하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는 자들이 고차원한 곳으로 치달아 下學의 공부를 잊을까 염려한 나머지, 이에 다시 지극히 가깝고 간절한 下學의 공부를 따라 나아가면서 점차 지극히 정밀하고 미묘한 上達의 경지에 이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덕으로 들어가고 덕을 이룩할 수 있는 차서를 서술하여 주었다. 학문을 닦는다는 것은 마음가짐을 세우는 것보다 더 앞서는 일이 없고 마음가짐을 세우는 일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시경』에 의하면, "비단 옷을 입고 홑옷을 걸친다" 하였다. 『시경』의 뜻은 비단옷의 현란한 광채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속으로 수렴하려는 것이다. 옛사람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으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군자의 마음을 미루어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는 참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자신에게서 얻고자할 뿐 남들이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바깥으로 헌사스럽게 빛나지 않고 은은하여 어둑한 듯하지만 마음속에 아름다움이 가득히 쌓여 있으므로 날로 끝없이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 소인의 도는 오로지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데 힘쓰는 까닭에 바깥으로는 뚜렷이 나타나지만 실상이 없으므로 날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른바 은은하나 날로 빛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군자의 도는 조촐하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으니, 참으로 그처럼 담박할 수밖에 없지만 그 속에는 충만하고 영원한 의지가 존재하여 자연히 싫증나지 않으며, 진실하고 꾸밈이 없으니 참으로 이처럼 간결해 보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빛나는 아름다움이 있어 문채가 있으며, 후하고 화기로우니 참으로 이처럼 온화해 보이나 그 가운데에는 질서가 있어 스스로 조리가 있다. 은은하나 날로 빛남이 바로 이와 같다. 이 모두가 비단옷을 입고서 홑옷을 걸쳐 입는 군자의 마음이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마음으로써 일의 조짐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멀리 나타나는 조짐은 가까운 데 있다. 그것은 천하 국가의 태평과 혼란은 내 자신의 잘잘못에서 유래됨을 알며, 외모의 풍채는 그 어디로부턴가 유래가 있다. 그것은 나의 몸의 잘잘못이란 내 마음의 사악함과 올바름에서 연유했음을 알며, 미세한 것이란 밖으로 나타나는 조짐이니, 그것은 내면의 사악하고 올바른 마음은 대단히 미세하지만 마음에서 몸으로 나타나는 선악은 매우 뚜렷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용모의 잘잘못이 나타나는 바와 몸 가까이에 있는 바와 미세한 마음을 삼가게 되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마음가짐이 충만하여 그와 함께 덕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어렵지 않게 성인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前章은 言聖人之德이 極其盛矣니 此는 復自下學立心之始로 言之며 而下文은 又推之하야 以至其極也라 詩는 國風에 衛碩人과 鄭之丰이니 皆作衣錦褧衣라 褧은 絅同이니 禪(단)衣也며 尙은 加也라 古之學者는 爲己라 故其立心이 如此니라 尙絅이라 故闇然이오 衣錦이라 故有日章之實이니라 淡簡溫은 絅之襲於外也며 不厭而文且理焉은 錦之美 在中也라 小人은 反是라 則暴於外而無實以繼之일새 是以로 的然而日亡也니라 遠之近은 見(現)於彼者 由於此也며 風之自는 著乎外者 本乎內也며 微之顯은 有諸內者 形諸外也라 有爲己之心이요 而又知此三者면 則知所謹而可入德矣리라 故下文引詩하야 言謹獨之事라
앞 장에서는, 성인의 덕이 그 성대함을 다하였다고 말하였기에, 여기에서는 다시 처음 배우는 자의 첫 마음가짐으로 말하고, 아래의 문장 또한 이를 미루어 가면서 그 지극함을 다하고 있다. 詩는 「國風」의 「衛風 碩人」과 「鄭風 丰」편이니, 모두 衣錦褧衣로 쓰여 있다. 褧은 絅 자와 같으니 홑옷이며, 尙은 위에 한 겹 더 걸쳐 입음이다. 옛 학자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위하므로 그 마음가짐이 이와 같다. 홑옷을 위에다 걸쳤기에 겉으로는 은은히 어둑한 듯하며, 비단옷을 안에 입었기에 날로 빛나는 실상이 있다. 담박하고 간결하고 온화함이란 홑옷을 겉으로 걸쳐 입었기 때문이며, 싫지 않고 문채와 또한 조리가 있는 것은 비단 옷의 아름다움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소인은 이와 반대이므로 바깥으로 드러나 보이지만 이를 이어 나갈 실상이 없는 까닭에 뚜렷한 듯하나 날로 사라지는 것이다. 遠之近은 저기에 나타난 것이 여기에서 말미암음이며, 風之自는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은 내심에 근본함이며, 微之顯은 내면에 있는 것이 바깥으로 나타남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려는 마음가짐이 있고, 이에 다시 이 세 가지를 알면 삼갈 바를 알고 덕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러므로 뒷글에서 『시경』을 인용하여, 나 홀로 아는 마음을 삼가는[愼獨] 일을 말하고 있다.
"먼 곳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함을 안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과 상대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들이 비방하는 소리는 나의 잘잘못에서 연유함을 아는 것이며, 용모의 풍채가 나오는 바를 앎이란 자신의 잘잘못은 그 마음의 邪正에서 말미암음을 앎이며, 미세한 것이 또렷이 나타남을 안다는 것은 또한 오로지 마음을 가리켜 말한다."122) 그리고 "멀리 있는 것이 가까운 곳에서 비롯되고 용모의 풍채가 나오는 바를 안다는 것은 바깥 것에 근거하여 裏面을 미루어 아는 것이며, 미세한 것이 또렷이 나타남을 안다는 것은 내면에서 바깥으로 이름을 말한다."123)
122) 위와 같음. 123) 위와 같음.
이는 愼獨의 일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 깊은 곳에서 몸이 밝게 드러난다는 것은 『시경』에서는 물고기를 가리켜 말한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이를 빌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란 매우 은미한 것이지만 이보다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고 이보다도 뚜렷한 것이 없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內省 두 자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그것은 한 생각이 처음 싹틀 때, 천리와 인욕을 살펴 存天理 遏人欲의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이러한 뜻은 처음 배운 자의 첫 마음가짐으로서 정립하여야 할 문제이다. 바로 마음의 잘못이 없었을 때 악한 일이 없게 된다. '無惡……'의 惡 자는 '惡其文之著'의 惡 자와 같은 뜻이며, 痛切한 의미를 갖추고 있다. 자아를 반성하여 잘못이 없어 양심에 부끄럼이 없는[不疚無惡] 그것이 곧 남들이 따를 수 없는 곳이며, 안으로 자아를 반성함[內省] 이라는 것은 곧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곳이다. 두 구절은 찬사로 쓰인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부분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경지의 관문을 지나가면 이는 곧 인간의 힘으로 다하기에는 어려운 경지이기에, 이 점을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그들을 격려한 말이다.
詩云 潛雖伏矣나 亦孔之昭라 하니 故로 君子는 內省不疚하야 無惡於志니 君子之所不可及者는 其惟人之所不見乎인저
『시경』에 이르기를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몸을 숨겨도 또한 아주 밝게 드러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內心을 반성하여 잘못이 없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으니,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이라면 오직 남들이 보지 못하는 바로 그것이다.
덕에 들어가는 일로 말하면, 『시경』에 이르기를 "보이지 않는 깊은 곳에 엎드려 몸을 숨겨도 아주 밝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라고 하였다. 이는 혼자만이 아는 마음이란 삼가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살펴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잘못됨이 없는 뒤에야 바야흐로 마음이 편안하여 악이 없을 것이다. 군자에게 미칠 수 없는 것은 오로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그 자신을 지극히 삼가는 점이다. 이는 자신을 살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것이다.
詩는 小雅正月之篇이라 承上文하야 言莫見乎隱莫顯乎微也라 疚는 病也오 無惡於志는 猶言無愧於心이라 此는 君子謹獨之事也라
시는 「小雅 正月」편이다. 위 글을 이어서 "은미한 마음보다도 더 잘 나타나는 것이 없고, 미세한 생각보다 더 뚜렷한 게 없음"(제1장 제3 莫見節)을 말한다. 疚는 병 됨이요, 無惡於志는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과 같다. 이는 군자가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는 일이다.
이는 바로 戒愼恐懼의 일을 말하고 있다. 위 節의 潛伏은 그 어떠한 물체가 보이지 않는 은미한 가운데 잠재되어 있다는 말과 같으며, 不愧屋漏는 안팎이 툭 틔어 있어 다시는 털끝만한 까끄라기와 찌꺼기마저 없음을 말한다.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공경과 믿음이 말과 행동하기 이전에 있었고 또한 말과 행동이 있는 이후에도 관철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공부를 더욱 정밀히 한 데에서 얻어진 것이다.
詩云 相在爾室한대 尙不愧于屋漏라 하니 故로 君子는 不動而敬하며 不言而信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그대가 방에 있을 때를 살펴보면 깊숙한 방 모퉁이에도 부끄러움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이지 않아도 공경하며,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 있다.
그러나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시경』에 의하면 "네가 너의 방에 있을 때를 살펴보니, 언제나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깊숙한 방 모퉁이, 屋漏의 신에게도 부끄러움이 없다" 한다. 이는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때에도 삼가지 않은 바 없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군자는 움직일 때도 참으로 조심해야 하지만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조심하며, 말이란 믿음이 있어야 하지만 말하지 않을 때에도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움직이지 않을 때에도……, 말하지 않을 때에도……라는 것은 곧 屋漏에 있을 때를 말하며, 조심하고 믿음이 있다는 것은 곧 부끄럽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存養의 공부이며 자신이 해야할 일을 위함이 더욱 정밀한 것이다.
詩는 大雅抑之篇이라 相은 視也라 屋漏는 室西北隅也오 承上文하야 又言君子之戒謹恐懼는 無時不然이라 不待言動而後에 敬信則其爲己之功은 益加密矣라 故下文引詩하야 幷言其效라
시는 「大雅 抑」편이다. 相은 본다는 뜻이다. 屋漏는 방의 서북 모퉁이이다. 위 글을 이어서, 또한 군자가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되 어느 때이든지 그처럼 하지 않은 때가 없어야 한다. 말하기에 앞서, 움직이기에 앞서 공경하고 믿음이 있으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공부가 더욱 정밀하게 된다는 점을 말하였다. 그러므로 뒷글에서 『시경』을 인용하여, 아울러 그 효험을 말한 것이다.
"옛 사람의 가옥구조는 동남쪽 모퉁이로 문을 열고 닫는데, 동남쪽 모퉁이를 突, 서북쪽 모퉁이를 屋漏, 서남쪽 모퉁이를 澳라" 한다. 사람이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맨 동남쪽 모서리를 보게 되며 그 다음에 서남쪽 모서리를 보게 되며, 그 후에 서북쪽 모퉁이를 볼 수 있으니, 이는 깊고 깊은 곳이다. 『禮記』의 「曾子問」편에서는 이를 '當室之白'이라 하였는데, 孫炎은 이에 대하여 "태양의 빛이 흘러드는 곳에 해당된다"라고 말하였다."124) 그러나 일설에는 屋漏는 방의 서북 모퉁이로 신위를 설치하는 곳이다. 그 위에 창문이 있는데, 신령이 그 곳으로 강림한다. 이는 사람이 없는 곳을 말한다고 한다.
이는 아래 제5 不顯절과 함께 공효를 말한 것이지만, 덕에 중점을 두고 있다. 본 주에서는 "진실과 공경[誠敬]을 지극히 한다"라는 말로써 無言의 뜻을 해석하였다. 그것은 말이 있으면 공경하는 마음이 통일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無言의 지극한 誠敬은 스스로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만을 가리킨다. 시의 본지는 제사를 지내는 데 대한 말이지만, 여기에 인용해 썼을 때에는 평소에 덕을 닦아 백성을 감화시켜야 한다는 점을 주로 하여 말하고 있다. 상벌이란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큰 법전이다. 상벌은 배제할 수 없지만 덕이 성대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감화되기에 굳이 상벌을 빌어 나라를 다스릴 필요가 없다.
124) 위와 같음.
詩曰 奏假(격)無言하야 時靡有爭이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不賞而民勸하며 不怒而民威於鈇鉞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신위의 앞에 나아가 신을 강림케 할 때 말이 없으나이에 다툼이 없다" 하였다. 그러므로 군자는 상을 내리지 않아도 백성들이 서로 권장하며, 성내지 않아도 백성들이 작두와 도끼보다도 두려워한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한 학문이 이뤄지면 그 공효가 어떻게 될까? 『시경』에 의하면 "제사를 주재하는 천자가 신명을 감동시켜 강림케 하되지극한 정성과 공경으로 하여 말이 없으나, 사당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감화되어 다투거나 예절을 잃는 자가 없다"라고 한다. 여기에서 그러한 덕이 있으면 그러한 감화가 있기 마련임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존양 성찰의 공부에 따라 成德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다. 비록 상을 내려 권유함을 보이지 않아도 그 덕을 입은 백성들은 자연히 그를 우러러서 서로가 선을 권장하게 되고, 비록 성내며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덕을 입은 백성들은 작두와 도끼보다도 그를 더 두려워하여 감히 악을 하지 않는다. 상을 내리거나 성을 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말이 없음[無言]을 말하며, 백성이 서로 권장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곧 다툼이 없는 것[無爭]이다. 덕이 성대하면 백성은 이처럼 스스로 감화되는 것이다.
詩는 商頌烈祖之篇이라 奏는 進也라 承上章而遂及其效라 言進而感格於神明之際에 極其誠敬하야 無有言說而人自化之也라 威는 畏也오 鈇는 莝斫刀也라 鉞은 斧也라
시는 「商頌 烈祖」편이다. 奏는 나아감이다. 이는 위 글을 이어서 마침내 그 공효에까지 언급하고 있다. 이는 나아가 신명을 감동시키는 즈음에 그 정성과 공경의 마음을 극진히 하여 말하지 않아도 사람 스스로가 감화되는 것을 말한다. 威는 두려움이며, 鈇는 작두이며, 鉞은 도끼이다.
『시경』의 '나타나지 않음[不顯]'의 의의를 인용하여 앞의 존양 성찰의 지극히 성대함을 표현한 것이며, 이는 또한 첫 절의 闇然과 상응한다. 이로 보면 많은 제후가 본받는다는 것 또한 차츰차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篤恭은 공경을 후히 함을 말한다. 이는 지극한 노력으로 그치지 않은 자에게는 스스로 그윽하고 심오하며 현묘하고 원대하여 나타나지 않은 덕이 있다는 것이지, 篤恭이 곧 不顯이라는 주석을 붙일 수 없다. 天下平 또한 전혀 정치와 교육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關雎」와 「麟趾」의 精粹한 덕을 가지고 있으면 스스로 「周官」의 법도가 담겨 있기에, 다만 强作하는 일로 행하는 바 없다는 것이다. 위 절은 '動則變'(제23장 제1절)의 뜻이며, 이는 '變則化'(上同)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말한다.
詩曰 不顯惟德을 百辟(벽)其刑之라 하니 是故로 君子는 篤恭而天下平이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나타나지 않은 덕을 많은 제후가 본받는다" 하니, 이 때문에 군자는 공경을 돈독히 하면 천하가 평정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시경』에 의하면, "천자에게 그윽하고 깊으며 현묘하고 원대한 덕이 있으면 제후들은 모두가 이를 본받는다" 한다. 이에 덕이 성대할수록 감화가 더욱 드넓다는 점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군자가 존양 성찰을 따라 그 극치의 경지에 이르면, 마음은 모두 渾然한 천리로서 모든 생각에 공순하고 어느 때이든 공순하여 돈독하고 심오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천하 사람이 스스로 그 법을 따르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되어 천하가 모두 다스려질 것이다. 이 또한 서로 권장하거나 두려워하는 자취마저도 찾아볼 수 없다. 공순을 돈독히 함[篤恭]은 나타나지 않는 덕이며, 천하가 평정됨은 많은 제후가 본받음을 말한다. 이는 中和를 극진히 다하여 천지가 제자리를 얻고 만물이 양육되는 位育 경지에서 가능한 일[能事] 이며, 성인과 神人만이 가능한 최고의 극치이다.
詩는 周頌烈文之篇이라 不顯은 說見二十六章이라 此는 借引以爲幽深玄遠之意라 承上文하야 言天子有不顯之德而諸侯法之니 則其德愈深而效愈遠矣라 篤은 厚也니 篤恭은 言不顯其敬也라 篤恭而天下平은 乃聖人至德이 淵微하야 自然之應이니 中庸之極功也니라
시는 「周頌 烈文」편이다. 不顯에 대한 설명은 제26장(제10절)에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는 시를 인용하여 그윽하고 깊으며 현묘하고 원대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위 글을 이어서, 천자에게 나타나지 않는 덕이 있으면 제후가 이를 본받으니, 그 덕이 깊으면 깊을수록 공효가 더욱 원대함을 말한다. 篤은 두터움이니, 篤恭은 나타나지 않는 그 공경을 말한다. 공손함을 돈독하게 하면 천하가 태평하다는 것은 성인의 지극한 덕이 깊고 은미 하여 자연스러운 감응이 있음이니 중용의 지극한 공이다.
위 篤恭而天下平 구절만으로도 이미 지극하여 끝을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자사는 나타나지 않은 덕에 깊은 뜻을 두고서 여러 차례 『시경』을 인용, 이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세 차례 『시경』을 인용한 가운데 "하늘의 이치 [天載]"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앞서 "큰 소리와 얼굴을 붉히지 말라는 것과 덕의 가벼움이 터럭과 같다"라는 두 구절의 시를 인용한 것은 不顯 篤恭의 덕이란 형용키 어렵다는 점을 나타낸 것이다. 王者 또한 큰 소리를 필요로 하고 노기 띤 얼굴도 필요하다. 하지만 덕을 주로 삼아야한다. 이는 평상시 공자가 정치의 도에 관해 논한 말이지, 이 시에 대한 특정적인 해설은 아니다. 輶 자는 『시경』에서는 본디 가벼워서 누구나 쉽게 들 수 있다는 뜻으로 쓰였으나, 여기에서는 가볍다는 뜻을 微細하다는 뜻으로 바꿔본 것이며, 毛猶有倫의 毛 역시 덕에 비유하여 말하였다. 그 덕은 오히려 어떤 물건과 비교하여 헤아려볼 수 있다는 것이지, 한낱 터럭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큰 소리와 얼굴 붉히지 않는다 함은 形象의 停滯됨이며, 덕의 가벼움이 터럭과 같다 함은 오히려 有形의 자취에 관계된다. 이 모두가 나타나지 않은 덕을 표현하려는 것이나, 이에 미진한 바 있기에 곧 이어서 "소리도 들을 수 없고 냄새마저 맡을 수 없다"라는 구절로 다잡아 쓴 것이다. 載는 만물을 발생, 양육하는 하늘의 일을 말한다. 이는 物이 있으면 법이 있다는 것으로 말하였지만, 이는 눈으로 볼 수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다. "……至矣" 구절은 나타나지 않은 덕이 지극한 데 대한 찬사이다. 이는 하늘이 이 같은 덕을 사람에게 명하여 준 것으로서 본디 소리와 냄새로써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이 이 같은 덕을 갖추어 하늘과 하나가 되면 또한 소리와 냄새로서도 가리킬 수조차 없다. 이것이 지극한 덕이다. 本註의 "오직 이것만이 ……을 형용할 수 있다[惟此可以形容……]" 구절은, 위의 "그것으로는 ……을 형용하기에는 부족하다[未足形容……]" 또는 "그 오묘함을 형용하기에는 미진한 바 있다[未盡其妙]"라는 구절과 함께 보아야 본문 밖의 뜻을 보완하여 볼 수 있다.
詩云 予懷明德의 不大聲以色이라 하야늘 子曰 聲色之於以化民에 末也라 하시니라 詩云 德輶如毛라 하니 毛猶有倫이어니와 上天之載 無聲無臭아 至矣니라
『시경』에 이르기를, "나[上帝]는, 문왕이 밝은 덕으로 큰 소리와 얼굴을 붉히지 않기를 생각한다" 하였는데, 공자는 이에 대해서 말하기를 "큰 소리와 얼굴을 붉히는 것은 백성을 감화시키는 데 있어 지엽적인 일이다" 라고 하였다. 또 『시경』에 이르기를 "덕의 가벼움이 터럭과 같다" 하니, 터럭은 오히려 비유할 것이 있거니와 하늘의 일(이치)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이 지극하다.
나타나지 않은 덕과 공경을 돈독히 함은 심오한 덕인데, 어떻게 쉽사리 표현할 수 있겠는가. 『시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제가 스스로 문왕이 밝은 덕으로, 성내어 큰 소리나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어줬으면하는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나타나지 않는 덕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공자는 그 시에 대해 일찍이 말한 바 있다. "정사를 하는 데에는 덕으로 다스림이 근본이다. 만일 큰 소리나 얼굴을 붉히며 백성을 다스린다면 이는 政令과 刑罰에 의한 것으로 정사를 하는 데 지엽적인 일이다" 하였다. 이에 『시경』의 "……을 크게 하지 않는다[不大]"라는 말을 살펴보면 이는 작게나마 큰소리와 노기 띤 얼굴빛이 있음을 말한다. 「烝民」 시에 의하면 "덕의 가벼움이 터럭과 같다"라고 한다. 이는 나타나지 않는 덕을 어지간히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터럭이란 미세한 물체이긴 하지만 그것도 그 무엇과는 비교할 수 있다. 덕이 어찌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文王」 시에서는 "하늘의 일이란 소리 들을 수 없고, 냄새 맡을 수조차 없다"라고 한다. 이는 참으로 나타나지 않는 지극한 덕이다. 그러므로 이 말만이 나타나지 않는 덕의 오묘함을 표현해 주고 있다. 이 때문에 군자의 학문은 반드시 이러한 경지에 다다른 뒤에 최상의 극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가짐을 세움과 자신이 해야 할을 위하는 공부로부터 나아가는 그 공부가 아니면 이 또한 어떻게 그 같은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겠는가.
詩는 大雅皇矣之篇이라 引之하야 以明上文所謂不顯之德者는 正以其不大聲與色也라 又引孔子之言하야 以爲聲色은 乃化民之末務어늘 今但言不大之而已니 則猶有聲色者 存이라 是未足以形容不顯之妙니 不若烝民之詩所言德輶如毛則庶乎可以形容矣로되 而又自以爲謂之毛則猶有可比者니 是亦未盡其妙라 不若文王之詩에 所言上天之事는 無聲無臭라 然後에 乃爲不顯之至耳니라 蓋聲臭는 有氣無形으로 在物에 最爲微妙이어늘 而猶曰無之라 故惟此可以形容不顯篤恭之妙요 非此德之外에 又別有是三等然後爲至也니라
시는 「大雅 皇矣」편이다. 이 시를 인용하여 윗글에서 말한 나타나지 않은[不顯] 덕이란, 바로 큰소리나 얼굴 붉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또다시 공자의 말을 인용하여, "큰소리나 얼굴을 붉히는 것은 백성을 감화시키는 데 있어서 지엽적인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단지 "크게 하지 않는다[不大]"라고 말했을 뿐이기에, <큰 소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고 얼굴을 붉히지 않는다 할지라도> 오히려 소리와 얼굴빛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는 나타나지 않은 오묘한 덕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烝民」 시에서 말한 "덕의 가벼움이 터럭과 같다"라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는 곧 그럴싸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또한 스스로 '터럭'이라고 말했다. 이는 오히려 그 무엇과 비유할 수 있다. 이 또한 그 <보이지 않은 덕의> 오묘함을 형용하기에는 미진하다. 「文王」 시에서 말한 "하늘의 일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라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말해야 바로 나타나지 않은 덕의 지극함이다. 소리와 냄새란 氣體는 있으나 형체가 없으므로 만물에 있어서 가장 미묘한 것임에도 오히려 그것마저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오직 이것만이 不顯 篤恭의 오묘함을 형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 이 덕의 밖에 또 다른 별개의 세 등급이 있는 후에야 지극하다는 것은 아니다.
"소리와 냄새조차 없다는 것은 본디 천도를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인용 시의 본뜻은 '문왕을 본받은 후에야 많은 제후가 믿게 된다'라는 점을 말한 것으로, 시인의 의도는 애당초 '無聲無臭' 구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중용』에서는 이를 인용하여 중용의 뜻을 끝맺고 있다. 이를 자세히 미루어보면, 그 의도는 혼자 있을 때를 삼가 덕을 닦는 데부터 비롯하여 『시경』의 "不顯維德, 百辟其刑之", "乃篤恭而天下平"에 이르고, 그 뒤에는 구절구절마다 不顯之德을 찬미하였기 때문에 "予懷明德, ……無聲無臭 至矣" 구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는 지극한 덕으로 미묘의 극치이기에 이처럼 형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처음 학문할 적에 어떻게 할 줄을 알지 못하면서 단 한 번의 발돋움으로 그 경지에 이르려고 한다면 그들은 이 같은 경지에 오르기는커녕 도리어 전도되어 일평생 혼미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125) 다시 말하면 학자는 항상 內省을 통해서 자신의 誠을 자각하여 원초의 지극한 誠에 이르러 천도와 일치가 되는 것이다.
125) 위와 같음.
右는 第三十三章이라 子思는 因前章極致之言하야 反求其本하고 復自下學爲己謹獨之事로 推而言之하야 以馴致乎篤恭而天下平之盛하고 又贊其妙하야 至於無聲無臭而後에 已焉이라 蓋擧一篇之要而約言之하니 其反復丁寧하야 示人之意至深切矣라 學者는 其可不盡心乎아
위는 제33장이다. 자사는 앞 장(제32장)에서 말한 極致로 인하여 그 근본을 돌이켜 추구하고, 또다시 처음 배우는 자들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위하는 마음가짐과 혼자만이 아는 마음을 삼가는 일로부터 비롯하여, 이를 미루어 나아가면서 차례차례로 공경을 돈독히 하여 천하가 평정되는 성대한 덕을 말한 데 이르렀고, 또다시 그 오묘함을 贊嘆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마저도 없다는 데까지 이른 후에야 그친 것이다. 『중용』 1편의 要諦를 빠뜨림 없이 열거하면서도 이와 같이 집약하여 말하니, 그 반복해서 간절하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뜻이 지극히 깊고 간절하다. 배우는 자들은 이에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